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 블루 청바지를 주문한다. 사이즈를 한 단계 줄인 것이다. 황급한 문자다. 빈 방 좀 없나요. 식당 일조차 버거운 친구는 식당을 또 그만둔다


몇 개월 내내 작업실 화구에 엉덩이를 밀착시키지 못한다. 


걸려있다. 일터 재계약말이다. 긴 협상 끝에 힘으로 밀어붙이는 모습에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어떻게 하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가 이러면 안된다고 정신을 차린다.  마음 곳곳과 움직이는 동선 곳곳에서 대응을 어떻게 할까라는 기운을 살아움직인다. 잠결에도 대응진도를 많이 나가고, 몇차례 강도 높게 대응한 뒤 많이 약해졌지만 제 길을 걷고 있다. 언제 끝나나. 탄핵인용처럼 근간을 흔들고 있는 무리들이 동시에 겹쳐온다. 


봄이 봄같아지다가 도로 동이다. 똥이다. 눈은 덕지덕지 쌓인다. 겨울내내 눈발 한 끝 쌓이지 않던 바닷가에도 눈기척이라니 놀랄 만하다.


십여년 같이 지내던 피씨가 먹통이다. 어찌 이리도 동시 다발적이란 말이야. 중고피씨에 복구했다고 가져온 하드를 살핀다. 어어 어어어 정작 필요했던 최신 바탕화면 링크 목록들이 보이지 않는다. 백업을 해둔 것도 아니고 뭣이람? 아득하다. 


그렇게 북적이던 몇 달의 일상에 감기몸살도 두어 번 다녀간다. 그 와중에도 다행히 책들이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세 권의 책.


여기에 마음은 걸려있다. 아니 녹는 눈처럼 뭔지 딱 떨어지지 않는 느낌들이 뭉치려고 하고 있다라고 쓰니 좀더 마음은 편안하다. 셀 수 없는 성, 아니 우리가 선입견처럼 가지고 있는 성은 없다. 자연, 아니 우리가 편견처럼 알고 있는 자연은 없다. 그리고 스피노자와 이어진 책 정치적 정서는 놀랄만큼 다채로우면서도 이어져 있다.


이렇게 어수선한 일상들이 서로 겹치고 책들 사이 녹아내린다. 아니 곁에 물어주고 이어주고 다른 질문을 만들어주는 친구들로 단계, 단계 계단같은 순서를 밟을 수 있어 다행이다. 이번 주말, 늦어도 계약도 시국도 마무리되리라. 이왕이면 새로운 영점으로 재출발하면 좋겠다. 배제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서로 잘 살자고 하는 일이다. 지나친 욕심이 금물인 걸 아직도 잊었느냐. 검찰-검사동일체 이젠 그만하자. 나라를 말아먹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말아먹고 있다. 그래 우리가 제일 심해,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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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31까지 대전 소소아트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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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설연휴다. 월요일 27일. 생산물량이 어느 정도 있어야지만 다음 달 정산에 유리한데 여러 제안을 해보지만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일, 필요한 원재료 수급이 불가능해 쉬기로 한다. 모처럼 긴연휴는 1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기도 하다. 불황도 한 가운데 있길 희망한다. 


올라간 길에 전시 협의를 위해 영화관에 들러 한 측면을 책장과 서재 형식으로 꾸미는 걸 손쉽게 합의하고 집에 있던 책들도 옮겨 채우기로 한다. 몇 가지 아이템 가운데 하나는 해결, 나머지를 궁리하고 포항에서 차로 옮기면 숙제의 절반은 해결되는 것이다.


1월 마지막 날. 독서 세미나가 있어 전날 내려와 2부를 읽어낸다. 처음의 밑줄과 달리 읽히는 부분들이 많다. 속도를 내느라 편식을 한 게다. 어쩌면 저작의 앙꼬인 셈이다. 지금까지 찐빵 겉만 호호 불면서 먹은 셈이다. 작업실에 들러 옮겨갈 작품들을 손보고 자주 가는 단골카페에서 휴식도 취하려는데 연휴라 휴무다. 더군다가 챙겨갈 한 무더기의 작품들이 대전에 있는 것인지 일터와 사택에 있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요란스럽게 왔다갔다 이동하여 확인해본다. 


