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전에 조이스 캐럴 오츠의 소설을 두 권 읽은 적이 있다. “멀베이니 가족” 과 “그들”.
두 권 다 읽고 나서 후유증이 상당했다. 깊고 진한 여운이 오랫동안 남아서 어쩔 때는 꿈자리가 뒤숭숭하기도 했었다.
읽고 나서도 이런데 읽는 중에는 얼마나 몰입이 되었겠는가.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들 각자에 너무나 깊게 감정이입을 해서 책장을 넘기기가 힘들기까지 했었다. 마음아파서 다음을 어떻게 읽나 하면서도 궁금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읽어내려야 하는 그 고통!
그래서 이 소설 “카시지”를 읽기 전에도 마음 준비를 단단히 했다. 이번에는 얼마나 또 나를 책 속의 인물들에 푹 빠지게 할까 기대감을 가득 품고선......
하지만 이번엔 기대와 달랐다. 소설을 다 읽은 지 하루가 지났는데 그냥 덤덤하고 읽을 때도 덤덤했다. 사실 더 솔직히 말하면 다른 오츠의 소설들과는 달리 이 소설은 언제 끝나나 하면서 자꾸만 페이지수를 계산하며 읽기까지 했다.
책을 읽으면서 주제의식에 상황과 인물들을 끼워 맞춘 느낌이 들어서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내내 들었기 때문이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는 이라크전 참전 군인을 내세워서 이야기 하는 전쟁의 참상과 잔인함, 가난한 젊은이들을 전쟁에 내모는 미국 사회의 부조리함, 사회주의 교수의 연구 작업에 참여하면서 들여다보게 되는 미국의 사형제도와 감옥 시스템과 범죄자들에 대한 인권문제 등등
그전에 읽었던 오츠의 소설들에선 인물과 인물이 처한 상황에 대한 정밀한 묘사와 그것을 뒷받침 해주는 서사가 한몸처럼 움직였다. 그래서 사회의 부조리한 문제들이 인물들을 덮쳐올 때 독자로 하여금 가슴 답답한 고통을 안겨주면서 자연스럽게 분노하게 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작가의 목소리가 인물들 밖으로 툭 튀어나온 느낌이었다. 소설 속 인물이 하는 얘기가 아니라 작가가 하는 얘기인 듯이 말이다. 그러니 비극이 그저 덤덤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던거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행복해 보이던 가족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게 되는 이 소설의 큰 줄기도 감동이 덜 했다. 아니 사실 이것 또한 그저 덤덤했다.
예쁜 언니 밑에서 예쁘진 않지만 똑똑한 아이라고 알려졌던 동생 크레시다. 언니만큼 예쁨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어서 오히려 냉소적이고 못되게 행동하던 아이가 저지른 사건 때문에 한 사람은 감옥에 가고 가족은 고통 속에서 해체된다. 그리고 그 아이가 몇 년이 지난 후 돌아온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참회하며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
결국 이 이야기는 인간을 자신의 좁고 유아적인 자아안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사회와 교류할 줄 모르는 철없던 여자아이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족과 떨어져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살며 자신을 돌봐주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곳곳의 사회 문제를 고발하는 교수의 연구작업에도 조수로 참여하면서......
부모의 울타리 밖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 당연히 성장하기 마련이다. 어른이 되는 과정을 크레시다는 이토록 요란법석을 떨며 거쳐야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그녀의 새로운 삶에서의 성장이란게 그녀가 저지른 일에 비해 터무니없이 평온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크레시다의 참회가 와닿지 않았다.
또한 크레시다라는 인물에 더 집중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크레시다의 새로운 삶의 이야기에서는 그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사연이 더 흥미롭게 펼쳐지고 어느새 크레시다는 그 사람들의 관찰자가 되어버린거 같았다. 그래서 그녀의 참회가 좀 뜬금없다는 느낌도 들었다.
결국 나는 처음에 기대했던 강렬한 여운을 이 소설에서 느끼지 못 했다. 그렇다고 작가에 대한 믿음을 거뒀다는 얘기는 아니다.
조이스 캐럴 오츠는 여전히 내가 존경하는 작가다.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대가다운 통찰력이 책 곳곳에 포진해 있다는 건 부인하지 못 한다. 다만 이야기적인 즐거움과 감동이 덜 했다는 게 내가 실망한 이유다.
뭐 그럴 때도 있는 거지. 한 작가의 책이 몽땅 다 좋을 수는 없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