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묻힌 여성 - 여성의 눈으로 본 선사시대, 젠더 고고학의 발견
마릴렌 파투-마티스 지음, 공수진 옮김 / 프시케의숲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 1 : 그런데 말이야, 옛날에 어떻게 살았는지, 그림을 남자가 그렸는지 여자가 그렸는지, 이런 게 중요한가? 어차피 자료도 없고 증거도 없이 추정만 하는 건데.

나 2 : 그치, 거의가 추정이고 가설이지. 하지만 저자도 이야기했듯이 인간은 기원을 알고 싶어 하는 습성이 있잖아. 무엇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그 모양은 어땠는지, 이런 거. 모두가 의미 없으니 하지 말자고 해도 분명히 하는 사람이 있을 거야.

나 1 : 어휴, 그게 다 무슨 소용인지. 의미 없다, 의미 없어. 그냥 전부 다 안 하면 안 되나?

나 2 : 어차피 누군가가 했고 지금도 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어? 지금까진 남성의 시각으로 봐 왔으니 잘못된 건 바로잡아야지. 억측도 그렇고.

나 1 : 그건 그래. 그래도 열불 나는 걸 어떡해. 몇천 년 남성의 역사는 너무 견고하다고. 책 속 말투도 조금 그렇지 않아? 이렇고 저렇고 아무것도 단정 지을 수 없는데 선사학에서조차 남성들이 의견을 굽히려 들지 않는 경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여성 운동이 역사는 짧지만 그래도 많은 것을 바꾸려고 노력했는데 앞으로도 엄청난 시간이 걸릴 거고. 왠지 저자도 완전 열받았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런데도 말투는 아주 조심스러운 것 같았어. 난 그것도 맘에 안 들어. 좀 뭐랄까, 자기 검열??

나 2 : 뭐 그런 면이 없지 않은 듯하지만... 그래도 읽으면서 잘 몰랐던 걸 알게 되기도 했잖아. 아니 잘 몰랐다기보다는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 '잠자는 숲속의 공주'나 사라 바트만 이야기 말이야. 난 최근에 본 드라마도 생각났어. 예나 지금이나 미디어가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이데올로기는 아직도 여전하구나 싶었지. 조선 시대 상황의 단순 재현인지 재현을 통한 이데올로기 주입인지 잠깐 헷갈리더라고. 당연히 후자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여전히 굳건한 이성애 이데올로기의 판타지적 재현. 아 이건 별 관계없는 이야긴가?

나 1 : 관계없는 건 아니지. 어차피 선사학도 보니 이게 남자다 저게 여자다 이런 걸로 싸우드만. 젠더가 둘 밖에 없어요. 그리고 말이야, 여성을 섹스의 대상으로만 보는 건 정말 이젠 몸서리치게 싫다고. 그걸 또 아니라고 하는 남자들 보는 것도! 어휴.

나 2 : 재미는 덜 했지만 난 그래도 이런 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너는 막 슬렁슬렁 건너뛰면서 읽었지?

나 1 : 당근이지. 모르는 사람들 이름 보기도 벅차. 대충 건성건성 읽었으니 끝냈지 안 그러면 아직 2장 읽고 있을걸?

나 2 : 그런데 프랑스에도 알려지지 않은 여성학자들이 많더라.

나 1 : 뭐 거기뿐이겠냐. 세상에 널렸지, 널렸어.

나 2 : 그러니 저자 말대로 알려지지 않은 걸 알려야 하지 않을까? 남성의 언어 말고 여성의 언어로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이 책도 그 나름의 가치를 갖는 거겠지. 덜 알려진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었으니까.

나 1 : 그건 인정! 아, 선사학 이야기 진짜 재밌게 쓴 책 읽고 싶다아~~~ 



..............................

" 그러나 교환 이론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고고학적 증거는 전혀 없다. 증명이 필요하긴 하지만, 이러한 관습이 만약 구석기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면, 이는 남성이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한 것일까 아니면 상호 협의한 것이었을까? 솔직히 말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아직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귀중품'이 교환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선사 사회에서 교환품인 여성의 가치가 높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특히 출산으로 후손을 얻게 해주기 때문에, 즉 집단의 영속을 보존해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국의 박물학자 찰스 다윈(1809~1882)이 1871년부터 주장했던 것처럼, 구석기시대 여성들이 자신의 배우자를 선택했을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이처럼 가설만 무성하게 확산하는 상황에 대처하려면, 과학의 한 분야인 선사학이 채택한 학문적 방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다시 발해서, 지난 수백 년간 이러한 방법론이 만들어지도록 영향을 준 문화유산의 요소를 구별해내야 할 것이다. " (35)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3-11-30 0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난티나무 2023-12-05 00:2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댓글 이제 다는 저...ㅜㅜ

청아 2023-11-30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1,나2에 이름 붙여주심 안되나요?ㅋㅋㅋㅋ 난티나무님
완독 수고하셨어요!

난티나무 2023-12-05 00:24   좋아요 1 | URL
투덜이와 긍정이???? 미미님 붙여줘 보세요~ㅎㅎㅎ
답글 늦어 죄송해요.^^;; 감사합니다~

청아 2023-12-05 07:46   좋아요 0 | URL
저는 아델과 엠마같은 이름 생각했어요ㅋㅋㅋㅋㅋ
 
법정에 선 페미니스트 - 페미니스트 법 이론
낸시 레빗.로버트 베르칙 지음, 유경민 외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호텔이다. 프런트에는 직원 두 명이 있다. 백인 남자와 흑인 여자. 여자는 컴퓨터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고 남자는 앞의 손님과 이야기가 끝나자 바로 여자 옆으로 가 함께 컴퓨터를 들여다본다. 나와 남편은 체크인을 하려고 서있다. 우리가 차례를 기다린 걸 그들은 이미 보았다. 몇 분 뒤 여자가 고개를 들고 묻는다. 도움 필요하세요? ... 좀 황당하다. 남자는 옆자리로 갔다. 안녕하세요,가 먼저 아닌가. 여자의 얼굴은 대략 표정이 없지만 딱 봐도 너희에게 친절하기 싫어, 이런 분위기다. 체크인하려고 합니다만. 아 그럼 옆 직원에게 가세요. 가볍게 토스. 백인 남자는 프랑스어를 쓰는 우리에게 영어로 말한다. 외국인 취급. 그렇지, 우린 외국인이지. 그러나, '다양성'을 인정하는 나라 프랑스에서 외모만으로 국적을 판단하는 일이 이렇게 잦다고?


