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는 길을 잃었다는 느낌, 너무 멀리 낯선 곳까지 와버렸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이때껏 누구도 이렇게 멀리까지 와보지는 않았을 듯했다. 공기 성분 마저 고향과는 다른 듯한 낯선 느낌,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낯선 느낌이었다.

-카프카의 <성> 중에서


1919년 노동자 재해보험공사에 다니고 있었던 서른 여섯 살의 카프카는 전체 260여명의 직원 중에서 단 두 명 뿐인 유대인 중 한명으로 그가 맡은 업무는 보험료를 산정하고 노동 현장을 직접 시찰하고 무수한 청원에 답변하고 재해 예방에 관한 다양한 사례를 엮은 논문을 쓰는 업무를 담당했다.

체코 보헤미안의 최고 수재들만 들어가는 카렐 대학교 법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던 카프카는 체코 최고의 재해 보험 공사에서 성실하고 명석한 직원으로 맡은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고 고객에게는 항상 친절했다.

그의 평판은 체코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유명했고 회사 밖을 나가는 즉시 180센티의 훤칠한 키와 몸에 딱 맞는 깔끔한 슈트와 모자를 쓴 모습에 수 많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사무실에 나가면서 외적으로 나의 직무를 완수하고는 있지만 나의 내적 직무를 완수 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그 완수 되지 않은 직무 하나하나가 사고로 이어지는데 그 피해는 전혀 복고되지 않고 있습니다.'

-프란츠 카프카가 루돌프 슈타이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서른 여섯 살 카프카는 나날이 심해지는 폐결핵 질환 때문에 밀려드는 업무를 잠시 미뤄 두고 단 2주간의 휴가를 겨우 받아 프라하에서 약 32킬로미터 북쪽으로 떨어진 보헤미아의 휴양 도시 셸레젠으로 여행을 떠난다.

셸레젠이라는 도시에 도착한 카프카는 치료를 받는 환자들만 머무는 하숙집을 숙소로 잡는다.

몇 시간 후, 그의 절친한 친구 막스 브로트가 찾아 왔다.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있던 카프카는 친구 막스 손에 들려진 종이 뭉치가 자신이 아버지에게 쓴 수 백장의 편지라는 걸 알아차린다.


'친구, 전부 태워 주게.'


친구 막스가 대답을 하지 않자, 카프카는 허공을 응시하며 이렇게 읊조린다.


'나에게는 조상도 없고 아내도 없고 후손도 없는 사람이다. 나는 어떤 신앙과도 관계 없는 인간이다.

내가 종족으로서의 유대인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나 자신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2주 후 회사로 복귀한 카프카는 하루 하루 수척 해져 갔고 말을 하거나 삼키기도 어려울 정도로 기관지 상태는 날로 악화되어 갔다.

죽도록 멎지 않는 기침을 해 댔던 카프카는 마치 거대한 공장 기계가 기름칠을 하지 않아 쇳소리를 대는 기계처럼 마지막 연인 도라 디아만트와 담당 주치의에게 보낼 편지를 쓴다.


살아 있는 동안 삶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운명에 대한 비관을 약간이 나마 막아낼 손이 필요하다.

하지만 다른 손으로는 그 폐허 밑으로 보이는 것들을 기록할 수 있다. 남들과 다른 것을 그리고 남들 보다 많은 것을 볼 수 있으니까. 그런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살아 있다.

아직 안 죽은 사람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카프카, 1921년 10월 19일


침상에 누운 카프카는 자신의 마지막 단편집이자 더없이 냉엄한 내용으로 채워진 단편<단식 광대>의 교정쇄를 검토 했다.

친구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에게 건네 받은 원고를 들고 출판사로 달려가 하루 라도 빨리 출간 일정을 앞당기라고 재촉하고 연인의 작품을 체코어로 가장 먼저 번역한 멜레나 에센스카는 완성된 원고를 받자 마자 매일 밤 타자기를 두드려 체코어로 번역하기 시작한다.

완성된 번역판과 최종 출간 본을 받아 든 카프카는 도저히 만족하지 못하지만 자신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예감하고 친구 브로트에게 두 개의 원고를 돌려 주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죽는 것에 대해 끔찍할 정도로 두렵네. 그건 내가 아직 삶을 덜 경험했기 때문이겠지.'


마흔 한 살의 프란츠 카프카는 자신이 세상에 남긴 모든 글이 미완성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고치고 수정하고 다시 쓸 수 있는 시간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마지막 빈 외곽의 열 두 개의 병실이 있는 사설 요양원에 입원하기 전 친구 브로트에게 자신이 남긴 모든 걸 불살라 버려 달라고 부탁한다.

그로 부터 일주일 후 1924년 6월 11일 수요일 오후 4시 마흔 한 살의 프란츠 카프카는 가족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눈을 감고 사흘 후 프라하 유대인 공동 묘지에 묻힌다.

친구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 보았던 막스 브로트는 장례식을 마치고 난 후에 친구 카프카가 마지막 숨을 거두었던 시각인 오후 4시에 자신의 시계 촛침을 맞추어 놓았다.

아들의 장례를 마치고 나서 카프카의 부모는 친구 막스 브로트를 집으로 불러 아들 프란츠의 사유물 관리자로 지정하는 계약서를 내민다.

브로트는 카프카가 남긴 책상 전체를 뒤집어서 심이 부러진 연필과 목깃이 뜯겨져 나간 단추들, 구슬들, 휴양지와 온천지에서 구입한 기념품들, 문진들 공책들, 미완성 초고들, 일기들 그리고 휴지 조각까지 전부 모아서 커다란 가죽 트렁크 속에 전부 때려 넣었다.

그는 친구 카프카가 살아 생전에 입었던 옷들의 주머니까지 전부 뒤져서 작은 종이 쪽지까지 전부 찾아 냈고 심지어 방 벽지에 낙서한 부분을 칼로 도려내서 떼어낼 정도로 카프카의 흔적이 남은 모든 걸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듯 전부 모으고 모았다.

부모가 마지막 열쇠가 채워진 서랍장을 열자 펜으로 쓴 쪽지 한 장과 연필로 쓴 쪽지 한 장이 발견된다.

막스 브로트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마지막 찾아낸 쪽지에 적힌 카프카의 글을 읽었다.

가장 친애하는 막스에게

내 마지막 부탁이네. 내가 남기고 가는 것 중에 공책과 원고와 편지 그리고 스케치 등등은 절대로 읽지 말고 남김없이 불태워 없애 주기 바라네. 더불어 자네가 갖고 있는 글과 그림 전부, 그리고 내 지인들이 갖고 있는 글과 그림 전부를 찾아내서 전부 태워주길 바라네.

설사 여건 상 서로 만나지 못한 다면 상대에게 태워 달라고 부탁하길 바라네

-프란츠 카프카가

카프카가 친구 막스에게 남긴 마지막 쪽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막스에게

다시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기가 이번에는 좀 힘들 것 같네. 폐열 증상이 한 달 째 이어지니 무슨 힘이 나서 글을 쓸 수 있겠나? 설령 쓸 수 있다 해도 그 글에는 생명력이 없는 거네.

그런 연유로 이제 내가 쓴 글 전부에 대해 마지막으로 유언을 남기면 '판결', '화부', '변신', '유형지', '시골의사' 단편으로는 '단식광대' 뿐으로 이것 들 외에 내가 쓴 것들 현재 집안 어딘가에 남겨 있는 것들을 전부 찾아 내서 불태워 주길 바라네.

나의 마지막 부탁이니 당장 그렇게 해주리라 자네를 믿겠네.

-프란츠 카프카

1939년 3월 14일 화요일, 해가 뜨지 않은 어두운 새벽 ,집을 나선 카프카의 친구 막스 브로트는 검은 색 가죽 트렁크를 챙겨서 아내 엘자의 손을 잡고 황급히 프라하의 윌슨역으로 출발한다.

만일 이 역에서 오후 9시에 출발하는 열차를 타지 못하면 막스와 그의 아내는 게슈타포에게 체포될 운명이였다.

아내 엘자의 미국 친척이 보내준 영국발 팔레스타인행 이민비자를 갖고 있었던 막스는 열종대열에 맞춰 유대인 추방 구호를 외치는 나치 청년들이 역 밖을 에워싸고 있는 광경을 숨 죽이며 지켜 보았다.

마침내 프라하의 팔레스타인 공관 책임자와 유대인 원조 단체 위원장의 보호를 받은 기차가 역에서 출발했다.

기차에 올라탄 아내 엘자가 좌석에 앉자 마자 막스 브로트는 친구 카프카가 남긴 모든 것들이 들어 있는 가죽 트렁크를 소중하게 좌석에 올려 놓았다.

두 부부가 영국 땅에 도착 했을 때 신고할 물품은 달랑 가방 한 개 뿐 정작 자신들의 소지품이 담겨진 가방은 단 한 개도 갖고 있지 않았다.

먼지와 바람만 휘날리는 황량한 팔레스타인 땅에 도착한 막스 브로트의 여권엔 54세/ 남자/ 난민 이라는 굵은 글씨가 새겨진다.

