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이 읽고 같이 이야기 나누고 싶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내 머릿속엔 왜 이걸 나한테 같이 읽자고 했을까? 하는 생각만 든다. 일단 너무 재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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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보이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박현주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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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귀고리 소녀>의 작가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오셀로>의 현대식 리메이크. 1970년대 (말콤 엑스와 마틴 루터킹 주니어가 언급된다) 미국을 배경으로 인종차별 부분을 좀더 부각시켰으며, 주요인물이 10대가 되었다.

초반 치밀하게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나의 십대시절이 회상되어 읽기가 힘들었다. 그 시기부터 그렇게 예민하던가..? 예민함과 미숙함이 함께 만나 잔인함으로 발현되는 것을 보며 잊고있던 에피소드들이 떠올랐다. 

원작도 그렇듯 충격적인 이야기지만.. 이렇게 쓸 수 있다니 놀랍다. <마녀의 씨>에 이어 <뉴 보이>도 상당히 좋았기에 호가스가 출판한 이 시리즈를 다 읽어보겠다고 마음 먹었다. (앤 타일러의 <식초 아가씨>는 아주 기대되지는 않지만)


"요즘 애들은 쉬는 시간에 사귀고 점심시간에 깨진다잖아요. 그런 시대예요."

오세이는 이언에게로 눈을 돌렸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한 거야?"

이언은 어깨를 으쓱했다.

"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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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까지 로맨스 판타지를 한 일곱 편 읽었다.


시작은 <루시아>









가장 최근에 읽은 소설은 (아직 완결 안됐지만) <상수리 나무 아래>

https://ridibooks.com/books/4766000001 이다. 



그 중 다섯 편을 작년 올해 읽었는데 읽을 때는 정신없이 읽지만 다 읽고 나면 '나는 왜 이걸 이렇게 열심히 읽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읽으려고 사 둔 책이 그렇게 많은데 휴대폰으로 눈이 빠져라 결제까지 해가면서 봐야 했는가? 이제는 로맨스라는 것이 나랑 전혀 관계없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고, 또 페미니즘 책 읽으면서 더욱 낭만적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는데 왜 이걸 재미있게 읽고 있는건가 싶었다.



대개 스트레스를 엄청 받고 있을 때 누가 재미있다고 알려주거나, 광고를 보면서 읽기 시작하게 되었는데


1) 일단 재미가 있고

2) 내가 판타지 장르에 거부감이 없으며

3) (연애 경험이 있으므로) 내용 이해와 공감이 어렵지 않고

4) 연재물 특성상 끊으면 안될(?) 곳에서 끊기 때문에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멈추기 힘들다


이런 이유들이 나로 하여금 잠도 줄여가며 보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7편밖에 안 읽었지만 그 중 6개 정도가 아래와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서


1) 중세 기사물

2) 남주: 검은머리의 기사, 몸짱, 냉미남, 여주에게만 잘하고 다른 여자한테는 냉정한 '나쁜 남자'

3) 여주: 출생의 비밀 등 약점이 있고 연약함

4) 중세물이기 때문에 연애하기 전 이미 결혼을 하고 시작


이런 특성들이 왜 독자에게 잘 팔리는가가 좀 궁금했다.


그래서 이 책에 그런 내용이 있지 않을까 하고 읽어보기 시작..



책을 읽어보니 로맨스 판타지의 세계는 제 생각보다 더 광범위하고 '육아물' 이라는 장르도 있다고...


어린 주인공이 애교나 특별한 재능을 발휘하여 아버지나 오빠 등 가족이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거나, 어머니나 아버지, 혹은 보호자가 주인공이 되어 아이를 양육하는 경우까지 포함한다.

- 12쪽


(안 읽어봐서 모르겠지만.. 이런 게 재미있을 수 있단 말인가?!)


