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자본주의 체제하의 제1세계와 제3세계 모두에서 여성이 성차별주의와 남성 지배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노동을 하고 있음에도 그 노동이 은폐되고, 여성에 대한 노동과 자본의 요구 과정에서 수단으로서 폭력이 사용됨을 알아보았다. 6장에서는, 봉건주의 혹은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을 이끌어낸 제2세계, 즉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여성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그 원인은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제3세계 여성에게 여성해방의 이슈는 식민지와 신식민지 종속에서 벗어나는 민족해방의 문제와 사회주의 사회를 세우는 관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왔고, 서구 페미니스트들 역시 반제국주의 민족해방투쟁을 하는 제3세계 국가의 여성운동에서 진짜 페미니스트적인 돌파구가 나올 것을 기대했다. 민족해방투쟁 이후 여성이 이전보다 정치 권력에 좀더 접근하게 되었는가, 착취적이고 억압적인 성별노동분업이 폐지되었는가? 묻는다면,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사회주의 국가의 여성 역시 가부장적인 남녀관계에서 해방된 것과는 거리가 멀다.



민족해방투쟁과 전쟁의 기간 동안 혁명의 포스터는 아기를 업고 한 손에 총을 든 여성의 모습 등 민족해방과 여성해방의 결합을 선전했다. 그러나 민족해방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혁명의 포스터는 건국의 아버지 (맑스, 엥겔스, 레닌, 마오, 호치민, 카스트로, 무가베 등) 이미지로 대치되었다.

여성해방과 민족해방투쟁, 그리고 이어지는 사회주의적 생산관계 건설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는 전제의 이론적 기초는 맑스, 그리고 좀더 특별하게는 엥겔스가 놓았다.



엥겔스는

여성이 가부장적 구속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노동'에 '재진입'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고 강조했다.

371쪽



엥겔스는 여성이 임금노동에 참여하는 것과 여성의 경제적, 그리고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지위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맑스와 엥겔스는 '자유' 임금노동자를 역사의 주체로 보았듯, 여성이 임금노동 부대로 들어감으로서만 역사적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일반이론의 주요 포인트는 다음과 같다.


1. 여성문제는 사회문제의 일부로, 자본주의 전복 과정에서 해결될 것이다.

2. 모두가 재산이 없는 임금노동자가 되면 남녀차이도 사라지므로 여성 억압의 물질적 기초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동계급 내에서 여성운동은 필요하지 않으며, 노동계급 여성은 계급의 적에 맞서는 모든 투쟁에 같은 계급의 남성 동지와 힘을 합쳐 참여해야 한다. 이로써 여성 해방의 전제조건을 창출할 수 있다.

3. 여성으로서 특별히 당하는 억압에 대한 투쟁은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 (합법적 행동, 교육, 선전, 경고, 설득 등 -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일어나야 한다.

4. 여성문제와 관련된 투쟁은 부차적이다. 계급투쟁이 우선이다. 그러므로 여성은 분리된 자율적인 조직을 구성해서는 안된다.

5. 기초적 생산관계가 혁명적으로 변화하고, 여성이 사회적 생산 혹은 임금노동에 진출한 이후, 개인적 가사노동과 육아의 집단화가 있을 것이며, 이를 통해 여성은 임금노동 뿐 아니라 정치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6. 남녀 사이의 진정한 평등 혹은 민주주의를 이루려는 노력은 남녀관계 차원에서 혹은 가족 차원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실제 해방전쟁에 많이 참여했던 여성이 가부장적 관계에서도 해방을 성취할 수 있었는가?


크롤은 혁명 투쟁 이후 생산관계의 변혁을 겪은 국가 소련, 중국, 쿠바, 탄자니아에서 농촌 여성의 '생산과 재생산' 경험을 연구했다.

네 국가 모두에서 여성이 '사회적 생산에 진입' 하도록 동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여성에 대한 일반적인 맑스 이론에 따르면 여성은 가정주부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사적인 생산에만 관여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 국가의 상황은 약간 달랐다. 러시아와 탄자니아에서는 여성이 언제나 농업 생산에 대규모로 참여해왔고, 중국의 경우 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였다 (임금을 받는 노동자로 참여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쿠바에서는 1970년대에만 여성이 대거 농업 임금노동자로 동원되었다.



소련

여성이 자급적 생산 (개별 농민농장과 텃밭)의 큰 부분을 차지하면서도 국영 집단 농장에서 41%의 노동력을 이루고 있으며, 가사노동도 책임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소련 남성은 가사노동을 분담하지 않으며 탁아소, 유치원 등의 가사노동의 사회화 형태도 제대로 발전하지 않았다. 노동 부담이 크고 가정 내에서의 성별노동분업이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에서 여성의 정치 참여는 일반적으로 낮으며 특히 농촌에서는 더욱 낮다. 비농업부문의 일자리는 주로 남성에게 돌아갔다. 여성은 일종의 '출산파업'으로 대응했다. 국가는 결혼 여부와 관계없이 여성이 출산을 하기를 장려하며 재정적 지원을 하였으나, 여성은 이중적인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중국

마오쩌뚱은 급속한 공업화보다 농촌의 발전을 우선시하였고 남성의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권력을 혁명을 통해 척결해야 할 4대 권력의 하나로 보았다. 초기에는 토지를 실제 토지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분배하고 (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이었던 밭농사를 이 시기에는 주로 여성이 장악했다), 그리고 이혼하기 쉽도록 한 결혼법이 생기면서 이혼 사례가 늘어났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며 급진적이었던 개혁은 좀더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족개혁으로 바뀌었다.

여성은 사회적 생산에 복무하도록 장려를 받았으나, 육아를 비롯한 가사서비스가 집단화되지 못하였다. 1958년 대약진운동과 코뮌의 설립으로 가사 서비스가 사회화되어 보육원, 유치원, 공동식당, 방앗간 등이 세워졌으나 이런 가사 서비스의 집단화는 여전히 이전과 같은 성별노동분업을 따랐다. 남성은 자본집중도가 높은 산업 부분으로, 여성은 교육, 건강, 기초소비재를 생산하는 소규모의 산업(기술발전 수준과 임금이 낮다)에 배치되었다. 가사노동의 집단화 노력은 높은 비용을 이유로 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문을 닫았다. 문화혁명 동안 봉건적인 남성의 태도가 비판을 받았고, 가사노동을 부담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어디까지나 이데올로기적, 의식적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1979년 이래 신인구정책 (한 자녀 가정 캠페인)을 추진하면서 여성의 임신능력을 규제하고 통제하였다. 한 자녀 가정에 사유지를 더 주는 등 특혜를 주는 한편, 다자녀 가정에는 '초과 자녀세'를 부과하는 등 불이익을 주었다. 농촌에서 한 자녀 가족은 더 많아진 사유지의 노동을 더 적은 노동력을 감당하기 위하여 더 많이, 오래 노동해야만 했으나 성별노동분업에 변화가 없었기에 여성이 사유지에서 일하는 시간을 늘림으로써만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있었다. 농촌 여성은 전통적인 부계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들을 선호했기에 여아살해, 태아 감별, 낙태, 불임시술 등의 결과가 나타났다.

중국의 여성연합은 남성지도자가 기획한 당 정책을 수행하는 도구에 불과했다. 여성을 가정주부나 번식자로 규정하여 여성이 무임금의 가족노동 혹은 저임금의 생산 노동을 통해 근대화과정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제3세계 국가에서와 유사했다.



