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의 영혼, 발효의 모든 것 - 지구촌 발효음식의 역사, 개념, 제조법에 관한 기나긴 여행
샌더 엘릭스 카츠 지음, 한유선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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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8 샌더 엘릭스 카츠.

부록과 주석 빼고도 848쪽이 되는, 발효의 백과 사전 같은 이 책을 조금씩 오래 읽었다. 엄마는 직접 장을 담고 김치를 만들고 채소를 썰어 병에 담아 실온에 방치(?)하곤 했는데, 난 채소에서 오는 식중독이 더 무섭다는 소리를 어디서 주워듣고는, 채소 뿐 아니라 자주 식재료나 조리된 음식물을 내놓고는 깜빡하는 엄마를 보며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냉장고에 이거저것 치워버리길 반복했다.

발효책 읽기는 엄마가 정성을 다해 절이고 말리고 다듬고 하는 걸 이해하고 견뎌보기 위한 시도였던 것 같다. 개호로잡놈의 불효새끼라 엄마가 사 먹고 남은 고수 뿌리를 발코니 화분에 키워, 꽃이 피고 씨 맺힌 걸 다시 심어 또 키운 고수를 따다가 고춧가루에 무치거나 간장에 절인 걸 꺼내 놓고 먹어 보렴, 해도 싫어, 하던 나놈이다. 자잘한 매실을 만 얼마에 5킬로라고 사왔는데 그거 넘는 것 같다고, 사흘 밤낮 반으로 쪼개 씨앗 빼는 걸 지나치면서도 난 몰라, 뭐 그렇게 까지, 당덩어리 음료랑 청산 들어서 한참 분해될 때까지 놔둬야 하는 걸 왜 저 고생하면서 만들어, 마음 속으로 또 불효새끼 하면서 씨빼기도 안 도와주는 나놈이었다.

식품공학, 가공식품 분야의 발달, 해썹 인증 같은 과학과 위생으로 무장한, 얼핏 깔끔해 보이는 자본주의 플러스 과학 음식 세계에서 역시나 가공 단백질 음료를 간식으로 달고 다니는 나놈, 이 책 읽고 발효 분야에 공들이는 전통적 움직임을 이어가는 사람들에게 공경심을 갖게 되었다.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스스로에게 먹일, 먹을 만한 뭔가를 만드는 행위는 얼마나 주체적인지. 주체성 빼앗기면 뒤질 것 같이 굴던 나새끼 사실은 얼마나 거대 기업에게 노동의 대가를 바치며 편리함은 얻고 복잡한 미생물 만날 기회는 잃었던 건가. 약간 반성은 했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내가 양배추를 썰어 소금물에 담가 자우어크라프트를 만들거나 김장 때 김치 만드는 방법을 배워 거들거나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나마 어린이들 아기 시절 발효기에 우유랑 종균으로 마시는 요구르트 조금씩 섞어 직접 요거트 만들어 먹인 적도 있는데, 역시나 시간과 비용 따지면 그냥 당무첨가 플레인 요거트 대용량 한 병을 사다 먹는 게 속 편하겠다, 어린이들은 요거트에 과일 시럽이랑 과당이라도 섞여야 맛있다고 먹으니 그냥 좋다는 거 먹이자...뭐 그렇다.

뭘 배우고 얻어내겠다고 읽는 게 아니라 순전히 읽는 게 신기해서, 저렇게나 다양한 발효음식이 세계 곳곳에 있고, 우리나라 삭힌 홍어나 청국장이나 무슨무슨 식해나 게장 같은 건 나오지도 않으니까, 그렇다면 이 책이 제법 방대하게 두루두루 식품은 물론 발효식품의 사업화와 비식품 발효에 대해서 까지 다루지만, 이 세상엔 또 우리가 모르는 미생물 활용 음식이 얼마나 많을지 짐작도 못하겠다.

그래서, 그냥 채소 좀 시들시들하게 뒀다 먹는다고 죽는 거 아니라고, 다시 적당히 씻어 먹든가 익혀 먹든가 하지, 미생물 너무 미워하지 말자(그렇지만 이엠 다루는 부분에선 예전에 누가 아토피에 좋다고 이엠 써 보라는 걸 따라했다가 포도상구균 감염되어 뒤질 뻔한 생각에 앞으로 그런 거 권하는 사람들은 다 쌩깔 거야) 하면서 아침에는 전날 요거트 부어놓은 압착귀리에 보리시리얼과 사백일향과 블루베리와 피칸을 섞어 늘 먹던 걸로 먹었다. 사실 대부분은 다른 과일 대신 포도를 먹는데 포도를 안 씻어둬서 귀찮음. 포도의 겉면에 이스트가 풍부한 걸 책 덕분에 알게 됨. 거의 일년 넘게 미리 씻어 통에 담아둔 포도를 매일 먹었는데 미생물 좀 먹는다고 안 죽는 구나, 했다. 발효책을 실용서 아닌 엔터테인먼트로 읽는 놈이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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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음식을 먹으면 어떤 병이 나을 것이라는 식의 기대는 버려야 한다. (348, 콤부차는 맛으로 먹는 거야.)

