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도 나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어긋나버리는 경우가 있다. 세 번 연락할 걸, 두 번으로, 그러다 점차 연락하지 않는 기간, 공유하지 않는 사연들, 떨어져 있는 시공간이 착착 쌓이다 보면 다시 카톡을 보내는 것이 왠지 겸연쩍어지는 시간이 온다. 그리고 관계는 그렇게 끝난다. 예전에는 그런 관계의 단절에 속상해했다. 아쉬워했다면, 이제는 그러한 관계의 소멸에 그냥 수긍하게 된다. 물론 아쉬울 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함께 했던 시간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함께 나누었던 것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겹쳤던 시간은 거기 그대로 고여 있다. 




 

그러기를 수없이 반복한 끝에 나는 서서히, 내가 애초에 그리고 싶던 것은 관계의 파탄이나 단절의 순간이 아니라, 어떤 관계가 꽃처럼 피었다가 결국 져버리는 과정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하자면 관계의 생로병사 같은 것.

-백수린 <작가노트>


 

















작가 백수린의 '작가노트'에서 내가 찾고 싶었던 그 표현을 마주친다. "관계의 생로병사" 작가는 <시간의 궤적>에서 프랑스에서의 한 '언니'와의 결국 어긋나버린 인연의 궤적을 그려나간다. 한때는 모든 것을 공유했던 사이가 어떻게 소원해지는지 서사는 진폭이 크지 않은데도 살면서 놓치는 자잘한 것들을 낙낙하게 주워담는다. 왠지 아련하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에 백퍼센트 공감하게 된다. 소설이란 이러한 것들을 이렇게 막연히 추측하고 생각했던 것들을 생생하게 또렷하게 다시 길어올려 삶의 이야기에 통합시킨다. 


종인 선배는 동시녹음기를 어깨에 걸어 메고는 붐 폴을 양손으로 세워 쥐고 미동도 없이 우뚝 섰다. 조연출 누나는 이번에는 검지를 입술에 올리며 조용히 따라붙으라고 손짓했다. 뒤를 돌아보면 역광을 받은 채 빛나는 선배와 그 아래로 붐 폴의 그림자가 더는 늘어날 수 없을 만큼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건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나는 수업시간에 주워들은 숭고, 라는 단어마저 떠올려버렸다.

-김봉곤 <데이 포 나이트>

김봉곤은 이성애자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공감의 영역을 자신의 사랑의 묘사에서 여지없이 찾아낸다. '내'가 사랑에 빠지던 그 순간, 나도 '숭고'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경외감을 느꼈던 시간을 불러세웠다. 그 시간, 다른 경험치는 그의 언어의 색깔이 소환하는 그 구체적 상황을 넘어서서 각자의 그 시간, 공간을 복기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이 작가는 특별한 얘기를 통해 보편적인 정경을 떠올리게 하는 능력이 있다. 


회상의 대가는 뭐니뭐니도 프루스트다. 그의 묘사는 점묘법이다. 어찌나 치밀한지 어지러울 정도다. 그는 기억을 언어의 그물로 짜 현실로 복원한다. 늙고 죽을 것을 항상 의식하지 못하는 인간의 속물성이 그 앞에서는 여지없이 드러나 해체된다. 


















이미 끝나버릴 것을 안다고 해도 그 시간을 현재형으로 사는 회상의 주체인 '나'는 현실을 소용 없는 일들, 허물어져 버리는 것들로 여전히 성실하게 채운다. 끝을 안다고 해서 시작조차 하지 않는 일은 없다. 여전히 욕망하고 시작하고 들뜨고 설레어한다. 다만 화자는 조금 더 알 뿐이다. 약간 더 현명할 뿐이다. 늙음이 가져오는 체념의 정서는 현실에 간섭하지 못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미덕은 그것일 것이다.


