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의 빈 곳 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 도로를 질주하는 동안, 앞에 가는 차가 열심히 달리면서 비켜주어 내가 앞으로 달려갈 수 있듯이 말이다. (속도가 그 빈 곳을 채우는 데 열심이긴 하지만.) 만약 너와 나 사이에 빈 곳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서로에게 질식해 이미 죽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다시 태어나지 말기를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누군가 샴 쌍둥이처럼 붙어 있던 우리의 몸을 칼로 베어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너와 나 사이의 빈 곳이 우리를 각자로 존재하게 하고, 그 빈 곳이 우리를 다 파먹어, 장차 우리를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해줄 것이다. 빈 곳이 우리를 사랑하게 하고, 빈 곳 때문에 우리는 미워한다. 내가 너를 사랑하자, 역설적으로 너와 나 사이의 이 '빈 곳'이 말할 수 없이 무겁다." (41~42, 김혜순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너와 나 사이의 빈 곳은 우리를 얼마나 파먹었을까. 자연스레 '너와 나'의 자리에 남편과 나를 대입한다. 사회가 엉망이어도 나라가 위기에 처해도 근심걱정할 수 있지만 그것은 내가 제대로 살아있어야 가능한 일. 버티고 서있기 위해 매일 부딪혀 싸우는 사람은 그와 나, 둘이라서. 김혜순의 글을 몇 번씩 되풀이해 읽어도 이 '빈 곳'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표현하기 어렵다.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 각자를 존재하게 하는 것, 사랑도 미움도 하게 하는 것. 그렇다면 빈 곳은 그만이 갖고 있는 본질, 그러니까 참자아 같은 건가. 서로의 존재를 뼈아프게 느끼면서 빈 곳이 무거워지는 건가.

그런 말이라면 조금 수긍이 간다. 각자로 존재하지 못해 서로의 기댄 팔을 말없이 갉아먹던 시간이 길었다. 같은 높이로 기댔다고도 할 수 없다. 기대고 싶어 기댔다고도 할 수 없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뻗대어본다. 세상은 모든 것을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고도 일러주지 않았다. 삶의 지혜를 배울 롤모델 따위는 없고 그저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다짐하게 하는 나쁜 모델만 있었다. 무엇이 옳은지, 어떤 관계여야 하는지를 깊이 고민하지 못하고,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 분노했으나 그나마도 표출하지 않았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 그게 사랑이겠거니 했던 관계에 진정한 사랑이 새로이 존재할 수 있는지, 마음의 소리를 찬찬히 듣고 들여다보면서 '빈 곳'을 깨우칠 수 있는지, 최근에야 함께 생각하고 표현하고 시도하고 있다. 이 일은 짐작보다 휠씬 힘들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옳다고 믿었고 당연하다고 여겼던 모든 삶의 기준들을 송두리째 바닥에 팽개치고 다시 하나씩 집어 새로운 자리에 꽂아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입당한 사회와 문화의 시선을 버리고 달라진 눈으로, 상대방이 어떤 느낌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 마음을 헤아려야 하기 때문이다.

결혼이라는 두 글자로 남편과 묶인 지 24년째다. 묶인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서로를 제대로 모르는 채 묶여 살았다. '빈 곳'은 있을 수 없다는 마음이 그렇게 했고 그 마음을 거부하는 마음이 그렇게 했다. 지금에서야 서로의 빈 곳을 찾아 돌아보고 인정한다. 너무 늦지 않았을까? 아니다. 이제 겨우 시작이다. 갈 길이 멀고 우리는 겨우 50이다. 서로의 존재를 뼈아프게 느껴서 빈 곳이 말할 수 없이 무거워질 그 때, 너와 나는 비로소 자유로운 춤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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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0 2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3-21 0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3-21 0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3-21 0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모두 밑줄감
(~33쪽까지 읽고)

