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지기가 요즘 하는 드라마를 보길래 옆에서 따라 보기 시작했다. 드라마 잘 안 보게 된 지 좀 됐는데 가끔 요샌 어떤 식으로 그리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꽁냥꽁냥 청춘 연애라 흥 코웃음치면서 본다.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남주는 멋있고 여주는 귀엽고 여주는 자주 위기에 처하고 그때마다 짠 나타나서 구해주는 건 남주고(영웅 서사), 무대에서 빛나 보이고 그냥 햇살을 등지고 서있어도 찬란하고(영웅 숭배), 둘 다 매력 철철 넘치는,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고, 주변 친구들도 매력 캐릭터고, 예전과 다른 게 있다면 뻔해지려고 하는 장면에서 조금 덜 뻔하다는 것? 아무튼 걔네는 사랑을 (한다고) 하고 연애를 하는데, 책의 구절들(아래 연애와 사랑 내용)이 겹쳐지면서 우리는 언제까지 연애를 진정한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살게 될까, 언제까지 드라마와 영화로 사랑은 낭만적인 거야,를 외칠까, 욕하면서 드라마를 계속 보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를 생각한다.(낭만에 중독되는 것이 얼마나 뾰로롱뽀샤시뜬구름인지 잘 아시리라.) 짜증 내면서 12회까지 봤다.ㅋㅋㅋ 방금 생각났다. 계속 보는 이유, 주인공들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우정, 특히 나이 불문, 여자들의 우정 때문이다. 최고다. 끝까지 우정을 보여주길. 사실 이 드라마의 주제는 그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밑줄긋기 책 페이지는 전자책이라 큰 의미가 없음)
(+ 드라마는 ‘스물다섯, 스물하나’임)

영웅 숭배가 우리를 성장시키거나 주춤하게도 할 수 있는 또 다른 원형적 경험, 즉 낭만적 사랑의 전조임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다. 10대와 20대 초까지 우리는 낭만적인 사랑을 통해 자신을 완성하는 길을 찾기 시작한다. 영웅 숭배는 자신의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줄 영혼의 짝 숭배로 진화한다. 가슴 아프게도, 로맨스로 통하는 것의 대부분은 사실 우리 자신의 ‘살지 못한 삶‘이 우리에게 다시 투영된 것이다.

잠시 자신의 연애사를 되짚어보라. 처음 만났을 때 연인의 어떤 점에 끌렸는가? 어쨰서 그 사람이 특별해 보였던가? 앞으로 연인이 될 사람의 가장 감탄스러운 특성들은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무르익게 될 잠재력이다. 삶의 새로운 가능성에 눈을 뜰 때, 대개는 그것을 타인에게서 먼저 보게 된다. 그동안 감춰졌던 우리의 일부분이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낼 참이지만,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직행하는 건 아니고 경유지를 거친다. 우리는 자기 안에서 점점 자라나는 잠재력을 타인에게서 보고는 갑자기 그 사람에게 사로잡힌다. 다른 누군가가 내 눈에 유독 빛나 보일 때, 그것은 내 내면의 무언가가 변화를 꾀한다는 최초의 징조다.

우리는 이렇게 또 성장하지만, ‘살지 못한 삶‘을 자각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투사는 친밀한 관계를 방해한다. 진전된 관계를 통해 의식의 동반 성장을 도모하기보다 상대방을 통해 자신의 잃어버린 조각이 채워지길 바라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당장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지만, 연애 중에는 상대의 인간성이 보이지 않는다. 실은 자신의 원초적 잠재력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잠재력을 나만의 것으로 환원하지 못했다는 바로 그 이유로, 우리는 아직 끝맺지 못한 일을 우리가 사랑한다고 선언한 바로 그 사람과 함께 실행하고 옛 상처를 재현한다. 자신의 ‘살지 못한 삶‘을 연인에게 떠넘기는 부당한 현상이 너무도 자주 벌어진다. 무엇을 연인의 탓 또는 공으로 돌리는지 가만히 관찰해보면, 자기 내면의 깊이와 의미를 알 수 있다. - P80

하지만 사랑은 자신과 연인의 동질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

사실, 사랑의 반대말은 권력이다. 사랑은 자신과 상대방을 동등한 존재로 인식하는 반면, 권력은 자신의 목적에 따라 상대방을 조종하려 든다. 우리 문화에서 상호 투사는 결혼의 전제 조건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걸 당연히 여기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정이 달라진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자신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살지 못한 삶‘을 상대방에게 맡기고 한동안, 그러니까 되돌려받을 준비가 될 때까지 상대방이 품게 한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든 서로에게 투명한 ‘살지 못한 삶‘을 각자 거둬들여 자신만의 것으로 환원하지 않으면 그 관계는 지속될 수 없다. 안타깝게도, 투사를 되돌리는 일은 대개 환멸과 함께 온다. - P81

사랑은 인간적인 능력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그 사람 자체로 사랑한다. 서로 비슷하고 가까움을 제대로 인식하고 느낀다. 반면 연애 감정은 일종의 신성한 중독이다. 상대방을 신격화하고, 그 사람에게 이 세상에 임한 신이 되길 요구하면서 자신이 그런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연애 감정은 신앙생활의 자양분이 되기도 한다. 연애는 심오한 영적 경험이다. 많은 이에게 평생에 유일한 종교적 경험이며, 신의 품으로 들어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수단이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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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28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사랑빼고 우정과 펜싱이야기가 주여도 괜찮지 않았을까 했어요 저도 ㅎㅎ

