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패배주의적 사고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다. 일의 진행 양상은 더 복잡하며 배움의 시기, 그리고 배운 교훈을 잊는 시기가 번갈아 온다. 이렇게 해서 완전한 혁명을 통해서만 변화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곁에 이렇게 적어둔다. “전체를 모두 바꾸는 변화를 열망하는 것은 재앙을 만드는 조리법”이다. 819
<경제 발전 과정에서의 소득불균형에 대한 참을성의 변화>. 열광에서 절망으로 전환한 1970년대 초반의 이 시기를 사람들이 하나의 집단적 감정에서 다른 하나의 집단적 감정으로 시계추처럼 이동한 순간이라고 보았다. 토크빌의 구절과 관련이 있는데 “다른 사람이 더 나아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상황이 실제로 나아지든 아니든 상관없이 자신의 상황이 더 나빠진 것으로 느낄 수 있다. 열광에서 절망으로 시계추가 이동한다. ‘터널 효과’ 820
라로슈푸코의 <<회고록>>. 보상이 곧 올 것이라거나 마땅히 와야 할 보상이 오지 않고 있다는 인식(의미론적인 발명과 반전)은 감정을 뒤집을 수 있었다. 터널 효과는 환희의 첫 순간, 1960년대의 ‘관용적인’ 분위기를 나타낸다. 그리고 터널 효과가 사라지면서 1970년대에는 분위기가 분노로 바뀌었다. 정작 놀라운 것은 불안정성이 아니라 “굉장히 널리 퍼져 있는 안정성”이라고 생각했다. 안정의 지속은 “폭동, 쿠데타, 혁명, 내전의 발생만큼이나 설명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822 <이해에 방해가 되는 패러다임의 추구> 해석적 사회과학이라 불리는 기념비적 논문.823
정책이 일으키는 “부정적인 부수효과”에 직면하게 된다. “남미 곳곳에서 국가가 차가운 괴물이 되어 가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이 현실을 조금이라도 설명하기 위해서는 예전에 긍정적인 부수효과들에만 강조점을 두었던 것과 달리 ‘부정적인’ 부수효과들을 파악해야만 했다. 830 1973. 허시먼은 과장된 희망 아니면 무기력한 절망이라는 양자택일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칠레에서 벌어진 일은, 자유시장은 “해결책이 아니며”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833
필요한 것은 완전한 조명이 아니라 한두 개의 불빛이다. 837 산업을 고도화하는 과정이 문제에 봉착하면서 군부독재가 들어서고, 그렇게 들어선 독재 정권이 산업화 과정에 강제적으로 안정성을 부여하게 된다는 것이엇다. 오도넬의 논문은 새로운 재조정을 일으키는 국내 요인들에 관심을 둠으로써 좌파들이 주장하던 ‘반제국주의’ 도그마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또한 남미를 ‘만성적인 규율 불가능성’에 시달리는 지역으로 규정하는 미국 정치경제학의 케케묵은 이야기에 도전했다. 842 한편 허시먼은 오도넬의 경직된 단계론적 논의가 후방 연관 효과를 지나치게 과장하고 있으며 산업 발달이 가질 수 있는 다른 선택지와 다른 문제들을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843 사회과학이 민주화된 남미에서 유용할 수 있으려면, 좌파와 우파가 희한하게도 서로 수렴해버린 견해, 즉 급진적인 해법이나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이 없으면 발전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견해에서 멀어져야 했다. 846
<<자본론>> “산업적으로 가장 발전한 나라는 산업적 사다리를 타고 올라올 후발 주자들의 길을 먼저 갔을 뿐”이라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말을 늦게 시작하더라도 모든 자본주의가 동일한 경로를 갈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지만, 바로 다음 단락에서 마르크스가 독일과 영국의 발전 과정이 매우 상이한 경로로 진행되었음을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844 <<법철학>> 이미 1821년에 헤겔은 자본주의의 문제점들을 발산해낼 잠재적 배출구에 대한 논의를 담은 경제 이론을 만들었지만, 마르크스는 이 점을 보지 못했다.(헤겔이 제시한 배출구는 ‘제국’이었다.) 이를 간과하는 바람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자신의 문제들에 대해 예기치 못했던 해결책들을 찾아 나가는 교묘한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헤겔의 통찰을 활용하지 못했다. 845
