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딸과 이십대 정도로 보이는 남녀들이 커플로, 혹은 각자 혼자 온 (지금까지 거의 항상 어린이, 아기로 아비규환인 극장 관람이 대부분이었다.) 전혀 다양하지 않은 연령층의 관람객과 함께 영화를 봤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만화로는 <언어의 정원> 정도를 봤다. 그런데 역시나 일관되게 흐르는 독특한 정서가 있다. '시간'의 불가역성이 해체되는 부분이다.  시간의 자장 안에서 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과 일어나야만 했던 일들은 다른 차원에서 병존한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온갖 회한은 다 치유될 수 있다,는 환상이다. 죽은 사람들도, 헤어진 연인들도 결국은 다시 살아나고 만나고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은 다시 교환된다. 이게 환상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묘하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저마다의 상흔을 치유하는 역할이 있는 것 같다. 가만히 상상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때'로 다시 돌아가 땜질하고 고치고 끌어안고 뭐 이런.

 

동경에 사는 소년과 시골에 사는 소녀는 서로 몸을 바꾸고 서로의 삶을 관찰하고 개입하고 때로 수정한다. 나중에 그 둘은 서로의 시간이 동시에 흐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둘의 차원을 함께 공유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안타깝게 어긋나고 비껴가지만 결국은 감독이 바라는 대로 된다. 곳곳에 동일본 대지진으로 파괴된 것들에 대한 일본 국민들이 공유하는 특유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흔적이 느껴졌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는 것과 설정 자체는 조금 다르더라고 결국 한 마을이 파괴되고 그 마을 안에서 꿈꾸던 모든 것들이 사라진 과거를 다시 수정하는 대목에 대한 감흥은 그 깊이와 넓이 자체가 다를 것 같다.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다시 그 지점으로 돌아가 파괴될 것들을 지키려고 분투하는 소년, 소녀의 이야기가 파고들었다. 역사 속 가해자로서의 일본을 떠올린다면 이러한 이야기가 한없이 아이러니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는 지루하다,고 했고 아름다운 영상과 누구나 매혹당할 수밖에 없는 환상에 끄달린 엄마는 과거 어느 지점, 지점마다 그 아이들처럼 달려가서 고치기도 하고, 더 용기있게 행동하기도 하는 지극히 애니메이션적인 꿈을 꾼다. 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아이와 내가 함께 이 시간,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으로 수렴하는 이야기들을 해체하는 결과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모든 우연과 모든 곡절은 지금 여기로 수렴한다. 영화관에서 다시 불이 켜지는 순간, 잠시 동안 가졌던 모든 불가능에 대한 환상은 꺼진다. 나는 열네 살이 될 수 없고 지금 당장 삶의 모든 힘겨운 과제들을 완수한 팔순 노인이 될 수도 없다. 죽어버린 아이들을 다시 살릴 수도 없다. 지금 할 수 있는 일들도 오 초만 흘러도 비가역성으로 응고된다.

 

사는 일은 참으로 알 수 없다. 결국 시간은 모든 가능성을 불가능성으로 닫아 버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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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7-01-12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이들과 이 영화 봤어요.
아이들은 조금 시쿤둥(아마도 어려웠을거라고 추측)했고 저는 몰입해서 봤어요.

blanca 2017-01-12 18:22   좋아요 0 | URL
현준이와 아마 제 딸이 동갑이거나 한 살 어린가 그랬던 걸로 기억나요. 정말 시큰둥하고 재미도 없었다고 막...어린이나 청소년 정서는 아닌 것 같아요. 감독이 어떻게든 사랑이 꼭 이루어지게 결론을 내는 편이라 저는 오히려 아주 가슴 아픈 이별의 사연이 있는 건 아닌가 혼자 생각 중이에요.^^

