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의 이야기는 가볍다. 가볍다는 것이 장점일 수도 있지만, 단점일 수도 있다. 난 그 장점이 단점을 아우를 수 있으면 좋겠다. 황만근에서는 조금 나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볍고 친근한 수다쟁이 성석제가 조금 더 우리 삶에 가까운 수다를 떨어 줬으면 좋겠다. 도로의 난간을 들이 받고 떨어지는 깡패의 이야기는 재미있긴 하지만, 일어날 법한 허구라기 보다는 <남의 이야기>라고 읽기 쉬우니깐... 깡패 말고, 우리 이야기를 좀더 개그 수준으로 풀어 줄 수 있었으면 한다.(by 글샘)

 뱀발. 마지막 <스승들>도 재미있게 본다. 처음부터 유사한 소재, 줄거리에 다소 식상함이 더해지지만 간간이 배여나오는 씁쓸한 맛, 그 여운이 오래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신에 여기서는 이 책에서의 인상적인 주장 하나만을 뭉뚱그려서(약간은 번안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허위적인) 종언 이후의 ‘그저 그런 삶(mere life)’을 ‘진정한 삶(real life)’과 대비시킨다. ‘그저 그런 삶’은 자신의 삶에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는 삶이며, 자신의 기득권이 아무 탈 없이 그대로 (자자손손) 보존되기를 매주 기도하는 삶이다. 그것의 정치적 버전이 자유민주주의인바, 지젝이 보기에, 자유민주주의의 최대 관심사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곧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마하는 일이다(미국의 대통령은 한달씩 여름휴가를 떠난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는 무-사건의 당이다”(Liberal democracy is the party of non-Event).

그러한 ‘그저 그런 삶’의 경제적 버전은 ‘아무일 없는 삶’(흔히 ‘여유로운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열심히 일했다고 저 혼자 ‘떠나는 삶’이며, 무료한 삶을 명품 브랜드들로 치장하느라 등골이 빠지는 ‘럭셔리한 삶(luxurious life)’이다(이상은 지젝의 용어들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본질적으로 아무런 이벤트도 없는 삶을 끊임없이 이벤트화하고 스펙터클화하기 위해 난리법석을 떠는 것이 포스트모던한 후기 자본주의의 삶이다.

사실, 지난 한해 우리사회에서 유행어가 되었던 ‘10억’은 이 ‘럭셔리한 삶’에 진입하기 위한 물질적 조건을 지시하는바, 어느 사이에 ‘진정한 삶’에 대한 기대나 열망 대신에 우리 삶의 풍경이 된 것은 여기저기서 억! 억! 하는 ‘10억의 삶’, ‘럭셔리한 삶’에 대한 집요한 탐욕이다(물론 여기서의 ‘10억의 삶’은 지극히 서민적인 레벨에서의 목표치이긴 하다). 하지만, 아무리 호사스럽다 하더라도 ‘럭셔리한 삶’의 본모습은 아무일 없는, 더불어 의미도 없는 ‘그저 그런 삶’일 뿐이며, 그것은 살아 있지만 이미 죽어 있는, 산송장(living dead)들의 적극적인 가장(假裝)이자 자기연출에 불과하다.

이러한 풍경을 두고, 지젝은 그가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말을 빌려서, 이렇게 묻고자 한다. “당신은 진정 살아있습니까?” “(유복한 나라의 국민들이여!) 9.11 이후에도 진정 당신들은 살아있습니까?” 그러한 물음이 전제하는 것은 ‘그저 그런 삶’과 ‘진정한 삶’의 존재론적 차이 혹은 거리이다. 단순히 ‘그저 있는 것들’(=얼빠진 것들) 혹은 ‘좀 있다고 하는 것들'(well-being족들)은 ‘정말로 있는 것’이 아니며, 멀쩡히 숨쉬고 두발로 걸어 다닌다고 해서 정말 살아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열린책들)의 러시아 작가 자먀찐의 표현을 빌면, 인간 중에는 ‘살아있고-죽어있는’ 인간과 ‘살아있고-살아있는’ 인간이 있다. 그는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고 기계처럼 행동하는 ‘살아있고-죽어있는’ 인간과 달리 실수와 탐구와 질문과 고통 속에서 존재하는 인간을 ‘살아있고-살아있는’ 인간이라고 분류한다.

