흰 도시 이야기
최정화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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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질병, 전염병은 인간 관계의 역학마저 변질시킨다. 사소한 접촉, 마스크의 착용 여부, 모임의 취소, 강행을 둘러싸고 코로나는 사람 간의 교류의 성격까지 변화시키기고 있다. 지인들을 만나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는 풍경이 이제는 민폐이자 나라의 방역에 협조하지 않는 풍경으로 비친다. 몇 개월 안이면 바이러스가 사라지거나 적어도 치료약이나 백신의 개발로 관리가 가능한 수준이 될 거라 여겼던 기대들은 이제 벌써 육개월이 훌쩍 넘어가 학습된 무기력으로 치닫고 있다. 사람을 믿고 사람과 접촉하고 맛있는 것들을 나누던 시간들이 점점 낯설게 멀게 느껴진다. 


최정화의 <흰 도시 이야기>는 코로나 이전에 나온 이야기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를 마치 예고하는 것 같은 소설이다. 피부가 하얗게 말라붙는 '다기조'라는 전염병에 점령된 L시의 공무원 이동휘의 이야기는 이 전염병이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유린하는지에 대한 탐사다. 아이를 잃고 세상에 대한 감각을 잃고 사람 간의 접촉과 애정을 잃어버린다. 


"새로운 병이 나타났다는 것은 새 시대가 출현했다는 것과 한 뜻이요."

-p.36


카뮈의 <페스트>에서 봉쇄되었던 도시 오랑의 시민들이 느꼈던 절망은 L시의 그것과도 닮았다. 사람들은 점차 희망이나 기대를 잃어버리고 전염병으로 무너지는 삶에 적응하게 된다. 무감각해지고 무심해진다. 그 병에 싸워 이겨보려는 의지조차 없다. 그런 의지는 반역적이고 반동으로 치부되어 모래마을이라는 대치되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동휘는 그 두 공간의 경계에 서 있다. 


그러니까 나는 이 도시의 운명과는 별개의 고유한 개인이 존재한다-바로 나 이동휘 말이다!-는 허황된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L시야 어떻게 되든 내가 지킬 수 있는 고유의 부분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p.112


<흰 도시 이야기>는 이동휘가 이러한 개인의 고유성을 도시의 운명에 맞서 과연 지켜낼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질문이다. 그는 L시에서 나와 모래마을로 가고 모래마을에서는 또  L시를 그리워하는 그 복잡한 모순 안에서 방황하지만 끝내 패배하지는 않는다. 잃어버린 아이와 잃어버린 기억들을 들쑤시는 그 고통과 연약함을 회복하려 애쓴다. 고통스러운 진실보다는 편안한 거짓과 허구를 택하는 다수 가운데에서 이탈한다는 것은 보통의 용기로 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 동인을 아이로 잡고 있지만 과연 이동휘라는 인물의 성향과 일관성이 있는지가 좀 모호하다. 


왜 어떤 사람들은 싸우고 어떤 사람들은 굴복하고 어떤 사람들은 견디는가. 또 어떤 사람들은 왜, 이 삶을 견디지 못하는가. -p.245


우리가 잘 견뎌내고 다시 예전의 그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 책에도 그러한 결말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고 희망할 수 없는 나날들을 일상으로 꾸역꾸역 이어나가는야  하는 것이 모두에게 힘겹다. 우리는 견뎌야 할 도리밖에 없는 것 같다. KF94를 끼고 언덕을 오르듯이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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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8-29 15: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로나는 우리 모두 처음 겪는 일이라는 것.
말하자면 우린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거지요.
다시는 마스크를 벗지 못하고 살까 봐 진지하게 생각하면 심각해져요.
모든 걸 잊는 잠 자는 밤이 요즘은 좋으네요. ^^

blanca 2020-08-30 09:00   좋아요 1 | URL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끝도 없는 것 같아요. 결국 마스크를 벗는 날이 올 거라는 걸 믿고 어려운 시간들을 잘 통과해나가야겠습니다.
 

