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기억의 유령 - 폭력의 시대, 불가능의 글쓰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W. G. 제발트 지음, 린 섀런 슈워츠 엮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5년 6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천재 작가의 마지막 증언, 제발트가 남긴 문학적 유산을 탐구한 <기억의 유령>. 2001년 12월 14일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던 독일 작가 W. G. 제발트가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발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전 세계 문학 애호가들에게 상실감을 안겨주었습니다. <기억의 유령>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까지의 심층 인터뷰와 평론가들의 에세이를 모은 책입니다. 문학적 거장의 진면목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제발트의 문학 세계는 마치 사냥꾼과 같습니다. 역사의 잿더미 속에서 잊혀진 이야기들을 발굴해내는 집요한 탐정이었습니다. 1944년 독일 알고이의 베르타흐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죽음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알프스 고산 지대에서 꽁꽁 언 시신과 함께 지내곤 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의 문학적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와 스위스 프리부르 대학교에서 문학을 전공한 제발트는 스물두 살에 조국을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나치가 아닌 체하는 교수들과 과거를 회피하는 독일 사회에 대한 깊은 실망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으로 건너가 이스트앵글리아 대학교에서 30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치며 브리티시 문학번역원의 초대 원장을 역임했습니다.
"그토록 우연의 일치가 많은 글을 읽고 그 배경이 심란하게도 자신의 삶과 같은 곳임을 알면 기분이 묘하다"라는 평론가의 말처럼, 제발트의 작품은 기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의 문학적 사냥은 과거와 현재, 개인사와 역사적 사건들을 하나의 그물망으로 엮어내는 작업이었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한강의 문학적 질문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와 닮아 있습니다. 한강 작가는 과거는 침묵 속에 묻어둬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윤리의 기반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제발트와 한강이 나란히 던지는 질문은 우리가 과거의 고통 앞에 어떻게 서야 하는지를 묻는 일이자, 그 질문에 스스로를 담보로 삼겠다는 결단입니다. 이 둘의 문학은 모두 죽은 자의 목소리를 복원함으로써 산 자를 구원할 수 있을까라는 거대한 가능성에 대한 문학적 사유이자 실험입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말함으로써 가능한 일들, 그 말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이들이 추구하는 문학의 윤리적 심연이며, 제발트와 한강이라는 작가를 시대 너머로 연결 짓는 가장 깊은 지점입니다.
제발트가 유령 사냥꾼이라고 불렸던 이유는 그의 독특한 문학적 시도 때문입니다. 그는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일과 그 일의 불가능성을 다루는 데 헌신했습니다.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목소리들이 현재에 어떻게 메아리치는지를 탐구하는 작업이었습니다.

특히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그의 작품들은 독일 문학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민자들』과 『아우스터리츠』는 "유럽의 유대인들이 겪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그의 이해도가 여느 독일 작가들보다 독보적"임을 보여주는 대표작입니다. 비평가 루스 프랭클린은 "제발트처럼 도덕적 지위가 있는 작가만이 이런 책을 쓸 엄두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제발트가 문학사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그가 창안한 산문 픽션(prose fiction)이라는 새로운 글쓰기 형식 때문입니다. 현대 소설에서 독일의 산문 전통을 부활시켜 픽션과 논픽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을 구체화한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입니다.
제발트는 자신의 창작 방법을 개를 관찰하면서 터득했다고 고백합니다. "원래 체계적 방식을 좋아하지 않아요. 말하자면 개가 들판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꼴과 같은 방식입니다. 코가 이끄는 대로 다니는 개를 보면 좌표를 설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들판을 이리저리 돌아다닙니다. 그러다 보면 개는 찾던 걸 반드시 찾아요."라고 말입니다.
그의 작품들은 소설과 에세이, 역사서와 회고록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습니다. 독특한 미로 같은 구조의 자유로운 접근법 덕분에 제발트의 문장을 따라가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제발트의 문학적 탐구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시적 접근이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참상에 대해 우리가 떠올리는 이미지들이 사실은 해방 이후의 사진들이었고, 실제 홀로코스트의 현장은 "그 이전에 안 보이는 데서 신속히 처리되었던 것"이라는 그의 지적은 예리합니다.
그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흐릿한 흑백사진들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입니다. 사진은 기억을 보존하는 매체이지만, 동시에 진실을 왜곡하거나 은폐할 수도 있다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발트의 문학은 서늘한 사치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의 문학이 지닌 유혹적 요소들은 과거를 회복하고 삼키고 대체합니다. 이 과정에서 극도로 파괴적인 혼란 상태는 더없이 정확하고 절제된 말로 표현됩니다. 마치 아름다운 선율로 포장된 절망의 노래와 같습니다.
<기억의 유령>에서는 작가의 내밀한 고백들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제발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되는 힌트도 가득합니다. 『이민자들』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전화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나온 존트호펜의 학교 선생님이 자살했다는 전화였다고 말이죠. 그의 작품이 어떻게 개인적 경험과 역사적 사건이 만나는 지점에서 탄생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제발트가 평생에 걸쳐 탐구한 것은 독일 사회의 집단 기억상실과 모의된 침묵이었습니다. 그는 "전쟁에 대한 부모의 침묵, 대학 시절 과거를 회피하고 '나치가 아닌 체하는' 교수들에 대한 좌절감"을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
이러한 침묵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제발트는 스스로 기억 상실을 유도한 독일 사회에서 성장하면서 기억하는 일을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행위로 여겼습니다. 그의 문학은 이러한 침묵에 대한 치열한 반박이었습니다.

개정증보판 <기억의 유령> 부록에는 제발트의 소설에 영감을 준 버지니아 울프의 「나방의 죽음」과 프란츠 카프카의 「사냥꾼 그라쿠스」, 그리고 문학관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제발트의 어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방의 죽음」과 「사냥꾼 그라쿠스」 모두 상징이자 은유로서 사용됩니다. 각각 ‘무력하지만 지속적인 생명’, ‘끝나지 않는 죽음 이후의 여정’을 상기시킵니다. 제발트는 이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얽히는가, 죽음을 지나치고도 과거는 여전히 우리를 떠도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역사와 기억, 트라우마와 치유라는 주제에 관심있다면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문학적 문지기 제발트의 문학 세계로 들어서보세요. <기억의 유령>은 그의 세계를 향한 입문서 역할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