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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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2 라우라 에스키벨.


이 책 읽기를 더 미룰 수 없게된 건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북플 마니아에 라우라 에스키벨이 떠 있어서였다. 아 이게 누군데... 나 왜 마니아… 보니까 가장 가까이 높다란 책장 위에 꽂혀 나 얇은데? 금방 볼 건데? 하고 내려다보는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의 작가였다. 열두 달 마다 레시피 하나씩, 너네는 한 번도 안 먹어봤을 중남미 요리로다가, 그렇게 풀어나가는 이야기였다. 식욕이랑 성욕이랑 버무리면 누구 하나라도 걸리지 않겠냐, 이런 치트키를 뿅뿅 써가지고 유쾌하게 써 내려간 소설이었다.

누구나 사랑하고 사랑 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건 이성애건 동성애건 범성애건 성애적 형태로 충족될 수도 있고, 아 난 에이섹슈얼, 그레이섹슈얼이라 그냥 로맨틱만 원해, 아니 다 됐고 난 얼큰한 국밥 한 그릇 뚝딱이면 그만이다, 거기에 알코올 추가요, 하고 만족할 수도 있다. 그런데 국밥 필요한 사람한테 자꾸 달라는 국밥은 안주고 배고픈데 주방에선 조리사님이 윙크만 오지게 보내거나, 밥은 됐고요 빨리 라면이나 한 사발 뚝딱하고 그냥 푸지게 더 안고 뒹굴고 싶은데요 하는 사람한테 만한전석을 차려준다고 행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소설 속에서는 가장 가까운 존재인 가족이 그렇게 엉뚱한 것만 허락하고 정말 원하는 걸 자꾸 안된다고 해서 내내 불행해질 뻔하다가 순간이나마, 혹은 늦게나마 원하던 걸 찾아가는 이야기가 펼쳐졌다. 엄마는 자기 몸종하라고 연애도 결혼도 못하게 해… 언니는 내가 좋아하는 남자랑 결혼해… 그런데 왜 이새끼 저새끼 군인새끼들 밥까지 이 언니들이 다 해먹여야 해...짜장면 시켜 먹어 새끼들아…
어느 책에선가 누군가에게 음식을 만들어 먹이면 옥시토신이었나 하여간에 행복해지는 호르몬이 듬뿍 나온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들은 행복해지려고 자꾸 우리를 먹이려 드시는 거였어… 효도하려면 아 내가 알아서 먹는다고! 를 자제하자… 가끔 먹고 맛있다고 엄지척해드리자… 나는 하도 잘 안 처먹어서 이렇게 불효자는 웁니다…

아무리 봐도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그나마 덜 빻고 지적이고 다정하고 사람이 된 놈이다, 싶은 게 존 박사 밖에 없었는데, 티타는 몸과 마음이 이끄는대로, 존 하고는 그냥 사돈댁하기로 하고 처음 사랑인 페드로와 불을 태운다. 그의 나이 향년 39세. 나랑 동갑이군요. 사실 나이 제도가 바뀌어서 어쩌다보니 나는 세상에서 가장 긴 39세를 보낸 기분이다. 구 한국나이 39세는 22년도였는데 만나이 39세는 아직도여서 이제 올해 12월 중순이나 되어야 드디어 앞자리가 바뀐다요… 나이랑 몸무게랑 페어링하는 시대가 오겠군요! 하여간에 20년 간 조카 키우느라 참아둔 사랑을 티타는 진짜 활활 태워버리고 만다. 누가 진짜 불장난 하랬어… 엄마 쟤 성냥 먹어…

그냥저냥 재밌게 읽을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마지막 약력에서 작가가 ’백년의 고독‘ 영화화 준비 중인 소식 보고는 개봉 하긴 했냐? 언감생심이네… 중남미라고 적당히 묻어가면 되겠나… 그 정도는 아니예요… 리얼적 마술리즘 노리는 할배가 저기 중국에 옌롄커라고 있는데… 할매도 할배도 적당히 빻은 건 닮았지만 더 이상은 좀 오바에요… 하고서 나는 백년의 고독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그리고 음식이 잔뜩 나오는데 하나도 모르는 음식이라 전혀 자극되지 않는 식욕… 이렇게 저렇게 허풍치며 섹스들 하는데 그냥 적당히 흐뭇한 광경일 뿐 딱히 야하지는 않았고요… 너무 매운맛만 좋아하는 어른이라 송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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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시피 우리 몸 안에도 인을 생산할 수 있는 물질이 있어요. 그보다 더한 것도 있죠.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걸 알려드릴까요? 우리 할머니는 아주 재미있는 이론을 가지고 계셨어요. 우리 모두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혼자서는 그 성냥에 불을 당길 수 없다고 하셨죠. 방금 한 실험에서처럼 산소와 촛불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산소는 사랑하는 사람의 입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촛불은 펑 하고 성냥불을 일으켜줄 수 있는 음식이나 음악, 애무, 언어, 소리가 되겠지요. 잠시 동안 우리는 그 강렬한 느낌에 현혹됩니다. 우리 몸 안에서는 따듯한 열기가 피어오르지요. 이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사라지지만 나중에 다시 그 불길을 되살릴 수 있는 또 다른 폭발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각자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불곷을 일으켜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만 합니다. 그 불꽃이 일면서 생기는 연소 작용이 영혼을 살찌우지요. 다시 말해 불꽃은 영혼의 양식인 것입니다. 자신의 불씨를 지펴줄 뭔가를 제때 찾아내지 못하면 성냥갑이 축축해져서 한 개비의 불도 지필 수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영혼은 육체에서 달아나 자신을 살찌워 줄 양식을 찾아 홀로 칠흑같이 어두운 곳을 헤매게 됩니다. 남겨두고 온 차갑고 힘없는 육체만이 그 양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말입니다.”
아! 얼마나 맞는 말인가! 티타는 그 누구보다도 그 말에 공감했다.
티타는 불행히도 자신의 성냥이 이미 축축해져서 곰팡이가 가득 슬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제 다시는 그 누구도 불을 지필 수 없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무엇이 자신의 불씨를 일으켜줄 수 있는지 알고 있는데도 성냥에 불이 붙으려고 할 때마다 불이 가차 없이 꺼져버린다는 거였다.
존이 티타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 차가운 입김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가장 강렬한 불길이 꺼질 수 있으니까요. 그 결과는 우리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런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그 입김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가 훨씬 더 수월하답니다.”
존은 양손으로 티타의 한쪽 손을 감싸며 간단히 덧붙였다.
“축축해진 성냥갑을 말릴 수 있는 방법은 아주 많이 있어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124-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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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4-11-23 0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찾아보니 백년의 고독은 다음 달 첫 영상화 넷플릭스에서 나온대네... 아놔 넷플릭스 구독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처음 흔들려 봄...

