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의 통제와 억제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을 나는 예속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정서에 복종하는 인간은 자신의 권리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의 권리 아래에 있으며 흔히 스스로 더 좋은 것을 보긴 하지만 더 나쁜 것을 따르도록 강제당하는 것처럼 운명의 힘 안에 있기 때문이다. 241

 

사람은 똑같은 종류의 물체에 대하여 형성한 보편 관념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완전하다고 하며, 이와 반대로 비록 전적으로 제작자의 견해에 따라 완성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유형의 개념과 덜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불완전하다고 한다. 242

 

우리는 사람들이 사물의 참다운 인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편견에 의해서 습관적으로 자연물을 완전하다든가 불완전하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자연은 목적을 위하여 작용하지 않는다/신이 어떤 목적인을 위해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어떠한 목적인을 위해서도 작용하지 않는다. 신은 존재에서와 마찬가지로 작용에서도 아무런 원리나 목적을 갖지 않는다./완전과 불완전은 실제로 오직 사유의 양태일 뿐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들이 동일한 종이나 유에 속하는 개체를 비교함으로써 습관적으로 형성하는 개념이다. 243

 

한계, 종말, 무능력 등과 같은 부정을 포함하는 어떤 것을 인정하는 경우에 우리들은 그것을 불완전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은 우리가 완전하다고 하는 것만큼 우리의 정신을 자극하지 않기 때문이다./선과 악에 대하여 말하자면, 이것들 또한 우리들이 사물을 그 자체로 고찰할 경우 사물에 있어서의 아무런 적극적인 것도 지시하지 않으며, 사유의 양태나 우리가 사물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형성되는 개념일 뿐이다. 244

 

선이란 우리가 형성하는 인간의 본성의 전형에 점차로 접근하는 수단이 되는 것을 우리들이 인지하는 것이라고 확실히 이해한다. 그러나 악이란 그 전형에 유사하게 되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을 우리들이 확실히 아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음으로 우리들은 인간이 이 전형에 더 많이 또는 더 적게 접근하는 경우 인간을 더 완전하다거나 더 불완전하다고 할 것이다./어떤 사람의 본성이 활동 능력으로 이해되는 한에서 그의 활동 능력이 증대되거나 감소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245

 

표상은 참다운 것이 참다운 한에서 참다운 것의 현재에 의하여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표상하는 사물의 현재의 존재를 배제하는 더 강한 다른 표상이 나타남으로써 소멸된다. 249

 

인간은 항상 열정에 필연적으로 예속하며, 또한 자연의 공통된 질서를 따르고 그것에 복종하며, 사물의 본성이 요구하는 만큼 그것에 적응한다. 251

 

인간은 자기의 유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모든 것에서 일치하는 것, 모든 사람의 정신과 신체가 하나가 되어 마치 하나의 정신과 하나의 신체를 구성하여 모든 사람이 동시에 가능한 한 자신의 유의 유지에 노력하고, 모든 사람이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이익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어떤 것도 바랄 수 없다. 262

 

어떤 것들이 본성상 일치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들이 능력에서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무능력이나 부정에서, 또는 열정에서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열정에 복종하는 한 그들은 본성상 일치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271

 

각 인간이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가장 많이 추구할 때 인간은 서로에게 가장 유익하다. 왜냐하면 각자가 자기의 이익을 더 많이 추구하며, 또한 자기를 유지하기 위하여 더 많이 노력하면 할수록 더욱 많은 덕을 갖게 되며, 또는 같은 말이지만 자신의 본성의 법칙에 따라서 행동하는 능력, 즉 이성의 지도에 따라서 생활하는 능력이 그만큼 더 크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성의 지도에 따라 생활할 때 본성상 가장 많이 일치한다. 그러므로 각자가 자기에게 유익한 것을 가장 많이 추구할 때 인간들은 서로 간에 가장 유익할 것이다. 275

 

4부 정리 38 


인간의 신체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극받을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 또는 인간의 신체로 하여금 외부의 물체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극하는 데 알맞게 만드는 것은 인간에게 유익하다. 그리고 그것은 신체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자극받는 것과 다른 물체를 자극한 데 더 알맞으면 알맞을수록 그만큼 더 유익하다. 이와 반대로 신체를 이것에 덜 적절하게 만드는 것은 그만큼 해롭다. 282

