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 이 책에서 나는 욕망과 사랑을 별개의 글 두 편에서 다룬다. 표면적으로 그것들을 분리하는 것이 말이 되긴 하지만, 그 분리는 교수법적인 것일 뿐, 사랑과 욕망을 잘 분리할 수는 없다. 욕망은 무언가 또는 누군가에 대한 애착심, 그리고 그 대상의 구체성과 대상에 투사된 욕구와 약속 사이의 간극으로 생성되는 뜬구름 같은 가능성에 대한 기술記述이다. 이 간극은 더 복잡한 문제들을 낳는다. 욕망은 외부로부터의 충격으로서 우리를 찾아오지만, 우리가 자신의 정동과 조우하도록 유도해 마치 그것이 우리 내부에서 오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이는 우리가 선택한 대상들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애착 가치를 투사해 우리 세계를 떠받치는 대상으로 변환한 사물이나 장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대상들에서 객관적이고 자율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욕망이 만들어 낸 것이고, 그렇기에 신기루이며 고정되지 않고 흔들리는 닻이다. 욕망의 대상을 향해 우리가 말을 거는 스타일이 바로 우리가 자아와 다시 조우하게 되는 드라마에 형태를 부여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랑은 욕망을 상호 교환하는 포옹의 꿈이다. 즉, 사랑은 [자아를] 고립시키기보다는 확장된 자아 이미지를 제공하는데, 사랑의 규범적 양태는 ‘둘은 곧 하나’라는 커플 형태의 친밀함이다(부모와 자식 또한 사랑의 관계성 속에서 이상화되지만, 그 사랑의 지속에 상호성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래서 그것은 커플의 성취를 언제나 무색하게 한다). 커플 관계의 이상화된 이미지 안에서 욕망은 사랑으로 이어지고, 이것은 또 욕망이 지속될 수 있는 세계를 만든다.

 하지만 이 이미지에도 명암은 있다. 사랑의 관계가 사실인지 아니면 실은 다른 무엇인지, 지나가는 변덕인지 아니면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 (스스로에게 혹은 다른 이에게) 속임수를 쓰는 것인지, 과연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이것은 감정에 대한 지식을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심리학적 질문이지만, 또한 어떻게 규범이 특정한 환상들을 이용해 삶에 대한 애착을 생산해 내는지에 대한 정치적 질문이기도 하다. 사랑의 표현들이 그토록 관습적이고, 결혼, 가족 등의 제도, 재산 관계, 상투 어구와 플롯에 그토록 매여 있다는 건 사랑과 관련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러므로 이것은 주체성에 관한 질문이면서 이데올로기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101~102)


3장 [욕망] 로런 벌렌트, 윤조원 옮김. 

첫 페이지부터 빠져버림. 그나저나 <잔인한 낙관>은 왤케 어려웠는지? 나중에 다시 읽어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을 (겨우) 떠듬떠듬 읽다(잡생각이 많아서) 오랜만에 밑줄이라도 남겨보자 하고 들왔더니 이미지를 올린 글에는 밑줄을 남길 수가 없단다. (그렇다, 북플이다.) 흥.

이미지를 지우고 밑줄 올리기. 한 쪽만 올리기. 1장 읽으면서 아 이 책은 뭐라도 써야 하는 책이다 했으나. 3장 읽고 있고 그런 생각을 한 순간은 지나가 버렸고. 돌아와라.

