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그를 샀더니 책이 따라왔다. 아주 가볍지는 않지만 롱머그보다 가볍고롱머그보다 넓어서 손 넣기 (설거지하기) 좋고 손잡이가 컵 거의 전체 길이만큼 길고 위쪽에 달려있어서 잡기가 좋다. 무엇보다 의미심장한 문구가 좋다.읽어야지, 언젠가.
카트 한가득 책을 실어 알라딘으로 향했다. 가까운 곳에 알라딘이 없기도 하지만 주차장이 있는 곳이 드물어 강남역점으로 갔는데 거기선 판매금액을 알라딘캐시로 받으면 20% 추가 포인트를 준다. 이만큼의 캐시를 확보했다. 이걸 다 쓰는 데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 것인가.
읽기 시작했다.
동물은 어떻게 하나의 대상이 되는가? 우리는 어떻게 이런 대상화를 정상적인 일로 배우게 되는가? 장애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우리가 동물들을 다르게 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가? - P32
만약 동물을 둘러싼 억압과 장애를 둘러싼 억압이 서로 얽혀 있다면, 해방의 길 역시 그렇지 않을까? - P33
워낙 좋다는 말을 듣고 시작했기에 이야기의 연결고리가 삐그덕거리는 부분이 더 잘 보였던 것 같다. 나쁘지 않지만 괜찮지만 우러나온 이야기 라기보단 ‘만든’ 이야기라는 게 느껴지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했어야 했나? 라는 생각도 든다. <랩걸>에 이어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과학 관련 에세이는 내게 어필이 안 된다는 걸 다시 느꼈다. <랩걸>보다 글은 좋았다. 기대가 컸기에 아쉬운 것으로. 제목을 자극적으로 지으려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물고기 fish’란 과학적 분류가 아니다. 그건 다른 방식의 분류지 존재하지 않는게 아니다. 아버지가 ‘너는 중요하지 않아’ 라고 이야기한 것도 우주적 차원에서 이야기한거지 인간적 차원에서 이야기한 게 아니다. 이 책에서 그런 범주의 차이를 가볍게 뛰어넘어 유사성 혹은 차이 혹은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사례가 많았던 것 같다. 어류는 범위가 수정되었을 뿐 여전히 사용하는 분류체계로 알고 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나) 번역의 문제인지 모르겠으나 이 책이 ‘어류’에 대한 새로운 오해를 불러올 수 있을 것 같다.원론적으로 과학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에 대한 지식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에 언제나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 모든 과학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천동설과 지동설, 뉴턴 역학과 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등 과학은 그런 과정을 거쳐왔다. 범주화라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저자가 과학을 본인이 이해하는 좁은 범주 안에 넣어 단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쉽다.자기 기만 얘기는.. 긍정적 자기 기만을 권장하는 미국 같은 사회에서는 특히 의미있는 이야기 같다. 하지만 나는 글쎄.. 사실 나는 좀 긍정적 자기 기만을 하며 살고 싶다. 안 되어서 그렇지.
내가 하고싶은 말을 잘 정리 못하는데 그걸 해서 책으로 내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좋다. 비혼 비출산이 대안은 아니라고 전에 쓰면서 왜 그런지를 설명하자니 복잡하고 막막하다고 느꼈는데, 이것이 부분적인 설명이 되겠다.반대말을 하지 말고 옳은 말을 하자.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토론들을 볼 때 자주 드는 생각이다.
얼마 전에도 SNS에서 "여러분, 우리 아이를 낳지 맙시다"라는 문장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출생률 때문이 아니라, 이 순간을 살아가는 ‘아이’ 때문이다. 사회가 여성에게 "아이를 낳아라"하고 말하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도 "아이를 낳지 말자"라고 받아치면 안 된다. 사회가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으니 주지 않겠다고, 벌주듯이 말하면 안 된다. 이 말은 곧 사회가 자격이 있으면 상으로 아이를 줄 수도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런 것이 아니다. 어린이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아이를 낳으면 안 된다는 말은, 애초 의도와는 다르겠지만 그 끝이 결국 아이를 향한다. 아이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된다. 미래에만 해당되는 말이라면 괜찮을까? 미래의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부정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 말은 결국 어린이와 양육자를 고립시킨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을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 만든다. 아이를 낳지 않는 사람은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 이야기가 약자를 배제하자는 결론으로 향하는 것이. 사회가, 국가가 부당한 말을 할 때 우리는 반대말을 찾으면 안 된다. 옳은 말을 찾아야 한다. (중략) 언제나 절망이 더 쉽다. 절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고, 무엇을 맡겨도 기꺼이 받아 준다. 희망은 그 반대다. 갖기로 마음먹는 순간부터 요구하는 것이 많다. 바라는 게 있으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외면하지 안 된다고, 심지어 절망할 각오도 해야 한다고 우리를 혼낸다. 희망은 늘 절망보다 가차 없다. 그래서 우리를 걷게 한다. 우리에게 자녀가 있든 없든, 우리가 어린이와 친하든 어색하든, 세상에는 어린이가 ‘있다’. 절망을 말을 내뱉기 전에 어린이를 떠올려 보면 좋겠다.<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지음, 사계절, 2020, pp. 218~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