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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다른 아이들 1
앤드류 솔로몬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평점 :
-20250727 앤드루 솔로몬.
모든 아이들은 부모와 다르다. 내가 낳은 아이들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나와 닮은 점을 찾아볼 때가 있는데, 말투나 유머감각, 반사회성, 급한 성질머리 같이 시각적 정보로는 찾기 힘든 뭔가가 비슷하다는 느낌만 가끔 받고 피지컬은 영락없이 곁의 사람을 따왔다. 그게 아쉬운 건 아니고 어쩔 수 없지, 그냥 그런 거지, 한다.
그러니까 이 책의 제목은 사람은 인간이다, 처럼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지만 목차를 보면 그게 또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다르다는 건 무엇일까. 어느 정도 같은 부분이 있음을 인정해야 다르다는 말이 알맞은 것 같다. 나는 저 코로나 바이러스와 달라, 하고 말하면 다들 뭔소리 하냐 할 것이다.
만7세 작은어린이는 아직 용변 뒤처리를 할 줄 몰라서 다 눴어요! 하고 외치면 쫓아가서 엉덩이를 닦아주며 어휴 몇 살 부터 스스로 닦을 거냐, 하면 아이는 몰라요,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궁금함을 가장한 ‘빨리 커다오’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조차 특권이라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입으로 섭식도 불가능한 아이들, 성인에 가까운 나이이거나 이미 성인인데도 배설물로 온 집안을 망쳐 놓고 부모에게 상해를 가하는 아이들, 우리 가족 중 누구도 그렇지 않다고 안도하기보다는, 어쩌면 우리 중 누구나 저렇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게 불안쟁이의 습성이다.
저자는 자신이 동성애자이자 우울증 환자로 지내 본 경험을 바탕으로, 가족과 불화했던 시절을 이야기하며 부모가 바라던 자식의 상과 어긋난 상황들을 풀어간다. 대부분의 사례가 저자와 여러 가정 구성원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생생하게 제시되어 있었다. 청각장애, 소인증, 다운증후군, 자폐증, 정신분열증, (중증) 장애 아동기(그리고 성인기까지) 자녀를 돌보며 좌절하거나 자부심 느끼거나 직접 아이를 도맡거나 (그러면서 자신들이 없어진 이후의 자녀 미래를 걱정하거나) 위탁 가정, 시설에 보내거나 죽이기까지 하는 사람들, 아이를 일찍 떠나 보낸 부모들, 상황도 과정도 결말도 다양했다.
내가 일하는 곳에 자폐 스펙트럼의 아이들이 여럿 있는데, 아이들 별로 어느 한 가지 용어로 묶기엔 너무도 다양한 특성이 있다. 한시라도 성인 보호자가 보조하지 않으면 안 되는(남을 공격하거나 무서운 말을 하거나 이상한 그림을 그리는) 아이부터, 그저 조용히 앉아 있는(그렇지만 대부분의 가르치는 말을 못 알아 듣는) 아이, 상동 행동을 반복하거나, 엉뚱한 말이나 정확한 대답을 해놓고도 칭찬을 하든 지적을 하든 “제가 말 안 했는데요.” 하는 아이도 있다. 그래서 이 책의 자폐증 챕터는 내가 그 아이들과 그 부모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게 도움이 될 것 같다. 통합 학급에 함께 할 수 있는 아이들은 그나마 고기능 장애라고 하는, 일상 생활의 최소한의 능력은 갖춘 아이들이어서 여기까지 익히는데 아이와 부모들이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쳤을지,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마냥 품을 수도 없는 삶이란 어떤 것일지 짐작만 할 뿐 (가족이 비슷한 상황에 놓이지 않는 한) 영원히 난 제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정신분열증으로 번역된 조현병 챕터는 내 아빠가 겪은 질환이기도 하고, 내게도 유전적 영향이 있지 않을지 우려하는 부분이기도 해서 더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 부모가 그러는 것도 환장할 노릇이지만, 그게 자녀의 삶에 많은 균열과 회복 어려운 상처를 남기기도 하지만, 반대로 내 아이가 그렇게 망상에 시달리고 목소리를 듣고 하는 것도 큰 고통일 것이라는 걸 사례들을 보면서 짐작해 보았다. 나도 공부 스트레스가 심할 때는 환청 환시 같은 게 있다 말다 해서 (망한) 공부를 마치자마자 스스로 조기 개입이다! 하고 약물 치료를 시작했고, 적절해진 상황에 만족하고 있다. ‘마음의 오류들’이나 ‘뇌가 지어낸 세계’ 같은 뇌 책도 주워보고, 다양한 사례 모은 이런 책도 보고 하는 게 나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때 조금이나마 일찍 알아차리고 할 수 있는 뭔가를 하거나, 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는 걸 알고 체념할 수 있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
주석 빼고도 700여페이지 넘는 책이라 한 달 가까이 읽었지만 다양한 삶을 들여다 보는 건 (미안하지만 어째요)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2권에서는 또 독해 보이는 주제들(신동, 강간, 범죄, 트랜스젠더)이 기다리고 있어서...다양성에 관한 탐구는 평생해도 끝도 없겠다 싶네요.