일에 몸을 갈아넣으면서 책과 글과 먼 거리 유지 중인 난티나무 그럭저럭 잘 살고 있습니다. 생존 신고 같으다. ㅋㅋ 🤣

그러므로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민족성은 일차적으로 정치적 과정이다. 민족성이 구성하는 집단체와 ‘그 이익‘은 일반적으로 사회 속에 존재하는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 집단체의 위치를 설정한 결과일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는 ‘민족적 정치‘에 관여하는 이들이 이 집단체 내부에 있는 타자들과 갖는 관계들의 결과이기도 하다. 특정 민족적 정치 구성의 중심에는 젠더, 계급 및 그 외의 차이들이 있고, 동일한 집단체의 상이한 민족 기획들이 헤게모니를 차지하려고 맹렬히 경쟁과 투쟁에 참여한다. 이들 기획 가운데 몇몇은 예를 들면, 영국 ‘흑인‘ 공동체의 경계들에 대한 논쟁의 경우에서와 같이 (Brah, 1992; Modood, 1998; 1994)집단체의 실제 경계의 구성에 여러모로 관여한다. 민족성은 억압받는 소수집단 특유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헤게모니 민족성 성취의 척도 가운데 사회문화적 구성물들에 대한 ‘자연화‘ naturalize‘의 성공 정도가 포함된다. - P86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단발머리 2024-06-25 09: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에 몸을 갈아넣으면서 엄청 바쁘게 살고 계시는군요, 난티나무님!
생존신고라도 좋으니 자주 좀 오시어요~~ 풍광 사진도 팍팍 뿌려주시구요^^

난티나무 2024-06-26 14:14   좋아요 2 | URL
아아 느무 피곤합니다. ㅋㅋㅋ
책을 안 읽으니 서재에도..@@ 출퇴근길에만 사진 찍는 일상 ㅎㅎㅎㅎ 출근하고 있어요. 🤣

달자 2024-06-25 23: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쁘지만 자주 와서 일상이나 읽는 책 몇 구절이라도 공유해 주셔요 난티나무님~~

난티나무 2024-06-26 14:17   좋아요 3 | URL
달자님!!!! 👋 넵 출퇴근길 도로 사진이라도 ㅋㅋㅋ 노력하겠습니다! 빠리 덥죠? 더위 조심하세요~~~
 

6장 도입부

사랑을 다루지 않은 급진적 페미니즘에 관한 책은 정치적으로 실패작일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사랑이라는 것은 어쩌면 출산보다도 훨씬 더 여성 억압의 주축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놀라운 사실을 함축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사랑을 없애기를 원하는 것인가?
사랑에 대한 어떤 위협에도 느끼게 되는 공포는 사랑의 정치적 중요성에 대한 좋은 실마리가 된다. 사랑이 여성 또는 성심리에 관한 어떤 분석에서도 중심적이라는 또 다른 징후는 그것이문화 자체에서 누락되어 있고 ‘사생활‘로 격하되었다는 사실이다.(침실에서의 논리에 관해 들어본 사람 있는가?) 그렇다, 그것은 소설, 심지어 형이상학에까지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사랑은 묘사되어 있거나 더 낫게 재창조되어 있기는 하지만, 분석되어 있지는 않다. 사랑은 충분히 경험되어 왔고 그 경험이 전달되었을지는 모르지만, 결코 이해된 적은 없다.
분석의 부재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즉, 여성과 사랑은 기본토대이기 때문에 그들을 검토한다는 것은 문화의 구조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 된다.*(본문 강조)
‘남성들이 걸작품들을 창조하는 동안 여성들은 무엇을 하고있었는가?‘라는 지겨운 질문은, 여성은 문화에서 금지당했고 어머니의 역할에서 착취당했고, 또는 역으로, 여성은 자녀들을 창 - P183

