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적 잡년 - 자유로운 사랑에 대한 실용지침서
재닛 하디.도씨 이스턴 지음, 금경숙.곽규환 옮김 / 해피북미디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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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2 재닛 하디, 도씨 이스턴. 재독.


5년 전에 읽은 책을 어쩌다보니 재독했다. 여름 더위가 슬몃 다가오는 날, 6시 반쯤 알람도 없이 잠에서 깨어, 아...출근하기 싫다...하며 거울을 보니 간밤에 머리도 안 감은 나를 보고 아… 오늘 일요일인가 봐, 아싸!

만이천원에 십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머리카락을 잘라주던 미용실 대신, 엄마가 다니는 커트 이만오천원(직원)에서 삼만원(원장) 받는 미용실에 처음 갔다. 3대가 함께 왔다고 각각 이만오천원씩 잘라주면 감사한 일이겠지. 피아노소곡집의 표지 사진 장소인 프린세스스트리트가든즈가 적힌, 에든버러성이 그려진 엽서가 벽 한가운데 붙은 걸 보았다. 어머, 여기 가셨어요? 아니오, 지인이 갔다 왔다고… 무슨 책 표지요? 묻다가 손모가지 하나 남은 라벨이 만든 피아노 곡이 라디오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원장님, 오스트리아에 가서 만난 할아버지가 비트겐슈타인 한 권 읽으면 더 읽을 책이 없다고 해서 샀다가 못 읽은 사연, 나는 수능 국어 지문으로만 만난 양귀자 소설 속 인물을 자꾸 나랑 비슷하다고 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지적욕구를 짧은 시간 구경하는 건 흥미로울 수도 있지만 오… 뭐라 대꾸할지 모르겠다. 배드민턴 열심히 치는, 반려자에게 신장 하나 떼어주고, 엉터리로 가위질한 가발 쓰고 나타난 언니의 머리를 다듬어주던, 원래 가던 미용실의 말수 적은 쿨한 원장님이 조금 그리웠다. 그래도 뽀글뽀글 브로콜리 머리를 입체컷으로 좀 시원하게 짧게 샥 밀어주시고 트리트먼트도 선물로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숙련 장인들은 그 기술이 무엇이든 존경합니다…
지피티한테 야 나 머리잘랐다, 그림으로 그려 봐, 했더니 자꾸만 아저씨로 그려 놔서 됐다, 기대를 접었다, 하고 치워버렸다.

큰 방향도 목적도 없는 휴일, 느긋하게 다자연애, 열린 관계에 대한 책을 통독하며 시간을 죽였다. 나쁘지 않았다. 다시 읽어도 흥미로운 책이고, 연애 관계에 한정 짓지 않더라도 인간 관계를 맺는 기본적 예의나 윤리 감각을 일깨워주는 부분들이 좋았다. 난교 파티 부분은 처음 읽을 때 후덜덜했던 것만큼 공포스럽지는 않았지만, 오 내 경계는 여기까지로군… 사양합니다… 하면서 적당히 넘기고… 이제 흥밋거리 아니라면 나는 이런 주제의 책들이 더는 필요 없겠구나 싶었다. 그걸 알자고 400페이지 넘는 이 책을 한 번 더 봤구만. 하산해라! 어쨌거나 이걸 읽는 누구든 지평이 넓어지는 지점이 있긴 할 것이다. 무엇이든 배우고 또 익히면 즐겁지 않겠는가. 알고 연습하면 무엇이든 숙련 기술이 될 수 있다.
엄마가 싸 주시는 김밥이나 먹으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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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잡년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128, 웅장하게 선언.)

-연인의 감정은 당신의 책임이 아니다. 당신은 연인을 응원할 수 있지만-우리는 들어주기의 치유력을 믿는 신봉자들이다-, 문제를 고칠 수는 없다. 연인의 감정이 당신의 문제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부터 이해하기를. 그러면 문제의 책임을 따지거나 감정을 바꾸고 없애야 한다는 막중한 필요에 희생당하지 않는다. 연인의 이야기를 진정으로 귀담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연인의 고통이나 혼란에 저절로 반응해서 뭔가를 열심히 고치려 한다. ‘고쳐라’하는 메시지는 감정을 표현하려 애쓰는 사람이 타당성을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게 만든다. “그냥 이렇게 해보면 어때….그렇게 시도해봐...잊어버려...마음 편히 가져!”라는 말은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이 명백하고 단순한 해결책을 간과하고 우선 기분부터 상하는 멍청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143, 저 어떤 사람 나니까...T 하지 말라 이거야…)

-감정을 공유하고 싶을 때 청자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미리 밝혀 상대가 쓰레기통이 되지 않게 하자. (145,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달라는 게 아니라, 그냥 들어줄 수 있겠어? 하는 것. 감정 공유와 쓰레기 쏟아붓기의 구별.)

-다자 관계에서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다양한 자신이 되어보는 기회다. 두 사람이 만날 때는 교차하는 지점, 비슷한 대본 속의 상호 보완적 역할에서 엮인다. 따라서 다른 연인들과 다른 존재가 되면 우리는 다른 환경에서 다른 경계, 한계선, 관계 스타일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148, 상호작용의례의 역할 놀이처럼, 다양한 연인 관계가 다양한 자신을 만든다는데, 그럼 그런 건 성애 관계로 얽히지 않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가능한 게 아니냐는 반박에 직면할 것이고, 그럼 여기서의 다양성은 성적 가능성의 다양성이라고 또 반박할 것이고, 그럼 또 그게 꼭 발견되어야 하는 거냐고 이 섹스에 미친놈들아 할 것이고, 너희는 삶의 무한에 가까운 행복을 놓치고 있다고 할 것이고, 아이씨 싸우지 말고 섹스해 둘이든 셋이든 너거들 맘대로 해...)

