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만년필로 글씨 쓰기에 맛들여서 올해 <자기만의 방> 필사를 시작했다.
하다가 말다가 오래 끌었지만 올해가 가기 전에 마무리해서 뿌듯하다.


방금 희진샘 작품 해설까지 다 썼고,
각주를 추가할까 말까 고민중.


해설 마지막에 샘이 팟캐스트에서 말씀하셨고
내가 전에 궁금했던 백래시 관련 내용이 있어 옮겨본다.

(이미지을 넣은 글에는 밑줄긋기를 넣을 수 없다고 한다, 북플에서)


내가 아는 여성주의는 자기 현장에서, 자신을 설명하는 언어를 생산하는 것이다. 울프도 이에 동의한다면, 지금 한국은 여성주의를 포함해 미국 이론의 식민지다. 최근 한국의 여성주의를 설명하는 방식조차 미국의 예전 언어를 그대로 가져다 쓰고 있다. 지금의 상황은 페미니즘의 대중화가 아니고 신자유주의의 틈새에서 여성의 성 역할과 여성의 개인화(개체화, 개별화)가 혼돈된 시기이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여성주의는 활성화된 적이 없다. 백래시? 이는 단순한 문화 지체이다. 팔루디의 백래시 분석은 1980년대 초반 미국의 정부와 언론이 대대적인 리버럴, 좌파, 페미니즘에 억압을 가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지금 우리 언론이 그러한가? 문재인 정권이 그랬는가? 교차성? 교직성이 더 적절한 표현이다. 교차성은 물리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언어다. 정확히 말하면, 교차성이 아니라 융합(trans-)이어야 한다.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의 동력은 방치, 무지, 에고 인플레이다. 문제는 여성주의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수많은 해석과 코멘트, 토론을 열망하는 울프의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자기만의 방』을 여러 번, 더 깊게, 더 맥락적으로 읽어야 한다. 이 작품을 서구의 여성주의 고전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우리 자신을 위해서.

(194-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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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4-12-13 23: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글씨 진짜 너무 좋아 ㅠㅠ 저 글씨 페티쉬 있나요? ㅠㅠ

건수하 2024-12-13 23:34   좋아요 1 | URL
제 글씨에요…? ㄷㄷ.. 😁

dbTlla 2024-12-14 0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씨체가 정말 마음에 듭니다. 어떤 만년필을 사용하시며, 촉의 굵기는 어느 정도인지 매우 궁금합니다. 선택하신 잉크 컬러들은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줄에 닿지 않고 글씨가 떠 있는 듯한 느낌이 인상적이며, 그 속에서 건수하 님의 신중하고 섬세한 성품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건수하 2024-12-14 07:32   좋아요 0 | URL
dbTlla님 안녕하세요. 댓글로 뵙는 게 처음인 것 같습니다 ^^

만년필은 이것저것 돌려써서 어느 부분에서 무엇을 썼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플래티넘의 센츄리 m, 파커51 f, 파이롯트 프레라 f, 오로라 입실론 ef 등을 썼습니다. 잉크는 고민을 좀 했고 글씨를 어떻게 쓸지는 고민을 안했는데 이렇게 제 성품까지 예상해볼 수도 있는 것이었군요… 신기합니다 :)

단발머리 2024-12-14 09: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건수하님.... 정말, 진심으로.... 저 노트 갖고 싶네요.
만년필로 이런 노트를, 그것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가질 수 있다면, 저도 매일 만년필로 .... (물론 저는 할 수 없음이요)
올 한 해 내내, 아니 최소한 10년은 자랑할 만한 일이에요. 마음껏 뿌듯해 하시길요! 저는 계속 부러워하기로!!!

건수하 2024-12-14 11:43   좋아요 1 | URL
저도 간직하려고 각주까지 완성할까? 하고 있어요 ^^ 단발머리님도 하실
수 있습니다!!

