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집 근처 마트 앞에서 쇼핑 카트 구역에서 카트를 꺼내려다 안타까운 모습을 보게 됐다. 휠체어를 탄 할아버지를 한 켠에 두고 쇼핑 카트까지 같이 감당하려니 속수무책으로 보이는, 본인이 오히려 부축을 받아야 할 것 같은 할머니가 좀처럼 입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어 도와드렸다. 별일도 아니었는데 할머니는 그런 도움을 받는 일에 어떤 부담을 느끼는 듯했다. 분명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도저히 장을 보지 못할 것 같은 노부부는 그렇게 넓은 마트 입구 채소 코너 부근에서 또 한참이나 채소를 고르는 일, 그것을 담을 봉지의 입구를 여는 일, 동시에 기력이나 의식이 희미해 보이는 할아버지를 챙기는 일 등을 놓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마음 한 켠이 싸하게 아파왔다. 시간이 지나가면 누구나 서서히 생의 에너지, 기력을 속도차가 있겠지만 결국 잃게 되고 젊은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는 일상의 생존을 영위하는 일이 힘들어지는 날을 만나게 된다. 그러한 모습은 먼저 우리의 부모님으로부터 경험하게 된다. 그 마지막으로 가는 힘겹고 유쾌하지 않은 길이 생의 후반부를 통과하고 있다는 자각은 언제나 씁쓸하다. 도망갈 수 없다. 그게 어떤 과정이 아니라 마침표를 찍는 종결부를 이룬다는 사실은 더욱 잔인하게 느껴진다. 모든 생의 무의미가 수렴되는 구간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찬란한 나날도 결국은 그렇게 쓸려간다.


















개인적으로 필립 로스의 작품 중 가장 감동적으로 읽었던 <Patrimony>의 번역본이 드디어 나왔다. 필립로스의 <에브리맨>의 색채를 그의 자전적인 아버지와의 이야기로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여든 후반의 유대인 아버지의 마지막 죽음과의 투쟁 이야기에 동행하는 필립 로스 자신의 이야기는 언제나처럼 그의 날카롭고 투명하면서도 위트를 잃지 않는 문장들로 투명하게 빛난다. 누구나 젊고 당당하고 자신보다 훨씬 컸던 부모님으로부터 자신보다 훨씬 약해지고 작아지며 결국 소멸해버리는 그 아픈 과정을 동행해야 된다는 잔인하지만 도망갈 수 없는 현실이 필립 로스의 목소리로 다시 살아나면 존경하는 노교수로부터 삶의 비의를 들으며 전율하게 되는 학생이 된 느낌을 받게 된다. 우리는 감히 언어로 끄집어 낼 수 없었던 그 숱한 부모, 삶에 대한 원형질의 애증이 언어로 결집되면 어떤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된다. 누구나 결국은 삶의 전장에서 죽음으로 향한 퇴로를 힘겹게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부모님의 죽음과 그 의연한 삶과의 투쟁은 스러지지 않고 후대로 결국 하나의 판단, 감정의 준거로 남게 된다.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우리의 다음 세대들도 그러할 것이다. 삶과 죽음을 통과하며 남기는 잔해는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그것은 죽을 줄 알면서도 결국은 사는 일일 것이다. 여기에서 의미와 가치를 논하는 것은 어쩌면 오만이다. 무엇이 생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는 결국 아무도 답할 수 없다. 하루 하루를 영위하며 생으로 담는 일은 그러한 것의 너머에 있다. 젊고 활력에 넘치는 독립적인 삶이 삶의 전범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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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3 06: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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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5 04: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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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5 07: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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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6 12: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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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3 08: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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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5 0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불운은 교통사고처럼 온다. 예측할 수도 없고 완벽하게 예방할 수도 없다. 오늘의 지루했던 일상은 급작스런 균열로 위태롭게 흔들린다. 지루했던 안온했던 일상은 간절한 기다림의 대상이 된다. 인도계 미국인 작가 아킬 샬마에게 닥친 위기는 그 규모나 파장이 잔인하도록 컸다. 힘든 이민자 가정에 든든한 지지 역할을 했던 형은 명문고 입학을 앞두고 수영장 사고로 의식을 잃게 된다. 말할 수도 웃을 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없는 시간들은 산처럼 버티고 서서 작가의 가족의 거의 반생을 지배하게 된다. 자전적인 이야기 속의 소년은 형의 사고 이후로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린다.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했을 때 동생을 도와주려 분투했던 형은 의식 없이 아기처럼 누워 자신이 만들어 낸 불행의 무게를 실감하지 못한다. 그래도 끝끝내 가족은 버티고 형의 회복 대신 좋은 성적을 기도해 엄마에게 야단을 맞았던 어린 동생은 미국에서 어엿하게 자리를 잡고 작가로도 성공하게 된다.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러나 자신의 이야기에는 대단한 플롯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역경 속에도 아름다운 것이 있다고 독자들에게 이야기한다. 그의 이야기는 그의 삶과 떨어질 수 없고 그러한 그의 성취는 읽는 이에게 건너가 다른 형태로 부활한다. 누구나 성장통을 겪는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러한 고통을 내재화하는 것이다. 잠잤던 눈물은 다시 깨어나 흐른다.


