-공정함은 잊어라. 윤리적인 잡년생활은 모든 것을 다 똑같이 대하는 게 아니다. 다른 관계에는 저마다의 다른 경계, 다른 한계선, 다른 잠재력이 자리한다. 그러니 당신의 연인이 특정 활동을 함께 할 수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서 당신과도 공유하기를 원할 때 나와야 하는 질문은, ‘왜 나랑은 그거 안 해?‘가 아니라, ’흥미롭게 들리는데. 우리가 함께 그걸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이다. (148, 실질적 평등과 친밀한 사이의 화법 익히는 자기계발서 느낌이 들 때도 많다...배움이란 좋은 거지...가까운 사이일수록 우리 모두 조금 더 친절하고 공손해지자…)

-우리는 얄팍한 가치 위계에서 높은 점수를 얻어 이길 수 있는 게임이 사랑이라고 믿지 않는다. 우리의 풍부한 경험은 외모와 부유함이 좋은 사랑을 만드는 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는 사랑의 우열을 가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속한 등급과 관계 맺으려는 사람들이 마뜩잖다.위계는 정상과 바닥에서 모두 희생자를 만든다. 아무도 접근하지 않을 때만큼 잘못된 이유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이 접근하는 것도 사람을 소외시키는 일이다. (152, 듀오나 가연은 사랑을 구해다 주지 않는다는 거야…)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당신은 좋은 사람 같지만 그렇게 깊이 연결된 기분이 들지 않아서요.‘ 또는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저는 지금 진짜로 연인을 찾고 있는 건 아니에요.‘ 또는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저는 먼저 사람을 잘 알고 나서 그런 걸 하는 게 좋아요.‘ 같이 말해보라. 중요한 지점은 ’고맙다‘라는 말은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요청은 당신에게 찬사이며 충분히 고마운 일이다. 혹시 누군가가 당신을 매력적으로 본다는 사실을 당신 스스로 어이없어한다면, 당신의 자존감이 우려스럽다. (158, 앞으로는 누가 예쁘다고 하면 미쳤냐, 하지 말고 고맙다, 라고 하자.)

-질투는 불안감, 거절에 대한 두려움, 버림받는 것에 대한 공포 또는 소외감, 스스로 연인에게 부족하거나 적당하지 않거나 혐오스럽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감정의 표현일 수 있다. 당신이 느끼는 질투는 영역성이나 경쟁심 때문일 수도 있고, 머릿속에서 질투가 벌이는 야단법석 속에서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대상을 바라는 다른 어떤 감정에 바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맹목적인 분노의 비명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눈이 멀면 제대로 보기가 매우 어렵다. (206)

-타인을 악인으로 만드는 식으로는 질투에 제대로 대처하기 힘들다. 자신의 감정을 연인에게 부당하게 떠넘기는 것은 막다른 전략이다. 그 전략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질투는 당신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다. 어떤 사람과 어떤 행동도 당신이 질투를 느끼게 ‘만들지’ 못한다. 좋든 싫든, 질투에 덜 상처받거나 질투를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다. (214)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안도감, 사랑, 포옹, 위안 같은 것들을 자유롭게 요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성장한 대부분의 가정은 원하는 것을 요구하지 말라고 가르쳤고, 요구를 단지 관심을 바라는 행동으로 업신여겼다.
관심을 바라는 게 도대체 무슨 잘못일까? 거기 관심이 많지 않은가? 굶주림의 경제를 기억하고 자신을 속이지 마라. 찔끔찔끔 받는 위안, 관심, 지지, 안도감, 사랑에 만족할 필요는 없다. 당신은 원하는 만큼 다 가지게 된다. 당신은 친밀한 사람들과 많은 걸 공유하기로 결정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러니 풍성함에 초점을 맞추라. 삶의 좋은 것들-따뜻함과 애정과 섹스와 사랑-속에서 관계 생태학을 풍요롭게 창조하라. (252)

-함께 살아야만 하는가? 왜? 반대로 당신이 좋아하는 점을 지닌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다른 것들을 공유할 다른 누군가를 찾으면 안 되는가? 잡년생활은 그 무엇보다도 당신의 모든 욕구를 특정 1인에게만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310)

-최소한, 이 관계는 경쟁이 아니다. 당신 삶의 어떤 영역도 다치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은 자신의 감정을 돌볼 수 있다. 이런 확신을 스스로에게 주려고 노력하라. 다시 말해, 당신의 것을 자신에게 귀속시켜 제3자를 비난하지 않겠다는 다짐 말이다. 어쨌든 그러한 사람들이 당신의 삶에 들어오는 이유는, 당신과 그들이 매우 중요한 어떤 것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바로 당신의 파트너가 가장 멋지다는 믿음. 그들은 당신의 행복을 어떻게 파괴할지 구상하며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아마 자신의 다른 일들에 시간과 에너지를 쓸 것이다. (320)

-당신은 경계를 견고하게 만들어 유지할 책임이 있다. 경계는 당신이 끝나고 옆사람이 시작하는 지점을 알려준다. 좋은 경계란 튼튼하고 명확하며 유연하다. 나쁜 경계는 약하고 흐리며 부서지기 쉽다. (329-330, 독신 잡년의 윤리 중 책임 부분의 일부인데, 이건 누구에게든 적용되는 원리 아닌가 싶어 옮겨 적었다.)