베트남

맑스주의 지도자들은 반식민지와 계급투쟁에서 처음부터 여성을 동원하는 것이 전술적으로 필요함을 알았다. 평등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생각을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고 폄하하는 전략을 통해 여성의 투쟁을 민족해방과업에 복속시켰다. 베트남의 여성농민 대중은 가정 혹은 가사노동에 고립되어 있지 않았으며 논밭에서 일을 하고 장사를 했으나, 베트남 공산당은 여성이 공적인 사회적 생산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맑스-레닌주의적 서술을 통해 여성을 동원했다. 프랑스와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여성은 농업, 공업, 행정, 교육 보건 활동, 게릴라 전투원 등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했던 역할은 대부분의 남성이 전쟁을 하는 동안 경제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해방전쟁이 끝난 이후 여성이 갖고있던 지도적 지위는 대부분 남성이 차지했다. 여성의 기여가 정치조직에서의 참여에 반영되지 않는 것을 두고 대개 '봉건적 잔재'라 비판하나 이것은 이데올로기적이 아닌 구조적 문제이며 소련과 중국의 사례와 유사한 양상을 띠었다.

중국-소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경제재건은 이중경제모델 (근대적이고 국영화된 공업, 집단농업 - 남성 영역 과 비공식적이고 보조적인 사유지, 수공업 등 - 여성 영역)으로 이루어졌다. 농업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가족사유지체계를 강화하고 가족 단위로 협동조합의 일을 하청했다. 이 제도는 생산을 크게 향상시켰으나, 여성 농부의 '여가시간'이 생산적으로 이용되었으며, 이는 사회화된 근대 부문을 보조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윤이 높은 수공예품 생산 역시 주로 여성의 몫이었다. 가사노동, 가족의 생계유지, 국가를 위한 노동 모두가 여성의 노동이 되었다.




결국 세 사회주의 국가에서 여성의 상황은 유사했다. 해방투쟁과 이후 여성 지위에 변화가 있었지만, 국가가 채택한 경제정책이 다시 여성을 가족 그리고 무임노동과 연결시키며 성별노동분업에 있어서는 시장경제의 제1세계, 제3세계 국가와 유사한 문제를 가지게 되었다.

민족해방투쟁 동안 여성은 필요한 존재였다. 민족의 미래를 상징하는 존재로서, 경제를 유지하는 존재로서 여성은 해방전쟁에 기여했다. 투쟁에 참여하는 동안에는 성별노동분업에 변화가 있었고, 여성의 조직화가 가능했다. 그러나 전쟁 이후 구질서는 곧 회복되었다. 경제의 재조직화 과정에서 이중경제모델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남성프롤레타리아는 여성보다 더 잘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 특히 가정주부 여성이 자본주의뿐 아니라 사회주의 발전에서도 최상의 노동력이었다. 산업화된 국가들로부터 들여온 공업화된 사회의 성장모델은 자본의 축적을 전제하고 있었으며, 자본의 축적을 위해 착취당한 계층과 그룹은 여성과 농민이다.

제3세계의 맑스-레닌주의자들이 자기 국가의 역사적 현실과는 동떨어진 (19세기 유럽 사회의 현실을석한) 이론을 비판적으로 적용하였고, 그 이론에는 여성문제와 식민지 문제가 배제되어 있다. 새로 해방된 국가의 정부가 똑같은 발전과 진보 모델을 적용하였고, 이는 같은 딜레마를 낳았다. 그들은 계급 갈등을 해결하고자 했으나, 인민 내에도 계층이 생겼고 특히 여성의 노동부담이 가중됨과 동시에 여성을 집단의 중심이 아닌 주변에 머무르게 하였다. 또한 여성은 정책결정과정에서 배제되었다. 여성은 사회주의적 축적 과정에서도 '마지막 식민지'로 남았다. 이는 새로운 이론, 새로운 경제모델 없이는 이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제 7장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 같다.

기대된다 7장.. (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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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02 12: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마리아 미즈 선생님은 대안 제시해버리는 꽉 닫힌 결말의 믿고 읽는 페미니스트!

건수하 2021-12-02 16:47   좋아요 1 | URL
대안의 7장 봤는데요... 많이 혼란스러웠어요. 머엉...
 








5장에서는 제3세계, 특히 저자가 잘 아는 인도에서 여성의 노동, 생산관계의 공통된 특징, 


여성이 착취 혹은 극한의 착취를 당하는 과정에서 구조적인 혹은 직접적인 폭력과 강제가 사용되는 (308쪽)


사례가 많이 소개된다. 인도의 경우 가부장제 외에 카스트 제도가 복잡하여 더 극단적인 사례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



# 지참금 살해



인도 시골의 근대화는 계급 갈등을 심화시켰고 1960년대 말부터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유례없이 증가하여 가난한 여성에 대한 강간과 학대가 많이 행해졌다. 중산층은 이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좌파 조직은 여성에 대한 강간을 봉건적 혹은 반봉건적 생산관계의 일부로 여겼다. 1970년대 말부터 대도시의 여성단체들이 결혼지참금을 충분히 가져오지 않은 신부에 대한 살해와 강간을 반대하는 캠페인을 시작하면서, 시골 외에 대도시에서도 여성에 대한 폭력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가부장적 인도 사회에서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있을 곳도, 사회적 지위도 없기 때문에 신부 가정은 지참금을 지불하고 딸을 ‘결혼시켜 치우기’에 열심이었다. 지참금은 신랑 가족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고 통보되며 신부의 가족은 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느라 빚을 지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결혼 후에는 지참금을 더 요구받고 학대받으며, 더 가져오지 않는 경우 시체로 발견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시체는 불에 태워 (자살시도로 불을 질렀다거나, 요리하다가 사고가 났다는 식으로) 모든 증거를 없애기 때문에 경찰이나 법정의 수사를 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독극물, 화재, 가슴을 물어뜯기는 잔혹행위, 질식과 뇌출혈 등으로 사망하거나 큰 부상을 입는 사례가 소개되었다)



여성단체와 조직들은 범죄에 대한 법 집행을 더 엄격하게 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1961년 지참금 금지법이 제정되었으나 이 법은 지켜지지 않았다. 1976년에 2670명, 1977년에 2917명의 여성이 화상으로 사망했다. 결혼지참금 살인과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잔혹행위에 대한 반대운동이 커지고 있었음에도 1980년 이후 남편과 시댁친지에 의해 젊은 여성이 살해되는 숫자는 급속하게 증가했다.



# 양수천자와 여성 살해



인도에서 여성을 선호하지 않는 증거는 다음과 같다: 1911년 이후 인도에서 여성/남성의 비가 하락한 것, 결혼지참금에 대한 과도한 요구, 신부를 사오는 관행이 있던 가난한 지역 공동체에 결혼지참금 제도가 확산된 것, 결혼지참금 때문에 빈민의 부채가 증가한 점 등.


양수천자와 초음파진단이라는 기술은 태아의 성별 선택을 가능하게 하여, 인구통제정책과 가부장적 제도, 남성지배적인 태도를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태아성감별을 통해 여성 태아를 낙태하는 것이 처음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 여론은 반응이 없었다. 반여성적인 태도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가 여아 출산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1978-1983년 사이 약 78000 명의 여아가 성감별 테스트 이후 낙태되었다. 여성들은 나중에 결혼시킬 때 수천 루피를 쓰는 것보다 지금 그 돈을 쓰는 것이 더 낫다고 했다 (Patel의 1984년 논문을 재인용). 양수천자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을 때, 논란이 되었던 것은 그것이 여성 전체를 위협하는 수단이어서가 아니라, 의사들의 홍보와 판매 전략이 범하는 잘못- 태아연구와 배아이식, 유전자공학 분야와 관련된 과학자의 엘리트주의적 사고방식, 그리고 그를 부추기는 국제적 철학-에 관한 것이었다 (Balasubrahmanyan의 1982년 논문을 재인용).