책의 서문에 따르면


웹소설이 종이책과 다른 점은 동시대의 독자들과 '호흡'을 같이 하는 문학이며, 로맨스 판타지는 철저하게 동시대의 여성 독자를 위한 이야기라고 한다. 연애가 전제되는 장르 특성상 인물들 간의 '관계'가 많이 다뤄지는데, 대상 독자인 여성들이 '관계'에서 비롯된 사회적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는 것의 반영이기도 하다고.. 그러고보니 <루시아>나 <상수리나무 아래>에서는 가족관계로부터 상처받은 주인공이 남자주인공에게 긍정되면서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저자가 지켜본 바 2014년-2021년 초 로맨스 판타지는 작가와 독자 간의 활발한 상호작용에 의해 독특하게 발전-변화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 한국에서는 페미니즘이 많은 관심을 받았고,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그 관심이 공유되고 퍼져나갔다. 웹소설이라는 장르 특성상 (회차마다 댓글란이 있어요) 활발한 상호작용이 가능했고 그에 따라 독자들의 요구를 신속하게 반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얼마전 희곡을 함께 낭독하는 모임에서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읽었다. 물론 옛날에 쓰여진 작품인 걸 알지만 멤버들의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에도 불구하고 상황에 몰입이 잘 안되는 거다. 지나치게 순종적인 여주인공과 남의 말만 (그 사람이 말을 참 잘하긴 하는데) 듣고 아내를 죽이는 남편이라니..










그런데 로판은 중세시대가 배경인데도 그 정도로 몰입이 안 되지는 않는다. 웹소설의 작가들도 분명 본인이 쓰고싶은 걸 쓰기는 하겠지만 대상 독자가 나름 분명하고, 끊임없이 댓글로 자극받고, 판매부수가 바로바로 보이므로 이 시대의 독자가 무엇을 원하는 지에 작품이 훨씬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로맨스가 받았던 전문성, 예술성이 없다는 비난과 등단의 문턱이 낮다는 웹소설의 특징은

바꿔 말하자면 로맨스 판타지의 화자가 바로 '보통 사람' 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보통 사람'들의 욕망과 희망은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또 다른 '보통 사람'인 우리와 공명한다.


- 9쪽, 추천의 말 중



내가 읽은 로판들의 남자주인공은 대개 내 여자에게만 친절한 '나쁜 남자' 였다. 이 남자들이 상당히 '남성적'이고 특히 육체적으로 강인하고 (그래서 밤일도 잘 하고) 여주를 보호해주는 대신 공감능력이 떨어지고 상당히 가부장적이다. 이 부분은 좀 거슬리는 부분이었는데.


요즘은 이전에 주로 서브 남주로 나왔던 '친절하고 공감 능력이 있으며 여자 주인공과 대화가 잘 통하는' 남성들이 좀더 발전하여 '조신하고 순결하고 살림 잘하고 다정한' 남자 주인공도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것도 여성들의 변화하는 '취향'의 반영일 것 같다.


또 배경이 중세임에도 불구하고 '회귀' 하거나 '환생' 하는 설정으로 경험이 풍부한 여주들의 경우 그 경험을 바탕으로 남주에게 정치적인 조언을 하거나, 그 시대에 매력적인 아이템이 될 수 있는 상품을 개발하여 사업을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나름 진취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여전히 주인공들의 외모는 아름답다는 설정이지만, '신분'이나 '사랑'만으로는 인정받기 어렵다는 생각이 깔려있는 것 같다.


그밖에 여주들은 대개 남편과는 사이가 좋지만 아버지와는 어린 시절 갈등을 겪었다는 설정이 많은데, 이것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갈등을 조금 더 안전하게 (성폭력이나 성적인 착취의 위협 없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었다. '성적 긴장이 제거된' 나쁜 남자라고.


또 여주인공을 주로 '귀족 여성'으로 설정하는 것이 미혼 여성으로서 안전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적 지위를 원하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또 요즘에는 '여적여'의 구도가 사라지는 추세라고 한다. 오히려 여주인공의 성장을 도와주는 서브 여주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 같다. 



다른 로판들은 연재가 끝난 뒤 읽었는데, <상수리나무 아래>는 아직 연재중이다. 그래서 한 번 쭉 읽고 다시 재독을 했는데 (그러니까 웬만한 책은 다시 읽지 않는 내가 로맨스 판타지를 재독... 완결이 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재독하면서 이제 여유도 좀 있겠다 댓글을 읽다보니, 댓글 읽는게 너무 재미있는 거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암시적인 요소들을 말해주는 댓글도 있고, 등장인물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댓글도 있고, 또 앞으로 어찌어찌 진행되면 좋겠다- 이런거 해주세요- 하는 댓글도 있고... 또 누가 불평을 하면 (여주인공이 좀더 적극적이었으면 좋겠다든가 하는) 누가 그것에 대한 의견 (성장 과정을 고려해줘야 한다.. 등)을 달기도 하고. 알라딘 서재에서 글에 댓글 다는 것처럼.. 그래서 재독임에도 불구하고 무척 즐거웠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재미도 느꼈지만 동시대 여성들과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고, 공감하면서 위안도 받았던 것 같다. 사람들이 이런 생각 하는구나.. 하면서.



