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0
임레 케르테스 지음, 한경민 옮김 / 민음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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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잖은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이 자신들의 참혹한 체험을 다양한 형식으로 증언했다. 그것은 회고담의 형식이거나 때로 허구의 형태를 띤 이야기로 세상에 나왔다. 많은 부분들이 때로 겹쳤고 상충되거나 서로 보완하여 완성되지 못한 그림을 마무리하기도 했다. 이미 이와 같은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도  헝가리 작가 임레 케르테스의 자신의  소년 시절의 수용소 생활을 자전적으로 그린 <운명>은 세상에 충격과 더불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십대 소년에게서 으레 기대하게 되는 뜨거운 이야기 대신 관조적이고 담담한 관찰자적 시선이 그려낸 나치의 만행은 역설적으로 더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폭력으로 느껴진다. 


"짧고 곧게 난 길은 아무 곳으로도 인도하지 않아. 또 하나의 길은 길고 굽이가 많아. 그래서 어디로 인도할지 알 수 없어. 그렇지만 적어도 그 길이 닿는 데까지, 사람들을 걸어간다고 느끼지. 그걸 기록해야 해."


그때 그 소년은 노인이 되어 <좌절>로 돌아온다. 글쓰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늙은 작가는 아내의 노동에 기댄다. '그'가 "세상에 대한 대답"으로 눌러 쓴 이야기는 오랜 시간 응답을 받지 못한다. 어쩔 수 없이 하는 번역은 부수입이 아니라 그의 유일 실질적 수입원이 된다. 그는 "무너지는 법, 기다리는 법"을 체현한다. 노인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시선은 어쩐지 서글프게 우스꽝스럽다. 그는 한심하고 무능력해보인다. "마지못해" 사는 그의 생활은 하지만 어쩐지 좀 고귀한 면이 있다. 그는 현재의 이 별스럽지 않은 삶, 초라한 일상과 증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극단의 폭력이 훑고 간 과거의 아우슈비츠의 어느 중간 쯤에서 끊임없이 어떤 부책감으로 서성인다. 이윽고 그를 훑던 시선은 어느새 시간의 불가역성을 뚫고 수용소의 소년에서 고국으로 귀향한 소년의 미래이자 노인의 과거의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시선과 시점과 시제는 혼재되어 독자를 혼란스럽게 하지만 삶의 이야기는 사실 정합적이고 논리적이고 순차적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모순이기에 임레 케르테스의 기만은 옳다. 


"필연적이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사는 것."


노인의 과거는 시대와 상황 앞에서 속수무책이지만 고고하다. 그는 "소비되지 않으려" 발버둥친다. 상부에서 외부에서 가해지는 각종 압력 앞에서 그는 때로 어쩔 수 없이 순종하지만 결국 짐짓 미친 척하다 미쳐버림으로써 자신의 마지막 존엄을 사수한다. 기자, 기계공, 간수의 직분은 외부에서 주어지지만 결국 그가 지켜내는 것은 그 자신, 그 본질이다. 다시 돌아온 노인은 마침내 인간의 극악무도한 만행을 언어로 형상화해내고 자신의 과거를 언어로 재구성한 작가다. 