수이 2022-03-28 21:24   좋아요 1 | URL
전 남주혁 보느라 보는데요 ㅋㅋㅋㅋ

mini74 2022-03-28 21:34   좋아요 1 | URL
전 지승완파 입니다 ㅎㅎㅎ

난티나무 2022-03-29 00:28   좋아요 1 | URL
오 맞아요! 우정과 펜싱 좋으다요. 연애가 💦 ☁️.ㅋㅋㅋ 저도 지승완 좋아요, mini74님!!!!!!

vita님은 주혁파!!! ㅋㅋㅋ

책읽는나무 2022-03-28 23: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김태리는 그렇게 좋아해도, 전 남주혁 보기 싫어서 그 드라마 안보는데 주변에서도 많이 보는 드라마인 듯 하더군요~^^

난티나무 2022-03-29 00:30   좋아요 2 | URL
캐릭터도 쫌 그래요. 저도 그닥이지만 ㅎㅎ 욕 하면서 봅니다.^^;;;

라로 2022-03-29 01: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저는 어제 처음 봤는데 벼벼별로였어요. 여러가지 드라마 짬뽕, 배우들만 다른. 지숭완이 누굴까요? ㅎㅎㅎ 찾아보겠습니다. ㅋㅋ

난티나무 2022-03-29 02:45   좋아요 2 | URL
글쵸, 별로죠. 저는 김태리 연기가 아깝습니다.ㅎㅎㅎ
 














<다락방의 미친 여자> 잠시 쉬다가 다시 읽기 시작.

4부는 샬롯 브론테다. 9~12장까지. (9장 <교수> 10장 <제인 에어> 11장 <셜리> 12장 <빌레트>) 그 중 11, 12장의 밑줄들을 추려서 가져온다. 읽을 때보다 밑줄로 옮길 때, 긁어서 가져올 때보다(스캔 등의 형식으로) 일일이 타자를 치면서 다시 볼 때 새롭다.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



4부 11장 굶주림의 기원


"... 이 게걸스러운 목사들은 많은 브론테의 비평가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단지 지방색이나 무의미한 이탈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장면 덕분에 이 소설은 부자들의 비싼 진미, 외국인의 독특한 요리, 공업 도시에서의 식량 반란, 군인들에게 가야 할 많은 식량, 어린이 노동자들의 불충분한 저녁 바구니, 그리고 실업자들의 굶주림에 대한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상 배고픔은 착취당하는 이들을 영국 사회에서 독립적인 성공적 삶에서 배제된 모든 사람들과 연결시킨다. 한 노동자는 "굶주리는 민중은 만족할 수도 없고, 정착할 수도 없다."(chap.18)고 명료하게 말한다. 그리고 『제인 에어』에서처럼 배고픔은 반항과 분노에 불가피하게 연결되기 때문에, 이 시대 비평가들이 『셜리』에서 커러 벨(Currer Bell, 샬롯 브론테가 자신이 작품을 처음 발표했을 때 사용한 필명이다.)의 여성 정체성을 발견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 작품의 전지적 시점과 의사擬似 남성적 시점에도 불구하고, 샬롯 브론테의 세 번째 작품은 이전의 두 작품보다 훨씬 더 의식적으로 "여성 문제"를 이야기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1811년부터 1812년까지 영국의 중상주의 경제가 쇠퇴하던 시기의 전시 위기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노동자들의 분노가 모든 피착취자들에게, 특히 (이 장의 제사들이 암시하고 있듯이) 자신들의 삶에서 목적의식을 가질 수 없었던 여자들에게 어떻게 파괴적인 역할을 하는가를 묘사하고 있다.

......

사실상 『셜리』에서 브론테는 어떻게 여자의 배고픔이, 디킨슨의 말로 하자면 "창문 밖 사람들의 / 방식"인지를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왜 "[창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욕망을 "없애 버리는" 방식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남자를 유지시켜 주는 음식과 허구는 정확하게 바로 여자를 병들게 하는 음식과 허구이기 때문이다. 이 "사도의" 목사들이 내뱉는 말은 바로 여자들이 굶주려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리하여 브론테는 여기에서 성경적인 낙원의 신화에 대한 페미니스트적인 비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

633~635


흠, 디킨슨의 비유가 확. 욕망을 없애버리는 방식. 배고픔. 배고픔의 기원. 여자의 배고픔. 요즘 자주 생각하는 것. 배가 고파올 때마다 생각남. 그러나 아직 정리는 안 됨. 배가 고프면 그저 이제는 뭐라도 먹어야 겠다는 생각. 참으로 일차원적이나.




" "모든 남자는 개인으로 보면 대체로 이기적이고, 집단으로 보면 심하게 이기적이기" 때문이다.(chap.10) "

643


무릎 탁!! 




"『제인 에어』가 일련의 알레고리적·가부장적인 위험에 직면해 승리해야 하는 모든 여자들에 대한 하나의 우화인 것처럼, 캐롤라인 헬스톤의 사례는 시련의 진정한 원인이 바로 여성의 의존적인 위치에 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643



"브론테는 바이블이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자에 대한 착취가 어떻게 상업 자본주의를 영속화시키며, 또한 그 상업 자본주의가 인간성과 육체의 본성에 대한 강제적인 통제를 어떻게 영속화시키고 있는지를 폭로하고 있다. 그러나 브론테의 인물들은 성경적 신화의 구속을 피할 수 없다."