팔레스타인의 난민들끼리 모여 있는 허름한 하숙촌에 방을 겨우 구한 막스는 가방 속에서 친구 카프카의 원고 뭉치를 꺼내기 시작한다.


아멜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슬픈 미소이기는 했지만 어둡게 구겨진 얼굴을 환하게 펴주는 미소, 말로 표현되지 않는 것을 들려주는 미소, 전혀 모르겠는 낯선 것을 알려주는 미소였다.

-프란츠 카프카의 <성> 중에서

1939년 나치가 유럽의 문을 폐쇄하기 직전 프라하에서 출발하는 마지막 열차에 올라탄 막스 브로트는 오로지 친구 카프카가 남긴 것들만 챙겨왔다.

54세의 빈털털이였던 브로트는 텔아비브에서 출판인들과 편집인들 문학가들을 전부 끌어 모아 친구 카프카가 남긴 유언을 거슬러서 미완성 원고였던 ‘성’, ‘소송’, ‘아메리카’를 비롯해 카프카의 일기와 편지를 전부 세상에 공개했다.

그는 자신을 카프카의 유일한 절친으로 자칭하며 직접 카프카의 전기를 쓰고 출간 하며 전 세계를 무대로 강연에 나섰다.

2차 세계 대전 전쟁의 포화 속에 파묻혀 있었던 세계는 그를 카프카의 전문가로 칭송 하며 그가 편집하고 출간하는 카프카의 모든 저작물을 신뢰했다.

막스 브로트는 친구의 원고를 출간하는 동안 차곡 차곡 쌓여 가는 저작권 비용으로 아파트를 구입하고 자동차에 운전기사까지 고용하고 그리고 친구의 방대한 원고 편집 작업을 위해서 프라하 난민 출신의 에스테르 호페라는 여성을 비서로 고용한다.

1952년 어느 봄 날 아침, 막스 브로트는 10년 동안 자신의 곁에서 충실한 비서 일을 한 에스테르 호페를 서재로 불러 서랍에서 편지지 한 장을 꺼내 그녀가 지켜 보는 앞에서 증서를 작성해 나간다.


'친애하는 에스테르 에게 나는 나의 소유물인 카프카의 원고 및 서신 일체를 1945년에 당신에게 증여 했다.'

-베냐민 발린트의 <카프카의 마지막 소송> 중에서


치밀하게 증여한 년도를 1945년으로 적은 막스 브로트는 1924년 친구 카프카가 남긴 모든 걸 담은 검은색 트렁크 안에 담긴 모든 원고와 일기, 편지, 쪽지들 그림들 사진들까지 전부 비서 에스테르와 함께 공동 금고에 맡기고 비서에게 모든 걸 증여한다.

16년의 세월이 흘러 20세기 최고의 문학가 자리에 오른 프란츠 카프카의 책이 전 세계 언어로 번역 되었던 시기인 1968년 12월 20일, 85세의 막스 브로트는 자신의 전 재산과 친구 카프카가 남긴 모든 걸 비서 에스테르 호페에게 상속하고 생일을 몇 일 앞두고 세상을 떠난다.

나치에 의해 카프카의 세 여동생과 친지들 모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고 막내 여동생 오틀라의 딸만 유일하게 살아 남아 영국으로 이주 했다.

이스라엘과 독일 양국가가 카프카의 원고 소유를 놓고 다투고 있는 동안 카프카의 조카는 모든 의사를 국가간의 문제로 양도하고 자신들은 카프카가 남긴 어떤 유산을 사적으로 취득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

반면 막스 브로트의 비서 에스테르 호페는 1988년 카프카의 ‘소송’ 원본 원고를 200만달러에 독일 마르바흐 아카이브에 팔며 호화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카프카의 원고를 하나 둘 씩 꺼내면서 전 세계 부유한 수집가들의 귀와 눈을 홀리기 시작한다.

이스라엘 당국은 이미 30여 년 전, 막스 브로트가 사망한지 5년 뒤인 1973년 비서 에스테르 호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가 패소 했다.

당시 이 소송을 맡았던 판사는 막스 브로트의 최종 유언장에 따르면 비서 에스테르 호페가 브로트의 유산을 처리할 권한을 갖는다며 이스라엘 정부가 아닌 에스테르 호페의 손을 들어주었다.

2007년 에스테르 호페마저 사망하자, 두 딸 에바와 언니 루트 호페가 상속 절차를 밟으려 할 때 이스라엘 정부가 또다시 소송을 제기한다.

이스라엘 당국은 국립도서관을 앞세워 텔아비브에 사는 브로트의 비서 딸인 73세의 에바 호페에게 카프카와 브로트의 원고를 반환하라는 소송을 제기 하고 약 9년에 걸쳐서 카프카가 남긴 원고 그리고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가 남긴 유언을 둘러싼 세기의 재판이 시작된다.

“이것이 줄다리기 시합이라면, 나에게는 아무 승산도 없겠지. 엄청나게, 엄청나게 강한 상대들과 싸워야 하잖아.”

브로트의 비서였던 엄마 에스테르 호페의 유언을 공증 받기 위해서 상속 등기소에 유언 공증을 신청했다가 난데없이 거대한 소송에 휘말린 에바에게 이스라엘 국립도서관 측은 막스 브로트가 비서 호퍼 에게 유산을 넘긴 것은 증여가 아니라 신탁일 뿐이었다고 주장했다.

체코 프라하에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프란츠 카프카는 체코어가 아닌 오로지 독일어로만 글을 썼지만 어디에서도 독일인으로도 유대인으로도 체코인으로도 살지 않았다.

그는 생애 마지막 시기에 만난 연인 도라의 권유로 시오니즘과 유대교에 대해 공부하고 히브리어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것이였지 그는 명시적으로 시온주의를 지지 한 적이 없었다.


예로부터 유대인들은 독일이 천천히 자기 방식대로 가지게 되었을 것들을 독일에 강요했고 독일은 이방인들에게서 온 것들이라는 이유에서 그것들을 반대 했다.

-1920년, 프란츠 카프카가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은 막스 브로트가 비서에게 넘긴 것은 유산을 어떤 조건으로 어떤 기관에 넘길지를 선택할 권한일 뿐, 그녀의 딸들에게 물려줄 권한을 준 게 아니라고 주장하며 더 나아가 카프카가 명시적으로 시온주의를 지지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의 문학 유산은 유대 민족의 문화재로서 유대국가인 이스라엘 정부가 소유해야 마땅하다고 강변했다.

소송은 텔아비브 가정법원(2007~2012년)과 지방법원(2012~2015년)을 거쳐 2016년 이스라엘 대법원까지이어졌고 가정법원에 이어 지방법원에서 이스라엘 정부의 승리로 끝났고, 2016년 최종적으로 대법원에서도 이스라엘 정부의 승소가 확정됐다.

이스라엘 대법원은 에바 호페는 카프카 원고를 포함한 막스 브로트 유산 전부를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에 양도해야 할 것이며 단돈 1셰켈의 양도 보상금도 없을 것이라고 판결을 내렸다.

“어느 날 아침에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난 에바 호페는 자기가 상속권을 박탈 당한 상속녀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에바 호페











20년 가까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벌였던 에바는 카프카 원고 인도가 한창 진행되던 2018년 분노와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막스 브로트는 친구 카프카의 마지막 유언을 지키지 않았다.

1939년에는 팔레스타인으로 도피해 유대인 절멸을 시도한 나치로부터 카프카의 원고를 지켜낸 막스 브로트는 배신자 일까?

그는 85세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 까지 오로지 카프카의 원고와 편지를 출판하는데 모든 걸 바쳤다.

그의 헌신과 노력이 없었더라면 살아 생전 무명이었던 카프카가 문학사의 가장 빛나는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세기 마다 각 국가를 대표하는 문학가들이 있다.

이탈리아는 단테가 있고 영국은 셰익스피어가 있고 독일은 괴테가 있다.

그렇다면 세기의 불후한 천재 프란츠 카프카는 어느 국가에 속한 작가인 것인가?

막스 브로트가 마지막 눈을 감기 직전까지 붙들고 있었던 원고가 있다.

친구 프란츠 카프카가 종이에 끄적였던 어느 문장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그들에게 왕이 되거나 왕의 전령이 되는 선택이 주어졌다. 모두가 아이들처럼 전령이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이렇게 전령들밖에 없는 것이고 이렇게 급하게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큰소리로 메시지를 왕이 없으니 무의미해진 그 메시지를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유랑의 삶을 끝내고 싶어 하면서도 충성을 맹세했으니 차마 그러지 못한다.

-프란츠 카프카, 1924년 9월

프란츠 카프카가 세상에 잠든지 딱 100년이 되었다.

소송은 끝났고 그의 원고를 지켜내고 세상에 알리고 그 모든 혜택을 누렸던 이들 모두 세상을 떠났다.

카프카는 평생 동안 자신의 모든 것들로 부터 자립하고 자유를 찾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고 투쟁했다.

그의 소설엔 정확한 지명도 없고 정확한 이름도 없고 신도 없다.