꿈꾸는섬 2017-01-12 18:23   좋아요 1 | URL
현수와 분홍공주님이 동갑이죠.ㅎㅎ

서니데이 2017-01-12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더 늦기전에 보고 싶어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blanca님, 좋은하루되세요.^^

blanca 2017-01-12 18:22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도 보시면 좋아하실 듯해요. 잔잔하고 아름답고... 오늘은 비교적 괜찮은 하루였습니다. 감사합니다.

moonnight 2017-01-12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너무 감정적이 될까봐 두려워서 못 보겠어요ㅠㅠ;;; 후유증 걱정ㅠㅠ;;;;;;

blanca 2017-01-13 18:51   좋아요 0 | URL
좀 감정적이 되어도 괜찮아요. 이게 한 해 한 해 감성이 달라지니 감성이 풍부한 그 시간을 누리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서른 즈음에 저는 애니메이션만 보면 눈물 한 바가지를 쏟았던 기억이 나요. 아주 오열을... 그런데 이제는 그러한 시간들조차 그리워져요...점점 그 말랑말랑하던 부분이 단단해져 가더라고요.
 

"나는 거의 팔십 년간 글을 써왔다."

 

- 존 버거 <자화상> 중 -Axt

 

처음에는 잘못 읽은 줄 알고 드러누웠던 몸을 다시 일으켰다. 존 버거였다. 그는 구십이 되었고 여기에서는 아직 살아 있지만 여기에서 나간 세상에서는 결국 한 세기를 완성하지 못하고 떠나가게 되었다. 평균적인 사람들의 수명을 생각한다면 장수한 편에 속하지만 유구한 역사를 놓고 본다면 역시 짧다. 나는 존 버거를 알지 못한다. Axt 안에서 그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를 번역한 번역가 김현우는 전업 번역가가 아니지만 그에게 존 버거는 각별하다. 때로 전체 안에서의 비율로 무언가를 설명하려다 보면 오해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 번역가의 본질에 그 자신이 사랑하고 경외를 느낀 작품과 작가가 오롯이 자리잡은 느낌이 영롱하다. 실제 존 버거를 대면하고 자신이 그를 번역한 시간의 의미와 의의를 술회한 대목에서 이러한 자부심이 드러난다. 팔십 년간 글을 쓴 작가와 그러한 그의 언어 뒤편에 놓이는 세상에 대한 시선의 본질까지 짐작하며 다른 언어로 성실히 열정적으로 옮겨 놓은 그가 어우러져 또 다른 차원의 예술을 완성해 낸다.

 

 

 

 

 

 

 

 

 

 

 

 

 

 

내처 존 버거와 틸다 스윈튼이 함께 찍은 <사계>라는 다큐멘터리를 찾아 보게 되었다. <The Seasons in Quincy: Four Portrait or John Berger>다. 배우 틸다 스윈튼을 포함한 네 명의 감독이 존 버거가 사는 프랑스령 알프스의 작은 마을 퀸시에 가서 찍은 다큐다. 이것은 존 버거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존 버거는 하나의 구심체로서 역할하며 더 크고 깊은 차원의 경지까지 이야기를 확대한다.

 

 

 영화배우 틸타 스윈튼은 존 버거와 서른네 살의 나이차가 있지만 생일이 같고 아버지가 군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녀와 존 버거의 대화는 담백한  울림이 있다. 둘 다 아버지와의 추억을 이야기하지만 그 추억을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아버지가 자녀들과 함께 하지 못한 그 사라져 버린 숱한 아버지들의 이야기들을 아쉬워할 뿐이다. 틸다 스윈튼의 아버지는 다리를 잃었다. 그는 한 다리로 네 남매를 키웠다. 담담하게 그러한 아버지를 이야기하고 또 그러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 존 버거의 모습이 아름답다. 우리는 흔히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노인과 그 이야기에 심드렁한 젊은이의 풍경을 본다. 존 버거는 듣는 데에서 이야기가 나온다고 고백했던 이야기처럼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 기울인다. 이 다큐는 존 버거의 것이라기보다는 존 버거와 함께 함으로써 나오는 생명의 순환,자연의 리듬, 노동, 죽음을 둘러싼 모두의 진지한 이야기다. 아름다운 전원의 풍경, 듣고 말하는 이야기, 틸다 스윈튼의 쌍둥이 남매가 존 버거의 아들 이브와 함께 하는 장면 등은 서사는 억지로 만드는 것이라기보다는 삶 그체에서 그대로 우러나오는 것이고 그 서사가 교차할 때 진정한 의미의 소통과 메시지가 남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https://youtu.be/d8dUvpL726Y