여성의 시 언어는 남성의 시 언어와 다르다. 여성의 언어는 이제까지 밖에서 주어졌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반동으로부터 터져나온다. 여성의 언어는 본래적으로 위반의 언어인 것이다. 이 위반이 이제까지 있어왔던 서정시의 장르적 특성이라는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것 때문에 여성의 시는 기존의 서정시에 대한 고정관념과 관습적 인식에 대항한다. 그러나 이 위반의 자리에 서면, 시의 온전한 재료이며, 존재 비평인 언어마저도 여성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는 엄혹한 현실이 닥쳐온다. 이렇게 부유하며, 쫓기는 그 자리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이름을 새로이 불러야 하며,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다시 잉태하고, 분만해야 한다. 그것도 사랑의 이름으로. 그 명명의 자리에서 사랑의 아픔으로 뒤범벅된 여성시인의 다양한 발성이 터져나오는 것이다. - P7

나는 여성시인도 바리데기 연희자와 같은 어떤 상징적인 치름, 그 과정을 경험한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여성시인에겐 스스로 인지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자신의 여성적 삶의 현실, 혹은 자신 스스로 구축하지 않으면 여전히 남의 현실로만 존재하는 현실을 인지하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여성시인은 그 순간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 그 병과 함께하는 죽음을 명명해야 한다는 것을 홀연히 깨닫는다. 그리고 그 아픈 몸으로 죽음과 삶의 소용돌이를 치러낸다. 그런 어느 시간의 점, 여성시인은 ‘여성성에 들린다.‘ - P15

영감은 여기 이렇게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나‘를 통해 ‘나‘를 무(無)로 만드는 기제, 그러나 그 기제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아무말도 할 수 없는 저 바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저 바깥이 내게로 여릿여릿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열고 여성성으로 들리자 저 바깥이 착각의 소용돌이인 내 안에서 열리는 것이다. 그 순간 영감이 속삭이기 시작한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아득해지고, 나는 마치 사막 한가운데에 버려져 있는 것만 같다. 먼지처럼 작은 모래 알갱이들만 소용돌이친다. 나는 휘날리는 모래 알갱이들 같은 불모에 휩싸여 사라져버린 나를 부른다. 나는 나와 만났다 헤어지며, 헤어졌다가 다시 만난다. 나는 온전한 정신이 들었다 사라졌다 하는 사람처럼 나를 끌어안았다 걷어차며, 걷어찼다가 끌어안는다. 나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방으로 떨어져가며 말의 새끼줄을 스스로 생산해낸다. 그 새끼줄이 나에게서 뿜어져나와 나를 옭아맨다. 그렇게 끊임없이 새끼줄을 뽑아내지 않으면, 또는 그것에 옭아매여 있지 않으면 나는 영감의 소용돌이에 파묻혀 미치거나 아니면 죽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 새끼줄을 끊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그 허방에 목매달려 있을 것만 같다. 어쩌면 나는 앞으로 그 영원한 허방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순간을 맞이할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말한 대로 미쳐버릴지도, 아니 벌써 미쳐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그 절명의 시각, 내가 나라고 믿었던 사랑과 아픔이 모두 깨어난다. 이미지라는 이름으로. 아니면 죽음이 보내온 신기루라는 이름으로. 그때 역설적으로 세계가 다시 내게로 살아나온다. 시라는 이름으로. 아니면 아득한 침묵이라는 이름으로. - P23

특히 여성시인이 ‘나‘를 열어 ‘나‘의 그 알 수 없는 심연의 죽음 속으로 빠지는 경험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심연이 바로 자신의 존재임을, 시를 쓰는 작업이 바로 그 존재성을 자각하는 과정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때, 여성시인은 그 불모의 사막 속에서 ‘나‘를 보내고, 모든 ‘나‘를 불러들인다. 한 주체가 다른 주체를 비추며, 모두를 무성하게 한다. 그것은 존재의 결핍이 아니라 부재를 통한 무수한 존재의 발견이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지만, 그러나 모두 있다. 그곳을 여성시인인 내가 방문하는 것이 내 시의 궤적이다. - P25

