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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초대 카톡을 보낸다. 연락이 잘 닿지 않던 분들도 반겨준다. 안부가 궁금했던 책방시모임의 멤버 진평님까지.....책방에 들렀더니 낮에 오랜만에 와서 머물다 가셨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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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듯한 밀크티를 한잔 하고 있는데, 달팽님이 다가오신다. 내년 전시일정과 세부 협의를 하셨으면 한다. <타이포그래피와 강연>인데 설연휴가 있어 횟수를 줄이고 전시를 1월말부터 진행해야할 것 같다는 전갈과 함께 나눌꺼리에 대해 조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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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반년 달뷴기자(달팽치책방 신문, 지금은 무려 100회, 89회를 넘겼다.) 생활을 할 때, 썼던 기사다. 2017년 가을. 책을 읽으면서 철학의 문제를 이렇게 가닥을 잡은 것이 이맘때이다. 그래 이분법이 문제야. 다 거기에 걸려있어. 


둘로만 나누다보면 닮는다!

 

_여울

 

지금 여기, 유령이 떠돌고 있다. ˝이것이다.˝˝이것 아니면 저것이다.˝라고 외친다. 어떤 세상인데, 왜 그럴 수 있냐고 되묻지 마라. 나는 아니라고 말하지도 마라. 밟아도 되살아나는 것이니 그리 한 숨을 쉬지도 마라. ‘만 필요한 윷판. , , 윷의 목소리는 늘 잊히거나 전체와 관계없는 목소리로 소멸된다. 백과 흑, 흑백, 검정과 하양을 한 번 경험해본 자를 회색이라고 해보자. 회색이란 사건을 경험한 자만이 흑과 백의 농도를 느낀다.

 

경주·포항지진. 지진멀미에 아직도 몸은 진동에 떨린다. 전통적인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 존 듀이는 경험으로서의 예술 1,2(존듀이, 나남)에서 ˝삶은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삶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경험은 역사적 사건과 유사한 것이다. 경험은 일정한 시간간격을 두고 일어나는 사건이며, 경험 특유의 줄거리를 가진다. 따라서 언제나 경험은 시작과 과정과 끝이 있다.˝고 하면서 ˝경험이란 우리가 살아오면서 직접 겪었던 일을 회상하면서 ˝나는 그러한 (하나의) 경험을 한 적이 있어˝고 말할 때의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서 경험은 멀미가 드리우고 있는 정서나 감정의 고저까지 안고 사건을 보는 것이다. ˝하나의 경험에서 보면 사고한다고 하는 것은 경험에서 지각되는 관념들을 일정한 질성이 드러나도록 계속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행위와 정서, 소소하고 미미한 것들을 포함해서 전체를 느껴야 한다고 한다. 이어서 그 사유와 행동의 끓는점 부근에서야 직관이 나타나며 상상력으로 그 하나의 경험은 충만한 단계에 이른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그는 다각도로 이원론에 갇힌 사유의 한계를 보여주고자 했다.

 

이분법이 세상과 사물을 인식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긴 하지만 저자는 사건의 정치(마우리치오 랏자라또, 갈무리)에서 ˝우리가 가능성을 기존 체계에 의해 고찰한다면, 여러 가능태의 배분은 기존의 양자택일 형식(남성/여성, 자본가/노동자, 자연/사회, 어른/아이, 정신/육체 등)에 의거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우리의 욕망이나, 감정, 지각 역시 그 이항대립의 틀 내에 서식할 수밖에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양자택일의 거부만으로도 새로운 지평을 우리에게 여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기존 관념에 대한 저항을 권한다. ˝세계가 객체와 주체가 아니라 관계의 짜임새로부터 성립하고있으며 그 관계라는 것은 여러 사물과 사건에 관해 함께 느끼고 서로 영향 받는 것이다.” 그 관계에서 느끼는 기쁨과 슬픔은 새로운 말들은 만들 수 있고 여러 경험과 사건들로 확산될 수 있다고 한다. 자본주의 역시 끊임없는 발명과 삶의 세뇌를 재현하지만 이렇게 다성과 다양의 사건의 발명으로 새롭고 다른 길에 접어들 수 있다고 한다.