10년씩이나… 일단 올해 내내 뿌듯해하겠습니다 😊

잠자냥 2024-12-16 12: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글씨 참.......냐옹ㅇ냐오옹오냐농오옹

건수하 2024-12-16 13:59   좋아요 0 | URL
냐아옹냐옹 냐오옹? 🙄

공쟝쟝 2024-12-16 19:49   좋아요 3 | URL
프랑스 고양이 좋아하는 소리입니다!

독서괭 2024-12-16 17: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엄머머 건수하님 글씨 완전 멋져요. 어떻게 저렇게 길게 가지런히 단정하게 쓰세요? 우왕..
저 이번에 산 한강작가님 특별판 세트(?)에도 필사노트 들어있던데 한번 해봐야겠어요.

건수하 2024-12-16 20:35   좋아요 1 | URL
평소에는 저렇게 안 쓰죠. 수양하는 마음으로 썼어요 ^^ <자기만의 방> 짧아서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괭님도 해보시고 올려주세요 ^^

공쟝쟝 2024-12-16 19: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 (입이 떡.) 우와.......................
우와....................
으아.............
우어.......
수하님 저는 팔목이 아파요......... ㅜㅅㅜ
(글씨 잘쓰고 싶은 사람)

건수하 2024-12-16 20:38   좋아요 1 | URL
올린지 한참 지나서 다들 관심없구나 했는데 오늘 다시 반응이 ^^

팔목은 직업병? ㅜㅜ 팔목으로 쓰는 건 아니겠지만 팔을 많이 쓰면 아껴야 할 것 같아요. 글씨도 많이 쓰면 어딘가 아파요.. 오래 쓰려면 필압을 빼야한다고 하네요.

달자 2024-12-17 0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건수하님 앞으로 서재 글은 타이핑 말고 손글씨로 쓰고 찍어 올리는 걸로 대체해 주시길 바랍니다 땅땅👩🏻‍⚖️

잠자냥 2024-12-17 06:55   좋아요 2 | URL
그 후 건수하 서재는 업데이트가 멈췄다….한다.

건수하 2024-12-17 09:20   좋아요 0 | URL
달자님 제 글 보기 싫으셨구나 ㅋㅋㅋ
당분간 업데이트가 잘 없을 예정이긴 합니다.

잠자냥님은 역시 절 파악하셨어...

달자 2024-12-17 16:50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ㅋㅋㅋㅋㅋ ㅠㅠ 그럼 예쁜 손글씨는 가끔 보여주시더라도 서재 글 더 많이 써주세요 잉잉

희선 2024-12-17 0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씨체 멋지네요 만년필로 쓰시다니, 그것도 멋집니다 끝까지 쓰셔서 뿌듯하시겠습니다


희선

건수하 2024-12-17 09:21   좋아요 0 | URL
만년필이 손에 힘을 많이 안 줘도 되어서 볼펜보다 편한 점이 있더라고요. 물론 재미도 있습니다 ^^
<자기만의 방>은 짧은 편인데도 오래 걸려서요.. 성경 필사 하시는 분들은 어떻게 하시나 놀랬습니다.
 

알라딘이 알아서 정리해줘서 좋네.

http://aladin.kr/ei/gFrmZ

딕테는 언제쯤 읽을 수 있을런지 모르겠고

함께 읽을만한 책은 1권 읽었고 2권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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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12-06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딕테 한권씩 챙기는 분위기라서 ㅋㅋㅋ 덕분에 알아서 정리해준 곳 들어갔다가. 홀린듯 장바구니 쓸어담던 나를 안정시키고 수하님한테 나는 이성을 지켜냈노라 댓글달기 ㅋㅋㅋㅋ
 


올해가 37일 남았다고 하고 나에겐 조금 덜 남은 느낌이다.

이상하게 연말이 되면 시간이 더 빨리 가는 것 같다.


10월 책을 오래 붙잡고 있진 않아서 요번 달은 빨리 읽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이후로 무슨 일이 있었던건지..

입술엔 물집이 생겼고 주말엔 계속 외출을 했다.

그리하여 아직 11월의 여성주의책같이읽기 책을 펴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읽은 책은 거의 없으니 산 책만 정리를 해보자. 