그러니까 또 다시 시작한다. 다시 기대한다. 나눈다. 같이 웃는다. 벚꽃처럼 다 질 것을 알지만 그 아름다움에 또 다시 숨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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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데려다 주고 오는 길, 오랜만에 미세먼지도 없고 완연한 봄이다. 사계절이 있는 것에 장단점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봄은 다른 공기 좋고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나라들과는 다른 특별한 감흥이 있는 것 같다. 더 농밀하고 무언가 가슴에 와닿는 뭉클함이 있다. 집 앞의 아련한 흔적 같은 산수유를 볼 때마다 뭐라 말로 하기 힘든 감동을 느낀다. 힘든 일을 겪던 와중에 이천의 산수유 축제에 갔던 기억. 난만한 꽃들은 바람에 흩날리고 나는 계속 걷다 울다 했다. 너무 젊었고 그 만큼 미숙했으니 울 일도 많았다. 다시 보는 산수유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이 산수유가 영원할 수 없고 그 산수유를 보는 나도 여기에서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는 깨달음에 문득 아득해져버린다. 내 손을 잡고 잘 걸어와주는 아이도 이제 곧 혼자 성큼성큼 걸어갈 거라 생각하면 또 그 미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한없이 아쉬워진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모든 게 영원할 줄 알았던 어린 시절의 철없음이 또 그리워지기도 하고. 꽃나무 한 그루가 온갖 단상을 길어 올린다.


나는 그냥 거리 풍경을 바라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냥 오후의 햇빛, 부드러운 바람, 달리는 자동차, 자전거 타는 사람, 걸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무의미의 시간, 그냥 흘러가는 시간, 순간도 영원도 아닌 어쩌면 그 모두인 저무는 휴일 오후의 시간, 생이 농익어가는 셀러브레이션의 시간, 뫼르소의 시간, 니체의 시간-아 여기서 더 무엇이 필요한가.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죽음을 앞에 둔 사람이 바라보는 생이 찬란하다. 하루하루, 그 평범한 일상의 빛나는 찰나들에 대한 그 어떤 묘사도 철학자 김진영의 그것만큼 생생하게 와닿았던 적이 없었던 듯하다. 소멸하는 과정에서도 그 어떤 고결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저자의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존경스럽다. 생과 존재에 대한 예우를 이처럼 자신의 마지막으로 체현한 사람이 또 있을까.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도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도 프루스트도 이제는 과거의 텍스트가 아니라 저자의 

사그라드는 생에 직접 와닿아 형형히 되살아난다. 머리로만 이해했던 문장들이 생에 돌연 날아와 꽂히면 삶 그 자체가 된다. 언어는 숨을 쉰다. 읽고 쓰는 일이 존재의 마지막까지 본분이자 남겨진 자들에 대한 배려와 책무가 되는 과정이 한없이 숙연해지게 만든다. 그가 인용한 차라투스트라의 "인간은 무르익어 죽는다."는 문장은 저자 자신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 같다. 


"내 마음은 편안하다." 그의 마지막 문장이 왠지 위로가 된다. 그가 남긴 책은 남겨진 자들의 애도 일기가 되었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애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숙제처럼 남기는 대신 스스로가 미리 매듭지어 남겨 두었다. 그래서 이 책은 슬프지만 도처에 사랑이 넘쳐 흘러 따뜻하다. 절망을 얘기하는 대신, 우리가 여기 지금에서 소비하는 일상들의 비의를 부각시켜 사는 일을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으로 만든다. 


이 책을 읽고 다시 산수유를 보는 일. 이렇게 서서 산수유를 볼 수 있는 지금은 영원하지 않아 눈물겹도록 찬란하다. 그것을 잊지 않기를 저자는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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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31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1 2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9-03-31 1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blanca님의 이 글도 꼭 읽어야할 것 같아요.
마음 한 귀퉁이가 쓸쓸하면서도 너무 포근해지네요.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도 여전히 잘 읽고 갑니다^^

blanca 2019-03-31 20:47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아니었으면 읽지 못했을 거예요. 감사 인사 꼭 하고 싶었어요. 기억해 두고 싶은 대목들 적어두고 두고두고 일상의 귀중함을 잊을 때 읽어보려고 합니다.

Jeanne_Hebuterne 2019-04-21 0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를 좋아하시는 어머니께 이 책을 보내드렸어요. 아직 택배로 도착하지는 않았지만 그저, 그 글자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요.

blanca 2019-04-21 21:36   좋아요 0 | URL
아, 이 책이 읽는 사람을 아무래도 좀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면이 있기도 하지만 뭐랄까, 오늘 하루를 사는 일에 대한 존귀함, 삶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애정 등이 잘 드러나 있어 어머님도 좋아하실 거라 믿어요. 쟌느님 어머니는 이렇게 사려깊은 책 선물을 하는 딸을 두어 참 행복하겠다 싶어요.
 
