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 관련 책을 읽다가 술술 읽혀 책 속에서 글쓰기 책 두권을 소개받았다. 그 책들을 읽다가 눈에 들어온 트레이닝 서적이다.


1.

작가가 되는 방법의 시작은 자신이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어떤 작가를 경멸할 수는 있어도 글을 경멸해서는 안 된다. 물론 자신이 작가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반드시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작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작가가 될 수 없고, 작가가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 중에서 작가가 나온다고 믿는다.

‘감히 내가 작가를?‘

작가를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어제 쓴 글을 오늘 고치고, 내일도 자판을 두드리는 사람이 작가라고 믿습니다. 글을 쓰기싫은 마음이 드는 순간에도 참고 쓴다면 작가가 될 수 있습니다. 쓰다 만 글을 끝내 완성하는 사람이 작가입니다. 글쓰기 PT를 시작한당신은 이미 작가입니다.

33

2.

조디는 카야의 부엌에 대롱대롱 매달린 외로운 삶을 보았다. 채소 바구니 속 소량의 양파들, 접시꽂이에서 마르고 있는 접시 하나, 늙은 미망인처럼 행주에 곱게 싸둔 콘 브레드에 고독이 걸려 있었다.

그동안 ‘외롭다‘는 표현을 할 때 쓸쓸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것 같았다‘ 라고 썼다면, 이처럼 사물을 통해 표현하는 방법을 새롭게 터득하는 거죠.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와 점점 닮아가듯,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닮고 싶은 작가의 글을 모방해서 자꾸 써보세요. 문장의 리듬을손끝을 통해 체화하세요. 필사 노트에 낯선 단어와 표현 방식을 채집하고 달아나지 않도록 꼭 붙잡아두세요. 종류별로 최신 장비를 보유한 수리공처럼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47

3.

노하우를 리스티클로 쓰면 글쓰기에 왜 도움이 될까?

- 정보를 선별하고 요약하는 훈련이 된다.

예를 들어 ‘시간 관리 잘하는 법’을 리스티클로 쓴다고 해보죠. 우선 내가 써본 방법이 떠오르겠죠? 시간대별로 해야 할 일을 엑셀에 정리해 기록해둔다든지, 중요도와 급한 일의 우선순위를 따져본다든지,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모두 쓸 수는 없으니 그중 ‘시간 관리 잘하는 다섯 가지 비법’으로 내용을 한정해보세요. 후보군 중 매력적인 다섯 가지를 취사선택합니다. 우선순위를 정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연습이 됩니다. 88

4.

기초 체력을 충분히 쌓았으니 오늘부터는 균형 잡힌 몸매를 만들어봅시다. 부위별로 골고루 글쓰기 근육을 단련하는 것이죠. 사물이나 사유를 세밀하게 표현하는 ‘묘사 근육‘, 상대방을 설득하는 ‘논리 근육‘, 없는데 있는 것처럼 창조하는 ‘상상 근육‘ 같은  것을 붙이면 어떨까요. 92


5.

그림을 썼으면 이제 자신이 리포터가 된 것처럼 상황을 중계하듯 ‘말 쓰기‘를 해봅니다.

그림 쓰기/말 쓰기

큰 초 두 개가 꽂힌 케이크 → 누군가 스무 살을 맞이했나 보네요.

고깔 모자를 쓴 친구들→ 친구들이 축하 파티를 준비한 모양입니다.
주변에 놓인 선물 상자→ 테이블 가득 쌓인 선물 상자를 보고

설레는주인공 표정→ 주인공 입이 귀에 걸렸네요. 114

볕뉘.

몇 가지 팁들을 남겨본다. 애써 시도해보지 않았던 방법들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싶은 내용들. 해보고 싶은 부분들에 대한 실전훈련 방법들이 재미있다 싶다. 자연스럽게 해보게 만드는 방법들이 배여 있다. 끝내주는 맞춤법 책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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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율이 아니라 백금율; 네가 대접받고 싶은대로 대접하지 마라, 남들은 취향이 다를 수 있다.


