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폴라 일지
김금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50329 김금희.

한 달에 네 권 읽는 정도의 학년 초라면, 감사해야 하는 걸까. 반 아이들의 몸싸움과, 아마도 올해 최초 열리게 될 자치위원회와, 격앙된 부모의 목소리로 학교 탓 교사 탓을 들으며 좀 더 잘 돌봤어야 되는데 죄송합니다, 사과하던 나와, 그날의 모든 것을 곱씹으며 말실수한 것은 없을까, 나의 퇴직 도우미가 되어 버릴 또다른 실수는 없을까, 스쳐가는 얼굴들과 잔상들을 감은 눈에서 못 떨쳐 한동안 잠들지 못한 밤이 가까이 있었다.

그런 나날이라 가장 먼 곳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을지도 모르겠다. 올해 여름 무렵, 남극은 겨울 한가운데일 무렵 어린이들에게 오세아니아와 극지방을 가르치게 될 거야, 그때 도움이 되지 않을까? 굳이 이유 달 필요도 없는데 그렇게 실용주의인 척 스스로에게 말하며 남극에 살다 온 김금희의 산문집을 펼쳤다. 아니, 어쩌다 남극엘 가셨어요… 궁금한 마음이 컸고, 읽기 시작한 순간부터 눈에 들어온 귀여운 일러스트와, 구절구절 문장문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 많아 안도하며(식물적 낙관을 읽다가 놔 버린 미안함 때문에 긴장했었음) 즐겁게 읽었다.

어딘가에 가고 싶은 마음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게 부러웠다. 1학년 작은어린이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나의 꿈은 ( )입니다.’ 의 빈칸 채우기. 무엇이 되고 싶은지 아직 앞으로의 삶이 까마득할 어린이들에게는 늘 가혹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완고한 어린이는 뭐가 되고 싶냐는 말에는 몰라요, 자기 얼굴을 그려야 하는 과제가 잦은데 자기가 그린 자기 얼굴은 실제랑 너무 달라 그 괴리감을 거의 고통으로 여기고 학교에서는 시간 내 과제를 안 하고 거부하는 아이로 찍힌 것 같다. 나는 그렇게 숙제가 되어버린 그리기 용지를 두고 윽박질러가며 어서 그리라고 다그치고 소리지르는 어미가 되어 버린 날들이다. 남의 어린이, 나의 어린이, 나야 말로 교차성의 총체가 아닐까 싶게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뭐 하고 싶은 거, 가고 싶은 곳 없어? 하고 꿈의 의미를 넓히니까 아이는 순순히 프랑스에 가고 싶다는 것을 꿈으로 적었다. 그리고 프랑스 국기 배색으로 색칠한 꿈기차에 몸을 싣고 에펠탑을 향해 가는 자신인지 엄마인지 모를 인간 하나를 겨우겨우 억지로 그려냈다.

프랑스에 가겠다, 는 건 농담처럼 친할머니댁 다녀오는 길에 이제 집에 돌아가지 않고 프랑스로 가자, 하는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몇 년 전부터 마음에 품은 말이었을 것이다. 이건 꿈이니까 다 커서 스스로 이루게 해야 할지, 심어 놓은 말에 어미가 질 책임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제 더이상 가고 싶은 곳이랄게 없어졌다. 떠나고 싶은 곳만 간절하게 밀어냈다. 그게 나의 패인일지도 모른다.

김금희 소설가는 남극이 배경인 소설을 구상했고, 직접 남극에 가서 둘러보고 싶었고, 몇 년을 도전한 끝에 취재원으로 연재 기사를 쓰는 구실로 꿈을 이루었다. 세종기지에 머무르며 만난 연구자, 월동대원, 셰프,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이니셜이나 별명으로 표기된 인물들을 다 머릿속에 그려내거나 구별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가장 고독할 것 같은 땅은 어쩌면 가장 사람들과 밀착하고 나홀로는 공동체를 떠나면 그냥 얼어죽어버릴 개체라는 걸 일깨우는 공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남극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에게 호기심과 관심을 보이고, 대화를 나누거나 일을 돕고, 보살핌을 받고, 펭귄과 해표와 고래를 보고, 죽을 고생으로 백두봉에 오르고, 온갖 유빙을 구경하고, 그걸 여기 남극과는 먼 사람들에게 가능한한 세세하게 전하려고 하는 사람이 작가로구나, 그럼 난 시켜준대도 못할지도 모르겠네… 읽는 내내 김금희 소설가의 친화력에 감탄했다. 사실 다시 시작하는 지점에서 유쾌하고 재미있는 사람의 이미지를 덧입고 다니느라 보름 만에 번아웃 지경에 이를 듯했던 나를 생각하면… 나도 어딘가 던져지면 살아남고 얼어죽지 않으려고 그렇게 사회성 있는 척 지낼지도 모르지. 그런데 김금희 소설가는 그런 생활들을 가장 나답게 보낸 순간이라고 하는 걸 보니 영 다른 삶이다.