 

한편 곁을 보지 못하는 이것이다라는 것도 다시 보아야 한다. ‘이것이다라는 확신은 모든 문제를 자기 안으로 불러들여 합리화하는 것이다. 모든 문제는 자본/노동 계급 때문이야‘, ‘서울/지방으로 나눠져서야‘, ‘가부장제(/)때문이지‘, ‘생태주의야‘. ‘남북이 갈라져서야로 전유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삶과 예술, 몸과 정신, 관객과 배우의 경계를 허무는 예술-사건을 포괄하는 이론을 제시한 수행성의 미학(에리카 피셔 리히테, 문학과지성사)은 참고할만하다. 그는 ˝경계는 서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는 문지방이 된다. 오히려 이것은 융통성 없는 대립의 극복에 관한 것이고, 역동적인 차이로 이끄는 것이다. 이분법적 개념쌍을 와해시키고, ‘이것 아니면 저것대신에 이것뿐만 아니라 저것도라는 논리를 따른다.˝ 라고 한다. ˝수행성의 미학은 모든 인간이 이것뿐만 아니라 저것도에 의해 결정되는 새로운 관계를 맺을 것을 장려한다.˝

 

레비나스를 스승으로 사숙한 저자는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우치다 타츠루,갈라파고스)에서 ˝타자는 빈자, 이방인, 과부, 고아의 모습을 갖는 동시에 스승의 모습을 가지며, 그것이 나에게 자유를 수여하고, 나의 자유를 기초 지우는 것이다.˝라고 한다. 레비나스의 타자는 서양철학에서 독특한 특징을 갖는다. 좋은 삶으로서 존재만을 고민한 것이 아니라 낯선 타자와 무한을 철학에 들여왔다는 점이다. 운동과 지속, 창조의 베르그송 철학조차도 그는 존재의 마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혹평한다. ˝사랑의 대상은 우리의 외부에 있어, 나의 지배나 파악을 벗어나 있다. 애당초 내가 지배하고, 파악하고, 통제 가능한 것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우리는 사랑할 요건이 갖추어졌다고 해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상은 가늠하기 쉽지 않지만, 끝없이 다르게 분기하는 사랑을 품어서 서로 달라지는 과정과 다양성의 철학으로 읽어보면 어떨까 싶다.

 

정보와 소통이 넘친다는 01의 디지털시대다. 하지만 우리는 원하는 말만 취한다. 그 사이 아날로그. 눈과 말, 그 시선과 감정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어쩌면 전도하기에 급급해 다른 이의 경험의 줄기에 달려있는 많은 지혜와 사랑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모와 도뿐인 나만의 생각에서, 너로 이어지는 개--걸의 시선으로 다가서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생각이나 삶의 시선을 의탁한다는 것 자체가 이분법의 그물코에 꿰는 것은 아닌가. 느낌을 공유하는 이야기가 숨 쉬는 곳들, 서로의 특이함에 귀기울는 사회, 그 독특함의 새로운 말을 만들고 나눌 수 있는 시공간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서로의 경험을 잇고, 서로의 직관과 상상을 더해 좀더 따뜻한 생각 습관을 갖기 시작할 수 없을까? 전체를 보려하고 그러다가 혹시 저 달의 이면을 볼 수 있는 기예를 익히게 되면 좋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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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람은 참 변하지 않는단 말이야. 어쩜 그렇게 변하지 않을 수가 있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래도 그 가운데 나은 책이 <<내가 된다는 것>>이다.  아첨을 좋아하는 이는 더 더구나 바뀌지 않는다. 어제 읽은 책에서 자기지시구조, <관찰자-비관찰자>편에서 그게 문제라는 걸 알지만 비판하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나쁘고, 화나고 짜증나게 되면 또 귀에 간지러운 소리를 찾게되는 순환 틀을 이야기 한다. 그래서 바뀌지 않는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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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님과 이야기나누는 순간 언급된 책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폐가 있는 분이 스스로를 극복해가는 과정은 직접 본인이 재관찰하면서 쓴 성장과정기를 다룬 책.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 스스로 명상을 통해, 무아과정을 겪으면서 내려놓고, 나쁜 관계나 이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한다. 어떻게 하면 바뀔 수 있는가, 아니 바뀌지는 않더라도 그 경계를 감지할 수 있다면 조금씩 나아질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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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델, 에셔, 바흐>>란 책을  천천히 읽다가 드뎌 며칠 전에 마지막쪽을 해치웠다. 하지만 이 책은 이렇게 읽고 마치게 되는 책이 아니다. 저자가 짜 놓은 틀과 인물, 장치로 다시 들어가야 하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책이기도 하다. 그러니 다시 읽어야 한다. 저자의 시선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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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자기-지시구조를 깨는 선구안을 집대성한 책이다. 이해를 하게되면 정말로 훌륭한 책일 것이다. 하지만 중도 포기자가 넘쳐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수학논리구조(러셀), 꼭 자기 머리를 세지 않게 되는 경우같다. 생명이라는 것, 면역을 기본틀로 하는 것들은 그것을 넘는다. 그런데 왜 인간들은 그 바이러스만도 못하게 자기를 벗어나지 못하는가에 대한 많은 답들이 들어있기도 하고, 조직의 구조나 신유물론이 추구하는 측면도 함께 눈여겨볼 수 있는 멋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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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연습과 생각바꾸기(아직도 그러하다) 몸바꾸기의 과정들을 나누고 싶고, 그 개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SF작가 지망생인 지인에게 전시초대 카톡을 했는데 책방에 쏙 들어오신다. 문과라 양자역학책을 고르고 계셨다. 물론 뇌과학책도 궁금해해서 이렇게 추천해드린다. 