저자는 로맨스 판타지의 생명력이란

"여성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나아가 아무런 조건 없이 이를 응원하는"

데서 나온다고 말한다.


6쪽, 추천의 말 중



그리고 로맨스 판타지가 딱히 고상하거나 문학적 가치가 높은 장르는 아니라 하더라도, 여성의 욕망을 그대로 보여주고 응원해준다는 점에서 이걸 읽는다는 걸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네 사실은 좀 그랬습니다) 했다. 이제 로맨스 판타지는 나에게 길티 플레저 아니고 그냥 플레저 인걸로. 그래서 이제 책에 있어 나의 길티 플레저는 '책에 관한 책' 그냥 플레저는 '로판' 이 되었다. (응??)



여성에게 로맨스가 남성에게 포르노 같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절판된 이 책을 빌려뒀는데, 아마 못 읽고 반납할 것 같다. 읽고 싶으면 다음에 다시 빌려 읽는 걸로...









그러니까, 요즘 (여러가지 일로) 스트레스 만땅 받으며 <상수리나무 아래>를 읽느라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이건 원래 안 읽으려고 했지만) 

<가부장제의 창조> <레이디 크레딧>

을 읽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7월도 벌써 20일이네..  


참고로 <상수리나무 아래>는 무척 재미있다. 19금이라서 야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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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는 왜 로맨스 판타지를 읽고 있나
    from 수하의 서재 2022-08-23 16:16 
    저번에 이런 https://blog.aladin.co.kr/suha/13780881 글을 썼고 직후에 작가의 사정으로 내가 보던 로맨스 소설의 연재가 중단됐다 (역시 연재물에는 손을 대는 게 아니라는 교훈). 구글과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등이 내가 웹소설을 읽고 있다는 걸 아는 듯 나에게 새로운 웹소설을 자꾸 들이밀었다. 그래서 또 새로운 걸 읽게 되었고, 그것도 연재중이고, 하루에 아주 짧은 분량 올라오는데 사실 그닥 재미가 없는데도 결말이 비슷해서
 
 
mini74 2022-07-20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야하기도 하군요. ㅎㅎ 한때 회귀물 복수물 좋아해서 한참 봤었어요. 아마 과거로 돌아가 로또 번호를 알고싶었던 제 욕망의 발현이 아니었을까요, 아님 저런 남자 구경이라도 한 번 해보고 싶은 ㅎㅎㅎ 수하님도 글 참 재미있게 쓰세요. 술술 읽히면서 상수리나무에 대한 궁금증이 *^^*

건수하 2022-07-20 20:26   좋아요 1 | URL
로또번호… 그거 좋은데요 _
상수리나무가 좀 야한데요, 야하기만 한 건 아니고 여주 남주의 로맨스도 (로맨스 별로 안 좋아하던) 꽤 애절하고 재미있습니다 ^^ 무료로 5화 정도 보실 수 있으니 리디 계정 있으시면 맛보기 해보셔요 ^^!

독서괭 2022-08-02 15: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그래서 가부장제의 창조와 레이디 크레딧을 못 읽으셨다는 결론이 ㅋㅋㅋㅋㅋ <루시아>도 야하죠 ㅋㅋ 로판에 대한 분석이 흥미롭네요. 저도 최근 트렌드가 여적여 없고, 조신한 남주, 적극적인 여주인 것 같아 더 재밌더라고요. 육아힐링물은 약간, 내 유년도 이랬으면..하는 마음의 반영이 아닐까 싶어 안타깝기도..

건수하 2022-08-02 16:37   좋아요 2 | URL
독서괭님 날카로운 지적 ㅎㅎ
레이디 크레딧은 거의 다 읽었는데 7월을 넘겨버렸네요. 가부장제와 창조는 3장까지 읽었나... 아직 멀었어요. ㅠㅠ
이번달엔 <레이디 크레딧>을 얼른 다 읽고 <임신 중지>를 읽은 뒤 시간이 남으면 <가부장제의 창조>를 마저 읽어보려고 합니다 ;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에서 발행하는
테마가 있는 계간 무크지 <마니에르 드 부아르> 에서

『페미니즘, 미완의 투쟁』 란 제목으로 특별호를 낸다고
텀블벅 소식을 알려줘서 냉큼 신청했다.

https://www.tumblbug.com/manieredevoirfeminisme

아마 목표금액 다 차고 나중엔 서점에 풀리겠지만
이름도 넣어볼까 하고 ㅎㅎ

아, 금액은 18,000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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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찾기와 민들레 법칙

며칠 전 아이를 데리러 갔다. 차에 타자마자 "엄마 '회전목마' 라는 노래 틀어줘!" 라고 해서 찾았다. 