하지만 그가 세상에 남긴 유산은 '문학'이라는 무한한 상상력, 누군가에 의해 끊임없이 재생되고 되살아나는 불멸의 언어를 남겼다.

그가 남긴 무수히 많은 글들은 마치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별빛처럼 세기를 지나 어디든 우리 곁에서 빛을 발할 것이다.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에 있는 얼어 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프란츠 카프카, 19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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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4-07-08 23:4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 오늘 카프카 소송 읽었어요. 다음엔 성 읽으려고 책 사놨고요.
카프카 얘기들 읽으면서 저 막스 브로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많이 궁금하더라구요. 스콧님 글 읽으니 생각이 많이 듭니다. 세기의 천재의 글을 알아본 안목. 그것을 버릴 수 없었던 마음. 그러나 친구의 유언을 무시하는데 일말의 주저도 없었던 것 같은 그의 삶 - 어떻게 보면 카프카가 소설속에서 그렸던 사람들 같기도 해요.
카프카의 작품은 인류의 것이지만 굳이 소유권을 따진다면 체코 아닌가요? 제 생각은 그렇네요. ^^
오랫만에 스콧님의 훌륭한 글을 읽으니 기분이 매우 좋아지는 밤입니다. ^^

2024-08-13 1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8월의 은빛 눈
이요하라 신 지음, 김다미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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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하고 일본 열도 전역의 원자력 발전소 가동이 일시 정지 되었다.

동일본 후쿠시마 원자력 지역 하청회사에서 25년 동안 근무 했던 다쓰로는 원자력 규제 위원회에서 새로운 규제 기준을 통과 시키며 일본 열도 전역의 원자력이 재 가동이 되었다.

다쓰로는 원자력의 위험성과 심각성이 완전히 해소 되지 않은 시기에 더구나 폐원전 처리 문제도 해결 되지 않은 채 미봉책으로 원자력을 재 가동 시키는 정책에 큰 불만을 품고 회사를 그만둔다.

그는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폐원자로 일을 하겠다며 방사능 누출 사고가 발생해서 죽음의 땅으로 변해버린 후쿠시마를 찾아간다.

지진 발생이 후 단 한번도 후쿠시마 땅을 가본 적이 없었던 다쓰로는 해변에 날아드는 연의 방향에 이끌려서 차에서 내리고 연이 날리는 방향을 쫓아간다.

[100미터 정도 앞에서 나이 든 남자가 연줄을 당기고 있다. 몇 명 정도 있을 줄 알았는데, 달랑 한 사람뿐이었다. 연은 육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받으며 바다 위에 떠 있다. 겨울의 전조처럼 서늘한, 북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린 서풍이다.]

-10만년 뒤의 서풍 중에서


연이 날리는 방향으로 따라간 다쓰로는 연을 날리는 남자를 만나고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연을 날렸던 미국산 '게일러 카이트'연이라는 걸 알고 친근감을 보인다.

후쿠시마 해변가에서 연을 날리는 남자의 이름은 다키구치, 그는 쓰쿠바 기상청 기상 연구소에서 일하다 퇴직한 후 취미로 연을 날리면서 습관처럼 기상을 관측하고 있었다.

다키구치는 기상청 근무 당시 고층 기상 관측 전문가로 라디오존데라는 관측 장치를 기구에 달아서 상공으로 띄워 넣고 예보에 사용할 데이터를 수집하는 일을 했었다.

기상 관측 연구가인 다키구치는 1930년대에는 연에 온도계를 달고 기상을 예측하는데 이용했다며 다쓰로 앞에서 직접 시연을 해 보인다.

그는 매일 해변에서 연을 날리며 레이더도 기구도 드론 같은 최첨단 기상 관측 기기가 아닌 연 줄을 타고 손으로 느껴지는 상공 공기의 감촉과 온도로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예측하고 습관처럼 데이터를 기록하고 있다.

다쓰로는 발길이 머무는 곳마다 연을 날리며 기상을 관측하는 다키구치가 동일본 후쿠시마 지역에서 원전이 있었던 도미오카마치를 갈 예정이라는 말에 원전 회사에 다녔었다는 말을 꺼낸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던 해에 다쓰로는 보수관리과 과장으로 승진해서 9월 말에 발생 했던 지진으로 인해 원자로 격납시설에 문제가 생겼는지 점검을 나섰다.

진도 4지진 발생으로 원자로의 안전 장치 역할을 하는 필터 벨트에 뒤틀림을 발견한 다쓰로 팀은 보고서를 작성하지만 부장은 새로운 규제 기준에 근거해서 진도 4정도로 배관이 손상되었다는 건 회사 이미지에 악영향을 미치니 보고서를 수정하라고 지시하고 문제가 발생했던 원자로의 일시 가동 중지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원자로 전력회사의 하청 회사에 소속된 다쓰로는 상사의 지시로 보고서를 수정한다.

그렇게 보고서를 수정하고 나서 리히터 규모 7.3 의 지진과 지진 해일로 도쿄전력이 운영하는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의 원자로 1-4호기에서 누출 사고가 발생한다.

이 사고는 분명 현실에서 일어날 리 없는 일이 언젠가 어디선가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뒤바뀐 치명적인 인재 사고 였다.

다쓰로는 폐암 투병 중인 아버지가 평생 동안 자랑스러워 했던 2호기 필터벨트의 뒤틀림 보고서를 수정한 직원이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가족이 사회로 부터 받을 막대한 후폭풍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생각에 사직서를 제출한다.

원전 사고 이후 폐원자로 처리 시설회사 일을 시작한 다쓰로는 원전 사고 유출 발생 지점 근처에서 날리던 연을 따라 서풍으로 이동해서 2차 대전 당시 일본 군부대가 미국이 이끄는 연합군 전선에 날릴 계획을 세웠던 풍선 폭탄의 이야기까지 흘러 간다.

수소 가스를 채운 직경 10미터 짜리 기구에 소이탄과 폭탄을 매달아 지상의 기지에 띄워서 기구가 상공에 강한 편서풍을 타고 이틀 밤 낮으로 날아 미국 본토 서해안에 자동적으로 폭탄을 투하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943년 일본 군부대 소속 노보리토 연구소는 300여명이 매달려서 기압계를 탑재한 정밀한 고도 유지 장치, 영하 50도에 달하는 상층 공기를 견딜 수 있는 내한 전지를 풍선 기구에 설치 해서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군수품 제조 공장과 극장, 학교에서 학생들을 끌어다 놓고 풍선 폭탄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1944년 11월 편서풍이 불기 시작했던 날 일본 군부대는 풍선 폭탄을 날려 버릴 기지를 태평양에 면한 해안 세 곳에 설치한다.

후쿠시마현의 나코소, 지바현의 이치노미야 그리고 이바라키 현의 오쓰에서 1945년 4월까지 미국 본토를 겨냥한 풍선 폭탄 기구를 발사한다.

당시 발사된 풍선 기구는 총 1만 발로 약 천 개의 풍선 기구가 미국 본토까지 다다랐다.

일본 군이 날린 풍선 폭탄은 미국 오리건주 마을의 숲과 공원에 떨어져서 무고한 민간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일본 군부대 소속 노보리토 연구소의 생물 병기 부서에서는 탄저균과 적리균, 우역 바이러스를 풍선 기구에 매달아서 미국 본토로 날려 버린다는 계획까지 세우고 기상학자 아라카와 히데토시는 기구를 발사하는 고도와 적절한 계절과 바람 ,발사 지역 그리고 미국 본토까지 다다를 시간과 확률을 계산한다.

1944년 10월 말 오전 3시 풍선 폭탄에 세균을 장착한 기구를 날릴 준비를 갖추고 정확히 두 시간이 지난 오전 5시 소대장이 '발사' 명령을 내리는 순간 풍선 폭탄은 날아 오르지 못하고 지면에서 폭파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풍선 폭탄 사고로 고층 기상대 데이터를 계산하는 중앙 기상대 기수들이 사망한다.

풍선 희생자들 위령비가 세워진 곳에서 다쓰로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연락을 해 지난 시절 아버지와 함께 날렸던 연 세트(게일러 카르트)를 구매 했다고 말한다.

원자력 발전 폐기물은 지하 500미터까지 갱도를 파서 사용 완료된 핵원료를 특수한 재료로 덮어 묻는다. 이런 핵폐기물 처리는 인간이 고안해 낸 방법 중에서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10만년 동안 폐기물이 지상으로 올라 올 경우가 없다며 원자로 가동에서 나오는 모든 핵 폐기물 처리는 이런 과정을 거치고 있다.

기후 이상 변화로 지구는 나날이 뜨거워 지고 있고 북극과 남극의 얼음은 빠른 속도로 녹아서 바닷물 수위는 올라가고 있다.

열을 감지한 지변이 흔들리고 계절의 순환은 뜨거운 여름이 지속 되어 강렬한 햇볕과 장기간 무서운 양으로 내리는 비의 양으로 인간들이 파 묻어 놓은 핵폐기물 시설이 10만년을 버텨 낼 것 같지 않다.


