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로 산다는 것>의 저자 제니퍼 시니어는 "장차 부모가 될 엄마와 아빠가 부모로서의 기쁨을 상상할 때에는 아이들이 나중에 사춘기를 지나게 될 일은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랬다. 임신 중에 나는 중고등학생이 된 내 아이들과 말다툼을 하는 광경은 단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다. 대신 항상 손 발이 조그만한 젖내를 풍기는 아기,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상상했다. 젊은 연인이 사랑에 빠졌을 때 노인이 된 상대를 떠올리고 결혼을 준비하지 않는 것과 비슷했다. 어쩌면 가장 드라마틱하고 어렵고 삶의 전반에 걸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시기가 빠진 기간에 환상을 덧씌우고 삶을 기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와 정유정의 <종의 기원>에는 모두 자신의 바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아들들의 극악무도한 범죄 앞에 선 어머니를 묘사한다. 그녀들도 모두 한때는 아름다웠고 젊었고 보드라운 살을 가진 아들들의 발바닥에 입마추었다. 특별히 아들을 학대하거나 방임하지도 않았지만 아들들은 살인자로 컸다. 이제 그렇게 살인자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그럼에도 품을 수 있느냐는 문제에 <케빈에 대하여>에서의 틸다 스윈튼은 담담한 포옹과 돌아올 아들을 위한 준비를 통해 대답한다. 자식은 타인이 아니고 자신의 삶과 역사와 정체성과 얽히기 때문에 논리적이고 선명한 대응이나 설명, 해명과 멀어져간다.
내가 부모의 결과가 아니듯이 나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교적 선의를 가지고 사회의 구성원들과 원만하게 잘 지내고 직업적 성취도 이루며 삶을 행복하게 영위하기를 기대하지만 나의 선의와 계획이 백프로 나의 자식들을 통해 구현될 수 없다는 것은 내가 나만 봐도 알아차릴 수 있을 테지만 사회적 압력은 그게 아니다. 잘못된 아이도 잘된 아이도 부모와 아이는 인과 관계로 섞인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부모가 된 그 순간부터 어떤 부책감과 죄책감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될 수 없다.
여기에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예시가 있다. 1999년 열세 명의 사망자와 스물네 명의 부상자(이후로 영구 장애를 입은 아이들도 있다.)를 낸 콜로라도 고등학교 총기 참사에서 의 가해자 중 한 명인 딜런 토머스의 어머니 수 클리볼드는 사건 당일 직장에 근무중이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과 친밀감을 나누며 잘 지냈고 장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일을 하고 있었으면 아들 둘을 최선을 다해 양육하는 교외 중산층의 평범하고 좋은 엄마였다. 그 하루 수는 갑자기 살인자이자 자살자인 딜런의 엄마가 되어 무고한 아이들의 실현되지 않은 꿈, 그들을 추억하는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사람들에게 지워지지 않을 상흔을 남긴 가해자가 되어버린다. 그 전날까지도 그녀는 행복했다. 아이는 평범했고 오히려 아주 순하고 수월한 양육을 통해 자라났다. 몇 주 뒤에는 합격한 대학으로 갈 예정이었고 파티에 파트너를 대동하고 수줍어하는 사진까지 남긴 터였다. 그녀는 항상 아이와 대화를 했고 아이의 친구를 초대했고 아이들의 부모와 친분을 나누었다. 아버지는 아들과 중고차를 함께 수리하고 심지어 대학 기숙사의 도면을 가져와 아들이 편히 지낼 수 있을지를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까지 할 정도로 아들과 소통했다. 딜런은 사랑받는 아이였다. 부모에게 맞거나 방임되거나 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어렵지도 않았다. 친구들에게 조직적으로 소외되거나 폭력을 지속적으로 당한 흔적도 없었다.
