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에서는 제3세계, 특히 저자가 잘 아는 인도에서 여성의 노동, 생산관계의 공통된 특징,
여성이 착취 혹은 극한의 착취를 당하는 과정에서 구조적인 혹은 직접적인 폭력과 강제가 사용되는 (308쪽)
사례가 많이 소개된다. 인도의 경우 가부장제 외에 카스트 제도가 복잡하여 더 극단적인 사례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 지참금 살해
인도 시골의 근대화는 계급 갈등을 심화시켰고 1960년대 말부터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유례없이 증가하여 가난한 여성에 대한 강간과 학대가 많이 행해졌다. 중산층은 이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좌파 조직은 여성에 대한 강간을 봉건적 혹은 반봉건적 생산관계의 일부로 여겼다. 1970년대 말부터 대도시의 여성단체들이 결혼지참금을 충분히 가져오지 않은 신부에 대한 살해와 강간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시골 외에 대도시에서도 여성에 대한 폭력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가부장적 인도 사회에서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있을 곳도, 사회적 지위도 없기 때문에 신부 가정은 지참금을 지불하고 딸을 ‘결혼시켜 치우기’에 열심이었다. 지참금은 신랑 가족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고 통보되며 신부의 가족은 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느라 빚을 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결혼 후에는 지참금을 더 요구받고 학대받으며, 더 가져오지 않는 경우 시체로 발견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시체는 불에 태워 (자살시도로 불을 질렀다거나, 요리하다가 사고가 났다는 식으로) 모든 증거를 없애기 때문에 경찰이나 법정의 수사를 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독극물, 화재, 가슴을 물어뜯기는 잔혹행위, 질식과 뇌출혈 등으로 사망하거나 큰 부상을 입는 사례가 소개되었다)
여성단체와 조직들은 범죄에 대한 법 집행을 더 엄격하게 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1961년 지참금 금지법이 제정되었으나 이 법은 지켜지지 않았다. 1976년에 2670명, 1977년에 2917명의 여성이 화상으로 사망했다. 결혼지참금 살인과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잔혹행위에 대한 반대운동이 커지고 있었음에도 1980년 이후 남편과 시댁친지에 의해 젊은 여성이 살해되는 숫자는 급속하게 증가했다.
# 양수천자와 여성 살해
인도에서 여성을 선호하지 않는 증거는 다음과 같다: 1911년 이후 인도에서 여성/남성의 비가 하락한 것, 결혼지참금에 대한 과도한 요구, 신부를 사오는 관행이 있던 가난한 지역 공동체에 결혼지참금 제도가 확산된 것, 결혼지참금 때문에 빈민의 부채가 증가한 점 등.
양수천자와 초음파진단이라는 기술은 태아의 성별 선택을 가능하게 하여, 인구통제정책과 가부장적 제도, 남성지배적인 태도를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태아성감별을 통해 여성 태아를 낙태하는 것이 처음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 여론은 반응이 없었다. 반여성적인 태도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여아 출산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1978-1983년 사이 약 78000 명의 여아가 성감별 테스트 이후 낙태되었다. 여성들은 나중에 결혼시킬 때 수천 루피를 쓰는 것보다 지금 그 돈을 쓰는 것이 더 낫다고 했다 (Patel의 1984년 논문을 재인용). 양수천자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을 때, 논란이 되었던 것은 그것이 여성 전체를 위협하는 수단이어서가 아니라, 의사들의 홍보와 판매 전략이 범하는 잘못- 태아연구와 배아이식, 유전자공학 분야와 관련된 과학자의 엘리트주의적 사고방식, 그리고 그를 부추기는 국제적 철학-에 관한 것이었다 (Balasubrahmanyan의 1982년 논문을 재인용).
인구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여아 낙태를 보는 학자들도 있었으며, 그 중 쿠마르 Kumar는 1983년 논문에서 성감별에 의해 여성의 공급이 줄어들면 여성의 가치가 올라갈 것이라고,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적용하여 여아 낙태를 옹호했다. 양수천자와 여아낙태가 여아신생아의 살해보다는 훨씬 인도적인 방법이라고 했다.
여기서 미즈는 잠시 이성을 내려놓고(?)
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암울한 여성혐오적인 표현은
여성 스스로가 체화시켜 이를 다른 여성에게 적대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성 스스로 절명하게 하는 것만이 해결책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는 우리에게 빈민을 섬멸함으로써 빈곤을 퇴치하는 것을 제안한 인구통제기구의 논리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는 그보다 더 끔찍하다.