이건 자이언티 목소리? 그런데 소코도모는 누구지? 멜로디가 단순하고 좋은데 신나면서도 어딘가 슬픈 느낌이 든다. 

가사를 들으니 이거 초등 애들이 듣고 좋아할 노래가 아닌 것 같은데... 

어제 퇴근길에 들으니 더 슬펐다.  


(찾아보니 작년에 유행했던 노래였다. 왜 난 들어본 적도 없고 소코도모 이름도 모르지...) 


  



내가 슬플 때마다 이 노래가 찾아와

세상이 둥근 것처럼 우린 동글동글

인생은 회전목마, 우린 매일 달려가

언제쯤 끝나, 난 잘 몰라 


빙빙 돌아가는 회전목마처럼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빙빙 돌아온 우리의 시간처럼

인생은 회전목마



단발머리님이 쓰신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리뷰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3724270 에서 책 내용과는 별로 관계없는 댓글을 달다가 내가 페미니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언제인지 생각하게 됐다. 비오는 퇴근길, 이 노래를 계속 들으면서. 


나는 원래 인생이 다 그런거지 뭐- 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사고란 건 저 멀리 위험한 곳에서 날 수도 있지만 집 앞 사거리 앞에서도 날 수 있는 거고, 내일 갑자기 내가 죽는다면 그건 할 수 없는거지,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아이의 부모가 되기 전까지는 특히 그랬고, 이제는 남기고 가는 사람이 있어 나의 죽음에 대해 조금 걱정한다. 기후 위기에 막연한 책임감을 느끼고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려고 하지만, 46억년 지구의 역사에서 인류가 차지하는 시간은 매우 짧고, 원래 지배종이라는 건 일정 기간이 지나면 멸종하기 마련이니까 인류는 언젠가 멸종해도 할 수 없다 생각한다. 삶에 굳이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즐거우면 된 거지. 그렇게 계속 하루하루 살아왔다. 회전목마를 타고 돌듯. 


그런데 어제 댓글을 달고 보니 나는 요즘 즐거운 것 외에 다른 생각도 많이 하며 살고 있다. 괴롭지만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대한 생각도 하고, 책을 읽고, 왜 세상은 바람직하게 돌아가지 않을까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까 생각한다. 내 인생을 바꿀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삶에 의미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게 맞나? 그럼 왜 이러고 있지? 의문이 들었다. 



단발머리님이 내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정치적(?)이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으로 말씀하신 건지 알겠지만 정확히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생각해본 적이 없기도 하다. 그래도 내가 언제 어떤 계기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는 알고 있다. 


하루하루 살아가다가 '뭔가 이게 아닌데' 라고 생각하게 된 건 막 아이가 뱃속에서 자라기 시작했을 무렵이다. 그때 나는 정규직 취업을 앞둔 소위 '내정자' 였다. 아이가 생겼고, 내가 담배연기를 피하고 술을 안 마시면서 임신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집 분야를 바꿔버렸다. 마음이 많이 상했지만 다른 선택지를 택하기보단 배우자와 같이 살 수 있는 곳에 취업하기로 마음 먹고 다시 자리가 나기를 기다렸다. 한 번 겪었기에 육아휴직을 쓸 엄두는 내지 못했다. 3개월 출산휴가만 쓰고 복직했고 2년 뒤 결국 같은 자리에 취업을 했다. 


그 전에는 살면서 내가 여성이라서 불이익을 본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 못했다. 가정 내에서는 남자 형제와 비교하여 불만이 있었지만 큰 불만은 아니었고 나는 잘 참았다. 조금 불편함이 있어도 열심히 하면 답이 있다 생각했고 가끔 소극적으로 여성을 꺼리는 분야, 성추행 전적이 있는 교수를 피하는 정도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임신과 육아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더라면 아이를 낳을 생각을 안했을 지도 모르고, 뭘 몰랐기에 그런 결정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요즘 2-30대 여성들의 비혼 비출산 결정에 십분 공감한다. 마이라 스트로버의 <뒤에 올 여성들에게>를 보면 임신 사실을 숨기고 면접을 보러 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굳이 숨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마이라 스트로버는 현명했다. 그러나 내가 숨기고 취업에 성공했다면, 그 괴로운 일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조금 다를 것 같다. 여전히 앞만 보고 가고 있을지도. 












