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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의 삶, 책들의 운명 ㅣ 걸작 논픽션 18
수전 올리언 지음, 박우정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10월
평점 :
수년전에 “난초 도둑”을 읽고 작가 수전 올리언이 쓴 책은 다 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난초 도둑”은 난초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관심도 없던 내게 난초 수집이라는 신기한 취미의 세계와 그것에 몰두하는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재밌는 책이었다. 비록 나는 여전히 난초를 기를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난초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다는 것도 큰 수확이었다. 덤으로 미국 플로리다 늪지대까지도 글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서 아직도 많이 기억에 남는 책이다.
그래서 수전 올리언의 이 책 “도서관의 삶, 책들의 운명”도 망설임 없이 읽게 되었다.
올리언은 어릴 때 엄마와 동네 도서관에 갔던 추억이 많다고 한다. 엄마와 도서관에 가서 각자의 취향에 맞는 책장을 거닐다가 책을 한 아름 대출해서 집에 가는 차안에서 빌린 책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일상적인 기억들, 만약 직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면 사서가 되겠노라 말하곤 했다는 엄마에 대한 기억들. 이 모든 기억들로 올리언은 “나를 키운 건 도서관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학을 가고 나서 책을 집에다 사 모으게 되면서 한동안 도서관이라는 장소를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LA로 이사를 와서 초등학생 아들 과제를 위해 LA중앙도서관에 같이 갔다가 수십 년 전 엄마와 도서관을 다니던 그때 그 시간과 장소로 되돌아 간 듯, 그 시절의 기억이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한다.
도서관을 느긋하게 돌아다니며 책을 고르는 느낌, 연필심의 사각사각 소리, 사서들이 밀고 다니는 북 카트 소리 등등 모든 것이 예전에 엄마와 다니던 도서관에서 느꼈던 그대로를 현재, 어린 시절 동네와는 아주 멀리 떨어진 이곳의 도서관에서 느꼈다고 작가는 말한다.
시간이 도서관 안에서 멈춘 건 아니었다. 그저 시간이 도서관에 붙잡히고 수집된 것 같았다. 모든 도서관에 내 시간, 내 인생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시간까지. 도서관에서는 시간이 둑으로 막혀 있었다. 그냥 정지된 게 아니라 저장되어 있었다. 도서관은 이야기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찾으러 오는 사람들이 고여 있는 연못이다. 불멸을 살짝 엿볼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다. (24쪽)
LA중앙도서관에서 옛 추억에 젖어 있던 올리언은 이곳에 큰 불이 나서 책들이 홀랑 다 타버린 적이 있었고 아직도 어떤 책에서는 그때의 화재 냄새가 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렇게 큰 불이었다면 같은 미국인으로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도통 기억 속에 그 불에 대한 것이 전혀 없어서 의아하게 생각하며 그때의 기록을 뒤지기 시작한다.
1986년 4월 29일. LA도서관에 화재가 난 날이다. 하지만 이날 주요 뉴스 매체들에서는 도서관 화재 소식보다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 소식이 뉴스를 덮고 있던 시기였다. 도서관 화재는 뉴스거리에서 뒷전으로 밀려났지만 어쩐지 모든 걸 황폐화 시키는 원전 사고와 책을 학살하는 도서관 화재가 하필 같은 날 발생 했다는 것은 우연이겠지만 의미심장해 보였다.
불은 낮 동안 7시간을 활활 타올라 도서관의 책 거의 100만권을 희생시켰다. 다행히 도서관 안의 사람들은 대피를 해서 아무도 다치지 않았지만.
이 책은 LA도서관 화재가 있었던 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왜 불이 났는지, 불을 끄고 나서 도서관은 어떻게 재건했는지를 관계된 사람들의 인터뷰와 기록된 자료들을 바탕으로 추적하는 내용이 주요한 한 축을 이룬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고 LA도서관이 세워지게 된 역사, 그곳의 사서들, 건축가, 도서관의 이상한 소장품들, 책을 불태웠던 역사들, 오늘날 도서관이라는 장소에 대한 고찰, 도서관이 앞으로 어떻게 공공의 장소로 시민들과 함께하게 될지 그 나아갈 방향까지 도서관에 대한 유용하고 흥미로운 주제들로 이야기를 뻗어 나간다.
일단 도서관에 왜 불이 났을까 궁금하지 않은가?