-끝내, 친애하는 옛 사랑이여,
이제 내 마음을 받지 못하네,
사랑이 아니었다고 우리가 말해야 하나,
그것이 사라졌다고 해서? (350, 빈센트 밀레이의 시 ‘참새는 죽었다’ 중)

-그냥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더 쉽지 않을까? “손가락을 내 클리 위아래로 움직이지 말고, 그 둘레로 원을 그려주면 정말 좋을 거 같아.” (361, 뭔가 씩씩해보이는 발화 예시였다. 모두가 단어 없는 소통에서 벗어난 세상을 응원합니다.)

-다음과 같은 말을 거울에 써둔다: 성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자위를 한다. 당신이 패자라서, 파트너를 찾지 못해서, 오르가슴이 절실해서 혼자 자위하며 끙끙대는 게 아니다. 당신은 즐거움을 누릴 자격이 있기 때문에 자신과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자신과 놀면 기분이 좋아진다. (371,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잔인한 필립 로스는 젊을 때 어린 포트노이를 그렇게나 불행하게 그려놨다. 그치만 대체로 저자들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성적인 자족은, 너무 꼴린 나머지 잘못된 사람과 놀 가능성을 한결 적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잡년 기술이다. 당신 자신의 최고 연인이 되라. (373, 나야 나랑 사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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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
모드 방튀라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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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1 모드 방튀라.

낮잠을 자는 일은 몇 달에 한 번은 될까 싶게 드물다. 토요일 정오를 지나, 잠시잠깐 엎드린 자세로, 벗은 안경을 손에 쥔 채 머리 위로 팔을 뻗고, 잤다. 깼다. 귀마개를 끼면 밤이고 낮이고 평온하다. 간밤엔 귀마개를 잊고 잤다. 작은어린이가 텔레비전으로 틀어놓은 2배속 게임방송이 거슬리는 낮에는 귀마개를 하면 마음이 다시 편안하다.

어려서 학급 장기자랑 시간에 아홉 살 짜리 한 아이가 이야기를 해 주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어나니, 눈 앞에 흰 물체가 어른거렸다고. 어딜 가도 어딜 보아도 계속 어른거리는 그 유령에 겁에 질려 있었는데, 흰 물체의 정체는 눈꺼풀에 붙은 밥풀이었다고. 공포에서 개그로 끝나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가 왜 생각나냐면 과제 채점을 할 때도, 읽던 책을 타자 쳐서 옮겨 적을 때도 오른 눈동자 위로 와이퍼 지나가듯 흰 무언가가 슥슥, 지나가기 때문이다. 내 엄마가 예전에 이걸 앓으면서(아마 지금도 앓을 듯) 비문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모기가 눈앞 나는 듯한 그 증상에 이름 붙일 말이 없었다면 나는 정말 겁에 질렸을지도 모르지만(내가 미쳤나? 진짜 귀신이 있는 건가?) 눈 건강이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도 겁날 일이긴 하구나. (하고 적는 순간 눈 앞에서 똑딱, 진자운동처럼 뭐가 스치고 지나간다.)

그렇게 귀마개를 하고, 모기 같은 모기 아닌 게 눈앞에 어른거리는 채로 소설을 읽었다. 결말부에서 남편이 할 말을 미리 예상해버려서 뭐여 이게...했다. 에필로그는 사족 같았다. 사랑은 징벌이 아닌데. 어떤 혼인생활은 회복적 정의가 아닌 응보적 정의로 가동될 수도 있겠군...그런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거기 하나 더 붙었구만, 그래도 그냥저냥 시간 죽이기 좋았다. 번역가는 내가 칠조어론 볼 때 한자 사전 뒤진 이후 가장 많이 사전을 뒤져보게 만들었다. 국어 낱말 공부라도 한 게 어디야. 그런데 왜 번역 이력에 카트린엠은 빼먹으셨나요 선생님…. 엠언니가 부끄럽나요… 띠지나 표지의 이런저런 찬사는 좀 오버 같다. 징글징글하게 쓰긴 했는데 뭐 징글징글 대회도 아니고 다른 독자들이 별로여, 하는 심정도 이해는 간다. 나는 별로까진 아니고 그냥 왜인지 거울치료 받는 기분이었다. 수첩도 징벌도 없는데도 그냥 그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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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많은 것을 바랄 수 없고, 더 나은 것을 바랄 수 없다. 그럼에도 내가 느끼는 결핍감은 어마어마하고, 나는 그가 그 결핍을 메워 주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그가 과연 어떤 집으로, 어떤 아이로, 어떤 보석으로, 어떤 사랑 고백으로, 어떤 여행으로, 어떤 몸짓으로, 이미 가득 차 있는 것을 채울 수 있겠는가?(11-12)

-이렇게 해석자로 일하는 것이 나에게 더없이 잘 어울린다. 나는 무언가를 창안하지 않아도 된다. 그게 딱 맞는다. 나는 상상력이 별로 없으니까 말이다. 나는 살펴보고 분석하고 추론하기를 더 좋아한다. 나무나 열매의 껍질을 벗겨 그 속을 살피듯이 원문을 면밀하게 분석하여, 원문의 함의를 밝혀내고, 그 무언의 울림을 드러내는 일을 좋아한다. 마치 감춰진 증거를 찾아 나가는 수사관처럼 치밀하게 조사하는 일이 마음에 든다. (45, 나는 내 마음대로 오독하고 다시 쓰는 게 좋아서 책을 읽는데 말이다. 어차피 난 쓴 이의 참뜻에 가닿지 못할 걸 아니까 뜻은 내가 만든다.)