모집 분야를 바꿔 다른 남자 직원을 뽑은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는 된다. 출산과 육아를 거치며 업무 공백이 없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를 완전히 대체할 사람이 없다면 그걸 감수하고 사람을 뽑아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출산율을 걱정한다면 특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어쨌든 나는 취업 전 이미 나의 보스에 대한 충성심 따위는 멀리 던져버렸고, 취업 후에는 적당히 나 하고싶은 만큼 하며 살아왔다. 그 전처럼 열심히 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육아도 하고 삶도 즐기고.. 그리고 지금은 페미니즘 공부도 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퇴근 후에도 일 생각만 하겠지만 나는 퇴근 하면서 머릿 속에서 일 생각의 스위치를 꺼버린다. 같은 직장의 혹자, 특히 남자 직원들은 나를 이해하기가 힘들 거다. 



아이를 낳고서부터 인문학 책에 관심이 많아져 잘 읽지도 못하면서 열심히 사들였다. 그때는 페미니즘과 관련한 대중서는 별로 없고 학술서만 많아서 읽을 엄두를 잘 내지 못했다. 2016년 강남역에서 일어난 묻지마 살인사건 이후 페미니즘 붐이 일었지만 사는게 너무 피곤했던 때라 동참하거나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 


코로나가 시작될 무렵 육아휴직을 냈다.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마지막 해였고 일년 전부터 팀원들에게 미리 여러 번 말했다. 보스는 놀라며 둘째가 생겼냐 물었고 (위에 그 보스 맞다), 아이가 이제 많이 컸는데 왜 쓰는지 의문을 갖는 사람도 많았다. 써도 괜찮겠냐, (업무 공백에 대해서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나의 개인적 성취에 공백이 생길까봐 우려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휴직기간을 알차게 보내려고 마음 먹었다. 그동안 아이와 못 가본 곳도 (평일에) 많이 가고, 아이 친구들과도 놀게 해주고... 방학 때는 여행도 좀 먼 곳으로 가볼까? 제주도? 영어를 이제 조금 읽을 수 있으니 영어권 국가에 가볼까? 돈도 일년 전부터 미리 모아놨다.  

그런데 아이는 학교도 안 가고 나와 집에만 있었다. 그 해 내가 한 건 하루 세 끼 식사와 간식 챙기기, 아이와 산책하기, 온라인 수업 등 챙겨주기, 불안한 사람들과의 메신저 대화, 그리고 책 읽기 뿐이었다. 잠시라도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그래서 당시 상황과 전혀 관계없는 내용인 줄 알면서도 <자기만의 방> 을 읽었다. 그리고 정아은의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을 읽었다. <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를 읽었다. 내가 읽고 이해할 수 있는 페미니즘 책이 많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그리고 작년에는 페미니즘 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을 만들었다. 줌이란 프로그램이 각자 먼 곳에 있는 (다른 나라에 있는 사람까지도)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작년에 내가 한 일중 그 일이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고 난 후로는 성별 때문에 부당한 취급을 받고있다는 생각이 들거나 맘에 안 드는 일이 있을때 참다가 한 번 울컥하거나, 짜증을 내는 일이 적어졌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내가 잘못해서 그런게 아니고 인간 사회가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전에도 몰랐던 건 아니지만 여러 사람들이 그걸 설명하는 걸 보면서 이게 언제부터 어떻게, 왜 그렇게 되어왔고 왜 바꾸기 힘든지를 이해하게 되니까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그리고 나의 행동 양식도 조금씩 바뀌었다. 다른 사람의 기분에 무조건 맞추기보다 지금 내가 어떤 기분인지 살펴보게 되고, 남편이나 아이에게 무리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무리와 최선.. 상충하는 단어인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고싶은 만큼 해도 충분히 많이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전에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곳에서 나의 목소리도 내고있고, 그걸 더 확장시키려고 생각하고 있다. 


