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롱은 다른 아이들이 그토록 반기는 것을 겁내는 자기 아이를 보니 마음이 아팠고 이 아이가 용감하게 세상에 맞서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중에서









1985년 12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어느 날 아침, 아일랜드의 제조업 생산기지가 있는 도시 뉴로스로 석탄 배달일을 하며 아내와 딸 다섯을 부양하는 책임감 강한 가장 빌 펄롱은 수녀원 창고에 석탄을 배달 하러 갔던 날, 그의 삶을 통째로 뒤흔들어 버리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펄롱과 눈이 마주친 수녀원 안의 아이들은 창문을 쳐다보고 숨을 들이마시더니 울음을 터뜨리거나 상냥한 미소와 친절한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은지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바닥에 엎드린 채 광택제 통을 놓고 죽어라고 바닥을 닦고 있었다.

여자 아이들 눈에 흉측한 다래끼가 끼어 있는 모습을 발견한 펄롱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수녀원 아이들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 거린다.

다음 날 다시 찾아간 수녀원 바로 옆 세인트마거릿 학교 사이에 놓인 높은 담벼락 꼭대기에 깨진 유리조각이 촘촘히 박혀 있다는 사실에 놀란 펄롱은 며칠이 지나 다시 석탄 배달을 하러 찾아간 창고에 갇혀 있는 여자 아이를 발견한다.

그 여자 아이는 뜻밖에도 펄롱에게 14개월 된 자신의 아기의 행방을 묻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수녀원장은 펄롱에게 뜨거운 차를 내놓으면서도 얼른 돌아 가주기를 바라는 눈치를 한껏 풍긴다.

뭔가 작지만 단단한 것이 목구멍에 맺혔고 애를 써보았지만 그걸 말로 꺼낼 수도 삼킬 수도 없었다. 끝내 펄롱은 두 사람 사이에 생긴 것을 그냥 넘기지도 말로 풀어내지도 못했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중에서

"아일랜드의 모자 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 받았던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바칩니다"라는 헌사로 시작되는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아일랜드 인들 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막달레나 강제 세탁소(수용소) 사건을 소재로 했지만, 막달레나 수용소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지역 조선소가 문을 닫고 비료 공장은 여러 차례 해고를 단행했던 혹독한 시기에도 하루 하루 일감이 끊이지 않은 자신이 운이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며 거래처와 이웃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평범한 가장의 가장 큰 목표는 다섯 명의 딸들을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학교(세인트마거릿 학교) 졸업생으로 키워 내는 것이다.

하루 하루 성실하게 살고 있던 펄롱이 종교적 위선에 짓밟히고 있는 자신의 딸들과 비슷한 또래를 외면 하지 못한 채 갈등 하는 모습에서 작가 클레어 키건은 ‘자신의 삶도 버텨나가기도 어려운데 소시민으로서 어디까지 사회의 불법과 위선에 목소리를 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수녀원의 실상을 마주한 펄롱의 마음 한 구석에는 “여기 오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며 수녀원장과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50파운드 지폐를 덥석 받아버린다.

펄롱은 수녀원에 감금된 소녀들이 노동과 인권을 착취 당하는 걸 외면 하고 거래처의 일감을 착실하게 챙겨서 가족들과 살뜰하게 살아 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하면 그는 수녀원에 감금 된 소녀들을 마주 하지 않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에게 지켜야 하고 함께 살아가야 하는 가족이 있었다.

50파운드 지폐는 정육점 외상값을 갚고도 남고 칠면조와 햄도 살 수 있을 정도의 액수 였지만 펄롱은 봉투를 구겨 석탄통에 던져 버린다.

그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든 건 수녀원장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한 것도 아니였고 석탄 광에 갇혀 있는 아이의 모습을 목격 해서도 아니였다.



펄롱을 괴롭힌 것은 아이가 석탄 광에 갇혀 있었다는 것도, 수녀원장의 태도도 아니었다. 펄롱이 거기에 있는 동안 그 아이가 받은 취급을 보고만 있었고 그 애의 아기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그 아이가 부탁한 단 한 가지 일인데-수녀원장이 준 돈을 받았고 텅 빈 식탁에 앉은 아이를 작은 카디건 아래에서 젖이 새서 블라우스에 얼룩이 지는 채로 내버려두고 나와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 갔다는 사실이었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 중에서


남편 펄롱이 자신의 위선에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지켜 본 그의 아내는 “그런 일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다”며 “생각할수록 울적해지기만 할 뿐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 척해야 하는 일도 있다며 남편에게 외면하면 그만" 이라고 말한다.


펄롱의 이웃들도 상관 하지 말고 조심하는 편이 앞으로 편히 살아 갈 수 있다며 수녀들 눈 밖에 나지 말라고 경고가 섞인 말을 내뱉는다.

하루 하루 노동으로 먹고 사는 서민들은 다수의 횡포에 대해 조용한 침묵을 유지 하는 편이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사는 법이라 조언을 들은 펄롱은 안락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침묵 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밤, 펄롱은 다시 수녀원 주변을 배회하다 창고에 갇혀 있던 여자 아이를 찾아 데리고 나오면서 이렇게 말한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일랜드 인들 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막달레나 세탁소>는 18세기부터 아일랜드 가톨릭교회가 정부와 함께 몸을 버린 여자들을 재교육 시킨다는 명목으로 미혼모와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를 수용했던 곳으로 실제 이곳을 거쳐간 이들은 강제 노역과 학대, 감금, 폭행을 당하며 수세기 동안 여성과 아이들의 삶이 끔찍하게 짓밟혔던 곳이다.

정확한 조사나 기록조차 없는 이곳을 거쳐간 여성들과 아이들은 약 3만 명에 달하지만 무덤조차 찾지 못할 정도로 시신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버려졌는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1996년에야 문을 닫았고 2013년이 되어서야 아일랜드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다수의 침묵으로 묵인 되어 왔던 인권 유린에 맞선 펄롱은 아기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 날, 길을 가던 노인에게 묻는다.

“이 길로 가면 어디로 나오는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사랑을 실천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따르는 사람이 펄롱이라는 걸 그 노인을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 노인은 펄롱에게 이렇게 답한다.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매년 출판사에서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시기에 가장 많은 독자들이 읽은 책들 순위를 발표 한다.

2024년 거의 모든 온라인과 오프라인 서점에서 1위를 차지 한 책들은 자기계발 분야의 <세이노의 가르침>과 소설 분야의 클레어 키건의 <이토록 사소한 것들>이다.

인터넷에 올라 온 글이 인쇄 된 책으로 출간 되자 마자 1년 만에 100만부를 찍어낸 <세이노의 가르침>에 가장 큰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삶의 우열은 돈으로 가려지는 것이 아니다.

-주식 투자는 쓸 일이 없는 여유 자금으로 하라.

-놀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헛된 환상을 버려라.

- 부자가 되려면 좁은 문으로 가라


시중의 거의 모든 자기계발서에는 누구나 노력하면 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세이노는 “성공은 운명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라며 “성공을 원하고,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그 꿈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성공할 수 있다”며 인생은 자전거와 같아서 뒷바퀴를 돌리는 것은 나의 발이고 앞바퀴를 돌려 방향을 잡는 것도 나의 손이고 눈이고 의지이며 정신이기 때문에 부자가 되려면 미래 방정식에 지금의 처지를 대입하면 절대 절대, 절대, 절대 안 된다는 일침을 가한다.

이 세상에 누구나 부자로 살고 싶어 하고 부자를 꿈꾼다.

로또 판매의 상승이 단 한 번도 하락 한 적이 없고 미래의 운명과 액운을 비방 하는 법을 알려주는 점집을 단 한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정도로 현실의 삶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은 것이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 막막할 때 우리는 가까운 이들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온라인 오프라인에 떠도는 명언들을 찾아 보거나 영화나 드라마 책에서 삶의 지혜와 교훈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앞날을 밝게 해주거나 현재 처한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주지 못한다.