무엇보다 카야의 죽음의 장면이 부러웠다. 약간 아쉬운 듯, 그러나 병마에 시달리지 않고 그녀가 사람들보다 더 일체감을 느꼈던 가장 사랑하는 야생의 공간에서 사랑하는 반려자가 마지막을 수습할 수 있게 그렇게 가는 대목. 눈물 나는 대목이 많았지만 이 대목은 더 나에게 얘기하는 바가 많다. 


















칠십이 넘은 생태학자가 처음으로 쓴 소설이라니 경이롭다. 야생의 습지, 그 습지에 사는 식물, 곤충, 동물에 대한 깊이 있는 식견이 군데군데 투영되어 있다. 마음으로 자연과 교감하지 않고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얘기다. 그 습지에서 홀로 생존해 나가며 사랑에 빠지는 사춘기 소녀의 마음의 결의 묘사력도 놀랍다. 같은 십대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떠올리 수 없는 그 날카로운 떨리는 욕망과 열정들이 생생하다. 사랑에 빠지고 배신 당하고 그럼에도 다시 자생력을 잃지 않는 그 생의 근원적 에너지는 대자연과의 공명과도 통할 것이다. 늪지의 소녀 카야의 바다, 새, 식물들과의 대화가 뭉클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일상을 꾸려 나가며 저도 모르게 환경에 가하는 수많은 해악들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우리를 낳고 우리를 살게 하고 결국 우리가 돌아가야 할 그곳에 정작 제대로 된 관심이나 애정을 기울여 본 적이 있는지도. 


카야가 연루되는 살인 사건의 법정 드라마도 흥미롭다. 성장소설이자 법정 스릴러적 요소가 가미된 생태주의 소설이다. 소년과 소녀가 가만히 서로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또 어찌나 아름다운지 여운이 긴 이야기다. 그 사랑이 그녀를 아프게도 하지만 결국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을 내친 세상과 화해하고 공존하게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친구가 하늘나라에 갔다. 마지막으로 했던 연락이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 그 시간을 아무리 되돌리려 해도 불가능하다. 이제 그 친구가 없는 세상에 산다. 문득문득 그 친구의 미소가 그 친구가 나에게 쳤던 귀여운 장난들이 떠올라 가슴이 저릿저릿하다. 나와 그 친구가 함께 했던 추억의 한 조각도 같이 빠져나갔다. 그 조각은 나에게 속했던 것이니 나는 이제 더 이상 그 이전의 세상 속의 내가 아니다. 자연으로 그 친구가 태어났던 곳으로 돌아간 것이라 위로해도 여전히 마음은 아프다. 카야가 작은 위로가 되었다. 이 세상보다 더 큰 차원의 대자연으로 그 영혼이 돌아간 것이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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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러 K. 르 귄의 작품은 애석하게도 아직 단 한 편도 읽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 기대 이상의 에세이집을 읽고 나니 그녀의 소설들이 궁금해졌다. 여든이 넘은 작가가 노년과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와 사회의 각종 현안과 폐미니즘과 개인적인 경험을 너무 진지하거나 현학적이지 않게 그렇다고 개인적인 감상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읽는 즐거움까지 함께 주는 이야기에 흠뻑 빠졌다. 단 한 편의 글도 가볍거나 지면을 낭비한 감이 없다. 위대한 작가란 이런 것이구나 싶을 정도.
















노년은 누구든 거기까지 이르는 자의 것이다. 전사들도 늙는다. 나약한 이들도 늙는다. 사실상 개연성으로 따지면 전사들보다 더 많은 나약한 이들이 늙어가게 된다. 노년은 건강하고, 강인하고, 거칠고, 용감무쌍하고, 병들고, 허약하고, 겁이 많고, 무능한 사람들 모두의 것이다. 