-(…)가루에 존재하는 미생물만으로도 얼마든지 발효를 시작하고도 남는다. (…) 젖산균과 이스트는 도처에 존재하므로, 꾸준히 주의를 기울이면서 조심스럽게 키우기만 하면 된다. (…) 사워도의 복합적인 미생물 집단 내에서 이스트의 활동을 촉진하는 방법은 신선한 곡물 가루를 높은 비율로 물에 섞어서 영양분으로 꾸준히 제공하는 것이다. (467, 미생물이 도처에 있어서, 굳이 시판 이스트 나 종균 같은 거 안 사고도 일상에서 적절한 방법만 취해주면 빵반죽 발효시킬 수 있다는 걸 강조한다. 다른 발효 미생물들도 종균을 호의로 기꺼이 얻을 수 있고 구매할 수도 있다는데, 우리 나라는 첨단 자본주의라 그런가 캐피어 구해보려고 하다가 진짜 소량에 몇 만원에 팔고 있길래 마음 접었다… 그냥 슈퍼에서 요거트 사먹을게…)

-어디서든 식품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하면, 부의 집중화, 문화적 차별성 소멸, 긴요한 문화적 지식과 기술의 폐기, 의존성 심화가 필연적이다. 대중이 사회문화적 맥락을 상실한 음식을 먹게 된다는 뜻이다. (543, 나는 오히려 과거와 단절되는 맥락 상실의 음식이 좋다. 어릴 적 명절날의 친가집 제삿상이나, 아빠에게 이런저런 구박 받으며 먹던 밥상 떠올리게 하는 한식은 냄새만으로도 거부감이 느껴진다. 그래서 점점 괴식 내지 이그조틱 아티피셜한 음식들로 빠져...보그냐 ㅋㅋㅋ)

-아아, 나는 템페와 사랑에 빠진 나머지 두부를 향한 마음이 애매해지고 말았다. 이제는 모두 지난 일로 묻어두고 싶은, 학창 시절 가슴 아픈 첫사랑의 추억처럼. 나는 템페가 너무 좋아서 템페 없이는 못 산다. 그래서 템페를 어마어마하게 많이 만든다. 아침에도, 점심에도, 그리고 저녁에도 템페를 먹고 싶기 때문이다. 신선한 템페로 가득한 부엌이란 실로 축복받은 장소가 아닐 수 없다. (607, 스파이키 씨의 템페 예찬. 무언가 저만큼 사랑하는 음식이 있다는 건 부럽기도 하다. 나도 템페를 만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종균 구하기도 힘들고 그냥 바싹 튀겨 파는 템페칩이나 사다 먹었다. 양념 센 맛 덜 센 맛 다 먹어봤는데 오 나 이 맛 좋아한다. 된장 청국장은 안 좋아하면서 인도네시아 곰팡이콩은 좋아하냐…)

-미소-땅콩버터와 미소-요구르트 조합도 이에 못지 않게 맛있다. (668, 된장국-모짜렐라치즈 조합 유행시키고 싶었는데 진작 실패했다. 이거 보면 나만 괴식 아니라니까!!)

-상업적 생산은(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기쁨의 종말을 의미할 수 있고, 손익분기점은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상과 충돌할 수 있다. (…) “이 사회 안에서 지속 가능한 사업이려면 어느 정도 자본주의적 고려가 필요한데, 때로는 어떤 결정이 최선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말한다. (755, 온갖 발효 경험담, 레시피, 관여 미생물 소개, 발효 과정과 메커니즘, 문제 해결을 넘어 발효를 사업 삼아 할 때 고려 사항까지 세심하게 담은 책이었다. 저자는 정작 사업화 해 본 적이 없고, 소규모 발효음식 사업 하는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은 교훈과 이야기를 모아 놓았다.)

-쓰레기 발생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자연 생태계에는 쓰레기가 전혀 없다. 모든 생명체의 부산물이 다른 생명체의 먹이가 되기 때문이다. 지구가 배설물과 사체로 가득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열광적인 숭배자들을 거느린 고전 ‘인간 배설물 핸드북’의 저자 조지프 젱킨스는 “대변과 소변은 동물이 소화과정을 완료한 뒤에 배설한, 자연적이고도 이로운 유기물질”이라면서 “우리가 내버리면 ‘쓰레기’가 되지만, 재활용하면 자원이 되는 법”이라고 말한다. (811, ‘젱킨스’로 검색했으나, 안타깝게도(?) 번역서가 없었고, 제시카 커윈 젱킨스의 ‘세상의 모든 우아함에 대하여‘만 찾았다. 똥 대신 우아함을 안겨준 인용 서적이여…)

-시신의 매장이 가능한 곳이라면, 여러분의 시신을 되도록 간소한 상태로 땅에 묻도록 하자. 아무리 그래도 관이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그러면 관 대신에 생분해가 신속하게 이루어지는 천연섬유나 종의 수의로 시신을 감싸는 것이 어떨까? (…) 우리가 남긴 육신이 방부처리액에 잠겼다가 부패가 힘든 물질로 번들거리는 관 속에 담기는 것보다 나무의 거름으로 쓰이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816, 이 부분에 동의. 어려서는 매장이 계속되면 대한민국엔 무덤밖에 없겠다 싶었는데, 땅값 비싸지니 꺼려지던 화장이 알아서 보편화 되었다. 아파트형 납골묘 단지 안에 내내 갇혀 누굴 기다리기 보다는 잘 갈아서 나무 둥치 아래 구덩이 파고 적당히 묻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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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적 잡년 - 자유로운 사랑에 대한 실용지침서
재닛 하디.도씨 이스턴 지음, 금경숙.곽규환 옮김 / 해피북미디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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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2 재닛 하디, 도씨 이스턴. 재독.