 

 

"연대가 중요한 것은 지옥이지, 천국이 아니다."라는 존 버거의 이야기가 여기 이곳에 날아와 꽂힌다. 말하고 듣고 연대하는 지점은 언제나 영원히 중요하지만 힘든 여기일수록 더욱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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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08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헬조선‘ 소리 듣는 이 세상을 살면서 위안되는 것이 연대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blanca 2017-01-09 11:05   좋아요 0 | URL
절대다수는 선량하고 상식선에서 행동하며 죽고 남을 다음 세대를 고려한 의사 결정을 한다고 믿고 싶어요. 이 신뢰가 깨어져 버리면 산다는 게 너무 비참해질 것 같아요.

순오기 2017-01-08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네요~ 새해맞이로 좋은 글과 영상 감사해요!♥

blanca 2017-01-09 11:06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페이퍼에서 몸이 좀 안 좋으시다고 읽었어요. 빨리 회복되시기를 바라요. 아무쪼록 새해에는 건강하셔서 하고 싶은 일, 이루고 싶은 일 모두 즐겁게 해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2016년 12월, 나는 대전으로 가는 KTX를 탔다. KTX는 처음이다. 대구에 할머니집이 있어 수시로 기차를 탔고 객실에서 연년생 여동생과 투닥거리곤 하다 경유지의 그 십분 동안 아이들에게 가락국수를 먹이고자 뛰어 내려가 줄을 서서 좁은 객실 복도에 우동 두 그릇을 들고 웃으며 나타났던 아버지가 떠올라 혼자 우동을 사 먹었다. 하지만 그때의 맛도 그때의 느낌도 물론 아니었다. 홀가분하기도 하고 좀 쓸쓸하기도 했다. 이렇게 마흔을 보냈다.

 

기대했던 차창의 풍경은 황량한 논,밭, 공장지대로 채워져 있었고 그마저도 너무 빠르게 휙휙 지나가 감상에 잠길 틈이 없었다. 기차가 아니라도 예전의 대전은 지방으로 내려가려면 통과해야 하는 중요한 기착지였다. 아무리 밀려도 연착되어도 대전을 찍으면 얼마간 부모님은 안심을 하셨다. 그런 대전이 이제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서울에서 갈 수 있는 거리가 되어 버렸다. 내 안의 아이는 아직 생생한데 나는 어느덧 중년이 되어 버린 것처럼. 인생의 시간도 그렇게 점점 빨라져 가는 것 같다.

 

"나는 끝내 그 사람에게 죽음을 권할 수 없었다."

                             -나쓰메 소세키 <긴 봄날의 소품> 중

 

 

 

어떻게 이렇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죽지 말라고 했다."도 아니고, "사는 게 낫다."도 아니고 "끝내 죽음을 권할 수 없었다."는 이 말이 울린다. 나쓰메 소세키니까 할 수 있는 그다운 이야기인 것 같다. 소세키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문학, 삶을 둘러싼 고민들, 죽음 등에 대한 이야기가 이 작가 앞에서는 자유롭게 나왔던 듯하다. 슬픈 여자의 고백 뒤에 소세키가 한 이야기다. 그 어떤 구체적인 사연은 나오지 않지만 여인은 몹시 슬프고 힘든 와중에 소세키에게 조언을 구했던 듯하다. 여자의 고백 앞에서 소세키는 죽음을 의식하지만 이 불행한 삶을 끝내 긍정하지 않고는 삶 안에서는 그 어떤 이야기도 진행시킬 수 없음을 간파한다.