-p.23


그 어떤 작가보다 그녀의 노녀에 관한 솔직하고 통찰력 있고 적나라한 이야기에 공감이 갔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의 빈약한 논리, 노년을 부정하려는 시류에 대한 따끔한 지적, 그것은 "존재의 상태"이기에 부인하거나 부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나날이 허물어지고 잃어가는 것들에 대한 응시가 우울하지만은 않은 게 그녀 특유의 위트가 가득한 문장들 때문일 것이다. 어떤 어두운 이야기도 그녀에게서 나오면 특유의 밝은 에너지를 얻는다.


반려묘 파드에 대한 이야기는 파드 입장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단편 소설 같다. 독특하고 득의양양한 고양이의 모습이 눈앞인 듯 그려질 정도다. "나쁜 발을 가진 착한 고양이"라니,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장난꾸러기가 연상된다. 


지난 두 세기 동안 아주 오래된 남성적 기관들에 점점 많은 여성들이 진출해 왔다는 사실은 매우 훌륭한 변화이다. 하지만 여성들이 가까스로 자신들을 배척하는 기관에 발을 들여놓게 되면 십중팔구 남성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남성적 가치를 강화하도록 강요받는다. 

-p.160~161

콕 집어 언어화할 수 없었던 불편한 진실의 적확한 표현이다. 여성들이 단지 남성적 기관에 많이 진출하는 게 성평등으로 향한 진보이자 발전이라 섣불리 단정지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녀들이 거기에서 어떤 가치를 강화하도록 독려받고 때로는 강요받는지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 뒤따라와야 할 것이다. 여전히 남성적 가치, 가부장적 조직 문화에 동화하고 때로는 보조 역할을 하도록 저도 모르게 내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자각이 필요할 것이다라는 이야기. 


'내면의 아이'에 모든 힘든 일들의 원인을 귀결시키는 것의 태만함에 대한 지적도 날카롭다. 그것이 결국 게으름이 아니겠는가, 하는 그녀의 반문은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또 한편 그럴지도 모른다는 설득력을 갖는다. 


어슐러 K. 르 귄은 어느 하나 허술하게 보아 넘기지 않는 것 같고 일단 의심하고 두드려 보며 인식과 지각의 지평을 넓힌다. 무조건적 맹종, 맹신, 무비판적인 수용을 그녀는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대목엔 웃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이렇게도 솔직하다니. 같은 직업군의 다른 이들을 시기한다고 때려주고 싶다고 이가 갈린다고 대놓고 얘기할 수 있는 그녀의 건강한 마음이 부럽다. 


질투는 노랑과 초록이 쌓인 그 더러운 코를 주로 작가로서의 내 삶에 들이댄다. 나는 찬사의 날개를 달고 성공을 향해 비상하는 다른 작가들을 시기한다. 그들의 작품이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나는 그들과 그들을 칭송하는 사람들에게 모욕적인 분노를 느낀다. 허세 부리지 않아도 성공할 만한 재능을 가진 헤밍웨이를 걷어 찰 수 있으면 좋겠다. 허세 부리고 가식을 떤 대가로 말이다. 끝을 모르고 과대평가 받는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은 뭐든지 이가 갈린다. 필립 로스의 안치소를 보면 화가 다 치솟는다. 

-p.219


그녀가 다음 주면 여든하나가 되기에 남겨둘 시간이 없다던 고백은 이 책의 제목이 되었다. 여든하나의 그녀가 하는 이 솔직하고 대담한 고백들은 단순히 사적인 차원이 공적인 메시지가 되어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좋은 에세이들이 가지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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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8-07 2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브랑카님 노년에 대해 관심 많잖아요. 정말 흠뻑 빠져서 읽으셨겠는데요?
저도 르 귄은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가입니다.
이책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그녀가 세상에 없다는 게 아쉬워요.

blanca 2020-08-08 09:50   좋아요 1 | URL
ㅋㅋ 스텔라님, 맞아요. 글을 진짜 잘 쓰더라고요. 저는 그냥 스토리텔러라고 생각했었거든요. 뭐랄까, 대가의 느낌이 물씬 나는 에세이들이었어요.
 