가장 고립되고 싶었던 내가 남의 어린이들에게는 상호의존성, 상호연결, 이런 말을 내뱉는 순간 멈칫하는 마음이 있다. 이름이 불리는 걸 들으면 어색하면서도 내 존재가 선명해지는 느낌이 든다. 극지 과학자들이 하는 많은 일은 이름 붙이기, 존재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먼 곳에 있는 것들의 이름을 불러주러 가는 사람들이 많다고, 그 사람들은 이끼가 밟힐까, 놓친 비닐봉지가 나동그라져 다닐까, 원래는 그 땅에 없던 생명체가 자신을 매개로 옮겨질까, 조심스럽게 종종 거리고 있다고, 읽지 않았으면 모를 이야기들을 들려 주어서 좋은 독서였다.

책 가운데 김금희 소설가가 찍은 남극 풍광 사진과 손글씨 엽서가 꽂혀 있었다. 남극의 유빙과 펭귄과 자갈과 바다 잔물결과 노을 혹은 여명과 능선이 보는 순간 마음에 들어 가까이에 놓았다. 자주 눈길이 거기에 닿는다.

+밑줄 긋기
-“그런데 이상하게도 많은 유빙이 펭귄이나 새 모양이라는 거죠. 월동 대원들끼리 남극의 연구 주제라고 얘기해요.”
그 말을 들으니 정말 얼음들은 신기하게도 S자 모양의 유선형 몸통을 한 오리나 부리가 뾰족한 펭귄처럼 보였다. 미지의 것을 익숙한 형태로 환원시켜 인지하는 인간들의 습관일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월동 천사는 그럴 수도 있을 거예요 하고는 이전 월동대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어느 바람이 심한 겨울날 눈발이 휘몰아치는 세종 기지 선착장에 누군가 위태롭게 서 있었다고 한다. 하얗게 얼어붙은 맥스웰만을 바라보며 그는 기지를 등지고 있었다. 기지 대원들은 모두 실내에 있는데 대체 누가 저렇게 아슬아슬하게 서 있을까. 위험하다 싶어 선착장으로 달려가니…... 그는 킹펭귄이었다.
현존하는 펭귄 가운데 두 번째로 큰 킹펭귄은 남대서양 사우스조지아섬에 무리를 이뤄 살아서 세종 기지에 나타날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모든 생명체에게는 각자의 사정과 사연이 있을 터이므로 그 펭귄은 남위 62도13분까지 내려왔고 세종 기지 선착장 위에서 ‘펭생’의 무게를 짊어진 지친 뒷모습을 기지 대원들에게 들켰다. (101-103)

-“나 사실 네 책상 위의 펭귄 인형을 봤어.”
나는 아주 귀엽더라며 칭찬했다.
”아, 그는 내 친구야. 모든 여행에 함께 다녀. 사람들한테 들으니 너는 매우 매우 매우 유명한 소설가라지?“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나는 손까지 내저었다.
“한국의 조앤 롤링 아니야?” (120-121, 남극에서 구름 씨와 대화 나누다 조앤 롤링 된 김금희 언니)

-우리의 바람과 달리 눈발은 더 심해졌고 군데군데 음영만 다른 회색빛 세상이던 해표 마을에는 눈송이들의 반짝임이 두드러졌다. 촬영을 못 하게 되나 불안했지만 정작 다른 사람들은 느긋해 보였다. 날씨가 허락하지 않으면 남극에서는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다. 그 조용한 순응을 다들 잘 아는 듯했다. (137)

-정작 나는 추워 덜덜 떨고 있었지만 마음은 녹듯이 포근해졌다. 일면 슬퍼지기도 했는데 너무 순정한 것, 아름다운 것, 들끓는 자아 따위와는 무관한 자연 자체의 풍경과 맞닥뜨릴 때 느끼는 기이한 상실감 같은 것이었다. 남극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나는 실제 내 삶은 이곳과 얼마나 다른가를 동시에 감각했다. 적어도 지금의 내게는 남극이 인간이 인간처럼 살 수 있고 해표가 해표처럼 살 수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안정적인 공간이었다. (138)

