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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폴라 일지
김금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월
평점 :
-20250329 김금희.
한 달에 네 권 읽는 정도의 학년 초라면, 감사해야 하는 걸까. 반 아이들의 몸싸움과, 아마도 올해 최초 열리게 될 자치위원회와, 격앙된 부모의 목소리로 학교 탓 교사 탓을 들으며 좀 더 잘 돌봤어야 되는데 죄송합니다, 사과하던 나와, 그날의 모든 것을 곱씹으며 말실수한 것은 없을까, 나의 퇴직 도우미가 되어 버릴 또다른 실수는 없을까, 스쳐가는 얼굴들과 잔상들을 감은 눈에서 못 떨쳐 한동안 잠들지 못한 밤이 가까이 있었다.
그런 나날이라 가장 먼 곳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을지도 모르겠다. 올해 여름 무렵, 남극은 겨울 한가운데일 무렵 어린이들에게 오세아니아와 극지방을 가르치게 될 거야, 그때 도움이 되지 않을까? 굳이 이유 달 필요도 없는데 그렇게 실용주의인 척 스스로에게 말하며 남극에 살다 온 김금희의 산문집을 펼쳤다. 아니, 어쩌다 남극엘 가셨어요… 궁금한 마음이 컸고, 읽기 시작한 순간부터 눈에 들어온 귀여운 일러스트와, 구절구절 문장문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 많아 안도하며(식물적 낙관을 읽다가 놔 버린 미안함 때문에 긴장했었음) 즐겁게 읽었다.
어딘가에 가고 싶은 마음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게 부러웠다. 1학년 작은어린이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나의 꿈은 ( )입니다.’ 의 빈칸 채우기. 무엇이 되고 싶은지 아직 앞으로의 삶이 까마득할 어린이들에게는 늘 가혹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완고한 어린이는 뭐가 되고 싶냐는 말에는 몰라요, 자기 얼굴을 그려야 하는 과제가 잦은데 자기가 그린 자기 얼굴은 실제랑 너무 달라 그 괴리감을 거의 고통으로 여기고 학교에서는 시간 내 과제를 안 하고 거부하는 아이로 찍힌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숙제가 되어버린 그리기 용지를 두고 윽박질러가며 어서 그리라고 다그치고 소리지르는 어미가 되어 버린 날들이다. 남의 어린이, 나의 어린이, 나야 말로 교차성의 총체가 아닐까 싶게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뭐 하고 싶은 거, 가고 싶은 곳 없어? 하고 꿈의 의미를 넓히니까 아이는 순순히 프랑스에 가고 싶다는 것을 꿈으로 적었다. 그리고 프랑스 국기 배색으로 색칠한 꿈기차에 몸을 싣고 에펠탑을 향해 가는 자신인지 엄마인지 모를 인간 하나를 겨우겨우 억지로 그려냈다.
프랑스에 가겠다, 는 건 농담처럼 친할머니댁 다녀오는 길에 이제 집에 돌아가지 않고 프랑스로 가자, 하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몇 년 전부터 마음에 품은 말이었을 것이다. 이건 꿈이니까 다 커서 스스로 이루게 해야 할지, 심어 놓은 말에 어미가 질 책임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 더이상 가고 싶은 곳이랄게 없어졌다. 떠나고 싶은 곳만 간절하게 밀어냈다. 그게 나의 패인일지도 모른다.
김금희 소설가는 남극이 배경인 소설을 구상했고, 직접 남극에 가서 둘러보고 싶었고, 몇 년을 도전한 끝에 취재원으로 연재 기사를 쓰는 구실로 꿈을 이루었다. 세종기지에 머무르며 만난 연구자, 월동대원, 셰프,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이니셜이나 별명으로 표기된 인물들을 다 머릿속에 그려내거나 구별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가장 고독할 것 같은 땅은 어쩌면 가장 사람들과 밀착하고 나홀로는 공동체를 떠나면 그냥 얼어죽어버릴 개체라는 걸 일깨우는 공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남극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에게 호기심과 관심을 보이고, 대화를 나누거나 일을 돕고, 보살핌을 받고, 펭귄과 해표와 고래를 보고, 죽을 고생으로 백두봉에 오르고, 온갖 유빙을 구경하고, 그걸 여기 남극과는 먼 사람들에게 가능한한 세세하게 전하려고 하는 사람이 작가로구나, 그럼 난 시켜준대도 못할지도 모르겠네… 읽는 내내 김금희 소설가의 친화력에 감탄했다. 사실 다시 시작하는 지점에서 유쾌하고 재미있는 사람의 이미지를 덧입고 다니느라 보름 만에 번아웃 지경에 이를 듯했던 나를 생각하면… 나도 어딘가 던져지면 살아남고 얼어죽지 않으려고 그렇게 사회성 있는 척 지낼지도 모르지. 그런데 김금희 소설가는 그런 생활들을 가장 나답게 보낸 순간이라고 하는 걸 보니 영 다른 삶이다.