볕뉘


오늘은 작업실 청소도 하고 쉴 겸 곁에 두고 있던 밑그림에 채색을 시작한다. 작년 길시리즈의 연장선이기도 한데, 길을 이렇게 정리도 하고 싶었다.


지나고/만나고  사귀다가/만들다가   '길'  조차 잃어버리는 일. 잊어버린 ,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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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수막, 포스터, 도록이 도착한다. 언박싱. 궁금하면서도 설렌다. 도록. 도록. 어 그렇지 조금 큰 사이즈에 색감도 좋고 좋아좋아. 만족스럽다. 어 살짝 제본의 곁이 나가긴 했지만. ...  그러다가 한 부분이 집힌다. 엊그제 박싱을 하다보니 분명 아크릴패드 아닌 것이 있었는데, 놓쳤다. 제소보드에 사이즈까지. 


어쩐다.이걸.

우선 조금이라도 라벨링을 해야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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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고 오리고 오린다. 라벨지가 끝부분이 제대로 접히지 않아 떼어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손톱깎이 지갑에서 이걸 꺼내든다. 조금씩 나아진다. 그래 수평 맞추어서 붙이자.


이건 또 야근이네. 왕두껑 하나 들고 시작할까.

사무실이 야근장이 되어버린다.


잠시 화실 배달하고 왔더니, 서각촌장님은 지금까지에서 제일 낫다고...반응들이 뜨겁다. 언제 이런 걸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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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멀리있는 곳들 발송분들만 대략 가늠하여 만들어둔다. 라벨지도 부족할 듯 싶어 주문 넣구. 바쁘다 바뻐. 


알라디너부터 챙긴다.


0


아침부터 부산스럽게 챙겨 우체국으로 향한다. 대봉투가 부족하다. 절반만 갖고, 문구를 들러 봉투를 사고, 우체국에서 나머지 작업을 한다. 여경비원이 쓱 다가오시더니 마무리 테이핑을 도와주신다. 앗싸. 고맙다. 진심.


등기에는 일반등기, 빠른 등기가 있는데 이번에 준등기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사람을 대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편함까지 가는 것인데 빠른 등기 비용의 절반이다.


1.


99부. 도록이 한 부 남아 우체국 직원분께 드리면서 돌려보시라고 한다. 펼치더니 깜짝이야 한다.


2.


결국 이 시간에 눈알 붙이기는 쪽집게에서 손맛으로 바뀐 뒤 마무리된다. 익숙해진다는 건 정밀해지는 것이다. 눈감고 할 수 있을까. 아무렴 어림없다. 그래서 라벨기에 기념으로 하나 남겨둔다. 눈이 침침...


3.


기대들 하시라.





