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807 휴가 마지막, 월요병을 피해 하루를 더 쉬어준다. 시내로 버스-지하철로 움직여 헌책방을 들러, 이구경 저구경하다 <중국의료사>,<한국건축사>,<STS>,<생명공학과 윤리> 주제의 책과,<음식혁명> 등 제법 새책에 가까운것을 구입하였는데 단돈 이만원, 한권에 4천원꼴로 횡재한 느낌이다. 돌아오는 길. 일터에서 전화가 왔건만 시네마테크는 공휴일이라 문을 닫아,  <한반도>를 보며 온전한 내시간을 준다.


'한반도'는 역사적 사실에 덧붙여진 상상력이 만들어낸 드라마이긴 하지만,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동안 우리가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고,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다 함께 생각해 보자는 화두를 던지고 싶었다. - 강우석 (영화감독)

 

 저녁 참* 회의에 앞서 몸을 달래 숲으로 달려 땀을 물씬 내어주며, 휴가의 대미를 장식해주었다 싶었는데.... 회의가 좀 길어지고, 간만에 지인의 호출로 <월사모> 와, 자본주의와 돈-땅얘기를 뺀 나머지 이야기와 신자유주의의 뿌리깊고 집요함, 점점 몰려가는 우리와 나를 나누다 머루같은 밤, 쪽잠으로 마무리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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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08 1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060801 휴가전, 서울에서 친구들을 만나, 많이 이야기나누고 많이 돌아다닌다. 신상.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다. 땅이야기-돈이야기가 끼어들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을 잡은 듯한 느낌을 받으니 말이다. 친구들의 고민은 무척 진지하다. 눈길도 세심하다. 청계천 복원-월드컵-문화, 의식에 대해 주고 받다. 차수를 옮기며 을지로입구역 지하차도를 지나친다. 10년전 일본의 라면박스 노숙자들을 본 것처럼 지하차도는 박스에 잠을 청하는 노숙자들로 붐볐다. 가는 선술집마다 안주를 시켜야 된다고 주문이다. 이상한 문화다. 하다못해 간이호프집까지... ...

 060802-3 휴가 하루. 섬진강을 들르기로 하였으나, 미리 예약을 해버려 홍천으로 향하는 마음이 무겁다. 한콘도에서 머무르고 다음날. 막내녀석이 수두 기미를 보여 인근 병원을 다닌다. 소도시라 친철하고 싹싹하구 약국마저 정겹다. 간단히 돌아다니다 자리를 옮겨 한적한 용문인근 강가로 간다. 호젓하고 아이들 물놀이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챙겨주는 소방대 아저씨들 천막을 빌어 이런저런 도움도 받고, 오는 길 옥수수로 건넨다. 두세시간만에 아이들은 새까맣게 탄다. 늦은 점심을 먹기도 전에 골아떨어지고, 여세를 몰아 남향한다.

 060803-4 휴가 이틀. 재첩국에 화개장터 입구에서 저녁을 청하고 하루 묵는다. 아침 일찍 쌍계사에 오르니, 막내녀석 수두는 더해지고 몸도 무거워지는 듯하다. 장터에서 아침은 제법 도회물이 풍겨 이것은 아니다 싶다. 남해로 가는 길, 악양 평사리 공원에 들러, 아이들 물놀이에 얕은 독서다. 걸어서 강을 건널 정도로 물이 얕고 푸르다. 그렇게 놀다 남해로 드라이브. 한바퀴를 도는데 녀석들은 이내 골아떨어져 있다. 삼천포항에 들러 전어축제에 잠시 들러 요기하다.  알라디너분과 약속이 취소되어, 내일 온전히 내 시간이란 생각이 떨어지기 무섭게, 지인이 청양이라구 왜 오지 않느냐구 빨리 오라구 난리다. 오랫만에 달리며 땀도 내주건만... ... 그렇게 꼬심에 넘어가 밤, 청양으로 넘어간다.

060805 얕은 계곡에 아이들 물놀이 장소를 만들어주는데, 몇가족의 아이들은 조그만 사방댐 풀로 이동이다. 수두에 고생하는 막내녀석을 격리?시켰더니 설운 울음을 토해낸다. 작열하는 태양에 밀집모자 씌우고 돌아오는 길, 내내 서러워 훌쩍인다.  한숨 재우고 더 이상 머무르지 못할 것 같아 딸내미를 남기고 돌아와 쉬다.

060806 아침 조금 일찍, 온전한 내시간을 갖기로 하고, 밀린 책과 빌린 책으로 도서관 터를 잡고 늦도록 더위를 피해본다. 저녁 독서흔적을 남기지만 읽기보다 흔적남기기가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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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6-08-07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가 알차게 보내셨네요.
전 13~15연휴를 어떻게 보내나 연구 중입니다.

2006-08-07 2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2005년 초판을 손에 쥐고 있는 감흥은 약간 남다르다. 이 책이 국내에 처음 나온 것은 지난 1978년 “정수용”이 옮기고, “광민사”에서 펴낸 것이었다. 출간되고 얼마 뒤 이 책은 금서(禁書)가 되었고, 1987년 해금되기까지 법적으로는 읽는 것이 금지 당했다. 오늘날엔 경제학 전공자들보다는 인문 ․ 사회학 전공자들에게 더 많이 읽히는 고전이 금서가 될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마음 한 구석을 찜찜하게 했던 것은 그런 부분이었다. 내가 너무 둔하여 혹시 이 책에서 금지될 만한 어떤 사유(思惟)들을 읽어내지 못한 것은 아닌가? (중략)

역사학자들이 20세기를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분명 사회주의 체제의 출현이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20세기를 러시아 10월 혁명과 함께 출발해 지난 1991년 무렵 구소 연방의 해체로 종결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역으로 지난 18세기 무렵 서구 유럽이 제국주의를 통해 축적한 자본을 통해 본격적으로 가동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자본주의를 구성하고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축은 ‘물질주의와 상업주의’이며 이것을 가능하도록 한 토대엔 인간의 욕망이 잠재해 있다. 우리들은 자신의 몸에 새겨진 안락함의 기억이 얼마나 질긴지 잘 알고 있으며, 대부분은 그 기억에 맞서 싸울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20세기의 사람들은 기독교나, 이슬람교, 불교, 유교와 같은 종교적 가치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20세기의 인류는 이미 단일 종파, 단일 종교로 통합되었는데, 그 신의 이름은 바로 “물신(物神)”이다.