여성이 여성 살해를 최종 해결책으로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324쪽
이라고 말했다.
미즈가 앞에서도 그닥 아주 냉철하고 이성적이지는 않았지만, 여기서는 잠시 이성의 끈을 놓는 것이 느껴졌다. 논리적으로 쓰려고 애썼지만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고나 할까. 5장을 읽으며 나의 감정도 내내 그랬다. 나는 여성 스스로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을 쓰거나, 상대 여성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적대적으로 대하고 뒷담화를 하는 것이 싫다. 남성에 대해서보다 여성에 대해서 그런 말을 쉽게 하는 여성이 많은 것처럼 느껴지는데, 필리스 체슬러의 <여자의 적은 여자다> (원제: Woman's Inhumanity to Woman) 에 이런 내용이 자세히 나와있었다.
여자의 적이 꼭 여자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그런 말이 사용되는 맥락도 별로 안 좋아하지만 공감되는 부분이 있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 여부를 떠나 여성이 남성보다 여성을 더 쉽게 적대시할 때 화가 더 나기는 한다. 집단으로 묶어 뭉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 경우는 예외다. 살아오면서 언제나 항상 그랬듯, 여전히 여성이 약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지만 전체 인류의 반이나 되는데, 여성은 정말 약자인가? 예전에는 단순히 남성/여성의 구분만을 생각했기 때문에 언제나 나는 약자에 속한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여성 중에서도 어느 범주에 속하는지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여러 복잡한 특성이 조합되어 있는 나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 강간
결혼지참금 살해와 마찬가지로 강간도 흔하게 일어나는 일로, 인도의 농촌 지역에서 만연한 ‘후진적이고 봉건적’인 관계의 특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대도시에서 많은 사건이 일어나며 1978년 이후에는 특히 경찰에게 당하는 경우가 증가하였다. 대부분의 사건은 경찰서 내부에서 일어났으며 희생자는 대부분 집단 강간을 당했다. 범죄를 저지른 경찰관들은 대부분 강간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읽기 괴로운 사례들이 여럿 소개되었다)
반강간 반결혼지참금 캠페인을 통해 인도에서 여성운동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이 캠페인을 통해 페미니즘은 서구에서 수입된 이데올로기임과 동시에 인도 여성이 가부장적이고 여성차별적인 남녀 관계에 맞서는 투쟁을 전개하는 것에도 관련되어 있음이 분명해졌다. 중산층 여성 또한 폭력으로 위협받고 있음이 알려졌고, 강간이 모든 계급에서 발생하고 있음이 인정되었다.
라자라만 (Indira Rajaraman)은 신부대금 제도가 있었던 농촌까지 결혼지참금 제도가 확산된 것이 농업의 생산력이 높아지면서 (기계 등으로?) 여성 노동력의 가치가 하락했기 때문으로 보고, 결혼지참금이 ‘여성이 벌이를 못하거나, 벌어도 생계비용 이하로 버는 상황에서 여성을 평생 부양하는 비용을 받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결혼지참금 제도가 신부대금 제도에 비해 특별히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오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정책적으로 여성이 소득유발 활동에 좀더 결합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경제학자 바르단도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적 경제’ 개념에 기초한 것으로, 여성이 수행하는 가사노동, 출산, 육아를 ‘생산적 노동’의 범주에서 제외한다는 것에서 논리적 결함이 있다. 이는 인도만이 아니라 세계 어디에나 존재하는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여성의 40% 이상이 집밖에서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서구와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여성에 대한 폭력은 증가하고 있었다.
