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핑거스미스>를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읽었다. 그 이야기에 어느 정도 시대 배경과 진실이 들어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부인을 정신병원으로 보내버리고 재산을 차지하는 일이 그리 드문 일이 아닐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세라 워터스의 <핑거스미스>. 한국 영화 <아가씨>의 원작이다.
(326쪽) 16-17세기에는 많은 사립 정신병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런던 근방에’ 많이 생겼다. 이런 정신병원들은 돈벌이를 위해 문을 열었으며, 비교적 비싼 입원비를 지불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입원시켰다. 오래지 않아 이런 시설을 악용한 증거들이 세상에 드러냈다. 부유한 남편들은 규제를 피해 성가신 아내들을 비교적 싼값으로 정신병원에다 수감했던 것이다. 대니얼 디포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는 1687년경 이런 사실에 주목하고, 세인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사악한 관행이 너무나 만연해 있다. 사람들은 개중 나은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최악의 관행이다. 말하자면 아내가 변덕을 부린다고 해서, 또는 아내에게 싫증이 나서 아내를 정신병원으로 보내버리는 것이 바로 그런 관행이다. 그리하여 남편들은 방해받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야만의 극치이며 불법행위이고, 은밀한 종교재판이다. 아니, 그보다 더 심한 경우다. 얼마나 많은 신사, 숙녀들이 이런 정신병원으로 보내졌는가. 나중에 말하겠지만 이런 정신병원들은 규제를 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매일 조사를 받도록 해야 한다. 이런 저주받은 정신병원에 들어가면, 미치지 않았더라도 조만간 미치게 될 것이다. 남편을 전혀 사랑하지 않거나 가족에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이렇게 정신병원에 갇힌 여성들이 이해할 수 없고 비합리적인 감금과 격리 속에서 얌전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갑자기 마구 때리면서 옷을 벗기고 회초리를 내리치며 제대로 먹이지도 않고 혹사까지 시킨다면, 누구든 미치지 않고 배겨날 수 있을까?”
<여성과 광기>. 이 책의 제목이 그리 인상깊지는 않았다. 사회화가 잘 된 탓인지, 가부장제 안에서 나의 역할에 충실하게 길들여진 탓인지 왜 굳이 여성과 광기를 연관시키는 지 연상이 되지 않았다. 아주 끌리지는 않았지만 화제의 책이고 평도 좋고 필리스 체슬러의 책이니 읽어봐도 좋겠다 생각했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에는 책이 많이 두꺼웠지만). 먼 길을 돌아 <여성과 광기>에서 정신병원에 갇힌 아내들을 다시 만났다.
<핑거스미스>에서도 그랬지만 <여성과 광기>에서도 그 광기는 본질적으로 진실하지 않다. ‘광기’라는 것은 남성의 입장에서 여성을 재단한 것으로, 정형화된 여성성 (결혼제도, 모성, 고분고분함, 자상함, 친화력, 가사 수행, …)에서 벗어난 여성의 상태를 판단한 것이다.
(147) 그들은 그냥 ‘여자’로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창조적인 인간으로, 혹은 그냥 인간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가 허용되지 않았다. 남성과 달리 여성은 문화적인 탁월함과 개성이 부정된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미치게 되는 것이다. 광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여성이 성적-문화적으로 거세되는 강렬한 경험이며 힘을 향한 암울한 탐색이다. 그런 탐색은 종종 ‘망상’을 수반하거나, 물리적인 공격성, 광휘, 성욕, 정서적인 특성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 모든 특질은 여성 지배적 문화에서라면 보다 잘 수용될 수 있을 것들이다. 여성에게서 나타나는 그와 같은 특질들이 가부장제의 정신병원에서는 두려움의 대상이고 처벌의 대상이 된다.
그러면 남성의 경우는 어떤가. 남성의 광기는?
(157) 상당수의 남성도 심각하게 불안정하다. 하지만 많은 남성이 불안 증세를 보인다고 해서 신경증적이라고 간주되거나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치료받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본다면 모든 남성, 그중에서도 특히 백인이고 부유하며 나이 든 남성은 여성보다 훨씬 더 매우 불안한(혹은 불안하지 않은) 충동을 보이기 쉽다. 전반적으로 남성은 허용되는 행동의 범위가 여성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다. 정신질환으로 입원하거나 또는 그런 꼬리표가 붙는 것이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만한 행동으로 인정되는 것과 관련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즉 여성에게는 남성에 비해 훨씬 적은 행동이 허용되고, 그들의 역할 영역에 더 엄격하게 국한되어 적용되기 때문에 여성이 병적이거나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간주되는 행동을 더 많이 저지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최근 읽었던 <달나라에 사는 여인>에 나오는 한 여인은
낯뜨거운 내용을 암시하는 정열적인 사랑의 시를 썼기 때문에, 좋아하는 청년을 향해 미소 짓고 뚫어져라 쳐다봤기 때문에, 풍성하고 윤이 나는 검은 머리카락을 풀어 헤쳤기 때문에, 한 청년에 대한 사랑을 공개적인 장소에서 모두가 들을 수 있게 고백했기 때문에
가족과 마을 사람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고 가족들은 그녀를 정신병원에 보내려했다. 전쟁이 나지 않았더라면 그 여인은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것이다.
