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침대에 며칠을 꼬박 누워 지내던 때 이 책을 읽었다.
유명한 이 책을 알게 된지는 꽤 되었다. 제목의 뉘앙스를 잘 파악할 수 없었으나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전쟁의 이미지와는 관계가 없지만 전쟁이라는 것에 참전한 여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고 생각했다.
이전에는 여성의 참전 사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막연히 간호병 등으로 참전했겠거니 생각했다. 마리아 미즈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를 읽으며 사회주의 국가 (소련, 베트남 등) 에서 여성들이 여성문제와 관련된 투쟁을 접어두고 계급투쟁 혹은 국가를 위한 해방전쟁에 참여하였으나 이후에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접한 적이 있다.
막연히 그런 부분도 좀 접할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이 책에서는 그런 이성적인 이야기가 아닌 참전자들의 '목소리' 를 다루고 있었다. 이성을 중시해야 한다 믿으며 살아온 사람이지만 이성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므로 이런 방식이 전쟁에 대해, 사람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줄 수 있었던 것 같다.
다 읽고나서 2월 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본격 침공하면서 이 이야기는 역사가 아닌 현실로 다가오게 됐다. 2차대전과 아프가니스탄 전을 경험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전쟁은 줄곧 현실이었을 것이다.
올라오는 글들을 보며 다시 읽을 엄두는 내지 못했고, 밑줄을 다시 읽으며 정리만 해 보았다.
위대한 사상이 뭐라고 (지금은 러시아에 위대한 사상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고).
평범하고 작은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본인의 바람과는 관계없이 인간의 잔인성을 경험하고 있다는게 슬프다.
(출판 검열관과 나눈 대화에서)
—그건 사실이 아니오! 유럽의 반을 해방시킨 우리 병사들에 대한 중상모략이란 말이외다. 그건 우리 빨치산에 대한 모독이고 우리 민중의 영웅들에 대한 모독이오. 우리는 당신의 그따위 저급한 이야기는 필요하지 않소. 위대한 이야기가 필요하지. 승리의 이야기 말이오. 당신은 우리네 영웅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군! 우리의 위대한 사상 역시 좋아하지 않고. 마르크스와 레닌의 위대한 사상을 말이오.
—맞아요. 나는 위대한 사상 같은 건 좋아하지 않아요. 나는 평범한, 작은 사람을 사랑하니까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은 2차대전이 미국 혼자 히틀러와 싸워 승리한 전쟁으로 알고 있어요. 소련 사람들이 그 승리를 위해 치른 대가,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소련 사람이 치른 2천만 명의 목숨값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아요.
우리는 사람이 사는 데는 목숨보다 더 소중한 뭔가가 있다고 믿었던 시대를 지나왔어요. 그때는 조국이 위대한 사상이었지. 스탈린도 그렇고.
나는 운전병이라 포탄 상자들을 운반했어. 운전을 하고 가면 죽은 독일군 병사들의 두개골이 차바퀴에 깔려 바드득바드득 부서지는 소리를 냈어…… 뼈도 으스러지고…… 너무 행복했지……
전쟁터에서는, 말하자면, 반은 사람이고 반은 짐승이어야 해. 그래야만 하지……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말이야. 만약 사람답게만 굴잖아? 그러면 살아남을 수가 없어. 단번에 머리통이 날아가버리지! 전쟁터에서는 뭔가 하나 정도는 자신에 대한 기억을 붙잡을 필요가 있어. 그래, 뭔가 하나쯤은…… 아직 자신이 사람다울 때, 그 사람다웠던 모습 중 하나는 기억해둬야 해……
—내겐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많은 반면, 집사람에겐 전쟁에 대한 감정이 더 많아요. 하지만 언제나 감정이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강력한 법이지.
그렇다고 그 아이들이 모두 군율에 복종하는 것도 아니었어요. 여자의 천성은 원래 군대 질서에 반하는 거니까. …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모든 의심과 우려는 깨끗이 사라졌어요. 소녀병사들은 진짜 군인이 됐소. 나는 우리 소녀병사들과 함께 참으로 험난한 길을 지나왔어요.
우리 소녀병사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냐고? 체르노바라는, 임신중인 친구가 있었지. 그 친구는 지뢰를 자기 옆구리에 끼워 날랐어. 새 생명의 심장이 뛰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이제 좀 이해가 될 거야.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우리가 왜 그랬는지 굳이 따져볼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그냥 그런 사람들이었을 뿐이야. 우리는 조국과 우리는 하나라고 배우며 자랐지. 어린 딸을 데리고 시내 임무에 나선 친구도 있었어. 딸아이 몸에 선전 삐라를 칭칭 돌려 감고 원피스를 입혀 감췄지.
우리는 동정이 필요한 게 아냐. 우리는 우리가 자랑스러우니까.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역사를 고쳐 쓰라고 해. 스탈린을 넣든지 빼든지 알아서 쓰라고.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남겠지. ‘우리가 승리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의 고통도. 우리가 겪은 그 아픔들도. 그건 잡동사니 쓰레기도 아니고 타다 남은 재도 아니야. 그건 바로 우리네 삶이지.
처음에 우리는 과거를 숨기며 살았어. 훈장도 내놓지 못했지. 남자들은 자랑스럽게 내놓고 다녔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어. 남자들은 전쟁에 다녀왔기 때문에 승리자요, 영웅이요, 누군가의 약혼자였지만, 우리는 다른 시선을 받아야 했지. 완전히 다른 시선…… 당신한테 말하는데, 우리는 승리를 빼앗겼어. 우리의 승리를 평범한 여자의 행복과 조금씩 맞바꾸며 살아야 했다고. 남자들은 승리를 우리와 나누지 않았어. 분하고 억울했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전선에서는 남자들이 우리를 존중했고 항상 보호해줬는데. 그런데 이 평온한 세상에서는 남자들의 그런 모습을 더이상 볼 수가 없는 거야.
우리 딸내미들 중에는 불행하게 사는 아이들이 많아요. 그건 전쟁터에 나가 싸운 엄마들이 자기들이 살았던 전선의 방식으로 딸들을 키웠기 때문이오. 아빠들도 마찬가지고. 전선의 윤리로 말이오. 전쟁터에서 사람은, 당신한테 이미 말했듯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가치를 지닌 사람인지 단박에 드러났소. 그곳에선 감출 수가 없거든. 우리 딸들은 세상엔 다른 방식의 삶도 있다는 걸 상상도 못했소. 부모들이 딸들에게 이 세상의 감춰진 추악한 이면은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결국 우리 딸들은 사기꾼 같은 작자들의 좋은 먹잇감이 돼 결혼했고, 그 사기꾼들은 우리 딸들을 잘도 속여넘겼소. 속이기가 식은 죽 먹기였을 테니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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