 

오만은 인간이 자신을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그릇된 속견에서 생기는 기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오만의 반대인 소심함은 인간이 자신을 남들보다 열등하다고 믿는 그릇된 속견에서 생기는 슬픔으로 정의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즉 오만한 자는 반드시 질투하며, 덕으로 인하여 가장 많이 칭찬받는 사람들을 가장 많이 미워라며, 그들에 대한 그의 미움은 사랑이나 친절에 의하여 쉽게 정복되지 않고, 또한 그의 무능한 정신에 비위를 맞추고 그를 어리석은 자에서 미치광이로 만드는 그러한 자들의 현존만을 기뻐한다. 소심함은 비록 오만과 반대되지만, 소심한 자는 오만한 자와 매우 가깝다. 왜냐하면 그의 슬픔은 그가 자신의 무능력을 타인의 능력이나 덕으로 판단하는 것에서 생기므로, 만일 그의 표상이 타인의 결점을 고찰하는 데 집중된다면 그의 슬픔은 가벼워지고 그는 기쁨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격언이 나온다. 불행한 자의 위안은 나쁜 동료를 갖는 것이다. 298

 

4부 정리67 


자유인은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이다. 308 신은 자유로운 인간에게 선과 악을 인식할 수 있는 나무 열매를 먹는 것을 금하였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먹자마자 살기를 욕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였다. 309

 

5부 지성의 능력 또는 인간의 자유에 대하여

 

정리 36 신에 대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신이 무한한 한에서가 아니라 영원한 상 아래에서 고찰된 인간 정신을 통해서 설명될 수 있는 한에서 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신의 사랑 자체이다. 즉 신에 대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무한한 사랑의 일부이다. 359

 

정리 38 정신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종류의 인식에 따라 더 많은 것을 인식하면 할수록 그만큼 나쁜 정서의 작용을 덜 받으며, 죽음을 덜 두려워한다. 361

 

정리 42 지복은 덕의 보수가 아니라 덕 자체이다. 우리들은 쾌락을 억제하기 때문에 지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지복을 누리기 때문에 쾌락을 억제할 수 있다. 366
















볕뉘


1.


여러 번 읽으면서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는 것은 대체 무슨 이유일까? 다시 읽으면서 추려낸 이들은 왜 방점을 서로 다른 곳에 찍게 되는 것일까? 왜 변함없이 주요한 지점에서 스피노자를 재사유하게 되는 것일까? 왜 마르크스와 접목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2.


알튀세르 부터, 마르크스 노트 마저 최근에야 번역이 진행중인 연유도 있지만, 인식론의 단절(우연, 마주침, 확율 등) 인과와 목적을 사유의 전제로 두는 방법론의 문제가 우선이라 할 수 있겠다 싶다. 


3.


인간중심주의가 어떤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통찰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유가 없다. 목적도 작용도 없다. 있는 그대로다. 있는 그대로를 보는 방법론이 지금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것도 반복해서 지금-여기를 냉정하게 따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4.


<예속>이란 정의.  정서의 통제와 억제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서란 무엇인가? 정서의 힘이란 무엇인가? <자유>에 대한 무수한 논의를 보아왔지만 윤리-정치-사회라는 동시에 울림이 있는 사유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보지 않게하는 힘이 있다. 


5.


무신론이거나 범신론이거나 신은 저기에 있거나 여기에 있거나, 신에 대한 개념과 관념에 대한 인식의 문제가 있던 게다. 현실과 맞지 않은 이야기. 신을 옹호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스피노자가 사유한 전체성을 읽지 못하거나 총체성을 읽어내지 못하면, 지금의 사유에서 뱅뱅 맴돌 수밖에 없다. 그 지점이나 그 와류 안으로 들어갈 자신이 없던 것이 문제였을 수 있다.


6.


그의 사유를 가져오면 인간은 홀로 있는 존재가 될 수 없다. 구차하게 많은 사상가들이 이 점을 밝히려고 노력하지만, 바로 지점에서 데카르트에게 거꾸로 걸려드는 것이다. 쉽다. 임신한 엄마. 공동존재일 수밖에 없다. 나만의 행복. 그것만 사유할 수 없는 존재가 나다. 이런 배경설명에는 사회적인 나, 서사로서의 나 등등 모든 것들이 말 위의 말일뿐이다.