인구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여아 낙태를 보는 학자들도 있었으며, 그 중 쿠마르 Kumar는 1983년 논문에서 성감별에 의해 여성의 공급이 줄어들면 여성의 가치가 올라갈 것이라고,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적용하여 여아 낙태를 옹호했다. 양수천자와 여아낙태가 여아신생아의 살해보다는 훨씬 인도적인 방법이라고 했다.



여기서 미즈는 잠시 이성을 내려놓고(?)



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암울한 여성혐오적인 표현은

여성 스스로가 체화시켜 이를 다른 여성에게 적대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성 스스로 절명하게 하는 것만이 해결책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는 우리에게 빈민을 섬멸함으로써 빈곤을 퇴치하는 것을 제안한 인구통제기구의 논리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이는 그보다 더 끔찍하다.

여성이 여성 살해를 최종 해결책으로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324쪽


이라고 말했다.



미즈가 앞에서도 그닥 아주 냉철하고 이성적이지는 않았지만, 여기서는 잠시 이성의 끈을 놓는 것이 느껴졌다. 논리적으로 쓰려고 애썼지만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고나 할까. 5장을 읽으며 나의 감정도 내내 그랬다. 나는 여성 스스로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을 쓰거나, 상대 여성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적대적으로 대하고 뒷담화를 하는 것이 싫다. 남성에 대해서보다 여성에 대해서 그런 말을 쉽게 하는 여성이 많은 것처럼 느껴지는데, 필리스 체슬러의 <여자의 적은 여자다> (원제: Woman's Inhumanity to Woman) 에 이런 내용이 자세히 나와있었다. 









여자의 적이 꼭 여자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그런 말이 사용되는 맥락도 별로 안 좋아하지만 공감되는 부분이 있다.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 여부를 떠나 여성이 남성보다 여성을 더 쉽게 적대시할 때 화가 더 나기는 한다. 집단으로 묶어 뭉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 경우는 예외다. 살아오면서 언제나 항상 그랬듯, 여전히 여성이 약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지만 전체 인류의 반이나 되는데, 여성은 정말 약자인가? 예전에는 단순히 남성/여성의 구분만을 생각했기 때문에 언제나 나는 약자에 속한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여성 중에서도 어느 범주에 속하는지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여러 복잡한 특성이 조합되어 있는 나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 강간




결혼지참금 살해와 마찬가지로 강간도 흔하게 일어나는 일로, 인도의 농촌 지역에서 만연한 ‘후진적이고 봉건적’인 관계의 특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대도시에서 많은 사건이 일어나며 1978년 이후에는 특히 경찰에게 당하는 경우가 증가하였다. 대부분의 사건은 경찰서 내부에서 일어났으며 희생자는 대부분 집단 강간을 당했다. 범죄를 저지른 경찰관들은 대부분 강간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았다.



(읽기 괴로운 사례들이 여럿 소개되었다)



반강간 반결혼지참금 캠페인을 통해 인도에서 여성운동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이 캠페인을 통해 페미니즘은 서구에서 수입된 이데올로기임과 동시에 인도 여성이 가부장적이고 여성차별적인 남녀 관계에 맞서는 투쟁을 전개하는 것에도 관련되어 있음이 분명해졌다. 중산층 여성 또한 폭력으로 위협받고 있음이 알려졌고, 강간이 모든 계급에서 발생하고 있음이 인정되었다.



라자라만 (Indira Rajaraman)은 신부대금 제도가 있었던 농촌까지 결혼지참금 제도가 확산된 것이 농업의 생산력이 높아지면서 (기계 등으로?) 여성 노동력의 가치가 하락했기 때문으로 보고, 결혼지참금이 ‘여성이 벌이를 못하거나, 벌어도 생계비용 이하로 버는 상황에서 여성을 평생 부양하는 비용을 받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결혼지참금 제도가 신부대금 제도에 비해 특별히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오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정책적으로 여성이 소득유발 활동에 좀더 결합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경제학자 바르단도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적 경제’ 개념에 기초한 것으로, 여성이 수행하는 가사노동, 출산, 육아를 ‘생산적 노동’의 범주에서 제외한다는 것에서 논리적 결함이 있다. 이는 인도만이 아니라 세계 어디에나 존재하는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 여성의 40% 이상이 집밖에서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서구와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여성에 대한 폭력은 증가하고 있었다.




여성 노동은 자본주의적 경제에서 따로 분리되어 은폐되어 있다. 여성은 가정에서, 들판에서, 공장에서 일을 그만둔 적이 없으며, 출산과 육아를 그만둔 적이 없다. 그러나 이 노동을 사회적으로 생산적인 노동으로 더 이상 여기지 않으며,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을 자본주의적으로 구분하는 것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남성이 여성 노동에 의존하는 것이 여성이 ‘부양자’ 남성에게 의존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341쪽



이 문장들을 보고 누구의 일이 더 중요한가를 가지고, 항상 자본주의적인 잣대로 이야기해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버지는 밖에서 돈을 벌어오는, '힘든' 일을 하는 '중요한' 사람이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벌어오는 돈으로 살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어릴 때 내가 주입받은 생각이다. 가끔 아버지는 '내가 번 돈' 이라는 말을 해서 나에게 타박을 받으시는데, 어머니의 생각을 물어본 적이 있지만 갈등을 싫어하는 어머니는 명확한 답을 하신 적이 없다. 하지만 내가 어릴 적부터 '아이를 낳기 전에는 너네 아빠보다 월급이 많았어' '내 퇴직금이 집을 장만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어' 라고 얘기하셨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물론 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여전히 여성이 비슷한 연령과 조건의 남성 임금 수준만큼 돈을 벌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돈 벌어오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분명히 자본주의적인 잣대에 기초한 것이다. 아주 간단하게 사람에게 가장 기본적인 것이 의식주라고 치자. 돈만 있다고 의식주를 누릴 수는 없다. 의식주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돌봄 노동은? 인간의 아기가 동물처럼 부모로부터 자립하여 스스로 먹이를 찾고 살아가는 데에는, 글쎄 몇 년이 걸릴까? 지금과 같은 사회구조에서는 최소한 20년 가까이 걸리는 것 같고, 야생에 던져놔도 10년은 걸리지 않을까? 이런 필수불가결한, 의존할 수 밖에 없는 노동을 여성이 주로 제공하고 있는데, 그것을 너무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 같다. 여성은 자연과 친하니까?



# 공물로서의 결혼지참금



결혼지참금은 브라만 계층에서 가부장적 결혼과 가족에 대한 이론들을 갖고 합리화하면서 발전시킨 것이다. 브라만식 결혼 개념에 따르면, 딸은 아버지가 ‘건네주는’ 것이다. 그리고 ‘건네준 남자는 언제나 건네야 하는 입장이다.’ 신부를 주는 가족과 신부를 받는 가족 사이의 관계는 결코 평등하지 않다. 신부를 받는 신랑 가족은 더 높은 지위에 있는 것으로 규정된다. 주는 쪽이 ‘받는’ 것은 이러이러한 남자, 이러이러한 가문에게 ‘주었다’는 명예이다.