점술가에게 인생을 앞날을 미래를 현재의 고통과 고난을 물어봐도 뽀족한 대안이나 비방이 되어 주지 못한다.

상담 비용을 지불하고 나서 깊이 생각해 보면 결국에 이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나 자신 뿐이다.

어느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살아 주지 못한다. 살아가는 것이 힘겹고 앞 날이 막막해도 내 스스로 헤쳐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자 숙명이다.

그러니 주변에 누군가 어려움에 처했다거나 이웃의 고통에 대해 크게 걱정하거나 신경 쓸 여유도 없고 어려움을 해결 해 줄 의인이나 위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슬픔에 걱정 하기 보다 내 삶을 살기에 급급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이따끔씩 책을 펼치면 나와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펼쳐 진다.

나처럼 고통에 처하고 나처럼 슬픔에 빠져 있는 모습에 공감 할 때도 있지만 이런 삶과 이런 환경에서도 모든 걸 감당하고 이겨내는 뜻하지 않은 삶의 모습에 감동을 받을 때도 있다.

특히 작가가 창작한 허구의 삶을 그린 소설을 읽는 순간 두 번 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잊은 채 경의로운 감정에 사로잡혀서 현재의 삶보다 더 생생한 허구의 삶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소설을 읽으면서 살게 되는 두 번째 삶을 통해 나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또 다른 이가 안고 있는 운명을 간접 경험 하듯 함께 생각하고 느끼면서 비로소 타인의 삶을 이해 하게 된다.

소설은 인간이 만들어 낸 허구의 세상이다.

소설이 보여주는 삶의 본질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철학 그리고 사상이 녹아 들어가서 다른 환경에 처한 이들의 삶을 이해 하고 공감 하며 세상의 어둠을 외면 하지 않게 만드는 희망을 품고 있다.

이 세상은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인생도 내 마음과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마음 먹은 데로 이루어지는 것이 없는 것이 인생이고 그것이 진정한 삶이라는 현실이 때로는 슬프고 비극적이여서 이 모순된 세상에서 상상의 공간이 없다면 숨조차 마음껏 쉴 여유가 없을 정도로 허구의 이야기가 사라지는 순간 암흑의 세상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1985년, 나라 전체가 실업과 빈곤에 허덕이며 혹독한 겨울을 지나고 있는 아일랜드의 소도시 뉴로스를 배경으로 한 소설 <이토록 사소한 것들>은 제목 그대로 소설 속에 등장 하는 이야기는 지나쳐 버려도 상관 없을 정도로 사소한 것들이다.

무려 70여년의 세월 동안 잔혹한 인권 유린을 자행 해 왔던 곳이 신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행하는 수도원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사소한 것들을 짓밟는 모순된 이기적인 집단들이라는 실체를 밝혀 낸 작가 클레어 키건은 소설 속 인물을 통해 사회고발적이거나 역사고발적인 주제를 펼쳐 보이지 않는다.

작가는 종교적 모순과 수녀원의 비리와 악랄함에 집중하지 않고 실상을 목격한 노동 계층의 남자 주인공이 갈등하고 번민 하는 모습에서 그의 도덕성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가 살아온 과거의 시간에서 느낀 비참함이나 가족과 함께 살면서 느꼈던 감격의 순간들을 교차 시켜 보여 주면서 인간의 실존적 고민과 삶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버지도 모른 채 태어나 어느 노부인의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얹혀 살았던 펄롱은 성실하게 일해서 세 딸을 낳아 건실한 가정을 꾸리고 있지만 어느 한 순간 .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알고 있는 사회 밑바닥 계층이다.

삶의 안정과 불안 사이에서 갈등 하던 펄롱은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라며 어찌할 수 없이 휘말려 버린 거센 소용돌이 속에 모든 것을 잃어 버릴 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도 결국 이 세상을 버텨내고 살아 나갈 수 있는 힘은 사랑이라 믿으며 수도원에 감금된 그 아이를 집으로 데려 온다.

2024년 한 해 동안 모두가 어렵고 힘겨운 시기를 무사히 견뎌 내고 12월 행복한 성탄절을 기다리며 마음이 들뜨는 시기에 뜻하지 않게 비상 계엄이 발발 했다.

단 두 시간 만에 시민들의 힘으로 계엄을 무효화 시켰지만 대한민국의 국격은 단숨에 밑바닥으로 추락 해 버렸고 나라 안 밖으로 비상 경제의 수렁에 빠져 버렸다.

자신의 아내를 지키기 위해 '사랑' 때문에 비상 계엄을 선포 한 권력자는 법률 책은 읽었서도 소설은 물론이고 활자로 적힌 책은 단 한 줄도 읽어 보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문자가 발명 되어 인쇄 기술 혁명으로 책이라는 도구가 생겨난 이후로 수 세기 전 사람들은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 하며 책을 읽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데 유용한 수단이자 참된 지혜라는 것을 강조 해왔다.

책을 읽는 것은 낯선 세상과 만나는 것으로 나와 다른 세상에서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피부색을 가진 이들을 책을 통해 대화하고 이해 하고 소통하게 되는 것이다.

인생을 바꾼 책은 누구에게나 한 권 쯤은 있을 것이다.

구글 창을 열면 무엇이든지 검색해서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는 시대에서 AI인공지능이 대신 읽어주고, 대신 검색 해주고 대신 글을 써 주는 시대를 살고 있다.

실체가 보이지 않는 AI인공지능과 대화 하며 친구를 맺을 수 있지만 AI인공지능이 내 삶을 대신 살아 주지 못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코로 숨을 쉬고 팔 다리를 움직이며 땅 바닥을 딛고 살아가야 하는 곳이다.

삶의 지혜와 조언을 줄 수 있는 곳이 숏폼이나 유툽 영상이 되어 주지 못한다.

남들이 무엇을 입고,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을 보는 데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허비 해서는 안된다.

태어난 환경을 탓하고, 부모를 탓하고, 주변 상황을 탓하고 사주를 탓해 봤자 소용이 없다.

점술가도 예언가도 타인의 운명의 방향을 바꾸지 못한다.

설령, 로또 당첨 행운의 날벼락을 맞게 된다 해도 현재의 삶과 크게 달라지기 보다 오히려 불운을 떠 않는 경우가 많듯이 삶의 지혜를 얻고 싶으면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채워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스스로 찾아 그 해답을 알기 위해 노력 해야 한다.

어쩌면 책을 읽는 시간은 가장 헛된 시간일지 모르고 삶에 그리 큰 교훈이나 깊은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다.

인생을 단 한 단어로 줄이면 [이야기] 즉,서로 다른 이들의 삶의 [이야기]다.

살아 온 세월은 이야기의 연속이고 인생 자체가 이야기 보따리다.

따라서 책을 읽는 동안 허구의 인물들의 시선으로 두 번의 삶을 살게 되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며 진정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양서는 처음 읽을 때는 새 친구를 얻은 것 같고,

전에 정독한 책을 다시 읽을 때는 옛 친구를 만나는 것 같다.

- 골드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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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4-12-24 0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는 틈을 낸다면
스스로 속(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하루를 쓴다는 뜻이고,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앞으로 나아갈 길과
오늘까지 걸어온 날을 되새기게 마련이라

책을 읽는 틈을 내는 오늘을 보낼 적에는
스스로 속(마음)부터 차리면서
새롭게 꿈을 그리는 씨앗을
살며시 심는 몸짓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라고 느낍니다.

한 해 끝자락에
저마다 마음을 돌아볼 책 한 자락을 그리면서
책집마실을 다닐 분이 늘어날 수 있다면
기쁜 일이겠지요.
 