오늘 세미나의 읽기 테마는 <탈-정체화>와 <틈새>다. 자아-해체. 낯익은 대목이지만 처음읽는 분들에게는 여전히 생소하여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 도식화된 자기 계발서를 읽는 것과 사뭇 다르다고 얘기를 나눈다. 별자리 가운데 몇 가지 종류의 개념어를 읽어내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한다. 시인을 제대로 읽기 위해 그가 잘 쓰는 단어를 골라내듯이 인문-사회과학서는 저자별 개념어와 서론과 목차에 방점을 두어 읽으면 훨씬 수월하다고 코멘트를 해둔다.


다행이다. 어디에 있는 지 확인이 되어 안심이다. 세미나 한 뒤에 작업실의 그림들을 골라서 이동하여 플래너와 만날 시간을 미리 보낸다. 토요일 오후 세시. 그 쯤이면 소소아트시네마에 죽이되든 밥이되든 전시할 작품들이 모이게 된다. 드디어 2부. 계급횡단자들 세미나가 시작된다. 발제자 마다 토론자마다 다들 완독을 하였지만 자신의 시선으로 읽어내는 경향들이 하나 둘 드러난다. 주제어마저 자신의 선입견대로 읽어낸다. 어쩔 것이냐. 민중의 저자 미슐레에 대한 대목도 나오는데 이 마저 설명을 저자의 의도로 착각하고 만다. 개인-사회라는 이분법이나 이원론의 개념에 걸려 헤어나오지 못하기도 한다.  어떡하냐 어떡하지. 


하지만 우리에겐 달팽님이란 토론 명장이 계시다. 차근차근. 또박또박 밑줄을 읽어내면서 짚지 못한 부분을 확인해낸다. 부르디외, 아니 에르노, 까뮈, 미슐레 등등 우리는 또 다른 별자리들을 짚어낸 지도 모른다. 가지고 간 작품들은 스토리어 이자 플래너 서진배시인의 도움을 받아 아름다운 별자리로 태어날 듯 싶다. 긴 여독 끝에 막걸리 한 병과 가지고온 반찬, 두부 한모로 빛나는 저녁으로 갈무리한다.

제2부 밑줄펼치기 ▼

 

I. 탈 정체화

인정을 위한 투쟁은 대다수의 경우좋든 싫든 하나의 성적 정체성 또는 사회적 인종적 정체성을 사회가 수용하도록 촉구하고 문제의 정체성 범주에 대한 존엄성과 권리를 부여하도록 사회에 압력을 가하는 운동에 기초하기 마련이다이 과정 속에서 그러한 정체성 정치에 기초한 사회운동은 개인을 고정된 추상적 규정성예컨대 여성동성애자노동자부르주아지기업가 등등의 범주 속에 가두는 위험을 치르게 된다. 161

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정 개념이라는 문제틀은 그것이 개인들을 하나의 고정된 정체성에 고착시키고 개인들을 단지 하나의 유형이나 그들의 독특한 본질을 표현해 주지 않는 부편적인 하나의 공통 통념으로 환원시키게 될 때 그 불충분성을 드러낸다그러나 한 개인은 결코 성별인종사회적 지위 등의 불변의 특성에 구속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기질 개념은 섬세한 차이와 존재들의 특수성을 고려하도록 또한 갈등적 관계들을 인정의 용어보다는 인식의 용어로 사유하도록 이끈다. 161

 

개인적 자아의 해체팡세자아란 무엇인가” 파스칼은 세 단계에 거쳐 자아 개념을 해체한다. 1. 창밖에서 거리를 내다보는 구경꾼의 관점에서 자기를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2. 사랑에 빠진 연인의 시선에서 자아를 고려한다. 3. 나의 판단력과 기억력때문이라면 나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것일까노화 혹은 사고와 질병 등은 영혼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앗아가 버릴 수 있다사랑은 나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단지 내게 잠시 주어진 특성들을 향하고 있을 뿐이다그 특성이 신체적인 것인지 정신적인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어떠한 특성이든 그것은 모두 빌려 온 것에 불과하다결론적으로 우리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우리는 다만 몇가지 특성을 사랑할 뿐이다. 162-165 물론 파스칼이 이러한 자아 개념의 해체를 통해서 의도했던 바는 틀림없이 인간이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이 영원히 불안정한 존재라는 점을 증명하는 것따라서 인간은 신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을 통해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만 자신의 실체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66