공쟝쟝 2024-11-24 10:31   좋아요 1 | URL
아… 나 해지햇는데

반유행열반인 2024-11-24 14:18   좋아요 0 | URL
그냥 이참에 백년의 고독 소설 다시 읽는 것으로 퉁치죠 ㅋㅋㅋ이 플랫폼 아니면 넌 이 컨텐츠 못 접하지 메롱메롱 하는 게 너무 싫어서(반체제인사 반새끼) 구독 안 하고는 있는데 거기서만 볼 수 있는 백년의 고독, 살인자ㅇ난감, 도로헤도로 이런 건 좀 탐나더라구요…박찬욱 리틀드러머걸도 넷플릭스 독점인 줄 알았더니 비비씨 방영에 왓챠에 있는 걸 좀 전에 알고 어리둥절했지만 ㅋㅋㅋㅋ띵작인지 졸작인지 방영 후 눈치보고 최초 넷플 구독을 들어갈까 말까 고민해보기로(아마 안 할듯 ㅋㅋㅋ) 합니다…
 
동경일일 3 - 완결
마츠모토 타이요 지음, 이주향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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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0 마츠모토 타이요.

 

 1권을 추석 시댁 가는 지하철에서였다. 생각 없이 큰어린이랑 같이 양으로 들고 갔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펼친 만화책이 너무 재미있는 거야… 이를테면 키우는 새랑 대화하는 장면이나…

 


 이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나온 그 아저씨 아니냐…

 


  쉽죠 밥로스 아저씨처럼 붓얼룩 같은 걸로 그린 편집부 아저씨도 그렇고 인물 마다 개성이 넘쳐…

 


 만화 잡지 편집자 하다가 잡지가 폐간되자 시오씨는 출판사와 연재작가들에게 폐를 끼쳤다 생각하고 오래도록 일하던 출판사를 그만둔다. 그러고는 지금은 펜을 놓았거나 잡고 있어도 많이 소진된 작가들을 찾아가서 원고를 요청한다. 만화 잡지를 창간할 테니 거기 실을 만화를 그려 달라고. 사실 시오씨는 가까이 있으면 그렇게 매력적일만한 인물은 아니다. 공감능력도 부족해 보이고, 만화가들한테만 굽신굽신 잘하고, 자기 혐오도 있는 같다. 그런데 우직하다. 목표 하나를 잡고 그것만 보고 다른 참아낸다. 바라보는 하나가 바로 만화다. 세상에 이런 로맨티스트가 나오는 만화라니… 사실 만화의 세계가 그렇다. 농구 밖에 모르는 바보, 해적왕 밖에 모르는 바보, 지구정복 밖에 모르는 바보를 지구수호 밖에 모르는 바보가 무찌르는 이야기… 사랑 밖에 모르는 바보들이 나와서 연애 만화의 온갖 갈등과 오해와 눈물을 자아내는 거지 뭐…

 

 클리셰 싫다면서도 알게 모르게 클리셰 중독인 나는 만화 분량이 이렇게 짧으니 창간이 결국 실패하리라 단정하고 읽고 있었다. 비관 밖에 모르는 나란 바보… 그게 아니라고 예측과 기대를 차고 대책 없이 희망적이고 풀리는 결말이 나오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망하라는 법은 있냐. 가끔은 그렇게 고생하고 소소한 정이 쌓여 뭔가를 이루기도 하는 법이다. 그리고 그건 혼자서만은 이룰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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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4-11-20 15: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오씨는 영화나 만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뭔가 정체를 숨기고 있는 연쇄살인마 같은 관상이군요. 저 안경 벗으면 막 겁나 잔인한 눈 들어있고, 그런.