하지만 아이는 부모와 형이 아는 면 뒤에 우울 성향과 무력감을 토로하며 폭력적인 성향의 친구와 무기를 구입하고 이미 무서운 계획을 진행중이었다. 그 일이 있기 하루 전날, 아들의 "안녕"은 영원한 작별 인사였다. 수는 꾸준히 자신이 쓴 일기를 들춰가며 대체 아들과의 관계에 어떤 문제점이 있었는지 부모로서 자식을 양육하며 겪는 시행착오들이 어떻게 이렇게나 무섭고 끔찍한 수렁으로 치닫게 되었는지 복기하며 피해자 부모와 아이들에게 사죄하고 스스로를 치유해 나가는 도정에 선다. 엄마가 되고 싶었던 그 날부터 딜런과의 아름다운 추억은 슬픈 추억은 세상을 괴물이라고 부르는 아들을 추모하는 그녀 나름의 방법이었다. 세상은 당연히 가해자로서의 딜런만을 기억할 뿐 아들을 잃은 수의 애도마저 떳떳하지 못한 것으로 봤다. 수는 살인자를 키우지 않았는데 결론적으로 살인자를 낳은 뻔뻔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아들과의 관계에 대한 기록은 유별나지 않다. 오히려 여느 보통 엄마들보다 더 노력했던 것도 같다. 다만 엄마 앞에서 웃었던 아들의 내면의 심연을 간파하지 못한 것이 실책이라면 실책이었다. 사춘기 아이의 신호는 별다를 것이 없었는데 파국으로 치닫고 말았다. 그녀의 순탄하고 평범하고 행복했던 삶은 결론적으로 그 심연으로 함께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내가 딛고 선 지반은 너무나 연약하다. 삶이라는 게 그렇다. 견고한 것도 영원한 것도 없다. 우리 모두 결국 이별한다는 명제 뿐이다. 특히 자식을 가지고 나면 그 이별의 의미는 순리를 따른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러하다. 참척의 고통을 겪은 이 세상의 부모들에게 그들이 삶을 다할 때까지 치유라는 게 가능할런지 진정성 있는 애도라는 게 가능할 지 의문일 정도다. 게다가 그러한 고통을 파생시키고 자행한 아이의 부모라면 아이가 파괴한 삶을 두고 삶을 붙든다는 것이 보통의 인내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 여정을 따라가기가 너무 괴로웠다. 도서실에 있다 친구에게 총을 맞은 아이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며 엎드려 숨어 있어야 했던 아이들, 그러한 아이들을 구하려고 고군분투하다 죽어야 했던 교사, 그리고 그러한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이... 딜런의 엄마는 끝까지 결국 그러한 모습의 아들과 어머니 일을 도와주고 수줍게 파티를 앞두고 턱시도 차림으로 웃던 아들 둘을 하나의 것으로 통합하지 못한다. 그것은 뇌의 병이었다,고 마음의 병이었다고 뭉뚱그리지 않으면 설명할 도리가 없었을 그녀의 마음도 한편 이해가 갔다. 딜런을 사랑했던 자신을 부정할 수도 그리고 그녀의 삶이 다할 때까지 사랑할 어머니로서의 본능도 차마 거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랑하는 아이들을 잃은 나머지 피해자들의 고통도 그녀는 영원히 지고 가야 할 것이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답이 없고 숱한 질문을 남긴다.
대체 아이를 품고 낳아 기른다는 게 무엇일까? 과연 상식, 정도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누구나 자신의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할 텐데 저만치 뻗어나가는 아이의 삶이 어디로 튈 지 과연 엄마들이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이미 가고 없는 두 사람은 그녀 역사의 한 부분이다. 그들은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들이며, 그녀가 먹이고 입힌 사람들이며, 그녀가 때로 실수해서 잘 돌보지 못하기도 한 사람들이며, 그녀가 때로 구조해주기도 한 사람들이며, 인생을 살면서 그 어떤 것보다 최고의 감정과 그 어떤 것보다 최악의 감정을 느끼게 해 준 사람들이다.
-제니퍼 시니어 <부모로 산다는 것> 중
아이들은 영원히 엄마와 함께 남는다. 부모가 되는 일은 어떤 순간에도 아이를 포기하지 않기로 약속하는 일이다. 정말 무겁고도 귀중하고 아픈 일이다. 자식이 먼저 떠나도 어머니는 남는다. 지겨운 애도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인 이유다. 사랑하는 일은 달콤하지 않다. 가슴이 저릴 만큼 아픈 노릇이다. 내가 아니면서 나 만큼이나 사랑하는 독립된 개체가 세상에 나와 나와 함께 호흡하다 그것이 스러지는 자리에는 갈피마다 눈물이 스밀 수밖에 없다. 그 아이들이 미처 살아내지 못한 삶은 수많은 가능성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남은 삶을 아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