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이샤(일본 기생)
오늘날 게이샤는 그 수가 크게 줄어 교토에도 이제는 겨우 수십 명 정도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게이샤를 하겠다고 나서는 여성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게이샤가 되려면 게이샤 학교에서 미야코 오도리(벚꽃춤)와 같은 전통춤에서부터 노래, 샤미센 (3줄짜리 현악기인 일본 전통악기)치는 훈련을 최소한 5년은 배워야 하고, 다도로부터 꽃꽂이, 고대 일본 도자기, 심지어는 세계의 정치까지도 공부해야 하는 등 그 과정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쉽게 덤벼들지 못한다.
본래 게이샤의 교육은 만 6세 6개월 6일째 되는 날부터 시작해서 만 16세가 되어야 끝이 난다.
이 10년 동안, 그녀들은 은퇴한 게이샤가 운영하는 오키야(게이샤의 집)에서 숙식을 한다. 그녀들은 거기서 은퇴한 게이샤를 어머니라 부르면서 교육을 받는다.
그 동안 텔레비전을 보아서도 안 되고, 친구를 불러서도 안 되며, 남자친구와는 만날 수 없고, 선배에게는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등 엄격한 규율 속에서 지내게 된다.
게다가 게이샤의 머리 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해 높은 베개로 목을 받치고 자야 하며 나이팅게일의 분비물로 만든 분으로 목덜미를 하얗게 칠하는데 이것은 때때로 납 중독을 일으키기도 할 정도로 위험하다.
이런 험난한 10년의 과정이 끝나면 드디어 게이샤, 즉 재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게이샤가 되면 마침내 술자리에 나가게 된다. 그녀들은 고객들에게 최고의 전통음악과 춤, 맛좋은 음식과 술, 재치 있고 세련된 대화로 분위기를 즐겁고 우아하게 이끈다.
만 20세가 되면 게이샤는 자신의 연인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도나산(남주인)을 선택하는 것인데, 도나산은 대개 재벌이거나 정치가들이다. 물론 그들은 유부남이고, 게이샤에게 매월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까지의 경제적 지원을 해주고 대신 필요할 때마다 그녀들을 만나 성관계를 갖는다.
도나산과 게이샤가 연인이 되는 방식도 특이하다.
서로 마음이 맞아 결합하게 되는 의식을 ‘미주아게’라고 하는데, 그 미주아게는 7일 동안 계속된다. 게이샤와 도나산은 첫날밤, 날 달걀 세 개가 있는 침실에 드는데, 도나산은 그 달걀을 깨서 노른자는 자신이 먹고, 흰자위는 게이샤의 허벅지에 발라준다. 그리고 나서 성관계를 갖게 되는데, 이것을 무려 7일간 계속하는 것이다.
이렇게 게이샤가 되기까지 엄청나게 힘든 과정을 겪고 결과적으로는 유부남의 첩으로 일생을 끝내야 하기 때문에 결코 행복한 삶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게이샤를 존경한다. 그러나 그것은 남이 게이샤일 때의 이야기이고, 자신의 딸이 게이샤가 되려고 하면 극력 반대한다.
세상의 어떤 부모가 술자리에서 술 따르고, 춤추다가 종내에는 남의 첩살이나 하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그러니 게이샤의 수가 나날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게이샤가 한때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은 때가 있다.
1989년, 일본의 수상 우노와 게이샤와의 스캔들이 그것이다.
평생을 우노의 정부(情婦)로 살아온 게이샤가 어느 날 우노가 자신을 등한시하자 매스컴에 우노와 자신이 내연의 관계임을 폭로해버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우노는 수상직을 사임했다.
정치가와 여자와의 스캔들은 종종 있는 일이고 또 그것은 주간지에 흥미거리로 등장하다가 대개는 흐지부지되게 마련인데, 이번 사건은 달랐다.
상대가 보통 평범한 일반 여성이 아니라 게이샤였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에게 게이샤는 신비스러운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들은 게이샤의 세계에 호기심을 잔뜩 갖고 있고, 또 게이샤만이 갖고 있는 어떤 품위, 품격 같은 것에 외경심을 갖고 있는 터라 이 사건은 일본 국민의 대대적인 관심을 끌었고, 게이샤를 무참하게 버린 정치가의 비인간성에 대해 일본 국민의 여론은 분개했다.
기생
춤 ·노래 또는 풍류로 주연석(酒宴席)이나 유흥장에서 흥을 돋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관기(官妓) ·민기(民妓) ·약방기생 ·상방기생 등 예기(藝妓)의 총칭.