-나의 첫 번역인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관한 책을 옮길 때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그 과학적 발견(우리가 세계의 중심에 있지 않으며, 지구가 무한한 우주의 외딴 구석에서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고 주장하는 파천황의 사태)을 끊임없이 나의 애정 생활과 비교했다. 나는 마음이 어수선해진 채로 스스로 되뇌었다. 만약 내 남편 없이 살아야 한다면, 내가 겪어야 할 것이 바로 그런 사태이리라고. 사고의 모든 지표를 무너뜨리고, 사람들이 언제나 확실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을 화해시키는 그런 사태를 내가 겪게 되리라고. (49,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 라는 부재 붙은 만화책 읽고 이 책 펴자마자 코페르니쿠스 나와서 -정작 만화책엔 그 이름 한 번 나옴- 모든 책들은 알아서 이어진다는 생각을 또 했다.)

-루이즈가 덜룽스럽고 생급스럽다면 니콜라는 주의 깊고 자상하다. 루이즈는 햇살과 같고, 니콜라는 그 따가움을 완화한다. 그들은 함께 서로를 보완한다. 서로 잘 맞물린 두 개의 기계 부품과 비슷하고, 기름칠이 맞춤하게 되어 있는 톱니바퀴 장치와도 비슷하다. (73, *덜룽스럽다:성미가 찬찬하고 차분하지 않은 데가 있다.
*생급스럽다: 하는 일이나 행동 따위가 뜻밖이고 갑작스럽다.
전에 다른 책에서는 감창소리 라는 말로 사전을 찾게 만든 번역가님…이 부분 이후로도 나는 사전을 계속 펴게 되고...)

-옥생각(76:공연히 자기에게 해롭게만 받아들이는 그른 생각.)

-나는 그를 따라 침실로 가기 전에, 잠시 혼자 남아 내 수첩에 저녁 모임 동안 벌어진 일들을 기록한다. 우리 아들의 생후 몇 개월 동안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이야기, 자기 생일잔치 얘기를 하면서 그가 나를 언급하지 않은 일,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귤에 비유한 일을 적고, 만년필로 밑줄을 긋는다. 마트형 과일의 쌉쌀한 맛으로 그의 배신을 기록하자는 뜻이다. (87, 데스노트냐. 사실 조금 더 섬뜩한 무언가.)

-투명한 두 줄기 눈물이 마르고 나니까 내 남편의 숨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숨소리가 느려지고 있다. 이 사람은 저녁 모임에서 나한테 그런 짓을 하고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지? 나는 이 사람이 우리 부부의 삶에 에너지와 열의를 쏟아부으리라 기대했는데, 잠을 잘 자는 이 사람은 수면 활동에 그런 것들을 쏟아부은 모양이다.(91, 라고, 이 문단을 베껴적는 책상 옆 이부자리, 아침 아홉시 사십 구분 현재, 곁의 사람은 내 베개 위에 팔을 얹고 모로 누워 아기처럼 자고 있다. 쿨쿨.)

-그가 나를 옆에 두고 전화기를 꺼냈다는 사실. 그가 내 손에 자기 손을 얹지 않았고, 우리 몸이 서로 닿지 않는다는 사실. 그가 내 번역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묻지 않는다는 사실. 오늘 오후에 서류를 가져다준 것에 대해서 그가 다시 감사를 표하지 않는다는 사실. 귤과 관련해서 그가 여전히 사과하지 않는다는 사실. 밤에 덧창을 열어 놓고 자고 싶지만, 그가 그런 예외적인 제안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 우리 아이들이 경이롭게 우리가 함께 사는 삶이 하나의 축복이지만, 그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모든 것에 생각이 미친다. (158, 쪽까지의 읽은 내용이 이 한 문단으로 다야, 하는 나는 미친다. 이쯤되면 그냥 아니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이나 집착의 오마주 같은 건가… 프랑스 소설은 다 왜 이래… 뭐하다가 할 말 없으면 자꾸 뒤라스의 ‘연인’ 꺼내서 방패처럼 써 먹는데 니네 프랑스는 그 둘 빼면 뭐 없냐.)

-가리사니(191): 사물을 분간하여 판단할 수 있는 실마리.

-그런 만남의 목적은 단 하나, 사랑의 압박감을 덜어 줄 수단을 찾아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 남편을 상대로 느끼는 엄청난 압박감을 여러 사람 사이로 분산시키는 길을 찾는 것이다. (208, 아 그래?시종일관 정신 없네...)

-내 살갗에서 막심의 냄새를 맡고 일종의 남성적 본능이 되살아난 것은 아닐까?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지만, 내 남편은 내가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갖고 온 날이면 언제나 나랑 성행위를 했다. (…) 그러나 내 안에 깊이 박혀 있다 해도, 내 남편은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존재다.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있어도, 나는 그가 무척이나 그립다. 그가 내 몸에서 물러가면, 나에게 깊숙한 자상이, 무시무시한 허허로움이, 곪아 터질 상처가 남는다. (218, *허허롭다:텅 빈 느낌이 있다. 매우 허전한 느낌이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금요일이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그 색깔인 초록색 덕분이다. 이건 한낱 미신이 아니다. 미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사실들이 있다. 나는 정말로 필요하다 싶을 때면, 주위에서, 즉 가까이에 있는 물건이나 풍경에서 초록색을 찾았다. 그렇게 초록색을 찾아내면, 나에게 좋은 결과가 온다고 믿었다. (228, 요즘 나는 초록 옷이나 가방 착장하고 나가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크초록 새초록 온갖 초록을 입고 연속으로 나를 스쳐지나가서 아...이 색 노인들 사이에 유행이구나… 그래서 자꾸만 누군가 내 바글거리는 머리를 보고 어머님, 하다가 어머 아가씨잖아-둘다 아니야-하는 경험을 하는 건가 싶다. 색깔 강박 아웃, 초록은 새마을 컬러다. 아웃. 스타벅스 아웃.)