‘개입적 변수들’. 경제 영역에서의 문제와 위기를 성공적으로 다루는 데 필요한 정책은 어떤 종류여야 하는지에 대해 지배층이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는지 분석하는 것이 중요했다. 신념·개념·이념의 작동을 도입함으로써 경제 문제를 정치적 결과들과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경제발전 단계와 정치 형태 사이의 관계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념이나 인식에 의해 매개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지배층이 특정한 산업화의 사이클이 효력을 다했다고 생각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정치의 양상이 크게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 동기는 경제적인 것일 뿐 아니라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것이기도 했다. 849 터널 효과에 대한 수정: 경제 논의에 집중하다 보면 정부는 사람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경제 문제와 상당히 다른 것일 때조차도 경제문제라고 생각하다가 스스로 그런 조작의 희생자가 된다. 정치와 경제 사이, 신념과 행동 사이를 연결지어야 한다. 851 고통의 불협화음 속에 대안이 담겨 있다.신기루는 적어도 카라반이 목적지에 도착하게 만들기는 한다. 853 영웅과 악한을 찾아내려는 경향에서 벗어나 남미 독재 정원의 기반을 더 다양하고 온전하게 살필 수 있다면 그것을 더 빨리 없앨 수 있을 것이다. 순환논리가 아니라 윤리적인 목적이 필요한 이유는 이런 실용성에 있는 것이다. 854
사회가 대대적인 변화의 시기를 지날 때 그 변화의 과정에는 우연과 선택이 가득하기 마련이며, 이것을 파악하려면 이성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해야 했다... ...학자들이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면 오히려 경제를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경제는 하나의 블랙박스가 아닙니다. 거기에서는 온갖 종류의 새로운 것들이 휘몰아치며 만들어지고 있습니다.”858-859
12.
<<군주론>> 권력의 신비에 대해 마키아벨 리가 무엇을 생각했는지를 보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865 스무 살 때는 마키아벨 리가 “일반 원칙”을 세우고자 한 것에 관심이 끌렸다. 그때 허시먼은 마키아벨 리가 추구한 원칙이 “마르크스의 운동 법칙”과 비슷하다고까지 생각했다. 장년이 된 허시먼이 다시 발견한 것은 역사의 법칙이 가진 아이러니를 드러내고자 한 회의주의자의 면모였다. 마키아벨 리가 “인간이 상당히 경멸받을 만한 존재일 뿐 아니라 세상 또한 상당히 엉성하게 혹은 사악하게 조직되어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867 마키아벨리가 희소한 자원에서 극대치를 달성하고자 하는 경제학자처럼 주장하는 것을 다시 읽고 매우 놀랐다. 통치자가 미덕의 귀감이 되면서 동시게 국가를 유지하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의 유지라는 제약조건 하에서 도덕을 극대화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소비자가 예산의 제약 하에서 효용을 극대화하듯이 말이다. 868 고전적인 역설. 국가에서는 권력과 참여가 둘 다 필요하고, 결혼에서는 유사점과 차이점이 둘다 필요하다. 세계의 국가들은 종종 직선이 아니라 원으로 배열된다. 그래서 가장 좋은 국가와 가장 나쁜 국가가 가까이 붙어 있다. 명백히 상충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가까운 형제일지 모른다. 이 두 원칙은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869