(342쪽)



이들 남성은 교육비로 썼던 돈을 보상하는 차원에서 많은 현금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많은 경우 그들은 결혼지참금을 사업을 시작하고, 변호사 사무실, 개인병원, 엔지니어 오피스 등을 여는데 사용했다. (345쪽)



결혼지참금 제도는 남성이 직접 한 노동을 통해서나 자기 자본을 투자해서 벌어들인 것이 아니라 갈취와 협박과 직접적인 폭력을 통해서 얻는 부의 한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결혼지참금에 대한 권리를 통해 모든 남성은 자신이 벌지 않은 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고, 살 수 없었던 현대적 소비재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결혼지참금은, 생존을 위해서 부채를 지고 소비를 해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런 물품이 거래되는 시장을 창출했다. 결혼지참금은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시장적 가치와 시장성 상품이 확산되는 길을 열었다. (346쪽)




한국의 경우와 크게 다른가? 결혼지참금을 혼수로 볼 때, 한국의 경우 집을 남자 쪽에서 마련하는 일이 많았으니 다르다고 볼 수도 있으나, 요즘에는 같이 모든 것을 마련하는 일도 많은 것 같다. 인도에서도 남자쪽 집에 가서 산다고 하니까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으로 보인다. 신부의 아버지가 딸을 ‘건네주는’ 양상은 모든 가부장적 사회에 흔한 모양이다. 또 결혼지참금 (혼수) 를 통해 직업의 기반을 마련하는 일, 현대적 소비재를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일도 유사하다. 시장성 상품이 확산되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중요하고.



브라만에게 이런 비상호적인 공물 관계를 수립하는 것은 중요했다. 이 승려 카스트는 몸으로 일하여 먹고 살지 않기 때문이다. 브라만적 사고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이기도 하다. 여성은 남편에게 몸과 노동과 자녀를 주고 이에 더해 돈과 여타 상품까지 바친다. 그리고 그 대가로 아내라는 명예를 '받는다.' (342-343쪽)




명예가 필요해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갈 곳이 없고 살 수가 없으니 할 수 밖에 없는건데 명예를 던져주는 거지.



요즘 많은 젊은 여성들이 비혼을 선택하는 것은 내 입장에서는 참으로 용기 있는 행동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할 수 밖에 없는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있을 곳' 과 '사회적 지위' 를 잘 마련하고 있나?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 남성은 타고난 강간자인가?



남성의 섹슈얼리티는 기본적으로 공격적이며 억제할 수 없는 것이고,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기본적으로 수동적이고 피학적이라는 주장 (346쪽)



이런 본능은 엄격한 법과 특정 범주의 여성 (어머니, 자매)에 대한 엄격한 사회적 금기, 그리고 여성 스스로가 남성의 공격적이고 가학적인 성 ‘본능’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행동을 조심하는 것을 통해서만 통제할 수 있다. (349쪽)



모든 도서관에는 남성의 성적 욕망은 기본적으로 공격적이며 통제할 수 없고, 여성은 고유의 섹슈얼리티를 갖고 있지 않으며, 남성의 공격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여성의 생물학적 운명이라는 점을 증명하려는 책들이 가득하다. 이들 학자와 학파 중 가장 유명한 예로 다윈을 들 수 있다. 다윈은 진화의 기초가 되는 것은 여성을 성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경쟁에서 남성들이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본능을 통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로렌츠, 타이거, 팍스 등의 학자들은 지난 20년 동안 이런 개념을 앞서 우리가 본 것처럼 ‘남성 사냥꾼 모델’로 축약하여 대중화시켜왔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공격성은 남성의 타고난 본능의 일부이며, 사회 개혁이나 혁명을 통해서는 변화할 수 없다. 과학적 사고 뒤에 숨어 있는 편향에 대해 좀더 비판적인 태도를 갖기 위해서는, 이른바 가치 중립적인 과학이 여성, 낮은 카스트, 낮은 계급과 민족과 민중에 대한 억압과 착취와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는 일정한 신화에 기초하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적자생존’, 즉 강한 남성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정복자, 승리자가 항상 옳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강간 법과 강간 신화의 뒤에 자리한 이데올로기이다. 이런 종류의 과학을 수용하는 이들은 파시즘이나 제국주의도 수용할 것이라는 점을 우리가 알지 못하겠는가? (349-350)




앞에 나왔던 '남성 사냥꾼 모델' 이 다시 언급된다. 남성 사냥꾼 모델에는 이런 함의가 있었던 것인가. 찰스 다윈, 콘라드 로렌츠는 익숙한 학자들인데, 동물행동학이라는 것도 동물을 색안경을 쓰고 본다는 생각은 해보았지만 여성과 관계있다고까지는 생각을 못해봤는데... '이런 종류의 과학'을 적극적으로는 아니지만 소극적으로 수용해온 자로서 부끄럽다.



공격자들은 종속된 이들이 상황을 자연이 부여한 것으로, 혹은 같은 의미지만, 신이 부여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지 않으면, 자신이 정복하고 종속시킨 이들에 대한 통제를 영구적으로 유지할 수가 없다. 남성에 대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창안자들은 여성에 대해서도 그에 어울리는 이데올로기를 창안해 왔다. 이는 영원한 희생자의 이데올로기, 자기희생의 이데올로기 (근대 서구적 버전으로는 여성 피학성의 이데올로기)이다. .... 이런 이데올로기는 여성을 지배하는 남성의 이득을 위해 발명되고 유지된다고 말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좀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이데올로기가 여성에 대한 수천 년 동안의 직접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352-353)




자신의 인생에 대한 자율권을 갖지 못한 여성은 자신에게 강요된 것을 자발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 밖에는 심리적으로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없다. 인간으로서 자기존엄을 모두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여성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이들과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가장 깊은 이유이며,

강간당했을 때, 자신의 '명예'와 가족의 명예가 침해당했다는 인식을 받아들이는 이유이다.


353쪽



인간으로서 자기존엄을 모두 잃고 싶지 않은 것... 이것이 여성의 약점인가. 아니다, 인간의 약점인데 그런 상황에 처하는 것이 여성인 거겠지. '낭만적 사랑'도 이에 근거하여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 같다.


강간이라는 것이 왜 두려운가, 왜 우리에게 효과를 발휘하는 가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모욕' 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두렵다'.

스톡홀름 증후군이나, 김기덕의 <나쁜 남자> 같은 영화에 공감을 하지 못했다. 나는 왜 '강간'을 두려워하는가.. 생각해볼 문제다. 강간이나 여성 폭력에 대한 책들을 읽기를 미뤄왔지만 이제 더 이상은 미룰 수 없겠다.












강간은 '여성을 치욕스럽게 하는 것', 여성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반박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 '우리에게 강간은 혐오스럽고 경멸스러운 행위이다. 이는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부정하게 한다. 이는 남성 권력의 궁극적인 자기주장이다.' (354쪽)



우리가 인도에서 강간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구체적으로 분석할 때, 우리는 불가항력의 성적 충동을 만족시켜야 할 필요에 대한 것은 거의 발견하지 못한다. 이런 장면에서 '어떤' 충동이 있다면, 이는 남성이 지배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모욕을 가하고, 침해하고, 괴롭히려는 욕망이다. 강간은 한 계급의 남성이 다른 계급의 남성을 벌주거나 모욕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음을 발견하게 된다. (...) 여성은 이 투쟁에서 유력한 남성의 남성다움, 그들의 힘을 증명하기 위한 대상으로 사용된다. (358쪽)



여성에 대한 폭력은 착취적인 남녀관계, 계급관계, 국제관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역사적으로 형성된 현상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 여성은 재산소유자의 범주에 공식적으로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은 '자유' 시민 혹은 역사적 주체도 될 수 없다. 이는 부르주아 혁명의 시민적 자유가 여성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여성이 그렇게 늦게 투표권을 부여받게 된 깊은 이유이며, 결혼 관계 내에서의 강간이 범죄로 여겨지지 않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 여성은 재산 소유자가 아니라 스스로가 재산인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르주아 논리를 따르면, 여성은 자유로운 주체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여성은 계약관계를 맺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노동이나 용역과 관련해 어떤 것을 여성으로부터 끌어내려한다면, 폭력과 강압을 쓰는 것이 필수적이다. (350-352)