-인터넷을 조금 검색해 보니, 초록색은 색채 스펙트럼에서 525나노미터의 파장에 해당한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빅토르 바슈로 52번지에서 자랐고, 25번 도인 두에서 태어났다. 설명은 합리적일수록 더 나은 설명이 된다. (229, 숫자가지고 자꾸 의미 부여하면 안 되겠다 싶은 거울 치료...되게 모지리처럼 보이는 구나…)

-사랑에서 나는 그 무엇도 배우지 못했다. 사춘기 시절 이래로 똑같은 도식을 되풀이한다. 나는 너무 강렬하게 사랑하는 나머지 사랑 속에서(분석 속에서, 질투 속에서, 의심 속에서) 나 자신을 소진해 버린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면, 나는 언제나 좀 사그라진 듯한 슬픈 상태를 맞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나는 엄하고 슬픈 사람으로 변하고 마음 쓰는 폭이 좁아진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만큼 진지하게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 사랑은 고단한 일로(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빠르게 변해간다. 요컨대, 나는 불행한 사랑을 한다. (…) 그 남자들 중 어느 하나에 의존했다기보다는 사랑에 중독되어 있었던 셈이다. 남자들은 변수였고, 그 중독만이 상수였다. (237, 내가 애기 때 내내 겪던 증상을 여기서는 사십대 가까운 중년 여성이 아직도 앓고 있다. 이제 좀 낫자...)

-당시의 내 심리 상태를 서술하기에 적합한 표현이 하나 있다. 즉, 나는 내 삶이 틀을 잡기를 바라고 있었다. 내 삶이 무언가 지속성 있고 견고한 것으로 변화하기를 바란 것이었다. 꼭 찰흙이 굳어 덜 만만한 것으로 변해 가듯이, 나 역시 물기를 버리고 단단해지고 싶었다. (242)

-언죽번죽(24):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고 비위가 좋아 뻔뻔한 모양.

-내 남편은 치즈값으로 75유로 23상팀을 냈다. 액수가 크다. 지난주보다 많다.(그가 장을 보면서 돈을 많이 쓰면 쓸수록, 나는 그가 나를 더 사랑한다는 기분을 느낀다). 생크림과 우유, 오믈렛용 달걀, 나를 위한 콩테치즈, 아이들을 위한 양젖치즈, 샐러드용 염소젖치즈, 그가 목요일에 소스를 만들면서 사용한 로크포르치즈. 한 주간 이상 먹을 만한 양이다. 적어도 열흘 동안은 더 사지 않아도 된다. 훌륭한 전리품을 얻은 것처럼 든든하다. 이건 한 가정의 아버지에게 걸맞은 영수증이다(여기에는 가족의 각 구성원이 좋아하는 치즈가 들어 있다). (250, 치즈 타령에 이렇게 많은 글자를 사용하는 것 보니 프랑스 놈들 치즈에 진심인 거 알았으니 이제 그만하면 됐다)

-하지만 내 남편은 내가 자기에게 무언가를 숨길 수 있다는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내가 다른 남자들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받은 메시지를 삭제하지도 않고, 내 몸에 닿은 그들 몸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샤워를 하지도 않는다. 내 남편이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오늘 오후에 다른 남자랑 함께 있었어?>라고 물으면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증거를 흩뿌려 놓아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월요일부터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을 낮은 탁자에 올려놓고 있지만, 확신컨대 그는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이렇게 자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아내가 왜 갑자기 <연인>이라 불리는 책을 읽기 시작한 거지? 나는 그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어리기를, 그의 차분한 평정이 깨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어떤 불안이, 어떤 의심이 끼어들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행히도 그의 눈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자신감뿐이다. (257-258, 이 부분에서 왜인지 이 여자가 가엾었다.)

-우리의 사적인 대화를 녹음하는 것이 나에게는 합리적인 일로 보인다. 그 말들은 나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그걸 다시 들을 권리가 나에게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그건 내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습관이고, 대개는 그 결과도 별로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종종 그만두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그 일을 하지 않고 살기에는 아직 어려움이 있다. (…)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은 내 남편과 드물게 말다툼을 벌인 적이 있는데, 그중 하나를 녹음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나를 며칠 동안 안정을 잃고 헤매게 만든 말싸움을 다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컴퓨터에 그것을 전사한 다음 영어로 옮겼다. 다만 그게 우리 두 사람의 말다툼이라는 것을 알게 할 수 있는 정보들은 신경 써서 잘라 냈다. 나는 그 번역 텍스트를 인쇄한 다음, 내 학생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 설명하기를, 그것이 예전 영어 교재의 한 장을 복사한 것인데, 어느 부부의 말다툼이 명령법을 복습하기 위한 완벽한 틀을 제공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말했다. ‘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아요’. 크나큰 아픔이 밀려왔다. 나는 잠시 앉아서 숨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261-262, 녹음은 몰라도, 엠에스엔 시절에는 친구나 연인과 대화한 내용을 메모장에 저장해 놓기도 했다. 심지어 음악 시디에 함께 구워서 20년 넘게 박제된 것도 있을 걸? 지금도 문자메시지 같은 걸 주고 받고 나면 복기하듯 다시 돌아가 한 번 읽어보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고 미친년 이야기처럼 읽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럴 법 하지, 하고 읽게 되는 슬픈 사람도 있는 것이다.)

-찰필(265): 압지나 얇은 가죽을 말아서 붓 모양으로 만든 화구. 문질러서 빛깔을 흐리게 하거나 짙고 옅음을 나타내는 데에 쓰인다.