고베 대학에서 지구 과학을 전공하고 도쿄 대학에서 지구 행성물리학으로 박사 과정을 수료한 이요하라 신은 1998년 '네 인생의 이야기'라는 단편으로 네뷸러 상을 수상한 컴퓨터 전문가 테드 창의 작품을 읽고 대중들의 시선에 맞는 픽션같은 과학 이야기를 써보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2003년 부터 도야마 대학 이학부 조교로 근무하면서 안정적인 일을 하게 된 이요하라 신은 2008년 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서 1년 만에 완성한 첫 번째 소설< 두번째 보름달>로 에도가와 란포상 최종 후보작에 오른다.

이후 발표하는 작품 마다 우리 일상에서 발생하고 마주 할 수 있는 과학적 현상과 기술을 지극히 평범한 이들의 삶과 연결 시키며 대중적 인기를 얻으며 작가와 평론가 그리고 서점 직원들의 추천서에 이름을 올리는 인기 작가가 된다.

과학자의 시선으로 인간의 삶을 바라보기 때문에 마치 과학자가 일련에 발생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가이드처럼 대화로 묘사로 풀어나가는 이요하라 신의 작품들은 SF장르에 속하지 않고 미스터리로 분류 된다.


단편집 <8월의 은빛 눈>은 일상 속에서 발생하는 과학적인 현상과 자연의 변화를 정확한 명칭과 장소를 제시 하며 마치 과학 잡지에 실리는 개인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듯 서정적인 문체로 펼쳐 보인다.

과학자인 이요하라 신은 소설을 쓸 때면 '과학자가 보고 있는 풍경 그리고 세계의 모습을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우연히 들여다 보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는 화두를 던져 놓고 글을 쓴다.

총 다섯 편이 실려 있는 단편집 <8월의 은빛 눈>에 맨 마지막 장에는 이요하라 신이 작품 집필에 참고한 문헌과 인터넷 사이트 주소가 빼곡하게 수록되어서 작가의 소설적 상상에서 비롯된 현상이 아닌 실제 우리 눈 앞에서 발생했거나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과학적 현상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요하라 신은 <팔월의 은빛 눈>에서 팔월에 은빛 눈이 내릴 수 있다는 가설을 이렇게 정의 했다.


[내핵은 지구의 안에 있는 또 하나의 별로 크기는 달의 3분의 2 정도로 열방사 빛을 제거하면 은색으로 빛나는 별이다. 그것이 액체의 외핵에 싸여서 떠 있는데 그 별 표면은 전부 빽빽한 은빛 숲으로 높이 100미터나 되는 철로 된 나무 숲이다. 실제 그 정체는 나뭇가지 모양으로 뻗은 철 결정으로 외핵 밑 부분에서 액체 철이 얼면 내핵 표면으로 은빛 가루가 천천히 눈가루 처럼 흩날린다.]

-8월의 은빛 눈 중에서


은빛 숲에서 내리는 은빛 눈의 소리, 무덥고 습한 7월의 이요하라 신의 단편집 <<8월의 은빛 눈>속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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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 2024-06-30 1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르던 작가인데 너무 매력적인 리뷰네요. 저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scott 2024-06-30 12:39   좋아요 2 | URL
이 단편집 정말 좋습니다
과학적 현상을 이토록 현실감 넘치게 묘사한 작가의 문체가 너무 유연하고 탄탄해서
대단하다는 생각만이 ^^
 















[열한 번째로 본 아파트는 벽장은 하나뿐이었지만 유리 미닫이문을 열고 조그만 발코니로 나갈 수 있었다. 발코니에 나가니 10월인데도 티셔츠와 반바지만 입고 바깥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자가 길 건너편에 보였다. 윌럼이 손을 들어 인사했지만, 남자는 인사하지 않았다. ]

-한야 야나기하라의 '리틀 라이프' 중에서


(c)Todd Hido: 3878, from Interiors/Motels (2005). Photograph: Courtesy the artist



여러 도시를 순회하고 취재를 마친 어느 날 모텔로 돌아 온 한야 야나기하라는 노트북 모니터 화면의 배경 사진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나서 첫 문장을 적기 시작한다.

하와이에서 태어나 로스앤젤레스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는 동안 혈액학자이자 암 연구자인 아버지가 이 도시 저 도시로 이동할 때마다 어린 한야는 엄마와 동생과 모텔에 머물렀다.

이 도시 저 도시로 이동하는 삶에 익숙했던 한야는 스미스 칼리지를 졸업 하자 마자 여행 잡지를 발행하는 회사에 들어가 마땅한 거주지 없이 계절을 앞서 발행하는 잡지 기사를 위해 매일 밤 낯선 도시, 낯선 공간에서 삶을 꾸려 나갔다.

1년 만에 승진한 한야는 뉴욕 본사로 발령이 나고 어렵게 구한 월세 방에 들어 가는 순간 머릿 속에 예술가들이 하나 둘씩 스쳐 지나간다.

수도 없이 즐비한 이상한 복도들을 따라가다 보면 쓰지도 않는 괴상한 모양새의 막다른 구석과 마감 안 된 어정쩡한 공간들 공사 도중 버려진 석고판들이 굴러 다니는 그곳 , 잘 팔리지도 않고 일고의 가치도 없는 형편 없어 보이는 것들을 끈질기게 작업하는 예술가들이 살고 있는 그곳, 뉴욕 땅의 한 구역에서 한야는 초록색 테이프로 4구역을 정확하게 나눠 놓고 낯선 월세인들과 같은 공간에서 살기 시작한다.

도시와 도시 공간을 취재하며 이 모텔과 저 모텔에 머물며 취재 기사 편집을 마치고 나면 한야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주드-헤럴드-제이비-윌럼- 앤디


다섯 명의 남자들의 삶을 조각 조각 써나갔던 한야는 마지막 문장을 찍고 나서 페이지 수를 확인했다.

천 페이지 분량의 원고를 받아 든 담당 편집자는 반 이상 덜어내라고 원고를 한야에게 돌려 보내자 그녀는 단번에 '싫다!'고 거절하고 천 페이지를 고집한다.

편집자는 주드 분량을 줄이라고 두 번째 원고를 반송하고 한야는 고심 끝에 몇 몇 부분을 다듬어서 한 손에 잡을 수 있는 700페이지 분량으로 최종 원고를 완성한다.

700페이지 분량의 원고를 받은 편집자는 이메일을 통해 스티븐 킹이나 해리포터 시리즈를 제외하고는 벽돌 부피의 현대 문학을 독자들은 외면 할 것이라며 분량을 더 덜어낼 것을 요구하자 한야는 거세게 항의한다.

마지막 편집부로 부터 승인을 받은 한야는 처음 원고를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줄곧 머릿 속에 떠올랐던 사진 한 장을 보내며 반드시 이 사진을 북 커버로 써야 한다고 못을 박는다.

Peter Hujar, Orgasmic Man, 1969,© The Peter Hujar Archive


한 남자가 두 눈을 질끈 감고 벅차오르는 슬픔을 꾹 참고 있는 모습의 이 사진은 사진가 피터 후자(Peter Hujar 1934-1987)의 '절정에 달한 남자(Orgasmic Man)'다.

이 사진을 처음 본 담당 편집자가 커버로 쓸지 망설이자 한야는 “이 사진 속의 가차 없고 무력한 어떤 것이 내 소설 속 인물인 주드와 윌럼을 떠올리게 했다”는 말로 설득하고 “사진 속 남자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인지 기뻐하는 것인지”의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기자는 말에 편집자는 흔쾌히 동의하고 출간을 한다.

잡지사 일을 하는 동안 18개월 만에 완성한 두툼한 벽돌 부피의 <리틀 라이프>는 2015년 출간 즉시 전미 도서상 후보에 올랐지만 미국 문학계에 큰 돌풍은 일으키지 않았다.

돌풍의 시작은 영국에서 시작되어 그 해 맨 부커상 후보작에 오르며 영국의 주요 매체와 언론들의 극찬 세례가 이어지고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서 영국 문학 베스트셀러 자리에 올라간다.

한야 야나기하라의 <리틀 라이프>는 안타깝게도 문학상을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독자들 사이에서 청춘들의 어두운 부분을 현실감 있게 그려 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인생 책 베스트에 올라간다.

2018년 <리틀 라이프>의 눈물의 간증 고백 리뷰가 틱톡과 숏폼 영상에 올라가면서 전 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몰며 각 국가 마다 절판 된 책을 다시 찍어내기 시작한다.


[고군분투하고 있는 가엾은 사람들, 자기도 모르는,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을 다 감싸 안는 것 같은 슬픔이었다. 매일매일이 너무나 힘들 때에도, 상황이 너무나 비참할 때에도, 사방에서 사람들이 살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생각하면 느끼게 되는 경탄과 경외심이 뒤섞인 그런 슬픔이었다. 인생이란 너무 슬프구나.]