베블런은 인간의 소비 혹은 욕망을 합리적인 것으로 단정한 고전학파나 신고전학파 경제이론에 매우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다. 그렇다고 이들의 경제이론을 완전히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베블런의 비판이 날카롭긴 했으나 그가 경제학에 새로운 체계를 세운 것은 아니었고, 마크르스처럼 유한(자본가)계급에 대해 혁명을 주창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오늘날 우리가 베블런의 공적을 폄하하거나 무시할 필요는 없다. 그가 유한계급에 대해 던졌던 냉소는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니까 말이다. 베블런의 지적들은 이후 정치적인 측면에서 C.W.밀즈(『파워엘리트』), 사회학적인 측면에선 피에르 부르디외(『구별짓기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그리고 문화적인 측면에선 제임스 트위첼(『욕망, 광고, 소비의 문화사』, 『럭셔리 신드롬』)에 의해 오늘날 좀더 세부적인 측면으로 분화되어 풍요롭게 계승되고 있다. (by 바람구두)


뱀발. 1899년에 세상에 내놓은 책이란다. 맑스?나 베버?보다 부르디외보다? 오히려 시원시원한 느낌이다. 궁금증으로 쌓인 것들이 뱉어내는 간결함에 녹는 것 같다. 살아남는자들의 성향이나 사회가 점점 더 옥죄는 분위기에 대해 간간이 들어있는 진화론의 과도한 덧붙임을 제외하면 수긍이 간다.

1.

244

초기의 야만적인 단계 혹은 본연의 약탈 단계에 부합하는 기준성격은 소박한 의미의 용맹성이었다. 유한계급에 편입되기를 열망하는 후보자는 당파심, 당당한 체격,잔인성, 악랄함, 집요합과 같은 재질을 타고나야 했다. 이런 재질들은 부를 축적하고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구비해야 할 자격조건이었다. 이후 부를 축적하는 방법과 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질들은 어느 정도 변하기 시작했다. 과감한 공격, 민감한 신분감각, 속임수 등을 통해서 거침없이 발휘된다. 후기 야만문화의 사회는 외견상 평화로운 신분체제하에 안정된 취득방법과 소유방법을 정착시켰다. 거침없는 공격과 상당히 무절제한 폭력은 가장 우수한 부의 축적방법으로 증명된 약삭빠른 행동과 교묘한 언변으로 대체된다.

목적에 대한 집요함은 다른 두계급- 즉 게으르고 쓸모없는 무능력자들이나 하류 범법자들-과 구별할 수 있게 하는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금력을 과시하는 남자는, 산업에 참가하는 남자가 선량하지만 무능력하고 의존적인 남자와 비교되는 것과 거의 같은 방법으로 범법자와 비교된다. 이상적인 금력과시형 남자는 이기적인 목적에 따라 재화와 인력을 비양심적으로 횡령하고 타인의 감정과 소망은 물론 자신의 행동이 미칠 간접적인 영향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점에 범법자와 같다. 그러나 그는 예민한 신분감각을 소유하고 있고 좀더 일관성있는 장기적 안목으로 간접적 목적을 위해 활동한다는 점에서 범법자와 다르다.

2.

248

유한계급의 생활과 생활양식은 야만적인 기질의 보존을 더욱 촉진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곧 주로 외견상 평화적인 변종 혹은 부르조아적인 변종뿐 아니라 어는 정도 약탈적인 변종도 보존하는 것이다. 귀족과 부르조아의 미덕들-파괴적이고 금력과시지향적인 특성들-은 주로 상류계급들 사이에서 발견될 것이고 산업적 미덕들-평화적인 특성들-은 주로 기계적인 산업에 종사하는 계급들 사이에서 발견될 것이 분명하다. 이런 구분은 개략적으로 보면 사실이겠지만, 구분의 기준은 기대보다도 쉽게 적용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결정적이지도 않다. 실패할 만한 이유는 모든 계급은 어는 정도는 금력과시 투쟁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력과시문화가 지배적인 곳이라면 어디서나 남자들의 사고습관을 규정하고 경쟁하는 가계의 생존을 결정하는 선택과정은 대개 취득을 보장하는 기반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모든 직업의 선택작용은 금력과시형 기질에 전적인 우위를 보장하는 경향을 띨 것이다. 그 결과 "경제적 인간"으로 알려진 인간형이 정상적이고 결정적인 인간성의 전형으로 자리매김 될 것이다. 그러나 오직 이기적인 관심밖에 없고 오직 타산적인 인간성밖에 지니지 않은 이 "경제적 인간"은 현대 산업의 목적들을 달성하는 데 유용한 인간형이다.

3.

251

상류계급의 기질과 하류계급의 기질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 차이가 거의 없다는 사실도 유한계급제도가 의존하는 과시적 낭비와 금력과시경쟁이라는 광범위한 원리들을 일반인들이 수용했다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유한계급제도는 공동체의 산업효율을 저하시키고 현대 산업생황에서 발생하는 절박한 상황에 대한 인간성의 적응을 지연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 제도는 첫째 유한계급 내부의 유전을 통해서 유한계급의 혈통을 이식받는 모든 외부계급까지도 고대의 낡은 특성을 직접 전파함으로써, 둘째 낡은 체제의 전통을 보존하고 강화하여 유한계급의 혈통을 이식받지 않은 다른 계급들 사이에서도 야만적인 특성들이 생존할 기회를 더욱 많이 조장함으로써, 지배적이거나 유력한 인간성을 보수적인 방향으로 유인한다.

4.