저는 밥로스 아저씨보다 윤석열 헤어를 하고 있는 저 허연 아저씨가 더 눈에 들어오네요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4-11-20 16:15   좋아요 0 | URL
시오는 소금인데 왠지 syo님이랑 발음(만) 비슷하네요? ㅋㅋ 안경 벗는 장면도 잠시 나와요 ㅋㅋㅋ술집 마담이 와 누구누구(배우) 닮았다 이러고 안경 벗어보래고서 내가 잘못 봤네...이럼ㅋㅋㅋ 벗어도 흐리멍텅한 얼굴이었습니다ㅋㅋㅋ
저는 미처 못봤는데 윤석열 머리가 저런가요 ㅋㅋ벌써 억울한 표정 짓고 계신데요? ㅋㅋㅋㅋ
 
성공의 조건 실패의 쓸모 - 어제의 실패를 오늘의 성공으로 만든 사람들
곽한영 지음 / 프런티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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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9 곽한영.

 


 

 브로콜리너마저-되고 싶었어요.


 

 오랜만에 전자도서관을 둘러보았다. 신간 틈에서 발견한 . .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척척박사 박학다식 거기에다 다정하기까지 교수님은 쓰는 취미라 정도로 온갖 것들에 대해 책을 내셨다. 글로 써서 자신이 알게 것을 전달하는 방식에도 교수님의 다정함이 묻어나서 그분 책을 좋아했다. 그런데피터와 앨리스와 푸의 여행’(줄여서 피앨푸행 했던 동화 고서적 이야기들 모음), ‘혼돈과 질서’, ‘게임의 법칙’ 같은 교양에세이쯤 되는 책부터 청소년을 위한 쉬운 법에 관한 책들(교수님 전공이 법교육...나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같은 전공을 택했다가 교수님의 교수님이 지도교수님이 되자 너무 무서워서 바로 도망친 아예 영구 수료로 남을 예정이지만…ㅋㅋㅋㅋ), 그러다가 배구에 관한 책까지 내신 알았는데 책의 외관이나 마케팅 포인트나 오잉...이제 자기계발서 까지 내신 건가요… 워낙 관심사 방대하다 해도 책의 주제나 외관이나 컨셉이나 이런 것까지...하고 너무 의외여서 오히려 궁금했다. 그래서 빌려 보았다.

 

 막상 펼치니 껍데기만 그렇게 보였을 , 읽는 내내 나를 빡치게 하는 같은 반복하는 자기계발서들이랑은 결이 달랐다. 내내 알고 있던 스토리텔링 풍부한, 내가 좋아하는 입담 좋은 이야기꾼의 이야기 모음이었다. 그래서 , 너무 재미있어… 재미있는데 뭔가 유익하기지… 이러고 후다닥 읽어버렸다. 시작은 비틀즈에서 제일 쩌리 같았던 링고스타가 사실은 위너 아니냐...하는 데서부터 이런저런 음악인들, 영화인들, 위인들 썰을 시시콜콜 풀어주면서도 거기서 우리가 돌아볼 만한 이야기들을 나눠주는게 나처럼 망한 애들이 시절에 읽기 맞춤한 책이었다.

 

 아이돌이나 연예인 진짜 모르고 알아보는데 올초에는 자기 앞에서 떨어진 가지고 먹을테니 개이득, 행운의 여신은 편이야! (원본 찾아보니 정작 본인은 러키비키 타령 했더라구…) 하는 장원영 보면서 나도 모르게 아무데서나 러키비키 하는데 재미가 들렸다. 처음엔 비꼬듯이 시험 전에 모의고사에서 이렇게 개박살 났으니 진짜 시험이 아니라 -마나 다행인지 완전 러키비키자나!!! 하면서 놀았는데 그러다 보니 어느덧 아무데서나 아무렴 어떠냐 다행 아니냐...이렇게 되더라구... 책의 많은 부분도 중요한 러키비키 하는 마음… 하고 태도에 관해 거듭 되새기면서 과연 성공과 실패라는 뭔지 근원적으로 돌아볼 만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비관적인 나같은 놈이 긍정으로 돌아설 때가 세상의 위기이고 망조일 수도 있습니다만… 2 망했을 때는 김연수의 위로 가득한 소설 읽고도 위로하지마!!! 했었는데 이번에는 그냥 ...그래 망했다 어쩌겠니 그래도 수능만 망했지 인생은 망했다...이러고 불행할 있었다. 며칠 겨우 봤는데도 아직 맘대로 책이 무한대로 남아가지고 행복한 같기도… 시간 쫓기고 맘대로 아무데나 걸어다닐 있는 것만도 행복하고… 아토피 재발하고 지독한 감기로 콜록대고는 있지만 그럭저럭 죽을 아닌 어디냐… 역시 지옥도 천국도 마음에 있는 것이냐… 나는 이렇게 체제가 허락한 마음 뽕에 취해 평생하던 반항을 거두는 것이냐… 이럴 이런 보고 위로 받는 것도 완전 러키비키잖아…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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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4-11-20 1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실 거울을 쳐다보면서 그래, 오늘도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하기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제목으로 쓰신 대사는 뭔가 낭만적인 느낌은 있지만, 사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품기 위해서는 저마다의 ˝당신˝이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일 것 같아요. 경험담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4-11-20 16:18   좋아요 0 | URL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아도 그냥 나여도 계속 곁에선 나는 더 나아질테다! 하는게 더 쉽지 않은 경우 같은데... 쓰고 보니 욕심쟁이에 이기적인 놈이네요 ㅋㅋㅋ 좋은 경험(?) 하신 걸까요? ㅋㅋㅋ
 
기억의 몫
장성욱 지음 / 득수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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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8 장성욱.