유명 건축가 버트럼 굿휴에 의해 설계된 LA중앙도서관은 1926년에 문을 연 건물이다. 1986년 화재 당시 이미 60년이나 된 낡고 늙은 건물이었다. 에어컨도 설치할 수 없어서 LA의 그 뜨거운 날씨를 선풍기로 식혀야 했고 옛날식 전기배선은 많은 전기량을 감당할 수 없어서 서고의 조명은 늘 어두컴컴했다. 사서들은 광부들이 쓰고 다니는 후레쉬를 장착하고 책을 찾으러 다녔다고 한다. 옛날에 지은 건물이라 서고는 화재에 대한 방비가 되어 있지 않기도 했다.
이런 상태의 건물에 작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불은 순식간에 책장을 덮었고 종이 책들은 그냥 불쏘시개가 되었다.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꽉 막힌 서고는 오븐의 역할을 해서 불이 1300도 넘게 올라가게 했다. 당시 소방관들은 도서관의 불이 빨갛지도 파랗지도 않은 무시무시한 투명한 불이었다고 증언한다. 이 불은 건물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받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물을 붓고, 서고 여러 곳에 구멍을 뚫어 공기가 통할 수 있게 하면서 겨우 진압되었다. 무려 7시간을 활활 탄 후였다.
불의 시작은 누군가의 방화였다고 검사단은 발표한다. 하지만 심증은 있지만 증거가 없었다. 사서들이 수상한 인물이 있었다고 공통으로 증언한 인물이 특정되었지만 어디에도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이 화재는 여전히 지금까지 왜 일어났는지 모르는 상태라고 한다.
여기서 해리 피크라는 독특한 인물의 이야기가 나온다. 방화범이라고 지목되어서 구치소에 가두기도 했던 인물이다. 금발에 잘생긴 얼굴로 누구에게나 호감을 샀지만 엄청난 거짓말쟁이였다고 한다. 배우 지망생이기도 한 이 젊은 청년은 말하는 족족 거짓말이었지만 그래도 순수한 구석이 있었는지 작가가 그 당시 해리 피크를 알고 지낸 사람들을 인터뷰 할 때마다 하나같이 사랑스러운 인물이었고 동정을 살 만한 사람이었다는 말을 듣는다.
어쨌든 해리 피크는 처음에는 자신이 도서관에 불을 질렀다고 했다가 또 아니라고 했다가 알리바이를 이리저리 바꾸어 말하면서 검사관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하지만 그가 이토록 계속 거짓말을 하는데도 잡아넣을 수가 없었던 이유는 결정적인 증거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란다.
그가 방화범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해리 피크라는 독특한 인물을 알게 된다. 작가의 취재로 그의 가족사와 교제했던 남자 친구들까지도 알고 나니 해리 피크라는 인물에 대해 얼추 그려볼 수 있게 된다. 비록 글로만 읽는 것이지만 이렇게 한 인간에 대해, 그것도 어디서도 만나볼 수 없는 독특한 인간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건 언제나 흥미롭다.
그런 점에서 초기 LA도서관의 여성 시 사서들에 대한 이야기도 아주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LA도서관은 1880년대에 18살의 메리 포이라는 여성을 시 사서로 임명했다. 시대를 생각한다면 나이도 어리지만 여성이라는 점이 파격적인 행보였다. 메리 포이는 도서관을 아주 철저하게 잘 운영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만 두라는 통보를 받았는데 당찬 메리 포이는 순순히 그만 두지 않고 신문에 도서관위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쓰고 나서 그만 두고 교사가 되어서 이후 여성 참정권 운동에 뛰어들었단다.
그 후 테사 켈소 라는 여성이 시 사서가 되었는데 그녀는 당시 있었던 도서관 회비를 없애고 더 많은 사람에게 도서관을 개방하는 것에 힘썼던 인물이라고 한다. 도서관 학교도 설립하는 등 도서관을 현대화 하려고 노력한 사서였다. 하지만 풍기 문란한 책을 도서관에 구입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는데, 테사 켈소는 이를 참지 않고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걸고 승소를 하기도 했지만 그 사건으로 도서관 시 사서 자리에서는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또다시 메리 존스라는 여성이 시 사서로 임명된다. 그녀는 도서관을 안정적으로 잘 발전시킨 인물이었다. 하지만 시 사서는 남성이 해야 한다는 도서관위원회의 급조된 방침에 따라 해고 통보를 받는다. 메리 존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출근을 했다고 한다. 이미 시 사서로 내정되어 있던 찰스 러미스라는 인물이 있는데도 굽히지 않고 계속 출근해서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서를 할 수 없다는 이유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 소식을 듣고 메리 존스를 지지하는 여성들이 거리에 나와 시위를 벌이기도 했지만 역부족으로 메리 존스는 물러났다고 한다.