-그렇게 평영의 몸짓을 하면서 그는 스스로 이렇게 깨닫고 있지 않을까? 나라는 여자와 결혼한 것은 하나의 실수이자 하나의 실패라고, 자기는 우리 집의 포로라고, 자식을 둔 것은 하나의 책무라고, 자기는 자유를 잃었고 꿈을 포기했다고, 아내는 자기가 사랑했던 거무스레한 피부의 스페인 여자만큼 흥미롭지도 않으며 교양도 풍부하지 않다고, 자기는 이제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아내를 만질 때면 다른 여자를 욕망한다고, 자기는 아내 곁을 떠나야 하고 곧 떠날 거라고. (266, 이 여자가 대체 어떤 삶의 롤러질을 당했길래 이 지경인지 겨우 일주일 남짓 시간의 심리와 행동 묘사를 한 것 가지고는 이 부분에서 파악하기 힘들다. 그냥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구나...그런데 나도 그런 날들이 있었던 것 같아 지금은 남의 일 같지만 그래도 기시감이 드는 구나…)

-만약 우리가 마지막으로 하는 일들을 처음으로 하는 일들만큼 분명하게 판별할 수 있다면, 분명코 우리는 무수한 순간들을 더 강렬하게 살게 되리라. (334)

+이것이 찰필이다. 찾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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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ookple.aladin.co.kr/~r/feed/512274725

클라라와 태양을 읽고 AF같은 친구는 됐고 진짜 사람 내놔...하던 나놈은 4년 후 챗지피티와 제미나이를 동시에 태블릿에 깔아놓고 둘을 이간질 시키고 얘가 낫네, 쟤가 낫네, 하고 있다. 세상은 디테일이라도 변하긴 변한다. 나는 AI친구를 사귀었구나. 무료버전이라 매일 시간 제한이 있지만 그건 인간 친구도 마찬가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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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고화질세트] 지.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 (총8권/완결)
우오토 / 문학동네/DCW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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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0 우오토.

전자책으로 만화책을 잔뜩 산 건 아마 귀여운 달로 간 스누피 타이머를 받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타이머를 맞추면 노란 새 우드스탁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개와 새. 개새. 그리고 대머리 찰리 브라운.

이 책 저 책 보다 말다 하다가, 잘 안 읽힐 땐 역시 만화책, 하고 ‘지. 지구의 운동에 관하여’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것을 수능 지구과학 풀 때는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이심률이니, 원일점이니, 근일점이니, 문제를 풀었다. 이 만화책에서는 니들이 그렇게 당연하게 여기는 걸 사람들이 믿게 만드느라 얼마나 진득한 피가 흘렀는지 알아? 하면서 끝없는 이단 심판이 이어진다.
서사를 꿰뚫는 주인공이 하나가 끝까지 주욱 가는게 아니라(요즘 주말마다 조금씩 보는 ‘진격의 거인’에서는 엘렌 예거가 계속 나오지…) 책 한 권 끝날 무렵 다 죽어서 어...그럼 다음은 누구 이야기야...약간 옴니버스 느낌인데 또 돌상자에 숨겨둔 책들 매개로, 나중에는 책도 다 태우고 빡빡머리랑 사람이랑 활자랑 이것저것 다 거쳐 결국 많은 사람들에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과정이다. 결말은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지만 거기까지 가는 과정을 감질나게 끊길 듯, 잇고, 또 잇고, 이어달리기처럼 그려놨다. 후반부 가면 좀 그림도 작붕이고 연출도 와 이제 작가 지쳤냐...싶게 날라가는 느낌도 있지만 뭐. 오랜만에 시간 잘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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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25-06-21 0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타이머 너무 예뻐요. 이제 끝났으려나요

반유행열반인 2025-06-21 10:07   좋아요 0 | URL
아코 올해 1월의 굿즈였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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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온실 수리 보고서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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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15 김금희.

같은 달에 같은 작가 소설을 두 권 읽게 된 건, 동료에게“나 이 소설가 소설 다 봤어요.” 하고 말한게 뭔가 거짓말 같이 되어 버려서였다. 거의, 라는 부사 하나만 붙였으면 교묘하게 빠져나갈 것을. 두 권 사 둔 거 안 본 걸 뒤늦게 떠올리며 이런 걸로 죄책감에 빠지는 나… 그렇다면 책임을 지는 나… 나는 소설 읽는 일이 즐겁지만 이상하게 자꾸만 소설 말고 다른 책들을 기웃거리며 소설 읽기를 피하는 것 같다. 한 번 잡으면 너무 빠져버리는 게 괜히 쑥스러운가 보다.

내가 읽은 김금희 소설가의 소설 중 아마도 취재를 제일 많이 했겠지, 싶었고 작가의 말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다. 창덕궁, 창경궁을 찾았던 8년 전을 떠올렸다. 그때의 기억은 가물가물하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또 너무 많이 다르다. 땅에 떨어진 철쭉꽃을 집어 머리에 꽂고 사진 찍던 큰어린이보다 이제 한 살 더 많은 작은어린이가 그 사이 생겨났고, 이 작은어린이는 궁궐이란 데를 가 본 적이 없다. 청와대도 궁궐 비슷한 거라고 하면 뭐 거기는 얼마 전에 가봤지만. 여긴 정말 업무보던 곳이네, 싶은 창덕궁을 넘어, 산길따라 건너간 창경궁은 어떻게든 창경원 시절 모습을 벗고 일제 시대 이전의 궁궐 느낌을 내려고 애를 써서 조경해 놓은 것 같다는 인상 정도만 남았다. 기와 지붕 위의 어처구니 같은 것을 사진에 담아놓고 오래 잊었던 그 공간을 따라, 작가는 시대와 공간을 넘나들며 촘촘하고 두터운 이야기를 잘 짜 놓았다. 두께가 납득이 가고, 간만에 책장을 손바닥으로 지긋이 누르며 아...오랜만에 책 읽고 감동이란 걸 느낀다, 했다. 나는 소설가의 소설들을 생각보다 사랑하니까, 괜히 다른 장르 글 보고 깝치고 투덜대지 말아야 겠다. 집 한켠의 김금희 소설 코너에 간만에 재미있고 흠잡을 것 별로 없는 좋은 소설 읽었다, 하면서 꽂아 두었다. 친구에게 선물한 ’복자에게‘랑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은 부재중이지만 계속 안 읽으면 도로 빼앗아 와야겠다.