여성 노동은 자본주의적 경제에서 따로 분리되어 은폐되어 있다. 여성은 가정에서, 들판에서, 공장에서 일을 그만둔 적이 없으며, 출산과 육아를 그만둔 적이 없다. 그러나 이 노동을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노동으로 더 이상 여기지 않으며,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을 자본주의적으로 구분하는 것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남성이 여성 노동에 의존하는 것이 여성이 ‘부양자’ 남성에게 의존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341쪽
이 문장들을 보고 누구의 일이 더 중요한가를 가지고, 항상 자본주의적인 잣대로 이야기해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버지는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힘든' 일을 하는 '중요한' 사람이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벌어오는 돈으로 살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어릴 때 내가 주입받은 생각이다. 가끔 아버지는 '내가 번 돈' 이라는 말을 해서 나에게 타박을 받으시는데, 어머니의 생각을 물어본 적이 있지만 갈등을 싫어하는 어머니는 명확한 답을 하신 적이 없다. 하지만 내가 어릴 적부터 '아이를 낳기 전에는 너네 아빠보다 월급이 많았어' '내 퇴직금이 집을 장만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어' 라고 얘기하셨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물론 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여전히 여성이 비슷한 연령과 조건의 남성 임금 수준만큼 돈을 벌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돈 벌어오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분명히 자본주의적인 잣대에 기초한 것이다. 아주 간단하게 사람에게 가장 기본적인 것이 의식주라고 치자. 돈만 있다고 의식주를 누릴 수는 없다. 의식주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돌봄 노동은? 인간의 아기가 동물처럼 부모로부터 자립하여 스스로 먹이를 찾고 살아가는 데에는, 글쎄 몇 년이 걸릴까? 지금과 같은 사회구조에서는 최소한 20년 가까이 걸리는 것 같고, 야생에 던져놔도 10년은 걸리지 않을까? 이런 필수불가결한,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노동을 여성이 주로 제공하고 있는데, 그것을 너무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 같다. 여성은 자연과 친하니까?
# 공물로서의 결혼지참금
결혼지참금은 브라만 계층에서 가부장적 결혼과 가족에 대한 이론들을 갖고 합리화하면서 발전시킨 것이다. 브라만식 결혼 개념에 따르면, 딸은 아버지가 ‘건네주는’ 것이다. 그리고 ‘건네준 남자는 언제나 건네야 하는 입장이다.’ 신부를 주는 가족과 신부를 받는 가족 사이의 관계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신부를 받는 신랑 가족은 더 높은 지위에 있는 것으로 규정된다. 주는 쪽이 ‘받는’ 것은 이러이러한 남자, 이러이러한 가문에게 ‘주었다’는 명예이다.
(342쪽)
이들 남성은 교육비로 썼던 돈을 보상하는 차원에서 많은 현금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 그들은 결혼지참금을 사업을 시작하고, 변호사 사무실, 개인병원, 엔지니어 오피스 등을 여는데 사용했다. (345쪽)
결혼지참금 제도는 남성이 직접 한 노동을 통해서나 자기 자본을 투자해서 벌어들인 것이 아니라 갈취와 협박과 직접적인 폭력을 통해서 얻는 부의 한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결혼지참금에 대한 권리를 통해 모든 남성은 자신이 벌지 않은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고, 살 수 없었던 현대적 소비재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결혼지참금은, 생존을 위해서 부채를 지고 소비를 해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런 물품이 거래되는 시장을 창출했다. 결혼지참금은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시장적 가치와 시장성 상품이 확산되는 길을 열었다. (346쪽)
한국의 경우와 크게 다른가? 결혼지참금을 혼수로 볼 때, 한국의 경우 집을 남자 쪽에서 마련하는 일이 많았으니 다르다고 볼 수도 있으나, 요즘에는 같이 모든 것을 마련하는 일도 많은 것 같다. 인도에서도 남자쪽 집에 가서 산다고 하니까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으로 보인다. 신부의 아버지가 딸을 ‘건네주는’ 양상은 모든 가부장적 사회에 흔한 모양이다. 또 결혼지참금 (혼수) 를 통해 직업의 기반을 마련하는 일, 현대적 소비재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일도 유사하다. 시장성 상품이 확산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중요하고.
브라만에게 이런 비상호적인 공물 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중요했다. 이 승려 카스트는 몸으로 일하여 먹고 살지 않기 때문이다. 브라만적 사고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이기도 하다. 여성은 남편에게 몸과 노동과 자녀를 주고 이에 더해 돈과 여타 상품까지 바친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아내라는 명예를 '받는다.' (342-343쪽)
명예가 필요해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갈 곳이 없고 살 수가 없으니 할 수 밖에 없는건데 명예를 던져주는 거지.
요즘 많은 젊은 여성들이 비혼을 선택하는 것은 내 입장에서는 참으로 용기 있는 행동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할 수 밖에 없는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있을 곳' 과 '사회적 지위' 를 잘 마련하고 있나?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 남성은 타고난 강간자인가?
