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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과 꿀
폴 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5년 6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 폴 윤의 단편소설집 <벌집과 꿀>을 읽으며 문득 떠오른 것은 우리 모두가 어떤 의미에서는 이주민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리적 이주를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이동하며 살아갑니다. 학교에서 직장으로, 고향에서 타지로, 꿈꾸던 모습에서 현실의 모습으로. 폴 윤 작가는 이 보편적 경험을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특수한 상황과 절묘하게 겹쳐놓았습니다.
간결하고 정제된 문장 안에 깊은 상실감과 이방인의 고독을 녹여냅니다. <벌집과 꿀>에서는 여러 대륙과 시간대를 넘나들며 전쟁, 분단, 이주, 유배, 상실을 겪은 인물들의 삶을 조명합니다.
그들은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폴 윤 작가의 시선은 그 떠남 자체보다, 떠난 이후에도 인간 안에 남아 있는 존엄성과 관계의 흔적에 집중합니다. 인간의 상실과 회복, 기억의 궤적을 성찰하게 합니다.

<벌집과 꿀>은 총 일곱 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연결된 주제를 공유하지만, 각 단편은 서로 독립적입니다. 어느 이야기에서는 전쟁 이후 아내를 잃고 혼자 남겨진 남성이 나오고, 다른 이야기에서는 유배지에서 술을 빚는 여성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삶은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으려 애쓰는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그가 발견했던 무언가가 사라져버린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갈망이라는 감정을 느낀 순간이 언제였는지 떠올려보려고 애를 썼다." - p21
첫 번째 「보선」은 출소한 한국계 청년 보가 미국 북부의 낯선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이야기입니다. 갈망조차 잃어버린 공허함을 지닌 보에게 카로라는 남자와 나누는 대화에서 희미한 빛이 스며듭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가능성을 놓지 않으려는 폴 윤 작가의 마법이 펼쳐집니다.
「코마로프」는 분단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개인의 내밀한 그리움으로 보여줍니다. 탈북 후 스페인에서 청소 일을 하는 주연은 소련 출신 권투선수 코마로프와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바다의 밀물이 들어오고 썰물이 빠져나가듯 자신이 남편을 쉬지 않고 떠올리는 것처럼" 단절의 현실에서 비롯된 아릿한 감정을 시적으로 표현합니다.
세 번째 단편 「역참에서」는 에도시대 일본을 배경으로 조선인 고아 소년의 고국 송환을 호송하는 사무라이의 시점에서 서술됩니다. 디아스포라 당사자가 아닌 제3자의 눈을 통해 이주와 정체성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시점이 흥미롭습니다.
"그 연극은 더 이상 목수가 아니게 된 목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사람은 너무도 오랫동안 오직 집 짓는 일만 하고 살아온 나머지, 그 일이 더 이상 자신의 일부가 아니게 되자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게 되어버립니다."라며 작중 인물이 관람한 연극 이야기는 소설 전체의 메타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잃고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 떠나는 목수들인 셈이라고 말이죠.
「크로머」는 탈북한 부모를 둔 한인 2세 부부 해리와 그레이스의 이야기입니다. 런던 외곽 한인타운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일상은 평범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복잡한 감정의 결들이 숨어 있습니다.
"해리의 내면에 붙들려 있던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빠져나가 사라져버렸다."라며 기억조차 덧없다는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2세대 이주민의 복잡한 감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표제작 「벌집과 꿀」은 19세기 말 연해주에 부임한 러시아 장교의 편지 형식으로 펼치집니다. 고려인 정착촌을 관리하는 러시아인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이 작품은 제국주의 시대의 복잡한 권력관계를 그려냅니다.
"그래요, 우린 비명을 지릅니다. 잠을 못 자고요. 그럼에도 내일이란 게 있지 않겠습니까?"라며 고려인들이 던지는 말은 디아스포라 문학의 핵심을 관통합니다. 절망적 상황에서도 삶을 지속하려는 의지말입니다.
벌집과 꿀이라는 제목은 공동체와 개인, 노동과 결실, 집단성과 개별성의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벌들이 모여 만드는 벌집은 집단의 힘을, 그 안에서 나오는 꿀은 개인의 달콤한 희망을 상징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고려인」은 사할린에서 자란 막심이 교도소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뿌리와 가정에 대한 모호한 감정 그리고 세대 간의 역사적 짐을 섬세하게 포착합니다.
마지막 단편 「달의 골짜기」는 한국전쟁 후 기억도 가물거리는 고향으로 돌아온 동수의 이야기입니다. 폐허가 된 농가에서 고립된 삶을 시작하면서 고아 남매 은혜와 운식을 머물도록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불안정한 기억과 트라우마가 그를 점점 옥죄는데. 돌아온 자의 또 다른 고립에 대한 이야기가 가슴을 두드립니다.

『벌집과 꿀』에서 폴 윤 작가는 특정 집단의 경험을 보편적 인간 조건으로 확장시킵니다.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현대인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존재론적 질문들을 던지고 있습니다.
절제되고 시적이면서도 감정의 깊이를 놓치지 않는 폴 윤 작가의 문체가 마음을 울리는 힘이 있습니다. 작가가 자신의 정체성과 충분히 화해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에도시대 일본에서 현대 런던까지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있어 읽는 맛도 좋습니다.
서제인 번역가가 옮긴이의 말에서 언급했듯이 이 책은 "한 사람의 마음속 빈 곳이 어떻게 위안을 주는 풍경을 빚어내는 거푸집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영어로 쓰인 한국인의 이야기가 다시 한국어로 번역되어 한국 독자에게 돌아오는 순환을 통해 저마다의 이유로 소속감의 위기를 겪는 우리들에게 위로를 안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