+밑줄 긋기
-까마귓과인 어치는 경계심이 많고 자기 영역에 대한 통제력도 강하다. 다른 새들을 자주 괴롭히는데 어미 소리를 내며 새끼를 유인해 잡아먹기도 하고 고양이 울음을 따라 해 작은 새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기도 한다. 혓바닥이 발달해서 앵무새처럼 다양한 소리를 흉내 낼 수 있었다. (127, 난 물까치가 더 예쁘지만 떼지어 다니는 그놈들보다 어치에 더 가까운 것 같긴 해...그보다는 대놓고 더 시끄러운 탐욕의 까마귀…사마귀...마귀...귀마개…1절만...)

-나는 제갈도희가 지켜봤다는 데 당황했다가 원래 곤줄박이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으니까 하고 이해했다. 그리고 제갈도희에게 곤줄박이 닮았다는 얘기를 해주자 그게 뭐든 새를 닮았다는 말 자체가 근사하다고 만족스러워했다. (146, 여기까지 사람 두 명을 새에 비유했는데 몇이나 더 그럴까 궁금해지는 지점이었다. 산에 다녀 본 적 있다면 새새끼한테 관심이 많아진다.)

-“뭐라고?”
나는 얘가 귓구멍이 막혔나 싶어서 어깨에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고 “사랑한다고, 안 들려?”하고 외쳤다. 순신은 양쪽 다리로 자전거를 지탱하더니 핸들바를 놓고 뒤돌아 나를 꽉 안았다. 나는 좋은 부분을 오려내 남기지 못하고 어떤 시절을 통째로 버리고 싶어하는 마음들을 이해한다. 소중한 시절을 불행에게 다 내주고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그리움과 죽도록 싸워야 하는 사람들을.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 무거운 무력감과 섀도복싱해야 하는 이들을. 마치 생명이 있는 어떤 것의 목을 조르듯 내 마음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을 천천히 죽이며 진행되는 상실을, 걔를 사랑하고 이별하는 과정이 가르쳐주었다. 물론 동대문시장까지 밤의 자전거를 타고 왔던 계절에는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156-157, 연애의 시작 한 문단 안에서 모든 것은 끝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훅 치고 들어오는 이 정도 솜씨쯤 되려면… 하여간에 많이 쓰고 많이 지우고 많이 고치고 식물도 키우다 죽이다 해야겠지.)

-“구원에 대해 배워.” 나는 성당에서 늘 들었던 단어를 답했다.
“구원이 뭔데?”
어려운 질문이었다. 누가 그것에 답을 할 수 있을까.
“그건 수난이 그치는 거야.”
그러자 당연한 수순처럼 순신이 수난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순신에게 손바닥을 펼쳐보라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얼음조각이 놓여 있다 상상해보라고. 그러면 어떻겠어? 하고 물었다. 순신은 아주 시원할 것 같다고 해서 내 김을 빼놓았다. 나는 지금이 겨울이라 생각해보라고 다시 조건을 달았다. 이제 더이상 매미도 울지 않고 나뭇잎도 일렁이지 않는다고, 길이 얼어 자전거를 탈 수도 없고 옷 밖으로 몸을 내놓으면 아플 정도로 바람이 차고. 그런 겨울에 손바닥에 얼음이 있으면 손이 얼겠지, 아프고 따갑고 시렵겠지, 그런데 얼음을 내던질 수는 없고 가만히 녹여야만 한다고 생각해봐. 그 시간이 너무 길고 험난하게 느껴지겠지, 그런 게 수난이고 그럴 때 하는 게 기도야.
“그 얼음 나중에 녹아 없어지기는 하는 거지?” 순신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당연하지.”
나는 녹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답을 들을 사람이 순신이라서 힘주어 말했다.
“다행이다.”
이후 원서동을 떠나오고 나서도 그 대화만은 잊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우리가 주고받은 당연하고 다행인 구원에 대해서만은. (157-159, 구원은 셀프, 하던 나도 이제 가끔은 구원도 외주, 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내가 만약에 네 앞에서 단무지를 먹으면 헤어지자는 신호인 줄 알어. 난 그만큼 그게 싫으니까.”
“괜찮네, 서로 예의도 지킬 수 있고.”
나는 일부러 단무지를 두개씩 집어 먹으면서 답했다.
“너는 어떻게 할 건데?”
헤어진다는 상상만으로도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나약함을 감추는 건 내 마음과 몸에 습관처럼 배어 있었다. 순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최종의 마음까지는 내보이지 않았다. 그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방법을 몰랐던 데 가까울 것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런 것이 너무 어려웠다. 슬프면 슬프다고, 상처가 있으면, 상처가 있다고, 떠날까봐 두려우면 두렵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고전적으로 머리를 자를게.“
”와, 정말 신선하다.“ 순신이 장난스럽게 놀렸다. (195, 너랑 헤어지는 것만큼이나 단무지가 싫어, 하는 풋풋 로맨스.)