노란 밤의 달리기
이지 지음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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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5호선 '을지로 4가'역 3번 출구로 나와서 곱창처럼 복잡하게 꼬인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페인트 칠이 벗겨진 철물점, 공업이라고 쓰여진 간판을 달고 비둘기 형상을 한 철제 조각물 부터 유리 공예 아트 공방들이 올망 졸망 모여 있는 걸 발견하게 된다.

1970년대 대대적인 개발 붐 시대에 서울 을지로 일대는 "탱크, 잠수함도 만들 수 있는 곳"으로 불릴 만큼 철공소, 자재상, 인쇄공장 수천 개가 모여 있는 숙련공들의 피, 땀, 눈물이 배어 있는 서울 안의 산업 단지였지만 현재 을지로는 설치 예술가 집단의 거대한 작업실이 되었다.

한옥이 있던 자리를 허물어서 공업사와 소형 공장들이 들어 섰던 곳이 제조업의 쇠락으로 슬럼화 되기 직전에 예술가들이 둥지를 틀고 나서 골목길 마다 예술의 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모터 가게, 인쇄소, 주물 가게, 유리 가게들이 모여 있어서 원스톱으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을지로는 서울 안 교통의 중심지에서 저렴한 임차료로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 져 있어서 예술가들에게 천국이다.

을지로 세운상가 터에 매달 50여명의 신청자들이 대기 할 정도로 입점 할 수 있는 장소가 부족해 졌고 임차료까지 나날이 치솟고 있다.

작업실 임대료가 치솟을 때마다 거처를 옮겨 다녔던 시각 예술가 '휴일'은 예술가들에게 천국 같은 환경을 제공 하는 을지로에 들어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작업 활동을 시작한다.


'내게도 직업이 있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콜라주를 하고 사진을 찍고 소리를 채집한다. 글자를 모으고, 때로는 사람들에 질문을 던지며 그것을 기록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나를 시각 작가 혹은 설치 미술가라고 부르고 내가 하는 일을 다윈예술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명칭이 중요한 게 아니다. 과연 돈을 벌기는 커녕 쓰기만 하는 걸 직업이라고 불러도 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그만둘 수도 없다. 너무 많이 와버렸다.'

-이지의 <노란 밤의 달리기> 중에서


사진학과를 졸업한 휴일의 동기들 중에서 함께 작업하는 태유를 제외하고 다른 동기들은 예술가가 아닌 다른 길로 인생의 방향을 틀었다.

휴일은 생계 걱정을 할 정도로 벌이가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동기생 태유와 '매트리스 매트릭스' 팀으로 활동해서 '주목할 만한 신인상'을 받았을 정도로 재능을 인정 받았지만 그 상이 오히려 그의 인생에 독이 되어 버렸다.

작품이 팔리지 않았지만 작업을 멈추지 못한 휴일은 입시 과외나 백화점 문화 센터와 구청에서 간간히 일을 하며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살고 있다.

아빠가 게이란 사실을 알고 엄마가 어린 휴일을 옷장 속에 버리고 떠났다.

어쩌다 사진을 전공한 휴일에게 부모에게 버려진 기억 조차도 예술적 영감이 되어 서른 살을 앞두고 세운상가에서 ‘서식’하는 예술가로 살아 간다.


'안다. 버림받았다고 할 수는 없다. 새끼 펭권인 척할 수도 없다. 나는 성인이고 아버지는 자유로운 인간이다. 사실 아버지와 사는 게 마냥 좋은 것도 아니다. 두 남자가 데면데면하게 사는 집. 고독만 두 배다. 그래도 누군가 떠난다는 건. 그래서 오는 코끝의 알싸함은 심장까지 닿는다.'


가난한 예술가 휴일에게도 '엘'이라 불리는 여자 친구가 있다.

휴일은 여러 명의 여자와 원 나잇 동침을 하고 나서도 언제나 '엘'에게 돌아간다.

'휴일'은 엘과 3년 째 만나는 동안 울며 고백하며 모든 이야기를 들어 준다.


'나는 사실 여자였어요. 분명히 여자애였는데, 엄마가 집을 나가고 얼마 후 남자가 됐어요. 내 기억은 또렷한데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요.'


여자 아이였지만 엄마에게 버림을 받고 나서 남자가 되고 그 남자를 사랑하고 있는 엘이라는 여자는 알록달록한 곰 젤리 하리보를 입에 달고 살고 있는 젤리 중독자다.

기억 속에 침착 되어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휴일은 사랑에 섹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 많은 연상의 ‘엘’과 사랑을 하는 동안 사랑에 섹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서로에게 밤인가. 그게 무엇이든 간에. 말 그대로 착즙해서라도 내 매력을 찾아주는 그리고 가감 없이 표현해주는 엘이 좋다. 그것이 낮의 엘이든 밤의 엘이든, 별이 빛나는 엘이든 폭우의 엘이든 엘의 피부와 향기, 신음이나 숨결, 목소리와 내 머리 위로 쏟아지는 머리카락과 숨결, 엘의 몸 속의 물, 그것이 나오는 순간 모든 것이 좋다. 그걸 좋아하는 걸 엘도 안다. 그리고 우리는 또 밤의 카니발을 지낸다. 이십대의 끝, 나는 엘에게 내 육체를 헌신한다.'


기나긴 생활고 속에서 사랑으로, 예술로 삶을 감당하고 있는 현실이 허황돼 보이고, 차라리 동물적 꿈을 함께 꾸는 반려견이나 입 속에서 쫀득한 맛과 향을 내는 젤리 하리보가 힘이 되어주는 웃픈 현실 앞에서 사람이 몸에 색을 칠하고 스스로 동물 우리에 들어가 살고 있는 모습을 부러워 한다.

현실의 경계가 무너져서 환상과 기억 사이를 수시로 오고 가는 휴일과 그 또래들은 부모에게 버림 받아 꿈 많았던 20대 청춘 시절에 도시의 재생 마중물로 쓰이다가 버려져서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는 법을” 모른 채 “받아본 적이 없이' 살다가 어느 덧 사회의 '잃어버린 세대'로 전락해 버린다.

동물의 우리 안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하고 있는 휴일의 동기생 '핑크스핑크스'라 불리는 태유의 아버지도 꿈을 꾸고 우리 안에 살고 있는 동물들도 꿈을 꾸고 있다.

그리고 서울의 여러 구역을 전전 하다 을지로 한 복판 세운 상가에서 작업을 시작한 휴일은 인간의 목소리가 내지른 말의 높낮이와 떨림, 강세 같은 소리를 채집한다.

그는 목소리를 채집 하는 동안 한 껏 들뜬 목소리를 내지르기도 하고 울먹이기도 하고 애원 하기도 한다.

휴일이 채집한 인간의 목소리의 톤이 오르락 내리락 할 때 마다 그를 둘러 싼 주변인들의 삶도 요동치기 시작한다.


'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의 몸과 하나의 얼굴이 있다.'


동물원에서 발생한 갑자스런 화마에 잿가루가 되어버린 태유의 아버지는 죽어서 더 유명해 졌고 음식으로 유명해지겠노라며 세상을 유랑 했던 아버지는 앞을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서야 자식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가족과 함께 살아도 외롭고 연인이 있어도 외롭다.

따라서 생은 외롭지 않으면 괴롭고, 괴롭지 않으면 외로운 것이다.

앞이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소리를 제대로 듣게 되고 냄새를 맡아서 주변의 낌새를 알아차리게 된 아버지를 통해 휴일은 소리의 감각이 펼쳐 보인 세상을 알게 된다.

휴일은 돈을 벌어 음식을 먹고 잠자를 구하는 생존이 아닌 숨 쉬는 생존을 하기 위해 밤의 어둠 속을 달리기 시작한다.

어둠 속을 달리고 있는 휴일의 시야에 눈가루가 흩날린다.

