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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 플레저
클레어 챔버스 지음, 허진 옮김 / 다람 / 2022년 7월
평점 :
날도 덥고 요즘 책에 집중하기도 힘들어서 가벼운 소설을 읽고 싶은 마음으로 도서관에서 서성이다가 책 표지 색깔이 예뻐서 집어 들었다. 책날개에 있는 작가 소개에 따르면 영국에서 1999년에 발표한 소설이 올해의 로맨틱 소설로 뽑혔던 적이 있었다나. 그 후 여러 소설을 쓰고는 오랜 기간 침잠해 있다가 이 소설 “스몰 플레저”는 무려 10년 만에 발표한 작품이란다. 나는 이런저런 설명보다는 올해의 로맨틱 소설에 뽑혔었다는 첫 문구에 혹해서 그렇다면 이 소설도 로맨틱 소설일 확률이 크고, 로맨틱 소설=가벼움 이라는 나만의 편견 가득한 공식에 의해서 흔쾌히 읽어보기로 했다.
근데 처음 몇 장 읽어보니 딱 감이 왔다. 가볍고 흔한 로맨스 소설이 전혀 아니구나 하고... 이 책 문장이 정말 좋은 거다. 가벼운 외피를 덮고 있긴 하지만 툭툭 무심하게 던지는 섬세한 문장들에 감격해서 나는 결국 책을 사고야 말았다.
읽어 나가면서는 문장도 좋았지만 특히나 다양한 여성의 삶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에 공감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이 더욱 흡족하게 다가왔다.
1957년 런던 외곽의 작은 지역 신문사 기자로 일하고 있는 진은 39살 독신 여성으로서 늙은 어머니를 부양하며 살고 있다.
진의 어머니는 간섭이 심하고 의존적이라 진의 퇴근 후의 시간과 휴일을 옭아맨다. 39살 독신 여성이지만 진은 혼자만의 자유로운 시간이라고는 없다. 어머니가 목욕을 하는 고작 30분 정도가 그녀에게 허락된 해방의 시간이고 그 짧은 순간을 즐기는 것에 기쁨을 느낀다. 이토록 진의 삶에서 즐거움은 아주 작은 것들이었다.
하루의 첫 담배, 일요일에 점심식사를 하기 전에 마시는 셰리 한 잔, 일주일 동안 쪼개 먹는 초콜릿 바 하나, 봄의 첫 히아신스, 단정하게 잘 다려서 개어놓은 여름 향기 나는 빨래, 눈 덮인 정원, 보물 서랍에 넣으려고 충동 구매한 문구 (456쪽)
이런 작은 즐거움들로 기운을 차리고 살아가던 진의 삶에 새로운 사건이 다가오는데 그것은 바로 신문사 앞으로 온 편지 한통에서 시작된다. 그레천이라는 여성이 10년 전 순수하게 처녀 생식으로 아이를 낳았다고 주장하는 믿기 힘든 사연이 그 내용이었다. 진은 이 처녀 생식에 대한 제보를 조사하고 기사를 쓰는 일을 맡게 되면서 사연의 주인공 그레천과 그녀의 가족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10대 시절 관절염으로 수녀들이 운영하는 요양원에 입원한 적이 있던 그레천은 그곳에서 퇴원하고 나서 임신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요양원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확실한데 그레천은 순진무구하게도 자신은 전혀 남자와 관계가 없었다고 확신한다.
아름답고 이국적인 외모의 그레천과 그런 그녀와 똑 닮은 10살 된 딸 마거릿을 만나본 진은 그레천이 딱히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다고 느낀다. 게다가 그레천의 남편 하워드 까지도 아내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이 가족은 진의 눈에는 그레천의 정갈한 살림 솜씨로 빚어진 안락한 집과 자상하고 따뜻한 남편 그리고 예쁘고 똑똑한 딸이 있는 그야말로 교외의 이상적인 가족의 표본처럼 보인다. 진은 그레천의 처녀생식 주장을 그저 믿어 주고 싶을 정도로 이 가족에게 매료된다. 그리고 어느새 마거릿에게는 비공식 이모가 되고 하워드와는 서로 비밀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 이상의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진은 마거릿을 향한 모성애와 하워드를 향한 사랑으로 행복과 양심의 가책을 동시에 느끼며 이 가족의 삶을 점점 더 가까이에서 지켜본다. 그러자 처음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그레천이 가족 내에서 그리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 채게 된다. 알고 봤더니 이 가족은 이상적인 완벽한 가족이 아니었다. 그레천과 하워드는 부부관계 없이 마치 삼촌과 조카 사이처럼 살고 있는 겉모습만 부부였던 것이다.
