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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비저블 서커스
제니퍼 이건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이 소설은 이미 퓰리처상도 타고 지금은 작가로서 노련미와 완숙미를 뿜뿜 풍기는 제니퍼 이건이 1995년에 낸 첫 장편소설이다. 이미 정점에 있는 작품들을 읽은 후 작가의 데뷔작을 읽어보니 첫 소설은 역시 처음답게 풋풋한 맛이 있었다.
흘러넘치는 감수성 풍부한 문장들하며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과거회상의 정서 그리고 소녀의 성장이라는 주제의식까지 작가들이 첫 소설에서 으레 도전하는 많은 요소들이 이 소설에 보인다. 작가의 젊은 시절을 만난 것 같아서 반갑기도 했다.
때는 1978년 열여덟 살 피비는 대학 입학을 앞둔 상태고 엄마와 단 둘이 어린 시절부터 살던 집에서 그대로 살고 있다. 피비가 태어나서 지금껏 살고 있는 곳은 샌프란시스코다. 1960년대 히피 문화의 상징이었지만 이젠 과거의 명성만 남아있는 곳. 그 시절의 급진적인 히피들은 벌써 약물중독으로 죽었거나 일상생활로 돌아갔고 아직도 남아 있는 히피들은 중독자가 되어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 곳이다.
피비는 내내 존재감이 없는 내성적인 학생이었고 그 흔한 담배 한 번 피워보지 않은 모범생이지만 피비의 마음속엔 60년대의 그 대단했던 급진적인 문화를 경험해 보길 바라는 열망이 있다. 거리를 배회하는 약물중독자들에 마음이 가고 지금은 텅텅 빈 예전 히피들의 음악축제를 찾아 가기도 한다. 피비는 그 시대에 대한 환상이 있다.
피비에게는 여덟 살 차이 나는 언니 페이스가 있었는데 60년대 말 페이스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동맹휴교를 이끌 만큼 그 시대의 급진성과 아주 잘 어울리던 인물이었다. 앞에 나와서 연설을 하고 신문에 이름이 실리고 곳곳에서 모여든 히피들과 어울려 다니던 페이스는 어린 피비가 보기에는 신비롭고 멋진 존재였다. 하지만 페이스는 열여덟의 나이로 유럽으로 여행을 가 있던 중 이탈리아 작은 해변의 절벽에서 떨어져 자살하고 만다. 어렸던 피비는 그렇게나 멋지던 언니의 죽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언니를 잊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아직까지 언니의 방에서 잠을 자고 언니가 활약했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간직한 채 점점 더 언니와 그 시대에 대한 환상을 쌓아가고 있었다.
피비의 가족에게는 페이스의 죽음 이전에 병으로 죽은 아버지의 빈자리가 슬픔으로 남아 있었는데 거기에 페이스까지 세상을 떠나버리니 어린 피비의 마음은 말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언니의 부재라는 큰 슬픔은 살아 있었을 때의 그들을 이상화하면서 누그러뜨릴 수 있었고 그래서 언니에 대한 환상뿐만 아니라 화가가 되었어야 하지만 가족을 부양하느라 회사에 다녀야만 했던 불운한 예술가라는 아버지에 대한 신화 또한 피비는 여태껏 진심으로 믿었다.
그런데 이런 피비에게 못마땅한 상황이 찾아온다. 엄마에게 새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이다. 게다가 과거에 파묻혀 있는 오래된 집도 팔고자 한다는 거다. 엄마가 죽은 아빠를 잊지 못 하고 계속 사랑하고 있기를 바라고 언니의 추억이 가득한 집도 계속 이대로이길 바라던 피비는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다. 엄마에게 반항해 보지만 돌아오는 건 아빠와 언니에 대한 피비의 환상에 균열을 내는 엄마의 절규였다. 아빠는 그림에 재능이 없었고 자신도 그걸 알았다는 것, 첫째 딸 페이스가 태어나자 페이스에게 온갖 사랑을 퍼부으면서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 한 위대한 예술가라는 자신에 대한 신화를 페이스에게 주입했다는 것, 페이스를 온전히 자신에게 의지하게 만들고 아빠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아이로 만들어서 아빠가 죽었을 때 페이스가 완전히 망가져서 지금의 결과를 만들었다는 것을.