미묘하다. 흑인에게서 인종차별의 뉘앙스를 느끼는 아시아인. 아마 이렇게 글로 쓰고 혹여 말로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느낀 그 미묘함을 정확히 전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도움이 필요하냐는 말은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흔히 하지만, 말이란 맥락과 뉘앙스를 가지는 것이 아니던가. 눈빛과 몸짓, 표정, 어투 등이 말을 돕는다. 가끔 겪는 일이라 놀랍지는 않고, 기분은 좀 나쁘다. 


다음날 아침을 먹으러 방을 나섰다. 객실 청소를 하러 온 직원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러니까 매뉴얼 인사가 아닌, 기분 좋은 인사. 나도 덩달아 웃는다. 그는 나이 지긋한 흑인 여자다. 생각이 많아졌다. 


얼핏, 이 책의 내용과 위의 에피소드는 별 관련이 없어보인다. 어느 경우에도 정확히 들어맞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무언가 걸리적거리는 부분이 있다고 느낀다. 그건 교차성이라는 단어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동질성과 차이라는 단어들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복잡하게 얽힌 그물망 어딘가에 위치한 인종과 젠더라는 단어들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언급한 모든 단어들에 언급하지 않은 모든 것이 더해진 무엇인가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일상은 책의 내용과 한치의 오차 없이 일치하기도 하지만 어떤 일상은 가려지고 포장되어 배경과 맥락이 드러나지 않기도 한다. 아래와 같은 구절을 읽을 때면 이런 경험이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해석은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우리는 우주의 한 톨 먼지보다 작은 존재이면서 그 안에 각자 하나의 세계를 품고 있는, 실로 형언할 수 없이 신묘한 존재들이 아니던가. (이렇게 말하면 인간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서구 페미니스트들이 다른 목소리와 접근에 더 기민하게 반응해야 하는 것인가? 그들은 인류 공통의 권리에 관한 개념을 거부하고 다원주의와 서로 다른 문화적 시각에 대한 포용을 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전 세계적 차원에서 재생산 자유의 결핍과, 전 세계 대다수의 여성이 이를 수용한다는 것은 그릇된 자각에서 비롯된 문제인 것인가? 수년 전 정치철학가 주디스 슈클라는 부정의의 얼굴은 낮은 곳에서 가장 잘 볼 수 있다는 유명한 주장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모던 페미니즘에 큰 영향을 미친 수잔 몰러 오킨은, "우리는 고통받는 듯한 사람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질문을 함으로써 정의에 대해 깨닫게 되지는 않는다"라고 언급하며 한계를 지었다. 그녀는 "억압받는 사람들은 종종 억압을 매우 잘 내재화하여 그들이 인간으로서 정당하게 얻어야 할 자격들을 알지 못하게 된다"고 언급했다. 두 학자 모두가 옳을 수는 없는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을 피할 길은 없는가?⌋ (205, 5장 젠더와 몸)



그러니까, 나는 머리가 아프다. 책 속 미국까지 갈 것도 없다. 어쩌면 세상이 지금 우리에게 바라는 게 너무 많은 건지도 모른다... 머리가 안 아픈 날이, 오기는 할까? 아,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책 뒷표지에 실린 문장이 정확히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이 책은... 또한 특정한 페미니스트 이론에 치우치지 않고 각 이론에 따른 결론과 비판점 등을 상세히 설명하여 입문서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이러한 풍부하고 다각적인 접근은 페미니스트 법 이론이 현학적인 문답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일어나는 문제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어쩌다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늘, 언제나 일어나는 일. 그 일에 대해 가만히 생각하는 것. 내가 옳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 (그런데 그 미묘하고 미묘한 것들을 어떻게 보이게 만들죠?)


제목을 '질문하는 책'이라고 달았다. 저자는 책 가득 질문을 쏟아낸다. 본문에서 질문하는 것도 모자라 각 장이 끝날 때마다 생각해 보라며 몇 개의 질문을 던진다. 1장 끝에서 질문들을 읽었을 때 절망했다. 어느 하나에도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당연하지, 그렇게 쉽게 한 사람이 대답할 수 있는 문제라면 질문을 던지지도 않았겠지. 2장, 3장, 그리고 책이 끝날 때까지 저자가 던진 질문들은 그렇게 거기 있었다. 한편으론 그 질문들에 골머리를 앓아야 하는 학자가 아닌 것에 안도했고, 한편으론 어쩌면 하나도 제대로 대답할 수 없는지에 난감했다. 답하기 어려운 이 질문들이 여성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내 문제라는 새삼스러운 생각도 함께.



⌈... 논쟁의 이 부분(대리모 계약)을 요약하면서, 법학 교수 마거릿 제인 라딘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의 지위를 낮춰서 시장에 진입하는 것은 자유로워지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여성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팔아왔고 이로 인해 그 지위가 격하되어왔다. 더 이상 그렇게는 하지 말아야 한다."⌋ (217, 5장 젠더와 몸)


위 구절을 읽으면서는 조금 속이 시원했다. 자유로워진다는 건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동시에 '더 이상 그렇게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 역시 단순하게 말하고 그칠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학교는 개인적인 성취의 관문 그 이상이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개발도상국 소녀들의 교육은 "가정 내에서 그리고 세대를 걸친 파급 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한다. 소녀들의 교육에 투자하는 것은 노동인구를 거의 두 배로 늘릴 뿐만 아니라, 빈곤을 줄이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다.

