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정말이지, 그 때는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내가 이러려고 결혼했나, 했구나."

 

 

 

큰 애가 아기였을 때 아기띠를 하고 장을 다 보고 양 손에 짐을 들고 마을버스를 타면 제발 자리까지 균형을 잡고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랐던 시간을 이야기하니 옆지기의 반응 --;; 우연히 예전에 자주 다니던 재래시장을 스치게 되어  함께 걸었던 내 인생의 어느 시기 비슷하거나 같은 상황에 있었던 인연들을 생각하니 잠시 뭉클했다. 더 어렸을 때에는 지금 만나는 사람들과의 자연스러운 작별이나 어긋남을 떠올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고 보니 항상은 아니지만 종종 지금 나와 이야기하는 사람들, 손을 잡은 사람들과 헤어질 시간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슬퍼진다. 그냥 그렇게 된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고 싶은데 자꾸 '나중'에 얽매이게 된다. 중년이 되고 나면 그래도 여전히 대책 없이 희망하거나 마냥 기뻐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까. 그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새삼스러운 욕심인지 모르겠지만, 이제부터라도 주위에 사람들을 두며 살고 싶어요. 인생 후반을 좋은 사람들과 교우하면서 보내고 싶어요. 나는 지금껏 주위에 사람을 만들어놓지 못한 채 살아왔거든요. 또 지금부터는 죽음을 대비한 삶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해요. 글쓰기도 그렇고 사는 것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요. 잘 죽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어느 순간 담담하게 그 경계를 넘어서고 싶습니다.

- 윤대녕 <Axt> 인터뷰 중 인용

 

 

 

윤대녕 소설가의 이 이야기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정말 그렇다. 사람을 항상 곁에 두고 시달렸던 사람들은 나이들며 자기에 충실하고 고독에 익숙해지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윤대녕은 반대의 경우인 듯하다. 삶을 관조하고 자기를 채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세속은 결국 불화하더라도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지는 곳이다. 오십 대를 넘어서고도 자기를 돌아보고 잘못된 점을 기꺼이 인정하는 그의 사려 깊은 태도가 절로 그의 얘기를 경청하게 했다. 중년에서 노년기로 넘어가는 시기는 조심해야 할 것 같다. 타인에 끊임없이 휘둘려도 흉하지만 독불장군도 고독하다. 그 어느 접점에서 욕망의 균형추를 잡지 않으면 추하게 미끄러질 수 있다.

 

 

모든 사람은 고유하고 개별적 존재라는 것, 모든 타인은 나만큼 삶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런 인식이 확보돼야 비로소 삶의 관계가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윤대녕 <Axt> 인터뷰 중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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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vis 2016-11-14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왕년의 내 사랑 대녕씨..그립고 궁금하네용^^지금은 헤어진지 오래지만ㅎ그래도 그 이 덕분에 20대를 지나왔습니다 소설 속의 광화문이며 대학로가 하도 궁금해서
상경해 몇 해 살았는데..

blanca 2016-11-14 19:45   좋아요 1 | URL
대학교 때 정말 찬란하게 등장하셨던 기억이 나는데 저는 그때 책을 열심히 안 읽던 시기라 윤대녕을 잘 알지 못해서 아쉬워요. 교양국어 시간에 교수님이 ˝윤대녕, 참 글 잘 쓰지.˝해서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그때 아름다운 단편들을 읽었더라면 더 흠뻑 몰입할 수 있었을 터인데...아쉬워요.
 

