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트 에코는 '죽음에 담담하게 대비하는 방법'에서 스무 살이나 서른 쯤에는 남들이 자기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시작하고 마흔 쯤에 미심쩍다는 생각을 품은 다음 백 살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바보라는 확신을 가지고 홀가분하게 떠나라고 조언한다. 즉 그의 기본적인 생각은 산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 세상의 선의나 대의에의 헌신에 어느 정도 기대나 신념을 가져야 가능한 일이니 죽기 직전까지는 그런 헛된 기대를 유지하되 마지막에는 이 세상은 전혀 그런 기대와 맞지 않다는 깨달음을 가지고 삶을 떠나라는 것이다. 그는 정치도 지도자도 대의도 신뢰하지 않은 듯하다. 이 대목을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의 상황은 그가 세상에 남긴 유언이 어떤 식으로 서사화되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대의 민주주의는 에코의 풍자와는 달리 기본적으로 식견과 능력과 선의를 가진 지도자를 가정할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에코가 이겼다. 문제는 에코가 이야기했던 마흔 쯤에는 그래도 의심하는 수준이어야지 성급한 결론을 내리면 백 살 때 홀가분하게 세상을 떠나는 쾌감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벌써 틀려버렸다. 권력의 사유화와 각종 전횡, 그리고 거기에 빌붙어 누리는 각종 이득과 이권에 도취되어 날뛴 역겨운 무리들. 그리고 계속되는 부인, 거짓말. 이 모두가 법치국가 민주주의의 프레임 안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이은희의 소설에는 그런 인간들이 결국 짓밟고 착취하게 되는 계층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마트 매장 상품 진열 아르바이트, 카페 서빙, 식품 회사 댓글 알바, 공시생들은 그들이 갇힌 프레임 안에서 자신이 왜 이 일을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지 혼란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순응하며 자본주의의 최하위에서 고통 당한다.
그애들이 남긴 커피잔을 치우다가 나는 내가 가슴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준수의 애인이 한 번도 상처받은 적 없는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은희 <푸른 문을 열면> 중
<푸른 문을 열면>의 '나'는 카페에서 서빙 알바를 하다 우연히 한때 좋아했던 대학 후배와 그의 여자 친구를 만나게 된다. 같이 학교를 다녔던 후배에게 음료와 디저트를 서빙하게 되며 그녀는 자신과 한때 교감했던 남자가 데려 온 연인이 자신과는 다른 계층에서 왔음을 직감하며 상처 받는다. 이것은 엄격한 '선긋기'가 아니다. 하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처절한 고독과 소외를 느낀다. 왜 자신들이 이렇게 여기에서 울어야 하는지 거창하게 성찰하거나 분석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들의 비애는 현실적으로 자연스럽게 공명한다.
슬픔만은 언제나 그녀에게 답을 주었다. 나는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내 삶의 리더이기 위한 지침이다. 내 슬픔에는 언제나 중대한 이유가 있다.
-이은희 <꿈꾸는 리더의 실용지침> 중
슬픔은 분노와도 통할 것이다. 나를 나이게 하는 힘, 에코가 이 세상 전체를 다 잿빛으로 바라보는 건 충분히 늙어 죽기 전에 해도 괜찮다고 했으니 희망을 가지고 분노해도 아직 괜찮을 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