7.


신체와 정신, 몸과 영혼은 죽으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는 것이 정신의 지적 사랑이다.  이 3종 인식은 지금까지 온 것의 모든 것을 뒤집을 만하다. 깨우침과 통찰,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모든 것들을 또 다른 시선아래 살 게 만들기도 한다.


8.


쇼펜하우어가 부와 명예, 욕정, 아니 삶을 다루는, 인류에게 절제란 무엇인가?란 가르침을 준 첫 사상가로 소개한 <<지성개선론>> 또는 <<지성교정론>>에서 반복하는 것들은 되짚을 이유가 충분히 있다. 



0. 


부끄럽기 그지없다. 나이 오십이 아니라 육십에 컹컹 개처럼 짓기만 했다는 걸 깨닫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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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해하려는 의지는 노력이 아니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능력으로 이해하며, 정신으로 하여금 사물을 추구하게 하거나 기피하게 하는 욕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미 이 능력들은 개별적인 것에서 형성되어 그것과 구분되지 않는 보편 개념이라는 것을 증명했으므로, 이제 의지 작용 자체가 사물의 관념 사물의 관념 자체 이외의 어떤 것인지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138 <정신의 본성과 기원에 대하여>

 

나는 정서를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러한 변용의 관념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러한 변용의 어떤 타당한 원인이 될 수 있다면, 그 경우 나는 정서를 능동으로 이해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는 수동으로 이해한다. 153 <정서의 기원과 본성에 대하여>

 

정신을 결정하는 것이나 충동과 신체의 결정은 본성상 동시적이며, 또는 오히려 하나로 동일한 것이고, 이 동일한 것이 사유의 속성 아래에서 고찰되고 사유의 속성에 의하여 설명될 때 우리는 이것을 결단이라 하고, 연장의 속성 아래에서 고찰되고 운동과 정지의 법칙에서 도출될 때 우리는 그것을 결정이라 한다. 160

 

정신은 신체의 변용의 관념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자신을 의식하므로, 따라서 정신은 자신의 노력을 의식한다. 이 노력이 정신에만 관계될 때에는 의지라고 일컬어지지만, 그것이 정신과 신체에 동시에 관계될 때에는 충동(욕구)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러므로 충동은 자신의 유지에 유용한 것에서 생겨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을 행하도록 하는 인간의 본질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다음으로 충동(욕구)과 욕망의 차이는, 욕망은 자신의 충동(욕구)를 의식하는 한 주로 인간에게 관계된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욕망이란 의식을 동반하는 충동(욕구)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상의 모든 것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해진다. 즉 우리는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것을 향하여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노력하고 의지하며 충동을 느끼고 욕구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선이라고 판단한다. 164-165 (정리 9)

 

사랑은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고, 증오는 마찬가지로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기 때문에 이들 기쁨과 슬픔은 사랑과 증오의 일종이다. 그러나 사랑과 증오는 외부 대상에 관련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 정서를 다른 이름으로 표시할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을 명예, 그리고 이에 반대되는 슬픔을 치욕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타인에게서 칭찬받거나 비난받는다고 믿으므로 기쁨이나 슬픔을 느끼는 경우임을 이해하기 바란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을 나는 자기만족이라고 하고 이에 반대되는 슬픔을 후회라고 할 것이다. 다음으로 어떤 사람이 자기는 타인의 기쁨으로 자극한다고 표상하는 기쁨이 단지 추상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각자는 자기를 기쁨으로 자극한다고 표상하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 대하며 표상하고자 하므로 명예를 좇는 사람이 오만하게 되고, 또한 모든 사람에게 혐오를 받으면서도 모든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있다고 표상하는 것과 같은 일이 쉽게 일어날 수 있다. 185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나 증오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용납시키려고 하는 노력은 실은 명예욕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본성상 타인을 자기들의 의향에 따라서 살기를 욕구한다는 것을 안다. 모든 사람이 이것을 똑같이 욕망하므로 모든 사람은 똑같이 서로 장애가 되며, 또한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서 칭찬받으려고 하거나 또는 사랑받으려고 하므로 모든 사람은 서로 증오하게 된다. 186-187 