한 사 년 전이었나 보다. 집 근처에서 버스로 몇 정거장을 가면 있는 도서관은 좀 외진 주택가를 걸어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는데 공원에 폭 안긴 폼이라 사방의 유리창으로 키 큰 나무들과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근사한 곳이었다. 게다가 부지런한 사서는 한국 문학 신간을 부지런히 넉넉하게 채워넣어 그 서가에서 그 책들을 한 아름 안고 나오는 길은 세상 부자가 된 느낌이었다. 그때 백수린, 김금희, 최은영을 만났다. 비슷한 또래에 비슷한 정서들을 공유하는 짧은 이야기들이 당시에 참 신선하고 좋았다. 여러 가지 일신상의 변화로 그 도서관을 떠나게 된 것이 참 아쉽다. 요 근래에 다시 그 작가들과 재회했다. 특히 정세랑의 발견. 대학병원이라는 장소를 둘러싼 <피프티 피플>의 이야기를 모처럼 즐겁게 읽었다. 장편소설이지만 오십 명 남짓의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이름 아래 개별적인 서사를 가지고 있어 차례대로 이야기의 흐름을 잡으며 읽을 필요는 없다. 환자, 의사, 방사선사, 안전요원, 홍보부 직원들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만나볼 수 있는 유형들이다. 서로는 알게 모르게 얽혀 있어 뜻하지 않은 대단원의 마지막 장면에서 재회하게 된다. 지나치게 촘촘하거나 치밀한 구성은 아니지만 그러한 느슨한 연결이 더 현실과 닮아 있어 몰입이 됐다. 특히 세대 간의 만남과 소통의 장면을 자연스럽게 묘사한 대목이 좋았다. 섣불리 젊은이들에게 훈계하려 들지 않는 잘 늙은 이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분주하고 다사다난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결국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며 기분이 데워지는 이야기들이다. 또 다른 장소에서 그 장소를 중심으로 인간 군상의 모습을 그린 이야기를 만들어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력적인 작품이다.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은 이야기.















사회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사람에 대한 기준을 각자 세우게 되잖아요? 제 기준은 단순해요.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정신줄을 잘 붙잡느냐 확 놓아버리느냐, 상대방을 고려 않고 감정을 폭주시키는 걸 너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요. 선하면서 스스로를 다잡는 사람, 드물고 귀해요.

-정세랑 <피프티 피플>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야기였다. "선하면서 스스로를 다잡는 사람"이 되는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너무나 많은 상황과 너무나 많은 감정의 진폭들은 때로 모두를 덜 예의바르게 만든다. 노력할 일이다.



백수린의 문장와 이야기는 결이 곱고 섬세하다. 예민한 현을 건드리는 재능이 뛰어난 작가이다. 한 마디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여름의 빌라>도 예전의 인상을 그대로 떠올리게 한다. 특히 손녀가 추적하는 할머니의 이국에서의 로맨스를 그린 <흑설탕 캔디>와 선량한 인간의 내밀한 이중적인 마음에 대한 핍진한 묘사가 인상적이었던 <아주 잠깐 동안에>가 좋았다. 모든 걸 다 가질 수 없는 상황과 그것에 대한 복합적인 마음에 대한 포착에 대한 여운이 긴 이야기들. 제목처럼 참 싱그러웠다. 
















그럼에도 이런 겨울 오후에, 각설탕을 사탕처럼 입안에서 굴리면서 아무짝에 쓸모없는 각설탕 탑을 쌓는 일에 아이처럼 열중하는 늙은 남자의 정수리 위로 부드러운 햇살이 어른거리는 걸 보고 있노라면 할머니는 삶에 대한 갈망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또다시 차오르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백수린 <흑설탕 캔디>

"아무짝에 쓸모없는..."이라는 말이 언제나 가슴을 파고든다. '쓸모'로 평가되는 사회에서 '쓸모없음'의 가치에 주목하는 일이 결국 읽고 쓰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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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7 13: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28 0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침묵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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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소설의 흡인력은  이미 비교적 쉽게 획득한 핍진성보다는 사실들의 행간의 맥락, 인물의 내면의 심리의 묘사력에 기대는 바가 크다. 이미 벌어진 일들은 이미 충분히 잘 알고 있는 독자가 그러한 사태와 상황 속의 인물에 몰입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전제일 것이다. 시공간의 낙차를 극복하는 방법은 그러한 내면의 묘사가 가지는 공감의 힘이다. 