움베르트 에코는 '죽음에 담담하게 대비하는 방법'에서 스무 살이나 서른 쯤에는 남들이 자기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시작하고 마흔 쯤에 미심쩍다는 생각을 품은 다음 백 살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바보라는 확신을 가지고 홀가분하게 떠나라고 조언한다. 즉 그의 기본적인 생각은 산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 세상의 선의나 대의에의 헌신에 어느 정도 기대나 신념을 가져야 가능한 일이니 죽기 직전까지는 그런 헛된 기대를 유지하되 마지막에는 이 세상은 전혀 그런 기대와 맞지 않다는 깨달음을 가지고 삶을 떠나라는 것이다. 그는 정치도 지도자도 대의도 신뢰하지 않은 듯하다. 이 대목을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의 상황은 그가 세상에 남긴 유언이 어떤 식으로 서사화되는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대의 민주주의는  에코의 풍자와는 달리 기본적으로 식견과 능력과 선의를 가진 지도자를 가정할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에코가 이겼다. 문제는 에코가 이야기했던 마흔 쯤에는 그래도 의심하는 수준이어야지 성급한 결론을 내리면 백 살 때 홀가분하게 세상을 떠나는 쾌감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벌써 틀려버렸다. 권력의 사유화와 각종 전횡, 그리고 거기에 빌붙어 누리는 각종 이득과 이권에 도취되어 날뛴 역겨운 무리들. 그리고 계속되는 부인, 거짓말. 이 모두가 법치국가 민주주의의 프레임 안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이은희의 소설에는 그런 인간들이 결국 짓밟고 착취하게 되는 계층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마트 매장 상품 진열 아르바이트, 카페 서빙, 식품 회사 댓글 알바, 공시생들은 그들이 갇힌 프레임 안에서 자신이 왜 이 일을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지 혼란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순응하며 자본주의의 최하위에서 고통 당한다.

 

그애들이 남긴 커피잔을 치우다가 나는 내가 가슴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준수의 애인이 한 번도 상처받은 적 없는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은희 <푸른 문을 열면> 중

 

 

<푸른 문을 열면>의 '나'는 카페에서 서빙 알바를 하다 우연히 한때 좋아했던 대학 후배와 그의 여자 친구를 만나게 된다. 같이 학교를 다녔던 후배에게 음료와 디저트를 서빙하게 되며 그녀는 자신과 한때 교감했던 남자가 데려 온 연인이 자신과는 다른 계층에서 왔음을 직감하며 상처 받는다. 이것은 엄격한 '선긋기'가 아니다. 하지만 그냥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처절한 고독과 소외를 느낀다. 왜 자신들이 이렇게 여기에서 울어야 하는지 거창하게 성찰하거나 분석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들의 비애는 현실적으로 자연스럽게 공명한다.

 

 

 

 

 

 

 

 

 

 

 

 

 

 

 

슬픔만은 언제나 그녀에게 답을 주었다. 나는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내 삶의 리더이기 위한 지침이다. 내 슬픔에는 언제나 중대한 이유가 있다.

-이은희 <꿈꾸는 리더의 실용지침> 중

 

 

슬픔은 분노와도 통할 것이다. 나를 나이게 하는 힘, 에코가 이 세상 전체를 다 잿빛으로 바라보는 건 충분히 늙어 죽기 전에 해도 괜찮다고 했으니 희망을 가지고 분노해도 아직 괜찮을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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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6-11-12 1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희망을 가지고 분노하기.. 백번 공감합니다. 바로 오늘 같은 날 말이죠.
 
떠나는 자와 남는 자의 마지막 수업 - 91세 엄마와 아들이 주고받은 인생 편지
앤더슨 쿠퍼.글로리아 밴더빌트 지음, 이경식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죽음을 앞둔 멘토와 멘티의 수업을 표방한 책은 어느새 진부해져 버린 감이 있다. 죽음을 앞두고 각자의 개별성은 확 트인 일반성의 시야 앞에서 해체된다. 우리는 매일 전투를 치르며 삶을 견뎌내며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이라 그들의 고견은 때로 비현실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이 책의 리뷰를 쓰려고 마음먹게 된 것은 지금까지의 그런 비슷한 류의 책들과 확실히 다른 차별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92살의 어머니와 오십이 다 된 아들이 일년 여 동안 주고받은 편지 안에는 죽음의 이야기보다는 삶의 이야기가 더 많이 담겨 있다. 게다가 그 주인공 둘은 세속적 의미에서 특별하다. 어머니의 이름은 글로리아 밴더빌트(록펠러, 카네기와 어깨를 겨루던 철도왕 밴더빌트의 후손), 아들은 CNN의 대표 앵커 앤더슨 쿠퍼다. 글로리아의 삶은 겉으로는 화려하게 반짝였지만 수많은 슬픈 체험들을 안고 있었고 이 편지 왕래가 있기 전까지 아들과 진정으로 교감하지도 못했다. 스포트라이트, 언론의 집요한 관심에 가족의 상실과 치부는 거의 생중계되었다. 글로리아는 담담히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아들에게 들려준다. 변호하지도 미화하지도 비하하지도 않는 자신의 삶의 재구성은 그녀 자신이 이미 지난 온 자신의 과거를 제대로 다시 소화해내는 것이기도 하고 그녀의 삶의 대부분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대중들에게 한 인간의 삶을 다시  들려주고 공감을 받는 과정이기도 하다.