짧은 그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다 어느 정도 불운하다. 결혼에 실패하고 때로 가까운 사람에게 이용 당하고 가족이 죽는다. 그런 상황은 대단히 불행할 것도 같은데 또 그렇지도 않다. 어떤 나쁜 일에도 반드시 조금쯤 좋은 구석이 있고 그것은 주인공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불운을 곱씹으며 울며불며 절망에 추락하는 인물은 없다. 어떻게든 그들의 삶은 계속되고 예쁜 구석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이야기가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니다. 미국에 이민 와서 알콜중독으로 고생하다 원가족에게 돌려보내져 설명할 수 없는 죽음을 맞게 된 엄마를 둔 아이는 자신의 내면에 차오르는 슬픔을 부정하다 어느 순간 그것이 눈물이 되어 넘쳐 흐르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You are happy?>는 페미니즘은 설득하거나 설득당하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존재하는 것들에 눈을 돌리지 않을 때 저절로 우러나올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가정주부가 주변의 여자들에게 당신은 진짜 행복하냐,고 묻는 행위 자체가 일탈로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아직도 이 지구상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보는 순간 그것은 논리나 정당화를 넘어서는 현실의 조각이 될 수 있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삶을 여행으로 비유한 첫번째 이야기로 다시 돌아온다. 늙은 남자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부끄럽기도 하고 불확실하기도 하다. 그러나 문득 그는 그의 낡은 자동차가 부식된 모습에서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생을 본다. 우리도 그와 같다,고 느끼니 별 거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다시 사랑하는 그 여자에게 노크한다. 왠지 그래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 그 과정에 절로 설득된다. 무언가를 갑자기 결행하게 될 때, 그것은 아주 사소한 깨달음이나 전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삶이 인생이 시간에 잠식당해 결국 사라지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에서 다시 앞으로 걸어나가게 되는 그 과정이 바로 하루 하루가 연결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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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부모 밑에 있을 때가 좋은 거야."

오늘 새벽 아침인가 해서 일어나 핸드폰 액정을 확인해 보니 아직 새벽 다섯 시라 다시 잠들기도 그렇다고 깨기도 곤란한 시간이라 생각했을 때 마침 이 말이, 엄마가 습관처럼 하곤 했던 말이 떠올랐다. 뜬금없이.


정말인 것같다. 결국 모든 선택, 언행이 도착했던 곳으로부터 다시 나로 올 것이라는 책임을 자인하는 나이는 무섭고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다. 아무도 내 대신 책임지거나 변명하거나 합리화해 주지 않는 나이, 골짜기 같은 나잇대로 진입하고 있다. 아직 캄캄해서 그런가 다시 어려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불가능하지만. 그리고 또 뜬금없이 윤흥길의 <장마>를 읽고 싶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 이야기 속 아이는 빗소리 속에 평상에 누워 주변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듣는다. 모든 위험하거나 대단한 이야기는 나를 그저 스치고 지나가는 나이. 그 시간은 아프도록 짧다. 내 기억이 틀렸대도 그런 풍경을 꿈꾸는 것만으로도 나는 다시 행복해진다. 비가 내리고 가족이 모두 아직 젋고 건강하고 나를 지켜줄 수 있는 나이. 나는 그저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충분한 그런 시간들. 작가의 의도는 분명 그런 것이 아니었대도 괜찮다. 내가 기억하는 <장마>는 그렇게 왜곡되어 들어와 있다.


