그러한 면에서 엔도 슈사쿠의 <침묵>의 배교자들은 비겁해 보이지 않는다. 17세기 일본으로 선교를 떠난 포르투칼 로드리고 신부의 수난의 과정은 대단히 현실적이다. 그의 스승이었던 페레이라 신부가 고문에 굴복해 배교한 과정은 결국 제자인 '나'의 여정에서 비로소 다른 측면에서 이해되고 재조명될 것이다. 기적도 극적인 해피엔딩도 없이 건조하고 어쩌면 외형적으로는 패배의 여정이라 할 만한 그 처절하고 사실적인 선교 과정의 묘사는 실제 가톨릭 신자였던 엔도 슈사쿠와 종교를 공유하지 않아도 충분히 공감하고 감동 받을 만한 것이다.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는 우리가 삶에서 청춘일 때 인생에 기대하는 어떤 열정, 이상과 합치하지 않는 생의 간극에서 가지게 되는 회의의 정경에서 흔들리는 대목을 그래도 체현하고 있다. 비겁자 스승의 발자취를 좇으며 그가 결국 깨닫게 되는 것들은 비단 종교적인 것들만이 아니다.


드라마틱한 기적도 신의 응답도 실종된 침묵의 현장에서 고통받으며 순교하는 무고한 신도들 앞에서 무기력하게 성화를 밟고 배교하기를 강요 당하는 고문의 현장에 선 로드리고 신부의 고통의 묘사가 절절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위하여 대체 이 머나먼 이국으로 와 응답이 없는 신을 위해 이 생에서도 굶주리고 위정자들에게 핍박받는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고문에 몸부림치며 죽어가야 하나, 라는 회의론적 의문은 치열하게 그를 압박한다. 모든 흔들리는 희미한 질문들을 엔도 슈사쿠는 피하지 않는다. 선교라는 미명하에 변형되어 아예 실체조차 불확실한 종교의 변용에 대한 회의도 비록 일본인의 입을 빌렸지만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하나님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만약 하나님이 없다면 수없이 바다를 횡단하여 이 작은 불모의 땅에 한 알의 씨를 가져온 자신의 반생은 얼마나 우스꽝스럽단 말인가. 그건 정녕 희극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 매미가 울고 있는 한낮, 목이 잘린 애꾸눈 사나이의 인생은 우스꽝스럽다. 헤엄치며 신도들의 작은 배를 쫓은 가르페의 일생도 우스꽝스럽다. 신부는 벽을 향하고 앉아 소리를 내어 웃었다.

-p.215


유다처럼 로드리고를 밀고하고 팔아 넘기고 부인하고 도망치지만 끝내 그의 주변을 떠나지 못하는 기치지로라는 인물도 어쩐지 눈물겹다. 약한 본성과 엄혹한 상황에 몰려 계속 자신의 신앙을 부정해야 했던 그지만 그럼에도 반복해서 돌아오고 신부 곁을 맴도는 그의 현실은 신앙을 위해 기꺼이 순교하는 용감한 신도들의 모습보다 더 현실적이다. 엔도 슈사쿠의 인물들은 고정적이고 용감하고 이상주의적인 대신 현실적이고 유동적이고 회의하고 모순적이라 우리의 삶과 더 가깝다. 그 모두의 변심과 배교는 그래서 미약한 마침표가 아니다. 수많은 질문들과 실종된 답변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성취다. 그는 감히 답하거나 설명하지 않은 채 마친다. 그것은 한계이기도 하고 최대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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