자아의 유령적 성격 166 잭 런던의 마틴 에덴

 

사회적 자아의 해체:

모든 정체성은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언제나 일종의 사칭이다위인의 조건에 관한 첫 번째 담론171 풍랑을 만나 뜻밖에도 미지의 섬에 내던져진 사내의 경우처럼 우리는 우연한 마주침의 결과로 세상에 던져졌다.. 조난자처럼 사회적 지위를 정당화해 주는 어떠한 공적merite도 없다 173 파스칼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신체와 정신의 가소성이다정신과 신체는 어떠한 상태이든 구별 없이 수용할 수 있다어떤 사람이 절대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더욱 유리하고살아가기 더 편한 상태로 태어난다는 것은 끊임없이 한 곳에서 다른 한 곳으로 이동하는 인간의 본성과 합치하지 않는다한편 기질 개념은 개인들의 통일성과 정체성의 원리로서 실체적 자아 혹은 주체-자아라는 관념이 폐지된 자리에 드 대안을 제공해줄 수 있다왜냐하면 기질 개념이 인과 규정들의 짜임새를 출신과 도착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사유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175

 

이행으로서 기질권위의 조건에 관한 첫 번째 담론』 패싱passing 통행자 누구인 체 하며 이행하기패싱:이라는 말을 프랑스어로는 이행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백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에서 태어난 클레어(패싱의 실천)와 아이린 패싱작품한 방울의 원칙one-drop rule.177 이 단어가 지닌 의미론적 다양성 탓에 이해의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바로 그 다양성 덕분에 선을 넘는다는 의미와 두 세계의 경계를 넘는 밀행자paaeur가 된다는 의미를 표현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179

 

적응과 도태 사이의 계급-이행

아니 에르노는 <<남자의 자리>>에서 나는 내가 지금까지 교양 있는 부르주아 세계로 들어갈 때마다 그 문턱 앞에서 내보여야만 했던 나의 유산을 드러내는 것을 그만두었다적응은 내려 두는 과정을심지어는 새로운 자리를 잡기 위해 기존의 것을 내팽개쳐버리는 과정을 포함한다적응은 예전의 가치와 방식을 버리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따라서 적응은 자신의 허물로부터 벗어나는 일종의 탈피 과정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변신은 결코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그렇기 때문에 계급횡단자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아가게 된다. 183

쁘띠 브르주아지와 최상층 부르주아지

상류층 사람들은 상당한 호감을 준다왜냐하면 무엇보다도 그들이 인간 조건의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불평과 불만의 토로를 아예 제거해 버리고 누구에게나 유익한 이타주의의 일환에 따라 실천하기 때문이다이러한 사회에 계급횡단자가 변신하게 에는 필연적으로 일정한 시간과 긴 숙성의 과정을 요구한다왜냐하면 일단 자신의 화법에서 사람들이 거슬려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변신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189

표범의 부유한 농부 돈 태로지: “너 귀가 먹은 거야 뭐햐?”라고 말하지 않고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1

 

수많은 유리잔들과 식사 용품들은 그 사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세련미와 화려함을 보여주는 증표라기보다는 오히려 식사 중 결례를 범할지도 모르는 횟수의 증가를 의미할 뿐이다그래서 계급횡단자들은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만이 아니라 물건들까지도 두려워하게 된다그는 언어의 법정 앞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사물들의 법정 앞에 서 있다. 193

 

계급횡단자에게 사건은 자신의 여유로움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라기보다 그의 불만족스러움을 이겨 내야 하는 시험이다스피노자적 용어를 빌려 온다면 자족감보다는 만족을 낳는다자족감이 자기 자신과 스스로의 행위 역량을 관조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기쁨이라면만족은 바랐던 것보다 상황이 더 낫게 이루어진 일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다그러므로 만족은 예상되었던 슬픔을 이겨 낸 기쁨의 형식이다계급횡단자의 기질은 무모함과 소심함 그리고 호전성과 유순함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195

복합물 혹은 화학적 합성물로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그의 기질의 형성은 화학적 분자 구조와 유사하다. 195

 

Ⅱ.틈새

 

거리의 에토스

 

계급횡단자는 언제나 경계 주변에서만 맴돌고 있다왜냐하면 사회적 코드에 알맞게 행동하고 상황에 어긋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그에게는 잠시 물러나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고다라서 그의 생각과 실천에는 항상 거리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209

부르디외 이중의 거리 마틴 에덴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하얀 가면,디디에 에리봉 낯도깨비같은 존재 그들의 기질 자체가 긴장 속에 있다. 221

 

마음의 동요긴장 속에 있는 기질.