267

미식축구와 체육문화의 관계는 퉁우와 농업의 관계와 거의 같다는 말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거기에 동원되는 재원이 짐승이든 인간이든 신중히 선별하여 훈련과 규율에 복종시킴으로써 본래 길들일수록 사라지는 경향이 있는 야생적인 적성과 성향을 유지하고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 이 과정은 그런 짐승이나 인간이 지닌 야생적이거나 야만적인 사고습관 내지 신체적인 습관을 전면적으로 철저히 복원하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야만성 혹은 야생성의 일부만 복원하는- 개체의 자기보존본능과 생활충족본능에 기여했을 특성은 도태시키고 상대를 손상시키고 파괴하는 데 필요한 야생적인 특성만 복원하여 강화하는-과정이다.

현대의 경쟁은 대부분 이처럼 약탈적인 인간성의 특성에 기초한 자기 과시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현대적이고 평화적인 경쟁에 개입하면서 세련된 형태를 띠게 된  이런 특성은 문명세계의 남자라면 어는 정도라도 소유해야 할 거의 필수적인 사항으로 정착되기 이르렀다. 그렇게 이 특성은 경쟁적인 개인들에게는 필요불가결한 것이 되어버렸지만 공동체에 대해서는 직접 봉사하지 못하고 있다. 집단생활의 목적에 대한 개인의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 본 경쟁력은 단지 간접적인 용도만 지니고 있을 뿐이다. 잔인성과 교활성은 다른 공동체를 적대적으로 상대할 경우를  제외하면 공동체에는 아무 소용도 없다. 이런 특성들이 개인에게 유용한 경우는 오직 그가 처한 인간적인 환경에서 다수의 동일한 특성이 활성화될 때뿐이다. 이런 특성을 별로 타고나지 못한 개인이 경쟁적인 투쟁에 참가하는 것은 뿔도 없는 송아지가 강력한 뿔을 가진 들소 떼에 뛰어드는 짓만큼이나 불리하기 그지 없는 행동이다.

5.

277

산업계급에 속하는 대다수의 보통남자들의 스포츠지향성은 이른바 스포츠 습성이라는 것을 체질화했다고 할 만큼 강하게 표출되지 않는다. 산업계급들에게 스포츠는 생활을 좌우하는 중대요인이라기보다는 때에 따라 기분전환용으로 즐길 수 있는 오락 같은 것이다. 사활이 걸린 항구적인 관심이 아니라, 일시적인 흥미에 따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추억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야만인들의 생활을 관찰하면 알 수 있듯이 용맹성은 폭력과 속임수라는 대표적인 두 가지 방향으로 표출된다. 이 두가지 표현형식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대의 전쟁, 금력과시적 직업들, 스포츠와 도박을 통해서도 대체로 비슷하게 나타난다. 구 가지 방향의 소질들은 스포츠생활뿐 아니라 좀더 심각한 형태의 경쟁적인 생활을 통해서 함양되고 강화된다. 전략이나 속임수는 전투와 사냥에서는 물론 도박에서도 변함없이 등장하는 요소이다. 이 모든 활동들을 통해서 전략은 술수나 흉계,기만행위 등으로 발달하는 경향을 보인다. 기만,거짓말,공갈 등은 일반적으로 모든 운동경기 진행방식과 도박이나 계임세서 부동의 위상을 차지고 하고 있다.

잔인성과 민첩성이라는 이 두가지의 야만적인 특성은 약탈적인 기질이나 정신상태를 조성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 특성은 협소하고 이기적인 사고습관의 발로이다. 두 특성 모두 차별적인 성공을 추구하는 개인의 편의를 도모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또한 두 특성 모두 심미적으로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어서 금력과시문화에 의해 육성된다. 그러나 두 특성은 모두 집단생활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전혀 쓸모가 없다.


 1. 디즈니, 공공문화의 정치학

 26 윌트의 오락과 교육의 결합은 공공문화와 상업적 이익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든다. 디즈니의 성공은 문화산업이 우리 삶의 거의 모든 측면을 간여하고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28 민주적인 문화는 젊은이들에게 비판적인 사고능력을 교육시키고, 민주적 사회 관계를 차단하는 인종,사회,경제적 불균형의 개선에 필요한 제도적이고 상징적인 원천을 제공한다.  기업들은 시민권인 교육의 자유와 교육 기회의 균등을 소득에 비례하는 교육으로 제한함으로써 상업적 요구를 앞세워 시민들의 요구를 묵살하려고 한다

32 기업에서 만들어낸 문화는 개인주의와 경쟁을 우위에 두고, 청소년들에게 광범위한 기술과 권리를 지닌 진정한 민주시민이 되는 잠재력을 포기하라고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업이 만들어낸 문화는 시장의 논리에 근거한 정체성만을 수용하게 하며, 능동적이며 비판적인 주체가 되는 것을 포기하게 하고 수동적인 소비자의 역할만을 하라고 제안한다.

33 상업적인 영역은 텔레비전,라디오,영화 그리고 신문이다. 대기업은 점점 더 삶의 의미와 소망을 상업적 논리와 접목시키려 하는데, 이를 통해 어린이들의 민주적인 정체성을 조정할 수 있게 되고, 문화에 대해 정치적이고 교육적인 위력을 "권력을 획득하는 긴요한 수단과 무기로서" 공고히 할 수 있게 된다.

37 기업과 소비자의 권리가 시민 활동권을 제압하면서, 아무리 상대적 반발과 조직적 저항이 남아 있다 해도, 민주제도와 사회적 관계의 쇠퇴와 더불어 일상생활의 상업화는 계속되고 있다.

40 자본주의의 위대한 신화 중의 하나는 시장은 단지 선택권을 주고, 선택을 합법화한다는 생각이다. 즉 시장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힘을 강화시켜주며 그들이 가진 화폐로 투표하게 한다. 하지만 그 순간 시장은 대중의 폭넓은 선택을 차단한다. 미국의 많은 도시에서 사람들은 25종의 자동차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지만, 대중교통 수단을 선택할 수는 없다.

45 정치적 투자란 디즈니의 세계관으로 우리 모두를 구속하려는 시도를 통해 우리들의 삶의 의미와 소망과 꿈을 조작해내려는 것이다. 디즈니의 교육은 시민의식의 유치하고 개인적인 면을 강화시킨 도피주의와 소비주의를 조장하는 전략이고, 과거가 현재를 규제하는 방식으로 공공의 추억을 특정한 틀 속에서 정의 내리는 행위이다.

