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덧, 이 공간이 생각을 자르지 않고, 보던 보지 않든 편하게 담는다고 여겼는데.

  자체 검열이 심해지는 듯 싶다.

  본다-볼 수 있다는 시선..

  왜 이렇게 무르춤해졌을까?  변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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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 060905 어제 **장과 자원활동 진행관련하여 방식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진행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공개적인 지적과 방향을 했는데, 아무래도 한 결과에 대해 자신을 잘못한 것이 없고,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사람과 친해지는 스타일이야 상관없겠지만, 독선과 숨막힐 듯한 합리화 과정이 지나친 듯하다.

사적관계-공적관계, 주변과 관계... 뭐를 하자는 것인지 의구심마저 든다. 머리와 실무만 박혀있는 것은 아닌가?  여유라곤 눈꼽만큼도 없고, 그 관계가 참* 공간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데에 대한 배려가 없다. 다 무용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지적하고 달라고 하는 사적관계만이 남아, 그것이 합리화의 근거로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상황을 연계하고, 활동 반경을 지나치게 합리화하는 측면이 강한 것 같다.  그 짜증으로 내내 시달린다. 일*일만으로도 벅찬데, 잔인한 것인지? 잘못한 점이 있음에도 강변하는 모습들에 숨이 막힌다. 사람관계를 일로 질식시킬 듯한 태도. 그래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얻어서 뭘 하겠다는 것일까? 강변과 합리화-나름의 처방으로 순환되는 **장의 일상틀이 무척이나 부담된다.

아*** - 060904 세미나, 뒤풀이에*신대표가 사무국장께 운영에 관한 문제, 실무 등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지적, 설득하였다고 한다.

일들이 매끄러운 맛보다 부담. 어기적거리는 느낌이다. 활동들이 이러해서 무슨 맛으로 지탱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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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0910 <잉여쾌락의 시대>. 오독-개념이 흔들렸다면 자의적인 해석...읽었는데, 읽지 않은 것. 쯧~.   어찌해야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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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 라깡학파에 관한 진부한 말 중의 하나는 그들이 임상에서 정신분석학을 실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젝은 세계를 텍스트적인 임상으로 다루며, 그의 임무는 그 속에서 사회병리를 대변해서 그리고 사회 병리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그의 독자로서의 우리는 그 세계이며, 지젝은 우리에게 혼자 힘으로 그의 저술을 이해하도록  요구하면서, 우리에게 '환상을 가로지르고' 실재계에 대한 우리의 종속을 이해해야 하는 어려움을 강요한다. 이런 방식으로 그의 저술은 "행위'의 개념에 상당하는 지성을 수행하며 독자-행위자로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에게서 상징질서를 향한 자기만족을 제거하도록 자극한다. 도전적인 만큼 그 자극은 불쾌한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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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그의 진단은 부분적으로는 분석적이고 만일 치료법이 있다면 그것은 '환상가로지르기', '주체의 결핍', 그리고 '행위'와 같은 치료상의 개념에 의존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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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 비판

냉소주의

지젝은 냉소주의는 현대의 전체주의 상태와는 불가분의 요소라고 거듭 주장한다....오늘날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방식은 우리가 "탈-이데올로기"세계에 살고 있다는 착각을 조장함으로써 작용한다. 그러나 지젝은 그 어떤 것도 자신이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이데올로기 바깥의 어떤 자리를 확인할 수 있다는 믿음보다 더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우리가 이데올로기 방향으로간다고 생각하는 냉소적 거리감은 정확하게 이데올로기의 공간을 구성한다...'냉소주의적 거리는 단지...이데올로기적 환상의 권력을 구조화하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핟록 만드는 방법이다. 비록 우리가 심각하게 여기지 않을지라도 심지어 우리가 아이러니칼한 거리를 유지할 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하고 있다. 환상적인 내용을 제공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우리에게 환상을 가져다준다.

환상과 환영

환상은 이데올로기라는 영화가 상연되는 화면을 제공한다. 지젝은 테라사수녀의 '성자와 같은'행위를 예로 인용한다. 우리는 그녀를 희망이 없는 제3세계에 희망을 가져다주는 인물로 묘사하며 이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고통을 정치적인 맥락이 아닌 도덕적, 사회적 맥락에서 나타내도록 한다. 서구인들은 우리가 속죄와 도덕적 향상을 발견한 것처럼 또한 이것이 인도의 곤경에 대한 정치적 책임가을 우리에게서 덜어주는 것처럼 테레사 수녀에게 돈을 기부할 수 있었다. 대신에 이것은 인도를 '어떤 정치적 행위도 불가능하고 단지 자선과 동정만이 이 고통을 격감시킬수 있는 극도로 황폐한 장소'로 보도록 허가를 준 것이다.