노인은 무력하지 않다. "좌절"은 하나의 은유일 뿐, 그의 실재가 아니다. 언뜻 패배한 이로 보이는 늙은 작가의 승리는 그러한 것이다. 자신의 삶, 그 자신의 운명을 묵묵히 살아낸 것, 그건 필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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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키즈언더블럭의 열혈팬이었다. 학교 근처 레코드샵에서 크리스마스 캐롤 특판 앨범을 미리 주문했다 찾아오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말 그대로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는 내 것이었는데 한 곡, 한 곡 들을 때마다 발가락이 저릿할 정도였다. 한 마디로 그때의 흥분이란 그 순간에 고대로 온전하게 담아서 다시 가지고 오고 싶은 것이다. 단순했던 나는 사람이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 앨범을 들을 때마다 그 순간의 희열감에 온전히 몰입했다. 지금은 너무 먼 풍경. 그 시간을 가져올 도리는 없다. 이제 순간 즐거운 일이 있어도 그 시간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기에 오히려 때로 더욱 우울해진다. 온전히 몰입할 수 없기에 항상 산란하다. 그때 아니고는 도저히 불가한 일들, 다시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그러한 나날들을 떠올렸다. 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아니 다시 한번 제대로 고쳐 산다면 그럴 용의가 있긴 하지만 스무 살을 복기해보기도 했다. "어느 찬비 내리는 가을 저녁 무렵..." 지은이가 헌책방에서 맞닥뜨리게 된 전집으로부터 출발하는 이야기는 일본 전후 세대의 청춘의 사연이지만 그것은 이미 조로한 그래서 어쩐지 좀 진짜 청춘 같지 않은 이들의 고백이다. 이념, 이상, 신념이 끝내 현실과 충돌하고 만연하는 생의 에너지는 언뜻 비치는 죽음들로 침해 당하며 결국 마침표를 품고 가는 이야기는 어쩐지 좀 비애로운 이야기다. 죽음을 전제하지 않은 삶의 이야기는 허위가 되고 말겠지만 항시 그것을 의식하는 생은 무겁고 늙어 있다. 이미 추락할 것을 아는 젊음의 고백은 때로 공허하다. 허무와 부재의 분위기는 인간의 심연과 만나 특유의 일본 소설들이 공유하는 느낌들과 만난다.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의 결말로 그 자체의 서사의 집을 세우는 작가의 필체는 매력적이지만 아쉬운 부분이 있다.


오히려 짧게 덧붙여진 <록탈관 이야기>에 더욱 공감이 갔다. 진공관에 집착하는 중학생 아이의 이야기는 어른이 되면 실제 만날 수 있을 거라 착각했던 나의 '뉴키즈'에 대한 열정과 만난다. 


그 시절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뭐니뭐니해도 아름다움이라는 것이었다.

- 시바타 쇼 < 록탈관 이야기>

그 아름다움이 특별했던 건 그 지점에 공통의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일은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그 시절 우리의 열정은 팬심은 공유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누군가 무언가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일은 은밀했지만 공공연해서 신 났다. 그러한 시간에 대한 묘사가 눈부시도록 세밀하고 아름답다. 비록 소년의 록탈관 득템이 반사기로 판명났다고 해도 그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 잊어버렸던 잃었던 아름다움에 대한 그 순전한 순진한 천착들이 떠올라 행복하게 아렸다. 


그시절...이미 사라져버린 시간들을 개별의 이야기에서 공통의 것들을 끌어내는 작가의 저력이 결국 이 이야기의 힘인 것 같다. 나의 나날이 아니라 "우리의 나날"로 집약하는 이야기는 그래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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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0 16: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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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6 19: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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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글자 풍경은 취학 전, 미술학원의 칠판에 판서된 단어들을 어떤 감흥도 없이 무조건 베껴 쓰는 지겹고 무의미한 반복이었다. 아마 미술학원에서는 그리기보다는 쓰기에 대한 효율을 학부모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나 보다. 나는 쓰고 또 쓰고, 깎고 또 깎으며 때로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 사이로 활자는 빠져나갔다.

나는 공부를 못해서, 아니 못했지만 잘 하고 싶은 열망 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서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의 글씨체를 흉내내어 필기를 하곤 했다. 귀퉁이가 유난히 부드럽게 빠진 똘망똘망한 글자체가 당시 여학생들 필기체로 인기여서 이를테면 ㅇ은 한없이 통통해지고 받침은 납작해지며 키를 낮추었다. 활달한 아이들의 경쾌한 글자체, 얌전한 아이들의 차분한 획은 나에게 와서 골고루 섞여 ‘쓰기’는 나에게 싫증나지 않는 하나의 발화가 되었다.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그 외관 자체가 하나의 실질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게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막연한 이끌림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활자 중독은 결국 글자에 대한 집착과도 겹친다.