MIT 컨퍼런스에서 “경제 이론이 이렇게 끔찍한 방식으로 정치적 사건과 연결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제학자들이 그다지 충격을 받지 않는 것 같아 보이는”데도 절망했다. 885 폴 샤믈리<<스튜어트와 헤겔의 정치경제와 철학>>. 막스 베버<<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나는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사람들은 그때 왜 새로운 원칙을 찾고자 하는 강박을 가졌던 것일까에 대해 탐구해 보고자 한다.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절박하게 답을 구하고 있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17세기에...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던 절망적인 고통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887 자본주의가 처음 생겨났을 때의 이론을 도출하여 자본주의의 억압된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면, 희망을 시장의 구원에만 두거나 사회주의 혁명에만 두는 극단주의의 유혹을 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888 몽테스키외,<<법의 정신>>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상황에 있을 수 있다면 매우 운이 좋은 것이다. 정념은 그들을 사악해지는 쪽으로 추동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이해관계가 그들이 사악해지지 않는 쪽에 걸려있는 상황.”888
애덤 스미스 <<법학 강론>>. 허시먼은 스미스가 ‘경제적 인간’이라는 개념을 발명하고 이 새로운 인간상을 연구하는 학과를 만들면서 경제를 정치에서 분리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미스가 사실은 경제와 정치의 관계에 관심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이 책은 그에게 매우 새로운 통찰을 제공했다. 894 마키아벨리 <<로마사 논고>>. “무장한 시민들”은 자신의 자유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사람들이며, 사회에 여러 계급이 존재하도록 함으로써 각 계급이 서로를 견제해 권력이 계속해서 분리된 상태로 있게 만들어서 자신의 자유를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스키너은 이런 이미지가 몽케스키외 공화주의론, 루소와 연결되었고 행동주의적 사상이 갖는 강점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896 어떤 유형의 경제 관계는 어떤 유형의 정치로 이어진다. 897 헤겔을 인용하면서 이제 ‘영웅적인 이상’은 ‘무너졌고’ 그 자리에 ‘실천을 통한 변화’가 들어섰다고 결론 내렸다. 그는 “인간은 그가 하는 일을 하면서 변화될 수 있다.” 899
<<정념과 이해관계: 자본주의가 승리하기 이전의 자본주의 옹호 주장들>>. <<진보를 향한 여정>>을 집필하면서 정책 결정자들을 읽어냈듯이 이책을 집필하면서 고전 사상가들을 읽어냈다고 볼 수 있다.900 ‘정념’을 ‘이해관계’라는 말로 새로이 포장함으로써 개인의 충동이 덜 충격적으로 보이게 되었고 사회에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범위”로 흡수 가능하게 되었다. 스미스는 이를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으로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국부론>>에서 ‘우리가 저녁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푸주한, 양조인, 제빵인의 이타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해관계(이기심) 때문이다.“ 허시먼은 스미스가 선택한 단어들에 밑줄을 그었다. 사회가 호소할 수 있는 곳은 개인의 인류애가 아니라 자기애이며,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이득이다.901
사적인 이기심을 추구를 옹호했지만 공적인 도덕적 태로를 잃지 않았던 사람으로서 스미스를 부활시킴으로써 투쟁의 양편에 다리를 놓고자 했다....902 허시먼이 파악한 바에 따르면 스미스에게서 ’정념‘이나 ’악덕‘과 같은 단어들이 ’이익‘과 ’이해관계‘와 같은 밋밋한 단어로 바뀌었는데, 이는 의도적인 것이었다. 인간의 동기들을 이런 식으로 새롭게 표현함으로써 그것들이 더 계산가능하고 예측가능하며 일관성 있는 것으로 인식되게 만든 것이다... ..의도치 않게 공공후생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치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둘다 한 쪽의 어리석음과 다른 쪽의 근면이 점차로 가져오게 될 거대한 혁명을 예견하고 있지도 않았고, 그러한 혁명을 가져오기에 필요한 지식을 알고 있지도 않았다.“ 903 <<도덕감정론>> 그들의 주머니에는 별로 편리하지 않은 물건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이런 것들을 더 많이 지니고 다니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옷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주머니를 만든다.....스미스는 넓은 의미에서 공화주의 정신을 따르고 있었다. 정부가 스스로를 제약하는 규칙을 통해 국민과 국민의 번영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904