-아쉬운 마음을 표하고 식당에서 나오니 마치 그 마음을 헤아리듯 특별한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보무도 당당하게 기지 안으로 불쑥 들어온 그는 턱끈펭귄이었다.
“너 여기서 뭐 해?”
내가 물었지만 멋진 붓꼬리도 없는 인간쯤은 무시한 채 턱끈펭귄은 보트동 앞을 지나 기지 앞마당까지 들어섰다. 혹시라도 길을 잃을까 싶어 얼른 막아섰다.
“그만 가, 이쪽은 바다가 아니거든.”
그러자 턱끈펭귄은 앞날개를 사선으로 뻗으며 소리를 꿱 질렀다. 부리도 날개도 꼬리도 없는 주제에 감히 앞을 가로막았다고 불쾌해하는 듯했다. (166-167)

-남극행을 준비할 때 사실 ‘죽음’을 목격할까 봐 두려웠다. 대자연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먹고 먹힘의 문제, 예를 들어 새끼 펭귄을 잡아먹는 남극도둑갈매기를 보면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싶은 걱정이었다. 하지만 내가 도착한 때는 한여름, 새끼 펭귄들은 그런 갈매기들에 어느 정도 대항할 만큼 자라 있었고 이상하리만치 사냥의 장면은 펼쳐지지 않았다. (176, 이 부분을 읽기 전날에 딱, 예전에 아기 동물을 갈매기가 막 뜯어 먹고 얘는 괴로워하는 장면을 영상으로 본 걸 떠올리며 그게 아기 펭귄이었나, 거북이었나, 아마도 펭귄이지, 했는데 김금희 언니도 같은 영상을 봤던 모양이다.)

-“혹시 불편해하면 어떡해요, 운동하는데…...”
다가가고 싶지만 얼마큼 다가가야 할지 몰라 주저하는 성격은 남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배우 김수현을 닮은 LB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불편해하긴요, 다들 환영할 거예요” 하며 내가 남극에서 들은 가장 잊을 수 없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환영받지 못하면 어때요, 그것도 배워가는 거잖아요.” (178, 이 구절을 읽으며, 요즘의 뉴스 헤드라인 볼 때마다 LB를 떠올리고 자책하다가 또 너무 자책하지 말자, 하는 마음을 망상해보았다.)

-풍광 맛집이라는 ‘전망대’로 가는 길은 만만치 않은 자갈밭이었다. 바닷가 자갈들은 둥글기라도 하지 이곳 빙퇴석들은 날카로웠다. 그래도 오른 보람이 있어 마침내 산 중턱에 펼쳐진 평지에 이르렀다. 마리안 소만의 경이로운 풍경이 보였다. 마리안 소만은 빙하가 흘러내리면서 U자 모양이 된 거대한 골짜기로 그 일부는 드러나 있지만 대부분 바닷물에 잠긴 피오르 지형이다. 급경사를 이루고 맥스웰만과 이어져 있다. (221, 오세아니아와 극지방 단원 나갈 무렵 이 부분은 기회 되면 읽어줘야지, 하고 옮겨 적었다. 직접 가본 사람의 묘사 듣고 사진 보면 더 생생할 것 같다.)

-절반쯤 내려왔을 즈음 월동 천사가 “여기 그라운드 서클이 있네요!” 하며 땅을 가리켰다. ‘구조토’라 불리는 그 독특한 지형은 얼음의 동결과 융해가 반복되면서 큰 자갈이 바깥 테두리를 이루고 작고 미세한 돌들이 안으로 모이는 극지방의 독특한 특징이었다. 마치 벌집의 육각형 모양처럼도 느껴졌다. 신기하고 아름다워 한참을 구경했다. (230, 위와 같은 이유로 적어둠)

-나는 남극에서 그냥 ‘나’로 머물러 있는 것이 좋았다. 동료 작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근처에 작가가 없어서 좋았고(?) 예민하게 일상을 대하지 않고 무던해지는 마음이 좋았다. 세밀하게 세공하던 일상을 아주 굵은 붓으로 쓱쓱 살아내는 기분이었다. 원고 작업보다는 내 발과 내 손과 내 눈으로 행하는 경험들이 우선이었다. (255)