조했기 때문에 작품을 그릴 필요가 없었다는 명백한 대답 이상의 가치가 있다. 사랑은 그것보다 훨씬 심층적인 방식으로 문화와 관련되어 있다. 여성이 그들의 에너지를 남성에게 쏟기 때문에 남성은 생각하고, 글을 쓰고, 창조한다. 즉, 여성은 사랑에 몰두하기 때문에 문화를 창조하지 않는 것이다.
여성은 사랑을 위해 살고 남성은 일을 위해 산다는 것은 판에 박힌 말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이분법의 근거를 개인의 정신에서 찾으려고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첫번째 사랑의 대상인어머니에 의해서 성적으로 거부된 남아는 그의 ‘리비도 libido‘-성적 (삶의) 에너지의 보고寶庫를 더 일반화된 형태의 사랑을 얻으려는 바람에서 장기간의 계획으로 승화시킨다. 그러므로 그는 사랑에 대한 욕구need for love를 인정에 대한 욕구need for recognition 로바꾼다. 여성에게는 이러한 과정이 그만큼 많이 발생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여성은 직접적인 따뜻함과 승인approval을 끊임없이 찾는다.
‘모든 남자의 배후에는 여자가 있다‘ 그리고 ‘여자는 왕좌 배후의 권력이다‘라는 진부한 말에는 진실성도 많이 있다. (남성)문화는 여성의 사랑 위에 그리고 그것의 대가로 세워졌다. 여성들은 그러한 남성의 걸작품들의 내용을 제공했다. 수천 년 동안 그들은 그 일을 해왔지만 그 수혜가 남성에게 돌아가고 남성들의 업적이 되어버리는 일방적인 감정적 관계에서 고통을 받아왔다. 그래서 만일 여성이 남성 경제의 주변부에 의지해 사는 기생적인 계급이라면, 그 반대 역시 진실이다. *(남성) 문화는 호혜성reciprocity 없이 여성의 감정적 힘을 먹고 자라는 기생적인 것이다.* (본문 강조)
더욱이 우리는 이 문화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한 전체의 - P184

절반만 제시하는 편협한 것임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문화의 구조 자체가 모든 점에서 남성 사회의 이익 안에서, 남성 사회의 이익을 위해, 남성 사회의 이익에 의해 운영될 뿐만 아니라, 성적 양극성 sexual polarity 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전체의 절반인 남성이 문화의 모든 것이라고 불리지만, 남성은 여성의 ‘감정적‘ 절반이 있음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은밀하게 그것으로 산다. 그들 안에 있는 여성을 거부하는 싸움의 결과로서(우리가 설명해온 오이디푸스콤플렉스), 그들은 사랑을 문화적 문제로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사랑이 ‘여행과 모험‘의 커다란 남성 세계에서 사내다움을 증명하려 작정하고 덤비는 모든 남성의 약점이듯이, 사랑은 (남성)문화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기도 하다. 여성은 남성이 사랑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이 필요를 부정하는지 언제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여성이 보편적으로 남성에게 느끼는 특이한 경멸("남자들은 완전 멍청해")을 설명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여성은 그들의 남성이 외부세계에서 가식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P1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장 아동기를 없애자

… 여성 존중처럼 아동 ‘존중’은 여전히 더 큰 사회의 일부였을 때인 16세기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명백하게 억압받는 집단을 형성하는 지금에는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아이들의 소외와 분리가 시작되었다. 아동중심적인 새로운 부르주아 가족은 끊임없는 감시를 수반했고, 초기의 모든 독립성은 없어졌다.
이러한 변화의 중요성은 아동 복식의 역사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진다. 복식은 사회적 신분과 번영을 표시하는 방식이었다. 특히 여성에 있어서는 지금도 그렇다. 특히 유럽에서 지금까지도복식의 부적절함에 실색하는 것은 ‘지위를 헝클어뜨리는’ 복식의 부적절함에 주로 기인한다. 의복이 비쌌고 대량생산이라고는 들어보지도 못한 시대에서 의복의 이 기능은 훨씬 더 중요했다.
의복이 성과 계급의 불평등을 여실히 드러냈기 때문에, 아동 복식의 역사는 어떤 일이 아이들에게 생겼는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 P118

소녀들의 복장은 어떤가? 여기에 놀라운 사실이 있는데, 그것
은 아동기는 여성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자아이는배내옷에서 곧장 성인 여성의 복장으로 간다. 그녀는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는 바와 같이 아동기를 구조화하는 제도인 학교에가지 않는다. 아홉 살이나 열 살 때쯤 그녀는 말 그대로 ‘작은 숙녀‘처럼 행동한다. 그녀의 행동은 성인 여성의 행동과 다르지 않다. 빠르면 열 살이나 열두 살 정도인 사춘기에 이르자마자 그녀는 훨씬 나이 많은 남성에게 시집 보내진다.
아동기의 계급적 기초는 이렇게 드러난다. 즉, 소녀들이나 노동계급의 소년들이 옷으로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었던 이유는,
그들의 성인 역할이란 상층계급 남성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유에의 통과의례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소녀들은 성장해야 할 아무 이유가 없었으므로 복장의 변화를 겪을 이유도 없었다. 성인 여성들은 남성과의 관계에서 여전히 하층계급 - P120