환상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극복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은 실제로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환상 기제를 역으로 형험하게 됨으로써 환상이 설치된 기제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법에 대한 복종에서 지나친 직역은 일단 그것이 더 이상 환상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되는가를 보여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규칙에 맞추어서 일하는 문제이다. 만일 어떤 종업원이 정확하게 규칙을 따른다면 그 기관은 활동이 정지된다. ...규칙에 맞추어서 일한다는 것은 그 '규칙'이 의존하고 있는 '충성심','헌신' 등등의 환상구조를 드러낸다....환상은 감추어진 억압된 사물의 외상으로 가득차있다.

향락의 절도

환상은 상징계의 욕동으로부터 실재계의 욕망을 분리시키고, 강요된 선택으로 인해 상실된 쥬이상스를 어떻게 타자들이 우리에게서 '훔쳐갔는가'하는 네러티브를 상징계에 제공한다. 즉 '우리가 향락의 절도를 타자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숨길 수 있는 것은, 우리는 결코 우리가 이릅바 빼앗긴 것을 소유한 적이 없다는 외상적 사실이다. 그러므로 결핍은 원초적이고 향락은 "빼앗긴"것으로 스스로 자처한다.-주제는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개정한 젓으로 동시대의 정치상황, 특히 인종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한 함의를 탐색한다.

 

반자본주의

후기자본주의의 문제는 쇠퇴하고 있는 것이 단순히 현대 이전 시기의 정당한 질서였던 상징적 오이디푸스 아버지뿐이 아니라는데 있다고 주장한다. 현대의 이 외상적인 '실재 아버지'는 또한 내쫓기고 말았다. '오늘날 아버지 권위의 호퇴를 이야기할 때 가리키는 것은 바로 이 아버지, 비타협적으로 "안 돼"라고 말하는 아버지로서 그는 사실상 퇴각하고 있다. 이 퇴각의 결과가 바로 더 이상 획득될 수 없는 '상징적 효과'라고 지젝이 부르는 것이다. 금지를 떠받치던 힘이 물러난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합의된 규칙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자기애적 퇴행의 기호들만 양산되고 있다.

자발적 노예화는 피학적 성욕이라는 근본 환상의 현대적 형태에 해당한다. 이것은 무의식이 법에 저항하기보다는 그것에 순응하는 특권적인 위치하는 정신분석학적 통찰을 반영한다. 이것은 향락을 향한 초자아의 강박충동의 결과인 것이다. 기든스오 모르게 위험사회의 반영성이 우리의 성적 충동의 구성에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주체가 선택의 무한한 자유를 누린다는 피상적인 주장은 주체가 제약에 공범적으로 추종하는 것으로서 반영되어 나타난다. 외적 권위 대신에 자발적으로 자기를 규율하는 자기애가 등장하였다. 오이디푸스의 지배 대신에 나르시스의 지배가 등장하였다.

이런 과정을 가리키는 증상들 가운데 지젝은 '불평의 문화'가 등장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것은 주체가 '큰 타자의 부재를 기쁘게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큰 타자의 실패 내지 무능력을 탓하는 것이다.' 큰 타자가 제 노릇을 못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그것을 다시 불러들이려는 시도다. '보상'을 얻어내려는 시도다.

지젝은 상징계가 '다문화주의'로 인해 파편화된 것을 겉으로는 정치적 자유의 표현처럼 보이는 것이 도착된 복종의 형태로 되는 또 다른 사례로 이해한다. 이것은 '생활양식'과 역할놀이에 복종하는 것을 촉진한다....나 자신을 온갖 하위문화들과 동일화하게 되고 이런 하위문화들이 세분화될수록 나도 그것들로부터 비동일화하게 되고 내적 차이의 신성한 본질, 나의 '복잡하고도 독특한 개성'에 집착하게 된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자면 이데올로기 바깥에 개인의 진정한 존재가 있다는 신념은 후기자본주의자의 다문화주의 이데올로기의 한 속성일 뿐이다.-"과도한" 동일화의 공포"

지젝은 후기 자본주의 주체들 가운데 히스테리 증상과 도착증상을 가진자들을 구분한다. 그가 진단하는 세번째 요소는 정신병이다. 이것의 한 공통표현은 음모이론의 확산이다. 지젝은 이것을 편집증 환자에게서 확인하는데, 편집증을 가장 간단히 정의하자면 타자의 타자가 있다는 믿음이다. 다시 말해 상징적 질서의 외관상의 빈틈과 결함이 저편에 숨어있는 어떤 실재 타자에 의해 보충된다는 믿음이다. 유에프오, 외계인의 침입,대량파괴용무기, 테러리스트 같이 무시무시하고 실재적인 사물의 규칙으로 , 상징계에서 법으 실패는 후기자본주의 편집증 환자의 환상속에서 되돌아온다. 음모이론의 가치는 그것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을 조종하고 그것에 책임이 있는 '어떤 것이 저기 바깥에'있다는 망상을 조장함으로써 불안을 설명한다는데 있다. 이런 공포의 힘에 대처하려면 지젝이 혼란스럽게도 '좋은 테러'라고 부르는 것을 이용하여 우리 자신에 대한 책음을 스스로 질 줄 알아야 한다.