이 차이에 대한 예민한 의식, 자신이 자리잡고 있는 곳에 안주하며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로 있어야 할 곳에 나는 있지 않구나라는 의식에서부터 ‘진정한 삶’으로의 이행을 위한 준비는 마련될 수 있다. ‘진정한 삶’이란 사건은 다른 것이 아니다. ‘살아있고-살아있는’ 인간들의 실수와 탐구와 질문과 고통을 대가로 얻어지는 사건이란 러시아말로 ‘싸브이찌에(sobytie)’, 곧 ‘함께-있음(being-together)’이란 뜻이다. 때문에 그것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력공격과 같은 유사-행위와는 가장 거리가 멀다. 진정한 행위(action)란 ‘그저 그런 삶’에서 ‘진정한 삶’으로 나아가는 결단을 담지하고 있는 행위이다.

그러한 이행의 길(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초자아의 길(the way of superego)과 행위의 길(the way of the act). 제국주의의 압제에 대항하기 위한 9.11의 테러리스트들의 행위나 <죄와 벌>에서 19세기 러시아의 전제주의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벌어진 라스콜리니코프의 노파 살해가 (부정적이면서도 불가피한) 초자아의 길을 보여준다면(‘살아있는 삶’(zhivaja zhizn')은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핵심적인 주제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진정한 행위의 길이며, 함께-있음의 윤리이다. 이것이 9.11의 교훈으로서 우리가 깊이 새겨두어야 할 ‘unknown knowns’이다.(by 로쟈)


우리{미국}는 세계의 부를 50퍼센트나 갖고 있지만 인구는 단지 6.3%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다가오는 시기에 우리가 해야 할 진정한 일은 ...이런 불균형의 입장을 유지해내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감상주의를 배제시켜야 하고... 우리는 인권과 생활기준의 향상과 민주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조지케넌, 존필거, <새로운 세계 통치자들> ) 

1.

135쪽

옛날 독일 민주주의 공화국의 좋았던 시절에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들을 고루 갖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신념(공인된 이데올로기의 믿음)과 지성과 정직이다. 만일 당신이 믿으면서 지성적이었다면 정직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지성적이고 정직했다면 신자가 아니었다. 만일 당신이 신자이면서 정직했다면 지성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패권주의적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신중하게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지성적일 수도 없고 정직할 수도 없다. 즉 당신은 어리석든가 혹은 타락한 냉소자이다.

 

2.

248쪽

유럽이 서양에서 온 야만인들에 의해 동쪽의 진주를 두번이나 유괴해간 그런 결과로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첫번째는 로마인들이 그리스의 사유를 유괴해서 통속화했고, 그 다음엔 중세시대 초기에 야만적인 서양인들이 기독교를 유괴해 통속화했다. 오늘 날 세 번째로 그 비슷한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테러와 전쟁"이 유럽에 대한 미국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경제적 식민지화라는 길고도 점진적인 과정의 꺼림직한 결과가 아닐까? 그런 과정의 매우 신중한 처신이 아닐까? 유럽은 다시금 서양에 의해, 즉 미국의 문명에 의해 납치되지 않았을까? 미국의 문명은 지금 전세계적인 기준을 설정해놓고 사실상 유럽을 그의 영토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뱀발. 번역이 산만하여 마지막장은 재벌읽다. 요점만 조금 건진다.

1. 우리에 빗대어 본다. 지금에 빗대어 본다. 