1.

이 시점에서 내가 자기 계발 장르의 팬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야 하겠다. 내 개인적인 생각에 따르면 우리는 너무 많은 내적 성찰과 너무 적은 외적 성찰의 시대에 살고 있다. 더 나은 세상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와 함께 시작된다. 우리의 주요 임무는 다른 기관을 만드는 것이다. 508



2.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황금률이 부족하다고 믿게 되었다. 10장에서 우리는 공감이 나쁜 길잡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단순한 사실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감지하는 데 우리가 항상 능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모든 관리자, CEO, 언론인 및 정책 입안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사실상 강탈하고 있다. 이것이 텔레비전에서 난민 인터뷰를 거의 보지 못하는 이유이다. 이것이 우리의 민주주의와 저널리즘이 대부분 일방통행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유이다. 이것이 우리 복지국가가 가부장주의에 젖어 있는 이유이다. 513

3.

공감과는 달리 연민은 우리의 에너지를 약화시키지 않는다. 사실 그 후 리카르는 훨씬 기분이 나아졌다. 연민이 동시에 더 통제되고, 더 거리를 두고 있으며, 더 건설적이기 때문이다. 연민은 타인의 고통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데 도움이 된다. 뿐만 아니라 연민은 우리에게 에너지를 주입하는데, 이는 남을 돕는 데 정확히 필요한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아이가 있다고 가정ㅇ해보자. 부모로서 당신은 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어둠을 두려워한다고 아들이나 딸과 함께 훌쩍거리지 않을 것이다(공감) 오히려 당신은 그들을 진정시키고 위로하려고 노력할 것이다.(연민) 515-516

볕뉘.

1. 4월초 지인이 머무르다 이 책 얘기가 나와서, 그건 아닌데 싶었다. 성선설, 성악설 그렇게 흑백으로 나눈 것이 문제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추천해준 책이 앨버트 허시먼 전기였다. 그는 인간을 시계추(이 역시 고루한 표현이지만)처럼 왕복운동하는 진자라는 개념을 써서 나아간다. 그랬을때만 사람을 좀더 폭 넓고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다고 말이다. 외연의 확장에도 염두에 두면서 이끌어가는 모습이 끌렸다. 또 다른 지인의 글에서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렇게 읽게 된다 싶다.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궁금해 결론부터 손이 간다.

2. vflat을 써보고 있다. 줄간이 이어지지 않아 어색하지만 정확도가 높아 더 사용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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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책들이 손에 다시 잡혔고 다시 읽고 있다. 다시 읽다나니 지난 번 독서는 모호한 끈이론과 다차원, 다중우주에 대한 관심으로 정작 중요한 것들을 지나쳤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읽는 사이로 플랑크 길이로 이루어지는 양자공간, 양자중력으로 양자역학을 통합하는 루프양자중력이론을 다루는 책들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싶다. 


빅뱅이 아니라 빅바운스. 블랙홀에 대한 이론이 다르게 접목되고 있음을 알게된다. 하지만 파인만이 그러한 것처럼 안다고 하는 사람은 많아도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에 한표다. 그나마 로벨리, 곽영직의 글들이 역사 속에 실패사례 위주로 하나하나 지워나가는 방식에 오히려 눈에 잘 들어 온다 싶다. 


지난 번 읽기는 책들 사이 날개귀만 접어놓고 기록해두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짬이 되면 밑줄긋기라고 해두어야겠다 싶다. 그래야 다음에 읽기가 조금은 더 수월해질 듯싶다. 아마 또 다시 읽게 된다면 몇 권의 텍스트와 집중해서 보게 될 듯하다. 주말 몇 권이 흥미롭게 대기중이다.
















볕뉘. 