후기자본주의가 낳은 정신적 변화를 '주인의 담화'로부터 잉여비참/대상 중심의 담론으로의 변화로 요약한다.

자본주의 기계는 본질적으로 만족될 수 없는 욕망을 자극하도록 마련된 상품의 증식에 의해 돌아간다. 잉여가치로서의 대상a는 경제가 자본주의 활동의 계속된 성장 속에서 점점 더 커지는 지출과 점점 더 커지는 부채를 떠맡게 만든다. '잉여가치'를 '잉여향락'으로 변형시킨 관점에서 생산성은 자본주의에 고유한 결핍과 과잉 사이의 불균형과 교차주위를 도는 것처럼 정신이 그 핵심에서 결핍/잉여 주위를 돈다. 정신적 대상a는 원래부터 상실된 객체의 위치이자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이러저런 객체를 욕망의 대상으로 만든다. 주체가 충동의 자리에 있는 대상 a를 에워싸고 있다는 사실때문에 이것은 '실제계의 대답'이 된다.

반자유주의


낙엽 1.  세계자본주의를 한덩어리로 간주하고, 그 덩어리의 본질을 정신분석학의 기재를 우선에 두고 짚어나가는 모습이 신선하다. 표현은 다르겠지만, 허구를 만들어내고 지탱하는 세계에 대한 그의 칼날은 학문적 고찰의 찬반을 떠나 새로운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주기에 야릇하다. 그의 관점을 따라갈만큼 지적성숙도도 미천하기 짝이 없다. 그렇기에 논리의 엄밀성을 따질 수준도 아니고 따지고 싶지도 않다. 그럴 능력이 없기에, 그의 관점이 세계을 어떻게 볼 수 있게 하느냐? 그 관점에서 새로운 것들이 이것이구나 느끼는 것만도 과분하다. 비판에 필요한 것은 몇 시간 책을 읽으면서 되돌려보거나, 감각적 동질감들이 느껴진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낙엽 2. 책읽기의 효용성, 무용성-무용함의 쓸모있음. 세상을 살아가며 뭔가 복제품, 허상에서 만들어지는 것. 알 수 없지만 자본주의 바탕에서 무엇인가? 재생산되는 놀라움.  <검*비>님 그림의 나르시즘. 과도한 자기애. 끊임없는 연민. 냉소. 상품을 고른다는 입장에서만 다양함. 주제가 주어진 선택의 다양함. 욕망--끊임없이 생성되고 만들어지는 욕망에 의해 움직인다는 느낌.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이 세상에 떠밀려가는 일상의 반복. 헤겔을 끌어내고, 들뢰즈를 끌어내고...맑스를 끌어내고....나와는 하등에 관계없는 일일까? 끌어내서 세상을 달리볼 수 있게 만드는 사람들. 사물을 달리해석하고 느끼게 만드는 시인들은 아닐까?  미천한 나에겐 논리학, 여러가지 문제점들은 나중의 일이다. 느끼는 것만으로도 벅찰 수 있다.

낙엽 3. 지식과 틀, 보는 시선은 보이지 않는 공간을 끊임없이 만든다. 그러기에 학문의 허점은 칼날이 예리해질수록 자신의 시선때문에 낭패를 보게될 수 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며 다양한 방법으로 세상을 체득하고 있으리라.  정합성으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해서, 학문적으로 전대미문의 업적을 세운다고 해서...학문은 학문으로서 세상을 보는 그만큼은 아닐까? 언급된 참고책들에 시선이 간다. 과연 읽게 될까? 누가 이야기해주면 안될까? 편하게 강의를 들을 수 있다면... ... 글로서가 아니고, 책으로서가 아니고....다른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없을까? 너무 간편함만 추구하는 욕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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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1. <사다리 걷어차기>, 시장만능주의, 경제의 세계화 논리는 사다리를 먼저 올라간 선진국이 후발주자에게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하게 하기위해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이라 한다. 14-5세기부터 선진국과 후발선진국, 신흥공업국에 이르기까지 조목조목 사례를 들고 있다. 그가 권면하는 것은 그렇게 원색적으로 자기 것만 챙기려 하지 말고, 정책적 제도적인 것들을 허용하고 성장을 위해 취한 것들을 보장해주는 것이 오히려 시장을 키우고 사다리를 걷어차고 올라간 놈과 그렇지 못한 놈들이 같이 좋을 방법이 있지 않을까이다.