여성시인의 영감은 이 지상에서 버려진 존재로서의 자신을 유일하게 생산적인 것으로 치환시켜주는 기제이다. 동시에 버려진 아이를 끌어안고, 그 버려진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확인시켜주는 기제이다. 혹은 죽은 아이를 살려내는 여행을 날마다 감행하는 샤먼처럼 ‘살아 있는 죽음‘ 속으로 스스로 떨어져가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기에 여성시인에게 영감은 남성시인의 관념적인 죽음의 응시, 그 투명한 공간으로의 여행과는 다른 공간으로의 여행을 감행하게 하는, 날마다의 ‘들림‘을 명명한 것이다. 여성시인이 바라보는 죽음, 혹은 무(無) 속에는 언제나 무언가가 들어 있다. 동양 철학이 궁구하던 무(無) 속에 ‘절대적인 없음‘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듯이, 여성적 영감이 끌어당겨서 홀려가는 여행의 공간 속에서는 언제나 버려진 아이의 울음소리가 선명하게 메아리친다. 그 순간, ‘나‘의 죽음은 죽음을 초월해 저 너머로 간다. 저 너머에 있는 죽은 아이인 또다른 ‘나‘를 만나러. -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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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22-03-03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요즘 읽는 책들이랑 연결되어 보여요. 여성시학 (강추), 여성 시하다 (아직 안 읽음)

난티나무 2022-03-06 14:03   좋아요 0 | URL
여성 시하다,는 사려고 보관함에 담아두었어요. 두 권 다 읽고 싶어요!
 
[기역이미음] 김칩스_쯔란 - 쯔란

평점 :
절판


왓 저는 왜때문에 이거 맛있죠?!! 서재이웃분들이 겨맛 난다고 하셔서 잔뜩 각오했는데 완전 맛있어!!! ㅋㅋㅋ 이 맛은 호불호 있는 것으로~~~~ 하나만 산 거 후회했슴돠. 또 사고 싶어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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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2-27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술안주는 호불호를 심하게 타는 것 같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난티나무 2022-02-28 02:1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첫 조각 집을 때 심히 긴장!!!!! 근데 반전!!!!!

잠자냥 2022-02-27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잊고 있던 겨맛 ㅋㅋㅋㅋㅋㅋ 이거 아직도 판매하는군요?!

난티나무 2022-02-28 02:20   좋아요 0 | URL
담에 책 살 때 아직 판매중이면 또 살 거예요! ㅋㅋㅋㅋㅋㅋ 겨맛 ㅋㅋㅋㅋㅋ 안 나던데!!!!!!ㅋㅋㅋㅋ

2022-02-28 0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28 0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28 0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브라질 산토스 디카페인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7월
평점 :
품절


향은 아주 좋아요. 볶은 콩 옮겨담아둔 병을 열 때부터~ 맛은 향에 비해 조금 평범하다고 느꼈어요. 가격도 저렴하지는 않은데 맛을 좀더 끌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알라딘 커피 두어 종류 맛보았지만 모두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어요. 미얀 알라딘. 커피집은 아니지만 더욱 분발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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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능 프로그램에 '에이핑크'가 나왔다. 데뷔 10년차 그룹, 새 앨범을 내면서 서로의 얼굴만 봐도 눈물이 난다는 세 명의 이야기를 듣는다. 남자 패널들이 왜 울어 왜 눈물이 많아졌어 신기하다는 듯이 말한다. 나는 그 감정 무엇인지 너무 잘 알겠는데, 그래서 따라 눈물이 나는데. 그건, 그러니까... 그런데 나는 왜 울지? 어느 포인트에 공감을 했지? 곰곰곰... 문득 작년인가 다큐 보면서 뜬금없이 눈물이 솟았던 때가 떠오른다. 산 속에 지은 집에 여자들이 삼삼오오 요가매트를 들고 모여 테라스에서 요가를 하는 장면이었다. 나 왜 울어? 하면서. 거기에 겹쳐지는 며칠 전 경험. 집회에 다녀온 독서모임멤버 한 분의 이야기를 신나게 듣고 나서 다음번 언젠가의 집회에 멤버들 모두 나가서 신나게 놉시다! 하는데 눈물이 주루룩. 아, 나는 그러니까 여성의 모임, 여성 공동체, 이런 관계를 원해왔구나, 싶은 것이, 그동안 혼자서도 잘놀아요를 시전했던 건 실은 외로움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이, 도대체 얼마나 사무치게 그리웠으면 그저 모여서 요가를 하는 장면에도 울고 같이 으쌰으쌰합시다 하는 말에도 울고 그런단 말인가, 싶은 것이, 아주 그동안의 내가 가여워 미치겠다. 지금 내 안에는 외로움이 그리움이 슬픔이 철철철 넘쳐흐르고 있다는 거지. 그래, 그동안 너무 혼자 있었지. 혼자 내 살을 뜯어먹고 있었지. 입을 꾹 다문 채로.