달리면서 얼굴에 달라 붙는 눈가루들 눈위의 눈, 눈에 눈들이 그의 머리 위에 쌓여 간다.

내리는 눈을 맞으며 달리는 동안 온 몸에 땀으로 범벅이 된 휴일의 머리 위에 내려 앉은 눈은 어느 새 촉촉한 물로 변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세상 모든 것들의 전성기는 찰나다.

모든 것이 아주 잠깐 동안 세상의 운과 이치에 딱 맞아 떨어지는 그 순간, 누군가의 인생을 가로 막고 있던 어둠이 잠시 걷혀서 빛이 들어 온다.

그 빛은 언젠가 사라져 버리지만 그 빛을 단 한 번이라도 받아 보았다면 남아 있는 생 앞에 놓인 어떤 고난도 역경도 이겨 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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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들의 섬
엘비라 나바로 지음, 엄지영 옮김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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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6년 스페인 아라곤 지방의 소도시 푸엔데토도스 마을에서 도금공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시스코 고야의 아버지는 바스크 태생으로 미천하고 가난한 도금공이었지만, 운 좋게 몰락 귀족의 딸인 그라시아 루시엔테스와 결혼해서 여섯 자녀를 낳는다.

철저한 신분제 계급사회에서 가문의 배경이 없는 미천한 이들이 출세 할 수 있는 길은 성직자 뿐이였고 이 성직자들 중에서 음악이나 미술 같은 예술적 재능을 갖고 있는 이들은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부모에 의해 수도원에 형제들과 들어간 고야는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받고 종교재판소 미술검열관이었던 종교화가 호세 루산 이 마르티네스(Jose Luzan y Martinez, 1710-1785)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판화 작업 부터 석고 데생 작업에서 미술의 기초를 배우기 시작한다.

문하생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고야는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에서 장학금을 받아 스페인 역사를 그림으로 옮기는 작업을 공부 하기 시작하고 여러 차례 왕립 아카데미의 경연대회에 도전 하지만 낙선하고 만다.

1770년 무작정 떠난 이탈리아 여행지에서 무수히 많은 종교화를 관찰하며 베끼는 작업을 하던 고야는 군주 초상화의 복제화 작업장에서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

1775년 부터 마드리드의 산타바르바라의 왕립 태피스트리 공장에서 공예작업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고야는 엘 파르도의 궁전 식당을 장식할 태피스트리 밑그림 작업을 의뢰 받는다.


18세기 중반 스페인에서 부유한 귀족의 하인겸 비서로 일하거나 상업으로 부를 쌓은 벼락 부자를 의미하는 ‘마호’(Majo남자 멋쟁이 )와 마하(Maja; 여자 멋쟁이)를 고야는 그림에 등장 시켜서 춤추고, 술 마시고, 싸우고, 소풍을 즐기고, 카드놀이를 하고, 연을 날리고, 연애놀이를 하는 신나게 놀고 먹는 이상적인 모습을 연작 그림 형태로 완성한다.

당시 놀고 먹는 게 중요한 하루 일과 중 하나였던 귀족들에게 고야의 연작품이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게 되고 고야에게 작품 주문이 쇄도 하게 된다.

고야는 밤 낮으로 밀려드는 주문에 부응하기 위해 귀족들의 유흥과 취향을 충족 시켜 주는 그림 위주 작품을 그리는 동안 그의 아이들이 줄줄이 사망을 하는 불운을 겪게 된다.

아이들의 죽음으로 삶의 낙을 잃어버린 고야는 천국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귀족들의 모습에 더이상 집중하지 않고 버림 받고 굶주리며 거리를 떠도는 이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 시기 부터 고야는 지주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쫓겨난 이들이나 거리의 매춘부, 핍박받는 농부들, 부유한 이들에게 웃음을 주는 맹인과 정신 지체를 앓는 광대들을 그리며 도시의 빛과 어둠을 기록하듯 동판화로 제작하기 시작한다.

고야가 살던 시기에 마드리드는 스페인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번화하고 부유한 이들이 몰려 사는 곳이였지만 수시로 칼부림이 일어났고 어디에서든 도적떼가 출몰해서 어떤 식으로 죽음을 당할지 모르는 범죄 도시였다.

1778년 부터 그리기 시작해서 1780년에 완성한 '교수형 당한 남자'라는 판화 작품에서 고야는 머리와 목은 쇠로 만든 목줄로 수직기둥에 고정된 끔찍한 상태로 죽음을 맞이한 사형수를 마치 순교자처럼 그렸다.

고야가 사형수를 죽음을 맞이한 순교자처럼 그린 이유는 당시 사형을 집행하고 그 임무를 직접 수행했던 이들은 성직자들이였기 때문이였다.

신의 제자라는 이름으로 성직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잔혹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시민들을 처형 시켰고 수도원 안에서 신의 이름을 더럽힌 성직자들도 목에 밧줄이 감겨서 동료 사제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고야는 1786년 궁정화가로 임명되어 최고 권력자 부터 그 권력에 아부하고 빌어 붙는 이들, 탐욕으로 가득 찬 계층과 사회에 가장 미천한 계급이 이들의 모습까지 다양한 기법으로 완성해 나갔다.

고야의 경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스페인 땅에서는 혁명과 내전이 터졌고 마녀 재판을 하듯 무고한 시민들은 잔혹한 방법으로 처형을 당했다.

영국의 첩자로 의심을 받았던 고야는 생활고를 겪던 중 중병을 앓아 후유증으로 귀가 멀어 버리게 된다.

그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암흑의 시기 동안 성화 속에 등장하는 가장 고귀한 신적인 존재들을 마녀와 마귀, 괴물의 얼굴로 둔갑 시켜 버린다.

사방이 컴컴한 공간에서 한 화가가 책상 위에 엎드려 자고 있고 그의 주변으로 스라소니, 고양이, 박쥐떼들, 올빼미 일곱 마리가 모여 있다.

판화집 <변덕>의 43번째 작품인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의 판화를 그리던 시기에 고야는 종교 재판소에서 언젠가 자신을 소환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 잡혀서 폭력과 광기에 사로잡힌 형상을 스라소니,고양이·올빼미·박쥐들에 투영시켰다.

고야는 낙후된 스페인이 발전하려면 교회에 의존하지 말고 영국과 프랑스의 계몽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사회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고야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스페인 땅에는 이성 보다 비합리성, 불안, 폭력, 광기로 무장한 권력자들이 권세를 잡고 피의 전쟁을 벌였다.

마드리드는 공동묘지로 가득했다. 산이시드로 공동묘지, 카라반첼 바호 교구 공동묘지, 다 허물어져가는 건물 뒷편에 둘러싸여 독특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아름다워 보이는 영국인 공동묘지까지 영국인 공동묘지 옆 건물에는 잔디밭도 없고 양로원을 연상시키는 크고 작은 화려한 속옷이 거미줄처럼 얽힌 빨랫줄에 항상 널려 있었다.

-엘비라 나바로의 <지옥의 건축학을 위한 기록> 중에서

1980년 시청 도시 계획 담당관으로 일하던 그는 중앙아메리카로 이주 하기 위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멕시코로 건너간다.

마땅한 직업을 구하지 못한 채 마약과 미신에 빠져 살다가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지인들의 도움으로 예전의 일터인 시청으로 돌아가지만 지난 시절 제 정신을 잃고 미쳐 날뛰던 큰형의 환영이 수시로 나타나 괴로움에 몸부림친다.

온갖 망상에 시달리던 그는 죽은 큰 형과 대화를 하기 시작하고 실체를 보지 못하는 가족들은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죽은 큰 형은 국방성의 고위직 인사로 재직 할 당시에 미확인 비행 물체를 추적하는 아폴로 계획 지상 추적소의 관리를 맡게 되지만 비밀을 발설 했다는 누명을 쓰게 된다.