에 속했다. 오늘날까지도 노동계급의 아이들은 복장 제한으로부터 자유롭다. 왜냐하면 그들의 성인 모델들 역시 지배계급과의 관계에서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중·상층계급의 소년들은 일시적으로 여성과 노동계급의 지위를 공유하지만, 그들은 점차 이러한 예속된 계급으로부터 빠져나와 상승하게 된다. 반면 여성과 하층계급 소년들은 거기에 그대로 남게 된다. 페미니스트들이 억압적인 여성 복장의 종식을 논했을 때 어린 소년들의 복장의 여성화가 폐지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양자의 의복 스타일은 계급적 종속과 여성 역할의 열등성과 완전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소공자 Little Lord Fauntleroy』는 페티코트petticoat와 같은 운명에 빠졌다.(나의 아버지도 긴 바지를 입은 첫날을 기억하지만, 오늘날까지도 유럽의 어떤 나라에서는 이러한 복장의식의 풍습이 여전히 지켜지고 있다.)
우리는 또한 새로 생긴 아동기라는 개념의 계급적 기초를 그것과 함께 생긴 아동교육 제도에서도 볼 수 있다. 아동기가 추상적 개념일 뿐이라면, 근대의 학교는 그것을 현실화한 제도이다.
(우리 사회에서 생애주기에 관한 새로운 개념은 제도들을 둘러싸고 조직된다. 예를 들어 19세기에 만들어진 청소년기 adolescence는 병역에서 징병을 용이하게 하려고 만들어진 것이다.) 근대의 학교교육은 사실상 아동기라는 새로운 개념을 명료하게 했다. 학교교육은 재정의되었다. 더 이상 성직자나 학자에게 국한되지 않았고, 아동기로부터 남성기로의 과정에서 사회적 입문 social initiation의 정상적 도구가 되도록 넓게 확장되었다.(진짜 성인기를 맞아볼 일이 없는 소녀들과 노동계급 소년들은 수세기 동안 학교에 가지 않았다.) - P121

요약하자면, 아동중심적인 핵가족의 시작과 함께 아이들을 가능한 한 오래 부모의 관할 아래 두는 ‘아동기‘를 구조화하는데 있어서 제도가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고전학문과 실용적인 도제훈련을 이론교육으로 대치하면서 학교의 수가 늘어났다. 이론교육의 기능은 배움을 그 자체를 위하여 전수하기보다는 아이들을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근대 학교교육이 성장을 증대시키기보다는 지체시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이들을 성인 세계로부터 격리시키고ㅡ결국 어른들이란 속세의경험을 가진 좀 더 큰 아이들에 불과하다 - 또한 인위적으로 1대 20 이상의 어른 대 아이 비율에 예속시키면서, 어떻게 마지막 결과가 아이들을 평범한 지능으로 평준화시키는 것 이외의 것이기를 바라겠는가?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자 18세기 이후에는 나이의 엄격한 분리의 구분이 생겨났다("학년"). 아이들은 더 나이가 많고 더 현명한 아이들로부터 더 이상 배울 수 없게 되었다. 아이들이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은 연령별로 잘 끌어모은 동료집단, 그리고 그다음에는 떠 먹여주는 ‘교과과정‘에 제한되었다. 그러한 엄격한 등급화는 성인기로 입문하는 데 필요한 수준을 높였고, 아이가 자신만의 속도로 직접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학습동기는 창의성을 확실하게 죽이는 외부 지향적outerdirected이고 승인 의식적approvalconscious인 것이 되었다. 한때는 - P126