.....

 가장 좋은 점은 여학생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이 선순환을 영속시킨다는 것이다. 교육을 받은 소녀들은 자라서 그들 자신의 아이들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친다. 그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그들이 대학에 가도록 격려하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부업을 한다. 물론 교육받은 남성들도 이러한 방식으로 기여하지만, 여성들은 단연코 더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한 소녀를 교육시키는 것은 곧 한 가족을 교육시키는 것이다.⌋ (304~305, 8장 페미니스트 법 이론과 세계화)


동의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뭔가 찜찜하다. 왤까. 먼저 노동인구가 늘어난다는 점. 맞는 말이면서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밖에. 빈곤에서 벗어나고 경제적 힘을 가지고, 다 좋다. 누가 가장 이득을 볼까? 두번째로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부업'을 하는 여성들. 부업. 이렇게 되지 않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한 소녀를 교육시키는 것은 곧 한 가족을 교육시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100퍼 공감한다. 그러나. 그 소녀가 장차 결혼하여 한 가정을 이루리라고 단언할 수 없다. 물론 결혼과 출산 안 해도 교육할 수 있지. 하지만 저자는 "소녀들은 자라서 그들 자신의 아이들에게"라고 적었다. 이것도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남성은? 그냥 둬? 가장 먼저 깨우치고 변화해야 할 사람들은 '남성적' 사람들 아닌가? 왠지 계속 여성에게만 짐을 지우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쳇바퀴가 계속 돈다. (그런데 여성의 영향력이 강력한 건 정말 맞는 말이다.)



⌈세계화 자체는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일자리, 상품, 의약품, 그리고 기술의 이전을 촉진함으로써 어느 정도 이익을 제공한다. 정보 및 서비스 경제는 수백만 명의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가져다주었다. - 당신이 전화로 상담하는 고객 서비스 담당자는 이제 토피카(Topeka)만큼이나 뭄바이에 위치할 가능성이 높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사스키아 사센은 직업 시장과 사업 기회의 "점진적인 여성화"는 세계화 덕분이라고 한다. 특히 이민자 여성들에게 도움을 준 이러한 경향은 더 많은 재산, 더 큰 사회적 자율성, 그리고 가족 의사 결정에 있어 더 강한 영향력으로 이어진다. - 어머니들이 더 많이 벌면, 아버지들은 더 많이 듣는다.⌋ (308, 8장 페미니스트 법 이론과 세계화)


비슷한 맥락에서 위의 인용문 끝문장도 찜찜하다. 경제력 중요하고 권력이기도 하지만, 그렇지만 여성이 돈을 벌든 안 벌든, 잘 '들어야'지??? 사람이 말을 하면 잘 들어야지, 옆집 개가 짖는구나 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후. 나도 안다. 이게 뱅뱅 도는 꼬리잡기에 불과한 잡설이라는 거. 그러나 '평범한' 남성이 얼마나 여성의 말을 '안 듣고' 사는지, 무의식 속에 자리한 일상적인 무시가 얼마나 잦은지. 이거 정말 심각하다. 더 많이 벌면 더 많이 듣는다는 말은 현상일 뿐,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주장의 근거가 되어서도 안 된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3-06-30 08: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휴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난티나무 님.
오늘 리뷰를 읽다보니 난티나무 님도 책을 몸으로 읽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의문점에 몸을 부딪치고 그런 한편 또 자기 검열을 해보기도 하고. 그런 난티나무 님에게 독서는 즐겁지만 또 괴롭기도 하진 않을지 추측해봅니다.

이곳은 어제부터 비가 내리고 있어요. 우린 7월에 또 함께 읽어봅시다!

난티나무 2023-06-30 16:39   좋아요 2 | URL
독서는 고통 아니겠습니까. 앎의 고통이라고 정희진샘도 그러셨…….
그러고 보면 고통도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아요? 사람마다도 조금씩 다르겠죠.

한국 날씨는 자주 여기랑 비슷합니다. 신기해요. 여기도 비 와요. 모처럼 시원한 바람이 부네요. 오, 7월 성의 변증법!!!!! 기대하고 있습니다. ㅎㅎㅎ

단발머리 2023-06-30 08: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젠더와 인종이 겹쳐진 그 어느 지점에 우리가(난티나무님이) 느끼는 그 불편함이.... 저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 느낌은 정확하다. 그 느낌이 맞다.

완독 축하드려요, 난티나무님. 같이 읽는 기쁨을, 이 글을 읽는 제가 마음껏 누립니다!

난티나무 2023-06-30 16:49   좋아요 2 | URL
그렇지 않을 수 있는데 그렇다면, 저 또한 어딘가에서 다른 사람에게 그런 불편함을 줄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버려요.
확신을 갖는다는 것도 중요하죠. 저도 단발머리님처럼 생각합니다.^^ 요즘의 제 ‘마인드컨트롤’! ㅎㅎ 그것만으로는 아직 힘들긴 하지만요.
단발머리님 댓글을 난티나무가 좋아합니다!^^

건수하 2023-06-30 10: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난티나무님 완독 축하드립니다!