흑백 텔레비전 시대에 시민들은 어딘선가 수상한 물체가 출몰하면 총질을 하며 공포에 떨고 국가는 수상한 징후가 보이는 지역은 모두 봉쇄 시켜 버린다.

매일 신문에 미확인된 비행 물체가 어디선가 출몰 했다는 출처가 없는 기사가 연이어 터져 나오자 전국의 사기꾼들과 자칭 예언자라는 이들, 우주 천제 전문가들이라는 사람들이 괴소문에 날개를 달아 주고 이 모든 혼돈의 원인자로 미확인 비행 물체를 추적하는 관리인인 큰 형이 지목된다.

큰형은 가족들에게 조차 외면을 받아 서서히 정신이 마비되어 멍청한 고깃덩어리 처럼 변해 버리고 환각과 환청에 시달리다 결국 누군가 자신의 목에 '정신 이상자'라는 팻말을 걸어두었다며 자해를 시도한다.

수시로 울고 웃다가 펄쩍 펄쩍 짐승처럼 뛰어다니던 큰 형은 거리로 뛰쳐 나가 악마가 도시를 지배 하니 악마의 시선으로 건물들을 보기 시작한다.

교회 천장에 그려진 성상화에 사탄주의가 깃들여 있다는 망상을 한 큰형의 눈에 수도사와 사제들 모두 악마의 사신으로 보였다.

세월이 흘러 어느 정신 병원에서 어떤 죽음을 알지 못한 큰형의 망상에 시달리던 동생은 어쩌면 큰형은 어디에선가 성직자나 구마 사제로 생을 이어가고 있을 지 모른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어느 목요일, 차에 앉아 있던 그는 별관의 어느 방 커튼 사이로 비치는 큰형의 그림자를 보았다.

말라붙은 야자수 잎이 발코니에 달려 있었다.

큰 형은 방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는데, 누군가를 구석에 몰아넣고 위협하거나 공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걸음걸이가 어딘지 부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나서 갑자기 불이 꺼졌다. 다시 한 번 온몸에 오싹 전율이 일었다.

그의 뼈와 근육은 머리가 상황을 논리적이면서도 불분명하게 만들고 있음을 알았다. 그 사건은 매일 같은 시간에 사흘 연속 되풀이 해서 일어났다.

나흘째 되던 날 성당의 원형 천장에 등이 켜지고 드디어 동생은 큰형의 모습으로 보이는 사람의 형태를 보게 된다.

다음날 미사를 마친 동생은 교구 신부에게 찾아가 천장에 직접 올라가는 방법이 있냐고 묻자 신부는 몸을 안전벨트로 고정하지 않으면 올라갈 방법이 없다고 딱 잘라 답한다.

동생은 신부에게 누군가 천장에 올라가 있는 걸 보았다고 말하자 신부는 그를 내쫓아 버린다.

그 날 밤 동생은 천장에 누군가 올라가고 있는 걸 목격하게 되고 몇 시간에 걸쳐서 그의 뒤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고야,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 1780

1780년 고야는 수도원 사제들에게 잔혹하게 사형 당한 어느 사형수를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 바로 옆에 그려서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 입을 벌린 채 두 눈을 감지 못한 상태로 죽음에 이른 자를 마치 박해 받은 성인이 거룩한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그렸다.

인간의 고통과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두 손과 두 발에 못이 박혀 죽음을 맞이한 예수의 죽음, 그리고 죄를 지어서 성직자들 손에 죽은 평범한 시민이 지은 죄의 무게는 서로 동등한 것일까?

고야가 죽고 나서 그의 조국은 잔혹한 내전을 치루며 결국 이성과 합리성을 중시한 계몽주의 사회가 되었지만 여전히 이 세상은 힘과 목소리가 센 자들이 외치는 불확실한 정보나 편견을 기반으로 해 다른 이를 비난하고 배척하며 낙인을 찍어버리는 괴물들에 의해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다.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선한 존재일까? 아니면 악한 존재일까?

이 세상은 과연 천국에 가까운 곳일까?, 아니면 지옥에 가까운 곳일까?

2021년 전미도서상 번역문학 부문 후보에 오른 연작 소설집 , 스페인 태생의 엘비라 나바로의 <토끼들의 섬>은 과거와 현실을 오고 가며 스페인 땅에서 살고 있는 이들이 처한 노동의 현실과 개인 존엄의 위기, 사회의 불안정함, 정체성의 혼돈에 사로 잡힌 모습을 수평적, 수직적으로 시 공간을 이동시키며 과연 이 세상이 인간이 살아 갈 만한 환경인지 실험적인 문체로 펼쳐 보인다.

어디에 살고 있어도 인간은 항상 불안감에 사로 잡혀 있다.

그러니 어디서든 이런 문구를 보게 되면 현실에 처한 암울한 내 운명에 한 줄기 빛이 되어 줄 수 있는 조언을 누군가 해주지 않을까라며 귀와 눈이 솔깃해진다.

기적과 점술은 실제로 존재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교활한 사기꾼이 많죠,

삶의 진실을 밝혀줄 타로점을 봐드리겠습니다.

이 번호로 연락 주세요, 8034550930

-점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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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의 늦여름
이와이 슌지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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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한 배경의 한 남자가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며 마치 권총을 발사 하듯 그의 손에 들려진 라이터에 불꽃이 솟아 있다.

독일의 현대미술가이자 전 세계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1932-)는 20세기 회화 작품을 21세기적 세계관에 투영시킨 미래 지향적인 예술가다.

회화 장르에서 시작한 그의 예술은 사진처럼 이미지를 재현하는 기법으로 세상을 향해 격렬한 분노를 표출하는 한 남자의 자화상부터 소녀가 된 자기 딸의 뒷모습을 사진에 기초해 화려한 색채, 그윽하고 안정감 있는 톤, 정교한 붓질로 아름답게 재현 해서 ‘사진을 기반으로 한 그림들(photography based painting)'을 독특한 장르로 승화 시켰다.

(c)Gerhard Richter's 'Betty,1988

구상과 추상, 사진과 회화의 영역을 넘나들며 독자적인 회화 스타일을 만들어낸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은 사진 원본에 붓질을 해서 이미 완성된 작품에 덧칠 하는 연출 기법으로 마치 21세기 디지털기기로 사진을 보정 하듯 회화와 사진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었다.

그가 완성한 작품은 사진일까?회화 일까? 아니면 사진을 기반으로 한 그림일까?

(c) Mieno Kei

미대를 졸업한 뒤 광고 회사에 다니던 ‘카논’은 상사의 괴롬힘에 시달리다 결국 퇴사하고 지인의 소개로 미술잡지 편집부에 수습기자로 들어가 특집기사를 맡게 된다.

여름이 시작 되기 몇 달 전인 3월 3일 히나마쓰리 축제에 맞춰 시작한 전시회 <늦여름> 안내장을 발견한 카논은 전시장을 찾아 가고 미스터리한 화가가 남긴 작품 <늦여름> 앞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그림의 크기와 사진같은 세밀한 기법에 탐복한다.

그림 속 모델이 되면 반드시 죽는다고 해서 죽음의 '사신'이라는 별명이 붙은 수수께끼에 쌓여 있는 화가 '나유타'의 특집 기사를 맡게 된 카논은 그의 실체를 취재하는 동안 나유타의 독특한 사진 회화 작품에 빨려 들어가게 된다.

연기로 덮인 하늘과 멀리 치솟은 불기둥, 제일 앞쪽에 찌부러진 기와지붕들이 겹겹이 쌓여 있고, 그 꼭대기에 한 소녀가 이쪽을 등지고 서 있다. 불에 그을리고 찢어진 분홍색 파자마를 입고 고개를 숙인 채. 나는 완전히 압도되었다.

