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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진 세계 - 2004년 퓰리처상 수상작
에드워드 P. 존스 지음, 이승학 옮김 / 섬과달 / 2024년 1월
평점 :
이 소설은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 노예제도가 서슬 퍼런 기세를 뻗치고 있었던 1850년대 버지니아 주 안에 작가가 만든 가상의 지역 맨체스터 카운티가 배경이다. 배경만 들어보면 무슨 이야기를 할지 딱 감이 오지 않는가? 인종차별, 백인이 흑인 노예에게 잔인하게 행하는 폭력, 흑인 노예의 비참한 삶 등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어두운 역사를 이 소설은 아프게 다시 한 번 보여 줄 거라고 나는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책을 펼쳐보니 이 소설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 예상보다 더 큰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33명의 흑인 노예를 소유하고 큰 농장을 가지고 있던 31세의 헨리 타운센드가 죽는 것으로 이 소설은 시작한다. 헨리의 아내 캘도니아는 남편이 죽자 노예들과 농장 관리를 맡게 되었고 캘도니아의 어머니 모드 뉴먼은 마음 약한 캘도니아가 유산이자 재산인 노예들을 엄격하게 관리하지 못 할 까봐 걱정을 한다. 캘도니아의 시부모이자 헨리의 부모인 오거스터스와 밀드레드는 흑인 노예를 거느리던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겨 아들 부부가 살던 좋은 집을 놔두고 흑인 노예 거주지에서 잠을 잔다.
지금까지 언급한 이들 모두는 다 흑인이다. 그러니까 흑인 부모가 낳은 흑인인 헨리는 흑인인 캘도니아와 결혼했고 33명의 흑인 노예를 소유하고 있다가 죽었다는 것이다.
이게 가능하다고? 흑인이 흑인 노예를 소유하는 일이?
나는 초반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 혼란스러웠다. 이 소설을 흑인 작가가 쓰지 않았다면 많은 논란에 휩싸였을 거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니까 백인의 잘못을 덜기 위해서 흑인도 흑인 노예를 소유 했던 적이 있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거 아니냐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책을 읽어 갈수록 나의 혼란은 점점 가라앉고 작가가 이런 세계를 다루고 있는 이유에 대해 납득하기 시작했다. 흑인이 흑인 노예를 소유했다는 당시의 기록이 실제로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에서 이게 역사적인 사실인지 아닌지는 그렇게 중요하진 않아 보였다는 거다. 중요한 점은 노예제도라는 시스템이 굴러가는 세계에서 사회 계급의 맨 끄트머리를 흑인 노예가 담당하는 사회란 어떤 사회인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만드는지를 이 소설은 다루고 있었다. 인종 문제를 포함해서 더 넓게는 사회 계급과 인간의 문제까지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소유 할 수 있다고 법으로 정해진 사회에서는 남편이 부인을 소유할 수 있고 아들을 사올 수도 있다. 오거스터스 타운센드는 자기 자신을 백인 노예주에게 돈을 지불하고 사서 해방 노예가 되었다. 아직 부인 밀드레드와 아들 헨리는 노예인 상태라 오거스터스는 돈을 벌어서 일단 부인만 주인에게서 사와서 자신의 노예로 서류에 올린다. 그리고 열심히 돈을 벌어 몇 년 후 아들 헨리도 사와서 드디어 자신의 노예로 서류에 올릴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한 가족이 서류상으로는 가족이 아니라 오거스터스와 그의 재산인 노예들로 기입되어 있다는 말이다. 참으로 기가 찰 세상이지 않은가? 이후 헨리는 쭉 자신의 아버지 재산으로 서류에 올라있게 되는데, 이는 노예가 해방되면 자신이 노예로 있던 지역을 떠나야 한다는 법 때문이었다. 헨리를 해방하면 헨리는 가족이 있는 맨체스터 카운티에서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헨리 타운센드는 이러한 세계에서 성공을 꿈꾼다. 이 세계에서 성공이란 부를 얻고 노예를 거느리는 삶이다. 어릴 때부터 헨리를 귀여워했던 백인 주인 윌리엄 로빈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땅을 사고 흑인 노예 모지스를 사들인다. 노예의 노동력은 헨리를 점점 부유하게 했고 더 넓은 땅과 더 많은 노예를 사들일 수 있게 했다.
그러면 헨리는 정말로 이 노예 제도가 지탱하는 세계에서 성공한 사람이었을까?
흑인 노예를 거느리고 넓은 땅의 주인이었지만 헨리는 여전히 흑인이라는 정체성에서 자유롭지 못 하다. 그 당시 시스템 안에서 흑인이라는 정체성은 노예를 뜻했다. 실제로 헨리는 서류상으로 자신의 아버지의 노예이기도 했고, 현실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전 백인 주인 윌리엄의 비호아래에 놓여있었다. 결코 부를 가졌다고 해서 완벽한 자유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윌리엄이 죽기라도 해서 세상에 없다면 헨리는 길을 가다가 밉보인 백인에 의해 납치되어 노예로 팔려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세상에 살고 있던 것이다.