5년 전에 읽은 책을 어쩌다보니 재독했다. 여름 더위가 슬몃 다가오는 날, 6시 반쯤 알람도 없이 잠에서 깨어, 아...출근하기 싫다...하며 거울을 보니 간밤에 머리도 안 감은 나를 보고 아… 오늘 일요일인가 봐, 아싸!

만이천원에 십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머리카락을 잘라주던 미용실 대신, 엄마가 다니는 커트 이만오천원(직원)에서 삼만원(원장) 받는 미용실에 처음 갔다. 3대가 함께 왔다고 각각 이만오천원씩 잘라주면 감사한 일이겠지. 피아노소곡집의 표지 사진 장소인 프린세스스트리트가든즈가 적힌, 에든버러성이 그려진 엽서가 벽 한가운데 붙은 걸 보았다. 어머, 여기 가셨어요? 아니오, 지인이 갔다 왔다고… 무슨 책 표지요? 묻다가 손모가지 하나 남은 라벨이 만든 피아노 곡이 라디오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원장님, 오스트리아에 가서 만난 할아버지가 비트겐슈타인 한 권 읽으면 더 읽을 책이 없다고 해서 샀다가 못 읽은 사연, 나는 수능 국어 지문으로만 만난 양귀자 소설 속 인물을 자꾸 나랑 비슷하다고 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지적욕구를 짧은 시간 구경하는 건 흥미로울 수도 있지만 오… 뭐라 대꾸할지 모르겠다. 배드민턴 열심히 치는, 반려자에게 신장 하나 떼어주고, 엉터리로 가위질한 가발 쓰고 나타난 언니의 머리를 다듬어주던, 원래 가던 미용실의 말수 적은 쿨한 원장님이 조금 그리웠다. 그래도 뽀글뽀글 브로콜리 머리를 입체컷으로 좀 시원하게 짧게 샥 밀어주시고 트리트먼트도 선물로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숙련 장인들은 그 기술이 무엇이든 존경합니다…
지피티한테 야 나 머리잘랐다, 그림으로 그려 봐, 했더니 자꾸만 아저씨로 그려 놔서 됐다, 기대를 접었다, 하고 치워버렸다.

큰 방향도 목적도 없는 휴일, 느긋하게 다자연애, 열린 관계에 대한 책을 통독하며 시간을 죽였다. 나쁘지 않았다. 다시 읽어도 흥미로운 책이고, 연애 관계에 한정 짓지 않더라도 인간 관계를 맺는 기본적 예의나 윤리 감각을 일깨워주는 부분들이 좋았다. 난교 파티 부분은 처음 읽을 때 후덜덜했던 것만큼 공포스럽지는 않았지만, 오 내 경계는 여기까지로군… 사양합니다… 하면서 적당히 넘기고… 이제 흥밋거리 아니라면 나는 이런 주제의 책들이 더는 필요 없겠구나 싶었다. 그걸 알자고 400페이지 넘는 이 책을 한 번 더 봤구만. 하산해라! 어쨌거나 이걸 읽는 누구든 지평이 넓어지는 지점이 있긴 할 것이다. 무엇이든 배우고 또 익히면 즐겁지 않겠는가. 알고 연습하면 무엇이든 숙련 기술이 될 수 있다.
엄마가 싸 주시는 김밥이나 먹으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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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잡년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128, 웅장하게 선언.)

-연인의 감정은 당신의 책임이 아니다. 당신은 연인을 응원할 수 있지만-우리는 들어주기의 치유력을 믿는 신봉자들이다-, 문제를 고칠 수는 없다. 연인의 감정이 당신의 문제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부터 이해하기를. 그러면 문제의 책임을 따지거나 감정을 바꾸고 없애야 한다는 막중한 필요에 희생당하지 않는다. 연인의 이야기를 진정으로 귀담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연인의 고통이나 혼란에 저절로 반응해서 뭔가를 열심히 고치려 한다. ‘고쳐라’하는 메시지는 감정을 표현하려 애쓰는 사람이 타당성을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게 만든다. “그냥 이렇게 해보면 어때….그렇게 시도해봐...잊어버려...마음 편히 가져!”라는 말은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이 명백하고 단순한 해결책을 간과하고 우선 기분부터 상하는 멍청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143, 저 어떤 사람 나니까...T 하지 말라 이거야…)

-감정을 공유하고 싶을 때 청자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미리 밝혀 상대가 쓰레기통이 되지 않게 하자. (145,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달라는 게 아니라, 그냥 들어줄 수 있겠어? 하는 것. 감정 공유와 쓰레기 쏟아붓기의 구별.)

-다자 관계에서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다양한 자신이 되어보는 기회다. 두 사람이 만날 때는 교차하는 지점, 비슷한 대본 속의 상호 보완적 역할에서 엮인다. 따라서 다른 연인들과 다른 존재가 되면 우리는 다른 환경에서 다른 경계, 한계선, 관계 스타일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148, 상호작용의례의 역할 놀이처럼, 다양한 연인 관계가 다양한 자신을 만든다는데, 그럼 그런 건 성애 관계로 얽히지 않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가능한 게 아니냐는 반박에 직면할 것이고, 그럼 여기서의 다양성은 성적 가능성의 다양성이라고 또 반박할 것이고, 그럼 또 그게 꼭 발견되어야 하는 거냐고 이 섹스에 미친놈들아 할 것이고, 너희는 삶의 무한에 가까운 행복을 놓치고 있다고 할 것이고, 아이씨 싸우지 말고 섹스해 둘이든 셋이든 너거들 맘대로 해...)