그래픽디자이너이면서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조예가 깊은 저자의 글자들의 생태계에 대한 이야기는 더없이 매혹적이다. 알지 못했던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세계 각지의 에피소드는 무심코 지나친 많은 글자들에 사연을 불어넣고 숨결을 가미한다. 글자들의 숲의 정경을 정갈한 화폭에 담아내는 인문학적인 손길은 무심코 소비하고 배경으로 치환해 버리곤 했던 한글의 존재감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말미에 세종대왕이 갓 창제한 훈민정음으로 최초로 인쇄한 [월인천강지곡]에 대한 해석은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저자의 궁극적인 의미부여와 절묘하게 만난다. “하나의 달이 천 개의 강에 ‘인쇄’되듯 ‘찍힌다’”라는 의미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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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실물의 서점, 그것도 동네의 서점 안에 들어서는 일은 일상의 풍경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래서 그러한 서점을 우연이라도 마주치게 된다면 나는 아무리 책을 비싸게 구입한다고 해도 빈 손으로 나서지 못하겠다. 그런 서점에서 정갈한 책 배치를 통해 짐작하게 되는 부재의 서점 주인을 상상하면서 그의 딸일지도 모를 젊은 점원에게서 이 책을 샀다.


















아르떼 시리즈는 개인적으로 <클림트>를 통해 신뢰를 가지고 있던 터라 어느 정도의 기대감이 있었다. 게다가 <불안의 서>의 페소아라면. 저자는 포르투칼과 페소아를 선택했고 실제 리스본에서 페소아 전문가와 함께 그의 수많은 이명의 삶의 경로를 그의 작품들과 함께 추적한다. 아프리카의 더반에서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을 리스본으로 귀향한 열일곱의 소년은 "내 영혼은 덜 보이는 것과 함께 한다."고 고백하며 자신의 문학적 성취의 색깔을 예고한다. 페소아의 삶은 괴이했고 동시에 지극히 단조로웠다. 그는 이름이 알려지기를 갈망했지만 생전에 이룩한 성과로 자신의 소망을 실현시키는 대신 끊임없이 오해받고 폄하되

곤 했다. "영혼 안에 울린 종소리"로 다가왔던 단 하나의 사랑은 곧 페소아 안에서 끝나버렸지만 상대 여성은 그 사랑을 불멸의 것으로 끌고 간다. 괴팍하고 고독한 작가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텍스트적인 틀 안에 자신을 가두고 결국 불사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물질적 것들 안에 비물질적인 것들을 발견해 내고 발명해 내고 결국 그것의 허술한 경계마저 파괴하고 뚫고 나와 세상에 숱한 '자기'를 전염시켰다. 페소아의 복수의 이름들은 그러한 것의 단적인 예증이었다. 저마다 다른 캐릭터로 다른 음조와 속도로 이야기하는 것들에 사람들은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포섭되었다. 말도 안되는,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목소리들이 이야기하는 것들에는 각각의 진실이 함유되어 공명했다.



오늘 나의 일부가 줄어들었다. 오늘의 나는 이전의 나와 같지 않다. 사무실 사환 아이가 떠났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우리 안에서 일어난다. 우리가 보는 곳에서 없어지는 것은 우리 안에서도 없어진다. -[불안의 책], 텍스트 279 * 김한민 <페소아>에서 재인용


내가 두고 온 풍경들은 내가 떠나온 그 자리에서 고스란히 하루 하루를 소진하고 있을까, 반문하면 묘한 기분이 들곤 했다. 왠지 내가 떠나왔으니 그곳도 더이상 실재하지 않을 것만도 같았다. 아쉬운 작별 인사, 서글픈 잔상들의 무게가 조금이라도 감해지지 않으려면 왠지 내가 떠난 그곳은, 나를 떠난 그들은 나와 함께 어딘가로 날아가버려야 마땅할 것만 같다. 페소아의 예리한 언어의 화살은 그 흐리멍덩했던 언어로 채집되지 않고 흩어져 버리는 막연한 것들을 다시 소환하여 정렬시킨다. 바로 그거였다. 그가 말함으로써 비로소 분명해지는 것들. 