1880년대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LA도서관의 여성 시 사서들의 행보는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용감하고 당찬 행보였다고 볼 수 있다. 부당한 해고에 수그러들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저항 하는 모습들이 참 멋있었다. 그런 거 요즘에도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는가...이토록 멋진 언니들이 LA도서관을 발전시켜왔구나!
이 책을 읽으며 LA도서관 사서들이 하는 독특한 업무에 대해서도 알게 되는데 그건 바로 인간 초록창 지식인 역할이었다. 인터넷이 없었을 때 사서들은 무엇이든 물어보면 대답해 주는 전화를 받는 업무를 했다고 한다. 물론 지금도 하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도서관 사서에게 전화해서 별에 별걸 다 물어본다고 한다. 기본적인 지식들은 물론이고 애 이름을 뭐로 지을지 장례식장 예절은 어떤 게 있는지 등등 시시콜콜한 생활의 궁금증들도 다 물어보는 전화를 하고 사서들은 성실히 대답을 해 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전화는 지금 인터넷이 이렇게 활성화 되어있는 현재까지도 운영한다고 한다. 인터넷을 못 하는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이 주로 전화를 한다고.
작가가 실제로 도서관에 가서 사서들을 인터뷰하고 있으면 마주치는 이용객들이 사서가 인간 백과사전이라도 되는 듯 지식을 물어보는 사람들을 마주치기도 한다.
미국의 사서들 이미지는 그렇구나. 나는 이때까지 도서관을 이용하면서 사서들에게 책을 찾아달라는 것 외에 뭔가를 물어보려고 했던 적이 전혀 없었는데... 미국은 사서들이 인간 백과사전 취급을 받고 있었다! 이 책의 사서들은 그것에 대해 불편하다는 인식 보다는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어떻게든 책을 찾아서 대답을 잘 해 주고자 하는 모습들을 보인다.
이런 것도 이 책을 읽고 알게 된 생경하지만 재밌는 경험이었다.
다시 도서관 화재로 넘어가서, 그래서 도서관의 책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어떻게 이들을 복원 했을까? 그나마 불에 타지 않고 물에만 젖은 책들은 그 당시 냉동고로 보내졌다고 한다. 곰팡이가 피지 않게 하려는 선택이었다. 어마어마한 분량의 책들이 냉동 해산물들과 한 방에 들어가 한동안 있었단다. 그러고 나서는? 이 책을 읽어보면 어떻게 책들을 녹여서 복원 했는지, LA도서관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등등을 알게 된다.
화재라는 주제 외에도 재밌는 부분이 많다.
일테면 얼마나 다양한 개인의 소장품들이 도서관으로 기증되어서 역사의 기록물로 남겨지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 보면 궁금증이 조금 풀릴 것이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도서관에 대한 추억들을 생각해 봤다. 내 기억 속에 등장하는 최초의 도서관은 초등학교 저학년 쯤 언니와 함께 갔던 도서관이다. 내가 책을 읽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도서관 매점에서 빵을 사먹은 기억은 있다. 그리고 친구들이랑 가서 라면을 사먹은 기억도 있고. 아니 무슨 도서관에서 먹은 기억밖에 없는지.
조금 더 떠올려 보면 도서관에서 글짓기 수업도 했던 거 같고 피아노도 쳤던 거 같다. 도서관에서 하는 프로그램에서 소풍도 갔던 기억도 있고. 어릴때 도서관에서 책 대출 뿐만 아니라 다양한 활동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까지도 열심히 도서관을 다닌다. 비록 빌려온 책을 거의 읽지 못 하고 반납하기 일쑤지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도서관은 내 삶에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도서관 가는 발걸음은 늘 설렌다.
그래서 이 책의 작가 수잔 올리언이 도서관에서 엄마와의 추억을 떠올리는 장면에 많이 공감했다. 그리고 도서관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저장되어 있다는 것에도.
애정을 가지고 도서관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여러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성실하게 책으로 엮어낸 이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
도서관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