-이와이 슌지의 <제로의 늦여름> 중에서

‘사신’(死神)으로 불리는 어느 천재 복면 화가의 이야기를 쫓는 ‘아트 미스터리’ ‘제로의 늦여름’에는 어느 천재 복면 화가가 남긴 여러 작품들이 등장한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영화 감독 이와이 슌지는 회화적인 언어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그림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그로테스크한 나유타 작품 중에서도 내가 비교적 좋아하는 그림이 있었다.

<까마귀 공원>이라는 작품이다.

어린 소녀의 초상화로, 티 없는 귀여움이 어딘지 후지이 쓰토무(일본 서양화가)의 작품을 연상 시킨다.

도록의 같은 페이지에 실린, 또 다른 소녀를 그린 <카나리아의 집>과 마치 한 쌍처럼 보인다. 어둑한 방에 있는 소녀를 심플하게 그린 <카나리아의 집>에 비하면 <까마귀 공원>에는 다소 독특한 구상이 엿보인다.

눈동자에는 쓸쓸함이 가득하고 입은 일자로 다물렸다. 손에 든 한 장의 사진에는 소녀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다. 사진 속 소녀는 웃고 있다.

회화적인 언어로 미술 작품을 묘사했지만 스토리의 전개는 유괴와 행방불명의 덫이 곳곳에 깔려 있어 오싹하다.

미술 기자 카논이 나유타가 남긴 작품 세계에 빠져 들 때마다 작품 속 소녀들은 행방 불명 되거나 살해 당해서 피해 가족들의 삶은 산산 조각이 나버린다.

'훌륭한 그림은, 한 눈에 압니다. 뭐랄까, 사체인데 살아있는 것 같았죠. 대단한 거죠. 언제가 되든 어디서든 꼭 공개하고 싶은 그림이네요. 하고 제가 말했을 겁니다. 얼마 후 아드님이 직접 연락해왔어요. 그림을 세상에 내놓고 싶다. 작가명은 '나유타'가 좋겠다. 뭐, 그런 얘깁니다.'

유화를 사용해 사진과 같은 사실적인 이미지를 연출한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사진 이미지를 보고 그리기 위해 본인의 사진을 포함했을 뿐만 아니라 잡지와 신문, 책에 수록딘 실제 이미지를 스크랩 해서 붓으로 흐릿하게 화면을 뭉개버리거나 흘려버리는 기법으로 생생하면서 선명한 리얼리티 경계를 무너뜨려 버렸다.

그는 이런 사진 회화적인 작업을 통해 광란의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힘겹게 삶을 이어갔던 어린 시절의 시간부터 종전 후 급속한 산업 발전으로 인간성이 상실된 현대 독일의 모습을 반영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에는 예기치 못한 선택과 우연, 영감 그리고 파괴의 요소들로 가득 채워져서 작품을 감상하는 이들에게 화가의 시선으로 해석된 세상을 보게 만들었다.

화가 나유타는 왜 죽었을까?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왜 유괴 되거나 살해 당했을까?

화가는 증거로 작품을 남겼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남긴 작품에는 ' 어느 누구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해. 누구도 구하지 못해. 그런 저주'가 걸려 있는 것일까?

가세가 붓을 들고 가시와기 슈조의 그림과 마주했다. 그의 붓끝이 거장의 세계에 닿는다. 붓이 움직인다.

사는 동안 한 번 쯤은 어떤 작품 앞에서 매혹 당하거나 일순간 마음에 무언의 감정이 솟아 날 때가 있다.

형언하기 어려운 그런 느낌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을 그린 화가의 심성은 어떤 상태 였을까?

글로 묘사된 나유타의 그림을 머릿 속으로 상상 하고 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행동을 추측해 보고는 내가 붓을 잡았다면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배경은 어떤 색으로 처리 했을 까..

이젤을 세워 놓고 작품을 완성 하고 나서 사진으로 작품을 찍어두고 어디론가 종적을 감춰 버린 나유타,만면에 웃음을 띤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그 또는 그녀가 긴 머리칼을 헝클어뜨린 채 춤을 추고 있는 작품들....

<연옥>....

가솔린을 뒤집어쓰고 제 몸에 불을 붙이고 불길에 휩싸여 춤추는 사람을 촬영해서 사진으로 현상하고 마지막 붓으로 완성한 화가 나유타.

영화 감독으로 이름이 알려진 이와이 슌지 감독은 겨울의 계절이 시작되면 생각나는 영화‘러브레터’와 ‘릴리슈슈의 모든 것’, ‘립반윙클의 신부’, ‘키리에의 노래’ 등 거의 모든 자신의 작품의 원작을 직접 쓸 정도로 일찌감치 글쓰기 재능을 인정받았다.

작품에 등장하는 화가 나유타가 실제로 찍은 사진을 기반으로 회화를 완성하듯 이와이 슌지 감독은 미스터리한 예술 세계를 그린<제로의 늦여름>에서 카메라 촬영 기법처럼 스토리를 전개 시켜 나가면서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회화적인 언어로 묘사했다.

Overpainted photograph 17. Nov. 99 ©Gerhard Richter 2017

연기로 덮인 하늘과 멀리 치솟은 불기둥, 제일 앞쪽에 찌부러진 기와지붕들이 겹겹이 쌓여 있고, 그 꼭대기에 한 소녀가 이쪽을 등지고 서 있다. 불에 그을리고 찢어진 분홍색 파자마를 입고 고개를 숙인 채. 나는 완전히 압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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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훈드여, 새로운 사상은 반드시 두 가지 질문을 받게 되오. 하나는 그 사상이 약할 때: 너는 어떤 존재인가? 타협하고 거래하고 사회에 순응하며 자기 자리를 찾아 살아남으려 노력하는가, 아니면 앞뒤가 꽉 막힌 고집불통에 꼬장꼬장하고 게다가 멍청하기 짝이 없어 산들바람에 휘어지느니 차라리 부러지는 쪽을 택하는가?─후자인 경우, 대개는 (백 번 중 아흔아홉 번쯤) 산산이 부서지기 마련이오. 그러나 백번째에는 세상을 뒤바꿀 수도 있소.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 중에서


1989년 9월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가 출간 되자마자 이슬람교의 선지자 무함마드를 비하 하고 모독 했다는 이유로 이 책을 불태우며 극렬한 시위로 들끓어 오른다.


악마의 시는 무슬림 인구 집단이 많은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수단, 남아프리카 공화국, 스리랑카, 태국, 탄자니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베네수엘라 등의 국가에서 출판을 금지 시켜버린다.

1990년 2월 14일 이란 테헤란 국영 라디오 방송에서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1989년 6월 사망) 유언으로 남긴 '무슬림을 모독한 자는 처단하라'라는 종교 법령' 파트와'를 발표하며 각지에 흩어져 있는 무슬림들은 살만 루슈디를 발견 하는 즉시 무함마드의 이름으로 처단 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1990년 2월 14일 파트와가 발령된 다음날 부터 살만 루슈디는 기나긴 도피 생활을 시작 하고 전 세계 곳곳에서 <악마의 시>를 불 태우는 시위와 작가 살만 루슈디의 생명을 지키자는 시위로 극렬하게 나눠져 버린다.

이 책을 출간하는 나라의 담당 출판사들은 무슬림으로 부터 폭탄 테러 위협을 받았고 악마의 시를 번역한 이들은 무슬림 폭도들에게 공격 당하거나 살해를 당했다.

유럽에서 <악마의 시>를 가장 먼저 출간한 이탈리아와 노르웨이 그리고 아시아 국가에서는 일본의 번역가와 출판인들이 무슬림의 공격으로 안타까운 생명을 잃자 세계 각국의 출판인들과 작가 단체들은 즉각적으로 살만 루슈디와 출판인들과 번역가들을 무슬림의 테러 대상에서 보호 받아야 하고 표현의 자유를 존중 하라는 선언서를 발표 한다.