인간의 본성은 대부분 불행한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며 행복한 사람을 질투하고, 또한 타인이 소유한다고 그들이 표상하는 것을 그들이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더 큰 증오로써 질투하도록 되어 있다. 다음으로 우리들은 인간의 동정심을 일으키게 하는 그러한 인간본성의 성질로 인간이 질투심을 갖게 되며 또한 거기에서 명예욕에 사로잡히는 일이 생기게 됨을 안다. 187

 

언젠가 향락한 것을 상기하는 사람은 최초에 그것을 향락한 것과 같은 조건 아래에서 그것을 누리고자 한다. (정리 36) 191

 

각자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더 좋고 무엇이 더 나쁜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엇이 가장 좋고 무엇이 가장 나쁜지를 자신의 정서로 판단하거나 평가한다. 따라서 탐욕스러운 사람은 재산의 축적을 가장 좋은 것으로 판단하고 그것의 결핍을 가장 나쁜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명예를 바라는 자는 무엇보다고 명예를 바라며 반대로 치욕을 무엇보다고 두려워한다. 마지막으로 질투하는 자에게는 타인의 불행보다 더 유쾌한 것이 없으며 타인의 행복보다 더 불쾌한 것이 없다. 이렇게 각자는 자신의 정서로 어떤 것이 선인지 또는 악인지를, 유용한지 또는 유용하지 않은지를 판단한다. (정리 39) 194

 

(정리 51) 서로 다른 인간들이 동일한 대상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자극받을 수 있으며, 또한 동일한 인간이 동일한 대상에서 서로 다른 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극받을 수 있다


<주석>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증오하며, 또 어떤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고, 동일한 인간이 이전에 증오하던 것을 지금 사랑하며 이전에 두려워하던 것을 지금은 감히 행하는 것 등이다. 다음으로 각자는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무엇이 더 선하고 무엇이 더 악한지를 자신의 정서로 판단하기 때문에 인간은 정서에서와 마찬가지로 판단에서도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205

 

우리가 이전에 다른 것과 동시에 본 대상이나 많은 것과 공통된 점만을 가진 것을 우리들이 표상하는 대상을 우리들은 어떤 특수한 점을 가진 것으로 표상하는 대상에 대해서 만큼 계속해서 고찰하지 못할 것이다.(정리 52) <주석> 정신의 이러한 변용이나 어떤 개체의 표상이 단지 정신 안에 있는 한에서 경탄이라고 한다. 만일 그것이 우리가 두려워하는 대상에 의하여 이야기된다면 공황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악으로서의 경탄은 인간이 그 악을 피하기 위한 다른 것을 사유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을 오로지 그 자신의 악을 고찰하는 포로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들이 경탄하는 것이 어떤 인간의 총명, 근면 또는 이와 유사한 방식의 것이라며 그로 인하여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를 훨씬 능가하는 것을 고찰하기 때문에 그 경탄은 존경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고 만일 우리들이 인간의 분노와 질투 등을 경탄한다면 그것은 전율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만일 우리가 우리들이 사랑하는 인간의 총명과 근면 등을 경탄한다면 사랑은 바로 그것에 의하여 더 커질 것이다. 그리고 경탄이나 존경과 결합된 이 사랑을 우리들은 헌신이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식으로 우리들은 증오와 희망과 안도 및 다른 정서를 경탄과 결합하여 생각할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들은 흔히 쓰는 어휘로 표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정서를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206-208

 

어느 누구도 자기와 동등하지 않은 자의 덕을 시기하지는 않는다


질투는 증오 자체이거나 슬픔이다. 즉 인간의 활동 능력이나 노력을 저해하는 정서이다. 그러나 인간은 주어진 자신의 본성에서 생길 수 있는 건만을 행하고자 하며 욕구할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타인의 본성에 적절하고 자기의 본성에 낯선 활동 능력이나 또는, 동일한 것이지만 특별히 다른 본성에 속하는 그리고 자기 자신에겐 낯선 덕이 자신에게 부여되기를 욕구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와 동등하지 않은 자 안에서 어떤 덕을 고찰하는 것으로 인하여 그의 욕망이 저해될 수 없다. 즉 그로 인하여 그 자신은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 결국 그는 그 자를 질투할 수 없다. 그러나 자기와 똑같은 본성을 가졌다고 전제되는 동등한 자에 대해서는 질투할 것이다. 212