1. 한 세기 양자역학의 탄생과 실험과학의 발전이 있었지만, 환상과 유행이 휩쓸고 지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과학이 점점 소설화해가는 아이러니 말이다. 중력파와 힉스입자 역시 예견된 파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한다. 과학 본연의 임무같은 것은 없겠지만,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검증의 검증, 엄밀화와 더불어 다방면의 앎을 넓혀가는 것도 그 근력을 키우는 방편이겠다 싶다. 역사 속에서도 그런 인물들이 발군의 집중력과 깊이를 보여준다 싶다. 좋은 스승 밑에 훌륭한 제자가 나온다는 사실을 볼 때 지금 여기의 물리학계 현실은 어떤가 되묻고 싶다. 기초체력은 더구나 더...


2. 어쩌다보니 100년이라는 굴레로 우리나가 근대사, 세계경제사, 제3세계, 과학사를 겸해서 보고 있는 셈이다. 미얀마도 그렇지만 지금여기라는 순간이 이처럼 반복될 수밖에 없는지, 시야를 넓히고 확장될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한 안타까움들이 스며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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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덜먼의 책을 덮고, 잠이 제대로 오지 않는다. 늦게 든 잠, 새벽녘에 꿈에 또 다시 시달린다. 한 장만 쓴 페이퍼가 더 홀쭉해보였다. 빈약함이 어울리는 그 페이지는 공중에 찢긴 종이가 날리듯 퍼덕거린다. 날렵함이나 날씬함이 아니라 몰골이 쑥 들어간 빈틈투성이라니 말이다. 부끄럽고 창피하다. 며칠 전에 있던 자만감 같은 것들은 대체 어디로 피신중이란 말인가. 가느다란 작대기. 그것도 이어진 막대기가 아니라 간신히 얼기설기 매어진 잣대. 누군가 훅 불면 후두둑 따로따로 땅바닥에 투두둑 떨어질 것 같다.

그들은 덧붙인다. 아니 어쩌면 심하다 싶을 정도로 냉정하기도 하다. ~으로 환원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행위자를 그대로 보려하지 않고 놓아두려하지 않는다. 그저 종속적인 위치로 놓는다. 가령 a라는 사물. 쓰레기나 폐기물이라고 하자. 흔히들 이것은 인간들이 부수적으로 만든 것이기에 그냥 처분하거나 과학기술의 발달로 처리하면 될 것이다라고 한다. 즉 인간위주의 판단에 종속변수로 놓는다. 이런 사유방식이 정작 문제가 생기면 대처를 하지 못하고 답을 찾을 길이 없다. 찾는다고 하더라도 사후에 생기는 일이다. 그러니 쓰레기. 핵똥(폐기물). 공정에서 나오는 신규화합물 등등 사물 그대로 행위하는 행위자인 것이다. 매체인 것이다. 서사뿐만이 아니라 그 똥은 끊임없이 악취나 문제를 일으키는 방식으로 말을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으로 된다거나 해석할 수 있다거나 하는 파악방식은 편의적인 발상이자 다른 것들을 볼 수 없게 만드는 사유방식이다. 이것은 자신의 분과학문이나 흔히 전문분야라고 그 시선과 잣대로 바라보는 방식과 유사하다. 그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행위자가 행위하는 것은 평범한 인간의 시선을 너머 선다.


레비나스는 인간적인 공정을 앞에 둘 수밖에 없다고 한다. 철학적인 사유에 보태서 윤리적인 존재임을 드러낸다. 칼 폴라니가 토지, 노동, 사람 등 실재로 분리가 불가능한 것들을 발라내고 분리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문제제기를 했다. 그 반면에 허시먼의 저작을 따라가다보면 경제에 정치, 사회뿐만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 심리까지 덧붙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생생하게 마주하는 실체로서 학문을 뜨겁게 달구어 놓는다 싶다.

포스트 휴먼 이론들은 보지 않으려는 곳들을 보게하는 확장성에도 불구하고 차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훅 불면 날라갈 듯 끈기도 풀기도 없는 듯싶다. 그렇게 이 틀들 사이 어디쯤 갈피를 잡지 못하며 서성거리겠지만, 새롭게 버무려지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올 봄에는 아마 이들 사이 여러 갈래길을 거닐고 있을 듯싶다. 설레이기도 기대되기도 한다 싶다.