여성에 대한 폭력과 강압적인 노동관계를 통해 여성 노동을 갈취하는 것은, 따라서,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부분인 셈이다. 폭력은 자본주의적 축적 과정에 필수적인 것이지, 주변적인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그 축적 모델을 유지하기 위해 가부장적 남녀관계를 이용하고, 강화시키고, 심지어는 발명해내야 했다. 세계 모든 여성이 '자유로운' 임금 노동자, '자유로운 주체'가 된다면, 이윤을 착복하는 것이 상당히 어렵게 될 것이다. 이것이 제3세계에서부터 제1세계까지 가정주부, 노동자, 농민, 창녀 등 모든 여성이 공유하는 점이다. (363)




이 장의 마지막 문장이 좀 아리송하다. 모든 여성이 공유하는 점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강압적인 노동관계를 갈취하는 것' 인 것 같은데, 그 앞 문장이 자유로운 임금 노동자, 자유로운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쓰여 있어서. 그러면 결국 저자는 모든 여성이 자유로운 임금 노동자가 되면, 여성에 대한 폭력은 없어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인가? 모두가 자유로운 임금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모두가 자유로운 임금 노동자, 즉 자본주의의 일부분이 되기를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부분을 바꿀 수 있다니, 논리적으로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7장에서 저자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빨리 보고 싶지만 보는 것이 두렵다. 여기까지 계속 공감하면서 왔는데, 마지막에도 공감할 수 있을지, 또 30년 전에 제시된 대안이 지금도 유용할지. 그런 것이 다 두렵다. 뚜껑을 여는 시기를 늦추고 싶다.




+ <은밀하고도 달콤한 성차별>이나 <아내 가뭄>을 읽으며 '여성이 돈을 버는데도, 어떨때는 남편보다 더 많이 버는데도 가사노동 분담 비율이 낮다, 특히 그것은 출산 이후 심해진다-'


라는 내용이 왜 여러 번 반복해서 강조되었는지 다시 깨닫게 되었다. 전업주부의 사례는 굳이 언급되지 않았던 것도.











1980년대 초에는 여성도 자유 임금 노동자가 되면 자본축적을 위한 불평등에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사회에 진출해서 남성과 비슷한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되었음에도 성별분업, 성차별은 달라지지 않더라- 가 전제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여성의 자유임금노동자화가 100% 진행되면 사회는 뿅! 바뀔 것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현재 자유임금노동자가 ##% 라고 하면 ##% 만큼 여성에 대한 이윤 착복화가 감소할까? 그것도 아닐 거다. 여성의 자유임금노동자화는 진행이 되었는데, 30년이 지났는데 왜 현실은 이러한가- 라고 한다면? 백래시도 있었고... 의식의 변화는 더 느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 1980년대 인도의 사례 (특히 농촌에서) 가 상당히 암울했고, 인도는 '강간의 왕국' 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강간 문제가 현재도 심각한 것 같다. 최근 인도에서 '농업개혁법'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시위가 계속 있었고, 결국 총리가 철회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영상] 인도 농민들 대규모 시위…총리가 굴복한 이유는? (kbs.co.kr)


이 시위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여성들도 많이 참여했는데, 여성들은 후방 지원을 많이 했고 남성들은 수도에서 직접적으로 참여한 것 같다. 6장에 나오는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민족해방의 사례와 유사하다. 농촌에서의 여성의 상황도 (현재 상황이 어떤지 잘 모르지만) 이번 시위 이후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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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읽고 있다. 이번 장은 경제 분야의 이야기가 많아서 그런지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제2차세계대전 그리고 1970년 이후 (대부분의 식민지들이 유럽 국가로부터 독립한 이후) 제1세계 (서유럽, 미국) 여성은 일자리로부터 소외되고 가정주부가 되어 번식과 소비의 주체로서, 제3세계 (주로 아시아, 아프리카) 여성은 가정주부이며 번식자이자 동시에 생산자로서 기능하기를 사회로부터 강요받게 된다. 1세계 여성이 번식을 권장받는데 비해 3세계 여성에게는 가족계획, 그러니까 덜 낳는 것이 권장되었는데 그 이유는 제3세계 여성의 값싼 노동력을 사용하여 생산 비용을 줄이기 위함이다. 그렇다고 해서 제3세계 여성이 자유로운 노동자로서 존중받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국제 자본이 제3세계 여성에게 끌리는 이유는 '가장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는 노동력' (256쪽) 이기 때문이다. 농업, 가내수공업, 공장에서의 공업, 성산업 등에 종사하게 되나 대부분 그들의 노동은 경제활동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의 대다수는 젊은 여성 (14-24세)이며, 나머지는 대개 가정주부로서 '여가' 시간에 노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이 노동을 하는 경우에도 임금에 관한 권리가 남성 (남편)에게 있는 경우도 있었다.



(요약이 아니라 기억에 남은 것을 적어봄)



1980년대에 쓰여진 책이라는 것을 이 장에서 드디어 실감했다.



1990년까지 한 집 건너로 가정용 컴퓨터를 갖게 될 것이라고 기대되고 있다. 가정주부는 ... 컴퓨터를 통해 쇼핑을 하고, 텔렉스 등을 통해 편지를 보내게 될 것이다. (295쪽)


동남아시아 섹스관광의 중심에 있는 세 국가 중, 타일랜드, 필리핀, 한국 .... (298쪽) 


(여기가 동남아시아였나?)


1980년대까지 이러한 상황에 있었던 한국이 지금은 '서구산업화 국가의 초국가적 조직'인 OECD 가입국가라고 생각하면 놀라운데, 사실 1990년대 이후에 가입한 다른 국가들을 생각하면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 어쨌든 한국이 좀 놀라운 사례인 것 같기는 하다. 예에 함께 속했던 인도, 태국, 필리핀 등을 생각하면, 또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와 비교해도 그렇다.




얼마 전 <몸이 선언이 될 때> 

운 좋게 태어난 백말띠 여성, 임신중지 여성, 성소수자가 말하는…‘내 몸’ - 경향신문 (khan.co.kr)


전시를 보고 왔다. 

1986년 이후 초음파로 태아를 진단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이후 여아 낙태가 많이 행해졌다고 했다.


이제는 출산율이 낮아 걱정하며 가임기 여성 지도를 만들어 배포하고 있으니.

30년 동안 한국은 국가 차원의 경제발전, 그리고 출산과 관련된 점에 있어서는 제3세계에서 제1세계로 이동한 것인가.



논제는 아니고 궁금한 것.


4장 마지막에서


제3세계의 가난한 여성의 모습은 산업화된 국가의 여성에게도 '미래의 이미지' (306쪽)



라고 했는데, 그래서 그 미래의 이미지는 어떻게 되었는가?

미국과 유럽의 많은 여성이 '보이지 않게 노동'하고, 생계를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몸을 팔면서 '발전 속으로 통합' 되었나?


국가 안에서도 분명 경제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나, 여전히 1세계는 1세계이고 3세계는 3세계인 것 같은 느낌인데.. 

1980년대 이후 이것이 어찌 진행되었는지 궁금하다.


또 이 논의에서 빠져있는 제2세계 (공산주의 국가) 의 경우는 어떠했는지.


한 국가가 사회주의 발전의 길을 채택한 혁명 이후에도 결국은 노골적인 반여성정책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문제는 후에 좀더 깊이 분석해야 할 것이다. (272쪽)



라는 문장을 보면, 또 앞의 장에서의 논조를 보면 사회주의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사회주의를 채택한 국가의 예들이 6장에 나온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여성은 오늘날 노동자로서는 은폐되고 있고, 번식자와 소비자로, 그것도 탐탁하지 않은 번식자와 소비자로 강조되고 있다는 점만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272쪽)



이렇게 중국의 예만 드는 것은 아시아라서 그렇다는 것인가? 러시아나 동부유럽에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인가?