 

글로리아의 아버지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소유한 밴더빌트가였지만 그녀가 십오개월 때 죽고 스무 살도 되기 전에 글로리아를 낳은 친정 엄마는 딸을 외면하고 화려한 사교계의 파티의 유명 인사들과의 자극적인 관계에만 탐닉한다. 그녀를 키운 팔할은 유모와 외할머니였다. 그러나 글로리아를 둘러싸고 그녀의 어머니와 밴더빌트가의 고모가 벌인 긴 시간에 걸친 양육권 다툼은 소녀를 공포에 몰아넣게 된다. 그녀에게 어머니 역할을 했던 내니와는 이 과정에서 강제로 헤어져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한다.  글로리아는 어른들에 의하여 때로 전략적으로 이용되었고 정작 조언이나 도움이 필요할 때는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나쁜 남자들과 사랑에 빠졌고 학대당했고 아이를 낳고 또 결혼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들었다. 당행스럽게도 마침내 앤더슨 쿠퍼의 아버지가 될 성실하고 정서가 안정된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게 되어 카터와 앤더슨 형제를 낳게 된다. 그러나 남편과는 앤더슨이 열살 때 사별하게 되고 큰 아들 카터는 스물세 살에 그녀가 보는 앞에서 자살하는 참상을 겪게 된다. 결국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둘을 제외한다면 이 가족은 모자 글로리아와 앤더슨만 남게 된 것이다. 앤더슨 쿠퍼는 이 상실을 단 하루도 상기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한다. 자상하고 따뜻한 아버지를 유년기에 잃고 두 살 차이의 형마저 자살로 잃게 된 앤더슨은 이 세상에 안전한 곳은 아무곳도 없다는 자각 속에서 항상 주도면밀하게 자신의 주변을 살피고 통제하고 비관적으로 미래를 전망하는 데에 익숙해져 버리고 만다. 한없는 낙천성과 순수함으로 쉽게 사랑에 빠지고 사람을 믿고 배신당하고 대책없이 미래를 낙관하는 그럼에도 그 결과로 얻은 그 수많은 상흔마저 긍정하는 구십이 넘은 어머니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셈이지만 이렇게 다른 둘의 대화는 진솔하고 담백하고 서로를 존중하면서도 교차하는 지점에서 빛나는 영롱함들이 있다. 기본적으로 모자는 서로를 믿고 사랑했다. 글로리아는 자신이 과거 양육과정에서 저지른 실수를 용기 있게 인정하고 사과한다. 아들은 아팠던 두려웠던 슬펐던 느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고백한다. 듣기 좋은 말만 하지 않고 하기 쉬운 이야기만 지껄이지 않는 대화가 부럽다.

 

 

누군가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서 네가 지닌 생각이나 감정 혹은 가치관을 재단하지 마라. 항상 진심을 말해야 한다.

-P.347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는 않아. 우리의 삶도 덧없이 흘러가고 말지. 그런데도 우리는 온갖 것들을 모으려고 하고, 자기 주변에 쌓아 두려 하고, 사람에 돈에 지위에 집착한단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오래 가지 않아.

늘 행복할 수는 없어. 그걸 바라는 사람도 없지. 행복이 영원하다면 이 행복의 의미는 사라지고 만단다. 이 진리를 받아들인다면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난대도 당황하거나 놀랄 일은 없어. '하필이면 왜 나에게 이 고약한 일이 일어난단 말이야?'면서 번뇌에 시달릴 일도 없단다. 어떤 일이 너에게 일어났다면 그것은 자연의 섭리란다. -P. 355            

 

 