비평가들로 부터 “잔인한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은 <리틀 라이프>는 어린 시절에 겪은 성적 학대와 폭력의 트라우마가 성장 하는 동안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인류 역사상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롭고 최첨단 기술이 정점에 다다랐지만 인간 이하의 야만성이 공존하고 있는 모순된 이 시대의 예술과 우정과 그리고 죽음을 청춘 남자들의 삶을 통해 펼쳐 보인다.
















[패트릭은 포도즙 압착기 위에 이르자 아래를 보았다. 두 개의 강철 롤러가 맞물려 한 치의 틈도 없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았다. 포도즙으로 얼룩진 롤러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포도를 압착했다. 공중 통로 난간의 하단은 겨우 패트릭의 턱 높이였다. 무척 가까이 느껴지는 압착기를 내려다보며 사람 눈도 반투명의 무른 젤리로 이루어진 포도송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얼굴에서 눈이 떨어져 나가 압착기 롤러에 으깨질 것만 같았다.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의 '패트릭 멜로즈' 중에서]


명망 높은 귀족의 작위를 갖고 있는 의사 아버지 데이비드는 다섯 살 아들 패트릭 멜로즈를 10여년 동안 성폭행을 하며 신체적 학대를 자행한다.

드넓은 영지를 마음껏 뛰어놀던 상상력이 풍부하고, 자부심이 강했던 소년 패트릭은 아버지의 강압적인 성적 폭력과 가족의 무관심 속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너덜 너덜한 상태가 되어 10대 부터 독한 약물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약에 의지 하고 있을 때도 약에서 손을 때는 순간에도 반드시 잠들기 전에 책 한 권을 머리 맡에 두고 잠이 들었던 작가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은 20 여 년의 세월 동안 총 다섯 권의 자전적 소설을 써 나간다.


[패트릭은 이에 찢긴 아버지의 아랫입술 상처를 종잇조각처럼 죽 찢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다.

아니야, 그건 아니야. 패트릭은 그런 생각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커튼 봉 위로 넘어가 달아났던 그 터무니없는 필요. 그건 아니야, 그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 패트릭은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개자식.

패트릭은 악문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아버지더러 의식을 되찾으라고 주먹으로 관 옆을 쳤다. 인생의 영화에서 이 장면을 어떻게 연기해야 할까? 패트릭은 자세를 바로잡고 경멸의 웃음을 지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그리도 지독히 슬픈 사람이었는데, 이젠 나도 슬픈 사람으로 만들려는군요.” 지나치게 감상적인 미국 사람 어투였다. 패트릭은 가식적으로 목이 메었다. “어유, 안되셨어.” ]

패트릭 멜로즈는 술에 손을 대고 약물 없이는 행동과 사고를 통제하지 못하고 입원과 치료를 이어나가는 동안에도 아버지의 학대와 어머니의 무관심으로 일관 했던 고통스러웠던 유년기의 악몽을 쉽게 떨쳐 내지 못한다.

어린 영혼의 상처는 10대 부터 시작된 마약과 술에 찌들어서 40대에 들어서서 겨우 중독에서 벗어나 닥치는 데로 책을 읽으며 자기 고통의 원인과 이유를 찾기 위한 글쓰기 탐구 여정을 시작한다.

어머니가 사망하고 나서 마침내 다섯 권의 책으로 완성한 작가는 자신의 정신 상태가 ‘유아기의 의식에서 오래 침전된 미 성숙한 어른'이라고 스스로 진단을 내린다.

그렇게 진단을 내리고 나서 비로소 짐승 같은 행동과 폭력을 서슴치 않았던 아버지와 귀족의 작위와 명예를 목숨 같이 여기며 오로지 사회적 체면만 내세웠던 어머니와 자신을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들 부모도 조부모에게 비슷한 성적 학대를 당했고 그 조부모들도 부모에게 받은 이 끔찍한 대물림에 대해 작가의 친구이자 정신과 의사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의 죽음은 네 인생 최고의 사건이지 아니, 아버지의 죽음 다음으로”













'사람들은 모두 편견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앤드류 솔로몬의 <부모와 다른 아이들>에는 게이, 청각 장애인, 소인, 다운 증후군, 자폐증, 정신분열증, 신동, 강간으로 잉태된 아이, 범죄자가 된 아이, 트랜스젠더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의 심리를 집요하게 탐구한 작가 앤드류 솔로몬은 300가구가 넘는 가족들을 상대로 4만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예외적인 정체성을 갖고 태어난 아이들 중 상당수는 어린 시절에 학대와 폭력을 당한 상처로 인해 부서지고 피폐된 영혼을 가진 성인으로 성장 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작가 앤드류 솔로몬은 남들과 다른 재능과 특징을 타고 태어난 아이를 제대로 양육하지 못한 부모들 역시, 성장 과정에서 큰 문제를 안고 있었고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이에게 정상인의 신체를 갖기 위해 무시 무시한 수술을 감행하는 부모들 역시 아이의 삶보다 자신들의 삶이 우선이였다는 것을 여러 가족의 사례를 통해 펼쳐 보인다.


한야의 작품 커버를 찍은 사진가 피터 후자는 우크라이나에서 건너온 어머니가 뱃속에서 육개월 때 생부에게 버림받는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카메라 한 대만 달랑 손에 들고 뉴욕에 정착해서 독학으로 상업 사진계로 진출하고 닥치는 대로 동물, 사람들의 초상화를 날것 그대로 렌즈에 담아 1960년대 뉴욕이라는 거대한 인종의 용광로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시선과 영혼을 사로잡는다.

(c) Susan Sontag Peter Hujar American 1975


수전 손택은 사진가 피터 후자의 작품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피터 후자의 카메라 렌즈에 포착된 사람들은 온전하게 드러나 있는

살갗 위로 촉촉하게 스며 올라온 슬픔이 보인다.'

-수전 손택

재능이 있는 것과 장애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태어나는 순간 부모를 놀라게 하거나 겁에 질리게 해서 걱정스럽게 만든다.

이 세상의 수 많은 예비 부모들은 곧 태어날 아이가 장애를 갖고 있지 않은지, 재능을 타고 나는 건 아닌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 편으론 자신의 아이가 뛰어난 재능을 갖고 태어나기를 바란다.

한야의 소설 <리틀 라이프>에서 주드는 교수의 격려와 지원을 받아 판사의 재판 과정을 돕는 연구원이 되지만 어린 시절에 수도원에 버려진 상처를 끝내 극복 하지 못한다.

아들 패트릭 멜로즈의 몸에 굳은 살이 박혀 버릴 정도로 신체적 정신적 학대를 가한 아버지 데이비드는 사회에서 존경 받는 의사로 세상의 모든 천박함을 경멸하는 삐뚤어진 자아를 가졌던 병든 인간이였다.

대다수의 부모들은 지금의 자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 애초에 다른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고 믿는다.

그렇게 태어난 자식은 부모에게 운명으로 주어진 선물로 설령 장애가 있어도, 잘못을 저질러도, 상처를 주어도, 심지어 먼저 세상을 먼저 떠나도 자식은 부모의 삶의 일부가 되어 영원히 끊고 싶어도 끊어 버릴 수 없는 천륜이 된다.

사진가 피터 후자와 어머니 로즈


이 세상에 모든 걸 주는 관계란 존재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영으로 시작해서 영으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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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씨 2024-06-28 14: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아...
꼭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목록의 가장 우선 순위에 둔 작품들이 이 페이퍼에 한꺼번에 있으니... 너무 놀라워요. ^^
잠깐 잊고 있다가 다시 상기하게 되네요.
소개 감사합니다.

2024-06-28 17: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깨비 2024-06-28 15: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틀 라이프... 살까말까 살까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스캇님까지 등판하셨으니 이제 사야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ㅋㅋㅋㅋ

2024-06-28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4-06-29 0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모가 가장 쉽게 망가뜨리는 게 바로 자식이 아닌가 싶네요 그렇게 하는 부모도 자기 부모한테 비슷한 일을 당했을지도... 꼭 그런 게 대물림 되지는 않기도 하겠지요 부모와 다르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많지 않을지 몰라도...


희선

2024-06-30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워터멜론 슈거에서
리처드 브라우티건 지음, 최승자 옮김 / 비채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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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인지 당신은 좀 궁금해 하겠지만 나는 정해진 이름을 갖고 있지 않은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내 이름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그냥 마음에 떠오른 대로 불러달라.]


일 년 열 두 달 달콤한 냄새가 감돌고 어떤 꿈이든 실현되는 완벽한 낙원 '워터멜론 슈가에 살고 있는 나는 이름이 없다. 원래부터 이름이 없었는지 아니면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이름을 버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나’가 살고 있는 곳은 아이디아뜨(Ideath)다.

이 아이디아뜨(Ideath)는 '나’를 지칭하는 ‘I’와 ‘죽음’을 지칭하는 ‘Death’를 합쳐서 아이디아뜨(Ideath)로 즉, ‘내’가 죽은 곳에서 ‘이름 없는 나’가 모호하게 살고 있는 곳으로 그저 불리우는 대로 혹은 누군가가 기억해주는 대로의 그 모습이 바로 ‘나’이다.