+밑줄 긋기
-모든 양육은 두 가지 행위를 포함한다. 첫째는 자녀를 변화시키는 행위다. 우리는 자녀에게 교육을 제공하고, 예의를 가르치며, 도덕적 가치관을 심어준다. 둘째는 자녀를 지지하는 행위다. 우리는 아이들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게 자긍심을 느끼도록 만들려고 노력한다. (13)
-내가 가진 충동의 상당 부분이 남자답지 않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안 까닭에 나는 자기계발에 더욱 정진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말해 보라는 선생님 말씀에 다른 아이들은 하나같이 아이스크림이나 햄버거, 프렌치토스트라고 말할 때 나는 이스트 27번가의 아르메니아 레스토랑에서 주문했던 카이마크 크림을 곁들인 에크멕 카다이프 빵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29, 그거 참 맛있겠는데.)
-자녀가 행복하지만 남들과 다르게 사는 것보다 불행하더라도 남들과 비슷하게 사는 것을 더 바랄 정도로 우리는 너무나도 명백하게 수평적 정체성을 증오한다. (44)
-나에게는 내가 스스로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내 미래의 모든 복잡한 가능성을 숙고하면서도 미처 예상치 못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어렵게 얻은 이 만족은 일반적으로 내적 평화가 외적 평화에 달려있다는 명백한 진실을 보여준다. (48)
-나는 동성애를 내 안에 가둠으로써 거의 파괴되다시피 했으며, 밖으로 이끌어 냄으로써 간신히 구원받았다. (49)
-어빙 고프먼은 그의 훌륭한 저서 ‘스티그마’에서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주변인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개인적인 진정성과 정치적 믿음을 갖도록 해준 어떤 요소에 대해서 긍지를 갖고 이를 천명할 때 정체성이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사회 역사가 수전 버치는 이러한 행위를 가리켜서 ‘사회화의 아이러니’라고 부른다. 어떤 집단을 동화시키려는 사회적인 시도는 흔히 그 집단이 그들의 특이성에 대해 보다 큰 목소리를 내도록 유도한다. (63)
-푸코 본인도 주장했듯이 만약 ‘인생이 실수를 수용할 수 있는 어떤 것’이고 실수 자체가 ‘인간의 사고와 역사를 구성하는 근간’이라면, 실수를 금지하는 행위는 진화의 종말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 인간은 실수를 통해 태고의 진흙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67)
-어떤 면에서는 거의 역설에 가까운 이 같은 주장은 라인홀드 니부어의 ‘평온을 위한 기도문’에 등장하는 마지막 구절이자 재활 운동의 신조로 간단히 요약될 수 있다. ‘하느님,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더불어 그 차이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72)
-‘상호 교차성’은 다양한 유형의 억압이 서로를 먹여 살린다는, 이를테면 인종 차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성차별 문제를 없앨 수 없다는 이론이다.(…)“어떤 집단의 편견을 그대로 용인할 경우 우리는 다른 모든 집단에 대해서도 편견을 그대로 용인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내 동생이든 다른 누구든 상관없어요. 나는 어떤 사람을 배제하는 조건이 전제된 인간관계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싸움을 하고 있으며, 모두 똑같은 자유를 가졌습니다.” (90-91)
-인권 운동가가 되는 대부분의 부모들은 사회 변화를 촉진하고자 행동에 나서지만 그 같은 욕구가 항상 순수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인권 운동가가 됨으로써 일종의 구원을 얻는다. 가정과 자식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에 따른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인권 운동가로서의 행동을 통해 슬픔을 분산시키는 사람들도 있다. 흔히 부모는 자식에게서 가장 유감스럽게 생각되는 부분을 칭송한다. 부모 스스로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런 경향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믿음이 행동을 이끌어 내듯이 행동이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점차적으로 우리의 사랑을 확대할 수 있다.