(이후엔 안 사겠다는 강한 의지 표명)











6권 중 한 권은 아이 책이고, 두 권은 선물했다. 

이 중 두 권은 조금 읽었다. 

11월에 완독한 책은 지금까지 3권이다 (하나는 9월부터 읽던 SOW, 하나는 10월부터 읽던 <세계 끝의 버섯> ...).


어쨌든 12월까지 책은 더 사지 않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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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더 까먹기 전에 적어보려고 적는다. 


일단 내가 이 책을 읽고 가장 놀랐던 건 이거다. 숲의 천이 succession 에 관한 것. 



    (이미지 출처: 산림청 홈페이지)



이런거 고등학교 때 배웠나? 여튼 오래 전에 배웠는데. 내가 배웠을 때는 이렇게 가로 방향의 그림이 아니었고 세로 방향으로 달라지는 그림이었는데 요즘엔 거의 이런 그림만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이 개념을 배울 때, 실제로 가르치는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음수림이 안정적이고 완성된 형태라고 생각했다. 위키 백과에 '천이'를 찾아보면 
천이 (생물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마지막 단계인 음수림 (극상 군락)을 이렇게 표현해 놓았다. 

극상 군락이란 식물의 종류가 더 이상 교체되지 않는 안정된 군락을 말하는 것으로, 이 때에는 물질 생산·축적·고사(말라죽음)의 순환이 평형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화살표도 있겠다, 이렇게 이렇게 가다보면 안정적이고 완성된 형태가 된다- 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개념 자체가 그런건지 내가 그렇게 이해한 건지 모르지만 이 그림에는 시간에 따른 선형성이 표현되어 있고 나는 시간에 따라 역사는 진보할 거라는 생각을 내재화하고 있어서 이 음수림이 좋은 상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안정적, 평형 상태라는 말은 보수적인 것 같지만 진보가 거듭되다보면 언젠가는 다 좋아지고 완성되어 안정적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그걸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막연한 낙관주의와 잘 부합되는 개념이다. 


하지만 송이버섯에게는, 소나무에게는 이 음수림이 안정적인 상태가 아니다. 소나무는 아마 양수림 상태에서 가장 잘 자랄 것 같고 송이버섯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개체 어떤 집단에게는 불안정한 것이 더 좋고 그래서 송이버섯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진보의 방향성을 거슬러 그 불안정성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주변에서, 자본주의의 중심지 미국에는 존재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공유지 (땅이 좁은 한국에는 거의 없을 것 같다) 에서 버섯을 채취하며 살아간다. 이 사람들에게 이것이 가장 효율적인 경제활동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은 전쟁이나 고향과 관계하여 숲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또 다른 경제활동이 어려운 경우도 있어 감수한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자본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삶을 살아갈 수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건 지구의 한 편 일본에서 송이버섯이 비싸게 팔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의 자본주의와 관계가 없는 듯한 삶의 방식도 자본주의 덕분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버섯의 수요가 전세계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그러면 자본주의와 관련이 생기기도 하겠지만) 이 집단의 규모는 마냥 커질 수가 없다. 그래서 작가의 표현대로 작은 패치로만 존재할 수 있다. 찾으려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그저 어디 존재할 뿐 수가 적기에 모두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그렇기에 지속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다.

학생일 때는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 수 없어서, 나는 결혼도 안하고 아이도 안 낳고 적게 벌어 적게 쓰고 살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하고싶은 일과 돈을 좀 절충할 수 있게 되어서 아이도 낳고 책도 좀 사면서 적당히 살고 있다. 코로나가 한참 창궐하던 2020-2021년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둘까 생각한 적이 있는데, 남편이 어쨌든 돈은 계속 벌어와야 한다고 해서 (...)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니 떠오르는 것은 대리운전, 서점주인 (자본이 부족한데), 아니면 서점 알바..? (알바를 쓸 수 있는 서점이 얼마나 될런지) 좀 무리하면 학원강사..? 그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공계서적 번역을 해보는 건 어떨까 생각도 했지만 영어나 국어 실력이 좋은 것도 아니고 이공계서적은 수요가 별로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내 상상력의 한계는 딱 그 정도였고 실행력도 없었다. 주류의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는 페미니즘 책을 계속 읽고 있지만 지금도 딱히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는다. 다들 이렇게 상상력이 부족해서, 그래서 자영업자의 수가 그렇게 많은 모양이다. 


