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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 : 타히티의 춤추는 여인들 ㅣ 예술가들이 사는 마을 4
수잔나 파르취.로즈마리 차허 지음, 노성두 옮김 / 다림 / 2010년 9월
평점 :
-20240905 수잔나 파르취, 로즈마리 차허 글. 노성두 옮김.
어쩌다가 친구랑 고갱이 이야기를 한 게 시작이었다. 국어 사전을 찾아 보면 이렇게 나온다.
고갱이
- 풀이나 나무의 줄기 한가운데에 있는 연한 심.
- 사물의 중심이 되는 부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주로 배추 꼬랑지 배추 꼬랭이 하는 부분이 사실은 배추 고갱이었다. 저 말이 언제부턴가 왠지 좋아가지고 삶의 고갱이, 이런 식으로 뭔가의 정수이면서 야들야들할 것 같은 코어를 일컬을 때 자주 써먹었다. 하여간에 가장 최근에 고갱이 이야기가 나온 건 결국 무슨 맥락이었는지 까먹었지만… 집에서 해가 져서 어두운 시간 조명을 노란불로 바꾸려고 스탠드 전등 근처로 가다가 거기 가까운 책꽂이에 꽂힌 이 책이 눈에 들어왔다. 고갱, 고갱이래.
얇지만 이거저거 다룬 어린이책이나 청소년책을 제법 좋아해서 언제 읽을진 모르지만 언젠간 읽을 거야, 하고 일단 썩히면 아까우니 너 먼저 읽어, 하고 초등학생이던 큰어린이에게 덥썩덥썩 중고로 책을 많이도 사 줬었다. 읽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얼마나 읽었는지는 집요하게 확인하지 않아서 알 수가 없다. 중학생이 되고 나니 큰어린이는 자기만의 세계가 생겨서 거기서 유영하느라 책을 많이 읽지는 않는다. 그건 슬프지만… 어린이가 중학교 가면서 어린이 방의 어린이용 책들을 빼다 바깥으로 옮기고, 중고딩이 읽으면 좋겠다 할 책들을 나름 엄선해서 가까이 놓아줬다. 여태 읽은 게 나랑 어릴 때 영화로 본 원작 ‘마션’ 밖에 없는 거 같지만...마크 와트니의 초긍정 생존 모드는 배울만 한 거니까 뭐 재밌으면 됐다…
여튼 그렇게 밖으로 방출된 고갱에 관한 어린이책을 발굴한 김에 읽게 되었다. 표지에 춤추는 그림이 재미있었다. 왠지 어린이가 그린 것처럼 어른이 흉내내어 그린 기분이었지만… 고갱에 대해 잘은 몰라서 그냥 다 버리고 원시 삶 남아 있는 섬에 가서 그림 그리던 아저씨, 그림이 엄청 강렬한 아저씨, 정도만 알았다. 이참에 알면 좋지 하고 얇은 건데도 책 볼 시간을 못 내서 조금씩 여러 번에 나누어 보았다. 그림을 따라가며 여기저기 뜯어보기 하는 걸 보여줘서 좋았다. 어린이가 직접해 볼 수 있는 그리기, 조형, 판화 같은 여러 가지 활동을 소개해주는 것도, 내가 어려서 이 책을 봤다면 몇 가지 따라하고 좋아요 했겠다.
고갱은 선원으로 일하다, 은행에 취직했다, 보험회사 다니다 다 때려치우고 나 그림 그릴 거야! 하고 가족 두고 아주 멀리 섬나라로 떠나 버렸다. 그리고 또...하는데 병이 들어 죽었다. 해서 어… 왜 벌써 끝나… 하긴 이렇게나 그려 놓고 갔으면 짧아도 짧은 삶은 아니었겠다. 고갱이 묻혔다는 히바오아 섬은 나도 가 본 적 있다. 십수년 전 곁의 사람이랑 온라인 대항해시대에서 퀘스트하러 갔었어… 거기서 머리에 꽃 꽂고 놀았었지…
독일 사람들이 쓴 책이지만 번역가가 최대한 한국화해서 표현도, 그림 사례도 우리 나라 걸 많이 가져다 써서 나름 제3저자 아니냐...하고 독후감 쓸 때 번역가는 잘 안 적어 놓는데 같이 챙겨 놓았다. ‘하지만 곶감 빼먹듯 꺼내 쓰던 돈은 금세 바닥이 나고, 당장 생활비가 없어서 쩔쩔매는 처지가 되었어.’ 이런 표현...독일에는 곶감 없겠지… 한 문장만 옮겨도 예술가 가족의 힘든 삶이 마구 느껴지는 것이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수록 그림은 ‘우파우파’였다. 제가 우파인 건 아니고요… 그림을 절단하듯 가로 아니 세로지르는 나무에 주목하게 설명해주고, 모닥불의 윤곽을 다음장에 첨부한 고흐 삼나무 그림과 연결지어 보게 하는 점도 재미있었다. 나는 저렇게 성질머리 더러운 아저씨끼리 잠시나마 같이 작업실 쓸 생각을 했다는 거 자체가 더 놀라워…
어려서 마티스의 춤 그림을 보고 그냥 너무 무서웠다. 발가벗고 역동적으로 마냥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그 그림이 너무 무서워… 밤에 눈을 감아도 발가벗고 손잡고 도는 사람들이 어른거렸다. 그런데 책에서 색채랑 구도랑 상상되는 상황이랑 주절주절 풀어 놓은거 뜯어보니 그렇게 무서울 그림도 아니었는데. 어린 나한테 옆에서 조잘대면서 그런 내러티브 붙여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안 무서워 했을 텐데. 지금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책에는 이렇게 고갱 말고도 고갱에게 영향을 주거나 받은 다양한 화가들의 춤 그림이 여럿 실려 있다. 춤은 잘 모르고 크게 관심도 없었는데 춤을 그린 그림은 움직이는 중인데 그걸 챡 고정해 놓고도 움직이는 것처럼 느끼게 그려 놓은게 신기하다 싶었다. 세상은 신기한 거 투성이이고 아직도 신기한 볼 게 많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