651



"이제 (여자는 먹는 것 때문에 저주받았다는) 그 기원의 신화가 여성에 대한 남자의 증오와 자신을 유지하거나 강하게 만드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공포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가 더 분명해진다. 캐롤라인은 먹지 말라는, 말하지 말라는, 그리고 나서지 말라는 명령을 내면화했다. ... 다시 말해서 캐롤라인의 조용하게, 그리고 천천히 진행된 자살은 그녀가 남자의 신화에 의해서 희생되었던 모든 방식을 함축하고 있다.

반면 캐서린 언쇼 린튼처럼, 캐롤라인 헬스톤 또한 일종의 저항 수단으로 자신의 굶주림을 이용하고 있다. 캐서린은 여자로서 "감금"당하는 것을 거부했다. 캐서린의 음식 거부는 부분적으로는 임신의 거부였다. 그러나 신경성 거식증은 처녀에게 훨씬 더 자주 발생하며, 그것은 성숙한 여자로 성장하는 것에 대한 저항으로 볼 수 있다. 스스로 굶는다는 것은 그러한 소녀들을 작은 아이의 몸 상태로 되돌려 주며, 그들이 "저주"로 간주하고 있는 월경 주기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캐롤라인의 굶주림은 또한 사회가 자양분을 주는 것으로 정의한 것에 대한 거부다. 『래크랜트 성Castel Rackrent』의 레이디의 저항처럼, 반항의 행위인 단식은 이질적인 음식으로 사는 것에 대한 거부다. 먹는 것은 자아를 유지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치욕적인 세계에서는 먹는 행위가 복종을 함축하고 있는 타협이라 할 수 있다. 브론테는 여자들은 스스로를 명명하고 자신들의 세계를 조정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해 주는 새로운 이야기가 창조될 때까지, 침묵 속에서 굶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캐롤라인의 굶주림은 탈란트를 잘 투자해야 얻을 수 있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가치가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 때조차도, 부양하는 여자와 대접받는 남자를 비판하고 있다."

659~660


무엇 하나 '정치적'이지 않은 것이 없구나.

아래와 같은 내용도 떠오르고.


"그러나 아름다움의 신화에서는 여성이 먹는 것이 공적 문제라, 우리가 먹는 양이 우리의 사회적 열등감을 증언해주고 강화한다. 여성이 남성과 같은 음식을 먹을 수 없다면, 공동체에서 그들과 같은 지위를 누릴 수가 없다. 여성에게 공동의 식탁에 자신을 부정하는 태도로 오라고 하는 한, 결코 남녀가 함께 둘러앉은 둥근 식탁일 수 없다. 접는 식탁을 놓고 여성은 밑에서 먹으라고 한 전통적인 위계적 식탁과 같다."

나오미 울프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 304




12장 루시 스노우의 매장된 삶


"『빌레트』는 여러 가지 면에서 샬롯 브론테의 가장 명백하고 절망적인 페미니스트 소설이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교수』와 『셜리』는 여성성의 불안에 기울이고 있는 강력한 관심을 냉정한 가짜 남성주의 외관 뒤에 숨기면서 적어도 다른 의도를 가진 체했다. 그리고 『제인 에어』는 함축적으로 반항적인 페미니스트 소설이라 할 수 있지만 일종의 동화적 구조를 이용하여 남성 사회에서의 여성의 위치에 관한 작가의 깊은 비관주의를 심지어 작가 자신에게조차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브론테의 다른 어떤 여주인공보다 더 나이가 많고 현명한 『빌레트』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루시 스노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없는(사회 바깥에서, 부모도 친구도 없는, 육체적·정신적 매력도 없는, 돈도 자신감도 건강도 없는) 여자다. 그리고 루시 스노우의 이야기는 아마도 지금까지 여성의 박탈을 다뤄 왔던 이야기 중 가장 감동적이며 무시무시한 이야기일 것이다."

672



"따라서 남성 낭만주의자들은 "매장된 삶"을 존재론적으로 미화시키지만, 브론테는 집 없음, 가난, 육체적인 매력 없음, 성적 차별, 혹은 여성에게 스스로의 매장을 강요하는 전형적인 사고와 같은 세속적 사실을 탐구한다. 아놀드와 같은 남성 시인들을 좀 더 타당한 내적 자아를 경험하고자 하는 갈망을 표현하고 있는 반면, 브론테는 단지 이런 사적인 영역에만 머물도록 제한을 받는 여성들의 고통을 묘사한다. 이런 여성들은 매장된 자아를 추구하고 찬양하는 대신, 그 매장 때문에 자신이 희생되었다고 느낀다. 대신 그들은 세상에서 자신들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기를 갈망한다.

......

브론테는 여성의 언어를 탐색하면서 남성 문화의 부적절성을 고찰하고 있다. 남성이 고안해 낸 예술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녀는 여성이 가진 상상력이 여성 자신에게 미칠 위험을 탁월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

676~677



"... 워즈워스의 루시는 자연의 보호("불 붙이거나 억제하는 / 감독하는 힘")을 받지만, 브론테의 루시는 자신의 개인적인 모순이 불러일으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워즈워스의 루시는, "말없는 비정한 사물들의 / 침묵과 평온"을 향유하면서, 잔디를 가로질러 새끼 사슴처럼 즐겁게 뛰노는 반면, 브론테의 루시(그녀는 인적 없는 곳에서 아는 사람 없이 살고 있기 때문에)는 바람에 두들겨 맞아 추방되어 갈 곳이 없거나, 존재가 없는 삶 속에 숨 막혀 매장될 운명이다."