 

어떤 개인의 각각의 정서는 마치 어떤 인간의 본질이 다른 인간의 본질과 다른 만큼 다른 사람의 정서와 다르다.(정리 57) 


<주석>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즉 비이상적인 것으로 알려진 동물의 감정(왜냐하면 우리들이 정신의 원천을 안 다음에는 짐승들이 느낀다는 것을 결코 의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은 마치 동물의 본성이 인간의 본성과 다른 만큼 인간의 정서와 다르다. 물론 말과 인간은 생식에 대한 정욕에 의하여 이끌려 간다. 그러나 전자에는 말의 정욕이 그리고 후자에는 인간의 정욕이 있다. 마찬가지로 곤충과 물고기 그리고 새의 정욕과 충동은 각각 다른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그리하여 비록 각 개체는 자신이 그 안에서 성립하는 본성에 만족하여 살며 본성을 즐긴다고 할지라도, 각자가 만족하고 있는 이 삶과 즐거움은 그 개체의 관념이나 영혼일 뿐이다. 215-216

 

(정리 59) 정신이 인식하는 한, 정신에 관계하는 정서에서 생기는 모든 활동을 나는 정신력으로 여기며 그것을 용기와 관용으로 구분한다. 나는 용기를 각자가 오로지 이성의 명령에서 자기의 유를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관용을 각자가 오로지 이성의 명령에서 다른 사람들을 돕고 그들을 우애로 결합시키려는 욕망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나는 행위자의 이익만을 의도하는 활동을 용기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이익도 의도하는 활동을 관용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절제, 금주나 위험에 부딪쳤을 때 정신의 침착 등은 용기의 일종이다. 그러나 예의와 온화함 등은 관용의 일종이다.
















볕뉘


1.


정신차려라. 정신만을 수습하라는 말이 아닐 것이다. 물벼락이 바로 코앞에 있을 듯하고, 소스라치는 놀람이 겹칠 듯하다. 넋이 나갔네, 나갔어. 란 말 역시 몸의 상태를 겹쳐보이게 한다. 프리윌. 자유의지. 영혼. 정신교육을 너무나 많이 받아와서 늘, 몸을 분리시키는 습관들. 습벽처럼 남아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몸은 좋을 걸 찾아간다. 맞거나 좋은 것들을 쌓아올린다. 그래서 좋은 것이다. 


2.


이분법. '이분二分'의 기나긴 터널을 지나왔는데, 정작 출발지점에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것 같다. 자연은 자기원인을 갖고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 목적 따위는 없다. 연장과 사유로 나누려는 강박은 선악을 분리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둘이 나눠지기 전의 상태를 알지 못한다. 둘로 나눠 깊어질 수 있으나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인식에서 있어 패착을 가져온다. 끊임없는 유혹, 신이 인간을 만든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는 물음이 남는다. 과학을 하든 철학을 하든 이 유혹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3.


선악을 같이보면 무슨 도움이 되는가? 내 몸과 지성, 앎의 필요와 삶의 갈구를 여실하게 느낄 수 있다. 죽음이 아니라 삶에만 천착할 수 있다. 죽음이 두려워지지 않는다라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4.


사람에 대해서 말하지만, 사람만 얘기하지 않는다. 말과 동물에서 대해서 언급하며 생명을 갖는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통로, 출입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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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사서 꽂아둔 발리바르의 책들을 다시 꺼낸다. 그동안 드문드문 보았던 스피노자의 저작이나 해설서들을 다시 꺼내든다. 몇 번씩 정독해두었던 알튀세르의 책들을 다시 본다. 저자가 번역해놓아 구입해둔 푸코의 밑줄을 다시 읽는다.


친절한 저자는 강의한 것을 이렇게 세세하고 구체적으로 풀어낸다. 서술하는 방법은 알튀세르를 읽는 듯도 하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서술 방법 같기도 하다. 그렇게 긴장감있게, 탐정의 모드로 읽힌다.