이제 그런 시간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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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놀이 2017-11-09 06: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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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댓글도 괜찮으시다면 답은 안주셔도 좋겠습니다. 저도 어린날 그런 풍경 하나를 떠올려보았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십 대에 이미 육십 대에 접어든 조각가 로댕의 사방에서 밀려드는 우편물들을 정리하고 답장을 쓰는 비서 역할을 했던 적이 있다. 자신의 분야에서 신화적인 존재가 된 예술가를 흠모한 청년 릴케는 그에게서 예술을 대하는 자세와 방식을 배우지만 상대적으로 삶과 죽음과는 유리된 현실부적응자로 다시 현실에 부딪히며 예술의 멘토와는 다른 관점에서 인생을 알아가며 위대한 시인이 되어가는 길을 걷게 된다. 이 과정에서 둘은 불화와 결별, 재회 등 굴곡 많은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예술에서의 성취는 반드시 삶의 성공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 둘의 대비되며 교차하는 이야기로 알 수 있다.  언어가 빚어낸 삶의 비가와 섬세하고 처절한 터치가 완성해 낸 빛나는 조형물들의 틈새에는 미처 다하지 못한 가족으로서의 도덕적 책무들, 기본적인 배려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들이 남기고 간 예술적 성취는 지금도 남아 삶의 온갖 책무에 너덜해진 우리들의 마음에 큰 위안이 되고 있지만 정작 이러한 성취를 가능케 한 가족들의 희생은 기억으로도 남지 않았다. 사실 사는 일은 그런 것이 아닌데 말이다. 매일을 아름다운 시로 채우고 눈부신 조각으로 연인을 감동케 하는 드라마는 현실을 딛고 있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이러한 담담함에 더 수긍이 간다. 대단한 드라마로 비장미가 가득한 그런 과장이 공허한 수사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 진짜 이야기. 결국 시간의 결이 모든 것을 훑고 가 삶의 이야기로 실을 잣는 그러한 이야기. 그것은 그러한 삶을 살아내고 그것을 이해한 사람만이 설득력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가 예순아홉 살이 되어 살아남은 자라는 지위를 확인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고개를 끄덕여 그것을 받아들였다. 사실이라고 느꼈다. 살아남은 자가 된다는 것은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무엇이었다.

-윌리엄 트레버 <루시골트이야기>















팔십 여년에 걸친 이야기. 아일랜드 역사의 격동은 한 가족의 평범한 소망과 일상의 행복을 흔들지만 그것을 전적으로 파괴하는 드라마로 치닫지 않는다. 언제나 시간은 사건은 그 안의 삶을 쓸고 지나가지만 생과 삶의 지축을 전적으로 좌지우지하거나 단편적이고 정합적인 스토리로 수렴하지 않는다. 누군가의 서사로 쓸어담아 완결되는 것은 삶이 아니라 그저 우리가 말하고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다행히 <루시골트이야기>는 그렇지 않다.


누구도 서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루하루가 지나가는 게 그렇듯이. 어떤 날이든 그 속의 시간은 서둘지 않고 지나가니까. 그걸 보고 배우면 된다. 서둘 필요 없다.

-<루시골트이야기>


그런 의미에서 서둘지 말자. 하루하루 속에 삶 전체가 나의 전 존재가 담뿍 담겨 있을 테니 천천히 하루하루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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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열심히 공부했지만 수학을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어를 이십오년 동안 했지만 쏟아부은 노력과 시간에 비해 소통의 수준은 낮다. 나라는 인간은 효율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고비용 저효율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듯하다.

















오직 언어의 세계에서만이 아마추어가 가치를 발휘한다. 실수가 가득하다 해도 좋은 의도의 문장은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