많은 일을 오래도록 잘 담아두고 잘 떠올린다고 자부해왔지만, 사실 더 많은 것들이 흐릿하고 아득하다 못해 새까맣게 없어진 듯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오래도록 왕래가 없던 친구가 있었다. 거의 십여년을. 왜 멀어졌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그무렵 미안하다는 말을 잔뜩 적어 그 친구에게 보낸 마지막 메일이 보낸메일함에 남아있었다. 미안할 일이 무엇인지는 함께 적혀 있지 않아 무슨 무례를 혹은 잘못을 저지른 건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어디가서 기억력 좋다고 하지 말아야겠다.
나는 미련이 많고 이미 지나가 더 이상 내 인생에 없는 사람들에 관해 자주 검색해 보는 사람이기 때문에, (섬뜩해하진 마시라...해치진 않아요…) 몇 년 전에 한 것처럼 또 우연히 떠오른 친구 이름을 검색창에 적었다.
10대 후반부터 몇 시간이고 채팅방에서 수다를 떨고, 20대 초반에는 샛노랗게 머리 염색을 하고 소설가가 되겠다고 열심히 자기가 끄적인 걸 동호회 게시판이나 자기가 운영하는 카페에 올리던 친구는, 한두해 전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정말로 소설가가 되어 있었다. 메신저에 적어넣은 옛아이디는 그대로였고, 축하의 말을 건네고, 근데 그때 우리가 무슨 일로 연락을 안 하게 되었더라? 나도 모르지. 그렇게 엊그제 떠들다 만 애들처럼 또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남의 흉도 보고, 그런 세월이 또 한 칠년 지난 것 같다.

사람이 어떻게 그리 쉽게 잊는가, 예전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잘 잊는다. ‘우리는 왜 잊어야 할까’라는 책에서 그래야 우리는 더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조금이라도 덜 불행하려면 그래야 한다는 걸 알았다. 당장 3년 수능 공부해보니 방금 문제풀이 들은 강의인데, 내가 바로 따라 풀어보려고 하면 하나도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ㅋㅋㅋ 너무 많은 경험과 지식이 들어와도 머리는 과부하가 일어나니까 알아서 이전의 것들이 정리되기도 한다.

쉽게 잊고 쉽게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 행복해 보이긴 한다. 반대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무언가를 안고서 오래도록 고통받고 마침내 붕괴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이야기를 하나 더 보게 되었다. ’올드보이‘가 그랬고 ’구타유발자들’이 그랬는데, 이번에는 학교폭력에 관한 이야기였다.

학교폭력이라면 나에게도 남은 상흔이 많다. 학생 입장 보다는 교사의 관점이지만, 초임부터 그랬다. 발령 삼일째, 반의 아이가 다른 반 폭력적인 아이에게 배를 심하게 두들겨 맞았다고 했다. 나는 너무 무섭고 속상해서 참지 못하고 이야기를 마친 아이 앞에서 펑펑 울었고, 생활지도부에 신고를 하고, 아이가 집에 돌아가는 길에 때린 아이를 마주칠까 봐 걱정이 되어 집앞까지 그 아이를 바래다 주었다. 몇 달 후 그 맞았던 아이는 같은 반 아이를 오래도록 괴롭히고, 게임 셔틀을 시키고, 돈과 게임 아이템을 빼앗고, 상처가 눈에 띄지 않도록 얼굴 팔다리를 제외한 배와 몸통 부분을 집중적으로 주먹질해 멍투성이를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강제전학을 가게 되었다. 아이들의 학습능력인지, 본성인지, 맞던 아이는 쉽게 때리는 아이가 되어 더 잔혹하고 무감각하게 파괴를 전염시키는 걸 일찌감치 보고 말았다. 이게 마지막이라면 좋았겠지만, 이후에도 여기 적기조차 끔찍한 수많은 폭력 사건을 담임으로, 생활지도부 사안 담당으로, 학년부 생활지도 담당으로 맡으면서, 나는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어린 존재들도, 부모도, 동료 선생들도, 관리자들도, 인간은 그저 비겁하고 조그만 힘이라도 가지면 남을 지배하고 억압하려 들고 또 쉽게 부서지고 만다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작은 조직이 낫지 싶어 전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또 돌아가면 이미 아는 걸 또 반복해서 확인하고 무너져야 겠지. 시발 거리고 주먹을 쥐고 나에게 다가오는 무서운 눈빛의 아이들. 킬킬대고 웃으며 할카스가 뭐에요? 000아세요? 빙 둘러싼 욕망 덩어리들의 성희롱. 비자발적으로 모아둔 집단에서는 그렇게 쉽게 맛이 간 짓거리들이 벌어진다...