-조디악이 달릴수록 그들의 얼굴이 멀어졌고 나중에는 세종 기지도 미니어처처럼 아주 작아졌다. 그 대신 기지 뒤의 백두봉이, 마리안 소만이, 동이 터오는 하늘이, 그러니까 남극의 거대한 자연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마치 두 달간 펼쳐졌던 내 일지의 배경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똑똑히 보라는 듯. 점점 붉어지는 하늘과 그 빛으로 도리어 아주 무겁게 어두워졌던 산등성이는 내 기억에 또렷이 남았다. 압도적인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과 평화, 인간종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만들어냈던 꿈결 같던 일상.
그것을 간직한 채 나는 여기로 돌아왔다. (2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0년 전이라고, 처음 읽은 게 10살 쯤이라고 해놓고는 설마 열 살이...했는데 만 10살이니 맞긴 맞았다. 1994년에 나온 가나출판사의 (아마도 중역, 번역자도 안 밝힌 기획실의 옮김) 데미안을 알라딘 개인 중고 검색해보니 1500원쯤에 팔고 있었다. 

 그렇지만 난 그 책을 살 필요가 없었다. 책장 구석구석을 뒤지면, 다 있다. 국민학교 1학년 때 부터 사서 읽은 책은 버리지 않고 하여간에 다, 있다. 

 이 표지를 직접 보고 싶었다. 속 표지를 보니 나영미라는 분이 표지 그림과 삽화를 그리신 모양이었다. 아마도 이 얼굴은 싱클레어인 동시에 데미안이고 에바부인이거나 베아트리스 일 수도 있겠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나 정성을 보면 적어도 그림 맡으신 화가님은 소설 데미안을 제법 진지하게 읽으시고 또 좋아하셨을 것 같다.  

 책은 어린이책이라고 지나치게 축약하지도 않고 그냥 이번에 읽은 책이나 분량은 비슷했다. 맨 뒤에 독후감 쓰는 법 같은 사족 빼면 231쪽, 열린책들 판형(길쭉이인가) 272쪽이니 뭐. 사실 야한 것도 없고 잔인한 장면도 없고 (재미도 없고) 아이들이 못 알아 먹을 뿐이지 굳이 삭제판 무삭제판 만들 이유도 없겠다고 이번에 읽고 생각했다. 심지어 다 읽고 나니 그냥 아는 내용 맞는 것 같아... 

1994년 데미안 가나출판사판 4000원.(현재 중고가 1500원...) 2014년 데미안 열린책들판 2025년 현재 알라딘가 9720원. 책값은 내내 내려갔다고 봐야 맞겠다. 

이 시절의 독후감 노트는 찾지 못했다. 다 있다며! 독후감을 썼다는 게 거짓 기억일 수도 있겠다. 1995년의 나는 어두웠다. 내 가정이 어두웠다. 집에 조현병 환자가 강제 입원을 당했다. 자살시도도 했다. 이제 그 사람과는 만나지 않는다. 데미안의 아버지는 그러고보니 나오지 않는 군. 싱클레어가 데미안의 어머니를 사랑한다. 그걸 알고 있었니? 당연하지! 하는 둘의 대화는 좀 유쾌하다 싶었다. 그냥 그 때 애기인 나는 알아 듣지 못할 이야기를 하나 읽고 와 이런 간지나는 나는 멋져, 하고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았을까. 자존감은 높으면서도 낮던 시절. 
 감흥도 없고 이렇게 우연히 뒤적거려야지나 찾게 될 이 냄새나고 먼지 쌓인 종이더미들을 언제까지 지고 갈 건지 에휴... 내가 죽으면 자식들이 폐지처리장에 넘겨 책들에게 안식을 줄런지 또 (귀찮아서) 이고지고 할런지 모르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잉크냄새 2025-03-24 1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미 알을 깨고 나온 듯한 모습이네요.

반유행열반인 2025-03-25 19:42   좋아요 0 | URL
표지 모습을 말씀하신 걸까요? ㅎㅎ사실 끝까지 읽어도 싱클레어가 득도를 했는지 어른이 된 건지 데미안 같이 된 건지 모르겠더라구요. 데미안 닮게 되는 게 진정한 나 자신이 된다고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eBook] 돌봄의 사회학 - 당사자 주권의 복지사회로
우에노 지즈코 지음, 조승미.이혜진.공영주 옮김 / 오월의봄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같은 병원 간호병동 입원만 해 봤고, 엄마 지난 번 수술에 보호자 입실 금지인 간호 병동이어서 상주 보호자 역할은 처음이다.