-공정함은 잊어라. 윤리적인 잡년생활은 모든 것을 다 똑같이 대하는 게 아니다. 다른 관계에는 저마다의 다른 경계, 다른 한계선, 다른 잠재력이 자리한다. 그러니 당신의 연인이 특정 활동을 함께 할 수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서 당신과도 공유하기를 원할 때 나와야 하는 질문은, ‘왜 나랑은 그거 안 해?‘가 아니라, ’흥미롭게 들리는데. 우리가 함께 그걸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이다. (148, 실질적 평등과 친밀한 사이의 화법 익히는 자기계발서 느낌이 들 때도 많다...배움이란 좋은 거지...가까운 사이일수록 우리 모두 조금 더 친절하고 공손해지자…)

-우리는 얄팍한 가치 위계에서 높은 점수를 얻어 이길 수 있는 게임이 사랑이라고 믿지 않는다. 우리의 풍부한 경험은 외모와 부유함이 좋은 사랑을 만드는 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는 사랑의 우열을 가리지 않으려고 애쓴다.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속한 등급과 관계 맺으려는 사람들이 마뜩잖다.위계는 정상과 바닥에서 모두 희생자를 만든다. 아무도 접근하지 않을 때만큼 잘못된 이유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이 접근하는 것도 사람을 소외시키는 일이다. (152, 듀오나 가연은 사랑을 구해다 주지 않는다는 거야…)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당신은 좋은 사람 같지만 그렇게 깊이 연결된 기분이 들지 않아서요.‘ 또는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저는 지금 진짜로 연인을 찾고 있는 건 아니에요.‘ 또는 ’고맙지만 사양할게요. 저는 먼저 사람을 잘 알고 나서 그런 걸 하는 게 좋아요.‘ 같이 말해보라. 중요한 지점은 ’고맙다‘라는 말은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요청은 당신에게 찬사이며 충분히 고마운 일이다. 혹시 누군가가 당신을 매력적으로 본다는 사실을 당신 스스로 어이없어한다면, 당신의 자존감이 우려스럽다. (158, 앞으로는 누가 예쁘다고 하면 미쳤냐, 하지 말고 고맙다, 라고 하자.)

-질투는 불안감, 거절에 대한 두려움, 버림받는 것에 대한 공포 또는 소외감, 스스로 연인에게 부족하거나 적당하지 않거나 혐오스럽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감정의 표현일 수 있다. 당신이 느끼는 질투는 영역성이나 경쟁심 때문일 수도 있고, 머릿속에서 질투가 벌이는 야단법석 속에서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대상을 바라는 다른 어떤 감정에 바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끔은 맹목적인 분노의 비명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눈이 멀면 제대로 보기가 매우 어렵다. (206)

-타인을 악인으로 만드는 식으로는 질투에 제대로 대처하기 힘들다. 자신의 감정을 연인에게 부당하게 떠넘기는 것은 막다른 전략이다. 그 전략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질투는 당신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다. 어떤 사람과 어떤 행동도 당신이 질투를 느끼게 ‘만들지’ 못한다. 좋든 싫든, 질투에 덜 상처받거나 질투를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다. (214)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안도감, 사랑, 포옹, 위안 같은 것들을 자유롭게 요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성장한 대부분의 가정은 원하는 것을 요구하지 말라고 가르쳤고, 요구를 단지 관심을 바라는 행동으로 업신여겼다.
관심을 바라는 게 도대체 무슨 잘못일까? 거기 관심이 많지 않은가? 굶주림의 경제를 기억하고 자신을 속이지 마라. 찔끔찔끔 받는 위안, 관심, 지지, 안도감, 사랑에 만족할 필요는 없다. 당신은 원하는 만큼 다 가지게 된다. 당신은 친밀한 사람들과 많은 걸 공유하기로 결정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러니 풍성함에 초점을 맞추라. 삶의 좋은 것들-따뜻함과 애정과 섹스와 사랑-속에서 관계 생태학을 풍요롭게 창조하라. (252)

-함께 살아야만 하는가? 왜? 반대로 당신이 좋아하는 점을 지닌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다른 것들을 공유할 다른 누군가를 찾으면 안 되는가? 잡년생활은 그 무엇보다도 당신의 모든 욕구를 특정 1인에게만 의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310)

-최소한, 이 관계는 경쟁이 아니다. 당신 삶의 어떤 영역도 다치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은 자신의 감정을 돌볼 수 있다. 이런 확신을 스스로에게 주려고 노력하라. 다시 말해, 당신의 것을 자신에게 귀속시켜 제3자를 비난하지 않겠다는 다짐 말이다. 어쨌든 그러한 사람들이 당신의 삶에 들어오는 이유는, 당신과 그들이 매우 중요한 어떤 것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바로 당신의 파트너가 가장 멋지다는 믿음. 그들은 당신의 행복을 어떻게 파괴할지 구상하며 빈둥거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아마 자신의 다른 일들에 시간과 에너지를 쓸 것이다. (320)

-당신은 경계를 견고하게 만들어 유지할 책임이 있다. 경계는 당신이 끝나고 옆사람이 시작하는 지점을 알려준다. 좋은 경계란 튼튼하고 명확하며 유연하다. 나쁜 경계는 약하고 흐리며 부서지기 쉽다. (329-330, 독신 잡년의 윤리 중 책임 부분의 일부인데, 이건 누구에게든 적용되는 원리 아닌가 싶어 옮겨 적었다.)