어쩌면 이들 또한 진과 마찬가지로 그저 안락한 가정이라는 작은 즐거움들에 의지한 채 자신들의 근본적인 행복을 유예하며 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처녀 생식이라는 미스터리를 조사해 나가는 와중에 진이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성들이다. 거의가 독신 여성들이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당시 그레천을 잘 알던 간호사는 현재 독신의 병든 몸으로 혼자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젊은 시절에는 간호사로 일하며 어머니를 부양하고 여동생의 아들까지도 대신 길러주며 힘든 삶을 살았다. 그녀는 남을 돌봐주면서 평생을 살았지만 현재 노년이 된 그녀 옆엔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그저 그동안 수집한 도자기 인형만이 곁을 지켜주고 있는 작은 즐거움일 뿐이다.
그레천의 입원실 동기였던 마사는 관절염을 앓으면서 팔리지 않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혼자서 궁핍하게 살아가고 있다. 지저분하고 추운 집에서 근근이 살아가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인지 태도만큼은 당당하다.
또 다른 입원실 동기인 키티는 보조 호흡기 통 속에서 살아야 할 정도로 허약하지만 종교에 의지한 채 나름 긍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예전 요양원 입원실에서 만난 낯선 남자를 천사라고 굳건히 믿고 있을 정도로 해맑게 신실하다.
1950년대를 살아가는 이 소설 속 여성들은 이토록 나름대로 자기만의 작은 즐거움들로 고된 삶을 견디고 있는 듯 보인다. 과거의 깊은 슬픔과 현실의 갑갑함과 미래의 암담함에서 의지할 수 있는 건 그녀들이 만들어낸 작은 즐거움들이다. 그 작은 즐거움들은 그녀들이 살아가는 희망이지만 자기기만이기도 하다. 그것이 가장 잘 응축된 상태는 그레천의 처녀 잉태라는 믿음이다. 현실은 그것이 참담한 범죄의 결과라고 똑똑히 말하고 있지만 아마도 순전한 여성이어야만 한다는 당시의 종교 혹은 교육으로 인해 그레천은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 했을 것이다. 현재도 딸 마거릿이 천사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믿고 있듯이 여전히 그레천은 작은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자기기만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
진이 쓰지 않고 모아둔 서랍 속 예쁜 물건들처럼 작은 즐거움은 일상을 예쁘게 장식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이 산부인과 의사에게 들었던 폭언 같이, 그레천이 남몰래 당한 범죄 같이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을 참고 외면해야지만 그나마 여성들이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들어낸 위장일지도 모른다.
결국 이 이야기 속 여성들의 작은 즐거움들은 미스터리가 밝혀지고, ‘사랑’같이 근본적인 행복을 찾았을 때 하나씩 사라지고 만다. 그레천이 그토록 정갈하게 가꿔왔던 아름다운 가정처럼, 진의 억제된 일상을 비추던 작은 즐거움들처럼.
이 소설은 약간의 미스터리와 살짝 달달한 로맨스와 반전 유머가 섞인 가벼운 소설로 읽을 수도 있다. 쉽게 쓰여 있고 구조도 복잡하지 않다. 하지만 이야기 겉포장의 가벼움을 걷어 제치고 나면 당시 우울하고 힘든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보일 것이다. 그녀들의 이야기가 다만 60년 전의 옛날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없을 만큼 현재와 연결되는 지점들도 많다. 특히 진의 미래를 암시하는 듯 했던 병든 노년의 부모를 부양하는 독신 여성의 이야기는 지금 현재에서도 와 닿는 부분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저 가벼운 소설인 줄 알았다가 아름답고 통찰력 가득한 문장들과 무거운 주제를 가뿐하게 엮어낸 이야기에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을 받으며 책을 덮었다.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은 결코 작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