이 이야기는 현실이라면 어쩌면 비극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학교 폭력 피해자이면서도 학교를 떠나야 했던 박선용은 리본500으로 거듭나 세계 최고의 프로게이머가 되었다. 어려운 환경을 딛고 잘 자란 듯 보이는 사람을 다른 사람들은 대견해하고 그 성취를 더 높이 사며 칭찬하고 호감을 갖는다. (나는 그게 뭔지 잘 알아…) 그렇지만 그런 성취와 별개로 이미 허물어지고 망가진 어딘가는 쉽게 복구되지 않는다. 하물며, 그렇게 나를 무너뜨린 누군가가 나에게 저지른 일과, 나라는 존재 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평온한 삶을 누리고 있는 걸 알게 된다면 지금의 내가 아무리 잘 되었던들 그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그럴 수 없었던 사람의 고통스러운 이야기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읽는 내내 온통 슬펐다. 장편이지만 페이지가 금세 넘어갔다. 참담한 결말이지만 몰랐다고 죄가 죄 아닐 수 없는 비극은 오이디푸스 이후로 진리 아니냐…

우리는 저마다 소소한 잘못을 저지르고 남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주며 살아간다. 몇몇은 곱씹고 이불을 차며 후회하고 반성하지만 몇몇은 그냥 잊어버린다. 그냥. 거대한 역사적 폭력과 그로 인한 아픔과 고통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사람조차 자신이 일상의 폭력이 되어 새로 배우는 미래 창작자의 작품을 함께 다뤄볼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거부하고 무엇이 문제인지 알 기회도 가르침도 져버리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 아마 본인은 그런 일을 기억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은 그냥 그렇다. 거기에 똑같이 주먹질, 발길질과 담뱃불을 들이대는 것을 빼면, 뭘 할 수 있나? 그냥 계속 쓰는 것? 그들과 똑같이 되지 않기 위해 묻어두고 잊어주는 것? 사필귀정, 하면서 여기저기 알려서 내 대신 남들이 알아서 놀이처럼 마녀사냥하고 린치하게 만드는 것? 나는 답을 찾지 못했다. 무너진 사람들 스스로 찾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조차 나는 그저 가혹하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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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불쾌한 사실을 굳이 사람들에게 상기시켜서 그렇습니다. 그걸 괘씸죄라고 하죠. 우리는 발밑에 하수구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걸 굳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지는 않잖아요.“(…)
”사람들은 당신이 형을 괴롭혀서 그렇게 화가 난 게 아니에요. 그건 그저 계기일 뿐이죠. 당신은 잘생긴 외모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고, 탤런트인 어머니의 재력을 이용해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도 않았죠. 더해서 지금도 이상적인 삶을 살고 있고. 쉽게 말해 그런 잘못을 하고도 당신의 인생에는 단 한 번의 페널티도 없었다는 사실에 화가 난 겁니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어쩌면 엄마의 말대로 그저 잊히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남들이 보는 저일 뿐이잖아요.“
”지금 그런 게 중요합니까?“
매니저가 되물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진짜 어떤 사람이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영빈은 그동안 믿어왔던 스스로의 어떤 부분이 허물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186-187)

-그럼에도 너의 얼굴에서는 잠든 사람에게 쉽게 볼 수 있는 방심을 찾을 수 없다. 입을 벌린 채 침을 흘리거나, 눈이 반쯤 뜨여 있거나 혹은 그 흔한 잠꼬대나 코골이조차. 공들여 깎은 조각상처럼 무척이나 평온하고, 아름답다. 보고 있기만 해도 어디선가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들려올 듯한 모습이다. 나는 그게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토록 아름다운 네가 무엇이 부족해서 나한테 그런 짓을 했을까. (20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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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4-11-18 14: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유수 2024-11-18 15:46   좋아요 1 | URL
이 와..는 오늘 명문 세 편 봐서 어지러운 동시에 개망한 사랑..들로 방황하는 중생이 읽은 것만으로도 북플 들어온 소기의 목적을 모두 이룬 것 같다 하는 와..입니다. (그럴리 없지만)오랜만에 쓰면 더 잘 쓰는 건가? 와..

반유행열반인 2024-11-18 17:01   좋아요 1 | URL
명문 세 편이라길래 뭘까 궁금해지네요 ㅋㅋㅋ 왜 아직도 망한 사랑으로 방황해? 청춘이네!!!! 중생이 원래 짐승에서 나온 건 알죠 우리 아름다운 짐승이시어... 왜 남의 잘 쓴 글 보고 와서 여기서 감탄하시나이까.... ㅋㅋㅋㅋ
 
조금 망한 사랑
김지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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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7 김지연.