죽기 하루 전 그가 남겼다는 마지막 문장은 누구에게나 오늘 유효하다. "나는 내일이 무엇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견디고 산다. 페소아처럼 위대해지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나름대로의 저마다의 텍스트를 자신의 생에 아로새기는 일이기에 함부로 포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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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게 간절히 원하는 삶은 익숙한 풍경속에서 헤매지 않고 당황하지 않고 안정감 있게 능란하게 모든 일들을 처리하는 것이지만, 익숙해질 만하면 그 지반이 흔들릴 일이 다가오곤 했다. 이 동네가 좋아질 만하면, 더이상 낯선 길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성인 여자의 미숙함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면, 영락없이 또 새로운 풍경이 밀고 들어온다. 나에게는 순발력이 없고 삶은 관성과 멀다. 그러니 이 간극은 영원히 좁혀지지 않으려나 보다.


분석 과정에서 얻은 새로운 태도는 머지않아 어떤 식으로든 부적절해지는 경향이 있고 반드시 그렇게 된다. 지속적인 삶의 흐름은 거듭 새로운 적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적응은 결코 최종적으로 성취되지 않는다. 

                                                     -앤서니 스토 <처칠의 검은 개 카프카의 쥐>














"적응은 결코 최종적으로 성취되지 않는다."는 융의 얘기는 절망적이지만 안심이 된다. 그렇다면 나만 그런게 아니었구나. 적응은 신기루다. 도달했다고 믿으면 그것은 사라진다. 그것이 삶의 양태인 셈이다. 저자 앤서니 스토는 정신분석학자이자 정신과 의사다. 그는 "결코 만난 적 없는" 처칠과 카프카와 뉴턴의 성격 연구를 행한다. 그것은 그 자신이 말한 것처럼 위험하고 모호하고 논쟁적이다. 살아서 항변할 이가 없는 일방적인 판단과 분석은 그래서 모순적이고 불완전하지만 앤서니 스토의 그것은 그 한계 안에서 생생하고 예지적이고 통찰력이 있다. 이 세 명의 고독한 인물들이 빛나는 성취를 이루는 과정에서 충족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정신과 의사의 예리한 분석은 개별적이지만 평범한 우리들이 삶을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보편적인 각성의 단초들을 제공해 준다.


처칠도 카프카도 뉴턴도 유년 시절 모친과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하는 데에 실패한다. 이 결손은 자존감의 원천 자체를 내면이 아닌 외부의 성취에 의한 대중들의 지지와 인정에서 찾게 하는데 일조를 담당하고 역설적으로 고독하고 우울했던 그들의 결핍은 역사에 남을 업적을 향한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승화된다. 


'예술적 관심'도 사실이 아닙니다. 실은 모두 틀렸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틀린 말입니다. 나는 문학에 관심이 있는 게 니라 문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나는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다른 어떤 것일 수가 없습니다.


연인 펠리체에게 한 카프카의 고백은 하나의 문학적 텍스트다. "문학으로 만들어져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작가가 쓴 글을 읽는 일에 대하여 생각한다. 그가 사라지고 남은 시간들을 사는 일에 대하여 고민한다. 그것은 함부로 얘기되어지거나 불평할 부수적인 일이 아닌 것 같다. 뉴턴의 이야기도 그렇다. "나는 그 문제를 밀쳐두지 않고 계속 붙들고 있으면서 최초의 여명이 서서히 차츰 그득하고 분명한 빛으로 이어질 때까지 기다린다." 그 과정에 가족이나 친밀한 관계는 없었다. 


어쩌면 이러한 우울들과 많은 고독들은 한 성인의 건강한 삶의 초상의 구도로는 적합치 않지만 하나의 기여, 빛나는 성취 앞에서는 필수불가결한 희생이자 재료였을지도 모르겠다. 건강한 삶, 온전한 정신에 대한 청사진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상지이자 

허구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평범한 나에게 완전한 적응은 영원히 먼 일일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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