-끝내, 친애하는 옛 사랑이여,
이제 내 마음을 받지 못하네,
사랑이 아니었다고 우리가 말해야 하나,
그것이 사라졌다고 해서? (350, 빈센트 밀레이의 시 ‘참새는 죽었다’ 중)

-그냥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더 쉽지 않을까? “손가락을 내 클리 위아래로 움직이지 말고, 그 둘레로 원을 그려주면 정말 좋을 거 같아.” (361, 뭔가 씩씩해보이는 발화 예시였다. 모두가 단어 없는 소통에서 벗어난 세상을 응원합니다.)

-다음과 같은 말을 거울에 써둔다: 성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자위를 한다. 당신이 패자라서, 파트너를 찾지 못해서, 오르가슴이 절실해서 혼자 자위하며 끙끙대는 게 아니다. 당신은 즐거움을 누릴 자격이 있기 때문에 자신과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자신과 놀면 기분이 좋아진다. (371,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잔인한 필립 로스는 젊을 때 어린 포트노이를 그렇게나 불행하게 그려놨다. 그치만 대체로 저자들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성적인 자족은, 너무 꼴린 나머지 잘못된 사람과 놀 가능성을 한결 적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잡년 기술이다. 당신 자신의 최고 연인이 되라. (373, 나야 나랑 사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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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
모드 방튀라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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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1 모드 방튀라.

낮잠을 자는 일은 몇 달에 한 번은 될까 싶게 드물다. 토요일 정오를 지나, 잠시잠깐 엎드린 자세로, 벗은 안경을 손에 쥔 채 머리 위로 팔을 뻗고, 잤다. 깼다. 귀마개를 끼면 밤이고 낮이고 평온하다. 간밤엔 귀마개를 잊고 잤다. 작은어린이가 텔레비전으로 틀어놓은 2배속 게임방송이 거슬리는 낮에는 귀마개를 하면 마음이 다시 편안하다.

어려서 학급 장기자랑 시간에 아홉 살 짜리 한 아이가 이야기를 해 주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어나니, 눈 앞에 흰 물체가 어른거렸다고. 어딜 가도 어딜 보아도 계속 어른거리는 그 유령에 겁에 질려 있었는데, 흰 물체의 정체는 눈꺼풀에 붙은 밥풀이었다고. 공포에서 개그로 끝나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가 왜 생각나냐면 과제 채점을 할 때도, 읽던 책을 타자 쳐서 옮겨 적을 때도 오른 눈동자 위로 와이퍼 지나가듯 흰 무언가가 슥슥, 지나가기 때문이다. 내 엄마가 예전에 이걸 앓으면서(아마 지금도 앓을 듯) 비문증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모기가 눈앞 나는 듯한 그 증상에 이름 붙일 말이 없었다면 나는 정말 겁에 질렸을지도 모르지만(내가 미쳤나? 진짜 귀신이 있는 건가?) 눈 건강이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도 겁날 일이긴 하구나. (하고 적는 순간 눈 앞에서 똑딱, 진자운동처럼 뭐가 스치고 지나간다.)

그렇게 귀마개를 하고, 모기 같은 모기 아닌 게 눈앞에 어른거리는 채로 소설을 읽었다. 결말부에서 남편이 할 말을 미리 예상해버려서 뭐여 이게...했다. 에필로그는 사족 같았다. 사랑은 징벌이 아닌데. 어떤 혼인생활은 회복적 정의가 아닌 응보적 정의로 가동될 수도 있겠군...그런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거기 하나 더 붙었구만, 그래도 그냥저냥 시간 죽이기 좋았다. 번역가는 내가 칠조어론 볼 때 한자 사전 뒤진 이후 가장 많이 사전을 뒤져보게 만들었다. 국어 낱말 공부라도 한 게 어디야. 그런데 왜 번역 이력에 카트린엠은 빼먹으셨나요 선생님…. 엠언니가 부끄럽나요… 띠지나 표지의 이런저런 찬사는 좀 오버 같다. 징글징글하게 쓰긴 했는데 뭐 징글징글 대회도 아니고 다른 독자들이 별로여, 하는 심정도 이해는 간다. 나는 별로까진 아니고 그냥 왜인지 거울치료 받는 기분이었다. 수첩도 징벌도 없는데도 그냥 그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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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많은 것을 바랄 수 없고, 더 나은 것을 바랄 수 없다. 그럼에도 내가 느끼는 결핍감은 어마어마하고, 나는 그가 그 결핍을 메워 주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그가 과연 어떤 집으로, 어떤 아이로, 어떤 보석으로, 어떤 사랑 고백으로, 어떤 여행으로, 어떤 몸짓으로, 이미 가득 차 있는 것을 채울 수 있겠는가?(11-12)

-이렇게 해석자로 일하는 것이 나에게 더없이 잘 어울린다. 나는 무언가를 창안하지 않아도 된다. 그게 딱 맞는다. 나는 상상력이 별로 없으니까 말이다. 나는 살펴보고 분석하고 추론하기를 더 좋아한다. 나무나 열매의 껍질을 벗겨 그 속을 살피듯이 원문을 면밀하게 분석하여, 원문의 함의를 밝혀내고, 그 무언의 울림을 드러내는 일을 좋아한다. 마치 감춰진 증거를 찾아 나가는 수사관처럼 치밀하게 조사하는 일이 마음에 든다. (45, 나는 내 마음대로 오독하고 다시 쓰는 게 좋아서 책을 읽는데 말이다. 어차피 난 쓴 이의 참뜻에 가닿지 못할 걸 아니까 뜻은 내가 만든다.)