697


이런 비교. 요즘은 특히 남성작가의 글을 잘 안 읽기는 하지만 간혹 접하는 글들을 볼 때 느끼는 묘한 감정들, 때로는 내가 너무 편파적인 눈으로 보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할 정도로, 아아 막 욕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매우 적절한 예시라고 생각하며 읽음.


"왜 브론테는 의도적으로 문제를 회피하려 하거나 독자를 오해하게 하는 화자를 선택했는가? 예를 들어 루시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온화한 날씨 속에서 쉬고 있는 돛단배"처럼 그리면서 문제를 회피하거나 독자들의 오해를 산다. "많은 여자들과 소녀들은 이런 식으로 그들의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chap.4) 왜 브론테는 허구적인 전기를 서술하기 위해서 엿보는 사람을 선택했는가? 이는 화자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더 매력적인 여자가 이야기의 중심인물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방식을 고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명 루시의 삶과 루시의 그녀 자신에 대한 인식은 여성의 삶을 규정하고 제한하는 그녀의 문화가 강요하는 문학적·사회적 전형에 부합하지 않는다. 루시는 또한 마치 자신에게는 아무 이야기도 없는 것처럼 느낀다는 점에서 괴테의 마카리를 닮아 있다. 루시는 그녀가 사용할 수 있는 서사 구조들을 차용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서사 구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루시는 자신의 경험에 맞지 않거나 부적절하거나 정도를 벗어난 것으로 간주되는 이야기들을 생략하거나 무시할 때조차도, 남자가 고안한 이야기와 이미지를 사용, 오용하고 있는(제시하고 꺾어 버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702


'문제 회피' '자신에게는 아무 이야기도 없는 것처럼 느낀다는 점' 같은 구절에 방점 팍팍 찍힌다.


"그러므로 화자로서 회피하는 방식을 택한 루시는 그녀가 (그리고 모든 여자들이) 침묵의 복종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그리고 목소리를 찾기 위해서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루시는 자신이 이어받은 모든 형태의 감금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진정으로 신화적인 일(자기 자신의 적절한 허구를 창조하고자 하는 시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빌레트』는 거의 똑같이 나뉘어진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첫번째 부분은 고해실의 에피소드까지 루시를 데리고 가며, 두 번째 부분은 마담 벡의 거처에서 나와 스스로 길을 헤쳐 나가려는 루시의 새로운 시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브레튼가가 등장하는 막간에서, 브론테는 가부장적 문화의 미학적 관습이 왜, 그리고 어떻게, 성차별적인 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제도와 마찬가지로, 여자들을 감금시키는가를 탐색하고 있다."

702~703


"거울은 실재를 반영하지 않는다. 거울은 실재를 해석함으로써 실재를 창조한다. 그러나 해석의 행위는 지각의 행위로 남아 있을 때만이 포학성을 피할 수 있다. 결국 "작은 방어들이 축적되는 곳에서만 (...)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은 확실하다."(chap.27) "

729


"가부장적 예술을 전복시키기 위해서 브론테가 사용하는 것은 수용의 행위다. 최근에 몇몇 페미니스트들은 브론테가 그녀의 여주인공들을 수동적 인물로 그렸다는 이유로 불편해한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브론테의 작품들은 남성성을 권력과, 여성성을 굴종과 동일시하는 악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브론테는 순종의 습관이 여성에게 중요한 통찰(여성들이 저항할 때 그들의 주인처럼 되지 않도록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공감의 상상력)을 주었음을 알고 있었다. 여자들은 자신들을 대상으로서 경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죽음에서 깨어날 필요성과 깨어날 수 있는 능력 둘 다를 이해하고 있다. 그 여성들은 그 능력과 필요성은 마술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마력이며, 박해하는 고백적인 참회가 아니라 부활시키는 고백적인 예술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또 다른 타자를 그들이 탈출했던 장소에 옭아매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예술이다. 시학의 정치학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브론테는 어떤 의미에서, 현상학자(이성과 상상 사이의 간극을 공격하고, 객관적인 예술 작품의 주관성을 주장하며, 그녀 소설의 주제로 대상화된 희생자들을 선택하고, 그녀와 함께 타자화된 사람의 내면성을 경험하도록 독자를 초대하는)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브론테는 끊임없이 고통 받았던, 그리고 좀처럼 잊을 수 없는 그녀 예술의 정직성 덕분에 힘을 얻었던 모든 여성들의 강력한 선구자다."

733



샬롯 브론테 대단해, 하며 읽었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똭 정리를 해주시는 저자님들. 맞습니다, 맞고요. 왠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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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22-03-25 0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난티님 이 책 구해서 읽고 계시군요! 이 책 정말 대단하지요?