67 교육의 가장 중요한 형태는 자아 반성과 공적 책임인데, 이 두 자질은 디즈니의 사상적 세계에서는 세속적 모독일 뿐이다. 디즈니의 교육은 현실의 가능성과 한계를 인식하게 하고, 비판적인 대화를 통해 현실을 변화시켜나가는 상상력을 키워주는 교육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디즈니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대응과 저항을 대신해 선전 문화에 기반을 둔 환상의 세계를 제공한다. 또한 과거에서 반항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과거를 단지 기업정신과 기술 발전이라는 감상적인 찬양으로 채워버린다


2. 디즈니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들

72 공립학교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줄면서 기업들은 학교의 사립화, 재정보조, 선택적 교과과정, 학교와 기업 간의 산학협동 프로그램을 통해 학교를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고 시도하고 있다. 교육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은 민주적인 공공의 삶을 심화시키고 확장해가고자 하는 투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건전한 시민이란 기존 인습들을 과감히 거부하고 당면한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오락국가'의 시대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정치적이고 교육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  누가 문화의 생산을 통제하고 있는가? 이렇게 생산된 의미들은 누구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가? 문화를 생산해내는 일이 오락,볼거리,소비,관광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가?

88 지난 10년 동안 기업이 만든 문화는 개인주의, 이윤 추구, 시장 중심의 문화를 찬양하는 변혁의 과정 안에서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해왔다. 이런 변화의 와중에 공동체와 민주주의와 공공의 이익이란 용어가 사라져가고 공공을 위한 목적, 공공에 대한 봉사, 공교육에 대한 사회적 요구 역시 약화되고 있다.

89 문제는 바로 민주사회에서 기업문화가 공과 사, 오락과 역사, 비판적 시민정신과 소비행위의 뚜렷한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행위를 허용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민주사회가 정치적이고 대중적이고 역사적인 대화 과정과 그 산물인 문화를 무시하고, 소비행위가 주는 쾌락과 도피적 오락과 기업의 이윤을 중시하는 기업문화에 흔들리고 있는 현실은 과연 무엇을 암시하는 것일까?

124 영화의 통제와 생산과 배포는 광범위한 권력 순환의 일부로 분석돼야 한다. "오락주권국가"라는 이름처럼, 디즈니가 다양한 분야에서 전반적인 통제를 위해 사용하는 조직적이고 정치적인 권력과 필수적으로 맞닥뜨려야 한다. 디즈니 아동 영화의 이용 가능성, 영향력, 문화적인 위력은 문화정책을 만드는 주체와 관련된 정치적인 토론의 일부가 돼야 한다.

125 언론의 자유라는 전제는 모든 사람들과 집단과 공공분야에 이익이 골고루 돌아갈 수 있는 민주적인 방식 안에서만 유용하다.

127 디즈니 제국은 순수하게 젊은이들에게 쾌락을 제공하는 상업적인 기업이기보다, 국가정체성의 문화적인 배경과 어린이들의 정신적 "학교"라는 역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교육 정책을 입안하는 기업으로 인식돼야 한다.


4. 디즈니 영화에 나타난 추억,국가,가정

130 문화권력: 디즈니 세계의 순수함이란 역사의 불쾌한 측면을 제거하는 이념적 도구이다. 순수함은 또한 권력의 지배 관계를 합법화시키는 수사적 도구일뿐만 아니라, 특정한 역사 이야기와 표현과 문화적 활동 가운데 사람들을 자리매김하는 교육적 장치이다.

131 좀더 비판적인 의미에서 교육이란 지식과 권위와 권력의 관계를 조명해주는 것이다. 이때 교육은 지식을 생산하는 조건들을 누가 통제하는가하는 문제에 주목한다. 더욱이 특정한 사회관계의 틀 안에서 지식과 정체성과 권위를 생산하는 다양한 과정 중에 권력의 순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윤곽을 제공한다. 지식과 힘과 소망과 경험이 특수하고 기본적인 학습의 조건에서 형성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133 역사적으로 대중문화가 지구촌 문화를 지배하게 되고, ....문화가 권력과 자본의 순환 구조에 직접 개입하는 기업의 아주 우수한 상업화 현장이 된다. 또한 그 현장은 편견과 정형화의 무자비한 과정 속에서 자료와 경험을 용해시키고, 기존 문화 관료들의 손을 거치면서 이야기와 표현을 한목소리로 통제하고 획일화시키는 곳이다.  도피주의와 역사적 망각과 인위적인 세뇌라는 전략은 미국의 정체성을 백인,교외주거지, 중산층 그리고 결혼을 통한 가정생활만으로 정의하는 것이다. 추억에서 반항적인 요소를 삭제한 역사적 교훈의 기능을 한다.


5. 미국을 장난감 상점으로 만들기

 

160 "여가와 오락의 전제적 권위"를 지니고서 문화를 상품화하고, 역사적 추억을 정화하며, 소비주의 이념 안에서 특별히 어린이들의 정체성을 조작해내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164 기업과 함께 자라나는 것은 미국 젊은이들의 일상생활이 돼버렸다. 시장문화가 욕망을 자극하고 정체성을 형성하는 등 교육적으로 강력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많은 젊은이들에게 민주주의의 정의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정부의 간섭 없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사고 쓸 수 있는 것"이라고 답했다.  젊은이들이 기업과 함께 자란다는 의미는 공공문화를 상업문화로 대체하고, 민주주의 언어 대신에 시장의 언어를 쓰면서 생활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165 학교의 기능이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것에서 민주적 소비자를" 만드는 것으로 전환되면서 지배적인 상업문화가 시민사회를 잠식하게 되었다. 그 결과 소비주의가 유일하게 수용해야 할 시민정신인 것처럼 보인다.

166 민주주의는 노력을 요구한다. 교육가,학부모,일반인들에게 시장은 " 민주적 시민사회의 핵심인 정의와 공평무사라는 문제에 대해 어떤 조언도 해주지 못한다." 기업문화라는 권력은 그대로 방치하면 어떤 경계선, 즉 위생적인 식품공급, 건강보험, 안전한 교통수단 등 기본적인 사회적 필요조차도 인정하지 않는다.