 

죽음을 의식하는 것이 삶에 대한 부정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죽어간다"는 의식은 삶을 더 명징하게 의식하게 만든다. 여기, 지금을 비판하지만 결국 그 안에서 우리는 걸어간다.

 

 

"그럭저럭 살아 있다."

 

와병 중에 나쓰메 소세키는 스스로의 상태를 이렇게 표현한다. 병이 결국 진행형으로 자신을 죽음으로 데려갈 것임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인의 아내의 요절 앞에서는 "세상의 모든 국화를 던져 넣으리, 그대 관 속에"라는 작별의 하이쿠를 바친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추모사다. 모든 사라지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광범위한 연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열심히 살았다. 잘 살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계속 이렇게 걸어가게 되는 것 같다. <열흘 밤의 꿈>에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이야기 한 편이 나온다. 사랑하는 여자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은 "백 년만 기다려주세요"였다. 떨어진 별 파편을 주워 여자의 무덤 위에 놓으며 남자는 붉은 해를 헤아리며 백 년을 고대했다. 남자는 결국 '벌써 백 년이 지났구나.'하고 깨닫는다. 소세키가 이 이야기를 1908년에 소개했으니 벌써 훌쩍 백 년이 지나 내가 읽게 된 것이다.

 

벌써 백 년이 지났구나. 그렇다면 또 앞으로의 백 년은 얼마나 훌쩍 지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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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12-31 00: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머낫~ 전 긴 봄날의 소풍 ㅡ으로 제목을 봤어요 . 그렇게 보고싶었나봐요 . 봄하면 소풍이 자연스레 떠오르니까...소풍이 길다는건지 ..봄날이 길다는 건지 ..하면서 궁금해 했는데 ㅡ 소품이었네요!
시적인 표현이네요. 찬란한 봄엔 모든 것이 소품같이 있을 자리에 있는 느낌 일까 ㅡ호기심 도 들고요!^^

blanca 2016-12-30 17:11   좋아요 1 | URL
정말 그렇네요. 저도 그렇게 읽었어요. ^^ 소세키의 소설, 에세이 등이 모두 참 좋았어요. 마지막 글도 묘하게 봄에 끝나네요. 이 추위가 물러가고 빨리 봄이 오기를 고대합니다. <그장소>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cyrus 2016-12-30 16: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따뜻한 봄이 얼른 왔으면 좋겠습니다. 3개월만 지나면 되는데 살다 보면 이 시간도 금방 지나갈 것 같습니다. 서재의 달인 축하드리고요, 올해 마지막 주말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blanca 2016-12-30 17:12   좋아요 2 | URL
아, 나이 들수록 겨울이 힘들어요. 아이들도 계속 감기에 걸리고요. 푸념하네요^^;; cyrus님, 새해 복 많이 받고 2017년에는 좋은 일들이 더욱 많이 생기기를 기원합니다.

나와같다면 2016-12-30 16: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뭐죠..? 이 서늘함.. 어디서 오는거죠?

blanca 2016-12-30 17:13   좋아요 1 | URL
이 하이쿠 같은 댓글은 어떤 뜻이 있는 걸까요? ^^;; 궁금합니다.

낭만인생 2016-12-30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벌써 백 년이 지났구나. .... 누구나 다 가는 군요.. 기분이 묘합니다.

blanca 2017-01-01 09:07   좋아요 0 | URL
어렸을 때는 일 년도 까마득했는데 이제는 오 년, 심지어 십 년도 훌쩍 지나가리라 생각되니, 상대적으로 인간의 삶이 참 짧게 느껴져요.

jeje 2016-12-31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점점..빠르게 흐르는것은 분명히 느끼는데.휴.
차가 지나가고, 불빛이 반짝거리고, 커피가 식고 있습니다. 저의 현재는 그렇게 지나고 있습니다.
blanca님 연말 알차게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lanca 2017-01-01 09:07   좋아요 0 | URL
아, jeje님이 묘사해 주신 풍경이 눈 앞에 떠오르네요. 감사합니다. jeje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를 바라요.

