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번과 마녀>를 읽고 중세가 궁금해져서 <둠즈데이 북>을 읽었다.
2054년, 시간여행이 가능해져 역사학도들이 과거로 가서 문헌이나 유물이 아닌, 실제 경험을 통해 역사를 연구하는 상황. 중세로 옥스퍼드 베일리얼 칼리지의 한 대학생이 실습을 가면서 (field trip이란 말이 딱 맞다)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인플루엔자, 페스트 이야기가 나와서 나름 요즘 시대에 공감이 잘 되는 내용이었다.
사실 내가 갖고있던 것은 10년 전에 나왔던 이 책인데 모 전자책 구독 서비스에 새로나온 버전이 있어서 종이책-전자책을 번갈아가며 읽었다.
번역자는 같고 (SF 많이 번역하신 최용준님이다) 출판사가 다른 두 판의 차이는 내가 느끼기엔 딱 한 가지인데,
예전 판에서 아렌스 교수를 '메리' 라고 번역하고 동료 교수와 반말을 했다면
최근 판에서는 '메리' 를 아렌스 교수 (성으로 부름) 로 바꾸고 서로 존대를 한다.
아주 재미있는 건 아니지만 계속 손이 가서 결국 삼 일만에 다 읽음.
코니 윌리스의 '수다' 가 괴롭다는 평이 많던데 그 수다와 영국식 유머가 아니었다면
(페스트로 사람들 다 죽어가고 있는데 아무도 젖을 안 짜줘서 젖이 퉁퉁 불어있는 암소가
젖 짜달라고 자꾸 주인공을 툭툭 친다거나, 몸이 약한 아들이 공부하느라 크리스마스에도 집에 못 온다며 엄청 걱정하는 엄마가 격리를 뚫고 옥스퍼드 안에 들어왔는데 아들은 매우 건강하게 수많은 여자를 만나 노닥거리며, 그 여자들을 통해 주인공에게 도움을 준다는 식의)
이 이야기를 끝까지 읽기는 힘들었을 것 같다. 사실 어찌보면 상당히 우울한 이야기라..
(코로나 시대가 아니었다면 별로 그렇게 생각 안했을지도)
이후 시간 순서대로 <화재감시원> (이 책에 실린 같은 제목의 중편이다) 를 읽었다.
(옥스퍼드 시간여행 시리즈는 작품 내의 시간 순서대로 <둠즈데이북> -<화재감시원>-<개는 말할 것도 없고>-<블랙아웃>-<올클리어> 이렇게 다섯 개의 이야기로 되어 있다. <화재감시원>이 출판 시기는 <둠즈데이북>보다 빠르지만.)
<화재감시원>은 바솔로뮤란 학생이 2차대전 당시 런던으로 시간여행을 가서 소이탄 공습으로부터 세인트 폴 대성당을 지키는 화재감시원 체험(?)을 하는 이야기이다. (대학 교수란 사람들이 학부생을 그렇게 위험한 곳에 보내다니!)
세인트폴 대성당이 영국 역사상 중요한 행사가 많이 열린 곳이고 상징적인 의미가 큰 것 같긴 하지만, 위험하게 자원 봉사를 해 가며 왜 그렇게까지 구하려 하는가에 대해 매사 실용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영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잘 이해가 안 되었다.
작가가 나이가 좀 많긴 한데, 공산주의를 싫어하는건지, 아니면 모든 걸 공산주의 탓으로 돌리던 냉전시대를 비꼰건지? 공산주의자가 이 성당을 파괴했다고 원망하는 부분도 잘 이해가 안 되었다. 어느 쪽이든 굳이 그렇게 설정했다는 것에 대해 솔직하다고 해야할 것 같다.
<둠즈데이 북>처럼 재잘재잘 수다를 늘어놓지만, 여전히 과거에 있었던 괴로운 (사람들이 많이 죽는) 일을 시간여행으로 경험하는, 숙연해지는 이야기였다. 바솔로뮤가 실습 이후 시험을 치를 때 역사에 대해 무거운 메시지를 던지기도 했고. 2054년에는 시간 여행을 통해 기록되어 남은 강자의 역사가 아닌 보통 사람의 역사를 연구할 수 있게 되었겠지. 그러나 이미 옛날에 죽은 과거의 사람과 만난다는 설정 자체가 무슨 일을 겪든 서글프게 만드는 것 같다. 어쩌겠어, 인간이라는 존재가 그리 유한한 걸. 시간 여행은 갈 수 있어도 역사를 바꿀 수 없는 걸.
지질시대 시간 규모로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잠시 생각하니 끔찍하다. 사람도 아닌 다른 걸 상대하기는 힘들듯.. (공룡이라던가, 삼엽충이라던가) 그리고 어차피 오랜 시간이 걸리는 프로세스들은 관찰할 수가 없다. 시간을 빨리 돌리는 것도 가능하면 좋겠지만?
지금까지 있었던 가장 재미있는 일은 고양이를 본 것이다. 나는 고양이에게 푹 빠져 버렸지만 그렇지 않은 척하려 애썼다. 이곳에서는 고양이가 흔해 보였기 때문이다.
화재감시원 중
2054년에는 고양이가 존재하는 것 같지 않아 마음이 아팠다. 멸종했다는 설정인가? 뉘앙스 상으로 보면 코니 윌리스도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둠즈데이 북>을 한참 읽을 때 아이가 대체 무슨 책인데 그렇게 열심히 읽냐며 물어보기에 3일 밤에 걸쳐서 요약-윤색하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화재감시원> 마지막에 의외의 말이 들어있어 놀랐다.
선생님들, 학생들에게 책을 읽어주세요.
부모님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세요.
하지만 여러분이 볼 때 아이들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모두가 읽거나, 나이에 맞거나 또는 적당한 주제의 책 말고요.
부적당한 책을, 다른 사람들이 지루하다고 생각할 만한 책을 읽어주세요.
여러분이 좋아하는 책을 읽어주세요.
아마도 여러분은 아주 오랜 뒤에 싹이 틀 그런 씨앗을 심는 것이 될 겁니다.
20년 뒤에 갑자기 꽃피울 그런 싹을 말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아주 밝고 아름답지는 않은 코니 윌리스다운 조언이었다 :)
내가 읽어주는 걸 좋아하지 않아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걸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어른 책을 읽어준다는 제안은 매우 솔깃하게 들렸다. 아이도 그렇기를. 수면 독립을 시도하며 읽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서 읽을 책 말고 다른 책, 새로운 책을 접할 좋은 기회가 되겠지. 이제 점점 어른의 책장도 넘볼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