<연대하는 페미니즘> 책을 집으면서 '연대'라는 글자가 새삼 눈에 들어온다. 들어가는 말을 펼쳐 읽으면서, 처음에는 안 보이던 구절이 다시 새로이 보인다.


"한 개인, 한 집단, 한 세대가 겪는 고통은 서로 비교될 수 없다. 각 개인에게 그것은 그 자체로 쓰라린 아픔이다. 그래서 내 고통이 더 크다고 단정 짓기보다 서로의 고통을 말하고, 공감하며, 함께 싸워가야 한다. 개인의 현실, 관심, 문제에 따라 젠더 의제는 전혀 다르게 다가오겠지만, 각자의 자리와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함께 만들어내는 페미니스트 공동체를 나는 소망한다. 이러한 집합적 개인주의(collective individualism)의 구현에 이 책이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과거는 미래를 만든다. 그래서 "역사 없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성 평등한 미래를 소망하는 페미니스트 공동체에게도 역사가 필요하다. 페미니스트의 역사 속에는 시·공간을 가로질러 여성들이 살아온 질곡과 고통의 과거가 들어 있다. 또한 이를 뚫고 투쟁해온 여성 주체들의 능동적인 행동도 드러난다. 역사 속 여성의 경험은 시대를 가로질러 전유되기도 하고, 과거의 고통은 여전히 우리 속에 남아 있기도 하다. 그래서 공유하는 역사는 바로 '연대하는 페미니즘'의 기초가 된다. 가까운 과거의 역사는 더욱 그러하다."

(정현백 <연대하는 페미니즘> 14~15)



"각자의 자리와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가운데 함께 만들어내는 페미니스트 공동체를 나는 소망한다." 여전히 내 안의 뿌리깊은 편견을 떨쳐버리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이 문장을 똑같이 소망한다. 나도 내가 그런 사람이기를 바란다.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진 내 자아들은 그런 사람이지 못할까 봐 겁을 먹는다. 자기검열을 멈추지 않는다. 이런 나부터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쉽지 않다. 내 눈은 타인의 시선에 오래 잠식당했고 점점 나빠지고 있었을 것이다. 결심만 반복하는 거 아니냐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고, 매일의 다짐이 나를 만든다.




"... 이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떄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누구의 언어로 이야기할 것인가가 또 문제가 되는 거예요. 결국 우리는 같은 언어를 찾을 때까지 영원히 같이 못 마주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출발해야 되느냐, 언어도 없고 불안하기도 하잖아요. '이 사람, 나랑 같은 언어를 쓰고 있을까?' '자기한테는 좋은 언어지만 나한테는 좋은 언어일까?' 그리고 시스터후드sisterhood, 자매애라는 것도 일종의 환상일 수 있죠. 우리의 경험이 같으니까 우리는 서로 통할 것이다? 아니에요. 사실은 그 사람이 울어서 내가 그 눈물에 동화된 적도 있을 거고, 그 눈물이 나의 어떤 감정을 건드렸던 것일 수도 있어요. 동일하지 않더라도, 그 감정의 순간이 스쳐지나간 것일 수도 있잖아요.