-시나리오 작가 더그 라이트의 말에 따르면, 가족이란 가장 깊은 상처를 입히고, 그 상처를 가장 세심하게 치료해 주는 존재다. 부모의 간섭을 피할 도피처란 없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부모님의 간섭을 고독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고 또 사랑이라 부를 줄 알게 되었다. 나는 분노가 가득한 상태로 연구를 시작해서 관대해진 상태로 끝났다. 나에 대한 이해로 출발해서 부모님에 대한 이해로 끝이 났다. 불행이란 누군가를 끊임없이 싫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행복은 용서로 나아가는 동기로 작용했다. 부모님은 언제나 사랑으로 나를 용서했으며 나 또한 사랑으로 부모님을 용서했다. (92)
-한번은 불교학자가 내게 많은 서양 사람들이 열반이란 번뇌가 없어졌을 때 도달할 수 있으며 영원한 행복만이 존재하는 곳으로 잘못 안다고 설명했다. 요컨대 그런 더 없는 행복은 과거의 아픔에 의해서 항상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따라서 불완전해질 것이다. 열반이란 미래의 환희를 고대할 뿐 아니라 고통스러운 시절을 담담하게 되돌아보고 그 안에서 기쁨의 씨앗을 찾을 때 마침내 발견하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행복을 느끼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되돌아보면 그것은 분명 행복이다. (94)
-“아버지는 내게 늘 말씀하셨어요. ‘일단 집 밖에 나가면 절대로 가난한 소녀처럼 보이지 말아야 해. 자신이 아무리 쓰레기처럼 느껴지더라도 절대로 다른 사람이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해야 한단다. 고개를 꼿꼿이 들고 걸어.’”(112, 청각 장애인 아버지 월터가 청각 장애를 가진 딸 로즈에게 강조하던 말)
-‘나는 나 자신이 농인 방식에 충분히 익숙하고 농문화에 동참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며 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도 무리 없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능력 때문에 때때로 내게는 건청인 마인드라는, 진정한 농인이 아님을 암시하는 꼬리표가 붙기도 했다.‘ (200)
-스윌러는 ‘하지만 우리는 누구인가? 나는 알고 싶었다. 우리 눈으로 바깥세상을 보는 주체는 과연 누구인가?’라고 썼다. 몇 년 뒤 그는 자신의 웹사이트에 다음과 같은 설명과 함께 짧은 자전적인 글을 올렸다. ‘2005년에 조시라는 사람이 인공 와우 이식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대성공이었다. 그는 자신이 ASL을 사용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있다. 그는 청각 장애인 커뮤니티의 분열을 조장하는 방어적인 태도와 불신을 거부한다. 그리고 우리의 동질성으로 분열을 극복해야 한다고, 그렇게 될 거라고 믿는다.’ (201)
-서아프리카의 다양한 부족 언어와 전설의 사멸을 언급하면서 말리의 민족학자 아마도우 함파테 바는 ‘노인 한 명이 죽는 것은 도서관 하나가 불타서 없어지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지금 농인들이 겪고 있는 문제는 과거에 퀘이커교도나 아메리카 원주민, 모든 종족과 국가가 겪었던 문제다. 우리는 문화의 소각로에서 살고 있다. 21세기 말에 이르면 현재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6000여 가지의 언어 중 절반이 소멸될 거라고 한다. 바벨탑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언어의 소멸과 함께 수많은 전통적인 생활 방식도 사라질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언어학자 니컬러스 에번스는 인간에 대해 ‘모든 계층에서 변화시킬 수 있는 본질적으로 다양한 의사소통 체계를 가진 유일한 종족’이라고 지적하면서 ‘다양성이 중시되는 언어와 인식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하루속히 찾아야 한다고 썼다. 그렇게 하지 못할 경우 농인은 수많은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또한 그들의 언어는 다른 수많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결국 멸종될 것이다. (209-210)
-나는 마치 ‘아, 우리 아이는 그럭저럭 감당이라도 되지만 당신의 아이는 어떻게 감당할 수가 없겠군요’라고 말하듯이 무척 측은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어요. 그런데 그녀가 정확히 똑같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더군요. (230)
-그녀는 치료 전문가를 구하고, 항우울증 약물 치료도 받았으며, 그때 이후로 계속해서 항우울증 약을 복용하고 있다. ‘치료를 받으면서 그 오랜 세월 동안 내가 평범한 삶과 무척 거리가 먼 삶을 살았음을 깨달았어요. 어느 순간 ’와우! 이런 게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죠.’ (255, 이런 유사 구절을 여러 책이나 글에서 매번 밑줄 쳤던 듯한 기분. 느낌 아니까)