섹스와 관련된 부분에서라도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뭔가 달랐는지, 어떻게 달랐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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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자본주의가 식민지 강탈에 기초하여 세계체제로 발전하면서 착취 대상은 외부로 확장되었다. 식민지의 토지와 주민은 남성 문명인의 착취와 이용을 기다리는 ‘자연’으로 여겨졌다. 동시기에 발전한 근대 과학기술은 자연을 분석과 해체할 대상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여성, 식민지에 대한 시각과 유사하다. 교회, 국가, 신흥 자본가 계급, 근대 과학자는 협력하여 여성과 자연을 폭력적으로 종속시켰다.



12-17세기까지 유럽 전역에서 맹위를 떨쳤던 마녀사냥은 여성을 통제하고 종속시키려는 메커니즘의 하나였다. 중상주의 관점에서 근대국가의 발전에 노동력의 확보는 필수적이었다 (이 관점은 지금까지도 대체로 고수되고 있다). 마녀사냥으로 산파가 통제하던 여성의 임신과 출산은 남성 의사에 의해 통제되었다. 마녀로 몰린 자들의 재산은 몰수되어 국고로 환수되었고 봉건계급과 부르주아의 자본으로도 축적되었다. 코르넬리어스 루스에 의하면 마녀 재판은 ‘인간의 피에서 금을 만들어낸 새로운 연금술’이었다.


근대과학의 아버지 프란시스 베이컨은 마법의 비밀을 알아내는 수사 방법과 같은 방법- 귀납법으로 자연의 비밀을 캐낼 수 있다고 하였다. 베이컨에 따르면, 자연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고, ‘노예’로 만들어져야 하며, ‘규제’되고, ‘해부’되어야 한다. ‘여성’의 자궁이 상징적으로 겸자에 굴복한 것처럼, 자연의 자궁이 품고있는 비밀 역시 인간의 삶 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해 발굴되어야 하는 것이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연약한 여성상은 이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조해낸 산물이다. 코니 윌리스의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서 빅토리아 시대를 잠시 엿보았다. 그 시대 여성은 물에 들어가지도 않고 (긴 치마를 입고 물에 빠진 고양이를 구한 여성은 누가 자신을 봤을까봐 정신없이 고양이를 안은 채로 ‘네트’를 통과해 미래로 가고 만다), 신경증이 있고 기절을 잘 하며 (자주 가장하기도 한다), 온통 결혼에만 관심이 있다. 그 시절 여성과의 대화에서 성적인 것과 관련된 주제는 금기시된다 (사람이 아닌 고양이의 임신에 대해서도 언급할 수 없다).










16-17세기는 약탈, 해적질, 강제노동과 노예노동을 통해 식민지로부터 자본을 축적한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식민지의 여성과 본국의 여성에게 서로 다른 가치체계가 적용되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들이 소유한 여성은 한 사람과만 성관계를 갖는 후계자의 출산자로 길들였다. 집 밖에서 일하지 못하게 했고, 재산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반면 노예 여성에게는 결혼이나 출산이 허용되지 않았다. 임신-출산-육아의 노동공백기를 고려하면 노예를 수입해 오는 것이 더 저렴했기 때문이다.


1807년 노예 무역이 폐지되면서 식민지 정부는 노예 여성에게 출산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노예제 기간 동안 반모성적 태도를 내면화한 노예 여성은 19세기 중엽까지 출산 파업을 지속했다. 출산을 하면 자녀가 노예가 되어 평생 노예주의 부를 위해 고된 노동에 시달려야 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죽이는 것이 용납되기도 했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가 떠오른다)










식민지 초기 서아프리카의 상류 여성들은 숙녀로 대접받았고 유럽인과 결혼하기도 하였으나, 이후 영국인들은 서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 여성을 창녀로 만들었다. 아프리카 여성을 ‘야만인’으로 취급하면서, 조국에 있는 백인 여성은 ‘숙녀’의 지위로 상승시켰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에서는 자메이카에서 귀족으로 살고 있던 여성이 영국에 가서 다락방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지역에 따라 여성에게 다른 기준이 적용된 이 두 과정은 역사적으로 단순히 평행하게 진행된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내에서 필요에 의한 인과관계로 깊숙히 얽혀 있다. (남성들의 필요에 의해 두 집단의 여성이 다르게 살게 되었다는 것 외에 딱히 얽혀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내가 잘못 이해한건가?)










제국주의가 팽창하던 시기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부르주아 이상 계급 여성의 향신료, 화장품, 비단 등의 사치품에 대한 욕구는 자본주의의 발전(신항로의 개척 등) 에 결정적인 자극이 되었다. 자본주의는 가정을 새로운 기계와 물품의 소비 시장으로 삼아 가사노동과 소비의 주체로 가정주부를 부각시켰다.


부르주아는 가족을 사적 영역으로 선언하고 여성들을 공공 영역에서 철수시켰다. 그리고 여성의 성적 경제적 독립성의 증발에 대한 보상으로 ‘낭만적 사랑’ 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다.

반면 프롤레타리아 여성에게는 재생산의 동기가 부여되지 않았고 이 여성들은 결혼 제도에 매여있지 않았다. 국가는 입법과 경찰과 교회의 이데올로기적 캠페인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재생산에 개입했다. 결혼 전 혹은 결혼 외 성관계를 범죄로 규정했고, 낙태를 불법화했다. 교회는 사람들의 영혼에 호소했다.



엥겔스와 베벨의 동지이자 사회주의 여성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클라라 제트킨은 프롤레타리아 여성은 부르주아 페미니즘처럼 남성에 맞서서 싸울 수 없으며, 남성과 함께 자본과 계급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리아 미즈는 이러한 제트킨의 주장을 여성의 역할을 어머니와 아내로 보는 부르주아적인 생각이라고 비판한다.



사회적 생산으로 진입하는 것이 여성해방 혹은 독립의 전제조건이라면,

남성을 부양자이자 가장으로, 여성을 의존적인 가정주부이자 어머니로 여기고,

핵가족이 ‘진보적’이라는 생각을 고수하는 것은 모순이다.



이는 여성 운동을 부르주아 여성의 전유물로 보고, 프롤레타리아 여성을 여성 운동으로부터 유리시키는 주장이기도 하다. 여성 운동이 여러 상황에 있는 여성의 다양한 주장을 모두 포괄하기는 어렵겠지만, 여성 운동이 계급 운동 혹은 사회 운동을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한국의 한 진보 인사가 진보진영 내의 성폭력 사건과 관련하여 벌어진 논란에 대해 ‘해일이 일고 있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 고 했던 발언과 비슷한, 대를 위해서 소는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과 비슷한 논리이다. (굳이 ‘조개’를 줍는다고 한 것도 기분 나쁘다. 의도된 표현일까?))



또 프롤레타리아 여성이 남성과 함께 자본가 계급에 맞서 싸워야 한다면, 프롤레타리아 여성과 남성 사이의 계급 차이는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남성은 프롤레타리아 여성을 가정화하면서


1) 쓸만한 임금노동에 대해 독점적 권한을 주장할 수 있고

2) 가정 내에서 모든 소득에 대해 통제권을 주장할 수 있다.



여성의 노동은 공기나 물처럼 공짜로 이용할 수 있는 자연자원처럼 여겨져 가치가 평가절하되고, 여성은 자본가 (부르주아 보다도 더 상위계급) 가 감당해야 할 비용을 감당하고 있다. 가정주부화는 가정에 여성을 묶어둠으로써 여성의 단체협상력도 떨어지게 만들었다. 남성 ‘부양자’가 부양하는 핵가족과 여성은 가부장제적 자본주의의 ‘내부 식민지’인 것이다.