이 책의 역자 노고운은 역자 해설에서 번역은 주변자본주의적이라고 했다. 정희진의 공부 매거진 10월호에는 학원강사 출신 번역자가 나왔고, 11월호에는 대학교수 출신 동네 사회학자가 나왔다. 이분들이 어떻게 생계를 꾸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는다면 내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방식은 아닐 것 같다. 어쩌면 희진샘도, 서점이나 온갖 돈이 되지 않는 것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주변자본주의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여기까지 쓰고 역자에 대해 찾아봤는데 역자는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의 현직 교수다. 책 어딘가에 저자가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의 한 학생에게 고맙다고 한 각주가 있었던 것 같은데 노고운 교수가 저자와 친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책을 쓰는 것도 아니고 번역하는 것은 노고운 교수의 이력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송이버섯을 따서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고.. 모두가 꼭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대로 살지는 않아도 된다. 쉽게 찾을 수도 없고 그렇게 사는게 쉽지도 않지만 그래도 그렇게 살면서 얻는 것이 있을 거다. 그건 각자 선택하기 나름이다. 찾거나 선택하기 전에 생각의 방식이 달라져야겠고 그게 가장 어렵지만 말이다. 


 역자는 모두가 이렇게 살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삶의 방식을 기후 위기 시대에 인류의 미래를 위한 대안으로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류세 Anthropocene 라는 개념에 대해 잠시 언급한다. 책이 출간되던 시점에는 국제지질학연합 IUGS에서 인류세를 지질시대로 지정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고 자료를 수집했지만, 올해 투표를 통해 인류세를 지질시대로 지정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인류세는 오존홀을 발견한 화학자 파울 크뤼첸이 처음 제안한 개념이고, 인류가 지구환경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얘기는 맞다. 오존홀도 그렇고 이산화탄소 농도가 이렇게 빨리 증가한 것도 처음이다. 하지만 지질시대로 지정할 것인가에 대한 내 생각은.. 지질시대는 보통 대륙의 이동이나 생물의 대량 멸종, 큰 기후변화를 기준으로 지정하는 것인데 아직 인류가 그만큼의 영향을 미쳤느냐하면 그렇지는 않다고 본다. 인류 입장에서는 중요하고 심각한 변화지만 지구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세 시대는 좀 작은 단위이기는 하지만 이미 16000년 전 기준으로 플라이스토세와 홀로세를 나눴고, 그 기준은 지구의 많은 면적을 빙하가 덮고 있다가 물러난, 나름 지질학적인 의미가 있는 사건이다. 플라이스토세에 인류는 이미 존재했지만 홀로세 이후 신석기가 시작되었고 본격적으로 경작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홀로세 역시 인류에게 의미가 있는 지질시대이다. 현재의 기후 위기 관련해 굳이 어떤 시기를 지정해야 한다면, 제이슨 무어 (나는 이 사람을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가 주장한 대로 산업혁명 이후를 자본세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당하다고 본다. 물론 그렇게 지정한다 해도 지질시대라고 보기는 어렵고. 

인류가 그렇게 쉽게 멸종할 것 같지는 않다. 지금처럼 우점하진 않아도 소수가 살아남을 것이다. 혹시 인류가 멸종한다 해도 지구에는 곰팡이나 식물 등 많은 생물들이 우리가 모르는 방식, 생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계속 살아갈 것이다. 처음 기후 우울을 앓고 있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에 놀랐는데,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그 분들이 우울을 경험하는지 알아본 적이 없어 잘은 모르겠다. 그렇지만 인류는 멸종한다 해도 지구는 어떻게든 지속될 거라고 생각하면 좀 낫지 않을까? 나는 기후 관련 일을 하고 있고 무력함을 자주 느끼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좀 나아졌다. 18세기 이후를 인류세라는 지질시대로 굳이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이 이 위기를 구해야 한다고,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인간의 능력이나 흔적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건 아닐까.