단순히 어린 성인들로 보였던 아이들은 우리가 반쯤 자란 강아지를 미래의 다 큰 개와의 관계에서 보듯이 이제 경쟁을 조장하는 그 자신의 내적 지위를 가진 뚜렷한 계급이 되었다. ’이 구역에서 가장 큰 녀석’, ‘학교에서 가장 똑똑한 녀석’ 등등, 아이들은 위계질서적 용어로 생각하도록 강요되었다. 모든 것은 지고한 말인 ‘내가 자라면.…..’으로 평가되었다. 학교의 성장은 나이와 계급에 따라 점점 더 분리되어가는 바깥세상을 반영했다. - P1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질문을 한다는 것은 곧 정서적으로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 (342)

“당신 자신이 당신이 드러내는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353)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형태의 행복과 약속의 형태를 띠는 행복은 우리가 그것을 현재 이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 있다고 상상하는 한 같은 지평에 속한다. 그리고 현재 행복이 존재한다 해도, 그것은 불안한 것,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상실할 수 있는 것이 되면서 멀어질 수 있다. 현재 행복이 존재한다 해도 우리는 방어적이 되어 행복에 위협이 되는 것(혹은 사람으로부터 두려운 마음에) 멀어질 수 있다. - P294

여기서 허위의식은 부르주아가 자신의 동기를 모른다는 것, 자신의 믿음과 자신의 이해관계가 우연히 일치함을 알지 못하는 상황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의식적인 믿음들은 이데올로기다. 사람들은 의식으로부터 그런 믿음의 이해관계적 성격을 탈각함으로써 이해관계를 유지한다. 우리는 "허위의식" 관념이 이제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허위/진실의 이분법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생각은 너무 지배적이어서 "허위의식"이라는 - P301

말 자체가 구시대적인 말처럼 들릴 정도다. 하지만 내가 2장에서 지적했듯이, 의식을 개인 주체에 속한 것으로 볼 필요가 없다면, 이 개념을 다시 살려 낼 근거가 있다. 의식이란 주체들의 도착보다 선행하는 기만들이 공유를 통해 사회적인 것을 배열하는 방식에 대한 것일 수 있다. 루카치가 잘 기술하고 있듯이 "부르주아 사회의 본성에 드리운 베일은 부르주아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Lukács 1971: 66[154]). 그 베일은 질서의 재생산을 은폐함으로써 사회질서를 재생산한다.
핵심은 진실과 허위의 구분이라기보다는 진실의 재생산에서 허위가 담당하는 역할이다. 다른 말로, 의식이 허위인 이유는 그것이 스스로와 결코 일치하지 않기 때문인데, 이런 상태가 이해할 수 있는 것 혹은 참인 것의 지평을 규정하면서 특정 질서의 재생산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재생산은 이런 불일치에 대한 인식의 실패에 기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질서를 의식하게 된다는 것은 진짜 의식, 즉 진실에 대한 의식을 획득한다는 의미에서 자신과의 일치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혁명가란 단순히 일치의 실패를 목격한 사람이라 할 수도 있다. 베일이 벗겨진다고 진실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베일이 벗겨진다 해도 모든 게 다 드러나는 것은 아니고 그 폭로에는 결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의식의 불일치를 인정하는 것은 그것의 허위성을 의식하게 되었음을, 그리고 사회적 믿음이 가지는 이해관계적 본성을 의식하게 되었음을 말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 P302

소외를 의식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인식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의 원인을 인식해야 한다. 소외를 의식하게 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어떻게 강탈되었는지 의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세상에서 소외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소외가 어떻게 이미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지를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 P304