-롬브 커토 <언어공부> 중


그런 의미에서 마흔에 유럽으로 이주한 윤이상이 <생의 한가운데>의 작가 루이제 린저와 독일어로 나눈 대담은 놀랍다. 그녀는 머나먼 동방의 나라에서 온 이국의 음악가의 질곡어린 삶과 도교적 정신 세계,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그것이 엮어낸 음악적 성과에 대하여 깊고 넓고 진실되게 이해하고 있다. 둘 사이의 대화에서 언어의 벽은 온갖 지엽적이고 형식적인 것들을 걸러내는 고결한 체로 작용할 뿐이다. 무언가를 유창하고 쉽게 이야기했다고 해서 상대가 더 많은 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아닌 것같다. 모국어로 소통하는 가족이 대화를 통해 남기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통이나 이해라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정답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윤이상이 투옥 중 감옥의 건너편의 대학생과 언어가 아닌 수신호만으로 우정을 나눈 이야기는 소통은 진정성이 있을 때 모든 것을 뛰어넘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루이제 린저와 윤이상의 대화는 윤이상의 태몽으로부터 연대기적으로 시작된다. 그의 어머니가 꾸었다는 상처입은 용의 꿈은 그의 운명의 파고를 예고한 듯하다. 아름다운 최남단의 어촌 통영에서의 어린 시절의 회고는 그림 같은 정경이다.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세시 풍속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윤이상과 남다른 이해와 관심으로 호응하는 루이제 린저의 대화가 뜻하지 않게 이국에서 나이들어가는 나를 촉촉하게 적신다. 자꾸 눈물이 났다. 어부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자란 소년은 그의 동양적 원천을 잊지 않고 자신의 창작에 주춧돌로 놓는다. 고국과 동포에 대한 사랑은 그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온 것이지 작위적이거나 인위적으로 상기하거나 끼워놓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은 엉뚱한 식으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엄혹한 박정희 정권은 시대의 특수성과 당시 독일연방공화국의 상황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이념적으로 재단하여 그를 가족과 떨어뜨려 강제로 고국으로 송환하여 짐승보다 못한 고문으로 강제자백을 강요하게 된다. '동백림(동베를린) 사건' 당시 해외에 있던 수많은 학자와 지식인들은 꿈에도 그리워하던 고국에 영문도 모르는 채 돌아와 자신들의 의도와는 다른 차원에서 설명된 억지 프레임안에서 과거의 행적을 해석당한다. 정작 그들을 구한 것은 고국이 아니라 생업이나 일을 위해 잠시 경유하거나 적을 두었던 이국이었다. 윤이상은 책상 하나 없는 옥중에서 기약없는 감금생활 중에도 작곡을 하며 자신만의 창작의 세계에서 고귀한 자유를 맛본다. 이미 그는 죽음을 넘어섰다. 사랑했던 나라와 사람들이 자신을 철저히 배신했다는 그 잔인한 현실도 그의 존재 전체를 구속하지는 못한다. 우주의 광활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자신의 존재의 미약함을 의식하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의심하지 않는 그의 도교적 깨달음은 현실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루이제 린저는 최선을 다해 그러한 그의 의식과 깨달음을 이해하려 고개를 숙인다. 그녀의 진지함과 겸손함, 성실성은 윤이상과 같은 민족인 나의 이해도와 정서를 뛰어넘는 것이어서 부끄러웠다.


윤이상이 마지막을 보내고 싶다고 염원했던 고국에의 귀환은 미완인 채로 남았다.  그를 끝까지 구속했던 유교적 가치관인 장자로서 선대의 묘를 돌보려 했던 책임감도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고국의 산천도 그의 영면의 터가 되지 못했다. 그를  사지까지 몰고가 핍박했던 시대적 격랑은 아직도 완벽히 투명하게 해명되지 않았고 그를 가두었던 생각지도 않았던 이념의 틀은 여전히 분단의 틀에서 잊을 만하면 다시 악몽처럼 부활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그의 삶을 존중하는 일은 아직도 수많은 인간들의 탐욕과 아집으로 끊임없이 뒤로 물러난다.


소년은 아버지 몰래 밤에 바닷가 절벽으로 기어올라가 별의 노래를 듣곤 했다. 때로 별은 공명판이 되어 어부들의 밤노랫소리를 전해주었다. 그 노래는 죽을 때까지 소년의 마음에서 울려 그가 만든 음악의 시원이 되어주었다. 그 바닷가에 다시 돌아올 수 없었던 소년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안에 남아 있었던 그 다 불러지지 못했던 노래는 오래도록 남아 그 소년이 살아내야 했던 숱한 시련을 이겨내는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노래는  유한한 생을 뛰어넘어 영원이 되었다.


영원은 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인간이 죽을 뿐이지요....

-윤이상


그의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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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7-10-22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윤이상을 ‘알쓸신잡‘에서 처음 들었어요.
무식이 탄로.....
본편에 잠깐 언급되었다가 나중에 감독편에 윤이상 이야기 하면서 작품을 듣는데, 충격적이더라구요.
100년 안에 현대음악의 거인으로 인정받을 것이라는 유희열의 말이 이해되기도 하구요.

언제나 그렇지만, 잘 읽고 갑니다^^

blanca 2017-10-24 01:54   좋아요 0 | URL
아, 알쓸신잡에 윤이상 이야기가 나왔었군요. 이념에 관련된 부분은 여전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아 윤이상에 대한 국내 평가는 아직도 잊을 만하면 색깔론으로 가서 참 안타까워요. 저는 현대클래식은 아직 귀에 잘 안 들어와서 솔직히 윤이상의 음악적 성과를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해 아쉬워요. 유희열은 작곡을 공부한 사람이니 그의 얘기가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읽어주셔 감사합니다.^6^

stella.K 2017-10-23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낸만이어요. 왤케 뜸하십니까?

blanca 2017-10-24 01:55   좋아요 0 | URL
시간은 빨리도 흐르는데 왜이리 챙기지 못하는 것들이 많은지... 벌써 2017년도 두 달 남짓 남았는데 쓰는 일도 손 놓으니 안 쓰게 되네요...읽기는 읽는데 읽은 것도 없는 것 같고. 좀 분발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