나는 어떤 입장에 서 있는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그러나 명료해지진 않는) 책입니다.. (그래서 읽는데 오래 걸리고 있다고 핑계를)

난티나무 2023-06-30 16:51   좋아요 0 | URL
오 맞아요 수하님! 생각 많은데 명료해지지는 않는! 오히려 더 복잡해지는 ㅎㅎㅎ 저도 그랬어요.^^

청아 2023-06-30 11: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의 챕터 끝마다 붙은 질문들이 본문 이상으로 깊이 있어서 놀랐어요. 난티나무님의 비판적 읽기와 고민을 들여다보며 대학에서 우리가 함께 만나 이런 공부를 하고 이야기를 나눴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주로 제가 배우는게 더 많았을거지만ㅋ)
잠시 상상하고 웃었습니다.
완독 수고하셨습니다!

난티나무 2023-06-30 16:54   좋아요 3 | URL
왓!! 저도 상상했습니다!!!! ㅎㅎㅎ
뭐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생각은 듭니다? 다만 판을 펼칠 학교가 있어야 겠고 한 지역에 살아야 겠고 (아 줌이 있네요!!! 그래도 대면이죠!!) 시간 맞아야 겠고… 돈도 좀 있어야? ㅋㅋㅋㅋㅋ 아 생각만 해도 신나네요. 🥰

책읽는나무 2023-06-30 1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난티 님이 느끼시는 그 차별적 시선들.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면 늘 화가 났다가 또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암튼 늘 응원합니다.^^

난티나무 2023-06-30 16:55   좋아요 2 | URL
그쵸 책읽는나무님. 사람이 뭔지 사는 게 뭔지, 저도 화 났다가 서글펐다가 그래요…ㅎㅎㅎ 감사합니다!!!!

달자 2023-08-07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부분에 난티나무님의 짧은 호텔에서의 경험담... 아 정말 너무너무 뭔지 알아서... 이거 프랑스 호텔에서 안 겪어본 아시아인은 없다는 데에 1유로를 걸겠습니다.... 이 책은 이북으로 안나와 있어서 올 여름에 한국에 잠시 갔다 오는데 그때 종이책으로 꼭 사려고 벼르고 있답니다.

난티나무 2023-08-08 00:50   좋아요 1 | URL
한국 가시는군요! 책 많이 사오시기를~^^
저는 빠리 대사관 갈 일이 있는데 차일피일 미루고 있습니다. 주말 지나면 날이 또 더워진다고 하네요.@@
안 겪어본 아시아인 없다...ㅠㅠ 맞습니다. 흑흑
 
러스트벨트의 밤과 낮 - 여성 철강 노동자가 경험한 두 개의 미국
엘리스 콜레트 골드바흐 지음, 오현아 옮김 / 마음산책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체로 슥슥 읽히는 이 책이 마냥 잘 읽힌다고만은 할 수 없다. 노동의 세계가 어떤지, 지금 이 거대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위치와 역할이 어떠한지, 애초에 이 사회에서 노동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다면, 내가 하고 있는 노동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고민해본 적이 있다면, 아니 그렇지 않다고 해도, 아 제철소의 노동이란 이렇구나, 하고 넘겨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노동,이라는 두 글자에 얽히고설킨 문제들, 자본과 불평등과 젠더와 정체성과 폭력, 어느 것 하나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는 문제들이 이리저리 흩어져있다가 모이기도 하다가 겹치고 떨어지고를 반복하며 일상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고, 책의 이야기에 내 그런 일상이 겹쳐져 보이기 때문이다. 


읽는 사람은 그냥 읽지 않는다. 나는 나를 생각하고 대입도 해보고 감정이입도 하고 문제를 끌어다 내 경우에 맞춰보기도 하고 전혀 다른 맥락에서 다른 생각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그냥 에세이야, 하고 말 책일 수도 있는 걸, 나는 내 '임금노동' 혹은 '돈이 되는' 노동에 대해 생각하느라 책을 읽은 직후에 리뷰를 쓸 수가 없었다. 아 물론 오래 묵혔다고 해서 그 생각들이 쨘 하고 글자들로 정리되는 건 또 별개의 문제다. 그저, 그랬다는 말이다. 동시에 그 '돈이 되는' 노동에 대해 고심하느라 글로 정리할 (마음의) 여유 또한 없었다는 말도 된다. 


'경제적 독립'이 중요하다고,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게는 더욱더 그러하다고, 많은 사람들이(책에서도) 말한다. 맞는 말이다. 독립이라는 글자가 의미하는 것만큼 독야청청 독립하는 일이 인간 생에서 가능하기나 할까 하는 물음은 차치하고. 문제는 사회의 '이렇게 생겨먹음'이다.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어떤 모양의 어떤 식의 독립이 진정한 경제적 독립인가. 쳇바퀴에 올라서서 열심히 페달을 꼬박꼬박 밟거나 쳇바퀴에서 내려와 다른 모양의 페달을 열심히 꼬박꼬박 밟거나, 그게 선택이라고 한다면 뭐 그렇다고 치자. 올라서거나 내려서거나,가 여성(나)에게 열려있는가? 오랜 경력단절이 경력인 여성(나)에게 어떤 '임금노동'이 주어지는가? 주어진다,는 표현이 거슬린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쟁취,해야 하는 것인가. 역시 '노오력'밖에 없는 것인가. 


어쩌면 나는 환상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그렇게 말을 했다. 돈이 없으면 밖에 나가 뭐라도 해야지. '몸을 쓰는' 노동이라도 해야지. 실제로는 그 '몸을 쓰는' 노동이 세상을 돌아가게 한다는 걸, 가장 가치를 인정받아야 하는 일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세상 가치 없다고 후려쳐지는 '비임금노동', 주로 여성이 집에서 하는 모든 일들도 그렇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들을 가장 덜 중요한 자리에 놓고 살아간다. (자리조차 없을 때가 많다.) 세상이 '이렇게 생겨먹음'에는 내 이런 태도와 생각도 한몫 하고 있다. 몸을 쓰는 임금노동은 하고 싶지 않은 일, 꺼려하는 일, 저평가되고 스스로 저평가하는 일, 할 일이 없을(?) 때 하게 되는 일, 모두가 기피하는 일... 이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바로 다시 '이렇게 생겨먹음'을 재생산한다. 그러니 몸을 쓰는 노동(이라는 말도 웃기지만. 몸을 쓰지 않고 하는 노동이 어디 있단 말이야.)은 하찮지 않다, 위대하다, 가치있다, 고 외치면서 자기 최면을 거는 내가 환상 속에 살고 있는 거지. 최면을 걸어야 할 정도로 익숙한 세상의 관습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거지. 


