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컨벤션홀로 통하는 로비는 비가 오는 내내 바람골을 만든 듯 춥다. 손님이 없을 듯 싶지만 기다림이란 그리 어설프지 않다. 몇 권의 책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수명의 <내가없는 쓰기>의 몇 개월을 읽다보니 벌써 여름 가까이 온 듯하다. 그러다가 빛과 실을 건네든다.



2. 


이런 뒷부분의 일기가 묘하게 겹친다 싶다.


<빛과 실>에는 글쓰는 작업을 위해 공개한 루틴이 나온다. 더 오래, 더 길게는 작가들의 로망이기도 하다. 헌데 공짜는 없다. 꽂힌 것은 스트레칭이다. 오십견을 겪은 뒤 느낀 것은 잔근육을 지나치게 움직이지 않았다는 깨달음이다. 


3. 


전시 뒤풀이를 못한 사위와 딸. 지난 비내리는 주말 틈을 타 일정을 잡고 함께 한다. (어머님과도 한잔) 음주에 대한 흑역사를 거침없이 말하는 제멋대로 여사 앞에서 얼굴도 화끈거린다. 하지만 없는 사실도 아니니 어찌할 수는 없다. 짬을 내서 달려주지만 많이 마신 술에 장사는 없다. 여독에 더해진 일정이 말해준다 싶다. 그림 작업 역시 노동이 들어간다. 과한 작업을 하면, 노가다처럼 쓴 막걸리 한잔 해줘야 마무리되는 것이 일상처럼 되어간다. 문제는 말미의 기분이다. 몸은 넘지 않았다하지만, 시간은 정신승리 편이 아니다. 그렇게 술병은 생기고 다음날의 밀도와 농도는 구멍이 생기고 허술해진다.


4. 


몸의 무게가 내려오다가 증권차트처럼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 점을 내려오기 위해 얼마만큼의 강도와 길이가 필요하지도 지난 몇 달간 과정으로 배우게 된다.  조금 더 내리기 위해서 하는 글쓰기도 일환의 하나다. 하지만 달리기도 노동이다. 마지막이 문제다. 매듭을 어떻게 지어주느냐다. 절주의 요령이다.


조금은 비겁해지기로 한다. 어제 숯불꼼장어 뒤 얼큰라면이 문제였다고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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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다. 상처나 난다. 흉터가 생긴다. 누구나 갖고 있다. 아픈 기억과 나와 다른 환경은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몸이 감당하지 못하는 충격들은 나와 섞이지 못하고 동거한다. 불쑥불쑥. 트라우마다. 한가롭고 싶지만, 정작 한가한 시간들이 주어지면 못참는다. 지루한 것이다. 인간은 그렇다. 좋다가도 말고, 나쁘다가도 좋아진다. 생명은 그렇다. 그렇게 자신을 지워내며 남을 이겨내며 면역이 생기며 살아가는 존재다. 


능동태와 수동태. 지금을 살아내고 있는 존재들은 이렇게 언어에 의해서도 갇혀있다. 그들에게는 나 위주로 세상이 돌아가줘야 한다. 주어와 가끔 명사만 반짝거리고 그렇게 반짝여야 한다. 대명사의 사소한 그것을 돌아볼 시간이 없다. 지금을 살아내는 존재는 그래서 경계가 없다. 심문의 언어, 자책의 언어만이 있어, 정작 자신이 어디에 처해 있는지 볼 수 없는 환경이다.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은 교과서에나 있다. 역사와 기억을 가진 존재는 말과 환경이라는 폭력에 끊임없이 자가교정을 하는 존재다. 그러니 교과서 밖에는 운명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만성통증이라는 것은 신경에도 기억이 있다는 것이다.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도 있지만 기억이 끊임없이 지금의 나를 다스리는 것이기도 하다. 