 

IUGS가 인류세를 지질시대로 지정하지 않은 이유는 좀더 실용적인 것이다. 원문을 찾아보긴 귀찮아 검색을 해보니 인류세는 공식적인 지질학 시대가 될까? 이런 기사가 있다. 관심있는 분들은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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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11-12 21: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 부분 좋네요. 인류가 멸종한다 해도 지구에는 곰팡이나 식물 등 많은 생물들이 다른 방식으로 공존할 수 있다는 생각이요.
저도 이 책에서 묘한 희망의 기운을 느꼈거든요.
올려주신 사진이 좋아서 한참 들여다 보았어요. 평형 상태를 좋아하지 않는 소나무, 그리고 송이버섯 ㅎㅎㅎ

건수하 2024-11-12 13:22   좋아요 1 | URL
인류를 포기하면 마음이 좀 편해지죠. 막연한 희망도 생기고...
근데 그러면 우리는 왜 공부를 하는 걸까요...? 결국 지식욕 자기만족인가...

공쟝쟝 2024-11-12 19:51   좋아요 1 | URL
할 수 있으니가 하는 거 아닐까요? … 할 수 없거나 할 줄 모르거나 할 기력이 없는 사람이 더 많다고 압도적으로 많다고 생각합니다. 😝

건수하 2024-11-12 20:57   좋아요 1 | URL
인류를 포기하는데 인문학 공부 굳이… 포기가 안 돼서 그런가봅니다 ^^ 물론 여유와 기력도 있어서 그렇겠죠 ㅎㅎ

청아 2024-11-12 1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하님 이 글 너무 좋네요! 이따가 PC로 재독예정! 저도 대리운전 생각해 본적 있는데 운전 실력은 둘째치고 택시 기사들,대리 기사님들 얻어맞는 뉴스가 자주보여 두렵기도 했어요. 그냥. 지금 하는거나 잘 하기로ㅎㅎ통념에서 벗어난다는 게 역시 쉽지 않다, 그러나 다른 시각을 가지기 위한 노력은 늘 필요하구나 새삼 느낍니다.

건수하 2024-11-12 13:25   좋아요 1 | URL
그쵸, 대리운전은 술취한 사람이랑 같이 있어야 하니까 위험하겠더라고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싶지만 노력한다고 되는건지... 요즘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조건이 주어지지 않으면 힘든 것 같아요. 노력하면 다른 시각을 접했을 때 부정하지 않는 정도는 가능한 것 같은데..

공쟝쟝 2024-11-12 1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하님은 일찍 하고 싶은 일을 찾으셨군요? ~~ 왜 근데 그만두고 싶어졌는지 궁금합니다.

돈… 저는 많이 벌고 많이 쓰고 싶습니다!!! ㅋㅋㅋㅋㅋ 제가 이과들이 좋아할 문장을 왓이즈섹스 보면서 찾아서 킵해뒀는데요! 나중애 시간나면 적어볼개요! 귀한 이공계 친구 건조수하님!! ㅋㅋ

건수하 2024-11-12 20:56   좋아요 1 | URL
좀 회의를 느끼기도 했고 가정생활과 병행하기가 어려워서… 육아휴직 후 복직을 안할까 생각해봤었어요. 회의는 여전하지만 이제 애가 많이 커서 다닐만 해요 ^^

이과들이 좋아할 문장 ㅋㅋㅋㅋ 궁금하네요!
 
Story of the World, Vol. 3: History for the Classical Child: Early Modern Times (Paperback) The Story of the World 9
수잔 와이즈 바우어 지음 / Peace Hill Press / 2004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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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달달 8-9-10월의 책. 