동질성을 통해서 연대를 마련하려고 하는 그 오래된 습관은 어떤 순간 고립주의를 자처하게 될 수 있어요. 말 통하는 사람들끼리만 연대하는 거죠. 그리고 이렇게 될 수도 있어요. 적에 대한 분노를 자꾸 표출하는 거예요. 적에 대한 분노는 서로 다르더라도 우리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되게 강한 힘이 되거든요. 우리는 언어가 다를 수 있지만, 쟤를 싫어한다는 점에서는 똑같다는 거잖아요. 그럴 때 갑자기 연대가 생기죠. '너랑 나랑 말이 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쟤를 싫어하지. 오케이, 그럼 가자'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로드는 그런 방식은 아니어야 된다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시작해야 될까. 겁도 나고 공포도 생기는데, 로드는 바로 그 약함에서 출발을 권유해요. 힘을 얻기 위해서는 약점을 보여서는 안 되고, 나약해지면 안 되고, 감정적이면 안 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다고 하는 거예요. 직시한다는 건, 그냥 그 순간에 울 수밖에 없다면 우는 거죠. 운다는 건 사실상 수용하고 인정한다는 거죠. 수용과 인정은 공포를 이겨낸 직면이기도 하고요. 나약하지 말라는 건 '네 약한 꼴 보이지 마', 즉 직면하지 말라는 뜻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오랫동안 우리는 공포심을 배웠다는 거죠."

(김은주 <페미니즘 철학 입문> 446~447)




자매애가 환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같은 경험으로 우리를 일반화하지 않기 위하여, 눈물이 나는 것을 그저 공감이라고 치부하지 않기 위하여, 나와 다르다고 배제하지 않기 위하여, 다짐. 먼저 나를 직시하는 일. 만들어진 인연을 배척하지 않는 일. 감사하는 일. <페미니즘 철학 입문>을 꺼내어 석 달에 한번씩 읽어야 겠다고 생각하면서. 칩거하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 그 분들께 소심하게 인사를 전하며.




+ 오늘 시국토론회(2022 페미니스트 주권자행동)에서 발언한 분들 멋있다. 패널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초등학생 때의 경험, 중고등학교에서의 성차별을 말하는 학생들의 모습에 코 찡, 대학생의 결기어린 말에 눈 찌르르, 아 어쩌자고 그렇게 빛나는가요. 초중고 페미니스트라는 말 왜 이렇게 가슴이 벅찬가요. 이제 겨우 입문한 50살 나도 수줍지만 여러분과 이어져 있는 거 맞죠. 이렇게 나 혼자 생각. 분노 속의 감동. "여성 있는 민주주의"!



"여성들의 서로에 대한 돌봄 욕망과 필요는 병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인식해야 우리의 실제 힘을 재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부장적 세계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우리 여성들이 이렇게 실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가부장적 구조 안에서만 모성이 여성에게 허락된 유일한 사회적 권력이 되는 겁니다.

여성들 사이의 상호 의존은 우리 각자 내가 될 수 있는 자유의 길입니다. 이때 '나'는 여성으로서의 효용 때문에 이용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창조적인 존재로서의 '나'입니다. 이것은 수동적인 임be과 능동적인 되기being의 차이입니다.