전에는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에 불만이 많았는데, 이제 나를 좀더 사랑하게 된 것 같다. 

아, 나는 삶의 의미를 찾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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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의 페미니즘 모멘트
    from 책이 있는 풍경 2022-07-05 15:26 
    수하님의 <페미니즘 입문의 계기>에 이어서 쓴다. ‘정규직 내정자’를 채용하지 않기 위해, 임신한 여성을 채용하지 않기 위해, 채용 후 출산 휴가를 주지 않기 위해, 모집 분야를 바꿔 다른 남자 직원을 뽑는 사람들의 마음을, 수하님은 이해한다고 썼다. 나 역시도 그랬을 거 같다. 세상이 온통 남자들 세상인데 여자들에 대한 배려를 기대하는 건, 그래, 너무 과하다. 하지만.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배신감, 실망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단발머리 2022-07-01 13:5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 수하님, 너무 좋네요. 수하님의 페미니즘 모먼트는 이랬었군요.
임신과 출산 휴가, 그리고 육아의 시간 속에서, 특히나 아이와 24시간 함께 하는 시간들이 수하님을 <자기만의 방>으로 이끌었군요.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도 다 적합한 시기에 수하님을 만난 거 같아요. 꽃은 그렇게 피는 것 같아요. 잘 준비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그렇게 팍!! 피어버리죠.
페미니즘 줌 모임 만드셨다는 거, 정말 대단하고 멋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자랑스러워하셔도 되겠고요. 그 예쁜 꽃의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수하님 뿐만 아니라 모임 같이 하시는 분들도 그 열매가 주는 즐거움을 마음껏, 오래오래 누릴 수 있으시길 바래요.

저는, 결혼하고 나서 제 위치가 남편의 위치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동등하게 취급받던 우리가 시댁과 친정에서 다르게 대우받는 걸 보면서 의문이 시작된 케이스에요. 모두 다 그렇게 산다고 생각하던 즈음, 강남역 사건 이후에 알라딘에서 여성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있었구요. <빨래하는 페미니즘>이 저의 그런 읽기에 시작이 되었습니다. 나만 그러고 산다는, 혹은 우리 시댁만 그렇다는, 또는 우리나라만 그렇다는, 그런 생각에 머물렀던 제가, 다른 여성들이 국가와 시대, 민족, 계급을 넘어서서 ‘성‘과 ‘육체‘의 존속을 통해 억압받고 있다는 걸 조금씩 발견하면서 더 많이 알고 싶어졌구요. 그래서, 조금씩 더 찾아읽게 되었습니다.

전, 전업주부여서 저의 그런 읽기가 ‘배부르고 한가한 소리‘로 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요 ㅎㅎ 페미니즘 책을 읽을 때, 제가 항상 기억하는 부분입니다. 저의 위치성, 저의 자리, 제가 가진 작은 특권 같은 거요.

우리의 이야기가 ‘의미‘에서 시작했잖아요. 의미에 대한 집착이 제게는 아직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인과를 넘어서는 사고를 하고 싶지만, 아직도 그건 잘 모르겠구요. 이 지구는, 아쉽게도 우리 인간들 때문에 곧 망하겠지만, 자신의 선택이 아닌 것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물음과 해답을 찾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대한 가장 확실하고 평화로우며 지혜로운 답이 페미니즘에 있다고 생각하고요.

저도 곧 페미니즘 모먼트로 돌아올게요. 근데 제가 글 쓴다고 여기저기 약속한 것들이 많아서 금방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ㅋㅋㅋㅋ
오늘 비가 안 와서 좋으네요. 날 개었다고 금방 좋아하는 이 하찮은 인생에게 오늘의 햇빛처럼 반갑고 좋은 글 감사합니다.
수하님, 우리 자주 만나요!!!

건수하 2022-07-01 14:12   좋아요 5 | URL
단발머리님 덕분에 그냥 지나갈 것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정리해서 글로 쓰고 나니 제 마음 속도 정리가 된 것 같고 한 계단 오른 것 같은 느낌, 후련해요 ^^

저도 이제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여자인 거네요 :)

글 천천히 써주세요, 저도 천천히 읽을게요.