난티나무 2022-03-25 14:07   좋아요 1 | URL
네! 흥미진진해요~^^ 개정판 나올 땐 번역도 좀더 매끄러우면 좋겠어요.^^

독서괭 2022-03-25 0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브론테를, 특히 빌레트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인에어밖에 안 읽어서^^
이 책도 상당히 두꺼운 모양입니다. 휴~ 언제 읽죠?ㅎㅎ

난티나무 2022-03-25 14:09   좋아요 2 | URL
엄청 두껍습니다. ㅎㅎㅎ 저는 제본한 책이라 권 수로는 세 권이나 되고요.^^;;;
소설들 다 읽어보고 싶은 마음 저도 들어요!^^

바람돌이 2022-03-25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이런 내용이었군요. 저는 제목만 보고는 소설인줄.....ㅠ.ㅠ 절판인데 난티나무님처럼 이렇게 리뷰를 써주는 분이 자꾸 생기면 출판사에서 재출간을 하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

난티나무 2022-03-25 14:11   좋아요 1 | URL
저도 이런 책인 줄 몰랐…ㅋㅋㅋ 그러나 재밌습니다!
올해 말쯤 나온다고 들었어요. 🥳

청아 2022-03-25 1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난티나무님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저도 <빌레트>너무 궁금하네요.
도서관에서 <다락방의 미친 여자>빌렸었는데 두께의 압박에 놀라고 무서워 조금 읽다 반납했어요ㅋㅋㅋ 그래도 책이 재출간된다면 꼭 사고싶어요^^*

건수하 2022-03-25 12:58   좋아요 2 | URL
다락방님이 전에 이 책 재출간 소식이 있다고 하셨던 것 같아요 (전 국회도서관에서 제본한 책으로 갖고 있…)

청아 2022-03-25 13:19   좋아요 1 | URL
네 수하님! 저도 그래서 알림해놓고 기다리는 중이예요^^* 제본 갖고 계시다니 부럽습니다.재출간은 두 권으로 나눠서 나옴 좋을것 같아요!

건수하 2022-03-25 13:20   좋아요 2 | URL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지요 ㅎㅎ 펴보지 않고 새 책이 나올 것 같아요…

난티나무 2022-03-25 14:13   좋아요 2 | URL
미미님^^
얼마 전에 서재에 빌레트 바람이 좀 불었었는데 그때도 읽고 싶다 했었거든요. 아 근데 사실 안 읽고 싶은 마음도 살짝 들기는 해요.^^;;; 제인에어를 읽을 때의 마음과 마찬가지일 것 같아서 ㅎㅎㅎ

난티나무 2022-03-25 14:15   좋아요 2 | URL
수하님^^
저도 제본이에요. 반갑!!!^^
새 책 나오기 전에 읽으려고 저도 애쓰고 있습니당. ㅎㅎㅎ

건수하 2022-03-26 22:37   좋아요 1 | URL
앗 저도 세 권으로 제본이요! 반갑습니다 ^^
 

리뷰는 어떻게 쓰는 것인가,는 뭐 예전에도 잘 몰랐지만 지금은 더더욱 모르는 상태가 된 듯하다. 3월은 길었는데 아직 끝나지 않았고 서재 달력에는 고작 3일이 체크되어 있다. 나는 무엇을 했던가. 열심히 읽었고 그러느라 그랬는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한쪽 눈 상태가 메롱메롱해서 한 이틀 쉬었고 일주일 정도 눈을 아꼈고, 그러다 보니 읽기는 읽었으나 정리하지 못한 책도 있고 쉬엄쉬엄 읽고 있는 두꺼운 책들도 있고 그러느라 머릿속엔 생각만 따박따박 쌓이고.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완독한 책이 몇 없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이 책을 읽으면서 기억이 났다. 이런 소설을, 쓰고 싶었다. 무엇을 쓰더라도(쓸 수 있더라도) 설명하지 않는 문체, 부러웠다. 그것만으로 좋았다. 리뷰를 쓸 수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지금으로선 딱히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사랑, 무얼까 싶고 부모자식 관계, 무얼까 싶고. 막 슬프고. 그래서 다음엔 <무엇이든 가능하다>를 읽으려고. 그러려면 일단 책을 사야 하는데... 음... 
















알리스 슈바이처 <사랑받지 않을 용기> 

완독. 몇몇 단어들 거슬리기는 했으나. 두루두루 여러 의제들을 짚어주어 좋았다.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책이었다. 벌써 가물가물. 
















네이딘 버크 해리스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제목이 책의 내용을 잘 보여준다. 그런 거 아니야 하고 막연히 의심했었는데 과학적 근거와 관찰/연구 결과로 실제 그렇다는 걸 설명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저자가 어떻게 아동건강센터(웰니스)를 세웠는지 그 과정을 (지나치게) 늘어놓는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그 또한 연구의 결과이기도 하므로 인정하면서 (그런 부분들은) 설렁설렁 읽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과 자잘한 질병들이 어디에서 오는지 역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연결된다는 게 어이없으면서 한편으로는 섬찟하다. 어이없는 건 그러니까 지금 내 성격을 이룬 바탕도, 관계를 형성하는 기술(?)도, 세상을 인식하는 눈도, 그밖의 모든 것도 다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왔는데 질병도 그렇다고 하니 그런 거고, 그래서 자꾸 무서워지는 거. 맞는 말인데 무섭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되짚어서 풀어내고 털어버려야 하는 건지. 털어지기나 하는 건지. 
















클라리사 에스테스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저자 성을 자꾸 에스테바 라고 쓰고 고치고 있다. 에스테스. 

늑대에 대한 선입견도 깨야 겠다는 생각. 늑대 = 나쁜 남자 아니던가. 음흉한. 그것도 다 편견이라고, 그러니까 늑대에 대한. 내 안의 늑대를 찾고 싶어졌다. 있기는 있었나 싶지만 책에서 있다고 하니 되찾고 싶다. 지금의 내 모습, 지금까지의 내 생활, 이런 것들을 돌아보는 계기. 책 속의 설화/신화/구전동화 등을 심리적으로 해석한 것은 좀 마음에 안 들지만. 어째서 페미니즘심리학적 분석은 안 되는가, 뭐 이런 생각도. 
