어제 퇴원 예정이라고 몇 달 전 진료부터 수술 직후까지 확언하던 의사 선생님이 오프날이라고 (사정도 있고 많이 힘들겠지만) 퇴원 할 날 병원에 한 번도 안 나와서 퇴원 오더를 못 받은 게 문제지만... 환자는 회복됐는데 병원에 일박 더 갇힌 상황... (큰 문제로군 입원비도 하루 더 내고 말이야)
머리 맡 냉장고는 웅웅 우우우웅 돌고(귀마개가 날 살렸다) 간병인 침대란 바닥이 왠지 더 나을 듯한, 그 신화 속 침대(짧고 큰 고통이겠지 이건 길고 잘은...)보다 불편할...

이제 아침이길! 하고 시계를 보면 세시, 깜빡 네시반, 그러고는 누워도 잠들 수 없었다. 다섯 시 반에 벌떡. 세수.

어제 마침 ‘돌봄의 사회학’ 한국어판 서문이랑 용어 해설만 읽은 터이지만(읽는 데 몇 년은 걸릴 듯), 돌봄 노동자들 처우를 잘 알려주는 구절에 밑줄을 쳤다. 그리고나서 몸소 그걸 체험... 간병노동자들과 긴 와병의 가족 돌보는 사람들은 매일 이 침대에서 잔다는 거잖아... 나쁘다. 내일은 진짜 퇴원시켜 주시오... 내보내 줘...

-지금껏 정책 설계자들은 돌봄이 아무나 할 수 있는 비숙련 노동이며 더욱이 ‘여자가 집에서 해오던 공짜 노동’이라고 여겨왔다. 돌봄노동의 싼 임금은 여태껏 정책 설계자들이 돌봄을 받는 고령자의 처우가 그만하면 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쓸모없어진 노인은 사회의 짐’이라고 보는 노인차별 의식이 그 뒤에 숨어 있다. 성차별과 연령차별이 겹치는 영역이 바로 돌봄에서 드러난다. <돌봄의 사회학> (우에노 지즈코) 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데미안 열린책들 세계문학 227
헤르만 헤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50322 헤르만 헤세


데미안은 청소년 문고 같은 것으로 (아마도 가나출판사. 집에 가면 어디 있을 건데 사진 나중에 올려봐야지) 열살인지 열한살인지에 읽었다. 그때 독후감도 썼을 건데 내용이 궁금하다. 아직 청소년이 되기엔 애기였던, 그렇지만 자기가 태어날 때부터 늙은 줄 알았던 그 아이는 이 책을 읽고 가슴 깊이 뭔가 불타오르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냥 좀 특이하고 이상한 책이네, 했을 듯.

삼십년이 지나,헤르만헤세가 이 책을 탈고한 나이에 딱 읽는 나에게는, 이번에는 너무 늦었다. 젊은이들이 늙은이(?)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을까 봐 젊은이인 척 가명 출간하고 젊은작가상까지 타먹은 헤세는 이걸 들켜서 망신을 당하고 문단에서 쫓겨...나는 대신 나중에 노벨상도 타고 85세까지 살아서 전쟁 끝나는 것 다 보고 내가 들어만 보고 읽은 바는 거의 없는 많은 저서를 더 남겼다.

그렇다면 마흔 살고 그보다 두배 이상 살다 죽은 헤세 아저씨 너무 일찍 늙은이 선언했다.

내 의지로 읽은 책은 아니다. 코로나19시절 알라딘이 대여도서를 무료로 많이 풀어줘서 잔뜩 구매해놓고 다운로드 안해서 박제처럼 5년 간 쟁여진 책이 많다. 이것도 아마 그 중 하나일 건데, 뭔 터치 실수였는지 기기에 다운로드 되고 말았지 뭐여. 단 2주 주겠다. 이러면 또 매몰비용 고려 못하는 비합리적 경제인인 나는 읽는 거다...이게 다 우리가 다시 만날 운명이겠거니 하고 열린책들판 데미안을 읽는 거다...아 재미없어...나 다니는 의원 선생님이 정신분석 배웠다던데 하면서…