낙엽 2. <쾌도난마 한국경제>, 1인당 4만불은 되도록 성장기조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유주의의 논리를 취하는 것은 성장도 되지 않고, 신자유주의 맹폭을 고스란히 맞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업정책-제도적으로 일국에서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고, 천민적 자본주의로 장기적 성장을 막고 있는 기업가의 행태, 당장 낭떠러지라는 극단에서 사회적 안정망과 사회적 대타협?으로 잠재적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라는 입장을 피력한다.

낙엽 3. 읽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민족주의와 통일이란 문제를 생각하며 그 관계에 서 있는 우리, 그때의 관점에 다시 서는 기분. 그러면서도 경제학이라는 것이 지금이라는 문제에 직면해 당장의 절박함으로 지난 것에 다른 관점에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느낌도 든다.

낙엽 4. 제도안 - 제도곁 - 제도밖, 먹고사는 문제, 그 급박함- 제도안에서 선택의 범위는 극히 제한적이다. 그 안에서 최적의 최상의 해를 찾는 것. 철학도 없는 현실에서 제도곁의 시도와 논리는 큰 힘을 부여한다. 하지만 제도밖의 대안과 상상력, 자본주의를 뒤흔드는 다른 시도, 관점 - 성장논리를 반하는 다른 시각은 또 다르게 주류를 흔들 수 있다.

낙엽 5. <황해문화> 가을. '행복의 나라 '부탄'을 찾아서'란 기행문을 읽다. '국민총생산'이 아니라 '국민총행복론'  성장 논리가 아닌 국민들의 행복을 중심에 둔 정책을 추진한다는 것이다.  몇차례 국제 심포지엄과 관련되는 요소들에 대해 연구를 하고 정책에 반영한다고 한다. 그리고 캐나다는 이것을 발전시켜 새로운 웰빙의 캐나다 지수를 개발하고 있다한다. 아무튼 다른 잣대로 한번 일상-정책-제도를 재배치해본다는 것도 재미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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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가집을 다녀옵니다. 년도가 바뀔수록 머무는 시간이 짧습니다. 아파하는 시간도 짧아집니다. 나이를 먹어서 만은 아닌 것 같고, 마음의 정성이 부족해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만큼 관계의 길이도 짧아지는 것 같아 겁이 납니다.

 그렇게 한분 한분을 보내고 나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오래머물고, 많이 아파해야하는 잘하고 잘못하고하는 문제를 넘어서는 것이겠죠. 점점 각박해지는 관계를 일상으로 가져와봅니다.

 사람과 관계. (개인적으로 몰인정?한 편입니다.) 인연을 짧은 시간에 담으려 노력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의도적인 관계확장을 시도하는 편도 아닙니다. 사적인 일상엔 그리 관심이 없습니다. 듣더라도 곧 잊어버리는 편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참 좋아한다는 소리를 듣는 편입니다. 아버지에게서는 친구들에게 다 퍼줄 놈이라는 소리를 듣고, 연애를 해도 다른 친구들을 더 좋아한다는 소리를 자주들었습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러하지 않았는데 이런 소리를 들으면 한편으로 손해보는 느낌이기도 합니다. 남녀를 떠나서 몇가지 경험을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일단 아래 생각을 이어 '동무'라는 기준으로 이야기합시다. 친구-동지라는 교수님의 구분을 따르겠습니다.

 제가 구분짓는 '동무'라는 기준 가운데 하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건데', '삶의 행방과 고민, 진로'에 대해 나누는 것이 첫째입니다. 꿈이 무엇이냐? 어떻게 살고 싶으냐? 지금 문제가 뭐냐?가 일상적으로 나뉘어지고 그것을 되묻고 하는 것이 그 중 하나입니다. 그런면에서 어떤 '남'에게 제게 '동무'하려고 나눴습니다. 그런데 술이 취한 것인지? 다른 진로에 대한 욕심이 있었는지? 무반응이었습니다. 친하기로 치면, 제가 '동무'로 여기는 분(이것을 듣는 남은 어찌 생각할 지 모르지만요. ㅎㅎ)들보다 먼저 알고, 친하기도 더 친한 편입니다. 그 관계를 넘어서지 못해 그렇게 지냅니다. 일상은 없는 셈이죠.

이성간은 무척이나 까다롭습니다. 관계에 욕심이 자리하면 - 그것은 보이고 느낄 수 있는 것이겠죠 - 더 이상의 관계정립은 어렵겠죠.  곁에 두고 싶어하는 욕심은 친구? 이상의 관계를 맺을 없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 ... 아무튼 '동무'라는 구분에는 만만치 않는 잣대가 필요해지는 것 같아 더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고, 더 품어야 할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여유있으면 생각을 덧붙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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