여성들 사이의 차이를 단순히 관용하겠다는 것은 가장 역겨운 개량주의입니다. 이런 개량주의는 우리 삶에서 차이가 담당하는 창조적 역할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차이는 단순히 관용의 대상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됩니다. 차이는 우리의 창의성이 불꽃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극성polarities과도 같은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성들이 상호 의존의 필요성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동등한 것으로 인정받는 서로 다른 힘들 사이의 상호 의존 속에서만, 우리는 그 어떤 지점이 없는 곳에서도 행동할 수 있는 용기와 자양분, 그리고 이 세상에서 새로운 존재 방식을 추구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오드리 로드 <시스터 아웃사이드> -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 176~177)




이제까지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법을 배운 적이 거의 없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예스라고 하면서 우리 자신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다른 흑인 여성을 친절, 존경 다정한 마음으로 대하는 법도, 단지 그녀가 흑인 여성이기 때문에 그녀에게 짧게나마 긍정의 미소를 띠며 대하는 법도 우리는 거의 배우지 못했다. 우리가 어느 부분에서는 서로의 단점에 가까운 존재이기에, 즉 그것이 우리 자신이기에 서로의 단점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는 법을 배운 적도 거의 없다. 다른 흑인 여성을 칭찬하며 그녀의 특별함을 인정해 준 가장 최근은 언제인가? 우리는 서로를 다정하게 대하는 것이 습관이 될 때까지 서로를 다정하게 대하는 법을 의식적으로 골똘히 연구해야 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던 흑인 여성들의 서로에 대한 사랑을 도난당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를 너그럽게 대함으로써 우리 스스로에게도 너그러워지는 것을 연습할 수 있다. 우리 안의 포용하기 가장 어려운 부분에 너그러워짐으로써 서로에게 너그러워지는 연습을 할 수 있다. 또한 우리 각자의 마음에 있는 용감하고 멍든 어린 소녀에게 마음을 더 많이 쏟아 줌으로써, 뛰어난 존재가 되려고 엄청난 노력을 쏟아붓고 품게 되는 기대를 줄임으로써, 서로에게 너그러워지는 연습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뿐만 아니라 빛 속에서도 흑인 여성을 사랑할 수 있고, 완벽을 기하려는 그녀의 격정적 마음 상태를 다독여 주며, 그녀가 주의를 기울이는 일을 실현할 수 있도록 격려해 줄 수 있다. 이렇게 한 다음에라야 우리는, 그녀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는지를, 그녀가 이 세상을 좀 더 살 만한 미래를 향해 가도록 하는 데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를 더 잘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리라.

(오드리 로드 <시스터 아웃사이더> -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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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2-02-19 23: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드리 로드의 문장 너무 좋네요. 전 아직 읽기 전이라서 얼른 읽고 싶은데 먼저 책을 준비해야겠네요.


자매애가 환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같은 경험으로 우리를 일반화하지 않기 위하여, 눈물이 나는 것을 그저 공감이라고 치부하지 않기 위하여, 나와 다르다고 배제하지 않기 위하여, 다짐. 먼저 나를 직시하는 일. 만들어진 인연을 배척하지 않는 일. 감사하는 일.

난티나무님 위 문장들도 가슴을 파고들고요. 그 다짐과 다짐의 시간들을 저도 기억하려고 해요.
좋은 사유,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해요, 난티나무님^^

난티나무 2022-02-20 08:12   좋아요 2 | URL
책들이 처음 읽을 때와 다시 펼칠 때, 또 다시 볼 때 매번 눈에 들어오는 문장이 달라요. 그만큼 그때그때 제 생각들도 변화하는 것이리라 생각해요. 그러기를 바라기도 하고요.^^ 어떤 한 가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펼친 책에 그 한 가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언니들의 통찰을 마주할 때의 짜릿함이 더 많이 늘어나기를 역시 바라고요.

오드리 로드 넘 좋아요. 동일선상에 자리하지는 않지만(동일선상이라는 단어 선택이 좀 주저됩니다만) 어쩌면 아시아 여성인 우리에게 가장 ‘적절하고 필요한 언니’ 중 한 명이 아닐까 싶어요.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읽을 때도 비슷하게 느꼈는데 오드리 로드의 글이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지더라고요. 이 분의 생각을 풀어주시는 김은주선생님 글도 좋고요. <시스터 아웃사이더> 말고 더 많은 글들을 접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단발머리님께도 감사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오드리 로드 어떻게 읽으실지 벌써 궁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