이런 엄마의 의견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던 피비는 언니가 왜 죽었는지에 대한 진실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 그렇지만 그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없는 상태로 무작정 유럽 여행길에 오른다. 과거 언니가 유럽에 가서 집에 편지를 보내오던 장소들을 찾아다니면 언니의 흔적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모호한 계획만 있을 뿐이다.
유럽에 간 피비는 이런저런 고생 끝에 언니의 생전 남자친구인 울프라는 인물을 만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언니를 닮고 싶다는 갈망이 울프를 원한다는 욕망으로 나타나면서 열여덟 살 피비는 유럽에서 생애 처음으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피비와 사랑에 빠진 울프는 드디어 그동안 감추고 있던 언니에 대한 진실을 털어놓으면서 양심의 가책과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되고 피비는 진짜 언니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그 진실 속에 있는 언니는 피비의 환상속 언니와는 다른 언니지만 문득문득 떠오르는 어린 시절 아빠와 언니에 대한 기억 속에서 언뜻 느꼈던 그 언니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된다. 아빠에게 인정받고자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 붙이던 언니의 모습, 그런 모습의 언니를 더욱더 사랑하는 아빠의 모습, 그 둘 사이에 끼어들 수 없었던 어렸던 자신의 모습...
드디어 언니에 대한 환상도 아빠에 대한 신화도 벗겨져 버린 피비의 눈앞에 벼랑 끝에 선 언니의 불안한 영혼이 보인다. 세상에 자신의 대단한 예술성을 내보이기를 원했지만 그럴 수 없었던 남자가 자식을 통해서 그 패배감을 달래려 했고 자식은 아버지의 바람에 부흥하기 위해서 끝없이 무언가를 증명해 보여야 했다. 그러다가 그 자식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고 벼랑 끝에 서게 된다. 바로 이게 피비의 눈앞에 보이는 언니의 모습이었다.
다시 가족이 있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피비는 엄마의 남자친구도, 집이 팔려 새집으로 이사가야 하는 현실도 받아들인다. 그리고 피비의 오빠 배리가 세운 컴퓨터 회사에 찾아가서 새로 다가올 기술의 시대와 조우하면서 동경했던 과거 히피의 시대와도 안녕을 고한다.
이제 아빠와 언니에 대한 오랜 애도를 끝낸 피비는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다.
최근작들을 보고 작가 제니퍼 이건에 관심이 간다면 이 데뷔작은 지나칠 수 없는 작품이다. 이 첫 소설에 지금까지 제니퍼 이건이 다루었던 모든 것들, 예를 들어 샌프란시스코, 히피문화, 아버지와 딸의 관계 등등이 모두 모여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제니퍼 이건의 소설마다 계속 나오는 아버지와 딸이라는 주제는 이 첫 소설에서 이미 꽤 심각하게 시도하고 있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 이후 “맨해튼 비치”에서도 어린 딸이 아버지에게 더욱더 인정 받기위해 대담한 모습들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나오지 않았던가? “캔디 하우스”에서도 아버지를 이해해 보고자 노력하는 딸의 모습이 나오고, 그토록 사랑받고 싶었던 아버지로 인해 망가지는 딸의 모습도 나온다.
이토록 작품속에서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 대해 계속해서 천착해 오는 모습을 보면 작가의 실제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땠을지 사뭇 궁금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제니퍼 이건의 첫 소설 재밌게 잘 읽었고 앞으로도 쭉 제니퍼 이건의 작품이 나오면 계속 읽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