-나의 첫 번역인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관한 책을 옮길 때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그 과학적 발견(우리가 세계의 중심에 있지 않으며, 지구가 무한한 우주의 외딴 구석에서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고 주장하는 파천황의 사태)을 끊임없이 나의 애정 생활과 비교했다. 나는 마음이 어수선해진 채로 스스로 되뇌었다. 만약 내 남편 없이 살아야 한다면, 내가 겪어야 할 것이 바로 그런 사태이리라고. 사고의 모든 지표를 무너뜨리고, 사람들이 언제나 확실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을 화해시키는 그런 사태를 내가 겪게 되리라고. (49,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 라는 부재 붙은 만화책 읽고 이 책 펴자마자 코페르니쿠스 나와서 -정작 만화책엔 그 이름 한 번 나옴- 모든 책들은 알아서 이어진다는 생각을 또 했다.)

-루이즈가 덜룽스럽고 생급스럽다면 니콜라는 주의 깊고 자상하다. 루이즈는 햇살과 같고, 니콜라는 그 따가움을 완화한다. 그들은 함께 서로를 보완한다. 서로 잘 맞물린 두 개의 기계 부품과 비슷하고, 기름칠이 맞춤하게 되어 있는 톱니바퀴 장치와도 비슷하다. (73, *덜룽스럽다:성미가 찬찬하고 차분하지 않은 데가 있다.
*생급스럽다: 하는 일이나 행동 따위가 뜻밖이고 갑작스럽다.
전에 다른 책에서는 감창소리 라는 말로 사전을 찾게 만든 번역가님…이 부분 이후로도 나는 사전을 계속 펴게 되고...)

-옥생각(76:공연히 자기에게 해롭게만 받아들이는 그른 생각.)

-나는 그를 따라 침실로 가기 전에, 잠시 혼자 남아 내 수첩에 저녁 모임 동안 벌어진 일들을 기록한다. 우리 아들의 생후 몇 개월 동안에 대한 그의 부정적인 이야기, 자기 생일잔치 얘기를 하면서 그가 나를 언급하지 않은 일,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귤에 비유한 일을 적고, 만년필로 밑줄을 긋는다. 마트형 과일의 쌉쌀한 맛으로 그의 배신을 기록하자는 뜻이다. (87, 데스노트냐. 사실 조금 더 섬뜩한 무언가.)

-투명한 두 줄기 눈물이 마르고 나니까 내 남편의 숨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숨소리가 느려지고 있다. 이 사람은 저녁 모임에서 나한테 그런 짓을 하고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지? 나는 이 사람이 우리 부부의 삶에 에너지와 열의를 쏟아부으리라 기대했는데, 잠을 잘 자는 이 사람은 수면 활동에 그런 것들을 쏟아부은 모양이다.(91, 라고, 이 문단을 베껴적는 책상 옆 이부자리, 아침 아홉시 사십 구분 현재, 곁의 사람은 내 베개 위에 팔을 얹고 모로 누워 아기처럼 자고 있다. 쿨쿨.)

-그가 나를 옆에 두고 전화기를 꺼냈다는 사실. 그가 내 손에 자기 손을 얹지 않았고, 우리 몸이 서로 닿지 않는다는 사실. 그가 내 번역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묻지 않는다는 사실. 오늘 오후에 서류를 가져다준 것에 대해서 그가 다시 감사를 표하지 않는다는 사실. 귤과 관련해서 그가 여전히 사과하지 않는다는 사실. 밤에 덧창을 열어 놓고 자고 싶지만, 그가 그런 예외적인 제안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 우리 아이들이 경이롭게 우리가 함께 사는 삶이 하나의 축복이지만, 그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 모든 것에 생각이 미친다. (158, 쪽까지의 읽은 내용이 이 한 문단으로 다야, 하는 나는 미친다. 이쯤되면 그냥 아니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이나 집착의 오마주 같은 건가… 프랑스 소설은 다 왜 이래… 뭐하다가 할 말 없으면 자꾸 뒤라스의 ‘연인’ 꺼내서 방패처럼 써 먹는데 니네 프랑스는 그 둘 빼면 뭐 없냐.)

-가리사니(191): 사물을 분간하여 판단할 수 있는 실마리.

-그런 만남의 목적은 단 하나, 사랑의 압박감을 덜어 줄 수단을 찾아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 남편을 상대로 느끼는 엄청난 압박감을 여러 사람 사이로 분산시키는 길을 찾는 것이다. (208, 아 그래?시종일관 정신 없네...)