이 책의 저자는 병력을 갖고 있다. 제철소 이야기만 주구장창 나오는 게 아니라 (사람은 한가지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므로) 저자의 양극성 장애 이야기도 생활을 따라 이어진다. 곁의 사람 이야기도. 뭐랄까, 함께 읽고 있던 책의 제목이 자연스레 떠오른달까. <일할 자격>. 의사의 진단을 받지 않아도 여러 가지 장애나 병의 증상들을 가진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진단을 받은 사람은 '일할 자격'이 없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일할 자격'을 박탈당하지는 않는다. 무슨 차이일까. 여성이라 제철소에서 일하기 힘들 거야, 하고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겠지. 차별. 쟨 좀 이상한 애야, 와 쟨 양극성 장애 환자래, 사이의 간극. 사회적 시선과 혐오와 구분. 부분의 일반화. 그리고, 내가 온전히 내 모습으로만 임할 수 없는 환경, 가면을 쓰거나 그 집단에 걸맞는 언행을 보여주어야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형태, 같은 것이 좀 역겨웠다. 그래야 버틸 수 있고 계속 일할 수 있는 거야, 세상은 '이렇게 생겨먹'었으니까. (아무래도 난 거기가 어디든 취직은 못하겠군.) "일할 자격"은 사회가 부여한다. 이걸 바꾸어야 하기는 하겠으나, 바꾸어서 쳇바퀴에 올라가는 일이 바람직하다고는 말 못하겠다. 적어도 지금 이 사회의 구조 속에서는. 더군다나 그 쳇바퀴라는 것도 해체되고 있는 와중에 '노동'은 점점 더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겨진다. 계약직, 임시직을 넘어 초미세(마이크로)노동이 등장한 지 오래다. 첨단기술의 그림자에 가려진 사람의 노동. 이 세상은 어떻게 흘러가게 될까... 


어쩔 수 없이 쓴웃음을 한번 짓게 되는 또하나의 사실이 있다. 책날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저자 엘리스 콜레트 골드바흐는 백인 여성이다. 과정이 힘들긴 했지만 석사 학위도 땄고 제철소 경험은 3년 남짓이라고 한다. 개인이 얼마나 힘들었는가와 상관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좀 후려치기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가 흑인 여성이었다면? 아시아 여성이었다면? 이라고 묻지 않을 수가 없네. 그럼과 동시에, 그래서 너는 이 책을 흑인 여성이 썼다면, 아시아 여성이 썼다면, 20년 노동한 사람이 썼다면, 그러면 만족할 텐가, 싶기도 하다. 독자의 오만이다. 




+++++++++++++++++++++++


⎾ 다이너모를 보면 클리블랜드가 생각난다고 샘과 찰리에게 말했을 때 그의 이야기에서 복수심과 관련된 부분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마음속 깊이 다이너모가 그 이상이란 걸 알았다. 그는 끔찍한 실패로 자신이 무너져 내리는 걸 지켜볼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계속 만들었다. 또 계속 베풀었다. 또 계속 모형 차를 만들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더 중요하게 그는 공갈꾼 몇이 열정을 앗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그를 클리블랜드로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러스트벨트에서의 삶과 노동이 의미하는 바였고 트럼프가 우리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바였다. 트럼프는 우리의 회복력을 보는 대신 우리를 찌부러뜨려 최악의 면을 도드라지게 했다. 그는 산업노동자를 몰락한 자로 여겼고 몰락이 우리의 유일한 정체성이라고 우리 스스로 믿게 했다. 그는 우리의 불안을 감출 수 있는 희생양과 분노의 대상을 제공했고, 그로써 그가 더 큰 권력을 탐하는 또 한명의 부유한 권력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못 보게 했다. 그는 우리에게 복수심을 불어넣었고 우리의 분노를 부추겼다. 그는 우리 마음속의 선을 훼손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지키기 위해 싸우는 그 모든 것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그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 P190



⎾ 자기 몸에 대한 여성의 생각은 불신되기 일쑤였다. 여성은 신체적 증상에 항불안제를 더 많이 처방받았고 심근경색 증상이 나타나는데도 스트레스 검사를 더 적게 받았다. 극심한 복통으로 응급실을 찾았을 때도 진통제를 받으려면-만일 진통제를 받는다면- 남성환자보다 더 오래 기다려야 했다. 상당수의 여성은 증상을 입증하기 위해 남자 친구나 남편, 아들을 동반한 채 의사를 보러 갔고 심장병이나 뇌졸중같이 심각한 질병이 있는데도 오진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평등은 아빠가 입에 올리고 싶은 토론 주제가 아니었다. 평등은 남근과 질이 같은지를 따지는 논쟁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육체가 생물학적 성과 젠더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중요하다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 ⏌- P215



⎾ 이제껏 살면서 본래의 나의 모습과 내가 원하는 모습, 남자들이내게 원하는 모습, 그리고 남자들과의 관계에서 내가 원하는 모습 사이에 끼여 수없이 갈등을 해왔던 것 같다. 이 혼돈의 와중에 정작 나 자신이 원하는 모습은 쉽게 간과했다. 때로 성차별의 영향은 괴롭힘이나 학대만큼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때로 그것은 충족할 수 없이 상충되는 기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 P234