9월부터 시작하여 급한 마음에 출퇴근길에 들었다. 출퇴근길 책 듣기는 애로사항이 많다. 영어책은 더 그랬다. 아는 얘기는 잘 들리고 모르는 얘기는 잘 안 들린다. 모르는 단어는 정말 모르는 단어일 때도 있고 내가 아는 발음과 다른 고유명사일 때도 있다. 이렇게 듣다보면 졸기도 하고, 잘 모르겠는 와중에 네비게이션 안내 소리 한 번 나와주면 그때부터 갑자기 산으로 가는 내 정신력.. 아이 데리러 갔다가 듣던 부분을 계속 틀었는데 잘 들리냐고 물으니 잘 들린다고 하더라. 그래 어릴 때부터 네이티브들에게 영어를 배운 네 귀 좋다 흥...



그래서 어떤 에피소드는 쉽게 넘어가는데 어떤 에피소드는 3-4번 듣기도 했다. 처음에는 듣고 나서 잘 모르겠던 부분을 책으로 확인했지만, 뒤로 갈수록 지쳐가서 이제는 내가 어느 부분을 이해 못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상태가 되어 대략적인 내용을 파악하는 데 의의를 두고 계속 들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영어읽기를 하려고 이 책을 함께 읽기로 한 것인데, 내가 한 건 듣기와 세계사 이해이다...? 어쨌든.. 끝까지 다 들은 걸 위안삼기로 한다. 



목차를 다시 살펴본다. 이 책의 소제목은 early-modern times 이고 중세에서 근대로 가는 시기, 소위 근세라고 부르는 부분을 다루는 것 같다. 시작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3권에서는 본격적으로 제국들이 식민지를 건설한다. 미국, 캐나다, 아프리카, 인도, 중국... 전쟁과 조약, 그리고 노예가 그에 따라온다. 이 책을 읽으며 (전에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대개 영국인들이 먼저 나쁜 짓 (노예제도, 식민지 개척, 자본주의 등) 을 시작하고, 그러면 다른 나라들이 똑같이 따라하고.. 그러고서 영국의 지식인들이 비판하면 그쯤에 반성하는 척 하며 레드오션에서 먼저 손을 떼는 (그러고서 교묘하게 뒤에서 계속하는) 일을 해왔다는 생각을 굳히게 됐다. 지금도 비슷한 것 같다. 내가 영어를 배우게 된 이유도 이 사실에서 비롯되었는데, 지금도 영어를 공부한다고 이 책을 읽고 있었으니 씁쓸하다. 


30년 전쟁이나 나폴레옹이 일으킨 전쟁 등 뭔가 소소하고 서구에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많이 나온다. 또 북아메리카에 유럽인들이 건너가 살게 되면서 다른 곳보다 미국의 건국 역사가 상세하게 나온다. 이런 이유로 '근세'를 별도의 권으로 분리할 필요가 더 있지 않았나 싶은데.. 내가 이걸 이렇게 상세하게 알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교양이라고 생각하고 다 듣긴 했다. 미국 교과서로 영어 공부하는 초등학생들이 이런 기분일 것 같다. (왜 미교로 영어공부하는지 이해를 못했는데, 내가 그러고 있...) 남아메리카 독립의 역사에 대해서도 꽤 상세하게 나오는데... 미국은 그래도 좀 알고 있는데 중앙아메리카-남아메리카에 대해서는 너무 몰랐구나 하고 약간 반성하게 되었다. 아프리카에 대해서도. 아무래도 가본 적도 별로 없고 문학으로도 별로 접하지 못한 곳들이다.  


후반부에는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미국 서부의 금광 개척얘기로 끝난다. 4권은 좀더 재미있길... 일단 아는 얘기가 더 많이 나오긴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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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11-12 1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들리는 그 어린이의 귀를 좀 빌리고 싶습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는 부러운 마음으로, 이 부러운 마음을 간직한 채로 그냥 살아가야 하는 겁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건수하 2024-11-12 13:27   좋아요 1 | URL
자꾸 듣다보니 조금 더 들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라지만 다시 들어서 익숙해진 걸지도...)
단어라도 많이 익혀 아는 단어를 만나는게 최선이 아닐까요?

출장가서 300 words 끝내고 오겠습니다!! 빠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