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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의 집
권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래전 그곳에 삼악산이 있었다."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차곡차곡 읽는다. 강원도 춘천의 실제 삼악산일까,는 중요치 않다. 권여선의 묘사의 힘은 그녀가 만드는 그 가상의 세계를 진짜처럼 보여줄 테니 말이다. 지리적 배경은 삶의 층위로 치환된다. 높고 가파른 곳은 험하고 거칠다. 낮고 넓은 지대는 풍요롭다. 그 가운데에 자리한 '우물집'은 어쩐지 좀 애매하다. 풍요롭지도 극도로 궁핍하지도 않다. 그래서 이야기가 생겨날 여지가 피어오른다. '우물집'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세를 놓아 재미를 보았던 주인집 순분은 아들 금철, 은철 또래의 두 딸 영, 원과 무언가 수상쩍은 남편을 대동하고 나타난, 처지에 맞지 않는 활달한 필체를 지닌 '새댁네'로 인해 아연 새로운 서사로 진입하게 된다.
'우물집'의 둘째 아들인 은철은 어린이의 관찰자적 시선으로 삼벌레 고개의 온갖 인물과 그 인물들이 엮어내는 역동적인 이야기를 묘사한다. 없는 살림에도 생의 의지는 활기를 띠고 그 활기는 드문드문 질곡어린 나날에 눈부신 빛을 비춘다. 거침없이 이웃들의 속사정을 염탐하고 자기식대로 재해석하여 얼마간의 악의와 호기심으로 왜곡하여 떨어대는 여자들의 수다는 구수하지만 결국 순분이 겪게 되는 온갖 고단한 고난의 전조가 되기도 한다. 무언가를 쉽게 내뱉을 때 그것은 천만 배의 무게로 다가오는 경험을 맞닥뜨리게 되는 삶의 엄중한 심판은 시대의 이념을 둘러싼 비극과 만난다.
권여선의 언어는 그 자신의 겸손한 실패의 고백과는 달리 그 어떤 본질에 마침내 닿아 빛난다. 이를테면
그 순간 은철은 알게 되었다. 지동순 할매가 소리 소문 없이 삼벌레고개를 떠난 이유를. 할매는 평상 위에 오롯이 새겨진 뚜벅이할배의 없음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오고갈 때마다 할매만 보면 벌떡 일어나던 그 할배의 없음을, 강한 부재의 힘을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p,197
그'없음'을 견디지 못한다,는 말은 폐부에 와 박힌다. 시간의 고랑마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잃는다. 그 상실이 '없음'으로 표현될 때 가슴을 할퀸다. 그렇게 찾아 헤매이던 슬픔의 지점을 그녀는 정확히 조준하여 언어로 낚아챈다. 말해지면 때로 낫는다. 내가 어쩌지 못했던 그 수많은 어쩔수 없었음이 해명되는 순간 가슴이 떨린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할매를 할배는 황송해하며 그 있음에 감읍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할배가 벌떡벌떡 일어나던 순간들의 비의를 할매는 아마 알았을 것이다. 알았기 때문에 할매는 이제 그 할배의 '없음'을 감당할 수 없다.
결국 수많은 생의 환희는 시간과 삶의 가혹한 일탈을 이겨내지 못하고 모두를 떠나게 한다. 성장으로 삶의 그 끈질긴 견디는 힘으로...그 끝에서 서성이는 마음이 시리다. 내 안의 어린이는 아직도 다 자라나지 못했고 그 어린이는 이럴 때 다시 걸어나온다. 슬픔만은 아니지만 언제나 그 되새김은 얼마간 감당해야 하는 없음 앞에서 돌연 아연해진다.
아름답지만 분량에서 다 되지 못한 이야기가 아쉽다. 결국 이 이야기도 시간과 지면의 제한을 뚫고 나와 저마다의 확장으로 이어져야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