⎾ 병실 앞에서 그가 부르던 장송곡을 떠올리고는 노래 부를 때는  말을 더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음악이 있을 때는 늘 말이 술술 나왔다.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를 때도 말을 더듬지 않았고 레드핫칠리페퍼스의 노래를 부를 때도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그를 보고 재빨리 웃어보였지만 목울대가 울컥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울지 않으려고 커피를 들고 수선을 떨었다. 크림을 더 섞고 설탕도 더 섞었다. 블랙커피 색이 점차 밝아지는 걸 지켜보면서 며칠 전에 간호사가 한 말을 생각했다. 적어도 저 남자 같지는 않잖아요. 어쩌면 간호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이 아저씨 같지는 않을 것이다. 몇 달 동안 하는 일마다 엉망으로 꼬이는 바람에 나는 상황을 바로잡아야겠다는 의지마저 잃었다. 이 나라가 끔찍하다고-갇힌 기분이라고- 정신과 의사에게 말했을 때 나는 몇년 동안 마음속에서 조금씩 자란 생각을 말로 표현한 것이었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고 무기력함을 느꼈다. 변화를 향한 나의 꿈은 헛되고 무익해 보였다. 미국은 약한 것들을 무자비하게 뭉개버리는 기어였지만, 나를 꾸짖은 정신과 의사는 옳았다.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미국을 전연 다른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에게 미국은 이민자가 의사 자리까지 오를 수 있는 나라였다. 이곳은 망명과 기회의 나라였다. 거대한 실험, 세계제일의 나라. 그곳에는 자체의 결점이 있고 그것도 치명적인 결점이 대부분이지만, 절망은 그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말을 더듬는 아저씨가 그 증거였다. 그는 자신의 외로움을 키울 수 있었지만 지독한 패배감에 젖거나 자기감정에 몰입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을 안고 있지만 노래를 불렀다. 자신이 기댈 수 없었던 아버지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의 말을 앗아간 폭력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의 고통은 냉소를 키우는 변명이 되지 않았다. 그는 분노를 방패처럼 들지 않았고 그 압력 아래에서 무너지지도 않았다. 삶은 그에게 주목받지 못하는 목소리를 주었으므로, 그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해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은 것이다. ⏌ - P356~7



⎾ 리아는 고개를 저으면서 웃었다. 리아와 함께 파란 쓰레기통을 맞잡고 바깥으로 나가자 겨울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용광로의 푸른 불꽃이 저 멀리서 타오르고 제철소가 우리 앞에 아득히 펼쳐졌다. 힘에는 양면성이 있다는 사실을 이곳은 늘 상기하게 했다. 힘은 모든 것을 찢어발길 수 있는 한편, 강하고 탄탄한 것도 부드럽게 누그러뜨릴 수 있다. 그러나 만사가 잘되길 기대하면서 수동적으로 서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발을 땅에 단단히 내딛고 통제하지 않으면 작은 흔들림에도 위태로워질 수 있다. ⏌- P367



⎾ 어린 시절에 들은 온갖 상투적인 말이 일시에 떠올랐다. 꿈꾸면 이룰 수 있어! 너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특별한 꽃이야! 맞는 말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어쩌면 하나의 문화로서 우리는 이 빌어먹을 특별하다는 감정에 매료된 나머지, 나라를 온통 집어삼킨 개인주의의 유독성에 눈을 감았는지 모른다. 우리는 독선과 거만, 개인적 쾌락, 개인적 이야기, 개인적 믿음, 개인적 자만에 꼼짝없이 예속되어 눈가리개를 한 채 이데올로기에 매달리기를 원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는 공간을 선호했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복잡다단한 면을 존중하지 않아도 되고, 뜻을 달리하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룰 필요도 없으며, 우리의 현실을 복잡하게 만들거나 부정하는 것들이라면 제거하고 무시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을 선호했다. 공동체 대신에 열차 사고와 재앙과 스캔들을 추구했다. 아드레날린의 분비를 촉진한다면 그 어떤 것도 갈망했다.

우리의 실제 모습―때론 혼란스럽고 따분한-을 직시하는 것보다 오락거리가 더 쉬웠기 때문이다. ⏌- P399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아 2023-05-26 2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난티나무님 글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다음 달부터는 저도 리뷰를 쓰고 싶네요.^^*

난티나무 2023-05-26 23:44   좋아요 2 | URL
미미님^^ 다음달부터 합류하시는 거죠!??? 😍😍😍

책읽는나무 2023-05-27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인 여성이어서 혜택?받은 부분들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은 저도 깨림칙하게 남아 있어요.^^

난티나무 2023-05-28 23:37   좋아요 1 | URL
이게 참 안 할 수도 없는 생각이죠?^^;;;;
 