워즈워스의 <송시>에서 따온 "무지개는 피었다 지고"는 이 책의 원제가 된다. 그것은 삶의 파고의 은유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 글로리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지금 이 모퉁이를 도는 그 수많은 사람들도 각자의 삶의 전투를 치르고 있기 때문에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저 위의 사람들도 알았다면 좋겠다. 그래도 아직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의와 신의와 상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믿음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요즈음 한 세기에 이를 자신의 삶의 치부까지도 가감없이 노출하며 후손에게 마음이 울리는 조언을 남기고자 한 글로리아와 그것을 경청하며 자신의 한계와 단점을 고백하며 진정한 의미의 소통을 위해 노력한 앤더슨 쿠퍼의 대화가 유난히 큰 울림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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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11-04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 이런 시절 에 무지개가 천국으로 향하는 다리로 생각했었습니다. 워즈워스의 시구가 인상적입니다. 무지개 한 번 보기 힘들고, 운 좋게 본다고 해도 오랫동안 감상하기 힘들어요. ^^;;

blanca 2016-11-06 09:18   좋아요 0 | URL
맞아요. 무지개 참 보기 힘들죠. 저도 손으로 꼽을 정도로만 기억이 나요. 인생에서 좋은 일도 그럴까요. 빨리 우리 나라에 무지개가 떴으면 좋겠어요.

나와같다면 2016-11-04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상실을 단 하루도 상기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한다....

blanca 2016-11-06 09:18   좋아요 1 | URL
저도 이 문장이 참 뼈아프더라고요. 상실은 잊는 게 아니고 안고 가야 하는 것 같아요.
 
너는 특별하지 않아 - 어느 교사의 맵고 따뜻한 한마디
데이비드 매컬로 지음, 박중서 옮김 / 민음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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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보스턴 교외의 웰즐리의 한 공립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졸업식 축하 연설은 특별했다. 연설자인 데이비드 매컬로는 이 학교에서 실제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였고 졸업생들과 비슷한 연령의 청소년을 포함한 아이 넷의 아버지였다. 이제 더욱 커다란 성취, 좌절의 장으로 나아가는 아이들에게 흔히 장밋빛 전망을 그럴듯하게 보여주며 더 많이 욕망하고 성취하라고 독려하는 여느 졸업 연설들과는 달리 데이비드의 연설은 각자가 지나치게 특별하다는 인식에 사로잡히지 않기를, 위대한 업적이나 성과 위주의 사회적 평가 체계에 함몰되지 않기를, 단 진짜 삶을 살게 되기를 기원했다. 이러한 그의 연설은 큰 화제가 되었고 이후 이 책을 집필하게 된다.

 

이 책은 기대를 뛰어넘는다. 무엇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이 유한한 삶을 다시 한번 제대로 고쳐 사는 것이 되기를 은연중에 바라는 부모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아이들의 좌절 경험까지 통제하려는 것이 얼마나 그 아이들의 삶에 무익하고 심지어 위해를 가하게 되는지를 깨닫게 한다. 아이들에게 했던 졸업 연설은 기실 그 아이들을 통해 성취의 트로피를 착복하려 했던 수많은 부모들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오직 대학에 가기 위한 과도기적 단계로서 학교 수업을 심드렁하게 받아들이는 아이들에게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통해 선문답을 하는 식으로 학문의 정수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깨워주는 정경의 주인공의 이야기는 매혹적이고 유머러스하다. 진지할 것 같지 않은 장난꾸러기들은 하나씩 호기심을 가지고 졸던 고개를 들어 데이비드 매컬로 선생을 쳐다보며 수업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성적이 우수한 아이도 중간인 아이도 느린 아이도 모두 그에게는 하나 하나의 개별적인 아이들이었다. 교육계에 점차적으로 만연하는 그 수많은 불평등을 출발선부터 배치하는 입시 제도에 대한 일갈은 우리나라에도 반면교사가 될 것이다.

 

이 책이 그의 명연설의 늘어지는 버전으로 폄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기본은 그것에서 출발하지만 이미 고등학교 교실을 떠난지 한참 되어 이제 우리의 녀석들을 거기에 들여놓아야 되는 나이의 사람들까지도 이 노교사의 위트 있는 수업 광경에 대한 묘사와 삶, 성장, 교육에 대한 직설적인 이야기들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가 마지막으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문학적 진격 명령으로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소환한 것은 이 이야기의 마무리로 맞춤하다.

 

온전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곧 기대로부터, 금지로부터, 부러움으로부터,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배움은 끝이 없다. 끝이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부터 인간의 나이듦이 성숙이 아니라 아집과 독선과 망령과 뒤섞이기 쉽다. 실제 작금 벌어지는 상황들도 그렇지 않은가. 기대와 금지와 부러움과 두려움에 꽁꽁 묶여 학교 교실에서 영희와 영수로부터 출발했던 그 단순하고 쉬웠던 기본적인 도덕률마저 망각하고 벌이는 작태들이 역겹다.