-‘나는 태어나면서 줄곧 교회에 다녔고 지금도 다니고 있어요. 한참 화가 나 있던 시기에는 내가 기독교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100퍼센트의 사랑과 권능을 가졌음에도 사람들이 썩어서 곪아터지도록, 개개인이 이런 고통을 안고 태어나도록 놔두는 그런 꼭두각시 조종자는 없을 것 같았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테일러의 화도 풀렸다.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다만 수긍해 줄 수 있을 뿐이에요. (…)’ (272)
-‘나는 내 결정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어요. 물론 그 당시에는 내게 선택권이 없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지금은 선택권이 나에게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이 아이가 생긴 것이 단순히 내게 닥친 어떤 사건이 아니라 내가 내린 긍정적인 결정의 결과라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293)
-키키는 화학요법을 시작하기 전에 크리시가 머리를 삭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신이 직접 해주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크리시의 삭발이 끝나자 자신도 삭발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크리시가 만류했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키키가 말했다. ‘엄마는 내 수술 뒷바라지를 하느라 고생이 많았어요. 그 일 때문에 엄마가 암에 걸린 게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나는 남들과 다르다고 느끼면서 오랫동안 지내 왔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아요. 그래서 나도 엄마처럼 머리를 깎아서 엄마 혼자만 다르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어요.’ (306)
-그럼에도 우리는 뇌의 어느 부분에서 해당 증후군을 유발하는 작용이 일어나는지, 왜 발생하는지, 무엇이 기폭제 역할을 하는지 거의 아는 것이 없다. 게다가 외적인 징후 말고는 자폐 여부를 판단할 방법도 없다. 노벨상 수상자 에릭 캔들 교수는 ‘자폐증을 이해할 수 있다면 인간의 뇌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우리가 인간의 뇌를 이해해야만 비로소 자폐증을 이해할 거라는 사실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다. (400)
-영국의 정신분석가 줄리엣 미첼의 논평에 따르면, ‘극단적인 경우에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해서 야기되는 격렬한 감정에 스스로 숨이 막힌다. 하지만 당신이라는 존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 상대방의 마음속에 당신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라질 수조차 없다. 다른 사람에 대한 당신의 인식이 당신에 대한 다른 사람의 인식과 관련이 있다는 심리적인 등가를 보여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427)
-하지만 보다 그럴듯한 현실은 정신분열증이 알츠하이머병처럼 무언가 더해지는 것이 아닌 대체와 결실의 질병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이전까지 알던 사람을 가면으로 덮어 가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일부를 제거하는 것이다. (529, 요즘은 조현병이란 용어를 쓰던데 번역을 정신분열증으로 한 이유가 궁금했다. 둘이 같은 질환으로 알고 있는데 아니었나…더 읽어보면 알겠지.)
-널리 알려진 대로 정신분열증 환자는 그들이 외부에서 들리는 소리라고 잘못 인지하는 목소리들이 존재하는 다른 세상에 빠져든다. 자신의 내면에서 생성된 이런 관계가 진짜 외부 세계의 그 어떤 교류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중요하게 된다. 이 내면의 목소리는 일반적으로 잔인하고, 특이하고, 부적절한 행동을 부추긴다. 이런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대체로 겁에 질려 있고 거의 언제나 피해망상적인 태도를 보인다. 때때로 환각은 환영 뿐 아니라 심지어 냄새로도 나타나고, 실질적인 위협으로 가득한 세상을 지옥으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위협 때문에 고통에 겨워 몸부림치는 지옥으로 만들기도 한다. 많은 정신분열증 환자들이 이상하리만치 망상에 집착한다. 희미해지는 실제 세상은 그들을 떠날 수도 없고 찾아오는 이도 없는 유해하고 고독한 행성에서의 영원한 삶으로, 지독한 고독 속으로 몰아 넣는다. 정신분열증을 앓는 사람들 중 5~13퍼센트가 자살한다. (…) 꿈을 현실로 인지하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거의 없다. 우리 모두는 자는 동안에 찾아온 공포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새 날을 맞이할 때 황홀한 안도감을 느낀다. 정신병은 자아를 현실과 구분하는 개인의 능력을 저해하는 주된 요소다. 정신분열증 환자의 경우에는 상상과 현실을 가로막은 막의 투과성이 너무 좋아서 생각을 하는 것과 경험을 하는 것이 특별히 다르지 않다. (530-531. 정신분열증=조현병 맞는데...)