잠결이다. 무언가 따닥거리는 소리. 아주 느리게 나무를 쪼는 딱따구리 같다. 천천히, 조용하게. 잠이 서서히 깬다. 깨면서 오른쪽 허벅지와 골반이 묵직하게, 아픈 것도 아니고 안 아픈 것도 아닌 그 상태, 곧 아픔이 몰려올 것처럼 묵직하게, 불안한 것을 느낀다. 새벽 네 시 반. 모두 잠든 시간에 이 딱딱 소리는 어디서 나는 걸까. 희미한 어둠 속에서 천장을 쳐다본다. 분명 소리는 내 머리맡에서 난다. 천장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십 년이 넘게 먼지와 시간이 쌓였을 그 곳, 사다리를 놓아야 올라갈 수 있는 그 곳, 그러나 한번도 들여다본 적조차 없는 그 곳, 지붕 아래, 천장 너머 다락. 다락이라고 하기엔 집 크기만큼이나 넓게 펼쳐져있을 그 곳. 거기에 무엇이 있는 걸까. 뭐길래 새벽에 잠도 안 자는 걸까. 나는 왜 새부리를 떠올리는가. 생물이라고 상상하는가. 그러다 문득 큰넘이 전에 한 말이 떠오른다. 침대가 삐걱거려, 움직이면 소리가 나. 그 소리일 수도 있을까, 생각해본다. 조용하다 갑자기 조용하게 들려오는 그 소리가, 몇 번을 딱딱거리는 그 소리가, 그 소리일 수 있는지에 대해. 몸을 저렇게 오래 뒤척인다고? 아무래도 새부리 쪽인 것같다. 만약 그렇다면 지붕과 천장 사이 그 곳에 그 새부리는 어떻게 들어갔을까? 그러다 또 떠오른다. 이전에도 이 소리, 들은 적 있는 듯하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새부리일 리가… 없을까. 누운 채로 다리를 이렇게 저렇게 움직인다. 지금 아프면 안 된다. 무엇보다 고통은 안 된다. 지금은 아니다. 요가매트를 떠올리고 스트레칭을 떠올리고 반성을 떠올리고 그러는 사이 이렇게 저렇게. 방에 불을 밝히고 사라진 소리를 들으며 이제 여름이 미친 듯이 온다고 생각한다. 그건 딱딱거리는 소리, 마치 살아있는 무언가가 내는 소리로, 창틈에 집을 지으려고 웅웅거리는 벌들의 소리로, 창밖 난간까지 기어오르는 개미들의 소리로, 온다. 온갖 살아있는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의 소리로 온다. 그건 때로는 아수라장 같다. 다시 자고 싶다고 생각한다. 필름을 거꾸로 돌려 잠이 깨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턱도 없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딱딱 소리가 다시 들린다. 이번에는 정확하게, 내 머리 위가 아니라 벽 너머 저쪽, 내 머리맡의 벽 너머 저쪽, 거기에서 들린다. 확실하다. 큰넘이 돌아누웠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결국 침대가 내는 소리인가. 만약 그렇다면 소리는 잠결일 때와 아닐 때를 구분하는 건가. 인간의 상태를 구분할 수 있는 건가. 아니면 새벽 세 시와 새벽 다섯 시의 차이인가. 시간이 소리를 지휘하는 건가. 이제는 커서의 깜박임에서 소리가 나는 것만 같다. 사방은 고요하다. 고요한 소리들이다. 소리들로 가득하다. 잠에서 깬지 한 시간이 넘어가고 있다. 그런데 뭐가 확실하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공쟝쟝 2023-05-04 2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포소설 같아요!!

난티나무 2023-05-05 05:31   좋아요 1 | URL
최고의 칭찬!!!! 😻
 
행복의 약속 - 불행한 자들을 위한 문화비평 딕테 시리즈 2
사라 아메드 지음, 성정혜.이경란 옮김 / 후마니타스 / 2025년 1월
평점 :
일시품절


작년에 독서 모임 멤버들로부터 성실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모임에 빠지지 않고 읽어와야 할 분량을 읽어오고 정리하자고 하면 꼭 몇 글자라도 끄적여서 오고, 그래서 멤버들은 나를 모범생, 우등생, 이라고 불렀다. 나도 안다, 그게 칭찬인 것을. 그러나 나는 모범생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부터 거부감을 가졌다. 칭찬하는 말에 적절한 대응법을 (아직도) 모르겠어서 흥흥 웃고 말았지만, 그 후로 왤까, 계속 생각했다. 뭐가 싫은 걸까. 

모범생, 우등생, 학교에서 말 잘 듣고 허튼 짓 안하고 곁가지로 빠지지 않고 시키는 것(만) 잘하는 사람. 내 머릿속에는 하라는 대로 잘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만 둥둥 떠다녔다. 이건가, 내 거부감은. 사실을 말하자면 학창 시절 나는 모범생으로 보이기는 했지만 우등생은... (아주 잠깐 그렇기도 했지만 대체로 절반쯤은) 아니었다. 시키는 걸 잘하고 싶었으나 애를 쓰지는 않았다. 애를 써도 할 수가 없었다. 학창 시절도 지나고 사회 생활도 지나오고 기혼 생활도 웬만큼(?) 해본 나를 돌아보자니, 떠오르는 에피소드 속의 내 모습이 아주 적확하게 '정서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늘 그렇지는 않았어도 자주 그랬다. 하. 나는 뼛속까지 이방인이었어. 그걸 알아서 항상 나를 탓하며 살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안 돼, 이상한 짓 하지 마, 벗어나면 안 되지... 

다시 모범생이라는 말로 돌아오면, 정서 이방인으로서 나는 모범생이었던 적이 없다고 해야 맞을 듯하다. (역사를 다시 쓰자.ㅋ) 좋아하는 것을 했고 약속을 했으므로 그 약속을 지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과 모범생이라는 단어는 합치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래서 그 단어로 칭찬받는 것이 싫었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칭찬하는 말도 새로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칭찬이 싫음, 기분 나쁨을 가져오기도 한다는 걸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올바른' 생각인지를 생각했다. 


나를 수동적 인간이라고 여겼다. 사람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안 되는 거지만 대체로 그렇다고 여겼다. 그러나 알다시피 우리는 한 가지 면만 갖고 행동하지 않는다. 같은 행동이라도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내가 '정서 이방인'으로 행동한 순간들을 떠올리면 그건 단순히 수동적,이라는 단어에 집어넣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내가 불행하다고 느꼈던 것, 수동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 모든 게 부정적이라서 내 입꼬리는 항상 아래를 향하고 있다고, 아주 불만이라고, 여겼던 것 들이 실은 자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나 뒤늦게 알아차리는 거, 이거야말로 '행복'이겠지.ㅋㅋ 그런데 '어쩌면' 나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몰라. 우등생이 되고 싶었지만 방법을 몰라서 못했던 때처럼 자원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를 몰랐을 뿐일지도. 