2017-01-06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07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크애비뉴의 영장류 - 뉴욕 0.1% 최상류층의 특이 습성에 대한 인류학적 뒷담화
웬즈데이 마틴 지음, 신선해 옮김 / 사회평론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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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지간 뚱뚱한 여자는 없었다. 못생긴 여자도 없었다. 아무도 가난하지 않았다.

-p.227

 

살면서 속물이 되지 않기란 쉽지 않다. 장담할 일이 아니다. 내 안의 욕망, 시샘, 질투, 비교를 언어화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고결함만으로 설명되고 규정된다는 건 유달리 속물적 욕망을 드러내는 이를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속단하는 것만큼 한계에 갇힌 이야기다.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욕망 그 자체가 어떤 사람의 행동의 동인의 전부라 여기고 그 틀안에서 해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특히 아이를 가진 엄마는 참으로 복합적이고 다변적이고 언어화하기 힘든 섣불리 규정되기 힘든 존재가 아닌가 싶다. 이기심, 모성애, 이타성은 명확한 경계를 때로 불허한다.

 

어쩌면 내밀한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속물적인 이야기다. 인류학을 공부했지만 인류학자라고 스스로를 규정짓지 않는 저자 웬즈데이 마틴이 '맨해튼 엄마들의 세계' 속에 들어가 '동화'되어 완벽한 거리두기에는 실패한 상태에서 그들을 학문적으로 고찰하고자 시도한 이야기다. 그녀 자신이 거기에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그들만의 배타적인 세계에서 왕따도 당해보며 객관, 중립, 주관을 왕복하며 풀어내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아이의 놀이약속을 잡아보려다가 숱한 거절을 당한 체험, 마침내 우연한 기회로 그 집단에 받아들여졌을 때의 어쩌면 좀 속물적으로 보이는 환희, 소위 에르메스의 '버킨백'이 남성들의 고급 자동차처럼 작용하는 세계에서 그 가방을 어렵게 구하려고 분투하는 과정에 대한 솔직한 고백은 실제 그 세계에서 아이를 키워야 하는 엄마로서  "협오스럽지만,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일"에 대한 정면 응시였다.

 

'생태학적으로 자유롭다'는 말의 의미는 기본적인 의식주의 안전성은 확보된 지 오래라 생존 그 자체의 문제로 분투할 필요가 없는 이 최고급 동네의 생래적 자유이기도 하고, 더불어 양가적인 구속이기도 하다. 물질적 제한에서 해방된 자리에는 극도의 불안, 질시, 경쟁이 게재된다. 최고의 자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파크애비뉴 70번대 가의 엄마들은 신경안정제를 먹고 술을 마시며 그 불안을 잠재운다. 저자는 내심 그러한 그녀들의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때로 안쓰럽기도 하고 경멸스럽기도 하다. 최고급 학력을 지닌 이 동네의 많은 여자들은 직장을 다니며 일하지 않는다. 최고의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지만 가정내에서의 위치에는 그녀들이 학창시절 누렸던 평등의 개념은 사변적으로 전락한다. 남편과 아내는 동등한 권리, 의무, 자유를 누리지 않는다. 가족 내에서 풍요로운 물질을 둘러싼 미묘한 불평등, 긴장이 팽배하다. 그러니 그녀들은 불안하다. "명예와 수치의 문화"는 "낯을 잃을까" 두렵게 만든다. 보이는 것들을 최고급으로 유지하는 데에 드는 에너지는 그녀들의 정체성을 공고화하는 게 아니라 그녀들의 정체성 자체를 타의적이고 모호한 것으로 만든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실제 저자 자신이 아이를 잃는 경험을 하며 거만하고 도도해 보였던 그녀들의 호의, 연대를 경험하며 현대 사회의  "모성집약적인 양육 문화"가 어떻게 엄마들을 짓누르는지를 상기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최정점에서 실제 그녀들이 경험했던 숱한 남녀평등의 신화는 자의든 타의든, 반복되는 임신과 출산을 둘러싼 현실적인 문제들의 공격으로 무너진다. 그리고 그녀들의 에너지와 지성, 능력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최고의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으로 그녀들을 한정하게 된다. 삶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숱한 긴장과 알력 관계는 이들을 박제화했던 것이다.

