꺄오 벼룩시장에서 이런 책을! 아 물론 내가 푸코를 읽을 실력은 안 된다.ㅠㅠ 그러나 사다 두면 아이들 중 누구라도 읽겠지.@@ 기욤 뮈소와 마크 레비의 책만 넘쳐나는 벼룩시장에서 정말 뜬금없는 득템. 






















다른 한 권은 지금의 나와 아이들에게 아주 딱 필요하고 유용하리라 생각되는 책이다. (중고등 아이들의 성에 관한.) 저자의 책이 꽤 되는데 한국에 번역된 것이 없다. 이런 책들을 보면 부족한 나라도 번역하고 싶은 마음(만 굴뚝). 끝까지 읽어봐야 어떤지 알 수 있겠지만 느낌상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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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편소포는 무소식이지만 화요일 띄운 항공소포는 무사히 오늘 아침 도착했다. 후덜덜한 배송비를 지불하고 받은 책은 다음과 같다. 





새 책이든 헌 책이든 현관을 통해 들어오는 책들은 알콜세정을 거친다. 이 중 유일하게 중고로 산 <혁명의 영점>을 닦으면서 펼쳐진 페이지들을 보니 얼른 읽고 싶어 안달이 난다. <제2의성>과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읽고 있는 지금 딱 같이 읽으면 좋을 책 같아보인다. 새 책으로 사도 아깝지 않았을 듯. 종이표지가 있었던 듯한데 사라지고 없고 먼지가 많이 묻었다. 

<여성과 광기>에 덧입혀진 종이표지가 없는 건 마음에 든다. 그러고 보니 100자평 남겼어야 했는데 잊어버렸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목차를 펼쳐보고 아 이런 내용이었지 싶다. <소설의 정치사>가 생각나는. 제목 완전 중요하다는 생각. 제본된 책이 두 권이지만 글자가 커서 다행이다. 

모두 기대되는 책들. 이번주에 소포 올 것을 알고도 전자책 두 권이나 대출해 뒀으니 대책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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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10-09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난티나무님 <다락방의 미친여자>제본은 어떻게 구하셨어요?!!😳

난티나무 2021-10-09 19:31   좋아요 1 | URL
좋으신 이웃님 찬스요!!! ^^

다락방 2021-10-09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의 미친여자라니 진짜 좋은 찬스 쓰셨네요 👍🏻👍🏻👍🏻👍🏻👍🏻

난티나무 2021-10-09 22:09   좋아요 0 | URL
유후!! 😁😁😁
 

사랑이라는 이름의 노동


우에노 지즈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가사노동‘이란 개념의 발견은 사람들의 인식에 커다란 발상의 전환을 가져왔다. ‘가사=노동‘이란 개념의 성립은 사람들에게 "가사노동도 노동이다" 라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이론에서 비롯된 개념이란 장치는 인식이라는 영역의 대전환을 초래했다. 본말이 바뀌어 세계가 새로운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난다. 이론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가사노동‘이란 개념이 성립되어 유포되기 이전에는 가사가 ‘노동‘이라고 간주되지 않았다. 가사와 육아에 쫓기는 전업주부인 여성은 비록 ‘피곤한 나날을 보내고 있더라도 세 끼 밥먹고 낮잠 자는 신분이라고 야유당한다.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 생쥐처럼 부지런히 일하고 있어요."라고 이의를 제기하면 "당신이 하고 있는 것은 일 축에도 끼지 않습니다" 라고 일축당하기 일쑤였다. "가사는 일이 아니다" 라는 말을 듣게 되면 "그래요"라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 지금까지의 여성이었다.
그러나 ‘가사노동‘이란 개념은 여성에게 이론적인 무기를 제공했다. 가사노동은 비록 돈이 되지는 않더라도 노동임에는 틀림없고, 그것을 주부가 하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대행시킬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유용하며 불가결한 노동인데도 여성에 대해서 아무런 법적·경제적 보상도 하지 않은 채 무권리 상태로 방치한다면 그것은 부당하게 보수를 지불하지는 ‘부불노동(unpaid labor)‘이 된다.
(중략)
‘사랑‘과 ‘모성‘이, 그것에 상징적인 가치를 부여하여 떠받드는 것을 통해서 여성의 노동을 착취해 온 이데올로기 장치였다는 사실은 페미니스트의 ‘모성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 서서히 드러났다. ‘사랑‘이란 남편의 목적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아 여성의 에너지를 동원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장치이고, ‘모성‘이란 아이들의 성장이 곧 자신의 행복이라고 간주하여 여성들에게 헌신과 자기 희생을 종용함으로써 여성이 자기 자신에 대한 요구를 억누를 수밖에 없도록 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장치였다. 여성이 ‘사랑‘에 높은 가치를 두는 한 여성의 노동은 ‘가족의 이해‘나 ‘남편의 위로‘에 의해 쉽게 보답받는다. 여성은 ‘사랑‘을 공급하는 전문가이며, 이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핀치와 그로브즈는 여자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배려나 보살핌‘이 ‘사랑이란 이름의 노동(a labor of love)‘에 다름 아님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여성이 집안에서 하고 있는 활동이 이떤 이데올로기적 수사로 표현된다 할지라도, 여성은 분명히 자신이 직접 하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대행시킬 수밖에 없는 노동을 하고 있다. 주부는 단지 그것을 ‘사랑‘이란 이름 아래 하고 있는 것이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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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제1편 형성 제3장 성 입문 & 제4장 레즈비언