미친게 아니라 그냥 사회가 원하는 ‘여성적 역할’과 조금 달랐을 뿐인데, 그 다름을 인정해주지 않고 정신병원에 보냈다는 것, 정신병원에서는 사회가 원하는 기준과 다르지 않은 상태로 만드는 것을 치료라고 생각했고, 그 치료를 위해 온갖 과학적이지 않은 수단을 동원했다는 것,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된지 (아직 일어나고 있고, 우리가 모를 뿐일 수도 있겠다)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러고보니 어릴 적에 ‘언덕 위의 하얀 집’ 이라며 정신병원에 관한 괴담이 있었던 것도 같다. 새삼스레 정신과 진료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도 몇십 년간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404) 흑인이나 히스패닉 또는 아시아계 미국 노동자 여성이 “그만 일하고 싶다, 아이들과 함께 집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 나를 보살펴줄 수 있는 남자가 필요하다” 라고 말할 때 그들이 뜻하는 바와 느끼는 바를 이해한다. 그녀는 두 직장을 겸업하기보다 한 직장에 전념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백인 여성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와 ‘가정주부’ 그들의 노동 없이는 남편이 (혹은 정부가) 먹고살 수 없다는 점에서 자신의 노동이 무한히 소중하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모든 계급과 인종의 여성들이 가족을 공적인 제도 혹은 여성에게 특히 억압적인 제도로 파악할 수 있도록 사회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 직장에 전념하고 싶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아니면, 가정이 직장이 아니어도 된다면 좋겠다고. 아니면 적어도 둘 모두 두 직장을 겸업했으면 좋겠다고. 문제의 해결은 아니지만 최소한 심리적 억울함은 덜어지겠지. 하지만 이것도 중요하다. 내가 페미니즘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얻은 가장 큰 것은 나의 심리적 억울함의 해소이기 때문이다. 나는 막연히 불공평하다고 오랜 시간 생각해왔고, (드디어!) 가족이 여성에게 억압적인 제도라고 내면화했다. 이제는 좀 거칠지만 나 스스로의 언어로 이걸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449) 여성운동은 결혼, 사랑, 심리치료라는 제도에 맞서고 그것들을 대체하거나 강화했다. 이런 지점에서 보면, 여성해방운동이 결혼이나 심리치료보다 훨씬 더 ‘치료적’이었다. 여성해방운동은 여성을 보다 행복하게, 보다 분노하게, 보다 자신감있게, 보다 모험적으로, 보다 윤리적으로 만들었다. 여성해방운동은 일련의 행동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451) 많은 여성들이 ‘정치적’이고 ‘과학적’인 책을 소설 읽듯이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 많은 여성들은 자신이 생각할 수 있고 그런 생각이 스스로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들의 사고능력을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 그러니까… 웬디 브라운의 <남성됨의 정치>도 열심히 읽어보자…
(너무 어려워 ㅠㅠ)
(493) 우리 여성이 자기연민과 자기파괴와 우리가 기억하는 한 우리의 유산이었던 무기력으로부터 빠져나오려면, 서로의 실패와 약점을 이해하고 동정하는 것보다는 서로의 성취와 성공과 능력을 지지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실패와 약점을 이해하고 동정하고 공감해주는 것도 여전히 좋아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공동체는 변함이 없다는 단점이 있다. 변함이 없는 것도 사실 쉬운게 아니지만. 요즘은 성취와 성공과 능력을 지지하는 것에 더 끌리는데 이런 구절을 만나서 반가웠다.
(513) 언젠가는 다양한 형태의 불평등 가운데서 꼭 하나를 선택하지 않아도 될 날이 올 것이다. 게다가 남성이 여성의 출산에 대해 부당한 대가를 지불하면서 강요해왔다는 이유로 출산 행위를 포기하는 것이 여성에게 이익인지는 잘 모르겠다. 남성 지배적인 사회에서 피임법이 특히 여성에게 좋은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강제된 임신과 출산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여성의 성적 ‘불감증’ 해소나 성매매 근절로 이어진다는 보장도 없다. 피임 ‘기술’ 그 자체만으로는 비소외노동의 시대나 대안적인 가족 형태로 나아가리라는 보장이 없으며, 그것이 반드시 성차별 폐지로 이어지리라는 보장 역시 없다. 사실 피임 기술은 성생활 및 출산과 관련하여 남성 지배적인 전체주의적 결정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이런 결정에 개별 여성은 강제된 출산에 관해 거의 말할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거의 개입하지 못할 수도 있다.