 

건설적이거나 절충적인 해법이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학적 고찰은 관찰자가 그 집단에 동화됨으로써 수시로 기우뚱거린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이기도 하지만 결국 이 이야기의 미덕이자 매력이기도 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나'는 끊임없이 최고의 사교계에 소속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분투하지만 그러한 속물근성은 결국 고전이 되었다. 대단히 고결하고 대단히 이상적인 것은 지향이 될 수는 있지만 삶의 역동과는 때로 빗겨간다. 그렇다고 모든 속물적 욕망이 정당화되거나 이상시되는 것도 존재와 삶을 한 차원 전락시키는 것이 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그러고 보면 모든 예술은 글쓰기를 포함해서 인간의 저급한 욕망과 고결한 이상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균형의 무게추를 찾는 과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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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도킨스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채 그의 방대한 자서전을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과학자로서의 그의 학문적 성과에 대한 체계적 이해나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그것을 이야기하는 필력에 대한 감상은 아쉽게도 부족한 상태로 출발했다. 다만 올해  일흔다섯이 된 그 자신이 회고하는 그의 삶 전반에 대해 그리고 분명 중간중간 끼어들 흥미로운 일화들, 그의 사상에 대한 개관이 궁금했다.

 

 

 

 

 

1권의 표지와 2권의 표지 사진의 대조가 인상적이다. 젊은 도킨스는 측면을, 나이 든 도킨스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세계관에 가지는 자신감의 깊이와 관련있어 보인다. 나이 든 도킨스는 불가지론자가 아니다. 그는 확신한다. 무신론의 세계와 인간이라는 생물이 가지는 개체적인 위치가 대단히 유의미하거나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도킨스의 아버지가 영국 식민지 공무원이었던 까닭에 그의 유년시절은 특이하게 아프리카에서 펼쳐진다. 아버지 또한 옥스퍼드에서 식물학을 공부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연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공유한다. 이는 도킨스가 과학자로 자라나는 토양이 된다. 어머니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리처드 도킨스의 육아 일기를 충실히 기록하고 심지어 각종 일화들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남겨 아들이  자서전을 쓸 위치에 와서 유년을 복기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도킨스 집안 사내아이들의 전통에 따라 리처드 도킨스는 영국의 퍼블릭 스쿨에 진학하게 되고 경제적으로나 삶 전반에 걸쳐 큰 곡절이나 사건없이 옥스퍼드 교수가 된다. 비교적 참 운이 좋았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지하고 따뜻한 양친 부모 아래 교육적 열의의 수혜자로 좋은 교육 과정을 차근 차근 밟으며 일찍 과학적 학문의 전당에 입성하며 좋은 스승들, 교우들, 제자들, 조력자들을 만나며 오늘날의 리처드 도킨스가 된다.

 

사생활적으로도 어떻게 하다보니 결혼을 세번 하게 되었지만 지금의 아내인 여배우 랄라는 리처드 도킨스의 충실한 반려자가 되어 그의 삶을 더욱 따뜻하고 풍요롭게 만들어주게 된 듯하다. 무엇보다 그의 학문적 관심을 충실히 공유하고 그것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랄라의 지적,예술적 소양과, 그의 딸 줄리아를 남기고 암과 투병하다 떠난 전처의 곁을 끝까지 지킨 배려가 도킨스에게 큰 고마움으로 남은 것 같다.