가장 고립되고 싶었던 내가 남의 어린이들에게는 상호의존성, 상호연결, 이런 말을 내뱉는 순간 멈칫하는 마음이 있다. 이름이 불리는 걸 들으면 어색하면서도 내 존재가 선명해지는 느낌이 든다. 극지 과학자들이 하는 많은 일은 이름 붙이기, 존재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먼 곳에 있는 것들의 이름을 불러주러 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그 사람들은 이끼가 밟힐까, 놓친 비닐봉지가 나동그라져 다닐까, 원래는 그 땅에 없던 생명체가 자신을 매개로 옮겨질까, 조심스럽게 종종 거리고 있다고, 읽지 않았으면 모를 이야기들을 들려 주어서 좋은 독서였다.
책 가운데 김금희 소설가가 찍은 남극 풍광 사진과 손글씨 엽서가 꽂혀 있었다. 남극의 유빙과 펭귄과 자갈과 바다 잔물결과 노을 혹은 여명과 능선이 보는 순간 마음에 들어 가까이에 놓았다. 자주 눈길이 거기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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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상하게도 많은 유빙이 펭귄이나 새 모양이라는 거죠. 월동 대원들끼리 남극의 연구 주제라고 얘기해요.”
그 말을 들으니 정말 얼음들은 신기하게도 S자 모양의 유선형 몸통을 한 오리나 부리가 뾰족한 펭귄처럼 보였다. 미지의 것을 익숙한 형태로 환원시켜 인지하는 인간들의 습관일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월동 천사는 그럴 수도 있을 거예요 하고는 이전 월동대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어느 바람이 심한 겨울날 눈발이 휘몰아치는 세종 기지 선착장에 누군가 위태롭게 서 있었다고 한다. 하얗게 얼어붙은 맥스웰만을 바라보며 그는 기지를 등지고 있었다. 기지 대원들은 모두 실내에 있는데 대체 누가 저렇게 아슬아슬하게 서 있을까. 위험하다 싶어 선착장으로 달려가니…... 그는 킹펭귄이었다.
현존하는 펭귄 가운데 두 번째로 큰 킹펭귄은 남대서양 사우스조지아섬에 무리를 이뤄 살아서 세종 기지에 나타날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모든 생명체에게는 각자의 사정과 사연이 있을 터이므로 그 펭귄은 남위 62도13분까지 내려왔고 세종 기지 선착장 위에서 ‘펭생’의 무게를 짊어진 지친 뒷모습을 기지 대원들에게 들켰다. (101-103)
-“나 사실 네 책상 위의 펭귄 인형을 봤어.”
나는 아주 귀엽더라며 칭찬했다.
”아, 그는 내 친구야. 모든 여행에 함께 다녀. 사람들한테 들으니 너는 매우 매우 매우 유명한 소설가라지?“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나는 손까지 내저었다.
“한국의 조앤 롤링 아니야?” (120-121, 남극에서 구름 씨와 대화 나누다 조앤 롤링 된 김금희 언니)
-우리의 바람과 달리 눈발은 더 심해졌고 군데군데 음영만 다른 회색빛 세상이던 해표 마을에는 눈송이들의 반짝임이 두드러졌다. 촬영을 못 하게 되나 불안했지만 정작 다른 사람들은 느긋해 보였다. 날씨가 허락하지 않으면 남극에서는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다. 그 조용한 순응을 다들 잘 아는 듯했다. (137)
-정작 나는 추워 덜덜 떨고 있었지만 마음은 녹듯이 포근해졌다. 일면 슬퍼지기도 했는데 너무 순정한 것, 아름다운 것, 들끓는 자아 따위와는 무관한 자연 자체의 풍경과 맞닥뜨릴 때 느끼는 기이한 상실감 같은 것이었다. 남극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나는 실제 내 삶은 이곳과 얼마나 다른가를 동시에 감각했다. 적어도 지금의 내게는 남극이 인간이 인간처럼 살 수 있고 해표가 해표처럼 살 수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안정적인 공간이었다. (138)
-아쉬운 마음을 표하고 식당에서 나오니 마치 그 마음을 헤아리듯 특별한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보무도 당당하게 기지 안으로 불쑥 들어온 그는 턱끈펭귄이었다.
“너 여기서 뭐 해?”