볕뉘. 허시먼 책에 하이픈이라는 구절이 나와 생각을 이어 보았다. 브라이언트책도 책속의 책이 참 많다. 봄비가 제법 많이 내린다.

하이픈(콕!)

손 내미니 


꽃도

벌도
나비도 한몸.
나-꽃.
너-벌.
우리-나비.

손 잡으니
너-달.
나-별.
우리-하늘.

손 펼치니
나-봄-여름-가을ㅡ겨울-눈
너-겨울-가을-여름-봄-꽃
과학-철학-문학-정치-벌-삶
농도-나비-밀도-글-밥-구름
비-바람-시-가난-풀
이리 한 켜 한켜 쌓다보니
배도 부르고 얼굴도 화끈하고
갈 수 없는 곳도 없다싶어
만나지 못할 사람도 없다싶어
가보지 않은 곳도 가볼 수 있다싶어
어설퍼도 아파도 누추해도 든든해.

마음 모아 ' - 하이픈 '
마음 가득 '하고픈'.
하여튼 하이픈.

하이파이브 닮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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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인간의 비참함을 만드는 것은 인간시민사이의 충돌이다. 이 둘을 하나가 되게 만들면 그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 그를 국가에 전적으로 내여주거나 완전히 그 자신으로 내버려두어라. 그렇게 하지 않고 그의 심장을 둘로 나누려고 하면 그의 심장은 갈갈이 찢어지게 될 것이다. 947 허시먼은 다성적인 즉 독자적인 여러 음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어울리는 방식의 해결책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사람들과 정책 결정자들이 그것의 복잡성을 인식하고 인정하면서 복잡한 제도들을 만들어낼 수 있게 할 문제해결적 정신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948 허시먼은 파스칼이 먹을 거리, 놀이, 기도, 정치에 대해 언급했던 바를 떠올렸다. 그런 영역에까지 비용-편익 계산은 불가능했다. 946


<사회과학에 대한 우리의 견해> 우리의 초점은 더 해석적인 것입니다.954

 

<<금지된 경계를 넘어서: 경제학에서 정치학으로,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서구에서 좌우파 모두가 전후 서구의 정치경제가 복지국가의 위기라는 구조적 위기에 처했다고 보고 있었다...‘성장과정에서 오는 고통시스템적 위기와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현재의 문제는 자본주의가 가진 근본적인 불합치성이나 근본 모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역사상의 전환에서 발행하는 복잡하고 알기 어려운 특성들이 드러나는 것이었다....실제세계의 복잡성과 모호성을 생각할 때 정말로 유용한 기능은 이런 식의 반대되는 반응을 하는 와중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좌파의 사고가 자기파괴적이라고 보았다. 숙명주의는, 종국에는 반대쪽을 유리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인 덫이었다. 966 시장이 협동과 갈등 둘 다에 대해 흔히 생각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도덕적인 제약들을 만들어내고 무임승차개념에 도전할 은유를 생각해낼 수 있었다. 바로 노젓기였다. 함께 노를 저으면 개인들은 노력을 덜 들이면서도 빠르게 나아갈 수 있을 터였다. 967


허시먼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배타적이지 않다고 보았다. 기분에 의해서든 취향에 의해서든 사람들은 언제나 선택을 내린다는 것이 허시먼이 주장하려는 바의 핵심이었다. 그가 주목하고자 한 것은 선택이라는 활동이었다. <<이탈, 발언, 충성심>>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다양한 선택을 내리면서 제도를 바꾸는지 설명했다면, 이제는 그들이 왜 선택을 내리는지 설명해야 했다. 93 마음속에서 올슨과, 그리고 더 넓게는 개인주의와 벌였던 내적 투쟁은 사회변화를 추동하는 인간 행동에 대한 내생적 모델을 만들고자 했던 오랜 목표로 이어졌다. 973 섭리적 설명. 기술 변화든, 전쟁이든, 수입된 거대 계획이든, 외부 자본의 주입이든, ‘해외로부터의 원조이든, 재앙이든, 발견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외부 요인이 사회의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역사의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번쩍 들어 옮겨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아야 했다. 974 