윤과 국힘 정권의 삼년은 이런 배제와 이분의 늪과 같은 과정이었다. 끊임없이 혐오와 수치심과 자극으로 한편을 적으로 몰라내고 폐기시키려는 것이 본질이었다. 한 번도 품으로 하지 않은 실수를 저질렀다. 언론과 미디어의 지난 십년의 수사를 보라. 심문과 자책의 단어, 그 구렁텅이에서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는가. 그 늪에서 누군들 온전하겠는가. 지금 우리는 어쩌면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트라우마다.


당사자연구라는 것이 이 책들 사이 여러 번 나온다. 정신병, 우울. 나의 서사를 타인에게 말하게 하는 것이다. 내가 내 병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섞여나가면서 알아지며 달라지는 관계, 그러면서 정작 갇힌 나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 쯤에서야 달라지고 낫는다 한다. 


숫한 비평과 날선 정치인들에겐 책임의 언어가 부재하다. 비난과 비판만 있지 회복적 비평이 없는 세상이다.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우리의 일상의 미세한 틈의 말들도 바꾸ㅕ야 조금씩 바꿀 수 있고, 타자의 반면도 나라는 사실을 알아채가는 과정이 있어야 바뀐다. 우리는 우리를 너무도 험하게 몰아부쳤다. 


헌법수호의 날. 민주회복의 날에 지금을 너머서는 우리를 상상해본다.


볕뉘


정정. 실수, 실패. 우리는 무수한 환경과 면역을 이루어내는 존재다. 순간순간 실수, 실패가 우리를 이겨내는 전부다. 인정한다는 전제아래. 이 암울이 비처럼 내리는 세상에는 질투가 힘이 아니라 실수을 정정해내는 힘. 실패를 인정하는 분위기. 자신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힘들이 우리를 겨우 일으켜 세울 수 있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로 회복해야 한다. 말할 기회를 변론할 기회를 인정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 줄 필요가 있다. 타인과 그릇된 자신을 함께 비추거나 봐 줄 광장도 필요하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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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으로 가다가 돌아선다. 한밤 중에도 꽃들은 지천이고 흐드러진다. 오르는 술을 더 이상 마시지  않는다. 나눈 이야기들의 단맛이 입안에 남아있고 환한 맛도 섞인다 싶다. 오랜만에 들른 선술집의 고정석에 앉아 나눈 얘기들. 팝스 사장님은 클로즈 문패를 걸어두고 열심히 노래 연습중이다. 일찍 문을 연 라이브 카페의 깔끔한 곳에서 한잔과 한보따리 얘길 나눈다.


살다보면 우리를 막다른 골목을 만나는 느낌을 갖기 마련이다. 어쩌지도 못하는 아이러니나 수수께기 같은 상황들 말이다. 하지만 정작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 일상이고 대부분이다. 식사 메뉴하나 제대로 고르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이다.


만든 상황일까 만들어진 상황일까? 그래, 섞여있다. 그래 우리는 엉킨 실타래를 풀고 있다. 꼬이기도 하고 얽히기도 하고, 삶의 능선에서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막 이어진 새로운 실이기도 하다. 어쨌든 일조를 했고 일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굳이 당연한 이야기를 왜 늘어놓는 것이란 말이야. 한 나라의 역사가, 각 나라의 역사가 다 다르다는 것이다. 다를 수밖에 없고, 다르게 만나고 다르게 넘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분기점을, 드러나 사건들을 색다르게 보는 눈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무수한 산불, 수해, 태풍에 대한 피해 등등 산사태에 이르기까지 선을 넘는 것들의 행태와 양상이 우리의 상식이란 고속도로와 더 멀리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갇는 시야와 폭을 훨씬 초월하여 다른 국면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체제는 더욱 옭죄이고, 다음 세대는 전 세대의 쓰레기더미를 찾아 일자리를 구한다. 정상적인 판단도 줄거나 부재하며 논쟁이나 회의나 하물며 토론 같은 것들도 갈수록 드물어진다. 그러니 기획기사같은 것도 미디어에서 꿈도 꾸지 못할 일들이다. 갈수록 메인을 벗어나는 것들의 품질은 떨어진다. 어쩌면 사람들은 뇌를 밖에 꺼내놓고 살아지는 좀비들 같다. 하루하루 살아내는 피맛만 찾을 뿐, 자기가 왜 여기 이렇게 서 있는지를 묻지 못한다. 물어보지 못한다. 답하지 않으려한다. 이런 와중에 내새끼 우리새끼는 그나마 귀여운 맛이라도 있다. 더 챙겨준다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하는 것 아니야. 그러면서 가혹했던 지난 날들을 지워버린다. 맥락이라고는 개나 줘버려하고 자신을 지우고 살아낸다. 그래서 좀비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그렇게 맞닿아 있다. 맹신의 끝엔 자신을 돌아보거나 밖에 서서 바라보지 못한다. 자신만의 예외다.