 

그는 다윈의 열렬한 추종자다. 개체를 단순히 유전자의 운반체로서 일회적이고 필멸하는 존재로 확신한다. 그의 정원에서 씨앗을 사방에 뿌리는 버드나무의 모습은 유구한 역사 속의 유한한 존재가 경험하는 찰나적인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만드는 지침을 퍼뜨리고 있는", 즉 DNA를 발산하는 기계적인 개체의 일례로 비친다. 개체는 유의미한 영적 가치나 대의를 위하여 복무하지 않는다. 다만 더 큰 개체군의 세대를 가로지르는 유전자의 운반자로서만 확실히 기능할 뿐이다.  건조하고 차가운 대목이다.

 

하지만 영화 <콘택트>의 엘리 모델로 회자되는 NASA의 행성학자가 NASA의 무인탐사선에 고인이 된 스승의 재를 태워 보내 그가 생전에 이루지 못한 꿈을 달의 표면에 안착시키는 대목, 도킨스의 어린 딸이 생모의 죽음 앞에서 의연하게 버티며 열심히 노력하여 결국 의사가 되는 대목, 수시로 시를 읊고 때로 여러 사람 앞에서 그 시를 낭송하다 눈물짓는 장면은 그의 인간적이고 감성적인 면모를 짐작케 한다. <총,균.쇠>의 저자 재러드 다이아몬드가 낡은 차를 끌고 나와 기대했던 근사한 식당 대신 대학 교정에서 빵을 잘라주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연대기적으로 재구성하지도 대단히 드라마틱하거나 유의미해보이도록 포장하지도 않는다. 끊임없이 농담과 유머, 신랄한 풍자를 곁들여 서른다섯 살 <이기적 유전자>를 세상에 개시하며 화려하게 과학,언론, 문학계에 등장하면서 연이어 수많은 후계자들, 모방자들, 적을 배태하며 인간에 대한, 생물에 대한, 세계 그 자체에 대한 이해의 지형도를 재편하여 마침내 '죽음'과 삶에서의 '퇴장'을 이야기하는 여기에까지 이르렀다. 그의 이론을 그가 직접 키운 제자들이나 그의 저서들을 충실히 읽어낸 수많은 사람들이 가지는 이해도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여하튼 그가 기본적으로 인간과 그 인간에게 주어진 삶에 가지는 이해와 그 이해로 그린 관점의 깊이와 넓이가 가지는 의의에는 존경을 표하고 싶다. 종교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세계 각지에서의 폭력과 몰이해와 배타적 편견에 대한 우려도 공감한다. 하지만 리처드 도킨스가 존재의 복잡성과 존재의 무게로 수렴하는 그 모든 기계론적 이론을 지나치게 단 하나의 진리로 확정하는 태도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불가지론자라는 것이 자랑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떤 여지와 어떤 관용의 틈이 있다는 변을 하고 싶다. 과학적인 것과 논리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과 진화론과 무신론은 연속선의 스펙트럼에 자리할 수는 있지만 동의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입장은 유동적이고 배움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또 다른 가능성이 등장할 수도 있다고 믿고 있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유명한 과학자들의 일화, 그의 과학 이론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덧붙여지는 대목은 참으로 흥미롭다. 가르치는 스승으로서 학생들을 앞에 두고 하는 것 같은 각종 조언도 유용하다. 끊임없이 호기심을 가지고 이 세계를 탐구하고 탐사하는 자세와 그 여정에서 동료, 스승, 제자와 너그럽고 친밀하게 협업하는 태도도 인상적이었다. 삶과 죽음 그 자체에 대한 그의 개인적 견해를 들을 수 없는 점은 아쉬웠지만 또 그답다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그렇게 개인의 의견을 설파할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도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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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0 1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20 1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6-12-23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2016 서재의달인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세요.^^

blanca 2016-12-25 15:00   좋아요 1 | URL
오, 서니데이님 덕분에 알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이미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고 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