오랫동안 자유인으로 살고 있던 헨리의 아버지 오거스터스가 언젠가 평소 그를 질투했던 순찰 대원에게 잡혀서 노예로 팔려갔듯이 말이다.
이 소설 속에는 헨리 같이 흑인이면서도 흑인 노예를 소유 하고 있는 부유한 흑인들이 여럿 등장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백인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 또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노예제도에서 벗어나거나 반항하려 하지 않고 그것을 적극 이용해서 결국 제도를 더욱 단단하게 하는데 이바지 하는 흑인 계층이 만들어 졌지만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면 백인들은 그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오거스터스의 실종 신고가 조용히 묻히게 되듯이.
흑인 노예주의 삶도 까딱하면 불안해 질 수 있는데 흑인 노예의 삶이란 어떻겠는가?
이 소설은 헨리가 소유하고 있던 흑인 노예들의 삶을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건조하게 벌어진 사건들만 나열하는 방식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대부분이 가족과 뿔뿔이 흩어져 여기저기 팔려 다니다가 헨리의 농장까지 온 사연들이다. 몸이 축나는지도 모르고 일만 하다가 밭에서 죽는 고아 소년의 사연도 나오고 도망치다가 잡혀서 귀가 잘리는 노예의 사연도 나오고 노새에게 걷어 차여서 머리를 다쳐 미쳐버린 노예의 사연,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팔리길 원했지만 결국 찢어져서 팔리고 오열하는 노예의 사연도 있다.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고 재산이라 그들에게도 헤어질 수 없는 가족이 있다는 사실은 사고 팔리는 과정에서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그저 물건을 떼다 팔 듯 튼튼한지, 오래 사용할 수 있는지, 이정도면 가성비가 괜찮은지를 따질 뿐이다.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이렇게 글로 읽으니 인간에게 값이 매겨진다는 사실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하던지......
인간이 인간을 사고 팔 수 있게 법으로 보호 받고 있는 사회에서는 인간을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는 왜곡된 인식이 사회의 바탕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노예뿐만 아니라 그것에 동조하는 인간들 까지도 모두 제대로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없다. 인간을 일상적으로 주종의 관계로 나누는 사회에서 진정한 관계가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맨체스터 카운티의 최고 부호이자 노예를 100명이상 소유하고 있는 윌리엄 로빈스는 자신의 노예를 부인보다 더 사랑해서 거의 부부처럼 지내면서 자식도 낳았다. 물론 자식들은 흑인이다. 윌리엄은 노예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노예의 입장에서 윌리엄은 달아나고 싶은 존재였다. 아무리 몇십 년간을 부부같이 지냈다고 해도 그 둘의 관계는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카운티의 보안관 존 스키핑턴은 개인적으로는 노예제를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보안관으로서 노예제를 공고히 지키기 위해 일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 그에게는 사촌이 결혼 선물로 준 미너바라는 어린 소녀 노예가 있었다. 스키핑턴 부부는 미너바를 딸처럼 키웠다. 그러나 정작 미너바는 기회가 오자 스키핑턴 가족으로부터 도망친다. 미너바의 입장에서는 주인 부부가 자신을 딸처럼 여긴다고 했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일상적인 말투, 의식하지 않고 쓰는 그 단어들에서 그녀를 노예 취급하는 의식이 묻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결코 부모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이토록 노예제도가 버티고 있는 비인간적인 사회에서는 사랑도 선의도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고 이 소설은 다양한 사회 계층의 사람들의 사정을 들여다보며 보여주고 있다.
사실 이 소설은 쉽게 읽히지 않았다. 한 인물에 대해 현재를 묘사하고 있으면 갑자기 과거와 미래의 서술이 끼어든다. 한 문단 안에 과거 현재 미래가 한꺼번에 쏟아지기도 한다. 그래서 이러한 서술 방식에 적응이 좀 필요했다. 빨리 읽어 나갈 수 없어서 조금 답답한 마음도 들었지만 다 읽고 나서는 좋은 경험을 했다고 느꼈다.
노예제도가 있는 사회란 어떤 사회인지, 지금도 인종 차별이 심하지만 노예 제도와 인종 차별이 세트로 묶여 있는 사회에서 흑인으로 살아가는 삶이란 어떠했을지 아프게 느끼기도 했다.
이 소설은 인간의 감정을 세세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는다. 당시에 그랬을 거 같은 사실 같은 상황과 사건을 나열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고 그것을 어떻게 느끼는가는 독자의 몫이었다. 감정을 강요하지 않고 있었던 상황만 봐라 하는 식. 이런 스타일이 오히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이 소설로 작가 에드워드 P. 존스는 퓰리처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장편 소설 소식은 20년째 없다고...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은데 아쉬운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