총칼을 들고 국회에 난입한 일들. 사건. 세계민이 모두 보았는데도 없던 일이란다. 그래서 그 혐오의 끝은 바른 사고를 할 수 없다. 이건 제 자식이 또 그런 짓을 저질러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무수한 사람들이 한 배에 탄 듯, 선장이 가르키는 곳으로 일사분란하게 이리도 많이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말은 거품이 되고 법은 누더기가 되고 신조어는 정치경제사회문화를 파고 후빈다. 말인지 된장인지. 어처구니 없는 언론과 매체 미디어는 홍수가 범람하듯 한다. 






































  여기 서 너분은 여기 지금의 문제가 구석기가 아니라 신석기때부터라고 한다. 농업혁명때부터 정착하면서부터라고 말이다. 구석기의 유전자가 지금처럼 공복을 부르짖고 꺼르륵 소리를 몸에 챙겨줘야 하듯이 아직 신석기이후를 유전자를 갖을 준비를 못하고 있다한다. 1만 2천년전부터가 문제다.


동의하는가. 하지 않는가. 그것은 커다란 문제가 아니기도 하다. 300-400년전 자본주의부터 출발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찬찬히 들여다보자. 우리는 폭탄을 가슴에 품고 다니지는 않지만 시동이라는 버튼을 매일 매순간 말 50마리 백마리를 끌고 누비고 다닌다. 이 비좁은 지구 안을 돌아다닌다. 이렇게 말을 걸기도 한다.


좁은가 비좁아지는가 우리 일상이 어떻게 되돌아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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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조팝나무

매화

동백

개나리

벚꽃

백목련

자목련

복사꽃


마음은 준비도 되지 않아 마주치기가 저어하다. 대체 뭘 본 건가. 이래도 되는 건가. 묻지 않던 질문들이 나온다. 마음은 볼록해져 본 것들을 밀쳐내기만 한다. 


매화

동백

개나리

개나리

목련

진달래

조팝나무

벚꽃


그리고

도화


해본다. 순서도 아래위도 법도 질서도 진실도 없는 세상을 보면서 뭐라고 해야하나.



 짬을 내어 오를랑 하이브리드 전시를 꼼꼼하게 살펴본다. 세계시민으로 자신을 예술에 바쳤다라는 표현은 알맞다. 끊임없이 자신을 변형시키는 모습도 놀랍다. 끊임없이 읽기와 사유를 멈추지 않는 일상도 안이하지 않다. 철저하고 예리하게 현실을 가르며 나아가고 있다는 말이 적절할 것이다. 


수많은 우려가 현실로 전화되는데도 국가의 짐이 되는 군상들은 자신의 근거없는 이념적 야욕과 힘과 권위와 권력에 소속되고 싶어하는 무리들을 끊임없이 끌어모은다. 사실과 현실은 분별을 잃고 혐오을 부추키고 선동에 하루하루를 지운다. 행정은 위기를 앞서나갈 수 있어야 한다. 순환하는 기후위기에 넋놓고 무책임한 집단들은 처음본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도 그저 국짐을 좋아만 하는 좀비족속들은 어찌하랴.