-내 살갗에서 막심의 냄새를 맡고 일종의 남성적 본능이 되살아난 것은 아닐까?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지만, 내 남편은 내가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갖고 온 날이면 언제나 나랑 성행위를 했다. (…) 그러나 내 안에 깊이 박혀 있다 해도, 내 남편은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존재다.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있어도, 나는 그가 무척이나 그립다. 그가 내 몸에서 물러가면, 나에게 깊숙한 자상이, 무시무시한 허허로움이, 곪아 터질 상처가 남는다. (218, *허허롭다:텅 빈 느낌이 있다. 매우 허전한 느낌이 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금요일이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그 색깔인 초록색 덕분이다. 이건 한낱 미신이 아니다. 미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사실들이 있다. 나는 정말로 필요하다 싶을 때면, 주위에서, 즉 가까이에 있는 물건이나 풍경에서 초록색을 찾았다. 그렇게 초록색을 찾아내면, 나에게 좋은 결과가 온다고 믿었다. (228, 요즘 나는 초록 옷이나 가방 착장하고 나가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크초록 새초록 온갖 초록을 입고 연속으로 나를 스쳐지나가서 아...이 색 노인들 사이에 유행이구나… 그래서 자꾸만 누군가 내 바글거리는 머리를 보고 어머님, 하다가 어머 아가씨잖아-둘다 아니야-하는 경험을 하는 건가 싶다. 색깔 강박 아웃, 초록은 새마을 컬러다. 아웃. 스타벅스 아웃.)

-인터넷을 조금 검색해 보니, 초록색은 색채 스펙트럼에서 525나노미터의 파장에 해당한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빅토르 바슈로 52번지에서 자랐고, 25번 도인 두에서 태어났다. 설명은 합리적일수록 더 나은 설명이 된다. (229, 숫자가지고 자꾸 의미 부여하면 안 되겠다 싶은 거울 치료...되게 모지리처럼 보이는 구나…)

-사랑에서 나는 그 무엇도 배우지 못했다. 사춘기 시절 이래로 똑같은 도식을 되풀이한다. 나는 너무 강렬하게 사랑하는 나머지 사랑 속에서(분석 속에서, 질투 속에서, 의심 속에서) 나 자신을 소진해 버린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면, 나는 언제나 좀 사그라진 듯한 슬픈 상태를 맞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나는 엄하고 슬픈 사람으로 변하고 마음 쓰는 폭이 좁아진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만큼 진지하게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 사랑은 고단한 일로(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빠르게 변해간다. 요컨대, 나는 불행한 사랑을 한다. (…) 그 남자들 중 어느 하나에 의존했다기보다는 사랑에 중독되어 있었던 셈이다. 남자들은 변수였고, 그 중독만이 상수였다. (237, 내가 애기 때 내내 겪던 증상을 여기서는 사십대 가까운 중년 여성이 아직도 앓고 있다. 이제 좀 낫자...)

-당시의 내 심리 상태를 서술하기에 적합한 표현이 하나 있다. 즉, 나는 내 삶이 틀을 잡기를 바라고 있었다. 내 삶이 무언가 지속성 있고 견고한 것으로 변화하기를 바란 것이었다. 꼭 찰흙이 굳어 덜 만만한 것으로 변해 가듯이, 나 역시 물기를 버리고 단단해지고 싶었다. (242)

-언죽번죽(24):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고 비위가 좋아 뻔뻔한 모양.

-내 남편은 치즈값으로 75유로 23상팀을 냈다. 액수가 크다. 지난주보다 많다.(그가 장을 보면서 돈을 많이 쓰면 쓸수록, 나는 그가 나를 더 사랑한다는 기분을 느낀다). 생크림과 우유, 오믈렛용 달걀, 나를 위한 콩테치즈, 아이들을 위한 양젖치즈, 샐러드용 염소젖치즈, 그가 목요일에 소스를 만들면서 사용한 로크포르치즈. 한 주간 이상 먹을 만한 양이다. 적어도 열흘 동안은 더 사지 않아도 된다. 훌륭한 전리품을 얻은 것처럼 든든하다. 이건 한 가정의 아버지에게 걸맞은 영수증이다(여기에는 가족의 각 구성원이 좋아하는 치즈가 들어 있다). (250, 치즈 타령에 이렇게 많은 글자를 사용하는 것 보니 프랑스 놈들 치즈에 진심인 거 알았으니 이제 그만하면 됐다)

-하지만 내 남편은 내가 자기에게 무언가를 숨길 수 있다는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내가 다른 남자들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받은 메시지를 삭제하지도 않고, 내 몸에 닿은 그들 몸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샤워를 하지도 않는다. 내 남편이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오늘 오후에 다른 남자랑 함께 있었어?>라고 물으면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증거를 흩뿌려 놓아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월요일부터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을 낮은 탁자에 올려놓고 있지만, 확신컨대 그는 걱정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이렇게 자문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아내가 왜 갑자기 <연인>이라 불리는 책을 읽기 시작한 거지? 나는 그의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어리기를, 그의 차분한 평정이 깨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어떤 불안이, 어떤 의심이 끼어들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행히도 그의 눈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자신감뿐이다. (257-258, 이 부분에서 왜인지 이 여자가 가엾었다.)