부르디외 자기-분석을 위한 초고

카뮈 최초의 인간어머니-가사도우미 자크는 수치심과 수치심을 느꼈다는 수치심을 동시에 경험한다왜냐하면 카뮈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자크는 세상의 판단과 또 자신의 악한 마음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이렇게 해서 수치심은 자가 증식의 폐쇄 회로 속에서 계속 재생산된다. 234 일반적으로 수치심은 생각행동 또는 자신이 보여지는 방식이 나쁜 것으로 지적-그 지적이 옳건 틀렸건 간에-받는 데서 생겨나는 모욕감이다수치심이 원천은 다양할 수 있겠지만 이 감정은 언제나 평가하고 판단하는 자의 시선-이 시선이 외부의 것이든 혹은 내면화된 것이든-에 대한 표상을 함축하고 있다. 235 주체 자신이 판단하는 자와 판단되는 자로 분열되어 있어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법이다스피노자가 수치심을 우리에 대한 외부의 비난의 결과로 국한시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비난한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우리의 어떤 행동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으로 정의하는 까닭이다. 235

 

사실 그 누구도 사회적 수치심을 느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자신의 출신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누군가를 단지 부르주아지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혹은 프롤레타리아트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것은 키가 크거나 작다는 이유로 상대로 낙인찍는 것만큼이나 부조리한 일이다그러나 이러한 상식적인 주장이 자신이 수치스러운 존재라고 확신하고 있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 줄 힘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왜냐하면 사회적 수치심은 객관적인 멸시의 상황에 대한 반사적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이 감정은 치욕의 원인이 사라졌을 때조차 계속해서 실재적인 결과들을 생산하는 허구적 표상들을 먹고 자라난다사회적 수치심이 감정은 이 점에서 다른 형태의 수치심들과 동일한 규칙을 따르고 있다사회적 수치심의 발생론 239

 

수치심의 사상계는 삶의 방식과 사회적 실천들 사이의 격차를 존재에서 가치로 이행시키는 절차로부터 생겨난다다시 말해서 존재론적 판단의 가치론적 판단으로 전환이 수치심을 낳는다요컨대 사회적 자긍심이나 수치심은 특정한 환경의 삶의 조건에 관해 단지 어떤 삶은 이러저러하다고 사실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안혹 그것이 저속하다느니 고상하다느니 비난을 규정할 때 생겨난다. 240

 

결국 문제는 세상의 모든 차별을 만들어 내는 존재에서 가치로의 이 은밀한 미끄러짐이 어디에서 연원하는지 알아내는 것이다어떤 점에서 그러한 이행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존재에서 가치로 이행은 역관계들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이다따라서 이것은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지배의 결과이며 그러한 지배 관계를 피지배자들의 동의까지 이끌어 내는 기만적 의식과 결합되어 있는 영속적 지배에 대한 욕망의 결과이기도 하다.240

 

수치심의 상상계는 역사적 우연에 의한 결과인 지배 관계를 마치 실존에 앞서는 본질인 것처럼 둔갑시키고 누군가의 운명이 원래부터 천한 것처럼 만드는 형이상학적 바꿔치기 속임수에 의해 구축된다피지배자들은 지배 관계가 마치 자연적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또한 자신들의 열등성을 타고난 결함이자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치욕의 표식으로 여길 정도로 지배 관계를 내면화하게 된다수치심은 변하지 않는 본질이 된 모멸감의 체화에 기초한다. 242

 

신생전설스탕달 적과 흑쥘리앵 소렐 주워온 아이부유한 누군가의 사생아 250

 

타자를 통해 자기자신으로 존재하기

 

어떻게 하면 이행의 과정에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찢기고 파열된 기질의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모든 어려움은 소외되지 않으면서도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이 되는 것에 있다타자성이냐 소외냐이것이 계급의 변화를 거치면서 일어나는 자기-변형에 걸린 판돈이다. 256