168 디즈니는 단순히 오락만을 파는 것이 아니다. 디즈니는 정치,경제,교육에 관한 실체이다. 대기업의 권력구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미디어업체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영향력을 명백히 폭로하기 위해서 다양한 부문의 전면에 서서 대항해야 한다.

189 문화에 대한 검증은 그 문화가 기쁨과 즐거움을 생산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기본적 체제를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제공해줄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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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6-08-31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대출해 놓고 아직도 책상에 있는 책이네요 얼른 읽어야 하는데...

여울 2006-09-28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마린님, 괜찮은 책이네요. 얼른 읽으셔요. ㅎㅎ

여울 2006-10-13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블렌에게 진화론의 의미  
2006-10-12 11:21

 들어가는 말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엽까지 서구 근대사상은 진화론으로부터 어느 정도 충격을 받았는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사실상 단서로 하여, 생물학에서는 생명의 기원에 관한 문제가 비약적으로 진보하게 되었고, 의학에서는 유전과 돌연변이에 관한 지식의 기반이 확고하게 되었다. 사회학에서는 다윈과 동시대 인물인 스펜서가 사회에 관한 연구를 자연과 생명의 연구 가운데 다시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진화론이라고 하는 사상계의 물결은 서구 근대사상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것이었다. 이 의미에서 경제학도 결코 예외는 아니었다.


  경제학에 대한 진화론의 절실한 영향은 19세기 후반부터 활약하고 후세에 제도학파의 창시자로 일컬어진 베블렌의 논고에서부터 파악할 수 있다. 베블렌의 이론의 핵심부분을 이루는 진화론을 재검토하여, 그가 진화론으로부터 어떤 충격을 받고 그 충격을 어떻게 이론에 반영하였는가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제 1장  진화의 의미

  베블렌의 이론을 고찰하기 전에, 그보다도 약 반세기 전에 진화론의 진원지였던 영국에서 인간과 사회에 관한 이론에 진화론을 적용한 스펜서의 이론을 간결하게 파악하고, 오늘날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진화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려 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스펜서의 등장 이전에는 진화론의 조짐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진화론은 서구 근대사상의 확실한 기폭제가 되고, 150년 후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아마 스펜서도 다윈도 진화론이 그 정도의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펜서에게 진화론은 서구 근대사회가 지금까지 축적해 온 기존의 사회에 관한 지식, 연구를 모든 근저에서 뒤집고 다시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강하게 직관되는 것이었다. 즉, 생물 전반에 관한 진화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자연, 생명, 사회(인간) 3자의 새로운 관계를 근대인에게 강요한 것이 진화론이라고 스펜서는 생각했다.


  스펜서 이전은 예를 들면 17세기 중반 데카르트의 이론으로 상징되듯이 사람들은 인간이 법칙이나 인식을 매개로 하는 것에 의해 우주(자연)를 제한 없이 해명할 수 있다고 믿는 것에 의심을 하지 않았다. 데카르트는 동물을 ‘자연기계’로 보고 제부분을 조립해 나가면 생명을 가진 전체로서 작용한다고 확신하기까지 했다. 즉, 인간은 그 이성에 의해 자연, 생명을 이해할 수 있고, 그것들을 만드는 것까지도 가능하다고 과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 서구사회의 구성원리를 지탱하는 이성주의는 진화론 앞에서는 붕괴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정확하게 파악한 것이 스펜서였다. 특히 그가 『제1원리』에서 자연이나 생명현상을 언급하며 인간지식에 ‘불가지’영역이 존재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항상 아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항상 알 수 없다고 하는 깊은 확신을 지닌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에 의해,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 즉, 우리들의 최고의 지혜와 최고의 의무는 모든 것이 불가지한 것(the unknowable)으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통해 인식된”다고 하는 것이다. 스펜서에게 진화론이란 인간이 미래를 예측가능하게 하지만, 인간이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이론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제시했던 진화관은 인간 및 사회가 자연으로 포섭되는 존재이며, 인간과 사회는 모두 자연이 지닌 법칙성에 따른다고 하는 주장으로 나타난다. 인간도 예외 없이 모든 생물은 자연 앞에서는 무력하며, 거기서 이성은 아주 미미한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 결국 스펜서의 진화관은 계몽사상 이래의 목적론적 진화관과도 구분되는 것이었다. 즉, 스펜서가 말하는 진화란 발전법칙, 발전도식의 의미는 전혀 갖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는 절멸, 붕괴할 수도 있는 엄격한 것이었다. 저명한 「군사형사회로부터 산업형사회로」라는 구호가 의미하고 있는 것도, 사회가 자연의 법칙에 따라 ‘변화한다’고 하는 것이며, 여기에 산업형사회로의 이행을 희구하는 인간의 희망적 관칙은 전혀 없는 것이다. 군사형사회, 산업형사회도 변화하는 사회의 한 유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진화론을 스펜서가 주장한 배경에는 그가 생물학을 기저로 하고 생물을 개체의 생존양태인 ‘개상(個相)이 아닌, 군체(群体)로서의 생존양태인 군상(群相)으로 착안하는 것에 의해 사회를 파악하려는 것에 있다. 진화론을 기반으로 하여 사회유기체설을 제창했던 스펜서에게 인간의 집합체인 사회는 개개 인간의 생존양태로 수렴하여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오늘날 생물학적 지식의 발달에 의해 더욱 명확해지듯이, 진화론이란 생물의 군상의 변화를 이론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개의 생물의 형태의 변화만을 나타내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상 고찰한 스펜서의 진화론에서 도출된 ‘진화’의 의미를 열거하면 이하의 3가지가 된다. 1) 진화는 인간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2) 진화란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거기에 발전법칙, 발전도식의 의미는 없다. 3) 진화란 생물(인간)의 군상(群相)의 변화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3가지는 중립설이라는 현대생물학의 최신의 진화론에서도 모두 계승,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근거로 베블렌이 진화론으로부터 어떤 충격을 받았는가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제 2장  베블렌에게 진화론과 경제학의 모순

