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을 열심히 공부했지만 수학을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영어를 이십오년 동안 했지만 쏟아부은 노력과 시간에 비해 소통의 수준은 낮다. 나라는 인간은 효율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고비용 저효율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듯하다.
오직 언어의 세계에서만이 아마추어가 가치를 발휘한다. 실수가 가득하다 해도 좋은 의도의 문장은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다.
-롬브 커토 <언어공부> 중
그런 의미에서 마흔에 유럽으로 이주한 윤이상이 <생의 한가운데>의 작가 루이제 린저와 독일어로 나눈 대담은 놀랍다. 그녀는 머나먼 동방의 나라에서 온 이국의 음악가의 질곡어린 삶과 도교적 정신 세계,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그것이 엮어낸 음악적 성과에 대하여 깊고 넓고 진실되게 이해하고 있다. 둘 사이의 대화에서 언어의 벽은 온갖 지엽적이고 형식적인 것들을 걸러내는 고결한 체로 작용할 뿐이다. 무언가를 유창하고 쉽게 이야기했다고 해서 상대가 더 많은 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아닌 것같다. 모국어로 소통하는 가족이 대화를 통해 남기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통이나 이해라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정답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윤이상이 투옥 중 감옥의 건너편의 대학생과 언어가 아닌 수신호만으로 우정을 나눈 이야기는 소통은 진정성이 있을 때 모든 것을 뛰어넘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루이제 린저와 윤이상의 대화는 윤이상의 태몽으로부터 연대기적으로 시작된다. 그의 어머니가 꾸었다는 상처입은 용의 꿈은 그의 운명의 파고를 예고한 듯하다. 아름다운 최남단의 어촌 통영에서의 어린 시절의 회고는 그림 같은 정경이다.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세시 풍속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윤이상과 남다른 이해와 관심으로 호응하는 루이제 린저의 대화가 뜻하지 않게 이국에서 나이들어가는 나를 촉촉하게 적신다. 자꾸 눈물이 났다. 어부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자란 소년은 그의 동양적 원천을 잊지 않고 자신의 창작에 주춧돌로 놓는다. 고국과 동포에 대한 사랑은 그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온 것이지 작위적이거나 인위적으로 상기하거나 끼워놓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은 엉뚱한 식으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엄혹한 박정희 정권은 시대의 특수성과 당시 독일연방공화국의 상황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이념적으로 재단하여 그를 가족과 떨어뜨려 강제로 고국으로 송환하여 짐승보다 못한 고문으로 강제자백을 강요하게 된다. '동백림(동베를린) 사건' 당시 해외에 있던 수많은 학자와 지식인들은 꿈에도 그리워하던 고국에 영문도 모르는 채 돌아와 자신들의 의도와는 다른 차원에서 설명된 억지 프레임안에서 과거의 행적을 해석당한다. 정작 그들을 구한 것은 고국이 아니라 생업이나 일을 위해 잠시 경유하거나 적을 두었던 이국이었다. 윤이상은 책상 하나 없는 옥중에서 기약없는 감금생활 중에도 작곡을 하며 자신만의 창작의 세계에서 고귀한 자유를 맛본다. 이미 그는 죽음을 넘어섰다. 사랑했던 나라와 사람들이 자신을 철저히 배신했다는 그 잔인한 현실도 그의 존재 전체를 구속하지는 못한다. 우주의 광활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자신의 존재의 미약함을 의식하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의심하지 않는 그의 도교적 깨달음은 현실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루이제 린저는 최선을 다해 그러한 그의 의식과 깨달음을 이해하려 고개를 숙인다. 그녀의 진지함과 겸손함, 성실성은 윤이상과 같은 민족인 나의 이해도와 정서를 뛰어넘는 것이어서 부끄러웠다.
윤이상이 마지막을 보내고 싶다고 염원했던 고국에의 귀환은 미완인 채로 남았다. 그를 끝까지 구속했던 유교적 가치관인 장자로서 선대의 묘를 돌보려 했던 책임감도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고국의 산천도 그의 영면의 터가 되지 못했다. 그를 사지까지 몰고가 핍박했던 시대적 격랑은 아직도 완벽히 투명하게 해명되지 않았고 그를 가두었던 생각지도 않았던 이념의 틀은 여전히 분단의 틀에서 잊을 만하면 다시 악몽처럼 부활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하고 그의 삶을 존중하는 일은 아직도 수많은 인간들의 탐욕과 아집으로 끊임없이 뒤로 물러난다.
소년은 아버지 몰래 밤에 바닷가 절벽으로 기어올라가 별의 노래를 듣곤 했다. 때로 별은 공명판이 되어 어부들의 밤노랫소리를 전해주었다. 그 노래는 죽을 때까지 소년의 마음에서 울려 그가 만든 음악의 시원이 되어주었다. 그 바닷가에 다시 돌아올 수 없었던 소년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안에 남아 있었던 그 다 불러지지 못했던 노래는 오래도록 남아 그 소년이 살아내야 했던 숱한 시련을 이겨내는 자양분이 되어 주었다. 노래는 유한한 생을 뛰어넘어 영원이 되었다.
영원은 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인간이 죽을 뿐이지요....
-윤이상
그의 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