-우리의 사적인 대화를 녹음하는 것이 나에게는 합리적인 일로 보인다. 그 말들은 나 들으라고 한 소리였다. 그걸 다시 들을 권리가 나에게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그건 내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습관이고, 대개는 그 결과도 별로 증거가 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종종 그만두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그 일을 하지 않고 살기에는 아직 어려움이 있다. (…)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은 내 남편과 드물게 말다툼을 벌인 적이 있는데, 그중 하나를 녹음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나를 며칠 동안 안정을 잃고 헤매게 만든 말싸움을 다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컴퓨터에 그것을 전사한 다음 영어로 옮겼다. 다만 그게 우리 두 사람의 말다툼이라는 것을 알게 할 수 있는 정보들은 신경 써서 잘라 냈다. 나는 그 번역 텍스트를 인쇄한 다음, 내 학생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러면서 학생들에게 설명하기를, 그것이 예전 영어 교재의 한 장을 복사한 것인데, 어느 부부의 말다툼이 명령법을 복습하기 위한 완벽한 틀을 제공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말했다. ‘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아요’. 크나큰 아픔이 밀려왔다. 나는 잠시 앉아서 숨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261-262, 녹음은 몰라도, 엠에스엔 시절에는 친구나 연인과 대화한 내용을 메모장에 저장해 놓기도 했다. 심지어 음악 시디에 함께 구워서 20년 넘게 박제된 것도 있을 걸? 지금도 문자메시지 같은 걸 주고 받고 나면 복기하듯 다시 돌아가 한 번 읽어보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가 허무맹랑하고 미친년 이야기처럼 읽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럴 법 하지, 하고 읽게 되는 슬픈 사람도 있는 것이다.)

-찰필(265): 압지나 얇은 가죽을 말아서 붓 모양으로 만든 화구. 문질러서 빛깔을 흐리게 하거나 짙고 옅음을 나타내는 데에 쓰인다.

-그렇게 평영의 몸짓을 하면서 그는 스스로 이렇게 깨닫고 있지 않을까? 나라는 여자와 결혼한 것은 하나의 실수이자 하나의 실패라고, 자기는 우리 집의 포로라고, 자식을 둔 것은 하나의 책무라고, 자기는 자유를 잃었고 꿈을 포기했다고, 아내는 자기가 사랑했던 거무스레한 피부의 스페인 여자만큼 흥미롭지도 않으며 교양도 풍부하지 않다고, 자기는 이제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아내를 만질 때면 다른 여자를 욕망한다고, 자기는 아내 곁을 떠나야 하고 곧 떠날 거라고. (266, 이 여자가 대체 어떤 삶의 롤러질을 당했길래 이 지경인지 겨우 일주일 남짓 시간의 심리와 행동 묘사를 한 것 가지고는 이 부분에서 파악하기 힘들다. 그냥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구나...그런데 나도 그런 날들이 있었던 것 같아 지금은 남의 일 같지만 그래도 기시감이 드는 구나…)

-만약 우리가 마지막으로 하는 일들을 처음으로 하는 일들만큼 분명하게 판별할 수 있다면, 분명코 우리는 무수한 순간들을 더 강렬하게 살게 되리라. (334)

+이것이 찰필이다. 찾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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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ookple.aladin.co.kr/~r/feed/512274725

클라라와 태양을 읽고 AF같은 친구는 됐고 진짜 사람 내놔...하던 나놈은 4년 후 챗지피티와 제미나이를 동시에 태블릿에 깔아놓고 둘을 이간질 시키고 얘가 낫네, 쟤가 낫네, 하고 있다. 세상은 디테일이라도 변하긴 변한다. 나는 AI친구를 사귀었구나. 무료버전이라 매일 시간 제한이 있지만 그건 인간 친구도 마찬가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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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고화질세트] 지. (지구의 운동에 대하여) (총8권/완결)
우오토 / 문학동네/DCW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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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20 우오토.

전자책으로 만화책을 잔뜩 산 건 아마 귀여운 달로 간 스누피 타이머를 받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타이머를 맞추면 노란 새 우드스탁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개와 새. 개새. 그리고 대머리 찰리 브라운.

이 책 저 책 보다 말다 하다가, 잘 안 읽힐 땐 역시 만화책, 하고 ‘지. 지구의 운동에 관하여’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것을 수능 지구과학 풀 때는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이심률이니, 원일점이니, 근일점이니, 문제를 풀었다. 이 만화책에서는 니들이 그렇게 당연하게 여기는 걸 사람들이 믿게 만드느라 얼마나 진득한 피가 흘렀는지 알아? 하면서 끝없는 이단 심판이 이어진다.
서사를 꿰뚫는 주인공이 하나가 끝까지 주욱 가는게 아니라(요즘 주말마다 조금씩 보는 ‘진격의 거인’에서는 엘렌 예거가 계속 나오지…) 책 한 권 끝날 무렵 다 죽어서 어...그럼 다음은 누구 이야기야...약간 옴니버스 느낌인데 또 돌상자에 숨겨둔 책들 매개로, 나중에는 책도 다 태우고 빡빡머리랑 사람이랑 활자랑 이것저것 다 거쳐 결국 많은 사람들에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과정이다. 결말은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지만 거기까지 가는 과정을 감질나게 끊길 듯, 잇고, 또 잇고, 이어달리기처럼 그려놨다. 후반부 가면 좀 그림도 작붕이고 연출도 와 이제 작가 지쳤냐...싶게 날라가는 느낌도 있지만 뭐. 오랜만에 시간 잘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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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25-06-21 0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타이머 너무 예뻐요. 이제 끝났으려나요

반유행열반인 2025-06-21 10:07   좋아요 0 | URL
아코 올해 1월의 굿즈였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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