나는 이제 아픈 건 참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아침 나절에 타이레놀 한 알을 더 먹었다. 전날 밤에는 타이레놀 콜드를 먹고 잠들었다. 이전 감기가 나아진지 얼마 되지 않는 작은어린이가 새로운 종류에 걸려온 걸 옮은 모양이다. 금요일 밤에 어린이는 열이 38.8도를 찍고 아주 조금 토했다. 다행히도 열은 금방 내렸다. 통증을 잘 견디는 사람은 공감 능력이 부족하고 사이코패스 될 가능성도 높다는 연구가 있다는 기사문을 얼마 전에 인터넷에서 보았다. 나는 소음과 냄새와 빛의 자극에는 개복치처럼 민감한데, 아픈 건 또 잘 참아서 내 살갗을 뚫는 피를 뽑아내거나 주사액을 넣기 위한 바늘 구멍을 눈을 떼지 않고 노려본다. 눌렀다 떼면 아픈 압통이 있어 스스로 충수염 의심하고 의원에 갔는데 의사가 열도 안 나고 별로 안 아파 한다고 장염약을 지어주는 바람에 죽을 먹고 약을 먹고 그러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응급실 가서 저 충수염 같은데… 그런데 밥을 바로 먹어서 통증을 견디며 공복이 되기 위한 몇 시간을 채우고 조영제 씨티를 찍어야 했던 적이 있었다. (충수염이 맞았다. 바로 수술 받음) 인대가 파열된 것도 모르고 접질린 발목으로 뚜벅뚜벅 걸어간 동네 외과에서는 엑스레이만 찍어보고 몇 번 눌러보고 내가 너무 멀쩡했는지 파열은 아닌 것 같다고, 물리치료나 잘 나오라고 오진을 해서 결국 한 달 뒤 엠알아이로 발목 인대 여러 개 나갔던 흔적을, 초음파로 그 합병증인 다리 심부정맥혈전증을, 직후에 숨이 차 뚜벅뚜벅 절룩절룩 천천히 걸어간 응급실에서 씨티 촬영으로 심장에서 폐로 나가는 동맥에 혈전이 박힌 걸 발견했다. 그러니까 통증을 가지고 막 호소하지는 않는데 또 제법 몸의 이상은 일찌감치 감지를 잘해서 그냥 이렇게 살아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조금 아프면 그냥 아프네? 하지 말고 병원도 바로 가고, 약도 잘 먹기로 했다.

수능 시험 마치고 집에 오니, 큰아이 얼굴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이틀전 체육시간에 다른 아이가 던진 공에 맞은 안경이 휘면서 찰과상을 입었다. 그런데 보건실에서 소독 후에 가로세로 삼센티미터 정도로 큼지막하게 마름모 모양으로 볼에 붙여준 습윤밴드가 문제였다. 다음 날 아침에 떼어보니 원래 상처는 크지 않았는데 반창고 모양으로 꼭 화상 입은 것처럼 되었다. 수험표 받고 돌아온 나는 감염이 걱정되어 항생제 연고를 발라주었다. 그러고 시험보고 돌아와보니 반창고 닿은 부위가 전부 접촉성 피부염에다 감염까지 되어 진물이 흐르고 번진 상처를 중심으로 얼굴이 전체적으로 평소보다 몇배로 부어 아이는 눈도 못 뜨고 있었다. 급히 야간 진료하는 피부과를 찾아 전화를 걸고, 저희는 상처 치료 안 하는데요, 말로만 듣던 미용 레이저 피부과 몇 개를 거르고 진료 봐준다는 병원을 찾아 아이 치료를 하고 (내가 한 거처럼 그냥 항생제만 얼굴 전체에 도포해주었다), 스테로이드랑 항히스타민제랑 항생제 먹는거랑 바르는 거 받아왔다.

시험 중에 뇌정지 오고 문제 안 풀려 고통스러울 때마다 다크초콜릿 싸간 걸 까득 반 조각 내 입에 넣고 녹여 먹었다. 알라딘에서도 팔던 나폴리탄 어쩌구를 아니 집더하기가 훨씬 더 싸네, 하고 샀다가 몇개월 냉장고 처박아 뒀던건데 평소 먹지도 않던 걸 싸갔더니 비상 포션으로 유용했다. 시험장 학교는 전전날 내가 오랜만에 산책 멀리 나간 공원 근처였다. 마치 거기 갈 걸 알았던 것처럼 만걸음 넘게 갔던 곳인데 수험표 받은 날은 꼭 그전날 걸은 길을 반대로 돌아 시험장을 확인하고 왔다. 여로에서 가장 가까운 후문께 가서 에이, 시험장날 설마 잠가 둘까 열어주겠지, 했는데 역시나 잠가놔서 좀 빙 돌아야했다. 그래도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괜찮은 시험 전날을 보낸 수험생이 아닐까 싶었다. 집에서부터 버스로는 환승해서 38분, 걸어서 49분, 네이버지도에 그렇게 알려준 곳이라 교통편이 애매했는데, 그냥 가장 가까이 가는 버스 한 번만 타고 1.4킬로미터는 걷기로 했다. 괜찮은 선택이었다. 다음 날 아침 버스를 내려 공원을 가로질러 걷는데, 거기에는 수능이랑 아무 상관 없는 이 세상 사람 9할 정도가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걷고 뛰고 있었다. 정원은 마음의 약국, 이라는 키케로의 문구가 적힌 팻말을 아마도 세 번째 (시험장 모르고 산책할 때, 전날 답사 갔다 돌아올 때, 그리고 시험 당일) 지나고 있었다.
학교 환경은 그간 내가 근무한 세 곳과 감독갔던 아홉 번(학교 자체는 중복이라 그거보다는 적지만) 중에 가장 쾌적하고 깨끗하고 좋았다. 휴지심을 네토막 내어 들고가서 책상이 흔들리면 고이려고 준비했는데 여자고등학교라 그런가 책상 의자가 키 작은 내게 맞춤한 듯 낮고 새거고 튼튼해서 그냥 소독 티슈로 한 번 슥 닦고 방석하나 놓고 하루 잘 보냈다. 그래도 내내 앉아 있으면 허리가 아프니까 쉬는 시간 마다 운동장이라도 걸으려 했는데 오전부터 비가 왔다. 3층인 내 시험실 바로 옆에 화장실이 있고 여자화장실은 늘 만원인 걸 알아서 나는 그 옆 복도 구석을 지나 본능이 이끄는대로 교과실들 놓인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가니 감독관 대기실이 보였고 ㅋㅋㅋ(감독관 출신의 본능이란…) 저기 화장실은 조금 더 한산하겠지, 만 한 층 더 내려가자 이제 아무도 찾지 않는 (아무래도 평소에도 한산한 듯 쾌적 깨끗한) 화장실을 찾아내 하루 내내 나의 아지트로 활용했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 마다 여길 이용하고 그 안을 내내 빙빙 걸었다. 벽에는 앙리 마티스 그림도 걸려 있었다. 공사한지 얼마 안 되는지 깨끗하고 사방에 전신거울, 화장대 같은 거울, 옆에는 바깥 단풍 내다 보이는 창이 있어 답답하면 열어놓고 찬공기도 쐬면서 있었다. 수학시간에는 나는 현우진이다, 이주란 소설에서 배운 것처럼 빙의해보려고 했지만(운동 가기 싫으면 나는 김연아다, 출근하기 싫으면 나는 봉사활동 가는 중이다, 한다고 했다) 실패했다. 마킹하지 못한 답안지를 채우려고 그간 작성한 답지 중 제일 적은 보기를 세는 스스로를 보며 참담함을 느끼는 일은 20년 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사실 이번 수능이 망할 것이라는 걸 며칠 전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길고 작게 미리부터 애도를 하고 있었다. 시험 주 내내 하루 만걸음 넘게 바깥을 싸돌아다니며 가을날 마지막을 느끼고 돌아왔다. 시험 이틀전에는 급기야 몇 주 몇 달 참던 책을 꺼내들고 읽었다. 나는 조금 덜 아프고 싶었다.