엥겔스는 ‘지배계급에게 좋은 것을 모든 계급에게 확대’하는 것을 통해 계급의 양극화된 관계를 변화시키고 싶어하였으나,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는 자연이나 타인에 대한 착취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모두를 위한 발전은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는 퇴보적 진보의 관계 (남성의 여성에 대한 착취, 남성의 자연에 대한 착취, 식민주의자의 식민지 주민에 대한 착취,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착취)를 완전히 폐지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부장적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방식의 경제 체제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논제)


부르주아 남성 - 부르주아 여성 / 프롤레타리아 남성 - 프롤레타리아 여성 간의 위계는 분명하다고 치자.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 여성과 프롤레타리아 남성의 상대적 지위는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분명하지 않지만 각자의 생각을 말해보자)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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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5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롤레타리아 남성이 부르주아 여성을 질투해서 조개로 폄하하는 상황? 부르주아 남성은 프롤레타리아 남성 표를 얻어야 해서 이대남 워째하며 부둥부둥 하고요. 그나저나 영원히 까이는 유시민 ㅋㅋㅋ 남자는 입조심 항상 해야죠 ㅋㅋ
수하님 넓고 깊게 읽으시네요. 저도 다시 읽는 마음으로 쭉 읽어보았습니다 💕

건수하 2021-11-25 11:57   좋아요 1 | URL
ㅋㅋㅋ 사실 유시민 좋아하는데요 그 말은 맘에 안 들었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남성이 부르주아 여성보다 하위에 있기 때문에 사적으로 불만을 표출하는게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써놓은 글이 있어서 한 장 한 장 올리기는 하는데 (이 책까지만 올릴거예요), 고기 한 부위씩 올리는 거 같아 좀 그렇지만 전체를 통합해 짧게 줄이기가 힘들다능….

공쟝쟝님 지루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독서괭 2021-11-25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의 임신에 대해서도 말하면 안 됐다고요?? 헐..
<개는 말할 것도 없고> 빨리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빌러비드>는 너무 참혹하죠 ㅜㅜ
조개 줍줍 ㅋㅋ 저 그 사람 꽤 좋아했었는데 정희진씨 책에서 그 내용 읽고 알게 된 후로 호감도가 떨어졌어요. 방송도 안 듣고 책도 안 사게 되네요ㅠ

건수하 2021-11-26 08:59   좋아요 1 | URL
빅토리아 시대에 대해 잘 모르고 시간여행을 가서 고생하는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 고양이 얘기도 그 중 하나랍니다. <개는 말할 것도 없고> 가 진짜 수다스러운데, 그만큼 또 재미있어요. 고양이 얘기 많이 나와서 독서괭님 좋아하실거예요~

유시민에 대해 저는 그래도 아직 좋은 감정이 남아있지만, 요즘 안보고 있긴 해요 ㅎㅎ
 
듄 신장판 1
프랭크 허버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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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게혜윰님에게 이끌려 얼마 전부터 알라딘 서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다락방의 미친 여자>를 언급했더니 알라딘 서재의 다락방님을 알려주셨고, 여성주의 책읽기에 관심이 있다보니 계속 방문하게 되면서 나도 이곳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책 이야기를 이렇게 즐겁게 나눌 수 있는 곳이 있었다니, 그것도 예전부터 있었다니. 이런 곳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니. 그렇게 발을 들여놓고 보니 알라딘 서재에 예전에 썼던 글이 몇 개 남아 있었다. 



그 중 하나를 읽으며 거기에 내가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페미니스트' 까지는 아닌데, 

라고 써놓은 걸 보고 얼마전 깜짝 놀랐다. 2009년에 나는 저렇게 생각했구나 하고. 






<듄> 1부를 읽었다. 전부터 궁금하기도 했지만, 영화가 나온다기에 같이 책을 읽는 모임 

(이 모임에서는 정말 같이 '읽기' 만 한다. 함께 읽을 책을 정하고 각자 읽고, 하고싶은 말이 있으면 톡방에서 수다를 떤다.) 에서 이걸 얼른 읽고 영화를 보자고 하여 읽기 시작했다. 이 모임은 4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른 책도 좋아하지만 모두 SF도 좋아한다. 


1965년작, 휴고상과 네뷸러상 수상, <스타워즈>와 <왕좌의 게임> <The Five Star Stories> 등 많은 창작물에 영향을 주었다. 


이것이 내가 갖고있던 사전 정보였다.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흥미롭게 읽었다. 반쯤 읽고 영화를 보러 갔고, 영화를 보며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 생기긴 했지만 나는 재미있게 봤다. 당시 막 싹트기 시작했을 생태학의 개념이 나오는 것도 흥미로웠고, 그 시절 히피들이 사용했던 마약 대신 향신료가 인간을 각성하게 만든다는 설정, 또 향신료 무역이 과거의 대항해시대를 연상하게 한다는 것도 재미있었다. 영화에서는 오니솝터 Ornithopter 의 구현이 인상적이었다. 확실히 헬리콥터보다 훨씬 빠르고 섬세하게 방향과 속도를 전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에겐 헬리콥터도 충분히 빠르지만..) 다만 동력이 상당히 많이 들 것 같은데 연료를 실으면 또 그 무게가 추가되므로 영화에서처럼 사람을 6인이나 태우면서도 그 정도의 속력을 내려면 핵발전 정도는 해야 (...) 가능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럼 돈이 얼마..?  



영화를 보고 나서 나머지 반은 좀더 느리게 읽었다. 설정이 거의 파악되어감에 따라 흥미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내가 종교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낡은 세계관이 페미니스트로서의 (드디어 말했다,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나에게 매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쯤 읽었을 때에는 이것을 7부까지 다 읽어야 하는가 마음의 갈등을 하였으나 (그러니까, 세트로 묶어 할인판매하는 책을 사야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갈등이다), 1부만 읽고 접기로 마음먹었다. 



<듄>에는 종교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베네 게세리트 (영화에서 발음은 베네 제써맅 ...) 는 버틀레리안 지하드라는 일종의 종교 혁명 이후 만들어진 일종의 성직자 그룹이고,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렌지 가톨릭 성경' 이라는 것이 그들의 경전인 것 같다. 그들은 의식을 집중하여 사물 혹은 인간의 속성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갖고 있고, '목소리'를 통해 다른 사람을 세뇌하여 움직일 수 있다. 



가끔 나오는 베네 게세리트의 교리 등을 보면 가톨릭과 불교, 수피즘 등의 종교 특성이 대략 합쳐진 것 같다. 남성 황족 혹은 전사들은 이들을 뒤에서 이야기할 때  '여자 마법사' 혹은 '마녀' 라고 부른다. 반면 아라키스의 사막에 사는 종족 프레멘의 종교는 유대교 혹은 이슬람교처럼 다소 배타적이고 맹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베네 게세리트는 자신들의 능력을 이용하여 황제의 조언자 '비밀을 말하는 자' 로서 봉사하거나 황족 혹은 귀족의 부인으로 남편에게 봉사한다. 이들의 비밀스러운 목표는 수백년 동안의 유전자 교배를 통해 특정 유전자 조합을 가진 '퀴사츠 해더락' 이라는 인물을 만드는 것이다. 이 목표를 관철하기 위해 특정인과 결혼을 하고, 특정 성별의 아이를 낳으며 (현대 과학의 상황에서 인간의 성별은 남성의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지만, 베네 게세리트는 임신과 관련하여 성별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모양이다, 하긴 나중에 유기화합물의 분자 구조를 마음의 눈으로 꿰뚫어보면서 약간 바꾸어 독성을 없애는 일도 한다 (....)),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황제와 협상을 하기도 한다. 언젠가 올 메시아 같은 존재인 '퀴사츠 해더락' 을 위해 아라키스라는 행성에 선교단을 보내 전설을 심어두기도 한다. 