  베블렌에게 진화론에 관한 선행연구는 그가 제시한 ‘진화론적 경제학’이라는 발상을 전제로 하고, 그것이 ‘적자생존’ ‘생존경쟁’ 원리로 계승된다고 하는 다위니즘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는가 하는 관점에서 상세하게 고찰하는 것이 많다. 이 때문에 ‘자연선택’을 제창한 다윈의 진화론 본래가 지닌 의미를 깊이 파고들어 베블렌의 진화관이 단독으로 정밀하게 고찰된다는 것은 대단히 적지만, 이러한 연구경향 가운데 I. 머프리의 논문 「토르스타인 베블렌의 경제학에서의 다위니즘」은 베블렌의 진화관에 관한 유익한 논점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는 다윈의 방법론을 단지 원인과 결과에 지나지 않는 인위(人爲)를 넘어선 인과연쇄로 파악하여, (인간의) 우주의 목적추구와 신의 섭리 아래에 있는 ‘자연의 질서’에 대한 신념을 불필요하게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머프리는 다음과 같이도 고찰하고 있다. 베블렌은 다윈의 진화론에서 우주가 목적론에 의거하지 않는 것, 사회진화와 진보사상을 분리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이상의 머프리의 고찰을 요약하면 인간의 합리성이 자연의 그것을 초월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인간에게 알려주는 것이 다윈의 진화론이었다는 것을 베블렌은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베블렌의 진화론에 대한 사고는 극히 초기에 쓰여진 저명한 논문 「왜 경제학은 진화론적 과학이 아닌가」("Why Is Economics Not an Evolutionary Science?")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이 논문의 모두에서 그는 동시대의 인류학자의 논거에 의존하면서 경제학이 근대과학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수복(修復)의 필요 앞에 서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데 라푸쥬(de Lapouge)의 경제학 비판의 핵심부분은 이렇다. 경제학은 사회발전을 일국면 혹은 겨우 이차적인 국면으로부터 밖에 파악할 수 없는 이상, 물질적인 복리의 증대에 관한 상관적인 술책을 추구하는 것만으로 한정되며, 국가의 쇠퇴나 민족의 가치의 저하라는 대상은 제외된다. 그러나 그는 인류사회학이 이러한 경제학의 결함을 답습하지 않고, 사회발전의 고찰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인류사회학에는 진화론적 발상에 근거한 사회변화의 과정을 이론구축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데 라푸쥬는 국지적인 균형점을 추구하는 경제학이론에서는 사회발전, 문명의 역사적인 발전, 국가의 쇠퇴, 민족의 가치의 저하라는 동태적인 분석은 불가능하다고 고찰했다.

 

 데 라푸쥬가 주장한 경제학이론에 대한 절실한 문제를 베블렌은 진지하게 반박했다. 그는 동시대의 경제학을 기초 짓는 마셜이론, 그리고 그것을 이론적으로 지지하고 있던 고전파 경제학, 고전파 경제학을 비판하여 독자의 이론을 형성한 역사학파의 어느 것도, 근대과학으로서의 경제학으로는 결코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베블렌에게 기존의 경제학이론을 뒤집지 않으면 안 된다고까지 단언하게 한 것은 데 라푸쥬의 논고를 인용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근대사회를 석권한 진화론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다. 그는 진화론에 촉발되어 이하 두 개의 관점에서 경제학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제 1의 관점은 기존의 경제학이론은 인위적인 법칙성에 의해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베블렌은 특히 고전파의 아담 스미스가 말하는 ‘신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시장의 목적론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이론적 장치를 비판한다. 베블렌에게 스미스의 이론으로 대표되는 고전파 경제학은 과학적인 이론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었다. ‘신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도된 이상적인 경제행위가 행해진다고 하는 구극적인 원리는 고전파 경제학자에게는 ‘정상적인 법칙 혹은 자연스러운 법칙’(laws of the normal or the natural)으로서 받아들여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장에서 ‘조정원리’(the controlling principles)에 지나지 않으며, 인위적인 경제현상의 경향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시장의 국소적인 합리성밖에 통용되지 않는 고전파의 이론의 특질을 베블렌은 믿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인과연쇄’를 추구하는 것으로 시종하는 경제학의 수법을 그는 전면적으로 부정한 것이었다. 또한 인과연쇄로부터 도출된 (물질적 세계의) 기계론적인 구조와 인간의 물질적 목적이라 해도 그것을 추구하여 제시한 것은 ‘분류학’의 목적으로, 경제생활의 변화과정을 추구해 가는 경제학이론의 목적으로는 될 수 없다. 원래 진화론이란 전체에 대해 부분적인 ‘메카니컬한 법칙성’이 통용되고 그것에 의해 성립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베블렌의 이론은 제1장에서 고찰한 스펜서가 인간에게는 필연적으로 ‘불가지 영역’이 존재한다고 주장한 이유의 핵심부분과 상통한다.


 제 2의 관점은 기존의 경제학이론에서는 사회내부의 인간이 유기적으로 밀접하게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을 충분하게 나타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관점은 앞의 제 1의 관점과 깊이 관련을 갖고 있다. 베블렌은 ‘인간은 항상 어디에 있어도 무엇인가를 하려고 한다는 의미에서 경제행위는 목적론적이다’고 서술하면서도, 그의 진의는 그 전제와는 정반대의 주장에 있다. “경제적 이해는 고립하여 작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인의 활동이 활발한 것에 의해 복잡해져 가는 목적론적인 활동에서 생기는 (사회에서의) 이해관계의, 거의 일부분밖에 아니기 때문이다”