'나는 아이디아뜨 근처의 통나무 오두막에 산다. 나는 창밖으로 아이디아뜨를 볼 수 있다. 내 오두막에는 침대 하나, 의자 하나, 테이블 하나, 그리고 내 물건을 간직할 수 있는 커다란 농이 하나 있다. 그리고 밤이면 워터멜론 송어 기름으로 타는 등도 하나 있다.'


아이디아뜨에 통나무 집에서 살고 있는 '나'는 창가로 가 창밖을 내다 본다.

아이디아뜨에서는 요일마다 다른 색깔의 태양이 뜬다.

그리고 요일마다 그 태양을 닮은 워터멜론이 자란다. 붉은 태양이 뜬 월요일에는 붉은 색의 워터멜론이 자라고 검은 태양이 뜬 목요일에는 검은 색의 워터멜론이 자란다.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마거릿이 찾아 오고 다음 날엔 프레드가 찾아 오고 잊힌 작품과 물건들에 관한 모호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프레드가 떠난 후 나는 워터멜론 씨앗으로 만든 잉크에 펜을 적셔 아래 지붕널 공장에서 빌이라는 친구가 만든 목판지에 글을 쓰는 작업을 시작한다.

  1. 아이디아뜨(좋은 곳)

  2. 찰리(내친구)

  3. 호랑이들

  4. 거울동상

  5. 척 영감

  6. 밤에 하는 긴 산책

  7. 워터멜론공장

  8. 프레드(내 단짝)

  9. 야구장

  10. 수로

  11. 에드워즈 박사와 학교 선생

  12. 아이디아뜨의 아름아운 송어 부화장

  13. 무덤조, 수직 통로

  14. 어떤 웨이트리스

  15. 앨, 빌, 다른 사람들

  16. 시내

  17. 태양 그리고 태양이 어떻게 변하는지

  18. 인보일(inboil/작중 등장 인물의 이름)과 그 일당 그리고 그들이 파낸 곳 즉 잊힌 작품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곳, 그들이 저지른 끔찍한 짓과 그들에게 일어난 일, 그리고 그들이 죽어버린 지금, 이 근방이 얼마나 조용해지고 괜찮아졌는지

  19. 매일 이곳에서 생기는 대화와 사건

  20. 마거릿 그리고 밤에 등불을 들고 다니는 그러나 결코 가까이 오지는 않던 여인

  21. 우리의 모든 동상, 무덤에서 나오는 빛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도록 죽은 이를 묻는 장소

  22. 워터멜론 슈거에서 살아온 내 삶

  23. 폴린(내가 특히 좋아하는 사람이다.)

  24. 그리고 백칠십일 년에 걸쳐 스물네 번째로 쓰이는 이 책

여기 이렇게 목록을 적어 나간 '나'는 잊힌 작품을 쓰는 동안 아이디아뜨에서 누군가는 불륜을 저지르고 누군가 자살을 하고, 호랑이에게 부모가 먹히며 아름다움을 칭송 하고 슬퍼한다.

모든 것이 설탕처럼 달콤 할 것만 같은 아이디아뜨에는 날마다 모든 것이 변하고 있고 매번 다른 빛의 태양을 받은 수박들이 각기 다른 색깔로 자라는 기이한 곳이다.

아이디아뜨 도처에는 숲과 강이 흐르고 심지어 거실에도 강이 흘러 그 강에서 마음껏 헤엄치고 다니는 송어가 있다.

반면 사람을 잡아 먹던 식인 호랑이들을 전부 불태워서 멸종 시켜 버린 자리에 세운 부화장이 있다.

이런 유토피아적 세상과 정 반대로 타락한 세상인 '잊힌 작품'이라는 곳은 악당'인보일'들이 위스키를 퍼 마시며 술에 취해 꿈을 망각한 채 타락한 인간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살고 있다.

초목은 자라지 않고 짐승 한 마리도 살고 있지 않는 '잊힌 작품' 세상에 호기심으로 넘어간 마거릿은 자살을 하고 '나'는 폴린이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1967년 미국 문학계를 뒤흔들며 순식간에 200만부가 팔려나간 <미국의 송어 낚시>에 뒤이어 발표한 <워터 멜론 슈거에서>는 날마다 다른 빛깔의 태양이 뜨는 워터멜론 슈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상반되는 잊혀진 작품이라는 가상의 공간으로 나눠져서 자연과 문명, 삶과 죽음, 현실과 이상 그리고 현실과 신화가 단절된 세상이 마치 한편의 우화처럼 그려져 있다.

매 챕터 마다 달려 있는 소제목 아래에 간결한 문장으로 채워진 이야기는 앞선 이야기의 과거-현재-미래가 뒤죽 박죽이여서 장면이 전환 될 때 마다 시점과 시제가 뒤섞여있어서 동 시대 여러 인물들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전개 된다.

1960년대 히피 운동의 문학적 상징이 된 작가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기계 문명과 상업자본주의로 타락하고 퇴폐화 된 것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너머 '인간 중심주의'를 꿈꾸었다.

그가 앞서 발표한 작품< 미국의 송어낚시>의 중심에는 송어라는 상징이 자리 잡고 있듯이 <워터멜론 슈가에서>에서도 송어들이 마음껏 뛰어 노는 세상을 천국이라 지칭했다.

미국 땅에서 흐르는 강에서 가장 많이 살고 가장 많이 잡히는 물고기는 송어로 미국 문학과 철학에서 이 송어가 상징하는 의미는 목가적 이상형을 꿈꾸는 청교도적인 사상을 담고 있다.

너새니얼 호손의 작품 속에는 '박공나무의 숲'이 허먼 멜빌에게는 거대한 '바다'그리고 마크 트웨인에게는 미시시피 강이 있듯이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작품 속에는 '송어'가 있다.



1967년 <워터멜론 슈거에서> 작품이 발표 되었을 당시에 미국 땅에서 더 이상 송어가 뛰어노는 하천을 찾기란 점점 어려워졌고 산업자본주의의 거침없는 확장과 팽창으로 오지와 대자연은 사라져서 송어들이 헤엄치던 곳은 야영지와 리조트가 됐다.


[내가 오래전부터 알아온 송어 한 마리가 무덤을 넣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치어 였을 때 아이디아뜨의 부화장에서 자란 송어였다. 내가 그걸 아는 이유는 그의 턱에 자그마한 아이디아뜨 방울이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이가 무척 많고, 몸무게도 무척 많이 나갔는데, 지혜롭게 느릿느릿 움직였다.]


워터멜론 슈거에서 살고 있고 발생하고 있는 그 무엇에 대한 실체는 모두 모호하다

도대체 아이디아뜨는 무엇이고? 마거릿은 왜 자살했고? 폴린은 어디서 불쑥 나타났는지...라는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앞 뒤 페이지를 여러 번 들춰 봐도 명확한 의미도 찾지 못하고 어떤 인간관계나 인물들의 구체적인 특성조차 알지 못한다.

일곱 가지 태양이 뜨는 아이디아뜨에서 일곱 가지 워터멜론이 만들어 내는 일곱 가지 워터멜론 슈가로 무엇을 만들어낼 것인지는 오직 ‘나’만의 선택이고 또 ‘나’의 몫이기 때문에 ‘나’ 또한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은 없다.

<워터멜론 슈거에서>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워터멜론 슈거에서는 여러 가지 일이 다시, 또다시 행해졌다.'


1960년대 미국 비트 세대의 우상이였던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해가 갈 수록 독자 수는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고 발표한 작품들의 거듭된 실패로 인해 극심한 좌절감에 고통스러워하다가 마흔아홉 살이 되던 해 1984년 창을 열면 태평양이 보이는 호텔 방에서 수렵용 44구경 매그넘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쏴서 자살한다.


이 작품의 마지막은 이런 문장으로 끝이 난다.


[연주자들이 각자 악기를 들고 자세를 취했다. 그들은 시작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제 몇 초 남았을 뿐이다, 라고 나는 썼다.]

그가 남긴 천국은 아름답지만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는 잊힌 작품 입구입니다

조심하십시오

당신은 길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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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6-17 07: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이디아뜨(Ideath)라는 단어를 보면서 문득 플라톤의 이데아Idea가 연상되었습니다. 플라톤은 이데아만이 완전하고 영원불멸한 실재라고 했는데 서두에 나온 ‘천국은 아름답지만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는 문장과 묘하게 연결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 작품이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2024-06-17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6-17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6-17 1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6-17 1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 패거리
필립 로스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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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미국 대법원관 자리에 올라간 얼 워런(1891~1974)이 이끄는 대법원은 매사 진보적인 판결을 내려서 흑백 분리주의 정책을 유지 하고 있었던 미국 사회에 큰 변화를 몰고 오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얼 워런 대법관은 흑백 인종차별을 철폐하고 나서 형사피의자와 피고인의 권리를 두텁게 보장했고 선거구 인구 불평등을 위헌으로 판시하면서 보수 정치인들의 표밭을 뒤흔들어 버린다.