(마지막 문장 ㄷㄷ <시녀이야기>가 떠오른다)
비혼 비출산을 추구했지만 얼떨결에 결혼해서 그럭저럭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내가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것을 택했는지는 관계없이 비혼이나 비출산은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이고, 의미있는 비율을 차지할 경우 사람들의 문제 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행동이지 무엇인가의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 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뾰족한 수는 없을 것이다. 마리아 미즈는 현대 서구문명의 문제까지 언급하며 자급자족에 가까운 생산 노동에 참여하자고 했고 (마리아 미즈를 읽으며 기대에 차 눈을 반짝이던 나는 비생산적인 노동을 하는 사람이라 그 결말이 절망적이라고 느꼈다), 필리스 체슬러는 아마존 사회가 원시 사회의 한 모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515) 그렇다고 동경에 차서 너무 지나치게 ‘뒤로 거슬러갈’ 수는 없다. […] 나는 생물학적인 과거보다는 기술이 발전한 미래에서 대중적 여성해방이 실현될 가능성이 높다고 확신한다. […] 하지만 신체적인 기량과 단련이 여성에게 완전히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은 스스로 방어할 수 없기 때문에 강간당한다. […] 여성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어 강간에 대한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아니라 혁명적이다. 여성이 잠재적인 전사 (물리적인 방식을 포함하여 단어가 지닌 모든 의미에서)로 간주되는 것 역시 시대착오적이 아니라 혁명적이다. 만약 이런 일들이 실현된다면 현대 생활에 급격한 변화가 일 것이다.
안 그래도 요즘 (출장와서) 웬만한 한국 남자만큼 힘센 서양 여인네들을 보면서 (서양 남성들은 더 세겠지만) 나도 저렇게 힘 셌으면 좋겠다, 힘세고 싶다… 하고 여자 동료와 이야기했었는데, 급 근력운동하자 (유산소도 잘 안하면서) 는 결심을 해 본다. 올해는 아직 18일밖에 안 지났으니 올해의 목표로 소소하게 건강 이런거 말고 근력 기르기로 정해본다.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을 믿어보기로 한다.
(저자의 의도와는 좀 동떨어진듯도 하다…)
(525) 여성은 다른 사람의 힘과 기술에 대한 사랑과 의존을 자기 자신의 모든 힘과 기술에 대한 사랑으로 전환해야 한다. 여성은 정서적 현실의 핵심으로 곧장 들어갈 수 있다고 간주되는 만큼이나 신체적-기술적-지적 현실의 핵심으로도 곧장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훈련과 용기와 신념과 분노와 행동할 수 있는 능력과 벅찬 기쁨과 절박함이 요구된다. 풍부한 자원을 가진 지략있는 여성만이 다른 여성과 이런 것들을 공유할 수 있고 필요한 자원을 축적하기 위해 이런 것들을 이용할 수 있다.
이런 여성들을 나는 이미 여럿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기쁘다.
마지막 ‘열세 가지 질문’ 중 대답을 떠올릴 수 있는 질문이 그리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첫 질문에 대해서만은, 내가 만든 답은 아니지만, 떠오르는 것이 많아 반가웠다.
페미니스트의 열렬한 비전에 확신에 찬 태도로 귀 기울이는 어린 소녀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가? 그들에게 무슨 시를 써 줄 것인가? 어떤 행동을 가르칠 것인가? 우리가 여성 안에 어떻게 창작에 대한 충동을 키울 것인가?
작년에 읽었던 리베카 솔닛의 <해방자 신데렐라> 가 나에게 반가웠던 이유가 이런 것이었구나 싶다. 딸은 이 이야기를 크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읽었다. 사실 딸은 <걸크러시>도 읽었고, 은연중 페미니즘 조기교육을 받고 있다. 그래도 그 대수롭지 않아 하는 표정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녀가 앞으로도 계속 그런 이야기들에 그런 무심한 표정을 지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세상에 살면 좋겠다.
나는 당장 나 때부터 바꿔야지, 뒷세대라니 무슨 소리야 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었지만, 가부장제는 너무 거대한 장벽이라 조금 현실적인 비전을 가지게 되었나보다. 그래도 나 스스로 이걸 물러섰다거나 소극적인 태도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되었다. 여성은 원래 자기에게 가장 가혹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