-한번은 길가에 있는 밴을 가리키면서 그 차에 FBI의 특수 장비가 실려 있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간호사가 자신을 독살하려고 한다고 생각해서 약도 먹지 않으려고 했어요. 해리가 입원한 뒤에 그 아이의 아파트에 간 적이 있었는데 집 안이 완전히 혼돈 그 자체였어요. 마치 그 아이의 머릿속을 보는 것 같았죠.(…) 한동안은 모든 게 순조로웠는데 어느 날 자기 아파트에 도청 장치가 설치되었다고 말했어요. 그동안 복용하던 약들 중 하나를 끊은 상태였죠. (534-535, 동서고금 막론 조현병의 증상에 길가의 차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생각,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한다는 생각(독살 망상도 흔함), 도청 장치가 숨겨져 있다는 생각이 자주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난 그걸 열두살에 봤어요...)
-(어디서나 불쑥 등장하시는 에릭 캔들 박사님이 알아낸 것에 따르면) 대다수 질병들은 하나의 유전자가 지속적으로 발현되는 방식에 의해 발생한다. 그리고 그 유전자의 스위치를 내리면 해당 증상도 사라진다. 하지만 정신분열증은 비록 일단의 유전자 때문에 발병할 수는 있지만 해당 유전자의 스위치를 내려도 증상이 완화되지 않는다. 일단 발병하면 이후로는 스위치를 내려도 저절로 작동하는 것이다. (549-550)
-자폐증에서는 조기 행동 개입이 자폐 증상의 발현을 약화시킬 수 있다. 이를테면 조기 행동 개입을 통한 훈련이 뇌의 실질적인 발달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듯 보인다. 정신분열증의 경우에도 조기 개입이, 그래 봤자 생후 18개월이 아닌 만 18세에 가깝지만, 비슷한 결과를 보장할 수 있다. 예일 대학 정신의학과 교수 토머스 맥글라샨은 정신병 증세가 처음 나타났을 때 조기 진단과 약물 치료를 실시함으로써, 만약 해당 조치가 없다면 정신분열증으로 발전하는 특징이 있는 뇌 변성을 실질적으로 완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치료의 불완전함을 고려하여 오늘날에는 훨씬 더 조기에 개입하려는 움직임이, 즉 정신병이 발병하기 이전인 전구증상 단계에서 예방하려는 움직임이 점점 더 두드러지고 있다. 환자들은 리버먼이 ‘험프티 덤프티 상황’이라고 부르는, 다시 말해 ‘우리의 현재 도구로는 정신분열증에 걸린 사람을 고치기보다 정신분열증에 의한 병적인 상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는 편이 더 쉬운’ 상황에 있다.
(…) 전문가들은 전구증상 단계임을 암시하는 일단의 증상들을 정리했는데 의심, 특이하고 불가사의한 또는 기이한 사고방식, 행동 방식의 극단적인 변화, 기능 감소, 학교나 직장 생활에서 보이는 무능력 등이다. 하지만 이런 증상들 대부분이 평범한 사춘기 증상이기도 하다는 점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568-569, 저도 그래서 까딱하면 정신건강의학과에 달려가기로 했습니다… 헤까닥하면 우리 선생님 말씀대로 보호입원 요청하고 약물 치료 전에 뇌전기자극술?이런 거를 해서 리부팅 먼저 해달라고...여기 써 놨다 식구들아...)