제임스 홀리스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위의 늑대.. 책과 연결해 읽었다. 진짜,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쉰이 되어버렸네. 전자책 대여라 확실히 읽고 나서 내 손에 잡히는 게 없고 그래서 남는 게 없는 건지도. 종이책 만세. 당췌 들쳐볼 수가 있어야지, 전자책은. 게다가 대여는. 아무튼 책의 첫인상은... 깊었다,고 해야 인상깊었다가 되려나. 다시 찬찬히 읽어봐야 할 듯. 읽을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다르지 않을까. 일단 오 너무 좋아요,는 아니었다. 역시 유년기의 경험, 어린 시절이 이렇게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나도 내가 누군지 이젠 좀 알고 싶으다. 
















낸시 프레이저 외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완독,이라고 하긴 좀 불완전하지만 어쨌든 넣어본다. 끝부분 남성학자들 챕터 두 개 빼고 읽음. '낸시 프레이저의 비판적 정의론과 논쟁들'이 부제이다. 그대로다. 여러 학자들이 낸시 프레이저의 이론을 비판하고 거기에 또 프레이저가 반박하는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주로 남성학자들의 의견이 어이없었고 거기에 '친절히' 설명&반박하는 프레이저의 태도가 조금 답답했는데(왜, 꼭, 그래야 하나 싶기도 해서) 마지막 챕터에서 통쾌하게 밟으면서 내 이론이 짱이야! 하셔서 ㅎㅎㅎ 속이 조금 풀림. 솔직히 다 이해 못했다. 너무 어렵다. 그러니까 대충 이런 이야기인 거지? 이런 상태. 어렵기는 해도 사회적 분배와 인정의 문제에 대해, 정의와 부정의에 대해, 여러 모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였다. 독서모임에서 낭독으로 함께 읽지 않았다면 애저녁에 집어던졌을 책. 몇 년 후에 혹여 다시 읽는다면 조금 더 나은 이해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슬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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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03-24 0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난티나무님! 글 얼마만인지요~^^♡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궁금했던 책인데 역시
무거운 느낌이 드네요. <루시 바턴>설명하지 않는 문체에 대해 저도 어제 책에서 읽었는데 반갑고요. 그 책에선 하이쿠까지 갔어요ㅋ 몇권 담아갑니다. 책은 저도 종이책이 더 좋아요. 만지고 펼치고 넘기고 쌓이고ㅋㅋㅋ

난티나무 2022-03-24 17:53   좋아요 2 | URL
너무 뜸하다고는 생각했는데 날들이 슉슉 가버리네요. ㅎㅎㅎ
어떤 책인지 궁금한데요? 루시 바턴 이야기하는 책이요. 알려주사와요~^^
스트라우트 책 보관함에 잔뜩 담아뒀어요.ㅋㅋㅋ
종이책이 짱~!!!^^

청아 2022-03-24 17:57   좋아요 1 | URL
아! <루시바턴> 이야기를 한건아니예요. 디테일하게 설명하지 않는 문체에 대해 롤랑 바르트가 얘기하더라구요. <푸코,바르트,레비스트로스,라캉 쉽게 읽기>에서 어제 그런 내용을 읽었어요ㅎㅎ
잔뜩 담아두셨다니 저도 꼭 스트라우트 읽어볼께요!

난티나무 2022-03-24 18:03   좋아요 2 | URL
우왕 그렇군요! 롤랑 바르트... 이름만 들어도 어려운 사람...ㅋㅋㅋㅋㅋㅋ
저는 미미님의 글에서 훔쳐 배우는 걸로~^^;;;;;

프레이야 2022-03-24 09: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종이책이 좋은 건 어쩔 수가 없네요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오래전 읽었어요
마음에 대체로 들면서 일부분 안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난티나무 2022-03-24 17:55   좋아요 2 | URL
프레이야님~^^
늑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 말씀 들으니 반가워요~ㅎㅎㅎ
종이책을 사랑하는 서재분들~^^

바람돌이 2022-03-24 11: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올리브의 감동이 좀 식으면 루시 바턴을 읽어야겠어요. 오늘도 제가 모르던 책들이 많군요. 왜 이렇게나 세상에는 좋은 책이 많은지말입니다. 보관함은 날로 날로 빵빵해져 갑니다. ^^ 좋은 책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

난티나무 2022-03-24 17:58   좋아요 2 | URL
보관함 넘쳐나는 거 다 비슷비슷할 거 같아요.^^
루시 바턴 이후에 다른 소설들도 보관함에 막 다 담아뒀어요. 저는 <무엇이든 가능하다>를 다음 책으로 읽으려 합니다. 올리브는 <올리브 키터리지>를 한번 더 읽고 <다시, 올리브>로~^^

라로 2022-03-24 14: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루시 바턴을 얼마나 좋아하게 되었는지요!! 난티님도 읽어서 좋아요!! 맞아요!! 설명하지 않는 문체!!! 이렇게 글로 똭 표현해 주시니 아! 그거였나? 싶기도 해요. 막 좋아요!! 이런 표현을 할 줄 아는 난티님도 막 좋고!! 근데 눈을 아꼈는데도 이렇게 마니 읽었어요?? 우왕 나 뭐지?ㅠㅠ

