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채 그의 방대한 자서전을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과학자로서의 그의 학문적 성과에 대한 체계적 이해나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그것을 이야기하는 필력에 대한 감상은 아쉽게도 부족한 상태로 출발했다. 다만 올해 일흔다섯이 된 그 자신이 회고하는 그의 삶 전반에 대해 그리고 분명 중간중간 끼어들 흥미로운 일화들, 그의 사상에 대한 개관이 궁금했다.
1권의 표지와 2권의 표지 사진의 대조가 인상적이다. 젊은 도킨스는 측면을, 나이 든 도킨스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세계관에 가지는 자신감의 깊이와 관련있어 보인다. 나이 든 도킨스는 불가지론자가 아니다. 그는 확신한다. 무신론의 세계와 인간이라는 생물이 가지는 개체적인 위치가 대단히 유의미하거나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도킨스의 아버지가 영국 식민지 공무원이었던 까닭에 그의 유년시절은 특이하게 아프리카에서 펼쳐진다. 아버지 또한 옥스퍼드에서 식물학을 공부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연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공유한다. 이는 도킨스가 과학자로 자라나는 토양이 된다. 어머니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리처드 도킨스의 육아 일기를 충실히 기록하고 심지어 각종 일화들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남겨 아들이 자서전을 쓸 위치에 와서 유년을 복기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도킨스 집안 사내아이들의 전통에 따라 리처드 도킨스는 영국의 퍼블릭 스쿨에 진학하게 되고 경제적으로나 삶 전반에 걸쳐 큰 곡절이나 사건없이 옥스퍼드 교수가 된다. 비교적 참 운이 좋았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지하고 따뜻한 양친 부모 아래 교육적 열의의 수혜자로 좋은 교육 과정을 차근 차근 밟으며 일찍 과학적 학문의 전당에 입성하며 좋은 스승들, 교우들, 제자들, 조력자들을 만나며 오늘날의 리처드 도킨스가 된다.
사생활적으로도 어떻게 하다보니 결혼을 세번 하게 되었지만 지금의 아내인 여배우 랄라는 리처드 도킨스의 충실한 반려자가 되어 그의 삶을 더욱 따뜻하고 풍요롭게 만들어주게 된 듯하다. 무엇보다 그의 학문적 관심을 충실히 공유하고 그것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랄라의 지적,예술적 소양과, 그의 딸 줄리아를 남기고 암과 투병하다 떠난 전처의 곁을 끝까지 지킨 배려가 도킨스에게 큰 고마움으로 남은 것 같다.
그는 다윈의 열렬한 추종자다. 개체를 단순히 유전자의 운반체로서 일회적이고 필멸하는 존재로 확신한다. 그의 정원에서 씨앗을 사방에 뿌리는 버드나무의 모습은 유구한 역사 속의 유한한 존재가 경험하는 찰나적인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만드는 지침을 퍼뜨리고 있는", 즉 DNA를 발산하는 기계적인 개체의 일례로 비친다. 개체는 유의미한 영적 가치나 대의를 위하여 복무하지 않는다. 다만 더 큰 개체군의 세대를 가로지르는 유전자의 운반자로서만 확실히 기능할 뿐이다. 건조하고 차가운 대목이다.
하지만 영화 <콘택트>의 엘리 모델로 회자되는 NASA의 행성학자가 NASA의 무인탐사선에 고인이 된 스승의 재를 태워 보내 그가 생전에 이루지 못한 꿈을 달의 표면에 안착시키는 대목, 도킨스의 어린 딸이 생모의 죽음 앞에서 의연하게 버티며 열심히 노력하여 결국 의사가 되는 대목, 수시로 시를 읊고 때로 여러 사람 앞에서 그 시를 낭송하다 눈물짓는 장면은 그의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면모를 짐작케 한다. <총,균.쇠>의 저자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낡은 차를 끌고 나와 기대했던 근사한 식당 대신 대학 교정에서 빵을 잘라주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재구성하지도 대단히 드라마틱하거나 유의미해보이도록 포장하지도 않는다. 끊임없이 농담과 유머, 신랄한 풍자를 곁들여 서른다섯 살 <이기적 유전자>를 세상에 개시하며 화려하게 과학,언론, 문학계에 등장하면서 연이어 수많은 후계자들, 모방자들, 적을 배태하며 인간에 대한, 생물에 대한, 세계 그 자체에 대한 이해의 지형도를 재편하여 마침내 '죽음'과 삶에서의 '퇴장'을 이야기하는 여기에까지 이르렀다. 그의 이론을 그가 직접 키운 제자들이나 그의 저서들을 충실히 읽어낸 수많은 사람들이 가지는 이해도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여하튼 그가 기본적으로 인간과 그 인간에게 주어진 삶에 가지는 이해와 그 이해로 그린 관점의 깊이와 넓이가 가지는 의의에는 존경을 표하고 싶다. 종교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세계 각지에서의 폭력과 몰이해와 배타적 편견에 대한 우려도 공감한다. 하지만 리처드 도킨스가 존재의 복잡성과 존재의 무게로 수렴하는 그 모든 기계론적 이론을 지나치게 단 하나의 진리로 확정하는 태도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불가지론자라는 것이 자랑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떤 여지와 어떤 관용의 틈이 있다는 변을 하고 싶다. 과학적인 것과 논리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과 진화론과 무신론은 연속선의 스펙트럼에 자리할 수는 있지만 동의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입장은 유동적이고 배움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또 다른 가능성이 등장할 수도 있다고 믿고 있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유명한 과학자들의 일화, 그의 과학 이론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덧붙여지는 대목은 참으로 흥미롭다.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학생들을 앞에 두고 하는 것 같은 각종 조언도 유용하다. 끊임없이 호기심을 가지고 이 세계를 탐구하고 탐사하는 자세와 그 여정에서 동료, 스승, 제자와 너그럽고 친밀하게 협업하는 태도도 인상적이었다. 삶과 죽음 그 자체에 대한 그의 개인적 견해를 들을 수 없는 점은 아쉬웠지만 또 그답다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그렇게 개인의 의견을 설파할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도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