내가 물었지만 멋진 붓꼬리도 없는 인간쯤은 무시한 채 턱끈펭귄은 보트동 앞을 지나 기지 앞마당까지 들어섰다. 혹시라도 길을 잃을까 싶어 얼른 막아섰다.
“그만 가, 이쪽은 바다가 아니거든.”
그러자 턱끈펭귄은 앞날개를 사선으로 뻗으며 소리를 꿱 질렀다. 부리도 날개도 꼬리도 없는 주제에 감히 앞을 가로막았다고 불쾌해하는 듯했다. (166-167)
-남극행을 준비할 때 사실 ‘죽음’을 목격할까 봐 두려웠다. 대자연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먹고 먹힘의 문제, 예를 들어 새끼 펭귄을 잡아먹는 남극도둑갈매기를 보면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싶은 걱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도착한 때는 한여름, 새끼 펭귄들은 그런 갈매기들에 어느 정도 대항할 만큼 자라 있었고 이상하리만치 사냥의 장면은 펼쳐지지 않았다. (176, 이 부분을 읽기 전날에 딱, 예전에 아기 동물을 갈매기가 막 뜯어 먹고 얘는 괴로워하는 장면을 영상으로 본 걸 떠올리며 그게 아기 펭귄이었나, 거북이었나, 아마도 펭귄이지, 했는데 김금희 언니도 같은 영상을 봤던 모양이다.)
-“혹시 불편해하면 어떡해요, 운동하는데…...”
다가가고 싶지만 얼마큼 다가가야 할지 몰라 주저하는 성격은 남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배우 김수현을 닮은 LB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불편해하긴요, 다들 환영할 거예요” 하며 내가 남극에서 들은 가장 잊을 수 없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환영받지 못하면 어때요, 그것도 배워가는 거잖아요.” (178, 이 구절을 읽으며, 요즘의 뉴스 헤드라인 볼 때마다 LB를 떠올리고 자책하다가 또 너무 자책하지 말자, 하는 마음을 망상해보았다.)
-풍광 맛집이라는 ‘전망대’로 가는 길은 만만치 않은 자갈밭이었다. 바닷가 자갈들은 둥글기라도 하지 이곳 빙퇴석들은 날카로웠다. 그래도 오른 보람이 있어 마침내 산 중턱에 펼쳐진 평지에 이르렀다. 마리안 소만의 경이로운 풍경이 보였다. 마리안 소만은 빙하가 흘러내리면서 U자 모양이 된 거대한 골짜기로 그 일부는 드러나 있지만 대부분 바닷물에 잠긴 피오르 지형이다. 급경사를 이루고 맥스웰만과 이어져 있다. (221, 오세아니아와 극지방 단원 나갈 무렵 이 부분은 기회 되면 읽어줘야지, 하고 옮겨 적었다. 직접 가본 사람의 묘사 듣고 사진 보면 더 생생할 것 같다.)
-절반쯤 내려왔을 즈음 월동 천사가 “여기 그라운드 서클이 있네요!” 하며 땅을 가리켰다. ‘구조토’라 불리는 그 독특한 지형은 얼음의 동결과 융해가 반복되면서 큰 자갈이 바깥 테두리를 이루고 작고 미세한 돌들이 안으로 모이는 극지방의 독특한 특징이었다. 마치 벌집의 육각형 모양처럼도 느껴졌다. 신기하고 아름다워 한참을 구경했다. (230, 위와 같은 이유로 적어둠)
-나는 남극에서 그냥 ‘나’로 머물러 있는 것이 좋았다. 동료 작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근처에 작가가 없어서 좋았고(?) 예민하게 일상을 대하지 않고 무던해지는 마음이 좋았다. 세밀하게 세공하던 일상을 아주 굵은 붓으로 쓱쓱 살아내는 기분이었다. 원고 작업보다는 내 발과 내 손과 내 눈으로 행하는 경험들이 우선이었다. (255)
-조디악이 달릴수록 그들의 얼굴이 멀어졌고 나중에는 세종 기지도 미니어처처럼 아주 작아졌다. 그 대신 기지 뒤의 백두봉이, 마리안 소만이, 동이 터오는 하늘이, 그러니까 남극의 거대한 자연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마치 두 달간 펼쳐졌던 내 일지의 배경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똑똑히 보라는 듯. 점점 붉어지는 하늘과 그 빛으로 도리어 아주 무겁게 어두워졌던 산등성이는 내 기억에 또렷이 남았다. 압도적인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과 평화, 인간종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만들어냈던 꿈결 같던 일상.
그것을 간직한 채 나는 여기로 돌아왔다. (28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