남들과 비교해 내 삶이 보잘것 없고 '실패'했다고 생각하다가, 아니다, 그런 게 어딨어, 정해진 기준은 없고 세상에 '성공'한 사람만 잘사는 건 아니다, 따라서 나는 실패한 게 아니야, 그냥 내 삶을 살고 있는 거지, 하고 생각의 전환을 이루었으나, 곧 이건 '합리화'가 아닌가 싶어 나를 의심하기를 반복했는데, 이젠 정말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책을 덮으며 또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기존 관념의 연장선에 내 생각을 놓는다. 기존 관념을 의심하는 시각으로 내 생각을 본다. 그거 또다른 기존 관념 아니야? '합리화'라는 말로 너를 다시 옭아매려는 술책?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 자책은 금물이다. 자책할 시간에 책을 한 글자 더 읽자. 


도입부가 어려워서 어렵다고 끙끙거렸다. 다시 읽으면 덜 어려울 것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좋아서, 물론 아메드의 말을 따라 나를 생각하면서는 슬펐지만, 그 슬픔은 좋은 슬픔이었다. 나는 이제 이 느낌을 기분 좋은 슬픔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슴이 아프지만 좋은 느낌이라고, 좀 고통스럽지만 기분이 좋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사라 아메드 덕분이다. 


잘난척하는 사람을 보면 묻고 싶었다. "그래서 넌 행복하냐?" 내 눈에는 하나도 행복해보이지 않는 그 사람은 분명 행복하다고 대답했겠지. 이런 게 행복 아니겠냐고 말했겠지. 나도 내 기준에서의 행복이라는 관념을 설정해두었을 것이다. 내 기준에서의 행복. 그걸 아직 '행복'이라는 단어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 아쉽다. 그땐 좀 헛발질하는 느낌으로 행복이라는 걸 상상했다면 지금은 발 끝에 단단하게 무언가가 와닿는 느낌으로 '좋음'을 상상한다. 그게 별것 아니라는 사실, 스쳐지나가는 것이라는 사실, 이미 수없이 스쳐보냈고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사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언어를 개발해야 한다는 아메드의 말을 되새긴다. '행복'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자주 쓰던 단어 '어쩌면'이 심하게 더 좋아질 것같은 느낌이다. '어쩌면, (행복)'! 






(밑줄들은 '결론'에서 가져왔다.) 


⌈행복은, 니체가 이야기하듯, 당신이 하도록 요청받은 것을 따르는 방식일 수 있다. ...... 우리는 능동적 활동과 수동적 활동을 경험하는 방식의 질적 차이를 설명할 언어를 개발해야 한다. 그러려면 능동과 수동의 구분 자체에, 그런 구분이 존재의 계급 구분을 고정하는 방식에, 행복한 사람과 길을 건너는 닭들을 고통 받는 영혼과 움직이지 못하는 길들과 구분하는 방식에 도전해야 한다.⌋ (378) 


⌈로드는 작품 내내 우리가 상처 주는 것으로부터 보호받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단지 상처를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상처를 야기하는지 알아차리기 위해 작업하고 투쟁해야 한다. 이 말은 알아차리지 않도록 배워 온 것을 탈-배움unlearning하라는 의미다. 힘과 피해의 관계인 폭력이 어떻게 다른 신체가 아닌 어떤 신체로 향하는지를 비판적으로 이해하려면 이런 작업이 필수적이다. ⌋(388) 


⌈이 책에서 내 목적은 나쁜 느낌들이 단순히 반작용적인 것이 아니라는 걸 살펴보는 것이었다. 나쁜 느낌들은 끝나지 않은 역사들에 대한 창조적 반응들이다(Ahmed 2004:200~202도 참조). 우리에게 불행할 의무가 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 견딜 수 없는 것으로 경험될 수 있는 느낌에서 로맨스나 의무를 만들어 내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나는 단지 불행을 극복해야 할 느낌 이상의 것으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390) 


⌈가능성을 받아들이려면 과거로의 회귀, 즉 우리가 상실한 것뿐만 아니라 현재 가지고 있는 것, 포기한 것뿐만 아니라 포기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가능성에 대해 배우는 것은 계보학을 하는 것, 현재의 도착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현재를 궁금해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능성에 대해 배우는 것에는 현재로부터의 일정한 소외가 수반된다. 익숙한 것이 물러나면 다른 일들이 발생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정서 이방인들은 창조적일 수 있다. 우리는 그릇된 것들을 바랄 뿐만 아니라, 포기하라고들 하는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이런 바람들을 중심으로 생활 세계를 창조한다. 우리가 행복에서 멀어져야 일이 벌어진다. 우연 발생이 생겨나는 것이다. ⌋ (392)


⌈불행할 자유는 부적절한 방식으로 행복할 자유를 포함한다. 그런 자유는 행복 하중을 가볍게 할 것이다. 불행할 자유는 그러므로 행복을 제쳐 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우연발생을 행복 안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다.⌋ (400)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쟝쟝 2023-04-29 2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난티나무 2023-04-30 05:42   좋아요 2 | URL
하뚜하뚜!!!

다락방 2023-04-30 0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난티나무 님, 너무나 좋은 리뷰 입니다!! 멋져요!!

난티나무 2023-05-03 06:45   좋아요 0 | URL
오홍홍 칭찬은 기분 좋은 것입니다!! 충성! 아 이거 아닌가…^^;;;;;; 🥰

거리의화가 2023-04-30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난티나무 2023-05-03 06:45   좋아요 0 | URL
유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