5주차 부분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 자주 생각했다. '성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서든 (아직도) 금기로 여겨져 입밖에 꺼내어놓을 수 없는 뜨거운 감자 뭐 이런 것. 뜨거운 건 맞나? 아무튼. 생각을 하면서 생각했다. 역시 바닥까지 솔직하기는 힘들겠어.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고 불특정다수에게 그대로 공개되어 어떻게 날아다닐지 모르는 글로는, 어렵겠다. 나는 소심쟁이다, 아직은. 옆지기와도 이런 이야기를 했다. '솔직히' 서로에게 솔직하기도 어렵다. 스스로에게 솔직하기도 아직 어려운데 말이다. 남는 것은... 허공에 뜬구름 잡는 소리거나, 보부아르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이거나. (언제쯤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듣고 의견을 나누는 날이 올까?)




"정상적인 성행위는 사실상 여성을 남성과 종()에 예속시킨다. 공격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거의 모든 동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남성 쪽이다. 이에 반해서 여성은 남성의 포옹에 따를 뿐이다. 일반적으로 여성은 언제나 남성에게 정복될 수 있지만, 그는 페니스의 발기상태가 유지되지 않는 한 그녀를 정복할 수 없다. 처녀막 이상으로 확실하게 문을 닫는 질 경련과 같은 강한 반항만 아니라면, 여성의 거부는 극복될 수 있다. 질 경련의 경우라도 아직 남성에게는 완력에 좌우되는 육체를 상대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남아 있다. 여자는 객체이기 때문에, 그녀가 움직이지 않아도 그 본디 역할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남성들은 자기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여성이 성교를 원하는지 또는 그저 거기에 따를 뿐인지 애써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남성은 죽은 여성과도 동침할 수 있다. 성교는 남성의 동의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 자연적인 결말은 남성의 만족이다. 또한 여성은 전혀 쾌감을 느끼지 못해도 임신이 된다. 게다가 임신은 그녀에겐 결코 성적 과정의 완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 순간부터 그녀는 종()이 요구하는 봉사를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임신·분만·포유(哺乳)의 과정을 통해 천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실현된다." 469~470


자, "정상적인 성행위"는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라. 세상에 '정상'이라고 규정지은 것들은 진정 정상인 것들인가. 우리가 그동안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삶의 기준, 잣대, 가치관 들이 정녕 옳은 것이었나. 그런 생각들 위에서 과연 우리의 '성행위는 정상'인가. "남성은 죽은 여성과도 동침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문장에 대한 증거를 실제의 사건들에서 충분히 보고 듣는다. 충격적으로 들린다면 수많은 강간살인사건을 다시 잘 살펴보자. "성교는 남성의 동의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새롭게 내 머리를 두드린다. !!! "종이 요구하는 봉사" "그것은 ... 천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실현된다."





"원시문명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한결같이 여자에게는 침대가 '헌신'의 장소인 듯이 인식해 왔다. 남성은 선물로 또는 그녀의 부양을 책임지는 것으로 그 헌신에 대한 감사를 대신해 왔다. 그러나 헌신한다는 것은 주인을 갖는 것이며, 그 관계에는 아무런 대등성도 없다. 결혼의 구조 자체가 매춘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즉 여자는 '자기 몸을 주고', 남자는 그 대가를 지불한 뒤 여자를 소유한다. 남성이 여성이라는 약자를 지배하고 소유하는 일을 금하는 걸림돌은 아무것도 없다." 470 


남자들은 흔히 착각하곤 한다. 여자에게 '잘하'는 것이, 아니 '잘해주'는 것이 곧 선물(혹은 돈) 공세라고.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은 선물을 하는 것이라고. 그렇지 않다. 가끔 무엇인가를 사주겠다는 옆지기의 말이 그리 반갑지 않았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나? 알 수 없는 감정들, 기분 나쁨, 내가 벌지 않는 돈, 내가 관리하지 않는 통장... "결혼의 구조 자체가 매춘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이 문장에 반박하지 못하겠다. 이전까지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반박할 수 없다.ㅠㅠ