남성의 섹슈얼리티는 기본적으로 공격적이며 억제할 수 없는 것이고,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기본적으로 수동적이고 피학적이라는 주장 (346쪽)
이런 본능은 엄격한 법과 특정 범주의 여성 (어머니, 자매)에 대한 엄격한 사회적 금기, 그리고 여성 스스로가 남성의 공격적이고 가학적인 성 ‘본능’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행동을 조심하는 것을 통해서만 통제할 수 있다. (349쪽)
모든 도서관에는 남성의 성적 욕망은 기본적으로 공격적이며 통제할 수 없고, 여성은 고유의 섹슈얼리티를 갖고 있지 않으며, 남성의 공격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여성의 생물학적 운명이라는 점을 증명하려는 책들이 가득하다. 이들 학자와 학파 중 가장 유명한 예로 다윈을 들 수 있다. 다윈은 진화의 기초가 되는 것은 여성을 성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경쟁에서 남성들이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본능을 통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로렌츠, 타이거, 팍스 등의 학자들은 지난 20년 동안 이런 개념을 앞서 우리가 본 것처럼 ‘남성 사냥꾼 모델’로 축약하여 대중화시켜왔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공격성은 남성의 타고난 본능의 일부이며, 사회 개혁이나 혁명을 통해서는 변화할 수 없다. 과학적 사고 뒤에 숨어 있는 편향에 대해 좀더 비판적인 태도를 갖기 위해서는, 이른바 가치 중립적인 과학이 여성, 낮은 카스트, 낮은 계급과 민족과 민중에 대한 억압과 착취와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는 일정한 신화에 기초하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적자생존’, 즉 강한 남성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정복자, 승리자가 항상 옳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강간 법과 강간 신화의 뒤에 자리한 이데올로기이다. 이런 종류의 과학을 수용하는 이들은 파시즘이나 제국주의도 수용할 것이라는 점을 우리가 알지 못하겠는가? (349-350)
앞에 나왔던 '남성 사냥꾼 모델' 이 다시 언급된다. 남성 사냥꾼 모델에는 이런 함의가 있었던 것인가. 찰스 다윈, 콘라드 로렌츠는 익숙한 학자들인데, 동물행동학이라는 것도 동물을 색안경을 쓰고 본다는 생각은 해보았지만 여성과 관계있다고까지는 생각을 못해봤는데... '이런 종류의 과학'을 적극적으로는 아니지만 소극적으로 수용해온 자로서 부끄럽다.
공격자들은 종속된 이들이 상황을 자연이 부여한 것으로, 혹은 같은 의미지만, 신이 부여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지 않으면, 자신이 정복하고 종속시킨 이들에 대한 통제를 영구적으로 유지할 수가 없다. 남성에 대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창안자들은 여성에 대해서도 그에 어울리는 이데올로기를 창안해 왔다. 이는 영원한 희생자의 이데올로기, 자기희생의 이데올로기 (근대 서구적 버전으로는 여성 피학성의 이데올로기)이다. .... 이런 이데올로기는 여성을 지배하는 남성의 이득을 위해 발명되고 유지된다고 말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좀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이데올로기가 여성에 대한 수천 년 동안의 직접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352-353)
자신의 인생에 대한 자율권을 갖지 못한 여성은 자신에게 강요된 것을 자발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 밖에는 심리적으로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없다. 인간으로서 자기존엄을 모두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여성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이들과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가장 깊은 이유이며,
강간당했을 때, 자신의 '명예'와 가족의 명예가 침해당했다는 인식을 받아들이는 이유이다.
353쪽
인간으로서 자기존엄을 모두 잃고 싶지 않은 것... 이것이 여성의 약점인가. 아니다, 인간의 약점인데 그런 상황에 처하는 것이 여성인 거겠지. '낭만적 사랑'도 이에 근거하여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 같다.
강간이라는 것이 왜 두려운가, 왜 우리에게 효과를 발휘하는 가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모욕' 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두렵다'.
스톡홀름 증후군이나, 김기덕의 <나쁜 남자> 같은 영화에 공감을 하지 못했다. 나는 왜 '강간'을 두려워하는가.. 생각해볼 문제다. 강간이나 여성 폭력에 대한 책들을 읽기를 미뤄왔지만 이제 더 이상은 미룰 수 없겠다.