  즉, 베블렌은 경제현상을 시장에서 개인의 경제활동이나 경제적 이해로 환원시키는 기존의 경제학이론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사회에서 경제적 이해는 개인의 그것에 환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베블렌은 개개인의 경제적 이해가 유기체적 경향을 갖으며 관련하여 부합하고 있는 사실에 착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경제적 이해를 추구하는 인간은 복잡한 사고습관을 수반하고 있으며, 또한 그 사고습관은 사회의 다른 인간의 그것으로 이루어지는 생활습관으로 영향을 받는다. 결국 인간은 고립하여 경제적 이해나 사고습관을 관철시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러한 문화현상을 베블렌은 경제현상이라 부른다. 베블렌이 최종적으로 진화론적 경제학에 의해 탐구하려고 한 것은 이 유기적인 문화현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베블렌의 이론에 대하여 흥미 있는 지적을 할 수 있다. 즉, 이러한 그의 비판은 국가주도의 사회개량책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정책에 중점을 두고 있는 (후기) 역사학파에 대한 비판이다. 결국 대단히 간결하게 표현하자면, 역사학파는 유기체의 존재를 국가 자체에서 구하며, 국가를 구성하는 인간의 상호작용에서 구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고찰한 것처럼 베블렌이 경제현상의 유기체적 경향의 소재를 국가 자체가 아닌, 개개인의 경제행위나 경제적 이해가 유기체적으로 상호 관련하고 것에서 구하고 있다고 한다면, 베블렌과 역사학파에서는 유기체의 소재를 구하는 방법 자체가 정반대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부분의 상호작용의 존재 자체를 유기체로 보는가, 아니면 전체를 유기체로 보는가. 이 논의의 핵심부분은 유기체라는 생명을 기능으로 독해하는가, 구조로 독해하는가라는 중대한 문제도 잠재해 있다.


 이상의 두 개의 관점을 근거로 베블렌은 기존의 경제학과는 다른 과학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진화론적 경제학이란 경제적 이해에 의해 결정되는 문화현상의 과정의 이론이며, 즉 그 과정 자체의 견지에서 제시되는, 경제제도의 누적적 연쇄(a cumulative sequence of economic institutions)의 이론이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의 고찰에서 베블렌이 말하는 경제적 이해에 의해 결정되는 문화현상이란 개인의 경제적 이헤로 환원되는 것이 아닌, 사회라는 유기체를 상정한 위에 비로소 고찰 가능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진화론적 경제학의 최대의 특징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들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진화론적 경제학이란 진화론과 경제학이라는 두 개의 모순되는 이론이 병치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왜냐하면 베블렌 자신이 기존의 경제학에 대해 지적하듯이, 경제학은 진화론적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확실히 베블렌은 “그것(경제학)은 민족이나 공동체의 경제생활과정의 이론이어야 한다”고 하여 확실히 경제학이 진화론적 경제학이라는 학문으로 개량 가능한 것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 듯한 발언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진화론적 경제학이라는 술어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가 왜 이 술어를 만들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이유이다.


 여기서 먼저 고찰한 데 라푸쥬의 주장을 상기하면 이 베블렌의 주장은 그것과 겹치는 부분이 대단히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블렌은 경제제도의 누적적 연쇄라는 술어를 사용하여 경제현상을 비롯한 인간의 사회에서의 여러 문화현상은 인위(人爲)에 의거하는 것이 아닌, 누적적으로 진화해 간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여기서 베블렌이 말하는 진화가 의미하는 것은 변화이다. 그렇지 않다면 경제학은 국가의 쇠퇴나 민족의 가치의 저하라는 사회현상의 추이, 동태를 분석할 수 없다고 한 데 라푸쥬의 주장을 자신의 논고 모두(冒頭)에 둘리가 없다.


  베블렌은 영국을 진원지로 하는 진화론에 큰 충격을 받고, 기존의 경제학이론을 모두 전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꼈다. 때문에 그는 누적적 진화라는 발상을 담은 과학의 필요성을 진화론적 경제학이라는 말을 통해 주장한 것이다. 당연한 것이지만, 경제생활 자체는 근대 이전의 사회에도 존재했다. 그러나 그 경제생활의 방향 부여를 경제학이 행하게 되었다는 것을 베블렌은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상술한 것처럼 최종적으로 인간을 주체로 하는 국지적인 합리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근대사회를 전제로 한 경제학과, 자연을 주체로 하는 생물의 변화과정을 이론화하는 진화론은 어떤 조건을 붙여도 상용할 수 없다. 이 양자는 명확히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경제생활, 현상의 성장과정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 베블렌이 말하는 진화론적 경제학이란 경제학에 정확한 의미에서의 진화론에 따라 그 재구성을 도모하는 것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베블렌은 스펜서와 같이 아무 것도 이론적 시좌가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진화론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스펜서에 의해 반세기 전에 발견된 진화론에 새로운 관점을 포함하고 그 정수(精髓)를 받아 계속 전개하는 것이 가능한 상태였다. 베블렌은 스펜서처럼 철저하게 진화를 전면에 밀고나가 그 이론을 세우지 않았어도 진화라는 용어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베블렌은 표면상으로는 스스로 주장하는 누적적 진화라는 말을 하지 않았어도, 사회의 진화과정을 논할 수 있었다. 그것이 저작 『부재소유제』이며 『유한계급론』이었다.

 

 

 제  3장  베블렌의 근대사회비판

  베블렌의 저작이나 논고는 모두 근대경제학이 지닌 자연과 대립하는 법칙관 - 인위적인 법칙관 - 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인간사회에 대한 비판, 즉 근대사회비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이하에서 간략하게 고찰할 『부재소유제』、『유한계급론』에 가장 단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베블렌의 집필시기를 고려하면 후자 쪽이 전자에 선행하지만, 근대 고유의 경제제도의 강한 영향을 받은 결과, 문화현상의 변질이 표출했다고 한다면 다소의 시차는 있지만 전자부터 고찰하는 것이 무난하다고 생각된다.


  『부재소유제』는 부재소유제라는 근대경제학이 낳은 경제제도를 다루며 미국의 자본주의경제를 비판한 것이다. 베블렌은 생산자=사업주와 소유자=고용주를 양극 분할시킨 이 부재소유제가 거대 독점기업의 출현과 확대를 초래하고, 기업에 큰 이익을 가져다 준다고 고찰한다. 예를 들면 기업의 이익의 확대의 일환으로서 그는 이익의 최대화를 추구하기 위한 시장에서 가격조작이 기업주도로 행해지고, 생산량 제한에 의해 가격의 상승이 가능하게 된 것에 주목했다. 이른바 「불로소득」의 발생이다.