"남성의 섹스 용어는 군대 용어에서 유래했다. 사랑하는 남자는 병사처럼 혈기가 왕성하고, 그의 성기는 활( )처럼 팽팽하며, 사정할 때는 '발사한다'. 그것은 기관총이며 대포이다. 남성은 공격이니, 습격이니, 승리니 하는 말을 함부로 지껄인다. 그의 성적 흥분 속에는 어떤 영웅주의적 취미가 있다." 471


"여성의 욕망에 섞여 있는 혐오 속에는 단지 남성의 공격성에 대한 공포뿐만이 아니라, 깊은 실망의 감정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좀더 강조할 만하다. 여성의 육체적 기쁨은 성욕이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억제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남성의 경우에는 촉각과 시각을 통한 즐거움이 이른바 성적 쾌락과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

또한 수동적인 에로티시즘 자체의 모든 요소들이 모호하다. '접촉'만큼 애매한 것은 없다." 475


이것 또한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여성의 욕망에 섞여 있는 혐오". 엄청난 사회화와 세뇌. 그리고 모호함. 진짜 모호하다. 나는 모호하다. 탐구해야 할 모호함이다. 




"남자는 여자를 상대로 쾌락을 '얻고', 그것을 여자에게 '준다'. 이런 말 자체가 불평등하다." 485


옳소! '얻는다'라는 표현도 거시기하지만. 행위로 차별하고 언어로 다시 차별하다.




"정신적 저항은 쾌락의 표출을 방해한다." 495


"여자는 자기 자신의 만족만을 생각하는 남자들의 이기주의에도 시달리지만, 또한 그녀에게 쾌감을 주려는 남자들의 지나칠 정도로 노골적인 의지에도 감정을 상한다. '타인을 즐겁게 하는 것은 상대를 지배한다는 의미이며, 남에게 몸을 맡기는 것은 자기의 의지를 포기하는 행위이다'라고 슈테켈은 말한다." 495


"성공적인 성교에 필요한 것은, 소심하면서도 단순하고 우직한 많은 남성들이 생각하듯이 쾌락의 수학적 동시성이 아니라, 성욕의 복잡한 형태를 낳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여성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시간과 기교, 즉 '격렬함'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런 남자들은 여자의 성욕이 여자의 상황 전체에 얼마나 좌우되는지를 모르고 있다." 501


"여자의 성생활이 전개되는 여러 가지 조건은, 단지 이제까지 설명한 사실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사회적·경제적 상황 전체에 달려 있다. 이런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이 이상으로 여자의 성생활을 연구하는 것은 모호한 추상적 이론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검토에서 몇 가지 보편적인 가치가 있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성적 경험이란 사람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존재 조건의 모호성을 발견하게 하는 인생 체험의 하나이다.

그들은 그 속에서 육체로서, 정신으로서, 타자로서, 주체로서 스스로를 경험한다. 이 충돌이 특히 극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여성의 경우이다. 여자는 먼저 자기를 객체로서 파악할 뿐, 처음에는 쾌락 속에서 확실한 자주성을 발견하지못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육체의 조건을 받아들이면서, 자유로운 초월자인 주체로서의 권위를 회복해 나아가야만 한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위험으로 가득 찬, 종종 실패로 돌아가게 될 계획이다. 그러나 여자가 처한 상황 자체의 괴로움과 어려움이, 남자가 고지식하게 속아 넘어가는 그 속임수들로부터 그녀를 지켜 준다. 남자는 공격적인 역할과 오르가슴의 충족된 고독에 내포된 거짓 특권에 속고 있다. 여자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진정한 체험을 쌓는다.

여자는 그 수동적 역할에는 다소 정확하게 적응하더라도, 능동적 개인으로서는 언제나 손해를 보고 있다. 여자가 남자를 선망하는 것은 그가 소유한 기관이 아니라 그 먹이 때문이다. 남자는 상냥하고 애정이 충만한 부드러운 감각 세계, 즉 여성적 세계에서 살고 있는 데 반하여, 여자는 거칠고 살벌한 남성적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이상한 아이러니이다." 508


"여자의 성욕이 여자의 상황 전체에 얼마나 좌우되는지를 모르고 있다." 옆지기와 대화할 때 누누이 말하는 바인데 이걸 남자들이 이해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 같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친밀함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섹스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역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듣고 해체하고 다시 맞추는 작업이 필요한 일이다.




