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용식
암울했던 일제시대에 한민족 "희망의 불빛" 으로 타올랐던 김용식.
식민통치 30년의 설움 속에서도 한민족의 자긍심을 지킬 수 있도록 한 것이 축구였다.
우리민족은 축구에 있어서는 한수 위의 실력으로 일본을 제압, 복받치는 마음을 달랬다.
이 선두에 김용식이 있었다. 일본의 교묘한 방해 속에서도 1936년 8월, 제11회 베를린올림픽에 출전. 마라톤 손기정, 남승룡, 농구 이성구, 염은현, 장이진, 복싱 이규환 등과 함께 맹위를 떨쳤다. 비록 일본대표로 출전하긴 했지만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만방에 떨치기에 충분했다.
김용식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돌아온 후 와세다대학에 유학, 해방될 때까지 일본대표로 뛰었다. 해방 후에는 실업단 최강을 자랑하던 조선전업팀을 창단, 한국축구를 이끌었다.
그는 또 1960년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 당시 한국대표팀 감독을 맡는 등 수많은 축구팀을
지도했다. 1980년 12월 국내 최초로 탄생한 프로축구팀 할레루야의 감독을 역임했다.
김용식은 프로축구가 탄생하고 2년이 지난 1985년 생을 마쳤다.
2. 홍덕영
"흑표범" 이라 불리며 그라운드서 펄펄 날았던 GK 홍덕영.
검정색 유니폼을 입고 볼을 향해서 몸을 날리는 폼이 흑표범을 연상케했다.
뛰어난 순발력과 빠른 판단력, 상대팀 공격수의 개성을 잘 파악하고 있어 기습적인 공격도 거침없이 막아내곤 했다.
173 cm / 64 kg 의 홍덕영이 마치 먹이를 향해 돌진하는 흑표범처럼 볼을 향해 몸을 날릴 때면 경기장의 관중들은 그의 모습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홍덕영은 1946년 상해원정, 런던 올림픽, 고려대 주장, 숱한 동남아 외국 원정 등에서 환상적인 플레이를 선보이며 팬들의 기억에 강하게 남았다.
조선방직을 거쳐 대표팀의 수문장으로 스위스월드컵을 거치는 동안 외국선수들의 돌진에 마지막 방위를 하느라 입은 부상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
10년간 한국대표팀 수문장으로 활약한 홍덕영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지난 2005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 최정민
"아시아 제1의 스트라이커" "황금의 다리" 로 불리며 1950년대 한국축구를 이끌었던 최정민. 그는 한국대표팀을 이끌며 1954 스위스월드컵 극동지역 예선전서 해방 이후 일본과 가진 첫 경기를 5-1로 승리, 온 국민의 응어리진 가슴을 시원하게 했다.
최정민은 1930년생으로 평양사대 재학중 인민군으로 6.25 전쟁에 참전 중 탈영, 대구방직팀에 입단했다. 178 cm / 72 kg 에 100 미터를 11초로 끊는 최정민은 1951년 제1회 전국축구선수권대회 겸 헬싱키 올림픽 파견선수 선발전 우승, 제1회 대통령하사배쟁탈 겸 동남아시아 원정선수 선발대회 우승, 동남아시아 원정대표팀 선발, 첫 월드컵 본선진출권 획득 등 무수히 많은 기록을 남겼다.
1961년 최정민의 은퇴 이후 한국축구가 침체기를 맞아 그가 차지했던 비중을 실감케했다.
은퇴 후 중앙대 감독, 한국대표팀 감독을 역임하다 53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4. 이회택
1970년대 차범근과 더불어 한국축구의 양대산맥으로 불린 "그라운드의 풍운아" 이회택.
"그라운드의 풍운아" 이회택은 차범근과 함께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이회택은 날카로운 슈팅력과 드리블, 그리고 공격수에 필요한 대담성을 가진 천부적인 골잡이로 평가 받는다. 동북고를 졸업한 1966년 대표팀에 처음 선발되어 1977년까지 10년 이상 태극마크를 달고 센터포워드로 그라운드를 누볐다.
그는 4차례나 대표팀에서 탈락과 복귀를 거듭, 풍운아로 불리기도 했다.
1973년 포항제철팀 창단멤버로 입단. 포항제철 감독을 거쳐 1990 이탈리아월드컵 대표팀 감독 등을 역임했으며 이후 전남 드래곤즈의 사령탑과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5. 차범근
"갈색폭격기" 차범근은 한국축구 역사상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로 손꼽힌다.
178cm / 70kg 에 100 미터를 11.3초로 달리는 그는 빠른 주력을 이용, 상대수비를 거침없이 따돌리며 통쾌한 슈팅을 터뜨렸다. 19세에 대표팀에 선발, 1978년까지 한국의 주전공격수로 활약했다.
그는 1979년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 프랑크푸르트와 레버쿠젠을 거치며 2차례의 UEFA 컵 우승을 비롯 총 308경기 출장 98골을 기록 당시 외국인 선수로는 최다득점자로 기록되는 영예를 차지했다. 1986 멕시코월드컵 본선출전을 위해 잠시 대표팀에 복귀하기도 했으며, 그 해 서독 아베트포스트지가 선정한 "올해의 분데스리가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989년 현역 은퇴 이후, 현대축구단 감독을 거쳐 1998 프랑스월드컵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이후 중국 갑A 선천 핑안의 감독을 지낸 후 현재 수원축구단의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1994 프로축구 감독상, 1997 AFC 올 해의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했다.
6. 최순호
"아시아의 호랑이" 최순호는 1980년대 한국축구를 대표하며 아시아를 호령했다.
최순호는 185cm 의 장신이면서도 유연한 볼터치와 섬세한 드리블링과 패스, 정확한 슈팅으로 한국축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선수로 평가받는다.
특히 상대수비수의 허를 찌르는 날카로운 패스와 넓은 시야는 역대 한국 선수 중 단연 최고로 꼽힌다. 그는 1979년 17세에 청소년대표로 선발되었고 다음 해인 1980년, 한국대표선수로 뽑혀 1991년까지 11년간 한국대표팀 부동의 스트라이커로 각광받았다.
1986 멕시코월드컵 및 1990 이탈리아월드컵에서 한국대표팀 주전공격수로 활약했고, 1990년에는 센추리클럽에 헌액되었다. 1991년 은퇴한 그는 통산 A매치 113회를 기록했다.
포항축구단 감독과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7. 김주성
1980년대 축구팬들이 한 선수로 인해 열광했다.
"깜짝 스타"의 주인공은 화려한 개인기와 드리블링을 선보이며 그라운드를 누빈 "야생마" 김주성이었다.
그는 1985년 대통령배축구대회서 "깜짝스타"로 떠올라 1987년 프로축구 신인왕, 1997년 프로축구 MVP 등을 비롯 1989 ~ 1991년 3년 연속 "아시아 최우수선수" 선정, 월드컵 3회 출전 등 숱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또 1992 ~ 1993년 차범근에 이어 두 번째 독일 분데스리거로 활약했다. 특히 공격수 - 미드필더 - 수비수 등을 두루 소화해내며 "한국판 마테우스" 라는 평을 들었다.
1986 멕시코월드컵과 1990 이탈리아월드컵 및 1994 미국월드컵에서 대표선수로 활약했고, 1998년에는 "20세기를 빛낸 아시아 최고의 선수 2위" 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1999년 프로통산 255경기 출장, 35골 17어시스트라는 기록을 남기고 은퇴했다.
현재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출처 : '20세기 한국 축구의 거목 7인' -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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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잉... 왜 홍명보랑 황선홍이 없는거야.......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