-‘...정신적 인지 행동 치료도 약물 치료만큼이나 효과가 있었다. 어떤 치료를 선택하든 정신병 환자들로 하여금 현실 세계에 집중하고, 교류하고, 정신병 증상이 겉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맞서게 할 수만 있다면, 정신병의 진행 속도를 늦추어서 극심한 경우에만 발현되도록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뇌에서 학습에 의해 만들어진 관계가 유실되지 않도록 하는 데 해당 치료가 일조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정신분열증에 걸릴 위험이 높은 사람의 가족들은 어떤 점을 주의해서 관찰해야 하는지 배워야 하고, 의사들 또한 불과 며칠 만에 정신병이 급격하게 악화될 수 있기 때문에 환자들을 수시로 만나야 한다. 정신병이 발병하기 전에 향정신병 약을 복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불안과 우울증에 대해서는 공격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옳다. (570, 다들 병원을 두려워하지 말아요...선빵이 최고의 방어임)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영혼 말고는 그 어떤 남자도 나를 임신하게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버지가 쓴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어요. 나는 예수그리스도가 2000개비의 담배를 나누어 주면서 책임감을 느꼈던 것과 똑같은 책임감을 느껴요. 예수그리스도가 나누어 준 것은 빵이 담긴 냄비 몇 개가 아니었어요. 내 생각에는 담배였어요. 그래서 그녀가 나와 아버지의 영혼 사이에서 태어난 딸들을 계속해서 죽이는 거예요. 그 딸들 중 한 명은 나보다 열 살이 많아요. 다른 한 명에게는 음료수를 사 먹도록 1달러 25센트를 주었죠. 나는 여자가 없이 아이를 낳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들은 동성애자예요. 나는 그들이 하나같이 게이라고 생각해요.”(577, 조현병 환자인 재키에게 저자가 약물치료에 대해 묻자 한 말. 저렇게 맥락이 이어지는 듯 비논리적인 게 극단으로 가면 나는 왜 힙하게 느껴지는 걸까...빌런과 정신병자들은 나와 나혼자만의 친밀감, 인류애로 묶여 있다…)
-나는 샬럿에게 “정말 정신없이 바쁘겠어요”라고 위로를 건넸다.
그녀가 말했다. “때때로 삶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에요.”(579)
-하지만 1도 화상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3도 화상으로 인한 고통을 어느 정도는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우울증은 일반적인 감정의 극단적인 형태다. 하지만 정신분열증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실존주의적인 독일인 정신과 의사 칼 야스퍼스 역시 정신병과 정상적인 사고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과 같은 차이’를 확인했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일반적으로 자신이 아는 것을 표현할 능력이 없으며, 설령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적절한 언어를 이용해서 풀어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단지 비유를 통해서만 정신병의 끔찍함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618)
-조울증 장애가 있는 작가 앤디 베어먼의 설명에 따르면 “정신 질환은 그 사람과 분리시켜 치료될 수 없다. 정신 질환과 환자가 불가분의 관계인 까닭이다. 방금 나는 ‘정신 질환은 어디서 끝나고 어디부터가 나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제시했다. 내 경우에 정신 질환과 나는 하나다. 적과 친구가 된 셈이다. 내가 치료에 성공한 이유는 나와 내 장애를 둘 다 고려하고, 그 둘 사이에 따로 구분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는 약물 반응에 따라 소급해서 판단하는 편법을 제시한다. 예컨대 만약 데파코트를 복용하고 상태가 호전되었다면 그 사람은 조울증에 걸린 것이 틀림없다. 자이프렉사를 먹고 상태가 확 나아졌다면 아마도 정신분열증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아무리 유용할지라도 거기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행위는 여전히 모순적일 뿐 아니라 입증되지 않은 이론에 매달리고, 정신 질환에서 불분명한 역할을 하는 신경전달물질에 집착하는 꼴이다. 정신 질환의 본질에 대한 환원주의적인 사고-정신 질환을 화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는 연구비를 지원하는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그에 기초한 연구가 환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직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정신분열증은 어떤 여지도 남겨 두지 않는다. 즉, 일단 정신분열증이 발병하면 정신분열증이 곧 환자 자신이 되는 것이다. (619-620)