‘반작용적인 정념들’로부터 ‘반작용적인 이해관계들’이 나오고, 이러한 ‘대치되는 힘들’로부터 견제와 제약의 원리를 도출할 수 있다고 본다. 희망은 복잡한 혼합, 긴장, 변증법에서 나온다. 이해관계는 사실 각 본성의 좋은 면들만 취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자기애적인 정념은 이성의 제약을 통해 개선되고, 이성은 정념에 의해 방향지어지면서 둘 다 향상되는 것이다.... 그 시절에 이해관계의 원리가 진정한 구원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909-910
<<국부론>>에서 스미스가 수행한 혁명적인 작업은 이기심의 추구에 경제적인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이기심이 통치자의 과도함을 억제하게 될 것이라고 정치적인 언어로만 이야기했다. 허시먼은 이 결정적인 움직임이 정치학과 경제학을 분리하는 기반을 닦았고, 개인의 사익 추구를 더 계산가능하고 예측하능한 질서의 기초로 삼으려는 시도의 토대를 만들었다고 보았다. 910 <<정념과 이해관계>>에서 주되게 설명하는 부분은 스미스가 한때는 반의어였던 이해관계와 정념을 유의어로 만들었으며, 그럼으로써 모든 이가 자신의 개인적 이해관계를 따라갈 때 사회 전체의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개념을 불러올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911
고전 사상가들은 정념과 이해관계를 경제적인 정신 속에 흡수할 수 있는 존재로서 ‘결합된 자아’을 제시할 수 있었고, 이와 동시에 이렇게 재결합된 자아의 자율성을 정치적 정념으로 가득차 짓밟고 간섭하려고 하는 국가에 맞서는 기제로서 제시할 수 있었다.912 허시먼은 애덤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의 연금술 속에 녹여 없애버린 인간 충동들의 경쟁, 갈등, 긴장, 그리고 비유의어적인 특질들을 되살리고자 했다. 이러한 자아 모델, 즉 복잡하면서도 결합되어 있고 그러면서도 불편한 자아 모델을 사라졌다. 그래서 허시먼은 역사로 돌아가서 원래의 열망과 우려를 되살리기 위해 정념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913
정념과 이해관계는 ‘공동의존적’이었다. 견제가 없을 경우, 정념의 지배는 끔찍한 유토피아로이어질 수 있었고 이해관계의 지배는 영혼 없는 실용주의로 빠지게 될 수 있었다. 915 허시먼과 스미스 모두 개인을 복잡한 존재로 보는 견해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사회의 섬세한 균형점이라는 개념을 촉진하기 위해 분투했다. 스미스가 앞을 내다보며 그랬다면 허시먼은 뒤를 돌아보며 그랬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다.916 인간은 상호경쟁하고 또 상호결합되는 충동들이 유장하게 투쟁하는 서사의 무대이다. 허시먼은 그럼으로써 인간이 이기적인 획득의 욕망과 공동체적인 미덕을 둘 다 갖는 ‘근대적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921 토크빌: 정부에 질서유지만 요구하는 국민은 본질적으로 이미 노예이다. 그 자신의 후생의 노예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족쇄를 채울 사람이 등장할 수 있다. 912
볕뉘. 생각보다 길어져 한 번 더 밑줄을 챙겨야 할 것 같다. 그의 저작은 다작은 아니지만 많은 것들을 함유하고 있다. 분량 역시 길지 않다. 설핏 읽었던 정념과 이해관계 최신 출간본은 그 근저에 많은 뿌리들을 함유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그 고민과 방향을 새겨준다고 볼 수 있다. 좀더 깊은 해석과 읽기가 필요한 듯싶다. 아마티아 센의 경제학에서 복수 개념들이 많이 등장하고, 또 다른 허시먼의 책 서문에도 등장한다. 책을 읽다보면 아시겠지만 아마티아 센은 허시먼의 조카사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