난티나무 2022-03-24 18:02   좋아요 2 | URL
라로님 바쁘신 와중에 책 많이 읽으심서 왜 그러셔요~ㅎㅎㅎ
눈이 너무 건조해서 아픈 거 같아요. 흠흠. 몇 년 전부터 눈의 물기가 확연히 적어졌거든요. 요즘 좀 심한 듯....ㅠㅠ
루시 바턴 읽고 나서 한국 단편 소설을 읽는데 문체 차이가 확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스트라우트가 더 좋아진 것도 있어요.ㅎㅎㅎ 일단 전작 읽기를 해보려고요. <올리브 키터리지>는 다시 한번 읽을려고 하고요. 라로님의 좋아요!!를 좋아하는 난티나무입니당.ㅋㅋㅋㅋ

mini74 2022-03-24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시바턴. 저도 정말 이런 소설 쓴다는게 넘 부럽더리고요 대단해보이고. < 불행은 질병으로 > 저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건강의 빈부격차도 슬펐고요. 리뷰 넘 잘 쓰쎴는데요 난티나무님 *^^*

난티나무 2022-03-24 21:34   좋아요 1 | URL
비슷하게나마 흉내내고 싶은 문체의 소설… 이었어요. ㅎㅎㅎ 필사라도? ㅋㅋㅋ
서재 달력 보고 깜짝 놀라서 ㅎㅎ 읽은 책 정리라도 간단히 하자 싶었어요. 읽은 부분이 적어도 분량이 많지 않아도 좀 써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요.^^;;;
mini74님 고맙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빈 곳 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 도로를 질주하는 동안, 앞에 가는 차가 열심히 달리면서 비켜주어 내가 앞으로 달려갈 수 있듯이 말이다. (속도가 그 빈 곳을 채우는 데 열심이긴 하지만.) 만약 너와 나 사이에 빈 곳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서로에게 질식해 이미 죽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다시 태어나지 말기를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누군가 샴 쌍둥이처럼 붙어 있던 우리의 몸을 칼로 베어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너와 나 사이의 빈 곳이 우리를 각자로 존재하게 하고, 그 빈 곳이 우리를 다 파먹어, 장차 우리를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해줄 것이다. 빈 곳이 우리를 사랑하게 하고, 빈 곳 때문에 우리는 미워한다. 내가 너를 사랑하자, 역설적으로 너와 나 사이의 이 '빈 곳'이 말할 수 없이 무겁다." (41~42, 김혜순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너와 나 사이의 빈 곳은 우리를 얼마나 파먹었을까. 자연스레 '너와 나'의 자리에 남편과 나를 대입한다. 사회가 엉망이어도 나라가 위기에 처해도 근심걱정할 수 있지만 그것은 내가 제대로 살아있어야 가능한 일. 버티고 서있기 위해 매일 부딪혀 싸우는 사람은 그와 나, 둘이라서. 김혜순의 글을 몇 번씩 되풀이해 읽어도 이 '빈 곳'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표현하기 어렵다.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 각자를 존재하게 하는 것, 사랑도 미움도 하게 하는 것. 그렇다면 빈 곳은 그만이 갖고 있는 본질, 그러니까 참자아 같은 건가. 서로의 존재를 뼈아프게 느끼면서 빈 곳이 무거워지는 건가.

그런 말이라면 조금 수긍이 간다. 각자로 존재하지 못해 서로의 기댄 팔을 말없이 갉아먹던 시간이 길었다. 같은 높이로 기댔다고도 할 수 없다. 기대고 싶어 기댔다고도 할 수 없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뻗대어본다. 세상은 모든 것을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고도 일러주지 않았다. 삶의 지혜를 배울 롤모델 따위는 없고 그저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다짐하게 하는 나쁜 모델만 있었다. 무엇이 옳은지, 어떤 관계여야 하는지를 깊이 고민하지 못하고,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분노했으나 그나마도 표출하지 않았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 그게 사랑이겠거니 했던 관계에 진정한 사랑이 새로이 존재할 수 있는지, 마음의 소리를 찬찬히 듣고 들여다보면서 '빈 곳'을 깨우칠 수 있는지, 최근에야 함께 생각하고 표현하고 시도하고 있다. 이 일은 짐작보다 휠씬 힘들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옳다고 믿었고 당연하다고 여겼던 모든 삶의 기준들을 송두리째 바닥에 팽개치고 다시 하나씩 집어 새로운 자리에 꽂아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입당한 사회와 문화의 시선을 버리고 달라진 눈으로, 상대방이 어떤 느낌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 마음을 헤아려야 하기 때문이다.

결혼이라는 두 글자로 남편과 묶인 지 24년째다. 묶인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서로를 제대로 모르는 채 묶여 살았다. '빈 곳'은 있을 수 없다는 마음이 그렇게 했고 그 마음을 거부하는 마음이 그렇게 했다. 지금에서야 서로의 빈 곳을 찾아 돌아보고 인정한다. 너무 늦지 않았을까? 아니다. 이제 겨우 시작이다. 갈 길이 멀고 우리는 겨우 50이다. 서로의 존재를 뼈아프게 느껴서 빈 곳이 말할 수 없이 무거워질 그 때, 너와 나는 비로소 자유로운 춤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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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0 2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3-21 0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3-21 0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3-21 0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모두 밑줄감
(~33쪽까지 읽고)