집합행동의 시계추 운동’. 만족과 실망, 공적 행동과 사적 행동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는 역학을 설명하려고 했다. ‘인간의 경험이라는 영역에서 감정의 반응이라는 영역으로 이동했다. BMW는 흥분을 약속하면서 불만족과 청구서도 배달했다. 모든 곳에 행복이 뿌려지고 있었지만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 뒤에는 실망의 긴 흔적이 남았다. 실망은 희망의 짝궁이었고 희망의 필수불가결한 쌍둥이였다. 후회와 실망.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는 높은 기대를 가지고 수행된 활동의 결과였다. 실망으로 가득한 삶은 슬픈 삶이지만 실망이 없는 삶은 아예 견딜 수가 없는 것이 삶이다. 실망을 장엄한 전망과 야망을 누리고자 하는 성향의 자연스런 짝궁이기 때문이다. 돈키호테가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을 세르반테스가 한탄한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의 어리석음에서 얻을 수 있는 쾌락이 사라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975 


이러한 노력은 사적인 추구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고 공적인 참여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사적 추구와 공적 참여가 비슷한 동기들에 의해 추동된다는 점이다. 허시먼은 여러 충동들의 복잡한 혼합물인 자아를 무대로 펼쳐지는 변증법을 제시했다. 근대적 인간을 영구적으로 분열된 심장을 가진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이분법적 범주들을 사용하지 않는 정치경제학을 만들어냄으로써, ‘사랑스럽고’ ‘비극적이며복잡한인간 주체를 되살리고자 했다.. 976



실망을 일으키기 쉬운 것들을 구매할 때 수확체감이 발생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면 실망은 공적인 행동을 촉발할 수 있게 된다. 실망이 사다리를 놓아서 소비자-시민이 사적인 삶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점차적으로 올라갈 수 있게해 줄 수도 있고 이데올리기 자체를 잠식할 수도 있다...공적인 행동도 시계추가 오락가락하는 스펙트럼의 범위에 속해 있는 한 지점이었다...공적인 행동은 과도한 헌신을 기대한다는 점에서 실망을 일으킬 수 있다. 사회주의가 저녁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기 때문에자기파괴적이라고 한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즐겨 인용했다...선거 역시 비용-편익으로 분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중적인 특성을 갖게 된다. ‘과도하게 억압적인 국가에 맞서서 방어하는 기능과 과도하게 표현적인 시민으로부터 방어하는 기능을 둘 다 갖는 것이다...“중요한 것은 열정적인 사적 시민이 이제 다양한 실망에 맞닥뜨렸다는 점이다. 행복을 추구하며 오만가지 물건을 구입해 집에 채워 넣었지만 그것들이 다양한 실망을 안겨 주고 있었고, 따라서 이제 중력이 시계추를 반대편으로 움직이게 하리라는 기대였다. 978-980


찰스 테일러. 크리스토퍼 래시<<나르시시즘의 문화>> . 이런 종류의 비관주의가 그 자체로 빈약할 뿐만 아니라공적 행위를 건설적이지 못한 공적 특성이 주기적으로 분출하는 것정도로 폄훼하는 경향을 낳는다고 본다. 허시먼이 말하고자 한 것은 불안정한 균형이었다. 그는 공적인 것이 일상의 노동과 소비에 더 많이 스며들어서 공적 행동의 특성인 분투하는 것획득하는 것의 혼합이 사적 영역에서 육성될 수 있게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합리적 행위자보다 행복의 다양한 상태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기에 더 우월했다. 982