-아무도 샘 피셔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고 딱 꼬집어서 말할 수 없었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그가 서른 세살 때 한 정신과 의사를 통해서였다. 그 의사는 그가 정신분열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 다른 임상의는 그를 아스퍼거 증후군이라고 진단했다. 샘은 확실히 감정 장애가 있고, 주기적인 격심한 우울증과 이따금씩 경조증을 경험하며, 정신병은 아니지만 과도한 자존감과 자만심을 느낀다. 그의 기만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은 그에게 경계성 인격 장애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는 불안증과 공포증이 있으며, 지나치게 강박적이고 자기도취적인 성격장애, 장기간 계속되어 온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을 보인다. 요컨대 그는 마치 갈라쇼처럼 하나의 뇌에 집약된 다수의 완전한 정신병 증상을 보여 준다. 그가 말했다.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내가 너무 이상해서 그래요.” (620-621)
-극단적이지만 일정한 스트레스는 상대적으로 덜 극단적이지만 일정치 않은 스트레스보다 대처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다운증후군 자녀의 부모 노릇이 정신분열증이나 자폐증 자녀의 부모 노릇보다 더 수월한 이유 중 하나도 그 때문이다. 즉 다운증후군 자녀의 부모는 그날그날 자신이 누구를 상대하는지 알고, 부모에 대한 요구도 비교적 변화가 적은 편이다. 반면에 정신분열증 자녀의 부모는 자신이 장차 어떤 괴상함과 부닥치게 될지 예측할 수 없다. 자폐증 자녀의 부모는 어떤 파국의 순간이 들이닥칠지 예측할 수 없다. (652)
-공감과 연민은 당신이 여전히 당신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의미 있는 삶을 꾸려 나갈 수 있다는 믿음과 함께할 때 최선의 효과를 발휘한다. 이런 상태를, 즉 자기 스스로 자신의 인생 경로를 결정하는 것을 지칭하는 용어가 ‘내적 통제 소재’이며, 이와는 반대로 자신이 외부 환경과 사건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고 느끼는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로 ‘외적 통제 소재’가 있다. 내적 통제 소재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활 방식과 우선순위를 적극적으로 일치시키고자 노력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흔히 장애 아동의 부모들은 그들에게 통제권이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상황이 통제된다는 느낌을 얻는다. 일반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경험보다 훨씬 커다란 어떤 대상에 대한 믿음이다. 가장 보편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대상으로 종교가 있지만 다른 방법도 많다. 신의 존재나 인간의 선의지, 정의 등을 믿을 수도 있으며 단순히 사랑을 믿을 수도 있다. (661)
-사랑은 항상 변한다. 사랑은 유동적이고, 끊임없이 떠돌며, 평생에 걸쳐 서서히 발전하는 일종의 비즈니스다. 우리는 우리 자식들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도 그들을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그들을 알아 가면서 사랑하는 방식도 변화한다. 그들을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그들을 알아 가면서 사랑하는 방식도 변화한다. 그들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인권 운동가들은 정상적인 키와 성적인 성숙함 등 애슐리가 잃은 것들에 분노한다. 이러한 요소들이 하나같이 자연스러운 생명 주기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단지 대다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중요하다고 할 수는 없다. 육체적 성장과 성적인 성숙을 통해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지, 성장 억제와 자궁 절제술로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지 비교하려면 정교한 도덕적 고등 계산법이 필요하다. 어쨌거나 상당한 인지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 애슐리 치료법을 행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695)
-‘둘로 찢긴’이라는 저서에서 영국인 정신분석가 로지카 파커는 오늘날처럼 개방적이고 현대적인 사회에서도 어머니의 모순성이 추한 비밀로 간주된다고 개탄한다. 대다수 어머니들은 가끔씩 그들을 찾아오는, 자녀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살인이나 다름없는 열망을 다스리면서 살아간다. 파커는 양육 행위가 어머니에게 두 가지 충동을 유발한다고 주장한다. 무조건 참아 내려는 충동과 밀어내려는 충동이다. 훌륭한 어머니라면 자신을 잘 보살피고 사랑해야 하지만 자식을 숨 막히게 하거나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시불 거 어쩌라고) 어머니에게 양육은 이를테면 파커가 ‘참견의 스킬라 바위와 무시의 카리브디스’라고 부르는 것 사이를 항해하는 행위다. 파커는 어머니와 자식 간의 완벽한 상호 작용과 동시성이라는 감상적인 생각이 ‘어머니로서의 의무에 대한 일종의 슬픔-기분 좋은 완전한 일체감이 언제나 도달 불가능한 목표처럼 보이는 지속적이고 가벼운 후회의 상태-을 유발할 수 있다’고 제시한다. 완벽이란 수평선 같은 덕목이며, 수평선에 다가가려는 노력은 우리와 수평선 사이의 거리가 결코 줄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718-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