다락방 2022-07-01 14:1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어휴 뭐 제가 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완벽한 페이퍼에 완벽한 댓글이네요. 아 그런데 왜 눈물이 핑돌죠?
이런 글을 써주셔서 감사하고요 수하님, 이런 댓글을 달아주셔서 감사해요 단발머리 님. 어휴 이분들이 오늘 저를 울리시네요 ㅠㅠ

건수하 2022-07-02 10:51   좋아요 3 | URL
저도 쓰면서 울컥… 너무 개인적인 내용을 자세하게 썼나 싶지만 쓰고나니 되게 후련하고 좋아요.

거리의화가 2022-07-01 14:17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 참으로 공감합니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이유~를 찾는 것이 페미니즘 공부의 하나의 목적인 것 같아요. 수하님 화이팅!

건수하 2022-07-02 12:09   좋아요 3 | URL
그게 꼭 필요한건가 생각했는데, 저도 모르게 찾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화가님 감사합니다 ^^

수이 2022-07-01 15:4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수하님의 페미니즘 입문기 읽고 있노라니 햇볕 쨍한 날 좋네요. 남편이나 아이에게 무리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도 좋고, 제일 좋았던 문장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곳에서 나의 목소리도 내고 있고, 그걸 더 확장시키려고 생각하고 있다.˝ 더 확장하시고 더 자주 수하님 목소리 들려주세요.

건수하 2022-07-02 12:11   좋아요 3 | URL
그 곳에 서재도 포함이 되겠네요 ^^ 개인적 고백보다는 유익한(?) 이야기를 많이 쓰고 싶습니다 :)

그레이스 2022-07-01 17: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이퍼 너무 좋아요
육아 휴직은 쉬는게 아닌데,
육아 휴직 말고 다른 말 없을까요?
수하님의 ‘나를 찾는 공부‘ 응원합니다!

저 ‘회전목마‘ 넘 좋아해요~^^

건수하 2022-07-02 12:18   좋아요 2 | URL
그러게요 휴직=휴식이 아닌데, 쉬니까 어때? 라고 말하면 기분이 별로예요. 이전부터 애볼래 밭맬래 라는 이야기도 있었다는데 사람들 인식은 안 바뀌는건지 안 바뀌고 싶은 건지..

응원 감사합니다 그레이스님 ^^

공쟝쟝 2022-07-01 18: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참 좋고 수하님을 좀 알게된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수하님 수하님도 혹쉬 인티제? ㅋㅋㅋㅋ)
의미를 찾고 자아를 찾고 페미를 찾는ㅋㅋㅋ 알라딘 여성주의자들의 지적 모험에 탑승하셨으니 이제 더 읽고 더 쓰고 더 자신을 사랑하도록 해요, 아 좋아라 너무 좋은데? (코쓱-)

건수하 2022-07-02 15:01   좋아요 4 | URL
제가 그동안 개인적인 얘기는 잘 안썼던거 같네요 ^^ (저는 새우깡을 얻어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S입니다 ㅋㅋ )

알라딘 서재 덕분에 쟝님 비롯 많은 멋진 분들을 만나게 되어 너무 좋아요 ㅎㅎ 더 읽고 쓰고 사랑하고 계속 할게요!

얄라알라 2022-07-04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훈훈한 페이퍼와 댓글을 뒷북 치다니요!
수하님 개인적인 이야기가 엄청 힘을 받습니다!

건수하 2022-07-04 14:54   좋아요 2 | URL
역시 글에는 본인 이야기가 있어야 하나 봅니다 ^^ 늦게라도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해요 얄라알라님 ^^

독서괭 2022-07-05 16: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피씨로 다시 읽고 댓글 달려고 했는데 너무 늦어졌네요! 수하님, 페미니즘에 입문하시게 된 계기를 곰곰이 생각해 써주신 글 넘 좋습니다. 저도 한번 생각해봐야겠어요. 저도 임신/출산 후인 것 같은데.. 코로나 시국에 육휴를 하셔서 많이 힘드셨겠습니다ㅜㅜ 집에서 하루종일 애랑.. 밥 해먹이고.. 아휴.. ㅠㅠ 나의 목소리를 내고.. 무리하지 않고.. ˝이제 나를 좀더 사랑하게 된 것 같다.
아, 나는 삶의 의미를 찾고 있었네.˝라고 말하게 되신 수하님, 으으으 제 마음을 울리셨어요!


건수하 2022-07-05 17:49   좋아요 0 | URL
댓글 달릴 때마다 좀 부끄럽기도 한데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 같기도 해서 조금 기쁩니다 ^^ 독서괭님의 이야기도 듣고 싶네요. 늦게라도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