강간은 '여성을 치욕스럽게 하는 것', 여성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반박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 '우리에게 강간은 혐오스럽고 경멸스러운 행위이다. 이는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부정하게 한다. 이는 남성 권력의 궁극적인 자기주장이다.' (354쪽)
우리가 인도에서 강간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구체적으로 분석할 때, 우리는 불가항력의 성적 충동을 만족시켜야 할 필요에 대한 것은 거의 발견하지 못한다. 이런 장면에서 '어떤' 충동이 있다면, 이는 남성이 지배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모욕을 가하고, 침해하고, 괴롭히려는 욕망이다. 강간은 한 계급의 남성이 다른 계급의 남성을 벌주거나 모욕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음을 발견하게 된다. (...) 여성은 이 투쟁에서 유력한 남성의 남성다움, 그들의 힘을 증명하기 위한 대상으로 사용된다. (358쪽)
여성에 대한 폭력은 착취적인 남녀관계, 계급관계, 국제관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역사적으로 형성된 현상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 여성은 재산소유자의 범주에 공식적으로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자유' 시민 혹은 역사적 주체도 될 수 없다. 이는 부르주아 혁명의 시민적 자유가 여성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여성이 그렇게 늦게 투표권을 부여받게 된 깊은 이유이며, 결혼 관계 내에서의 강간이 범죄로 여겨지지 않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 여성은 재산 소유자가 아니라 스스로가 재산인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르주아 논리를 따르면, 여성은 자유로운 주체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여성은 계약관계를 맺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노동이나 용역과 관련해 어떤 것을 여성으로부터 끌어내려한다면, 폭력과 강압을 쓰는 것이 필수적이다. (350-352)
여성에 대한 폭력과 강압적인 노동관계를 통해 여성 노동을 갈취하는 것은, 따라서,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부분인 셈이다. 폭력은 자본주의적 축적 과정에 필수적인 것이지, 주변적인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그 축적 모델을 유지하기 위해 가부장적 남녀관계를 이용하고, 강화시키고, 심지어는 발명해내야 했다. 세계 모든 여성이 '자유로운' 임금 노동자, '자유로운 주체'가 된다면, 이윤을 착복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게 될 것이다. 이것이 제3세계에서부터 제1세계까지 가정주부, 노동자, 농민, 창녀 등 모든 여성이 공유하는 점이다. (363)
이 장의 마지막 문장이 좀 아리송하다. 모든 여성이 공유하는 점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강압적인 노동관계를 갈취하는 것' 인 것 같은데, 그 앞 문장이 자유로운 임금 노동자, 자유로운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쓰여 있어서. 그러면 결국 저자는 모든 여성이 자유로운 임금 노동자가 되면, 여성에 대한 폭력은 없어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인가? 모두가 자유로운 임금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모두가 자유로운 임금 노동자, 즉 자본주의의 일부분이 되기를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부분을 바꿀 수 있다니, 논리적으로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7장에서 저자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빨리 보고 싶지만 보는 것이 두렵다. 여기까지 계속 공감하면서 왔는데, 마지막에도 공감할 수 있을지, 또 30년 전에 제시된 대안이 지금도 유용할지. 그런 것이 다 두렵다. 뚜껑을 여는 시기를 늦추고 싶다.
+ <은밀하고도 달콤한 성차별>이나 <아내 가뭄>을 읽으며 '여성이 돈을 버는데도, 어떨때는 남편보다 더 많이 버는데도 가사노동 분담 비율이 낮다, 특히 그것은 출산 이후 심해진다-'
라는 내용이 왜 여러 번 반복해서 강조되었는지 다시 깨닫게 되었다. 전업주부의 사례는 굳이 언급되지 않았던 것도.
1980년대 초에는 여성도 자유 임금 노동자가 되면 자본축적을 위한 불평등에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사회에 진출해서 남성과 비슷한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되었음에도 성별분업, 성차별은 달라지지 않더라- 가 전제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여성의 자유임금노동자화가 100% 진행되면 사회는 뿅! 바뀔 것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현재 자유임금노동자가 ##% 라고 하면 ##% 만큼 여성에 대한 이윤 착복화가 감소할까? 그것도 아닐 거다. 여성의 자유임금노동자화는 진행이 되었는데, 30년이 지났는데 왜 현실은 이러한가- 라고 한다면? 백래시도 있었고... 의식의 변화는 더 느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 1980년대 인도의 사례 (특히 농촌에서) 가 상당히 암울했고, 인도는 '강간의 왕국' 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강간 문제가 현재도 심각한 것 같다. 최근 인도에서 '농업개혁법'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시위가 계속 있었고, 결국 총리가 철회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영상] 인도 농민들 대규모 시위…총리가 굴복한 이유는? (kbs.co.kr)
이 시위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여성들도 많이 참여했는데, 여성들은 후방 지원을 많이 했고 남성들은 수도에서 직접적으로 참여한 것 같다. 6장에 나오는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민족해방의 사례와 유사하다. 농촌에서의 여성의 상황도 (현재 상황이 어떤지 잘 모르지만) 이번 시위 이후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