영국은 살만 루슈디를 24시간 밀착 보호 하며 이란에게 경제적 외교적 제재 조치를 취했다.


살라딘은 참지 못하고 낄낄거렸다. 그 사건이 다윈의 보복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덤스데이는 저 딱딱한 빅토리아시대에 살았던 불쌍한 찰스에게 미국의 마약문화에 대한 책임을 덮어씌웠다. 그런데 지구 반대편에 와서는 자기가 그토록 반대하던 부도덕한 문화를 상징하는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중에서

1981년 <한밤의 아이들> 출간한 살만 루슈디는 전 세계 주요 문학상을 휩쓸며 세계 문단 중심에서 '표현의 자유'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영국 정보부의 보호 아래 수시로 거주지를 옮겨 다녔던 살만 루슈디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이 머물렀던 곳을 세워 보다가 사용했던 침대가 무려 56개나 된다는 사실에 놀라며 본격적으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격투기, 권투 같은 호신술을 배운다.

호메이니는 <악마의 시>가 본격적으로 서점에 깔리기 3개월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유언을 반드시 지킨다는 무슬림들이 파트와는 발령한 사람만 취소 할 수 있다는 근거를 내세우며 살만 루슈디를 향한 칼 끝을 저버리지 않았다.

제국 시절에 북아프리카 이슬람국가를 지배해서 무슬림의 이민자들과 난민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프랑스는 1993년에서야 <악마의 시>를 번역 출간 하고 이슬람의 테러 행위가 미국 땅으로 번질 것을 우려 했던 미국은 프랑스 출간에 뒤이어 미국판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파트와 법령을 충실하게 시행했던 무슬림 폭도와 테러리스트들은 세계 곳곳에 알라라는 이름으로 무고한 이들을 대상으로 분노하고 테러짓을 저지르는 동안 살만 루슈디는 공포심에 떨며 무기력하게 살지 않았다.

그는 매일 각종 호신술을 연마 했고 전 세계 여러 매체에 출연해서 언론의자유, 종교적, 관용, 문학의 자유에 대해 소신 발언을 하며 전세계 여론을 움직였다.

1998년 서방 국가의 제재 압력에 버티기 힘들었던 이란은 루슈디의 사형 선고를 철회 한다고 발표 했지만 루슈디를 처단 하는 어떤 무슬림도 처벌하겠다는 발언은 하지 않았다.

파트와 법령이 발표 되자 마자 이틀에 한 번씩 거주지를 옮겨 다녔던 살만 루슈디는 도저히 이런 상태로 살 수 없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버린다.



용서 할 수 없는 일이란 어떤 것인가? 자기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에게 전부를 들키는 것, 그 살 떨리는 벌거벗음의 상태 그것이 아니면 또 무엇이겠는가?- 일찍이 지브릴은 살라딘 참차의 모든 비밀이 고스란히 드러나버린 상황을 -납치,추락,체포 -목격하지 않았던가?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 중에서


반세기를 지나서도 무슬림들은 <악마의 시>를 쓴 작가 살만 루슈디를 용서 하지 않았다.

2022년 여름 살만 루슈디는 뉴욕대에 주최하는 강연장 무대 위에 오르는 순간 이슬람 테러리스트 가 휘두르는 칼에 찔려 한쪽 팔의 신경이 완전히 끊어졌고 한 쪽 눈 시력도 완전히 상실했다.



바닥에 쓰러져 내 몸에서 바깥쪽으로 퍼져가던 피 웅덩이를 바라보던 모습이 기억난다.

피가 많네. 나는 생각했다. 그런 다음에는 내가 죽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극적이고 특별히 끔찍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엄지손가락이 내 목을 눌렀다. 큰 엄지손가락 같았다. 그 손가락이 가장 큰 상처를 눌러 내 생명이 담긴 피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살만 루슈디의 <나이프> 중에서


원형 극장 무대에 살만 루슈디가 올라가는 순간 검은 옷에 검은 마스크를 쓴 24세 무슬림 청년이 달려들어 날카로운 칼로 목을 찌르고 얼굴 위쪽과 입 왼쪽, 가슴, 허벅지를 차례차례 찌른다.

살인마 무슬림 청년이 살만 루슈디를 찌른 시간은 단 27초

현장에 있었던 소방관과 의사들의 빠른 응급처리를 받은 살만 루슈디는 왼손 힘줄과 대부분의 신경이 끊어진 상태로 응급실로 실려와 죽음을 향해 갔다.


눈을 잃었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애썼다. 시신경이 손상되었고 그걸로 끝이었다. 그는 나를 죽이지 못했으나 내 눈을 가져갔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그 상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눈을 잃는다는 건 신체적으로 힘든 일이다.

시야의 4분의 1을 아예 보지 못한다는 건 그 자체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엄청난 마취제를 투여 받은 살만 루슈디는 가족 앞에서 이렇게 말한다.

' 삶을 되찾아야 해. 죽음과 비슷한 상황에서 그저 회복만 할 수는 없어.

삶을 되찾아야 해.'

일주일 동안 끔찍한 수술을 마치고 일주일 회복 기간 동안 살만 루슈디는 앉고 일어서고 걷고 움직이는 법을 천천히 시도하고 파트와 법령 선포 당시 아홉 살 나이였던 아들, 이제는 새 하얀 머리카락으로 풍성하게 뒤덮인 그 아들의 손을 잡고 병원을 나와 집으로 돌아간다.

끔찍한 사고를 겪은지 18일 만에 살만 루슈디는 환자복을 벗고 티셔츠와 운동복 바지와 운동화를 신고 휠체어에 올라탄다.

그는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염탐 하는 눈도 귀도 없는 곳에서 조용히 회복의 시간을 갖고 칼이 아닌 펜을 들고 한 글자 씩 써내려 가기 시작한다.


언어도 칼이었다.언어는 세상을 베어 세상의 의미를 그 내적 작동 방식과 비밀과 진실을 드러낼 수 있었다. 언어는 하나의 현실에서 다른 현실로 베어 들어갈 수 있었다. 언어는 헛소리를 지적하고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고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언어가 나의 칼이었다.


살만 루슈디에게 칼을 들고 달려간 테러리스트 이름은 하디 마타르 24살의 레바논 출신인 그는 ‘악마의 시’를 단 두 페이지만 읽은 뒤 범행을 계획했다고 경찰에 진술했지만 그의 집에선 3만개가 넘는 증거물들이 쏟아졌다.

이란과 이슬람 국가는 이 사건과 자국의 연관성을 전면 부인했고 그 테러리스트도 단독범행이라 자백했다.

현재 미국 경찰은 배후 세력을 찾아내지 못했다.

파트와가 선포 된지 33년 6개월의 시간이 흘러 칼에 찔린 살만 루슈디는 강한 의지로 살아 남았다.

그는 회복 기간 동안 자신의 목을 찌른 그 테러리스트에게 범행의 이유를 묻는 일문일답 형식의 상상속 대화를 시도한다.



-살만 루슈디

신의 본성에 대해 물어봐도 될까?

-테러리스트

신은 모든 것을 포괄하기고 모든 것을 아시지. 그분은 곧 모든 것이야.

-살만 루슈디

너희의 전통에 따르면, 너희의 신과 그 책에 나오는 다른 민족들. 그러니까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이 믿는 신은 다른 거지? 그 사람들은 그들의 책에 적혀 있는 대로 신이 자신의 형상을 본떠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던데.

-테러리스트

그들이 틀렸어.

-살만 루슈디

너는 내가 부정직할 뿐 아니라 악마이기도 하다는 거네. 그래서 나를 죽이는 게 옳다는 거야?

-테러리스트

너는 새끼 악마일 뿐이야. 그러니 자만하지 마. 하긴 새끼도 악마도 악마지.