 

강인한 영혼은 올라가는 일이든 내려가는 일이든 상관없이 수행할 수 있다. 260

 

민중 계층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연대와 상부상조는 그 밖의 다른 자원이 전혀 없는 결핍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전된 행동 양식이다그렇다면 과연 이것을 자연적 선함과 온정으로 해석할 수 있는가연대는 빈자의 유일한 자산이다따라서 연대가 알아서 잘 지내는 유복한 계급에는 널리 퍼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다지 놀라울 일도 아니다자기 자신으로 남는다는 것그것은 민중으로 남는 것을 말하는가그러나 우선 실체적 자아라는 것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 내용이 민중적인지 부르주아적인지 논하는 것은 무용하다그러므로 우리의 문제를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가장 어려운 것은 계급 사다리를 오르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는 것 혹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이는 우리가 엄격히 말해 민중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아비투스 도야를 통해 민중이 된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하다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민중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생겨나고 변천하는 여러 민중만이 있다. 265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과 화해는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에 대한 명예 회복을 함축하고 있다이것은 어빙 고프만이 낙인의 전도라고 부른 것다시 말해서 모욕의 기호를 도리어 당당히 드러내고 자신의 상징으로서 주장하는 것을 통해 일어난다. 268

 

미슐레가 보기에 개인적 수준의 계급의 변화는 집단적 진보의 운동과 연장선상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올라간 자들이 자신의 색을 잃고 싶지 않다면 그들은 야만인이 되어야 한다즉 계몽하는 자가 되어 되찾은 자긍심의 기호들을 널리 퍼뜨리는 기수가 되어야 한다이는 계급횡단자들이 단순히 사는 곳의 경계를 바꾼 이행자로 존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과 부정의한 속박의 굴레를 계급과 함께 파괴하고 승리의 역사를 향해 전진하는 개척자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274

어쩌면 이상화된 형태의 민중에 대한 지적 옹호야말로 배신이 극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러한 옹호는 후견주의 우민 정치 이상으로 일상적 현실에 대한 무지와 경멸을 드러내고 있다사실 민중은 자신의 해방보다는 억압 상태를 지속시키는 온갖 소외와 편견으로 가득한 일상 속에 살고 있다민중 계급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것이 민중 계급의 상당수가 여성동성애이민자의 권리와 그들의 사회적 자리를 인정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진보적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과 상충하지 않는다그러므로 수치심과 관련해서 구별한 것과 마찬가지로 건강한 자긍심과 해로운 자긍심을 구별하고 출발 계급와 도착 계급에 대한 이중의 이상화를 자제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277

 

계급 횡단자가 타자를 통해서 그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죄책감을 제어함으로써 이 감정을 동력원으로 바꾸어 자신을 짓누르는 것을 지렛대로 변형시키고 기장들을 오히려 발돋움판으로 사용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은 없다. - 이 죄책감이야말로 결정적인 것입니다이 감정이 제 글쓰기의 기저에 있다고 한다면 그와 동시에 글쓰기가 저를 그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281

 

나는 아버지의 말과 제스처취향아버지의 삶에 흔적을 남긴 사건들나 역시 공유하고 있는 한 존재의 객관적인 기호들을 모아보려 한다추억의 시도환희에 찬 조롱도 없을 것이다평평한 글이 자연스럽게 쓰여졌다내가 부모님께 중요한 소식을 말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식 그대로 쓰인 글이. 286

 

대립물들을 합치시킨다는 것은 그것들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는 일이라기보다 타자와 자기 자신 사이의 화해를 이루는 일이다이러한 화해는 타자를 그리고 계급 장벅 뒤편에서 부정하고 억압했던 자신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자신 안으로 재통합하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재회를 주선해 준 것은 지배자들의 세계 중심에서 획득한 민족지적 문화이다./<<슬픈 열대>>를 반대로 뒤집은 것이 부르디외의 민족지적 프로젝트다. 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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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첫손님이다. 전집 사장님은 월요일 손님과 통화중이다. 생굴을 먹은 것이 문제가 생긴 듯하다. 노로 바이러스. 음식으로 인한 문제가 생길 것을 대비해서 보험을 들어둔 것 같다. 아. 이런 굴전이나 생굴 생각이 나 왔건만 어쩐다. 요즈음 오후 날씨가 봄날 같더니 이런 사달이 났구나 싶다. 딸아이와 p협력사의 쉰이 되지 않은 아빠가 일손을 거들어주기도 하는데, 쉽지 않겠다 싶다. 책을 읽지 못할 정도로 전등이 흐리기도 하는데, 손님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걸 본 적이 없다. 알바도 구하기 쉽지 않아 절절 매던 일들도...그래서 혼자 오기는 쉬운 게지. 