봄이 제자리를 잃은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한단 말인가? 포월, 초월이 아니라 저월을 이야기하는 저자의 말을 뿌리깊게 귀 기울여야, 아니 몸기울여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생각한 자연이란 없다. 이 지구는 수백마리의 말을 끌고 나오는 증기기관덩어리다. 그 덩어리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현실이란, 사고의 파격을 원한다. 대체 생각이 자랄 곳은 어디란 말인가. 법마저 갈 길을 잃은 지금이란 자리에서 한 걸음을 어찌 디뎌야한단 말인가.


 '오를랑'


1947-

성형소식은 들었지만

뿔까지 한 줄은


책이 쌓여있더군요

한 단어를 위해 그렇게

노력한 줄은


친밀성의 소멸을

예견해서 그런 줄은 몰랐네요

슬로우 댄스를


목소리가 아름다웠다는


세계의 시작이란

그림은 알지만

전쟁의 시작이란

그림도 알고 말았다는


많은 게

한 꺼번에

다가온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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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표를 본다. 공약수 가운데는 '협동'이 있고, 삼분할해서 생각, 자본, 노동의 교집합이 그려져 있다.  '협동' 협동이라. 그 '협동'이란 단어를 마음과 입 안에 공글려본다. 공동체라. 모임이라. 혼자가 아니라 같이 가치를 추구하며 산다. 여럿이. 


위태로운 일상, 차고 넘치는 하루하루는 불안하다.  어떤 이는 <불안사회>라 말하기도 하고, 위태로운 '상황'은 불안한 대기처럼 지금을 잠식하고 있다.  '벌거벗었다'라고도 하며 액체상태라고도 한다. 불안한 하루하루는 '나"를 끊임없이 요동치게 만든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견뎌내기도 힘들어 사소한 다정다감에도 목숨건다. 



표지화를 본다. 정교한 소묘와 치밀한 덧칠이 아니다. 많게는 서 너번, 작게는 한 두번 잎새와 꽃, 꽃잎에 색을 올린다. 각자의 모양으로 피고 있는 꽃들.  뒷표지에는 팔이 하나인 꽃, 두 팔을 벌리고 있는 꽃, 운동하고 있는 듯한 꽃, 세 송이의 다른 꽃을 그려둔다.



자리이타 自利利他 . 나도 좋고 남도 좋다. 나도 피고 너도 피고, 서로 꽃피우는 일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대행에 대리다. 빠르고 빠르게 순환을 만드는 체계이기에 보이지 않는다. 남기는 것만 드러날 뿐, 그 안을 움직이는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닫힌 삶을 기계처럼 상품처럼 낳기만 할 뿐이다. 닫힌 방에 갇혀 하늘을 볼 수 없다. 하늘이 어디인 줄도 눈길을 잃어버린다. 점점 깊어지는 터널이다. 나갈 길이 요원하기만 하다.


우리는 세 개의 공을 동시에 던져야 한다. 놓치지 말고, 생각과 자본, 노동이라는 공을 동시에 던진다. 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고 받고, 대리나 대행이 아니라 품을 팔고 나눈다. 그렇게 십시일반 꾸려진 돈을 나눠 몸을 키운다. 모임을 자라게 한다. 하나가 아니라 둘, 둘이 아니라 셋을 나누는 연습을 해야한다. 겨우 닫혀진 방에서 나올 수 있다. 겨우 닫혀진 나에게서 나오기 시작한다. 다행히 돈만 남기는 사회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공짜는 없다. 


그렇게 나눈 것들은, 그렇게 채운 것이 서로에게 선물이다. 매번 달라지고 생기가 도는 모임이다. 열려지는 삶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열린 삶의 출발이다.


볕뉘


1. 읽고 나서 저자의 다이어그램 속 '협동'이란 말 대신이 '일상'이란 말을 넣어보기도 한다.


2. 화마가 드리운 날, 그 끝을 알 수 없는 불꽃. 스스로 만든 법의 테두리조차 타는 듯한 나날이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3. 반드시 그럴 것이다. 우리는 질문하는 법을 느끼기 시작한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질문들은 아마 출구를 낳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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