내가 있는 곳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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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네에서 쭈욱 살며 초중고교를 다 다니다 대학교야 거리가 좀 있는 곳으로 지하철을 타고 다녔다지만 이후 이동이 잦은 직장에서 일하게 되며 나는 내가 참으로 이동을 싫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사람, 장소, 사물에 가까스로 적응했다 다시 그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절로 힘이 쭈욱 빠지곤 했다. 이미 정들어버린 것들을 떠나보내는 것도 힘겨웠다. 자고로 한곳에서 익숙한 것들에 기대어 변화, 변수 없이 살고 싶다는, 안주하고 싶다는 생각은 사실 나이듦과 더불어 더 진해져 큰 일이다. 이별도 적응도 솔직히 귀찮고 두렵다. 



장소를 옮길 때마다

나는 너무나 큰 슬픔을 느낀다.

추억이나 고통,

즐거움이 있던 곳을 떠날 때 

그 슬픔이 더 크지는 않다.

충격을 받을 때마다 출렁이는 단지 속 액체처럼

이동 자체가 날 흔든다.

-이탈로 스베보, [에세이와 흐트러진 페이지]



기다렸던 줌파 라이리의 <내가 있는 곳>의 첫장에 인용된 이 글을 읽고서야 나는 나를 제대로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 그래, 난 그저 장소를 옮길 때마다 슬픔을 느꼈던 거야. 그곳에서 아름다운 추억을 쌓았든, 진상을 만나 잊고 싶은 경험을 했든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저 그 불안정, 혼돈이 날 흔들었던 거야, 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목은 이탈리아어로 Dove Mi Trovo. 줌파 라히리는 영어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겠다,는 결심을 공표한 바 있다. 그녀는 십대 때 제 2외국어로 이탈리아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중년이 지나서야 단기로 거주하며 이탈리아어를 비로소 실생활에 직접 쓰며 부딪히는 여러 한계, 좌절,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애정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 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모국어가 아닌, 그것도 언어습득기도 아닌 성인이 되어 체류한 나라의 언어로 아름답고 농밀한 글을 써낼 수 있다니, 조각 조각 떨어진 것같은 짦은 이야기들을 읽으며 믿기지 않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다.


46개의 짦은 이야기가 모여도 그 이야기는 여전히 짧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각각의 독립성은 또렷하다. 결혼하지 않은 중년의 여자의 시선은 줌파의 시선을 통과하여 주변의 사물과 사람과 사건을 그녀만의 독특한 무형질의 색깔로 물들인다. 소설이라지만 에세이 같기도 하다. 그 만큼 누구나 읽어도 동감하고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일상에 대한 묘사가 빛난다. 


이따금 내가 사는 동네 길거리에서 함께 어떤 이야기, 어쩌면 인생을 같이 만들어나갈 수도 있었을 한 남자를 만난다.

-<길>

그 남자는 내 친구와 가정을 만든 남자다. 그래서 더 나아갈 수 없는 그 지점에서 동행한다. 경계는 아찔하고 그 경계 너머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아슬아슬하다. 그럼에도 다시 '내가 있는 곳'으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우 모두가 "불길한 목적지를 향해 조용히 나아가는 감금된 죄수들 같다."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짦은 기간의 빛, 더 이상 나와는 상관없는 뜨거운 에피소드" 앞에서 물러날 줄 아는 '나'는 지극히 평범하다. 줌파 라히리는 뜨겁고 강렬한 서사를 만들기 위해 무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안온하고 단단한 현실에 착 달라붙어 안주하지도 않다. 그 절묘 한 균형 지점을 간파하는 작가의 저력에 그저 놀랄 따름이다. 외국어의 체를 걸러 건너간 지대는 어쩐지 더 핍진성이 있고 간명한 이야기들로 웅성거리는 것같아 인상적이다. 낭비도 잉여도 결핍도 없다. 때로 말로 주워섬길 수 없었던 그 수많은 모호한 감정들이 그녀 앞에서 비로소 이름과 실체를 얻으며 시원해지는 느낌이 반갑다. 문구점에서 존재의 의미를 확인하고 정들었던 주인 가족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것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하는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방향 잃은, 길 잃은, 당황한, 어긋난, 표류하는, 혼란스러운, 어지러운, 허둥지둥 대는, 뿌리 뽑힌, 갈팡질팡하는, 

이런 단어의 관계 속에 나는 다시 처했다. 바로 이곳이 내가 사는 곳, 세상에 내려놓는 말들이다.