김지연의 소설이었고, 내가 이전에 김지연 소설 처음 읽고 아 이건 좀...나랑은 안 되겠네, 했다가 다른 수상작품집에서 ‘포기’를 읽고 흠 한 번 더 읽어 볼만 할지도 했어서 신작 소설집을 산 건데 마침 그 ’포기‘가 처음으로 나왔다. 소설 속 젊음들은 사랑을 잃고 거기에 더해 돈도 잃는다. 그런 이야기만 거의 삼연타로 나온다. 헤어진 연인이 돈도 안 갚고 잠적...이런 거 진짜 자주 있는 일인건지 그렇다면 정말 자본주의적인 맴찢이 아닌지…

김지연 소설을 읽다가 나는 내가 4년 전 마지막 쓴 소설이 생각나 다시 읽어보고 혼자 흡족하면서 씁쓸하기도 했다. 한국문학에 내 자리가 손바닥만한 거라도 남아 있었다면, 그 비슷한 위치는 이미 김지연이 있다...나는 중복이라 땡탈락...혼자 그런 망상을 하면서 웃었다. 나는 나중에 소설집을 낸다면 ’사랑의 흑역사‘라고 내겠다고 그런데 아직 그런 제목의 소설을 쓰지 못했네...했는데 ’조금 망한 사랑‘이 비슷한 위치를 선점했지 않냐...그런데 소설집과 동명의 소설은 없긴 하다. 작가의 이전 소설도, 작가 자체도 난 잘 알지 못했는데 작품들 읽는 내내 많은 교차점을 발견하고 반갑기도 하고 어 야...왜 자꾸 먼저 써… 그런 기분도 들고 사실 내가 오래 책을 굶다 읽은 거라 뭘 읽어도 후했을 시기이긴 한데 하여간에 악성반놈한테 잡힌 것 치고는 운이 좋...은 게 아니고 작가님 잘 쓰셨네요…

22년도와 올해 인생 두번째, 세번째 수능을 보면서 그제서야 나는 생각보다 망해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국어도 딱히 잘 본 건 아니지만 굶주린 나놈에게 가뭄의 물줄기 같던 국어 공부가 즐거웠던 걸 보면 나새끼는 별 수 없는 뼛속 깊은 문과따리라는 걸 다시 확인하는 기회일 뿐이었고… 나는 망친 몸 건강과 정신 건강을 회복하는 방법, 혼자 집에서 체지방을 덜고 근육을 붙이는 방법, 아무데서나 밥 말고 시리얼바 하나랑 단백질 음료로 끼니 떼우고도 건강히 생존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조금 덜 울면서 잘 망하는 방법도 조금은 익혔을지도… 망하기 전에도 알았고 망한 후에도 알았지만 나는 잃은 게 하나도 없었다. 내 사랑은 하나도 망하지 않았다. 세상에. 나는 가진게 너무 많았고, 잠시 들이닥칠 안 좋은 일들도 시험을 비껴 다가와서는 주말 내에 서서히 나아지는 중이다. 아이들도 나도 아픈 곳이 (아마도) 회복중이다.