전집을 온 이유는 계약 관련 긴 협의의 끝이 보이기도 해서이다.  과메기 안주도 되지 않고, 전은 그렇고  두루치기를 시켰다. 막걸리 한 병을 주전자를 가져와 따른다. 제법 요리시간도 많이 걸리는 것이 이 가게의 특징이다. 무와 콩나물 밑반찬에 막걸리 한 모금을 우물거리며 마신다. 계약 당사자인 l감사에게는 원가분석을 하시라고,그래야 거짓말하는지, 일들은 제대로 하고 있는 것 알 수 있지 않겠냐구 마음을 여러 번 보탠다.  거꾸로 오너의 지시가 역으로 떨어지고 나서도 진척이 보이질 않는다. 서로 바닥은 봐야지 협상 수준을 알 수 있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 분석을 기대하는데 더디다. 공장은 대보수공사로 북적이고 정신이 없는데, 회의록 작성하라는 오더에 문제해결보다 보고에 더 신경쓰는 모양새다. 


공문도 여러 번 보내면서 결재 수준, 전달 과정, 소통 방식을 확인하는 작업도 병행한다. 뭘 믿고 무얼 확인할 것인가.


아껴서 먹는 막걸리는 배추쌈을 주어서 그나마 더 맛있게 들 수 있다. 알바분이 오시고 말 소리들이 더해져서 전집은 온기가 돌기 시작한다. 감량 덕분에 위가 많이 줄어든 듯, 배부른데 탄수화물이 당긴다. 오뎅탕은 많고, 적당한 안주는 없는 걸까. 벽에 붙은 오뎅우동 광고가 있어 되느냐고 묻는다. 이 것 역시 혼자 먹을 수 있는 양을 넘어선다. 첫 개시인 듯싶다. 매콤한데 나쁘지 않다. 술은 한 병 더 가져오고 주전자에 담고 한 두잔 먹자 더 이상 들어가지 않는다. 


테스트를 여러 번 해보았다. 물량을 이월해서 정산을 하자고, 월급은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말로 되지 않을 것 같아, 공문으로 보냈고, 공문으로 되지 않아 구두로 확인해보아도 어처구니없는 대답만 한 가득이다. 그럴 줄 알고 보낸 카드가 있는지조차 모른다. 눈 앞에 있는 것만 관심이 있고 배경을 헤아리고자 하는 의도는 없다. 여러 번 교차해서 확인한 결과, 영혼이 없구나. 일만 있어 처리만 할 줄 안다. 


남은 막걸리를 병에 다시 따른다. 거의 목까지 올라왔다. 부자가 된 기분이다. 그렇게 술 한병을 들고 촐랑촐랑 사택으로 돌아간다.


볕뉘


야망계급론은 힙스터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신 구별짓기란 신흥부자들의 행태이기도 하다. 어떻게 살아지는가에 대한 관심의 끈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기본 소득은 분명 또 다른 출발점이기도 하다. 출발 선이 너무 다르다. 극우들아 제발 공부 좀 해라. 대체 아는 게 뭐냐. 모든 것 갖고 싶으냐. 모든 것을 누리고 싶으냐. 그럴러면 정신은 차려야 하는 것은 아니냐. 보수 한 점 없는 이 땅위에 화만 잔뜩 있으니 누가 너희를 좋아하겠는가. 떠벌이지만 말고 출발선상의 불평등같은 것이 왜 문제인지, 평생에 단 한 번이라고 고민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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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2-04 0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사이 들어 ‘살림’이라는 이름을 살려서 쓰는 이웃을 이따금 봅니다. 얼마 앞서 《살림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인 책이 나오기도 하더군요. ‘살림글’이라면, 한자말로는 이른바 ‘생활글·생활문학’일 텐데, 모든 살림이란 시골에서 논밭을 짓는 일부터 우리가 보금자리에서 맡는 모든 집안일부터 헤아립니다.