결국 내가 떠나고 싶었던 그 지대가 결국 내가 사는 곳이다. '내가 있는 곳'이다. 별스럽지 않은 이야기가 돌아오는 곳이 내가 있는 지점이라 안심이 된다. 흔들리고 당황하고 표류하며 일상을 사는 것. "불길한 목적지"가 종착점이라 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나날이 늙어가는 그 시간들의 무게에 대한 사려 깊은 담담한 이야기가 깊이 와닿는다. 역시 그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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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3-26 1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블랑카님. 이 책 벌써 읽으셨군요!
저도 줌파 라히리의 신간이라며 좋아하면서도 이탈리아어로 쓰여진 소설이라 해, 아아, 그전 소설보다 좋지 않을 수도 있으려나? 살짝 의심했는데 읽어야겠네요. 읽겠습니다.
줌파 라히리의 글만큼 좋은 페이퍼네요, 블랑카님.

blanca 2019-03-26 16:39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저는 줌파 라히리가 너무 부러워요. 자기가 사랑하는 외국어로 이 정도의 글까지 쓸 수 있다니 문학적으로 좀 다른 차원이긴 한데 원하는 대부분의 것을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기대이상이어서 너무 짧아서 아껴 읽느라 딴 곳에 던져두기까지 했답니다. ㅋㅋ 그렇지만 너무 짧으니까 어쩔 수 없이 다 읽어버리고 말았어요. 여하튼 저도 의구심을 품고 읽기 시작했는데 이 작가는 정말 특별하구나, 그걸 부정할 수는 없겠다, 싶었어요.

무해한모리군 2019-03-26 15: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어서 이책 읽고 싶어요. 금요일쯤 받을거 같은데 기대기대

blanca 2019-03-26 16:40   좋아요 0 | URL
도착일이 금요일이라니 딱이네요. 야식과 함께 이 책이라면 진정한 의미의 행복한 불금이 될 거라 믿어요.

붉은돼지 2019-03-26 16: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저는 또 리하리로 읽고 말았습니다.
이게 한 번 입에 붙어버리니 쉽게 고쳐지지 않는군요..음..

blanca 2019-03-26 16:41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 게 많아요. 지금 바로 떠오르지는 않는데 한번 굳어버리면 영 고치기가 힘들더라고요. 몇 가지가 있어 예를 들고 싶은데 생각이 안 나 아쉬워요.^^;;
 
어반라이크 URBANLIKE 35호 : My Stationery! 어반라이크
어반북스컴퍼니 편집부 엮음 / 어반북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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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도저히 참지 못하는 물욕이 있으니 책과 더불어 문구다. 이러한 급소를 예리하게 가격한 잡지가 있었다. 어제 받아서 흥분하며 읽고 보고 메모하니 딸아이도 빼앗아 읽으려 하고 문구와 거리가 먼 유치원생 남동생까지 덩달아 자기도 본다고 옥신각신하다 싸움이 제대로 붙어 잡지 한 페이지가 부욱 찢겨 나갔다. <어반라이크> 때문에 어젯밤 조용하던 우리집은 울음바다가 되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다.

수지 인터뷰는 덤이다. 도화지 같은 인상에 그 어떤 사물, 상황, 배역을 가져다 대어도 잘 어우러지는 배우라고 생각한다. 연필도 수지가 꽂으니 뭔가 더 영롱하고 그럴 듯해 보인다. 2017년에 발간된 잡지는 현재 그녀의 과거를 미래형으로 얘기하고 있어 흥미롭다. 스물네 살이 되는 것에 대한 감상. 영원히 스무 살일 것 같았던 그녀는 이제 스물 여섯이 되었다. 그밖에 ‘문구를 사랑하는 창작자 100인의 시선’ 코너에서는 저마다 아끼는 문구를 둘러싼 소소한 이야기가 알토란 같이 쑥쑥 나와 안긴다. 그 사람을 잘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그 사람이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사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지름길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증처럼 느껴질 정도로 진지하고 깊이 있는 인터뷰가 읽어 주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내밀하기도 하고 재미있었다. 특히 라북 대표의 “최소한의 것을 추리는 습관. 적게 가질수록 최선의 것을 가지게 된다. “는 말은 나의 급소를 찔렀다. 나이듦은 사물에 대한 시선의 각과 깊이의 변용도 함께 가져온다. 싸다고 손에 닿는다고 차선의 물건과 쉽게 타협하는 대신, 좋은, 꼭 필요한 물건을 기다렸다 적기에 소유하는 현명함에 대한 필요를 배우지만 그래도 어떤 낭비와 무용하지만 끌리는 것들에 대한 애착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 난감하다.