내 삼년만의 가족 복귀를 기념하듯 어제는 내가 마트에서 4900원 주고 사온 부자만들기라는 보드게임을 둘러 앉아 세 시간 넘게 했다. 십억을 벌면 이기는 게임인데, 나는 연지 일주일도 안 되서 피씨방이 화재로 불타 폐업했다. 헬스장을 여니 대형 피트니스센터가 들어와 또 강제 폐업 당했다. 치킨집, 호프집, 다시 의류백화점 업종 변경을 하며 겨우겨우 돈을 모아 완전 개털되지 않고 근근이 생존했지만, 큰어린이가 10억10만원을 모아 게임이 종료되었을 때 나는 그 절반인 5억 얼마를 모으고 꼴찌를 했다. 게임이니까 꼴찌이지 5억이 어딘가…. 게임인데도 재산세 50만원! 학원비 40만원! 자녀 대학 입학금 400만원! 경조사비 50만원! 이렇게 지출이 디테일한 구석이 있어서 망했다 흥했다 자본주의적 인생 경로 한 번 잘 따라갔다 왔네…

하여간에 수능은 망했는데 그냥 나는 안 망했다는 인사를 독후감 빙자해서 길게도 썼다. 더 읽고 쓰겠다고 공부를 택했는데 너무 돌아갔다 다시 온 것 같기도 하다. 굳이 무엇이 안 되어도 이미 하고 있었는데? 뭘 더 안 가져도 이미 너무 많은데? 하고.


+밑줄 긋기
-내가 상상한 평범한 삶이라는 게 웬만한 건 다 충족된 삶이었다는 것도 나중에 깨달았다. 집이 있고, 차가 있고, 일 년에 한두 번 해외여행을 가고, 함께 여행 갈 애인이나 친구나 가족이 있는, 그런 게 평범한 삶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런 게 평범하던 시절도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더이상은 아니었다. 그건 아주 어렵게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삶이었다. 민재가 말한 평범한 삶이란 불운과 함께하는 삶이었다. 살면서 한두 개의 불운이란 없을 수가 없으니까 그것이야말로 평범한 삶이었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아야지. (’포기‘ 중, 25)

-반려빚은 정현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 정현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 말이 가당치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있을 수 있는 꿈이라고 해도 그건 말이 안 됐다.
우린 진작 헤어졌잖아.
반려빚은 잠시 정현의 말을 곰곰 생각해보는 듯했다.
참, 그랬지.
반려빚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코트 깃을 세우고 현관에 서서 정현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정현을 떠났다. 정현 역시 현관에 오래 서 있지 않았다. 찬장에서 소금을 꺼내와 현관 밖에 팍팍 뿌렸고 문이 닫히자마자 걸쇠를 단단히 걸어 잠갔다. 다시는 얼씬도 못하도록. 꿈속에서 정현은 마냥 홀가분했고 깨어서도 그랬다. 마침내 0이 된 기분. 정현은 그 이상을 바라는 것도 이상하게 무섭기만 해서 그저 0인 채로 오래 있고 싶었다. (’반려빚‘ 중, 104-105)

-무슨 일에서든 선경은 성실을 최고의 가치로 두곤 했다. 그렇게 성실한 사람이니까 바람을 피울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엠비티아이 유형을 따져보자면 아마 K는 J타입일 것이다. 철두철미한 계획형 인간. 그런 것치곤 피임은 제대로 못하는 편인 듯했지만 인간이 한쪽으로만 치우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정확한 비밀‘중, 209. 비꼬고 두들겨 패는 거 잘 함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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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4-11-17 19: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 서재에서는 언급이 차단되어 있는 키워드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저도 대학이 어떻게 될지는 오리무중이지만, 준비하는 과정에서 확실한 뭔가를 얻어낸 것 같아요. 이러나저러나 좋은 시간이었고, 살아가는 일이 좀 더 확실하게 좋아졌습니다. 뭔가 맘이 평화롭네요.

반님께도 끝없는 평안이 도래하기를. 고생하셨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4-11-17 20:06   좋아요 0 | URL
고생 많으셨어요. 이제 내내 꽃길만 걸으시길!!!!!

유수 2024-11-17 2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반유행열반인 2024-11-18 09:56   좋아요 1 | URL
아이 참 역시랑 쩜쩜쩜 사이엔 너무 많은게 (좋은 말 나쁜 말 다 ) 들어갈 수 있다니까요? ㅋㅋㅋㅋ

유수 2024-11-18 10:06   좋아요 1 | URL
(예전 글 반님 대댓글에 아직 쓰려면 기다리라고 하시더니) 역시!!

반유행열반인 2024-11-18 10:07   좋아요 1 | URL
짝짝짝짝 한층 선명해졌다

공쟝쟝 2024-11-18 07: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벌써 한 권!!! ㅋㅋㅋ 긴장된다!!! (🥹 알죠? 나 누가 읽는 거에 되게 자극 영향 마니 받는 사람ㅋㅋㅋ) 반님 활약하는 동안 나도 긴장해야지ㅋㅋ (이북까지 동원햇서 왕창 읽을것!!)
부자만들기 보드게임… 좀 너무 심한거 같아요. 나 이 책 예약했어요, 반려빚…ㅋㅋㅋㅋ 지연님 벌써 친하게 지내고 싶다!!

반유행열반인 2024-11-18 09:58   좋아요 1 | URL
아니 뭔 활약까지 ㅋㅋㅋㅋ저 독후감 일찍 쓸라고 수능도 안 끝났는데 시험 이틀 전부터 소설책 처 읽은 위인…ㅋㅋㅋㅋ 지연님이랑 쟝님이랑 (책으로) 친해질 수 있을 거 같음 ㅋㅋㅋ 쨘 하게 겹치는 부분 (그런데도 다 마신 찻잔 아래 마지막 발랄함 잔여물 남음 ㅋㅋㅋ) 없다고 말 못함 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