다시 버틀러의 책들도 꺼내고 있다.


알튀세르의 저작도 그렇고, 푸코의 저작들도 최근에서야 번역되고, 그 사상가들의 진가는 지금에서야 온전해지고 있다.  지금 언급된 사상가들의 저변에는 마르크스가 있다는 걸 많은 사람들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 또한 그 곁엔 스피노자가 있다는 것도 관심이 없다. 하물며 우연성이나 마주침, 사건이라는 인식론의 단절이 이들의 사상가들이 기본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도 모른다.


88년생인 저자는 태어날 때 유행한 이런 이론들이 제대로 다시 읽히기를 소망한다. 활동이나 운동이라는 변화를 꿈꾸던 이들이 이 저자를 통해 제대로 읽힌다면, 어쩌면 우리나라 진보라는 것이 있다면 엄청난 근력과 지성의 지평을 넓힐 계기가 된다고 여긴다. 


스피노자는 기호를 통한 혼접이나 상상을 1종인식이라하고 이를 종합하고 개념화하는 인식 이성을 2종인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3종인식은 직관지다. 일종의 통찰이나 깨달음같은 것이라고 자의적으로 덧붙여보기도 하는데, 분명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중요한 저작이다. 아전인수하거나 자신의 계파 기원을 찾아내려 안간힘을 쓰는 가짜진보들에게...모두 다 내려놓고 다시 읽어보고 판단해보자 할 수 있는 저작이기도 한 듯싶다.


우리는 삼중고에 절여있는 주체들이다. 민주주의-자본주의-기후위기의 숨막히는 현실을 살아내는 지구인들이다. 아직도 사르트르의 인간중심마르크스주의에 멈춰있는 자칭진보들은 이런 수평적 확장이나 시야를 가져보는 것이 나쁘다고 할 수 없지 않는가. 부디 독서에도 올인해보시길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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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해관계에 근거한 자본주의 정신이 만들어진 과정을 찾고자 했으나 이 역시 우연이 겹쳐진 것이란 얘기가 떠오른다.(엘버트 허시먼, <<정념과 이해관계>>) 구석기 수렵채취문화에 대한 기존 연구들도 다양성이나 풍부함으로 보지 못하는 아둔함을 지적하며 새로운 관점에서 보고 있다.(로버트 켈리, <<수렵채집사회>>) 신석기의 문제점, 농업혁명부터가 가장 큰 변화라는 관점은 최근들어 더 자주 거론되고 있다.  


2. 서양사상사라는 것과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도 폐기된 역사들은 다시 일어설 수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입맛에 맛는 주류만 남기고 나머지는 지우는 일의 반복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수많은 <<자기이론>>들이 호흡하고 있음에도 자신의 말을 만들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이 더 알맞은 표현은 아닐까? 


3. 이 해적 계몽주의라는 책은 <<모든 것의 새벽>>이라는 책과 궤를 같이하는 최신 저작이다. 안타깝게도 저자는 코로나로 유명을 달리했다. 해적이 계몽주의의 원조라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가장 큰 해악이 아니라 신석기부터가 더 큰 문제라고 얘기하는 부류와 다른가? 그리 다르지 않다고 본다. 역사라는 것은 있는 사실들을 큰 통에 넣고 흔들어 다시 꿰어내는 능력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과학이 진리에서 벗어나 상상을 넘나들고 있기도 한 것이고, 인간이란 존재가 특수하지도 특별하지도 않다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기도 하다. 과학과 역사, 종교가 서로 넘나들지 말란 법도 없는 건 아닐까? 그렇게 종횡무진으로 움직여야 지금을 구해내는 깨달음같은 관점을 얻어내는 건 아닐까? 어쩌면 지금을 구해내기 위한 계보학의 일환으로 봐도 될 것이다.


4. 해적 계몽주의 부록 도표를 보면 서양사상사의 출발에 있어 마다가스카르 해적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5. 교류사나 비교문화. 각자 독특함을 뿌리로 삼는 것 또한 지금에 비교하면 양호한 자극을 낳을 수도 있을 듯하다.