그래서 아직 좋은 노트와 블랙윙 연필에 대한 욕심의 불씨는 꺼지지 않는다. 그 잉여에 대한 집착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였으면 좋겠지만 세상 사람 모두를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는 일의 불필요와 불가능도 아는 나이가 되었으니까.

아, 지난 주에 소위  "인스" (인쇄소 스티커)를 사고 또 사내라는 초등생 딸에게 반론을 제기할 처지가 아니다. 결국 지고 만다. 나도 참지 못하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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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쓰지 않는 것보다 후지게 쓰는 것이 두려웠다."는 발언은 상당히 도발적이다. 괜히 찔리는?  쓰는 일의 무게를 함부로 폄하하지 말라는 듯한 그 엄중함을 의식하라고 은근히 충고하는 발언처럼 느껴지지만 발화자가 77세가 되었고 이미 마흔 권 이상의 책을 출판한 대작가라는 배경을 알고 나면 가만히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리스 태생의 스웨덴 작가 테오도르 칼리파티데스의 이야기다. 생소한 이름이지만 스웨덴의 국민 작가의 위상인 듯, 심지어 고국인 그리스에는 그의 이름을 딴 길이 있다고 한다. 스무 살 이후에 스웨덴으로 이주하여 모국어가 아닌 스웨덴어로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니 그 노정이 짐작이 간다.



                              




언뜻 작가라기보다는 잘 늙은 헐리우드 배우 같은 이미지다. 이백 페이지가 채 안 되는 작가의 푸념은 사실 절필 그 자체가 핵심은 아니다. 창조의 샘이 고갈된 것에 대한 당혹감, 타성과 관성에 젖은 작가로서의 권태에 대한 고백은 사실 쇠락해가는 고국 그리스로의 그리스어로의 귀환의 발단이기도 하다. 잃어버린 것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잊어버린, 잃어가고 있는 것들을 찾아 더듬어 나가는 과정에 대한 잘 압축된 형상화다. 문장이 시적이면서 어렵지 않고 잘 읽힌다. 작가 자체의 저력과 번역가의 협업인 듯 쏙쏙 잘 들어온다. 


오늘밤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 불빛과 나무들을 지난 수년간 봐왔지. 죽더라도 그것들이 생각날 거야. 삶이란 꿈이 아니거든. 시간과 빛 사이의 그림자일 뿐이지.죽음은 아무것도 앗아가지 못한다니까.


"죽음은 아무것도 앗아가지 못한다니까." 이 문장이 너무 위안이 된다. 죽음으로 인한 허무주의는 너무 횡행하니까. 반복, 중복, 중첩은 이미 충분하니까. 이런 신선한 시각이 상쾌하다. 그러니 그는 일흔이 훌쩍 넘어 모험을 강행한다. 고국으로의 물리적인 귀환과 더불어 스무 살 이후로 문학적인 언어로는 한번도 활용해 본 적이 없는 그리스어로 이 자그마한 책을 쓰기로. 이 책은 이민자로서 그가 고국에 느끼는 부책감, 미안함에 대한 보상이기도 하다. 


그가 돌아온 고향 마을의 고등학교 아이들이 작은 원형극장에서 아이스클로스의 비극을 연기하는 것을 보는 그의 눈가는 젖는다. 그의 언어로. 마침표이자 그의 절필에서 그를 끌어낸 소년, 소녀들의 역할은 장엄한 결말이다. 


하지만 마지막 말은 모국어로 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의 마지막 문장.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모국어를 간직하고 있다는 건 대단한 축복이다.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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