-살만 루슈디

악마는 파멸 시켜야 하고?

-테러리스트

그래, 넌 이십억 명의 미움을 받고 있어. 그것만 알면 돼. 그렇게 까지 미움을 받다니. 어떤 기분일까? 벌레가 된 기분이겠지 잘난 체하며 온갖 말을 떠들어대지만 사실 너는 자신이 벌레 보다 못하다는 걸 알고 있어. 발로 밟아 죽여야 할 벌레 말이야. 넌 다른 나라고 여행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전 세계 나라의 절반 정도에는 발도 들일 수 없어. 그런 곳들에서는 너에 대한 증오가 너무도 강하니까.

-살만 루슈디

평범한 남자에게 할 만한 평범한 질문이야. 사랑에 빠진 적이 있나?

-테러리스트

난 신을 사랑한다.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가 출간 되고 나서 학자들 사이에서도 신성을 모독했는지 아닌지를 놓고 서로 다른 의견으로 갈라졌다.

1989년 ‘악마의 시’는 출간 되자마자 금서로 지정돼 수입·유통·출판이 금지되어서 이슬람권에서 책을 읽은 사람이 드물었고 살만 루슈디에게 칼을 휘두른 테러리스트도 딱 두 페이지만 읽어 보고 범행을 계획했다.

실제로 이 작품을 읽어 보면 신성 모독이 아닌 시대와 사회에 대한 풍자와 유머로 가득 찬 20세기 <돈키호테> 같은 스토리라는 걸 알게 된다.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까닭은 온건한 사람으로 보이길 거부했기 때문입니다.내가 여기 있는 까닭은 내가 감사할 줄 모르는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모든 것을 변화 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도 변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아프리카인,카리브인, 인도인,파키스탄인,방글라데시인, 키프로스인, 중국인-만약 우리가 저 바다를 건너오지 않았다면, 만약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 들이 일자리와 존엄성과 자식들의 더 나은 삶을 찾아 저 하늘을 건너오지 않았다면 우리 모습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 사회를 다시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죽은 나무를 잘라내고 새 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이번에는 우리 차례입니다.

-살만 루슈디 <악마의 시>중에서


봄베이발 여객기가 런던 상공에서 폭발하고 두 남자 살라딘 참차와 지브릴 파리슈타만 살아 남는다.

살아 남은 두 사람의 운명은 부서지고 흩어져 버린 비행기 잔해 속에서 탑승 했을 때의 영혼과 자아를 벗어 던져 버린다.

모국어도 잊어 버리고 도저히 설명하기 힘든 영혼, 초능력을 갖은 두 사람의 미래는 이미 현실에서 소멸 되어 버린 채 지상의 천사로 다시 태어난다.


'다시 태어난 거야. 자네와 나. 생일 축하하네. 이봐 생일 축하 한다고.'

작가 살만 루슈디는 홀수 장에서 비행기에서 추락 하기 전 지상에서 15년 동안 배우의 삶을 살았던 지브릴 파리슈타의 삶을 보여 주고 짝수 장에서는 천사로 변신한 모습으로 교차 시키며 세상을 들끓어 오르게 만드는 온갖 사건들을 끄집어 낸다.


기억할 거야 양탄자 타고 다니는 레카 우리가 추락할 때 봤잖아 그리고 한 명 더 있었는데 미친놈 같은 스코틀랜드 복장을 하고 고라(백인, 유럽인) 같던데.

이름은 제대로 못 들었지만

알리도 그 둘을 봤는지 못 봤는지 나도 잘 모르겠어 알리는 그대로 서 있기만 했고

레카가 시킨 일이었어 알리를 위층으로 데려가라고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정상에 오른 사람은 내려가는 길밖에 없다면서

나는 손가락으로 알리를 겨냥했고 우리는 위층으로 올라갔어

나는 알리를 밀지 않았어

레카가 밀었지

나는 절대로 알리를 밀어버릴 수 없었으니까.

스푸노

내 마음을 알아줘 스푸노

빌어먹을

나는 그 여자를 사랑했다고....


작가 살만 루슈디는 <악마의 시>에서 초월적 존재의 진짜 정체를 명확하게 알려 주지 않고 그의 정체를 곳곳에 숨겨 놓았다.

그 초월적 존재는 시 공간을 오고 가며 현실과 지옥, 그리고 천국 속에서 지상의 온갖 사건 마다 모습을 드러내고 푸념 하고 변명하며 거짓말 같은 진실을 장황하게 늘어 놓는다.

파트와 선포 후 33년 6개월 만에 자신의 목을 찌른 테러리스트가 법정에 서게 되는 날 작가 살만 루슈디는 그의 앞에서 이런 말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내 삶에 당신이 침입한 것은 폭력적이고 해로웠지만. 이제 내 인생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사랑으로 가득한 삶이지요. 당신이 감옥에서 보낼 나날이 무엇으로 채워질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은 아닐 거라고 거의 확신합니다. 앞으로 내가 당신을 조금이라도 생각하게 된다면, 아마 별것 아닌 듯 어깨를 으쓱하며 지나칠 겁니다.

난 당신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내게 그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부터 남은 나날 동안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상관없는 존재가 될 겁니다.

나는 당신의 삶이 아니라 내 삶을 살아서 기쁩니다. 내 삶은 계속 이어질 겁니다.

-살만 루슈디


루슈디는 자신을 향한 칼에 펜으로 맞서며 언어로 세상을 베고 찌르면서 종교의 관습과 굴레로 겹겹이 쌓여 있는 불평등을 향해 진정한 자유의 힘이 무엇인지 언어의 힘으로 증명해 보였다.

회복 기간 동안 써 내려간 <나이프>에서 루슈디는 이런 말을 한다.


합리주의자의 신앙에서 러셀은 이렇게 말해. '사람은 자신의 열정에 어울리는 신념을 갖게 되는 경향이 있다. 잔인한 사람은 잔인한 신을 믿고, 자신의 잔인함에 핑계를 대기 위해 믿음을 이용한다. 오직 친절한 사람만이 친절한 신을 믿는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경우에든 친절하게 행동한다.


신성 모독이라는 이유로 살해를 지시하는 자는 신의 제자가 아닌 그저 한 인간에 불과한 살인 교살자일 뿐이다,

어느 시대나 어떤 사회에서도 예술은 논쟁과 비판을 불러 일으키지만 예술의 궁극적 가치를 인간성의 본질에 부합되는 자유와 존엄의 권리로 받아 들여야 한다.

단,그 예술의 가치가 형편 없다면 사람들에게 금세 잊혀 질 것이고 역사에 기록 되지 않을 것이다.

시인 오비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에게 추방 당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로마 제국은 멸망했지만 오비디우스가 세상에 남긴 시는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지금까지 널리 읽혀지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살해 당하고 불태워지고 소각 되고 쇠창살에 갇힐 지라도 말을 하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인간의 자유까지 막아 낼 수 없다.

신의 이름을 외치며 칼을 들고 달려든 자에게 생명을 잃을 뻔 했던 살만 루슈디는 폭력이 아닌 펜을 들고 예술로 이렇게 답했다.


언어는 나의 칼이었다.

만약 내가 뜻밖의 칼 싸움에 휘말렸다면

아마도 ‘언어’라는 칼 때문이었을 것이다.

-살만 루슈디(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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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4-11-11 2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인/작가의 분노라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오늘도 눈호강하고 갑니다~ 정성이 가득 담긴 글 잘 읽었습니당~ ‘나는 당신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시원합니다!

scott 2024-11-19 11:22   좋아요 2 | URL
살만 루슈디 여전히 칼의 공포에 시달리고 있고 눈과 팔의 신경이 끊어져 버렸지만 죽을 때까지 칼 대신 펜을 쥐고 악의 공포를 이겨 내겠다고 합니다
에이 아이 시대에 더 소중해진 펜의 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