혁명 의식이 세상과 맞지 않는다는 느낌 혹은 세상이 이질적이라는 느낌 같은 것을 의미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당신은 주어진 세계- 좋은 습관과 예절로 이루어진 세계, 복종과 선의를 다하면 안락함을 약속하는세계-로부터 멀어진다. 느낌의 구조로서 소외는 불타오르듯 강렬하게 현존한다. 그것은 당신을 소외시키는 타인들 앞에서 일어나는 느낌으로, 마치 당신을 억누르는 동시에 멀어지게 하는 힘처럼 느껴질 수 있다. 당신은 자세를 바꾸고, 머리를 숙이고, 땀을 흘리고, 초초하고 불안하다. 모든 것이 당신을 짓누른다. 세상 전체와 싸우는 것 같고, 세상도 당신에게서 등을 돌린 것처럼 느껴진다. 더 이상 잘 적응된 상태가 아니다. 세상에 적응할 수가 없다. 혁명가는 이런 특정한 의미에서 정서 이방인이다. 당신은 몰입할 수가 없다. 당신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당신이 세상에 저항할 때는 당신이 경험하는 세상도 저항의 형태로 다가오는 것이다. - P306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법의 하나로 불행[불만]을 선택할 수도 있다. 즉, 하나의 믿음으로서의 불행은 어느 정도 무관심하게 대상들 사이를 떠돌면서 현재를 붙들고 있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모든 게 다 불만이라는 것은, 어떤 한가지를 기대하고 있어서 그것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불행하다는 것이다). - P307

아이들의 부재는 그에게 내 희망을 유예할 수 있는, 그를 위해 현재의 내 고통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그 누군가의 부재를 나타내는 기표다. 다른 말로, 아이들은 이 판타지의 무게를 지고 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없는 삶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도전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사실 "자기 자식 없는 삶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은, 아이 없이는 삶이 무의미하다는 말을 듣는 것도, 아이가 꼭 있어야 삶이 의미 있는 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도 지친다. 우리가 아이 없는 삶은 무의미한 삶이라는 이 관념을 어떻게 해석하든, 여기서 표현된 불안은 관념으로서의 미래가 상실되었다는 불안, 그리고 그 상실에 대해 걱정함으로써 미래가 있다는 관념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는 불안이다. - P332

이는, 4장에서 설명했듯이, 돌봄에 특정 형식을 부여하고 돌봄을받는 사람이 어떤 식으로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는 행복 돌봄이라기보다 우연 돌봄hap care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하는 것이다. 우연 돌봄은 돌봄에서 불안을 제거하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우연에 대한 돌봄care for the hap 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누군가를 돌보는 것보다 더 취약한 것은 없다. 그것은 내가 아닌 존재에 내 에너지를 쏟는 일일 뿐만 아니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다뤄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돌봄이란 불안한 일이다 - 관심 가득하다 full of care, 조심스럽다careful는 것은 그들의 미래가 걱정스러워서(미래 - P335

가 그 존속이 중요한 대상의 허약함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것들에 신경 쓰는 것이다. 관심을 갖게 된다는 것이 착해지거나 다정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돌봄"을 자신의 자아 이상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들의 선한 이미지를 보호하기 위해 아주 무뚝뚝하게 행동한다. 돌본다는 것은 대상을 내버려 두는 게 아니라 자신의 것이 아닌 것에 빠져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대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 P336

만약 불행할 자유가 없다면, 행복할 자유는 인간의 자유를 제한한다.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는 필연성이 자유라는 가면을 쓰고 있을 때 불행은 자유가 될 수 있다. - P350

우리는 불행이 집단적인 것, 공유되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해야할 뿐만 아니라 행복에 도전하는 일이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기획이어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다수의 불행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위해 투쟁할 때에도, 열망의 순간에도, 계승과 재생산 사이의 간극에서 춤을 출 때도 페미니스트 아카이브, 퀴어 아카이브, 반인종주의 아카이브가 집단적인 불행의 직조물들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만약 행복할 권리에 도전하는 것이 곧장 뻗어 있는 똑바른 경로에서 이탈하는 것이라면, 정치 운동이란 그런 이탈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을 말한다. 이탈을 함께 나눌 때 즐거움과 경이, 그리고 희망과 사랑이 있다. 만약 이탈을 공유하는 것이 불행의 원인을 공유하는 것이라면, 즐거움과 경이, 희망과 사랑조차 불행 없이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라불행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이 된다. - P35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 8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