 볕뉘


치킨집. 단골집에 주인이 바뀌다. 오랜만에 들렀더니 왠 변고인가. 어

떡한다. 해장국집에 들르니 마감 십분전이라 한다. 어쩐다. 한참 헤매다 마늘치킨집에 들어 짬독한다. 세부사항으로 들어오니 더 멋지다. 아 이 양반 장난 아닌데...마늘은 왜 이리 아린가....맥주 진도는 나가지 못하고 귀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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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시난데를 타고 다있소에 들르다. 오늘을 라이팅과 폴데다. 마지막 작품의 불빛과 글을 드리울 것이 필요하다. 있던 캔들은 불빛이 약해서 불안하다. 따듯한 불빛이면 좋을텐데, 크기가 맞지않고, 불빛이 마음에 들면 크기가 맞지 않는다. 커튼에는 무게별로 세팅이 되어 있다. 적당한 크기와 무게의 것을 싣고 온다. 낮에 찾아온 부조액자와 모아두니 한 꾸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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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보는 사이 사이 짬독을 한다. 식상한 주제인데, 대체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지 궁금한 것이 묵혀진지 며칠 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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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한다. 주의를 기울인다. 사실형사고, 참여형 사고, 유보, 역설에 대한 대응, 비개인적 유대감, 중립적 호기심 들이 키워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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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생돼지찌개가 생각나 들른 식당 주인아주머니. 티브이조선 팬이신가보다. 정말 봐주지를 못하겠던데. 내색은 하지 못했지만, 어찌 동의까지 구하는 제스처를 취하시기까지 한다. 


1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응대하는가가 아니다. 사실들을 끼워 맞추어 놓은 기획이 아니다. 닫힌 결말을 요구하는 소통은 더 더구나 대화가 아니다.  그것은 기획된 주입에 가깝다. 그 가게 사장님은 마음 속에 채워진 단어들의 조합을 기계처럼 원한다. 듣고 또 듣고, 선동적인 앵커에게 넘어가고, 또 어떤 가십(기사꺼리가 아니다.)거리를 던져주면 패널들은 돈묻은 발언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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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어쩌구저쩌구 하는 것이 아니라 친밀감이 먼저라고 한다. 유대감. 비개인적인 유대감이 제일 우선이라고 한다. 바닷가에 있다는 이유로 지인들이 머물다가기도 하는데, 밤을 지새우면서 나눈 이야기들 끝의 여운들이 좋다. 그래서 또 찾아오기도 하고, 끝을 모르는 이야기를 이어나가면 뭔가 풍성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긴 했지만 늘 부족한 2%.를 채워주려고 권한다. 이렇게 몇 시간 얘길 나눈다고 해결되는건 없어. 맘 편하게 일박할 생각들을 하란 말야. 


늘 정해진 시간은 자기 얘기만 하다만다. 


3


대면이다. 숱한 사람들은 대부분 면접을 보면 가려진다. 숱한 이력서의 비밀은 이렇게 서로 눈빛을 볼 때 감출 수 없는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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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독. 잘못된 해석.을 열어두는 것이다. 어 그게 내 말이나 의도가 아니었는데. 그것도 중요한 것이다. 짜르고 말고까지. 


5


 이 책에서는 주체, 대상, 나, 너 그리고 같은 비중으로 '주의'를 둔다. 그렇게 3축이 2축의 갇힌 회로를 열어둔다라고 한다. 봄도 이 주의를 대화의 중요요소로 본다. 사고 thought. 그 가운데 사실만 따져들며 대화를 이어가는 걸 사실형 사고라 한다. 그에 대응하는 것이 생각하듯이 참여형 사고다. 열어두는 것이다. 공통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단어처럼 공통된 것을  만들어가는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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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젠 최종마무리. 겸  한 잔 데이. 국밥집에서 찰 순대. 그리고 땅콩에 가벼운 소맥도 이차. 오고가는 길. 쏜살같은 라이딩. 제 법 가을치고는 안온한 날이었다. 오늘도 아침이 맑고 따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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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으로 나뉜 사람들 '사이'를 고민하고 '사이사이'를 파고든다. 관심을 두고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는 시선; 과 겹쳐있는 인물과 사물들의 중첩; 되고 쌓여있는 이미지, 하기; 로 설명되는 거듭'나'기의 강조.