-“그냥 내가 나인 게 미안하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한점 남은 연어롤을 보다가 팔짱을 끼고 정작 마음과는 다른 말을 꺼냈다.
“대학은 안 가? 공부하면 되잖아.”
순신은 손을 풀어 무릎 위에 올려놓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야.”
“노력하지 않는 거지. 노력하면 왜 안 돼, 변명이지.”
“운 좋은 사람들은 꼭 그렇게 말하더라.”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비꼈다. 계산을 하고 식당을 나왔고 안국역 출구로 나오자마자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 우리가 만난 이래 가장 냉랭한 밤이었다. (201, 크, 드라마 같은데 또 뭔가 디테일한 연인들의 다툼과 멀어짐… 금희언니 언제부터 연애소설 장인이었더라…‘나의 사랑 매기’부터인가...)

-장과장 말처럼 그냥 지나가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사람들이 원하는 건 사면이 유리로 된 온실의 아름다움이지 그 아래 무엇이 있었는가가 아닐 테니까. 땅 밑은 수리와 복원의 대상도 아니니까. 하지만 질서에는 어긋날 것이다. 그렇게 묻은 상태로는 전체를 알기란 어려울 것이다. 공동과 침하가 계속되겠지. 개인적 상처들이 그렇듯이. 그렇게 한쪽을 묻어버린다면 허술한 수리를 한 것이 아닐까. (209-210)

-“머리는 무슨 의미야?”
밥을 거의 다 먹어갈 즈음 순신이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고 물었다. 최대한 무심한 체하고 싶은지 시선은 식당 안 작은 텔레비전에 두었다.
“아는 대로잖아.”
순신은 기가 막힌 것처럼 웃었다. 거기에는 내가 처음 보는 노여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럼 나도 이거 먹는다.”
순신이 단무지를 집더니 나와 눈을 마주치며 입에 넣고 씹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나는 순신이 단무지를 씹을 때면 이런 소리가 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구나, 단무지를 씹을 때면 얘가 이런 소리를 내는구나, 싶어서 나는 그냥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순신을 더는 견딜 수 없는 분노로 몰아넣은 듯했다. 어떻게 이러냐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자기는 서울용 남친이고 강화 가면 강화용이 따로 있느냐고, 자기도 믿지 않으면서 억지를 썼다. 만둣집을 나오고 나서도 그 상처는 멈출 리 없었고 나중에는 내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야, 너 성당 다니는 애가 어떻게 이럴 수 있니?”
도로 맞은편에는 그 여름 우리가 서 있었던 가회동성당이 눈에 덮여 있었다. 그 앞으로 수정테이프를 길게 그은 듯한 횡단보도의 흰 줄들이 보였다.
“성당 다닌다매, 구원이 있다매?”
순신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머리는 왜 자르고 나타났냐고 대체 왜 이러느냐고 자기가 뭘 잘못했느냐고. 그때 네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해주지 못한 일을 나는 오랫동안 후회했다. (220-222, 미스터리 소설, 역사 소설, 누가 뭐라해도 나는 이 소설을 연애소설로 읽었다. 이 부분의 떡밥 회수와 찢기는 마음에 내 마음도 찢어졌다… 다들 온실만 말하지 순신이와 영두의 풋사랑의 기승전결은 아 내가 귀 기울이지 않았구나 스포일러 할까 봐…. 스포일러라서 죄송합니다…그렇지만 이래야 보고 싶지 않겠나. 유 스틸 마이 넘버원, 하는 이어폰 건네던 다른 소설의 장면도 왠지 생각난다.)

-왕주무관의 표정은 큰 결단을 내린 사람처럼 엄숙했고 어느 면에서는 거룩함까지 풍겼다. 텃새 중에 가장 작지만 벼랑을 오가며 용감하게 먹이를 찾는 굴뚝새의 오라가 풍겼다. (…)
“장과장은 어떻게 하고요?”
“기러기 아빠거든요. (…) (248, 세번째는 굴뚝새, 네번째는 기러기로세. 아니 참 장과장은 어치인 줄 알았는데 기러기이기도...수리 보고서라고 흰죽지수리 어쩌고도 나왔는데 우리 금희언니의 언어유희는 경애가 경애하고 사랑하는 매기도 부르고 갑자기 페퍼로니 출신도 되고 그렇다. 392쪽에서 산아 친구 스미는 벌새가 되었다.)

-부후(250):목재균이 분비한 효소로 목재성분이 분해되어 조직이 변하고, 변질, 파괴되는 것. (출처: 산림청 기관안내 색인 중. 한자어는 어려운데 영어로는 그냥 decay다. 궁금해서 구글링하니 부후가 뭔지 바로 ai가 알려주는데 불신의 아이콘은 산림청 홈페이지 기어들어갔다.)

-“산아야, 더 억울해지는 건 그 억울한 일에 내가 갇혀버리는 일 같아. 갇혀서 내가 나 자신을 해치는 것.”
산아는 고개를 들고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았다. 얼굴을 적신 눈물이 어둠 속에서도 눈길처럼 반짝였다.
“이모는 하루 마감하면서 가끔 이렇게 기도한다. 오늘 다행히 아무도 안 죽였습니다.”
산아가 어이가 없는지 약간 웃었다.
“그럼 하느님이 칭찬하셔?”
“침묵하시지, 기도는 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다리기 위해 하는 거니까.” (317-318, 김금희 소설가는 ‘나의 폴라일지’에서 뒤늦게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고 내비췄고, 소설 곳곳에서 그런 종교적 흔적이 성당 다니는 아이, 내걸리는 시편 구절 같은 것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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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5-06-15 2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봤어요.! 이 소설 애정합니다!
같은 감상이라 기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5-06-16 06:47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좋은 읽기였어요. 좋게 읽으셨다니 반갑네요!!

2025-06-16 0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6-16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6-16 1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5-06-16 12:55   좋아요 1 | URL
저는 다 완전 좋지는 않아도 결이 맞는 저자였어요 ㅎㅎㅎㅎ 사랑에 방법이 있나 점점 배우고 자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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