일련의 진보적인 판결에도 불구하고 미국 땅에는 여전히 흑인 전용 화장실이 존재 했고 가게와 공공 장소 학교 그리고 클럽 마다 흑인 사절이라는 푯말을 내걸었다.


1960년 11월 8일 민주당의 대선 후보였던 존 에프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 되면서 미국 전역에 진보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1963년 11월 22일 재선 선거를 앞두고 미국 텍사스 댈러스 파클랜드 헐스를 퍼레이드 하던 중에 리 하비 오스월드의 총에 맞아 암살 당하고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예비 선거의 후보자 로버트 F. 케네디가 팔레스타인 난민 시르한에게 친이스라엘 성향이라는 이유로 선거 유세 중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면서 미국의 진보 정치에 검은 먹구름이 드리워 지게 된다.


8년 후 1968년 대선을 앞둔 대통령 예비 후보 리처드 닉슨은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헌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법률가를 대법관으로 임명하겠다고 약속하고 1968년 3월 31일 존슨 대통령이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자 워런 대법원장은 그가 후임 대법원장을 임명할 수 있도록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1968년 6월 26일, 존슨 대통령은 자신의 친구이자 예일 로스쿨을 졸업한 유대계 에이브 포터스(1910~1982)를 대법관 후임으로 지명한다.

유대계 에이브 포터스 대법관은 모든 사안에 대해 진보적인 판결을 내렸다는 사실을 크게 우려한 공화당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때마침 에이브 포스터는 고액 보수를 받고 강연을 다녔던 과거 이력이 들통나버린다.

논란이 급속도로 확산되자 에이브 포터스는 친구이자 마지막 대통령 임기가 남은 존슨 대통령에게 지명을 철회 할 것을 요청했고 존슨은 이를 받아 들였다.


그 해 11월 공화당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 되고 워런 대법관이 이듬해 5월에 사임하면서 대법원에 두 명의 대법관 자리가 생기게 되어 닉슨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보수의 가치를 내건 깃발 두 개를 꽂아 버린다.


가장 먼저 닉슨 대통령은 미네소타 출신이자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법무차관보를 역임한 워런 버거(1907~1995) 컬럼비아 지구(DC) 연방항소법원장을 후임 대법원장으로 지명했다.

그 다음으로 닉슨 대통령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인 클레멘츠 헤인스워스 제4연방항소법원장을 지명했으나 과거 인종차별적 발언을 한 사실이 드러나서 상원에서 45대 55로 인준이 부결되자 뒤이어 닉슨은 플로리다 출신인 제5연방항소법원 판사 해럴드 카스웰을 지명했지만 그 역시 인종차별 성향임이 드러나서 상원에서 45대51로 인준이 부결되어버린다.

닉슨은 남부에 보수의 깃발을 꽂으려는 시도가 연달아 실패하게 되자 버거 대법원장이 추천한 미네소타 출신의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해리 블랙먼(1908~1999을) 제4항소법원 판사를 대법관으로 지명한다.

1970년 6월 상원은 해리 블랙먼을 94대0으로 통과시키고 1년 뒤 대법관 두 명이 건강 상의 이유로 사의를 표명하자 닉슨 정부는 만세를 부르며 버지니아 출신으로 미국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낸 루이스 파월(1907~1998)과 법무부 차관보이던 윌리엄 렌퀴스트(1924~2005)를 대법관으로 지명하면 미국 대법원을 완벽하게 보수주의자들이 장악 하게 만들어 버린다.

취임 한지 ​불과 2년 반 만에 닉슨 대통령은 대법원장과 대법관 3명을 임명하는 기록을 세워서 대법원을 보수 4인, 중도 2인, 진보 3인으로 바꾸어 버렸다.


미국의 진보 언론은 닉슨의 깃발이 꽂혀진 대법원을 ‘닉슨 대법원’이라고 불렀다.

1972년 1월 7일 일명 닉슨의 꼬리표가 붙은 대법관들로 구성된 미국 대법원은 잇달아 진보적인 판결을 내리면서 닉슨 정부를 경악 시켰고 미 전역으로 엄청난 진보적 개혁의 바람이 불게 만든다.

가장 먼저 1971년 4월 대법원은 먼 거리에서 통학 시켜서 라도 스쿨버스로 백인 학생과 흑인 학생을 통합 시켜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로 많은 백인 학생들이 멀리 떨어진 흑인 학생이 많은 학교로 스쿨버스를 타고 다니게 돼서 백인 학부모들의 강력한 저항이 시작되었다.

곧바로 닉슨은 이 문제에 연방법원이 개입하는 데 반대했으나 버거 대법원장은 대법관 전원 판결로 자신을 지명한 닉슨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렸다.

두 번째 진보의 바람을 불러 일으켰던 판결은 ​1971년 6월 30일 미국 정부는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가 기밀문서로 분류된 펜타곤 페이퍼를 게재하는 것을 금지할 수 없다고 판시했지만 대법원은 6대3 판결을 내리고 뒤이어서 사형에 대해 잔혹한 형벌이며 자의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이유로 대법원은 5대4 판결로 위헌으로 판시했다.

이 판결로 사형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주(州)는 형법을 개정해서 사형 판결 요건을 엄격히 정해야 했고 차츰 미 전역으로 사형 집행이 중지된다.


지금까지도 찬반의 대립을 불러 일으키며 미국 땅을 분열 시키고 있는 낙태 문제는 1973년 1월 22일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낙태 문제에 대법원이 낙태금지법이 헌법이 보장하는 여성의 사생활권을 침해한다며 7대2로 위헌 판결이 선고되기 시작하면서 미 대륙을 넘어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다.

당시 대법원은 임신 첫 3개월 동안 여성은 자신의 의사로 낙태를 할 수 있고 3개월 동안 미국의 주정부는 여성의 건강을 위해서 규제할 수 있으며, 마지막 3개월 동안은 여성의 생명과 건강을 위한 경우가 아니면 주 정부 법으로 낙태를 금지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닉슨이 꽂아 놓은 대법관들 모두 진보적인 성향으로 돌아서서 이번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낙태 문제 판결로 낙태를 둘러싼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생각했지만 이 판결은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와 가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한 생명 운동(Pro-Life Movement)을 촉발 시키면서 미국을 두 개의 이념과 사상, 종교로 대립하는 양극화에 불을 질러 버렸다.


1980년대 낙태에 대한 입장은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정체성 차원의 문제가 되었고 1980년 11월 4일 공화당 대선 후보인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 되면서 대법원에 또 다시 보수주의 깃발이 꽂히게 된다.

2016년 11월 미국 워싱턴 연방대법원 앞에서 복음주의자들이 ‘생명을 지켜라’ 등의 팻말을 들고 낙태 반대 집회를 열었다. 당시 이들은 5개월 전 대법원이 텍사스주에서 낙태금지 법에 위헌 결정이 내려지자 이에 반발해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일명 바이블 벨트 지역에 거주 하며 활동하고 있는 미국 복음주의자들은 대선 같은 대형 정치 행사에서 낙태 및 동성애 반대, 작은 정부, 총기 자유화를 내걸며 강한 조직력과 결속력을 바탕으로 일반 유권자보다 적극적으로 투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전미복음주의연합(NAE)에 따르면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예수를 구원자로 믿으며 다음과 같은 신념을 내세우고 있다.


- 성경주의(성경이 절대적 기준)

-십자가 중심주의(예수의 희생을 강조)

-회심주의(성경에 의한 거듭남을 강조)

-행동주의(사회 참여)


​미국 백인 복음주의자들은 2004년 대선과 2016년 대선에서 모두 공화당 후보인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79%)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81%)에게 완전한 몰표를 던져서 당선을 시켰고 2016년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당선 시키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단합하는 정치 집단세력이라는 걸 증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진보 성향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사망 한지 불과 8일 만에 낙태 반대론자인 보수 성향의 에이미 코니 배럿 판사를 후임으로 지명 했고 2022년 6월 24일 . 진보 성향 대법관 3명을 제외하고 보수 성향으로 채워진 대법원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하고 낙태는 각 주가 스스로 규제하도록 판결하면서 후 폭풍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 국민들의 삶 중 어떤 부분에서도 불의를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우리는 공정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부자와 특권층 뿐만 아니라 가장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공정한 사회입니다. 요즘 흑인의 힘이니 여성의 힘이니 이런저런 힘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태아의 힘은 어떨까요? 비록 세포에 불과 하다 해도 그들 역시 권리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들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권리를 위해 싸울 겁니다.]

-필립 로스의 <우리 패거리> 중에서


1971년 닉슨 대통령이 낙태에 반대하는 연설을 패러디한 필립 로스의 <우리 패거리>은 ‘트릭 E 딕슨’이라는 가상의 대통령을 내세워 그가 재선을 위해 펼치는 정치적 공작을 거침 없는 독설과 조롱, 유머를 뒤섞으며 공화당 출신 미국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을 향해 빅 펀치를 날려 버린다.