<<참여의 시계추 운동: 사적 이해관계와 공적 행동>> 내가 하려는 일은 삶의 양식을 변화시키는 동기들에 대한 이론을 만드는 것입니다. 나의 설명은 이후 경제학자나 정치학자들의 손에서 가설로 발전할 것입니다. 990 허시먼이 인간을 실수하는 이상주의자, 이해관계와 정념 둘 다를 가진 자로 묘사하자 이것을 도덕적인 주장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가 원한 것은 인간 행위자를 더 사랑스러운 인물로, 어느 정도 안쓰러운 인물로, 그러면서도 약간 무서운 인물로, 따라서 비극적인 인물로그리는 것이었다. 탈미혹된 소비자에게 공적인 삶이 은신처가 될 수 있으려면 발언의 기술이 더 정교하게 다듬어져야 했다. ‘공적인 인간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소비자 안에도 시민의 맥동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희망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허시먼은 이것이 자기파괴적이라고 생각했다.희망을 포기하는 발언은 자기실현적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식인을 향한 윤리적 메시지가 있었다. 994-995

 

14.

<<손주들을 위한 사회과학>>. 허시먼은 윤리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사회과학을 만들고 싶었다. ;윤리에 대한사회과학이 아니라 사회과학의 윤리를 다루는 사회과학 말이다. 999 합리적 행위자공동체적 정신이냐 사이에서 선택을 요구받던 시대에 결합되었으되 불안정한 주체야말로 통합된 사회과학의 초석이었다. 1000

 

마키아벨리는 인간이 어떠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실제로 어떠한지에 기반해 정치학을 구성하려고 했고, 몽테스키외는 정치적 실천이 도덕이나 정의와 얼마나 많이 충돌하는지를 논하는 것이 무용하다고 경고했으며, 애덤 스미스는 이기심을 추구하는 머리를 감정을 느끼는 심장에서 효과적으로 분리시켰다. 마르크스조차 자본주의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 냉정한 과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002 마르크스주의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법칙을 추구했지만 그만큼이나 강렬하게 도덕적 분노에도 쏠려 있었다. 허시먼은 이 희한한 혼합, 풀리지 않는 이 모든 내부적 긴장이야말로, 과학에 중독되고 도덕적 가치는 거의 상실된 시대에 마르크스주의가 가질 수 있었던 그리고 지금도 가지고 있는 막대한 호소력의 원천이었을 것일고 언급했다.1003 허시먼은 도덕적 이해와 비도덕적 분석 사이의 풀리지 않는 마찰에 대한 주장을 정교화해 나갔다. 이 둘을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고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누르고 승리하는 것도 아닌, ”영구적인 긴장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제시하고자 했다. 1004 도덕적 사회적 규범은 시장과 별개가 아니라 시장이 기능하는 방식의 일부라고 볼 수 있었다. 1005 그에게 사회과학의 도덕성은 연구의 중심에 속하는 것이어야 했으며, 이는 사회과학자들이 도덕적으로 살아 있고 스스로를 도덕적 우려에 깊이 영향받도록만들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사회과학자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도덕적으로 유의미한 연구를 생산해낼 수 있게 될것이었다. 1009

 

내부가 아니라 외부를 바라보는 것이 주는 즐거움과 자극을 재발견함으로써 객관적인 접근과 규범적인 접근 사이의 긴장을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1015

 

<<집단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기: 남미의 풀뿌리 경험>>1984 개발 업무를 진행하는 사람들이 좌절하는 흔한 원인 중 하나는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를 수량화가 가능한 것 위주로 측정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러느라 다른 점들, 예를 들면 사랑이라든가 시민적 추구 같은 것들이 간과되어 버린다.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자기육성과 향상, 머리와 심장을 조화시키고 자아와 사회를 조화시키기 위한 개선 등이 평가에서 누락되는 것이다. 프로젝트의 평가는 정해진 비용-편익 모델에 꼭 맞아떨어지지 않는 활동과 동기들에 열려 있어야 한다. 1025-1026 애초에 너무 거대한 비전을 가졌던 탓에, 계속 타협과 양보를 해 가며, 또 반대편의 힘에 의해 변형되어 가며 이루어지는 매우 제한적인 진보는 진보로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핵심은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느냐가 아니라 더 낫게 만들 수 있느냐이어야 했다. 1027