세계대전 아래, 세상의 종말을 눈앞에 둔 청년이든 중년이든 유럽인이든 아시아인이든 사람들에게, 삶은 진지하고 묵직한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지금은, 몇분 몇초짜리 반짝이는 쇼츠 영상 수십 수백개에 눈을 맡기고 돈 몇 푼에 하루 대부분을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어딘가에 바치는 사람들에게 삶은, 감자란다. fuck fuck하니까…

엄마가 그저께 입원하셔서, 어제 수술을 받으시고, 의사선생님은 철썩같이 그다음날 퇴원, 토요일 퇴원, 하시더니 병원에 안 오셨다. 퇴원 오더 없어 병원에 갇힌 환자...만하루 엄마 돌보던 동생은 더 못해, 하고 바톤터치 요청해서 내가 왔다. 시간과 공간의 방에. 심심한데 또 책읽긴 힘든 어머니께 와이파이를 잡아드리고 유튜브를 열고 이어팟까지 꽂아 드리니 덜 심심해 보이셔서 다행이야… 어제는 많이 아프셨다는데 오늘은 혼자 운신하시고 화장실도 불편함 없이 다녀오시고 다행이다. 그런데 선생님 왜 집 안 보내주고 안 오셨어요…

그덕에 내일 대여만료인 데미안 말미를 마저 읽었다. 30년 전에 읽었는데도 줄거리는 대강 다 아네… 그책엔 삽화도 있었는데 글씨만 잔뜩인 걸 다 읽고 참 잘했어요.

이 책을 읽고 마음을 불사르던 청년들도 있는데 두 번 읽고도 시들한 이 반항아의 이마에도 표식이 보이는지 한 번 봐주세요...

+밑줄 긋기
-나는 오직 내 마음속에서 절로우러나오는 삶을 살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왜 그리 어려웠을까?

-용기와 개성을 지닌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늘 으스스하기 마련이야. 두려움을 모르는 으스스한 족속이 주변을 돌아다니게 되면 정말 마음이 불편하지 않겠어? 그래서 그 족속에게 별명을 붙여 주고 허황한 이야기를 지어낸 거지. 그 족속에게 복수하고 싶었고, 모두들 두려움을 견디는 것에 대해 좀 보상받고 싶었겠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가 한순간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갑자기 긴장해서 목사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목사님이 카인과 카인의 표식에 대해 하는 말을 들으면서, 목사님의 가르침이 반드시 맞는 것만은 아니라고 마음속 깊이에서 느꼈다. 그것을 다르게 볼 수도 있었고 비판할 수도 있었다!
그 순간 데미안과 나는 다시 연결되었다.

-동물이나 인간이 모든 주의력과 의지를 어떤 특정한 일에 집중하면 뜻을 이룰 수 있어. 그게 전부야. 네가 방금 물은 것도 마찬가지야. 네가 누군가를 충분히 정확하게 바라보면, 그 사람에 대해 그 자신보다 더 많은 걸 알 수 있어.

-하지만 내겐 간단한 방법이 있어. 그럴 때마다 목사님의 눈을 빤히, 아주 빤히 쳐다보는 거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잘 견디지 못해. 다들 불안해하지. 네가 누군가에게서 뭔가를 얻어 내고 싶으면 느닷없이 그 사람의 눈을 빤히 쳐다보도록 해. 그런데도 그 사람이 전혀 불안해하지 않으면 포기해! 그 사람한테선 아무것도 얻어 낼 수 없어. 절대로 얻어 낼 수 없다니까!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어. 사실 나는 그게 통하지 않는 사람을 딱 한 명 알고 있어.」

-파리 한 마리가 그의 이마에 내려앉아 코와 입술을 타고 천천히 기어 내려갔지만 그는 주름살 하나 움찔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어디, 어디에 있을까? 무엇을 생각할까? 무엇을 느낄까? 천상에 있을까, 지옥에 있을까?

-그것은 세상에 항의하는 내 방식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스스로를 망가뜨렸고, 이따금 그 상황을 이런 식으로 보았다. 세상이 나 같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세상이 나 같은 사람들에게 더 좋은 자리, 더 숭고한 임무를 제시하지 않는다면, 나 같은 사람들은 망가져야지 별수 있어. 그래 봤자 세상만 손해지.