볕뉘


뿌리나 출발점을  삼아 기술하는 역사는 많은 것을 사유하게도 만들지만, 그 닫힌 매듭은 또한 그 주위의 것과 연결점들을 보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민족이나 신이나 또 다른 우월감을 위해 찾아낸 역사들은 사상누각일지 모른다. 그렇게 지금까지 그 짓을 해온 것이 우리 인류이기도 하다. 지금과 연결된 고고학과 계보학은 자랑하고 뽐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뿌리를 다시 확인하고 보지 못한 것들을 보게 만드는 작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가볍게 읽어도, 무겁게 읽어도 좋을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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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30남성. 중도층처럼 움직이지만 그렇지 않는 이 그룹은 어떻게 움직여 왔으며,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이대남인가? 그렇게 폄훼될 수 있을 것인가?  <경험의 멸종>에서 말하는 것처럼 떠블클릭의 광증에 시달리는 우리는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을까? 매개는 없고 즉답을 요구하고 즉답만 살아남는 시절에 우리는 반추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정말 그러한가?라는 의문조차 살아남을 길이 없다. 하물며 연구라니?


 세대론, 남성여성, 재산, 지역으로 나누는 구분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기도 하다. 어쩌면 2030남성이란 정체는 그런 구획이나 선긋기나 갈라치기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변할까? 변할 수 있을까? 백여일 뒤, 설문이나 데이터는 어디를 가르키고 있을까? 그리고 그 사실이 변할 수 있고, 변하게 하는 지표나 물꼬를 만들 수는 있을까?라는 의문까지 뒤섞인다 싶다.



2. 


미국인 저자의 말로는 강원도 상동광산이 살아나고 있다한다.(급 검색을 해보니 작년부터 난리가 났군. 내년부터 채굴가능이라고 한다.) 땅밑의 전쟁은 불안한 국제정세로 국가마다 굴곡을 갖고 진행되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이를 예견하고 대안의견까지 갖고 있기도 하다. 지구가 갖는 희귀자원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지구 안의 흐름에 갇혀 여기저기 그 수혜와 희생을 함께 맛볼 수 밖에 없음을 평온한 논조로 기술한다. 그리고 그 지하에서는 영국 산업혁명초기의 굴뚝청소부 이상의 과다노동과 열악노동이 빈번하다. 버젓이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국가는 학대당하고 있다. 제1세계의 안락한 삶들을 위해 수면아래 거침없는 발놀림은 여전히 재현되고 있다. 





3. 


우리는 기억력과 문해력, 글쓰기의 곤란을 몸소 겪고 있다. 남녀노소 성별 세대를 불문하고 뇌를 밖에 두면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책을 읽지 않고 요약해달라 하는 독서의 종말, 문서 작성을 맡기는 생각의 종말, 지시어만 넣어 그림을 얻는 창작의 종말까지 우리의 경험들은 단순화시켜 밋밋해질 것이다. 그 와중에 재미까지 휩쓸려내려가지는 않을까? 


벌어지는 일들을 멀리서 쳐다보기만 하면 그럴 것이다. 그 안에 있는 상실들을 발라내지 않는다면 서있는 나의 중력까지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 남은 안간힘, 경험과 재미, 자본주의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채득하지 않으려 한다면, 당신은 좀비처럼, SF 영화의 아메바처럼 뚱뚱한 몸만 남아 걷지도 못하는 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



4. 


정현종시인의 시가 아니더라도 사람을 만나는 일은 무척 설레는 일이기도 하다. 하물며 애써 고른 선물로 전달될 온전한 마음과 정성이 그 만남에서 버무려진다면, 우리들의 관계는 그 순간부터 싹이 나고 자랄 수 있다. 우리는 상품을 고르는데 익숙하다. 가성비와 유용성. 하지만 팔할은 사람들 사이에 이런 유용성과 가성비만 따지다보면 대부분 팔할이상 그 관계를 놓친다.  자본주의의 상품으로 도배된 세상을 쫓다보면 틀림없이 당신 곁에 사람들은 남지 않을 것이다.