여성의 시 언어는 남성의 시 언어와 다르다. 여성의 언어는 이제까지 밖에서 주어졌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반동으로부터 터져나온다. 여성의 언어는 본래적으로 위반의 언어인 것이다. 이 위반이 이제까지 있어왔던 서정시의 장르적 특성이라는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것 때문에 여성의 시는 기존의 서정시에 대한 고정관념과 관습적 인식에 대항한다. 그러나 이 위반의 자리에 서면, 시의 온전한 재료이며, 존재 비평인 언어마저도 여성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는 엄혹한 현실이 닥쳐온다. 이렇게 부유하며, 쫓기는 그 자리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이름을 새로이 불러야 하며,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다시 잉태하고, 분만해야 한다. 그것도 사랑의 이름으로. 그 명명의 자리에서 사랑의 아픔으로 뒤범벅된 여성시인의 다양한 발성이 터져나오는 것이다. - P7

나는 여성시인도 바리데기 연희자와 같은 어떤 상징적인 치름, 그 과정을 경험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여성시인에겐 스스로 인지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자신의 여성적 삶의 현실, 혹은 자신 스스로 구축하지 않으면 여전히 남의 현실로만 존재하는 현실을 인지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여성시인은 그 순간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 그 병과 함께하는 죽음을 명명해야 한다는 것을 홀연히 깨닫는다. 그리고 그 아픈 몸으로 죽음과 삶의 소용돌이를 치러낸다. 그런 어느 시간의 점, 여성시인은 ‘여성성에 들린다.‘ - P15

영감은 여기 이렇게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나‘를 통해 ‘나‘를 무(無)로 만드는 기제, 그러나 그 기제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아무말도 할 수 없는 저 바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 바깥이 내게로 여릿여릿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열고 여성성으로 들리자 저 바깥이 착각의 소용돌이인 내 안에서 열리는 것이다. 그 순간 영감이 속삭이기 시작한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아득해지고, 나는 마치 사막 한가운데에 버려져 있는 것만 같다. 먼지처럼 작은 모래 알갱이들만 소용돌이친다. 나는 휘날리는 모래 알갱이들 같은 불모에 휩싸여 사라져버린 나를 부른다. 나는 나와 만났다 헤어지며,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다. 나는 온전한 정신이 들었다 사라졌다 하는 사람처럼 나를 끌어안았다 걷어차며, 걷어찼다가 끌어안는다. 나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방으로 떨어져가며 말의 새끼줄을 스스로 생산해낸다. 그 새끼줄이 나에게서 뿜어져나와 나를 옭아맨다. 그렇게 끊임없이 새끼줄을 뽑아내지 않으면, 또는 그것에 옭아매여 있지 않으면 나는 영감의 소용돌이에 파묻혀 미치거나 아니면 죽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 새끼줄을 끊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그 허방에 목매달려 있을 것만 같다. 어쩌면 나는 앞으로 그 영원한 허방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말한 대로 미쳐버릴지도, 아니 벌써 미쳐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그 절명의 시각, 내가 나라고 믿었던 사랑과 아픔이 모두 깨어난다. 이미지라는 이름으로. 아니면 죽음이 보내온 신기루라는 이름으로. 그때 역설적으로 세계가 다시 내게로 살아나온다. 시라는 이름으로. 아니면 아득한 침묵이라는 이름으로. - P23

특히 여성시인이 ‘나‘를 열어 ‘나‘의 그 알 수 없는 심연의 죽음 속으로 빠지는 경험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심연이 바로 자신의 존재임을, 시를 쓰는 작업이 바로 그 존재성을 자각하는 과정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때, 여성시인은 그 불모의 사막 속에서 ‘나‘를 보내고, 모든 ‘나‘를 불러들인다. 한 주체가 다른 주체를 비추며, 모두를 무성하게 한다. 그것은 존재의 결핍이 아니라 부재를 통한 무수한 존재의 발견이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지만, 그러나 모두 있다. 그곳을 여성시인인 내가 방문하는 것이 내 시의 궤적이다. - P25

여성시인의 영감은 이 지상에서 버려진 존재로서의 자신을 유일하게 생산적인 것으로 치환시켜주는 기제이다. 동시에 버려진 아이를 끌어안고, 그 버려진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확인시켜주는 기제이다. 혹은 죽은 아이를 살려내는 여행을 날마다 감행하는 샤먼처럼 ‘살아 있는 죽음‘ 속으로 스스로 떨어져가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기에 여성시인에게 영감은 남성시인의 관념적인 죽음의 응시, 그 투명한 공간으로의 여행과는 다른 공간으로의 여행을 감행하게 하는, 날마다의 ‘들림‘을 명명한 것이다. 여성시인이 바라보는 죽음, 혹은 무(無) 속에는 언제나 무언가가 들어 있다. 동양 철학이 궁구하던 무(無) 속에 ‘절대적인 없음‘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듯이, 여성적 영감이 끌어당겨서 홀려가는 여행의 공간 속에서는 언제나 버려진 아이의 울음소리가 선명하게 메아리친다. 그 순간, ‘나‘의 죽음은 죽음을 초월해 저 너머로 간다. 저 너머에 있는 죽은 아이인 또다른 ‘나‘를 만나러.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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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22-03-03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요즘 읽는 책들이랑 연결되어 보여요. 여성시학 (강추), 여성 시하다 (아직 안 읽음)

난티나무 2022-03-06 14:03   좋아요 0 | URL
여성 시하다,는 사려고 보관함에 담아두었어요. 두 권 다 읽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