 

'퀴사츠 해더락'은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할 수 있는 자, 혹은 과거와 미래를 보는 자 라는 뜻을 갖고 있다.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다면 그 곳에 다 존재할 수 있다고 볼 수도 있으니 이 두 의미가 상반되는 것은 아니다. 더 높은 차원들을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퀴사츠 해더락은 '남자' 이다. 


그런데, 베네 게세리트라는 집단이 수백년 동안 애써서 이 퀴사츠 해더락을 만들고, 각성시켜서 뭘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하면, 그 이후의 목표는 딱히 없다. 거창한 세계관을 만들었지만 그게 어딘가로 수렴되지는 않는다. 사실 '퀴사츠 해더락' 을 어느 다른 베네 게세리트가 통제할 수가 없다. 그 뒤는...? 2부부터는 읽지 않았지만 그 사람이 꼭 와야 하는 이유나, 와서 뭘 하기를 바라는지는 나오지않는다. 인류를 구원하려고 그러나..? 


주인공 폴이 아라키스에서 각성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는 자신의 존재로 인해 '지하드' (성전)가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지하드를 막을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하려고 노력하지만 각성할 수록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럼 또 한 번의 지하드를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 베네 게세리트의 목적인가? -_-; 



이제 한참 <듄> 이야기를 했으니, 내가 페미니스트로서 이 이야기가 더 읽고 싶지 않고 더 궁금하지 않은 이유를 얘기해야겠다. 베네 게세리트들은 대단한 능력자다. 그러면, 딱히 뚜렷한 목표도 없으면서 (사실은 2부 이후에 나올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봐서) 왜 그렇게 수백년(!) 동안 노력해서 '퀴사츠 해더락'을 세상에 내놓으려 하는가? 그것이 왜 '능력자'들의 모임인 베네 게세리트의 거의 유일한 목적인가? 종교라는 것이 원래 딱 손에 잡히는 게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딱히 그 외에 다른 영향을 끼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왜 그렇게 열심히 정신 수련을 하고 능력을 개발시키는가? 황제나 다른 남성에게 봉사하는 것조차, '퀴사츠 해더락'을 만들어 내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말이다.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왜 조언자, 그리고 '자궁' 역할에만 머무르는가? 때로는 정실 부인의 자격조차 얻지 못하면서까지. (만화 <The Five Star Stories> 에서 파티마의 설정이 불쾌했던 이유도 이것이다. 그들은 기계이기도 했지만) 결국 이 소설에서 여성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권력자 남성의 보조적 역할 혹은 '자궁' 이다. 



<왕좌의 게임>에는 그래도 대너리스, 세르세이, 아리아가 있었다. <듄>에는? 퀴사츠 해더락을 낳은 어머니 레이디 제시카와 그녀의 미친 딸 엘리아, 퀴사츠 해더락과 정략결혼하여 자손을 보지 못하고 회고록을 남긴 이룰란 공주가 있다. 퀴사츠 해더락과 사랑하고 그에게 영감을 주고, 결혼은 못했지만 '아내'가 되어 아이를 낳고 돌봄 노동과 가사 노동을 도맡았던 챠니가 있다. 챠니의 말을 들어보자. 


"얘기했잖아. 시에치는 남자들이 없는 외로운 곳이라고. 거긴 일을 하는 곳이야. 우린 공장과 포장실에서 일해. 무기도 만들어야 하고, 날씨를 예측하려면 모래기둥을 박아야 하고, 뇌물을 바치려면 스파이스도 채취해야 하니까. 또 모래언덕에 식물을 키워서 모래를 제자리에 묶어두게 만들어야 해. 천과 융단도 만들어야 하고 연료 전지도 충전시켜야 하지. 부족의 힘이 약해지지 않게 아이들도 훈련시켜야 하고."

"그럼 시에치에 즐거운 일은 하나도 없는거야?"

"아이들이 즐거운 일이지. 우린 의식을 지키고 음식도 충분해. 때로 우리들 중의 누군가가 북쪽으로 와서 자기 남자와 함께 지내기도 하고. 삶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 듄 신장판 1권, 707쪽



프레멘 여성만 일하고 남성은 논다는 뜻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프레멘은 성별을 막론하고 전사로 훈련받는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아이를 낳고 나면 남녀의 역할은 저렇게 분담되고 만다. 리에트 카인즈의 딸인 챠니, 현명한 여성이고 성직자인 챠니조차 퀴사츠 해더락에게 힘을 주는 일종의 '뮤즈'로 소비되는 느낌이다. 


레이디 제시카는 1부 마지막에서 폴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이룰란 공주와 결혼하려고 할 때 (폴은 챠니에게 결혼관련 협상 역할을 맡기며 심지어 '잘 지켜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우리의 삶이 저 공주의 삶보다 낫다며 챠니를 위로한다. 이룰란 공주는 결코 그의 마음을 얻지 못할거라며.


"생각해 봐라, 챠니. 저 공주는 아내라는 이름을 갖겠지만 첩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될 거야. 결혼으로 자신과 묶여있는 남자에게서 단 한 순간도 부드러움을 맛보지 못하겠지. 하지만 우리는 말이다, 챠니, 첩의 이름을 달고 있는 우리는 역사가들에 의해 아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될 거다." 


- 듄 신장판 1권, 892쪽


남자의 부드러움? 아내라는 이름? 마음? 낭만적 사랑? 그게 여성의 삶에 유일한 보상이자 위로인가? 

남자의 마음이 없어도 공주의 삶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여성과 남성의 삶을 정형화하여 이것이 당신들에겐 적당하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싫다. 이것이 내가 영화 <듄>과 책 듄 1부를 보고 씁쓸했던, 그리고 더 이상 관심이 생기지 않았던 이유이다. 예전에 쓰여진 소설에는 이런 설정이 많이 나오고, 과거의 나는 약간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즐겼다. 그 부분 빼고는 괜찮잖아- 라면서. 이제 나는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 같다. 읽더라도 항상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 내가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이라고 말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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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11-24 10: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래전에 앤절라 카터 책 읽고 ‘이 책은 나보다 페미니스트들이 더 좋아하겠다‘고 리뷰 써놨더라고요? 와- 제 과거 어떡해요?

그런데 듄이 이런 내용이군요. 사실 저는 SF 에도 판타지에도 관심 없어서 듄에 대해서도 좀 무심한 편이었는데, 수하 님 글 읽고 보니 오히려 읽고 싶어져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읽고 대차게 까고 싶어진달까요.... 흠흠.

건수하 2021-11-24 10:34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께도 그런 과거가 ㅎㅎㅎ
그래서 제가 지금까지 별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살아오려고 애썼는데 말이죠...

SF에 관심없으시면 초반에 좀 재미없으실 수도 있지만... 이 이야기가 재미있긴 재밌어요. 읽어보시고 대차게 까주세요!! 900쪽이 넘어서 갖고다니면서 읽기는 힘드니 전자책 추천합니다~

독서괭 2021-11-24 12: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하하 다락방님 수하님께도 그런 과거가 있으시다니 정말 위안이 됩니다. 저도 그랬거든요..ㅜㅜ
수하님 글 넘 재밌게 읽었고, SF에 특별히 관심없는 자로서(시간여행 쪽에만 관심있음) 고민없이 거르면 되겠다 싶네요. 지적해주신 ˝자궁˝으로 소비된다는 내용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건수하 2021-11-24 14:36   좋아요 1 | URL
사실 전 SF 좋아하는데 말이죠, 이 이야기가 오래되긴 했지만 오래된 이야기라고 다 그런 건 아닌데 실망스럽더라구요. 영화에서는 남성 인물 하나가 여성으로 바뀌는 등 약간 변화가 있긴 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