"레즈비언을 '남자를 모방하려는' 그녀의 욕망 때문에 '남성'으로 정의하는 것은, 그녀를 잘못 규정짓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이 현 사회가 규정하는 그대로 남녀 성별의 구별을 받아들임으로써 얼마나 많은 모호성을 불러일으켰는지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사실 남자는 오늘날 '적극적'인 것과 '중성적'인 것, 즉 남성과 인간을 대표하고 있다. 한편 여자는 단지 소극적인 것, 즉 여성적인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여자가 인간적인 존재로서 행동할 때마다, 세상은 여자가 남성처럼 행동한다고 말한다. 여자의 스포츠·정치·지적 활동과, 다른 여자에게 갖는 여자의 욕망은 '남성적 저항'으로 해석된다. 사람들은 여자가 고려하는 자기 초월적 가치들을 거부한다. 그래서 주체적인 태도를 취하는 여자는 비본질적인 선택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해석의 기초가 되는 중대한 오해는, 인간 여성은 '여자다운' 여자가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세상이 인정한다는 데 있다. 이 여자다움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성애자거나 어머니인 것으로 아직 충분치 않다. '참다운 여자'란 전에 카스트라토(거세된 남자 가수)들이 그랬던 것처럼 문명이 만들어 낸 인공적 산물이다. 교태와 순종 같은 이른바 여자의 '본능'은, 남자에게 남근적 자존심이 불어넣어지는 것처럼 여자에게 불어넣어진다. 남자라고 해서 반드시 남성적 사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여자 역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그렇게 순종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될 충분한 까닭들이 있다." 513


'제4장 레즈비언' 부분은 따로 덧붙일 말이 없다. 513쪽 구절을 인용한다. 아직 잘 모르기도 해서 동성애와 트랜스젠더에 대해서는 더 공부가 필요하다. 처음엔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점차 문제가 복잡해지는 걸 느낀다.


***

이렇게 1권 읽기가 끝났다. 2권이 기대되면서 동시에 겁난다. (라고 써놓고 오늘 화요일이라 2권 앞부분 읽는데 재미있으면서 쑥쑥 읽히면서 역시 뼈때리고 그런다. '성'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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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10-05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리뷰 쓰기가 참 어렵더라구요. 뼈 때리는 글. 너무좋죠?!! 1권 클리어 수고하셨습니다ㅎㅎ👍👍

난티나무 2021-10-05 23:55   좋아요 1 | URL
그러니깐요! 왤케 뭘 쓰기가 어렵죠?!^^;;;;;; 뼈 아파요.ㅎㅎㅎ ㅠㅠ 😍😍😍😅😅😅

막시무스 2021-10-06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많으셨습니다! 아직 읽지않은 부분이지만 덕분에 예습 잘 했습니다! 2권도 화이팅 하십시요!ㅎ

난티나무 2021-10-06 17:46   좋아요 1 | URL
넵 막시무스님도 화이팅!!!! ㅎㅎㅎ 👏👏👏👏👏

얄라알라 2021-10-09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대용어..찾아보면 더 많겠네요. 함께읽기 으쌰으쌰 응원드립니다.

난티나무 2021-10-09 01:07   좋아요 0 | URL
얄라알라북사랑님, 응원 고맙습니다~^^
 














동서문화사 2권을 시작했다. 프랑스어 원서가 있지만 읽어낼 실력이 안 되기에 한글판으로 읽으면서 아주 간혹 궁금한 문장을 찾아 비교해보곤 한다. 그런데 간혹의 그 찾기에서 좀 걸리는 번역이 눈에 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성행위는 여자가 남자에게 하는 ‘헌신‘이라고 여겨진다. 남자는 자기의 쾌락을 '받고', 그 대신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여자의 육체는 파는 물건이다. 여자에게 자기 육체는 활용할 수 있는 자본이다." 539


이 문장들에서 눈에 띈 단어는 '헌신'과 '파는'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On admet comme jadis que l‘acte amoureux est, de la part de la femme, un service qu‘elle rend à l‘homme; il prend son plaisir et il doit en échange une compensation. Le corps de la femme est un objet qui s‘achète " 


헌신의 경우, 넓은 의미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치자. 서비스와 헌신. 

"여자의 육체는 파는 물건이다"라는 문장의 원문에서 사용한 동사는 se vendre 가 아니고 s'acheter 이다. 그렇다면 '팔다'의 의미보다는 '사다' 혹은 '제공하다' '거래하다' 등의 의미가 더 강조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물론 문장의 주어가 여자가 아니고 여자의 몸이긴 하지만, 어쨌든 파는 물건,이라는 말에는 파는 행위의 주체가 여자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해석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여자의 육체는 파는 물건이다"라는 문장은 남성&세간의 시선에서 바라본 문장이다. 이런 생각. 이렇게 생각하니 "남자는 자기의 쾌락을 '받고' " 도 거슬리네. 쾌락을 '취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 

을유 개정판에서는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궁금하다. (갖고 계신 분들 안 귀찮으시면 한번 찾아봐 주세요. 2부 2편 상황 제1장 기혼 여성 앞부분입니다. 동서판 2권 539쪽.)


번역은 참 어렵다. 몇 문장이라도 우리말로 바꿔보는 일을 해보면 느낄 수 있다.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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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04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0-04 2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