'얼마나 달라지느냐의 문제다. 얼마나 많은 시선을 갖느냐의 문제다. 집요한 관찰과 고민의 결과를 이번 전시를 통해 풀어낸 작가. 그의 시선을 따라 함께 걸어보자. 


<EPILOGUE>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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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가 무르춤하다. 자전거가 아니라 잔차. 바이크, 벨로. 애마<로시난테>를 타고 난데없이 다닌다. 출근하는 책방사장님도 만나고, 초청강연을 하는 책방을 지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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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습관이 바뀌지 않으면 변하지 않는다라는 어제 말꼬리에 걸린다. 나 역시 주어 없음에 걸려있다. 그 숱한 이야기의 시작이 주인공이라니. 주인공은 없다. 주인공은 냉소의 시작이다. 그래서 천만관객을 숱하게 돌파하고도 사람들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다만 해소되었을 뿐, 또 다시 일상의 삶을 산다. 대리만족이었던 셈이다.  숱한 이야기꾼들이 삶을 갈아넣어 글을 쓴다. 글짓는 법을 배운다. 또 내 글을 쓴다. 그래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시니컬, 냉소의 먹구름이 우리 심장에 드리우고 있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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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골목을 누비고, 햇살에 몰려 산책로에 나온 산책꾼들로 한가득하다. 오고 가며 가며 온 잔차길의 행로가 새처럼 보인다. 한 낮을 난다. 그렇게 배를 굶-줄여 저녁을 맛나게 들 요량이다. 무얼 먹을까. 삼산회관 할머니 김치돼지볶음이라니, 왕까스라니, 연포탕이라니, 스시라니... ...북적대는 저녁밤에 홀로손님은 머쓱하다. 그렇게 동선은 단골집에서 끝난다.


0


<과학과 예술, 종교>편을 읽다. 애초에 하나였으니 어떻게 세 갈래길로 갈라지게 되었는지. 신은 왜 저기에 쳐박혀 있는지, 과학은 왜 이렇게 우쭐 광인이 되었는지, 예술장이들은 왜 있지도 않은 자기 안의 골목길을 배회하다가 자학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그 앞 뒤를 추려본다. 데이비드 봄이 이 글을 쓸 때에는 정상우주론과 빅뱅이론이 교합을 하고 있던 듯하다. 아니면 정상우주론이 약간 우세하던 때 말이다. 과학광인은 심리의 황폐화, 영혼을 씻을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늘 건조하다. 습도가 부족해 늘 말라 비틀어져 있다. 


1


그 셋은 아름다움으로 만난다. 신은 저기에 있지 않았다. 늘 곁에 있었고 서로의 안에 있어, 힒듬과 이해하지 못함, 괴로움들을 그때그때 치유한다. 삶의 맥박을 짚어주고 신의 무릎을 베고 누울 수 있었다. 그 신을 저기로 모아버리고 고여버리게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바로 이 인간들이다. 신을 빌미로 이것저것 여기있는 것을 저기로 버렸다. 복도 저기로 모셨다. 그러니 늘 빌고 구한다. 제 안에 있는 것도 모르는 이들. 오늘도 다른 것을, 다른 것들을 악이라 칭하고 평정을 취한다. 그 간편함으로 일상을 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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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셋은 궁금함으로도 만난다. 있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예술은 정교함을 요구한다. 과학 역시 기존 틀에 만족하지 않는다. 기계론에 집착하지 않을 때, 자기-지시 구조에 맹점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수긍할 때, 좀더 색다름이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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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작업은 그제 한 작업을 다시 확인한다. 재료를 옮기고 써보고 동영상을 다시 확인해서 살피지 못한 것을 살펴보는 일이다. 출근길 벚나무 수피를 빼꼼히 본다. 가로 무늬근이다. 땅과 수평을 가르키며 빙빙 섬처럼 둘러서서 올라간다. 그 끝엔 안토시아닌이 있는 낙엽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하늘도 곱다. 잘 어울린다. 어우러지는 보색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가을은, 늦가을로 접히는 가을엔 첫눈도 접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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