-새로 산 작은 튜브 안의 고급 템페라 물감이 나를 황홀하게 했다. 그중에 크로뮴산 같은 진한 초록색이 있었다. 그 초록색 물감이 하얗고 작은 접시에서 처음으로 빛을 발하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개개인의 가치는 도대체 어디 있지요? 우리 안에 이미 모든 것이 완성되어 있다면, 무엇 때문에 노력해야 하지요?」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말아요. 자연이 당신을 박쥐로 만들었다면, 스스로 타조로 만들려고해서는 안 돼요. 당신은 이따금 자신을 남다르게 여기고 대부분의 사람들과는다른 길을 간다고 자책하고 있어요. 그런 습관은 버리도록 해요. 불을보고 구름을 봐요. 예감들이 떠오르고 당신 영혼 안의 목소리가 말하기시작하는 즉시, 그것들에게 당신 자신을 맡기도록 해요. 그리고 선생님이나 아버지나어떤 신이 그것을 좋아하거나 마음에 들어 할지 묻지 말아요! 그런질문을 함으로써 자신을 망가뜨리고, 걸어다니는 화석이 되고 말죠.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그 사람의 모습 속에서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미워하는 거요. 우리 자신 안에 없는 것은 우리를 흥분시키지 않는 법이오.

-하지만 난 이해가 안 가. 왜 성적 욕구를 억제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순수하다〉는 거야. 아니면 너는 모든 생각과 꿈에서도 성적인 것을 몰아낼 수 있다는 말이야?」

-또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린 돼지도 아니야. 우리는 사람이야. 우리는 신들을 만들어서 신들과 싸우고 있어. 그리고 신들은 우리를 축복해 줘.

-새로운 신들을 원하는 것은 잘못이었다. 세계에 뭔가 새로운 것을 부여하려는 것은 완전히 잘못이었다! 각성한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의 내면을 확고하게 다지고 결국 어디에 이르든지 간에 자신만의 길을 계속 앞으로 더듬어 나가는 것, 그 한 가지 말고 다른 의무는 결코, 결코, 결코 없었다.

-나는 자연이 던진 주사위였다. 불확실성을 향해, 어쩌면 새로움을 향해, 어쩌면 무(無)를 향해 던진 주사위. 태고의 깊이에서 던진 이 주사위를 작용하게 하고 그 의지를 내 안에서 느끼고 완전히 나의 의지로 만드는 것, 오로지 그것만이 나의 소명이었다. 오로지 그것만이!

-정말로 자신의 운명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사람에겐 같은 족속이란 게 존재하지 않아요. 그는 완전히 혼자이고 그의 주변엔 오로지 차가운 우주만이 있을 뿐이오.

-「사랑을 간구해서는 안 돼요.」 그녀는 말했다. 「사랑을 요구해서도 안 돼요. 사랑은 자기 자신 안에서 확신에 이를 수 있는 힘을 갖추어야 해요. 그러면 사랑은 더 이상 상대에게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끌어당기지요. 싱클레어의 사랑은 내게 끌려오고 있어요. 그 사랑이 언젠가 나를 끌어당기면, 그때 가겠어요. 나는 선물을 주지 않아요. 나를 가져가 주길 원해요.」

-그는 단순히 한 여인을 얻는 대신 온 세상을 마음속에 품게 되었다. 하늘의 모든 별이 그의 안에서 밝게 빛났으며 그의 영혼을 기쁨으로 반짝이게 했다. 그는 사랑했고, 사랑하면서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하면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디 비슷하지만 자그만 nfc디스크 받아서 앱을 깔고 노래를 다운 받으니 휴대전화에서 앱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아이 참 신기한 세상...
알라딘 랜덤 2종 추가 포토카드는 다행히도 오프매장 온라인 둘이 다른 걸 줬다. 히히 힌두교 제단 처럼 꾸며 놓고 애들 흉내 내는 20세기 사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하수 2025-03-19 2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잘 듣고 있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5-03-19 22:25   좋아요 0 | URL
눈뜨고코베인이랑 장기하 팬인데 지디팬인 척(?) 하는 기분이라 (왜 같은 음반 두 개 사...여덟 개 한 번에 산 사람 보고 신기해하더니 ㅋㅋ) 요상해요. 노래는 오늘 온 것 다 좋네요. ㅎㅎ

새파랑 2025-03-20 08: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뭔가 열반인님과 지디랑 안어울리는거 같은데... 브로콜리너마져 들으셔야 하는거 아닌가요? ㅋ

반유행열반인 2025-03-20 15:04   좋아요 1 | URL
골고류 듣는 편이에요. 마릴린맨슨도 아직 좋아합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