 

사는 것은 준엄하고 어렵다. 항상 이런 교사의 조언과 질책을 둘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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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1 0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1-01 1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참담한 빛
백수린 지음 / 창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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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표지는 아련하게 찬란하다. 해가 저무는 중일 수도 있고 해가 뜨기 전일 수도 있다. 레이스 커튼의 아랫단은 자기 그림자와 만날 듯 말 듯하다. 표지가 제목인 <참담한 빛>과 더불어 이야기에 진입한다. 이 역설은 언제나 그래왔다.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슬며시 반대편에 서 있어야 할 감정, 기억, 언어는 오곤 한다. 그게 논리적으로 자연스럽지 않으니까 숨을 쉰다. 정합과 논리는 이론의 지지대지 현실의 완충 지대에 있는 것은 아니다. 백수린 작가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처음부터 읽지 않았다. <중국인 할머니>부터 시작했다. 중국인 새할머니의 죽음에서 역주행한다. 가족은 핏줄로만 맺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애초의 출발이 그런 것이 아닐 때 조금씩 서걱거린다. '나'는 거기에서 출발했고 거기에서 좀더 나아가 끝낸다. 머뭇 머뭇 과하지 않게 딱 좋은 곳에서 더 나아가고 싶은 욕구를 기민하게 조절한다. 새할머니, 새외삼촌, 새사촌. 그들과 감동적으로 교감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랬으면, 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중국인 새할머니와 교감한 '나'만의 비밀이 진실이든 왜곡이든 그것을 밝히며 그녀를 애도한다. 빛나는 달을 보며 아직 다 크지 않은 '나'를 두고 중국인 할머니가 중국 민요를 불렀던 장면, '덧없이 짧은 한 순간' 이었지만 중국인 새할머니와 당신이 데리고 온 아들이 낳은 사촌 진운이와 그렇게 셋은 잠시 '가족'을 느꼈었던 기억은 그녀 안에 쌓여 기억을 이루고 그게 삶의 과거를 만든다. 서늘하고 찬란한 이야기였다.

 

만난다. 낯선 이를. 그것은 우연한 조우지만 공유되는 시간의 충실성은 그 누구도 단정지을 수 없다. 충만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기대는 있었지만 과하지 않았고 실망이 뒤따르기도 했지만 압도적이지는 않다. <시차>에서 외국으로 입양 간 사촌과의 조우도 그러했고, 아버지의 몰래 한 사랑이 낳은 딸과의 만남을 그린 <북서쪽 항구>도 그러했다. 표제작인 <참담한 빛>에서 남자와 외국의 다큐멘터리 감독이 함께 한 잠깐의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소통은 많은 것을 함유하고 있지 않지만 양자를 변화시킨다. 작가의 문장은 몹시 담담하다.

 

영원할 듯 빛나던 순간은 사라지고 모두 종국에는 늙고 병들어 종료되는 것이 삶임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사람들은 피로한 얼굴로 묵묵히 집에 차오른 물을 양동이 가득 퍼서 창밖으로 버렸다.

-<높은 물때> 중

 

환상은 없다. 러시아 문학 스터디를 주관했던 근사했던 첫사랑 선배도 생업에 찌들어 영업을 하고 <첫사랑> 촉망 받던 미술학도는 머나먼 타국에서 불법 민박을 운영하며 늙어간다.<높은 물때> 그러나 종국에 이 모두를 훓고 지나가도 남는 것에 대한 응시가 작가의 이야기다. "어렴풋한 빛"이 떨어지고 살아남는 이야기에 다시 표지로 돌아온다.

 

바람이 불고 커튼은 흔들리며 자기를 투영해 내고 자기를 응시하고 그 공간 안에 우리 시선은 떨어진다. 찰나에 아련한 과거와 두려운 미래가 중첩되며 남기는 어딘가의 현재에 발을 담근다. '참담한 빛'은 그래서 언제나 우리를 통과한다. 참담해도 빛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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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10-09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키님, 참 글 잘 쓰시죠.

블랑카님, 작가시죠??

blanca 2016-10-09 20:54   좋아요 0 | URL
음... 사람 참 기분 좋게 만드시는 재주가... 고마워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