어디 가든 빈 손으로 가지마라. 빈 손이 아니라 여행떠나기 전 설렘처럼 다른 것들을 담는 선물을 준비한다면, 받는 이는 마음과 당신의 됨됨이, 사교의 끈을 읽을 것이다. 이 또한 혹시 벌어질 일을 예비한다는 측면에서 뇌물로 진화한 지 모르겠지만, 작고 꾹꾹 눌러쓴 편지글처럼, 애써 만든 물건이나, 희귀한 가성비 좋은 지역 특산물들은 신선한 바다나 파도향까지 덤으로 전하기도 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그늘에서 살지만, 자본주의를 너머 사는 법은 해보는 만큼 바뀔 수 있다. 부끄러워 말고, 만날 때 음료수 한병이라도 건네자. 장이라도 튼튼하게 말이다. 십중팔구 좋아질 것이다. 맨 손보다는.. ...



5. 


스피노자는 자연은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한다. 신의 목적에 의해 인간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처럼 자연에는 목적이 없다. 우리 현대인들은 이런 사소한 출발을 놓친다. 그래서 지구를 탈출하고 지구를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그만 철퍼덕 주저앉는 상태다. 자연스럽다. 그냥 연결된 하나란 사실을 여전히 머리 처든 국가 국익이란 괴물을 만들어 애써 부정하고 있다. 북극해를, 그린랜드를 또 어떻게 이용해쳐먹으려고, 편취를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우리나라만 잘살면 대체 뭘할 건데. 나만 잘살면 대체 무슨 재민겨의 버전의 노하우도 갖지 못하는 것이 국가라는 망령이기도 하다. 아이러니의 해결책은 지구밖에 있지 않다. 머리처든 국가의 아둔, 그것이 인간만 낫다는 목적론의 유사 판박이다. 그러니 우리는 근본의 철학을 다시 모든 사유와 평행하게 같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생각했던 자연을 없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상상하고 배울 수 있다. 부르주아가 귀족의 유유자적을 문제삼았던 것처럼 국가의 우둔함을 문제삼아야 한다. 그 그룹은 버젓이 지구를 망치고 있다. 오늘도 여념없이, 한 국가의 한 국민을 위한다는 착각을 주입하면서 말이다.



6. 


헛, 이 사람 한병철인가? 왜 이리 책을 자주 내는 거야. 살펴보니 기고문, 연설문 등등 최근 이 삼년간의 활동 흔적이다. 연결되어 있다. 모르는가? 다 안다. 하지만 알면서도 모르고 있고 움직이지 않는다. 데이비드 봄의 사유까지 나아가지 않는 과학자들도 많은데, 이만하면 감지덕지 아닌가? 이탈리아의 사회운동가로, 어디도 국가는 못된 짓과 기득권의 아성이 되어버린지 오래다. 야생성은 온데 간데 없고, 냉소로 가득채운 분위기는 지구 곳곳을 횡행한다. 우리는 홀로 존재했다. 혼자 악다구니로 산다. 하지만 말이 그러하듯, 우리는 소통해야 한다. 언어라는 것이 소통하려고 만든 것이다. 혼자는 없으니 걸음마처럼 선물하듯 남을 의식하는 일상들이 채워져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가 어제 달팽이책방 매대에 놓인 책들이다. 선물같은 책들. 궁금의 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이렇게 책들이 서로 손짓하며 만날 수 있단 말인가. 분명 우리의 삶들이 손짓하기에 맘짓하기에 이런 책들이 나오고 만나고 있다고 여긴다. 사회도 점차 강도와 온도와 밀도를 높이고 있다고 여기고 싶다. 분명 달라질 것이다.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고 여기고 싶다.


7. 


지금 여기, 지금 나, 지금 우리를 제대로 보는 방법들이 있다. 없는 것이 아니라 켜켜로 쌓인 지구지층, 지구정치, 지구국가들처럼 그 사이사이를 뚫고 솟아날 마그마같은 것이 꿈틀거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근시안은 더 이상 떠블클릭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밖의, 창문 밖의 너를 호명하고, 불러내고, 같이 만나는 것이 시작이다.





8. 


스피노자는 귀환했다. 그만큼 모든 철학자와 정치학자, 사회학자가 만날 것이다. 곧, 아니 만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서로 같이 더 나은 삶을 꾸리고 싶기 때문이다. 이원론에서 사로잡힌 근대인들이 망상과 지금의 나를 빠져나오는 아리아드네의 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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