‘우리한테 있는 빛’이라면, 먼먼 옛날부터 물려주고 물려받으면서 저마다 가꾼 ‘살림’이 있다고 느낍니다. 오늘날에야 왼날개와 오른날개를 가르지만, 지난날에는 누구나 왼날개와 오른날개를 나란히 품고 헤아리면서 ‘온날개’로 하루를 그리고 짓는 온살림을 했다고 봅니다. 우리한테 왼손과 오른손이 있어서 살림을 빚거나 짓거나 가꿉니다. 우리한테 왼발과 오른발이 있어서 기쁘게 거닐면서 이웃한테 마실합니다.

어쩐지 요즈음 자꾸 번지는 ‘극우·극좌’ 같은 이름은 그만 서로서로 미워하는 마음에 싫어하는 등돌림과 따돌림과 손가락질을 부추기는 밉말(혐오표현) 같습니다. 다 다른 사람을 끌어안자는 마음이 아름답다고 여기지만, 정작 걷는 길이 조금이라도 다르면 “넌 틀렸어!” 하고 윽박지르면서 가르치려고 드는 물결이 대단히 드세면서, 날마다 싸움판 같습니다.

틀림없이 “넌 틀렸어!” 하고 말할 만한 자리까지도 ‘그들’이 하려는 말을 가만히 귀담아듣고서 이 말을 하나하나 짚으며 ‘함께 배울 살림’을 이야기로 들려줄 수 있다고 봅니다. 처음부터 “넌 틀렸어!” 하고 딱 끊을 적에는 아무 어깨동무(평등)를 못 이루면서, 아무 살림도 못 나누는 담벼락을 그들뿐 아니라 우리부터 높고 단단하게 세우는 굴레이지 싶습니다.

‘우리한테 있느 빛’은 모름지기 ‘살림’ 하나와 ‘사랑’ 둘에, 살림과 사랑을 심고 가꾸는 ‘두손’이요, 살림과 사랑을 나란히 바라보는 ‘두눈’이며, 살림과 사랑을 함께 그리고 펴는 ‘두다리’이지 싶습니다.
 

지불을 하지 않으면 폰으로 엑셀도 텍스트 작업도 할 수 없다. 취소하려면 찾아가기도 어렵다. 그렇게 돈이 슝슝 빠져나가도록 된 구조다. 합법적이다. 불편을 가장한 합법. 눈뜨고 코 베이는 세상이다. 


기침이 가라앉지 않아 바깥 바람을 쐬기조차 삼가고 있다. 어제 저녁은 그나마 약을 먹지 않고 버티었는데, 새벽 나은 기미가 보인다. 달리면서 몸부리는 재미에 빠졌는데, 부상이 오거나 이렇게 몸이 말을 듣지 않으면 더 간절해진다.


어제 저녁 손에 들린 책이다. 피터싱어와 영아살해에 대한 논쟁을 담은 첫 글을 읽는다. 무척 힘들다. 하지만 많이 좋아졌다.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가? 아픈 존재는 무엇인가? 불편한 존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불편하기 그지 없던 예전과 달리 시선에 맞춰 읽어나갈 수 있어 다행이다.


무수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나의 존재 기반을 무너뜨리는 발언을 어떻게 수긍하고 긍정할 수 있을까? 논리와 말 이전에 존재가 있다. 머무르지 않고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말을 찾아야 한다. 논리도 싸움도 찾아야 한다. 끊임없이 출발하는 것이 존재다. 


이유도 없이 굴복당한 무수한 존재들. 삶들. 말조차 없어 끙끙 앓던 이들. 무수한 편견과 시선의 겹겹으로 누르는 짐같은 하늘아래 사는 존재들. 삶들. 한줄기 빛과 같은 깨달음도 함께 하길. 우리는 서로 곡예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만들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다. 삶을 사랑하기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아끼고 마음에 담기에 말이다.


볕뉘


며칠동안의 침체를 딛고 오늘은 강변까지 달려가고 싶다. 싱싱한 바람과 솟아오르는 땀의 호흡을 느끼고 싶다. 조금씩 작업이 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갈증을 쌓아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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