  베블렌은 이러한 부재소유제가 발생시키는 고유의 법칙성, 즉 생산자와 소유자의 격리를 대전제로 한 경제제도가 지닌 리좀에, 근대 이후의 자본주의 경제사회가 확실히 매번 집착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예를 들면 물리학과 화학의 진전에 의해 생산공정에 참여하지 않는 전문기술자가 직인계급을 지배하게 되어 종래부터 어떤 기술산업이 변질된다. 같은 생산공정에도 사업에도 참여하지 않고 영업을 하는 세일즈맨의 약진에 의해 시장의 가격경쟁이 치열해진다. 기업이 주식, 증권 등 신용기구에 의존하게 되고, 자본의 집중을 용이하게 초래하는 기업의 규모를 한층 확대한다. 그 결과 그가 살던 그 당시의 미국의 자본주의경제의 상태분석, 고찰이 아닌, 미래적으로 예측되는 상태이다. 물론 그가 진화론적 발상에 의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예측이 인위적 방책에 의해 회피된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베블렌은 이러한 인위적 방책의 집대성인 이론 자체를 정립하는 것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기묘한 경제제도, 하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지극히 당연하게 되어 버린 부재소유제라는 경제제도는 제 2장에서 고찰한 자본가, 사업가, 생산자 등의 개인의 경제활동이나 경제적 이해로 환원해도 그 실태가 같은 방향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베블렌의 기존의 경제학에 대한 비판은 변질한 근대사회 이래의 경제제도에 대한 지금까지의 이론으로는 유효성을 상실했다고 하는 절실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상의 부재소유제의 논리를 근거로 한다면 『유한계급론』이란 근대사회에 등장한 유한계급의 이론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유한계급을 돌출시킨 근대사회에 대한 베블렌의 통렬한 비판으로서 받아 들여야 한다.


  베블렌이 단지 「과시를 위한 소비」를 행하는 유한계급의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다음의 문언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근대 산업제도의 필요가 개인이나 가족을 종종 어떤 접촉도 없는 타인과 의미도 없이 (우연히) 같이 살게 한다. 오늘날 우리들의 사회 속에서 일상생활에서는 얼굴도 알지 못하는 많은 타인과 조우하는 일이 있다. 교회, 극장, 무도회, 호텔, 공원, 상점 등에서 그렇다. 유한계급은 소유제의 개시와 동시에 문화현상의 진화과정에서 등장하게 되었다. 즉 부재소유제로 대표되는 인간을 토지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키는 경제제도에 의해, 인간은 지금까지는 확실히 존재했던 공동체 의식에 근거한 관습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근대사회는 옆에 살아도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가를 전혀 알지 못하는 개인의 집합체가 되어 버렸다. 베블렌은 지연, 혈연을 기반으로 하는 확고한 공동체 의식이 존재했던 전근대사회의 인간과는 다른 인간으로 근대인은 변질되었다고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베블렌은 진화론적 발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부재소유제, 유한계급이라는 경제현상이나 문화현상의 추이를 사회 전체의 변질이라는 관점에서 적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의 두 저서는 진화론을 매개로 하여 연관성을 갖고 논해져야 함을 알 수 있다.

 

  이상의 고찰에서 명확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들 저작은 근대사회의 누적적 진화를 비판적으로 묘사한 것임과 동시에, 제 1장에서 스펜서가 제시한 진화론으로부터 도출된 진화의 의미를 알 수 있게 하는 구체적인 예라는 것이다. 만약 『유한계급론』이 유한계급에만 주목하는 이론에 의해 관철되었다면, 베블렌이 자신 이외의 인간에게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며, 유한계급 이외의 인간의 인간성의 변질을 언급할 리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D. 리즈만(Riesman)은 베블렌이 경제학에서 포괄할 수 있다고 구상했던 영역은 사회학을 비롯한 「보다 사회적인」 사회과학이었다고 고찰한다. D. 마틴데일(Martindale)은 베블렌이 사회학자로부터는 경제학자로, 경제학자로부터는 사회학자로 보여진다고 지적한 후에, 그의 연구가 단지 경제현상의 분석범주를 넘어선 대상을 다룬 사회학자라고 서술하고 있다. 지금 베블렌이 받은 진화론의 충격과 진화론과 경제학의 모순을 고찰한 우리들은 이 마틴데일이나 리즈만의 견해를 이해할 수 있다. 인위적인 합리성을 비판하는 진화론적 발상에 입각하여 근대사회를 비판하고, 그 합리성에서는 포섭할 수 없는 관습, 인간성, 사회구조 등의 변질을 파악하는 것이, 베블렌이 경제학이나 사회학 등의 사회과학에 요구했던 것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후기)

베블렌의 『유한계급론』은 이미 대학시절에 듣기는 했지만 정독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읽다가 보니 베블렌에게 영향을 미친 진화론적인 의미를 어느 정도 알아야 보다 정확한 이해를 하겠다 싶어서 여러 자료를 취합해서 과감하게 이 글을 시론적인 입장에서 한 번 써 보았다. 



마이페이퍼 링크 주소 : http://www.aladdin.co.kr/blog/mypaper/967687


 


수메르, 이집트, 마야 등 고대 문명의 문자언어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한 것도 눈여겨 볼만 하다. 후대 사람들에게 이들 고대 문자는 일종의 암호와도 다름 없었기 때문에, 이를 해독하기 위한 노력에서도 추리소설 같은 기호학적 재미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 지은이의 설명이다
뱀발. 딱딱한 책 중간, 머리도 식힐 겸 편하게 읽고 잉카, 모오스부호까지 편하게 이해하다. 지은이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편협한 시각(119쪽)은 첨언하지 않았으면 괜찮을 것 같다.마야가 가난한 것을 문자전승 부재만으로 연결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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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각시 오는 저녁

 

당콩밥에 가지 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횅 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 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하늘에 별이 잔콩 마당 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1.

모닥불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랑잎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짗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門長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2.

 靑枾

 

별 많은 밤

하늬바람이 불어서

푸른 감이 떨어진다 개가 짖는다

 

3.

내가 생각하는 것은

 

포근한 봄철날 따디기의 누굿하니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두 많이 나서 흥성흥성할 것이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친하니 싸다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우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러 다닐 것과

내 손에는 신간서 하나도 없는 것과

그리고 그 [아서라 세상사]라도 들을

유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내 눈가를 내 가슴가를

뜨겁게 하는 것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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