낙태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태아의 권리’를 주창한 1971년 4월 닉슨의 샌클레멘테 연설을 마치 한편의 풍자극 시나리오처럼 구성한 필립 로스는 태아 권리를 명분 삼아 (1972년 재선거 전) 태아 투표권까지 법제화 시켜서 재선에 당선 되기 위해서 온갖 모략을 참모들과 도모하는 소설 속 대통령 트릭 딕슨을' 리키(Tricky, 사기꾼)'로 부른다.


“이 나라가 다시 위대해지는 데 꼭 필요한 것은 바로 대량의 무지”라는 위험한 생각을 품고 있는 미 합중국 트리키 대통령은 12~13살 짜리 보이스카우트 단원 소년 세명이 반정부 세력 집단으로 파악한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숨지자 정치·군사·법률 참모들을 모아 놓고 사살 진압과 즉결 처분 안부터 좌파 화 공작 시나리오를 짜기 시작한다.

트리키 대통령은 국가의 모든 정책을 마치 미식축구 전략 짜듯 추가 논의로 밀어붙이고 보수성향과 반대의 길을 가는 진보적인 국가를 향해 포르노 정부라 지칭한다.

그는 국가의 공권력으로 사회의 정의와 공공 이익을 우습게 보며 법원에 자신들의 가치 성향에 부합하는 법관들을 앉혀 놓고 시민들의 눈과 입을 가려 버린다.

이렇게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 줄 법관들을 앉혀 놓은 트리키 대통령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가가 아니”라, “결정을 내린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전체주의적 지배 논리를 시민들에게 늘어 놓는다.

이토록 음험하고 음흉한 다크 베이스 같은 독심술을 품고 있는 대통령의 모습을 작가 필립 로스는 1970년대 미국 사회를 두 개로 갈라 버리며 첨예하게 대립했던 사건들을 수면 위로 올려 버린다.


[목사, 이건 내 정치 생명이 걸린 문제요! 목사와 내가 보기에 더 훌륭한 퀘이커 교도가 되기 위해서라도 지금 우리가 상대하는 어린 녀석 무리는 무시무시한 거짓말에 오염되어 있소. 그들의 정신을 깨우면서 동시에 대통령직의 위엄과 신망을 회복하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만약 이 두 가지 중요한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내가 텔레비전에 나가 동성애자라고 말해야 한다면 나는 그렇게 하겠소. 예전에 나는 앨저 히스가 공산주의자라고 용감하게 말했어요. 흐루쇼프를 가리켜 약자를 들볶는 불한당이라는 말도 용감하게 했고, 분명히 말하지만 지금도 나는 스스로 동성애자라고 용감하게 말할 수 있소!]

-필립 로스의 <우리 패거리> 중에서


1971년 이 작품을 발표 할 당시 필립 로스를 향해 복음주의자들이 닉슨 대통령에 대한 모독이라고 맹비난을 퍼붓자 필립 로스는 이에 강하게 반발하며 이렇게 맞 받아쳤다.


'저는 제 2차 세계 대전 동안 뉴저지에서 성장하면서 오로지 국민 전체를 '전쟁 사업'에 총 동원 시키기 위해 라디오와 신문 같은 언론들이 정권의 나팔수가 되어서 전투 소식으로 국민의 마음을 자극했었죠.

저도 그 시절엔 열심히 깡통 모으는데 동참하며 동전 한 푼이라도 이념을 위해 자유를 위해 싸우는 군인 아저씨, 삼촌, 사촌 그리고 이웃들에게 보내줬습니다.

아주 대단히 헌신적인 뉴딜 당원이였죠.

1968년 닉슨 대통령은 우리 집안에서 악당으로 불렸고 종종 이모들은 신문에 그의 얼굴이 실리면 손에 부엌 칼을 들고 찍어낼 정도로 증오 했습니다.

저는 베트남 전쟁 시기에 제 인생에서 가장 정치적인 활동을 활발하게 했고 공산국가를 돌아 다니면서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했습니다.

제가 쓴 <우리 패거리>에 등장하는 트리키 대통령을 닉슨 대통령을 풍자하고 우스꽝스러운 똘아이로 그린 것이 아니라 리처드 닉슨 자체가 우스울 정도로 미국 땅에 똘아이 짓을 많이 했습니다.

그만큼 부패하고 음험 하고 무법적인 대통령은 닉슨이 처음이였고 조 매카시도 그 사람보다는 덜 했을 정도죠.

저는 일개 소설가로 고작 이런 이야기로 세상이 바뀌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쓰지 않았습니다.

단지 저는 시위대 한 가운데서 고함 치며 피켓을 흔드는 것보다 종이로 인쇄되어 이런 인간이 버젓이 내뱉는 '미국'이라는 말에 어떤 애국심도 없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 애착심도 없는 패거리들끼리 사기 치고 수작 부리는 꼴을 널리 읽혀지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1974년 필립 로스

마흔 살을 갓 넘긴 필립 로스가 6개월이 채 걸리지 않고 뚝딱 완성한 <우리 패거리>는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기 6개월 전에 발표되었고 이 똘아이들의 행동으로 인해 반 세기를 지나 2022년 미국 땅을 두 개로 갈라 버린 낙태법 폐기 법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까지 충격일 정도로 이 작품은 단순한 소설을 넘어서 예언서처럼 읽혀진다.

복음주의가 미 정계 전반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시기는 1970년대 닉슨 집권기로 1973년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임신중절 권리를 인정한 ‘로 대(對) 웨이드’ 판결을 내리자 낙태를 죄악시하는 복음주의자들은 거세게 반발하며 거리로 나섰다.

2003년 부시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찬반 논란이 극심했던 ‘부분 출산’(태아의 머리나 몸통 일부를 먼저 꺼내는 낙태 방식)을 금지하자 낙태 반대파는 이 방식이 매우 잔인하며 사실상의 영아 살해라고 반발했고 찬성론자들은 감염 위험이 적고 산모에게 안전한 시술이라고 반박했지만 부시 정권은 밀어붙였다.

2016년 백인 복음주의자들의 강력한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 된 트럼프는 집권 이후 줄곧 반낙태, 반이민 정책을 펴며 복음주의자들이 선호하는 정책을 구현했고 재임 중 3명의 보수성향의 대법관을 임명했다.

이 세 명 모두 닉슨 시절에 헌법을 반기를 들며 진보로 돌아섰던 대법관들과 달리 보수적 판결을 충실하게 내리며 미국 사회를 ‘분열과 증오의 정치’로 대립 하게 만들었다.

현재 대선을 앞둔 미국은 전체 비율로 미세하게 바이든이 앞서고 있지만 경합주인 총 6개 지역에선 트럼프가 앞서고 있고 이 지역에는 미국 복음주의자들이 몰려 살고 있다.

필립 로스가 1971년에 쓴 <우리 패거리>의 우두머리이자 미국 역대 최고의 똘아이 대통령 트리키는 이런 말을 내뱉는다.


[미국 대통령, 또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십 대 소녀가 이분을 '자유 세계의 지도자'로 부르는 걸 들었습니다. 자유 세계의 지도자, 제 친구이자 저명한 재판관으로 현재 남아메리카에 살고 있는 법조인은 얼마 전 제게 보낸 편지에서 흥미로운 말을 했습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최고급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어떤 남자가 이분을 '미군 최고 통수권자'로 부르는 걸 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분은 평범한 의미의 지도자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는 비범한 의미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알았던 우리가 마치 반려동물에게나 붙일 법한 소박하고 허물없는 이름으로 그를 생각하는 겁니다.

어린 강아지에게나 붙일 법한 편안하고 친숙한 이름이죠.]

-필립 로스의 <우리 패거리> 중에서


트럼프는 미국 언론에서 "불법무도한 사이코패스(lawless psychopath)"로 심리 전문가들에게는 자기도취적 인격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자로 불리고 있지만 충성스러운 지지자들에게는 우리 이익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권력자로 칭송 받고 있다.

여러 우려 속에서 이번 미 대선에서 복음주의자들과 지지자들이 똘똘 뭉쳐서 트럼프에게 표를 던지게 된다면 포퓰리스트 사이코패스 패거리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미국을 만나게 될 것이고 이는 현재 한국 정치 집단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게 만들 것이다.



무능하고 교활한 정치인에게 작가가 펜으로 맞서는 최대치의 항거를 보여준 필립 로스의 <우리 패거리>는 전 국가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익 집단의 패거리들의 행태와 악행을 실랄하게 풍자한 세기를 뛰어넘는 걸작이다.


[이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이념 전쟁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자신의 이상을 지킬 의욕과 능력이 있는 대 악마가 필요합니다. 오늘 밤 여러분은 우리의 삶 전체에 대해 판정을 내려야 합니다. 역사의 흐름은 우리 편입니다. 우리는 그 흐름을 계속 우리 편으로 묶어둘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옳은 편이니까요. 우리가 악의 편이니까요.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만약 제가 대악마로 선출된다면 악이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게 할 겁니다. 우리 자녀들, 자녀들의 자녀들은 올바름과 평화의 끔찍한 고통을 결코 모르게 할 겁니다.]

-필립 로스의 <우리 패거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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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4-07-06 00: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스콧님~

scott 2024-07-06 02:2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젤소민아님 주말 동안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