그 원류(源流)는 신라 24대 진흥왕 때에 여무적(女巫的) 직능의 유녀화(遊女化)에 따른 화랑의 원화(源花)에서 발생하였다고도 하고, 정약용(丁若鏞)과 이익(李瀷)은 고려시대부터 생겼다 하여 “백제 유기장(柳器匠)의 후예인 양수척(楊水尺)이 수초(水草)를 따라 유랑하매, 고려의 이의민(李義旼)이 남자는 노(奴)를 삼고, 여자는 기적(妓籍)을 만들어 기(妓)를 만드니, 이것이 기생의 시초”라 주장하고 있다.
이 밖에도 전쟁 포로 중 부녀자의 노비화, 사노비(私奴婢)의 매음녀화(賣淫女化:天官女의 경우), 신라시대의 가척(歌尺) 및 여악(女樂) 제자의 유녀화(遊女化) 등의 예를 추정할 수 있다. 고려 문종 때에는 팔관연등회(八關燃燈會)에 여악(女樂)을 베푼 것이 관기(官妓)의 시초라고도 하며, 여악은 후에 창기희(唱技戱)로 발전하여 조선시대에 들어와 많은 관기가 생겨 태조가 개경(開京)에서 서울로 천도할 때 많은 관기가 따라갔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관기 설치 목적은 주로 여악(女樂)과 의침(醫針)에 있었으며, 따라서 관기는 의녀(醫女)로서도 행세하여 약방기생, 또는 상방(尙房)에서 침선(針線:바느질)도 담당하여 상방기생이란 이름까지 생겼으나 주로 연회나 행사 때 노래 ·춤을 맡아 하였고, 거문고 ·가야금 등의 악기도 능숙하게 다루었다.
관기는 지방관아에도 딸려 지방관의 위락(慰樂)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역대의 왕이나 왕족으로 기생을 즐긴 예는 성종(成宗) ·수양대군 ·연산군 ·양녕대군(讓寧大君) ·안평대군(安平大君)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기녀들의 가무(歌舞)에 있어 지방적 특색으로는 안동기(安東妓)의 송대학지도(誦大學之道), 함흥기(咸興妓)의 송출사표(誦出師表), 관동기(關東妓)의 창관동별곡(唱關東別曲), 의주기(義州妓)의 치마무검(馳馬舞劍), 제주기(濟州妓)의 주마지기(走馬之技), 평양기(平壤妓)의 창관산융마시(唱關山戎馬詩), 북청기(北靑妓)의 치마지기(馳馬之技), 영흥기(永興妓)의 창용비어천가(唱龍飛御天敬) 등이 특히 유명하였다.
중종 때는 사회 풍기에 관해서 여러 가지 규제를 하는 가운데 의녀(醫女) ·창기(娼妓)의 연회 참여를 금지시킨 일이 있는데, 1510년 중종은 크고 작고간에 연회를 할 때 의녀나 창기를 부르는 것을 엄금하도록 사헌부(司憲府)에 명령하고 절목(節目)을 만들도록 하여 위반자는 물론, 의녀나 창기도 중벌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왕명이 얼마나 잘 지켜졌는지는 의문이다.
기생을 관장하는 기관으로는 기생청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가무(歌舞) 등 기생이 갖추어야 할 기본 기예는 물론, 행의(行儀) ·시(詩) ·서화(書畵) 등을 가르쳐 그들이 접대하는 상류 사족(士族)의 교양과 걸맞게 연마시켰다. 기생청은 후에 권번(券番)으로 개칭되어 기생청의 기능을 맡았거니와, 서울과 평양에는 기생학교가 있어 15세에서 20세까지의 처녀를 입학시켜 가음곡 외에 예의 ·서예 등을 가르쳐 예능과 교양을 겸비하도록 하였다.
기생의 배출지로 이름났던 곳으로는 서울 ·평양 ·성천(成川) ·해주(海州) ·강계(江界) ·함흥 ·진주 ·전주 ·경주 등이었다. 또한 시(詩) 등 문장으로 유명한 명기(名妓)로는 황진이(黃眞伊) ·매창(梅窓) ·소백주(小柏舟) 등이 있으며, 의기(義妓)로 유명하기는 평양의 계월향(桂月香), 진주의 논개(論介), 가산(嘉山)의 홍련(紅蓮) 등이 있다.
기생제도는 조선시대에 발전하여 자리를 굳히게 되어 기생이라 하면 일반적으로는 조선시대의 기생을 지칭하게 되며, 사회계급으로는 천민에 속하지만 시와 서에 능한 교양인으로서 대접받는 등 특이한 존재였다.
출처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