 

허시먼은 이 책의 독자와 이 책의 연구대상자가 분리되지 않길 원했다. 그래서 이 책을 개발이 실제 진행되는 과정을 기록한 여행기의 형태가 되게 하고 싶었다. (문어와 구어를 연결하고) 1037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혼합”.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선진국에 비해 이 두 영역 간의 혼합이 도미니카 학교에서 더 많이 존재한다. 상층에서는 많은 기업인이 실제로 공적인 활동을 한다. 공적인 사안과 관련해 실제로 공식적인 지위를 갖고 있으며 공적인 대의와 단체에 시간을 많이 쓴다...우리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섞인다고 하면 추한 면을 떠올리는 데 익숙하다. 그러느라 이러한 결합이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어떤 종류든 진보에는 이런 결합이 필요하다는 것도 보지 못한다.” 1043

 

15.

<<반동의 화법:역효과론, 무용론, 위험론>>1991. 시민집단들 사이(진보진영과 보수 진영 사이, 급진 진영과 반동 진영 사이 등)에서 소통이 체계적으로 제거되는 현상에 대한 우려가 대중사회에서 원자화된 개인들의 고립이라는 문제보다 더 위험해 보인다. 1108 개혁이 왜 그렇게 망가지는지를 파악하려면 개혁을 향한 운동이 왜 그에 대한 거부감과 강렬한 적대감을 이끌어낸느지 파악해야했다. 1103 ‘위험 명제보수주의자들이 정치를 말할 때믄 좋은 의도에서 나쁜 결과가 나온다고 주장하면서 경제를 말할 때는 나쁜 의도에서 좋은 결과 가농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의도와 결과의 불일치를 찬양함과 동시에 비난한다. 1105 자신에게도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집단들이 열린 대화를 유지할 수 있는 역량이야말로 한 사회의 민주적 수준을 나타내는 척도이자 그 사회가 시민을 위한 미래를 일뤄 나갈 수 있는 역량을 얼마나 갖추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였다. 1109 1. 위험명제는 개혁이 과도한 비용을 유발하고 이전에 있었던 모든 혁신을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는 주방. 2. 무용명제는 변화를 위한 모든 노력은 무용하며 아무리 바꿔도 결국 제자리라고 말하는 주장. 1111 전통적인 적대와 비타협 담론으로부터 민주주의에 더 친화적인종류의 소통으로 가는 길은 길고 힘든 길일 것이다. 1117

 

16.

<<자기 전복의 경향>>1995 ‘정치 이전의 공동체적 감수성은 핵심을 놓치고 있는 개념이라고 경고했다. 충성심이란 정치로부터, 그것의 혼란과 가능성들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이전의 주장들을 전복하는 데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과거의 개념들을 되짚어보려는 경향이 그 개념들을 확장할 수 잇는 방법을 찾기 위한 것이기에 그의 작업이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1133 <<경계를 넘다>>crossin boundaries




볕뉘. 지인의 모친상으로 부여를 다녀오다. 전날 소식에 몸과 마음이 흔들렸는지 하루 종일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따스한 봄볕. 따뜻한 마음들이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된 것 같다. 당사자는 오직할까 싶다.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려 하지만 몸짓에서 벌써 마음이 읽힌다 싶다. 대보수 마지막 날이라 일터에서 이렇게 매듭을 짓는다. 시계추처럼 끊임없이 반복하는 모습들이 읽혀 아쉽고 안타깝다. 한 번이라도 멈추면 한번이라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진보는 계속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지와 몽매에 가까운 것은 아닐까. 멈추시길, 그리고 둘러보시길...스스로 안까지. 마음 속까지. 자기전복의 경향조차 없는 무리들이 아니길. 스스로 증명하는 방법은 늘 열려있다는 사실까지 망각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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