2. 이스라엘, 레바논... 민간인에게 무차별 포격. 9.11 사건이후 유럽연합은 미국에 의한 일종의 이데올로기-정치적 공갈에 굴복돼 있다. 이라크에 대해서도,  이스라엘-미국의 만행에 대해서도 지금도 눈치보기에 여념이 없다. 상품의 통로만 활짝 열어제친 채....앙꼬없는 찐빵, 별사탕없는 건빵, 알콜없는 맥주, 카페인 없는 커피.... 적이 없는 현실에 가상의 적을 만들어 놓고 키운다. 르완다 학살, 동티모르,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쟈 2006-08-07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감스럽게도 거의 '지젝 없는 지젝' 번역서이죠. 여울마당님도 고생하셨겠습니다...

여울 2006-08-07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산만합니다. 볼수록. 아예 되보지 않고 갈무리해보는 것이 나을 듯하더군요. 로쟈님 리뷰가 오히려 도움 많이 되었군요. ㅎㅎ
 

  뱀발. 가 짬짬이 읽으며 그가 이야기하고자 한 바를 따라가본다.

 앞..[대화]245쪽을 인용하며 지난 역사적사실,현상과 해석에도 좀더 자유롭고 융통성있는 태도와 환원적 사고가 '지적 현실도피'가 아니면 '이념의 화석화' 또는 교조주의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는 대목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305쪽.

1.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90년대 초까지도 그런 학생들이 꽤 있었다. 이제 갓 배운 '계급주의 이론'이 너무 신기했던지 모든 걸 그걸로 재단하려는 과잉 열의를 드러내곤 했다. 지식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혹 한국 대학 풍토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대학이 이론 중심 교육을 하다보니 현실 세계에 대해선 잘 말하지 않는다. 그런 건 저널리즘의 몫이라는 식이다. 바깥세상의 실제 작동방식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 채 대학에서 좌파 물을 먹고 사회에 나간 학생들은 대부분 순식간에 헷가닥 바뀐다. 자신이 대학에서 가졌던 생각들의 현실 적합성이 전혀 없으며, 그렇게 살다간 자신만 죽게 돼 있다는 걸 곧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예방주사'를 미리 놔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정치와 기업이 실제론 어떻게 움직이며, 세상의 어떤 부분이 얼마나 추악한가 하는 걸 미리 알려주자는 것이다. 세상과 적정 수준에서 타협하는 방식까지 알려준다면 더욱 좋겠다. 그래야 사회에 나가더라도 헷가닥 돌지 않을 수 있을 게다.

 이론과 현실, 이론과 실천의 괴리는 인류 역사 이래로 많은 이들을 괴롭혀 온 주제이지만, 그 괴리를 좁혀 보려는 시도는 좀처럼 환영받지 못한다. 선명성이 떨어져 사람의 관심을 끄는 '상품성'이 약한 탓이다.(중략)

 이론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큰 주제로 '놀이하는 인간'을 빼놓을 수 없다. 아니 이게 가장 큰 괴리를 갖고 있는 주제일 것이다. 그 주제 중의 하나로 스포츠, 특히 국제 스포츠를 정면 대응해보자.

2.

310쪽

 유신 시절을 다룬 책들을 읽으면 당시의 세계가 암흑 같았다는 느낌을 준다. 대중문화와 스포츠는 대중의 판단력을 마비시키기 위한 독약처럼 묘사돼 있다. 그런데 과연 그랬나? 유신이 선포된 다음해인 1973년에 대학생이 되었던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간 감히 그 말을 공개적으로 할 수 없었다. 당시의 수많은 전태일들과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나처럼 의식 없는 대학생들은 '고고 미팅'이다 뭐다 해서 놀기 바빴을 때 그들은 저임에 혹사당하거나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염려하고 있었으니 어찌 훗날에라도 "그 시절이 그렇게 나빴던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죽은 자에 대한 예의때문에라도 그렇게 말 못한다.

 지금 그 시절이 의외로 좋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한국 현대사의 상처 때문에 '놀이'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어려웠던 사정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이미 앞서 소개한 바 있지만, 신윤동욱은 "금메달의 감동은 정권의 '조작'으로 시작됐는지 모르지만, 이제 자발적 복종, 아니 자발적 열광으로 '승화'됐다"고 했다.(중략)

313쪽

 월드컵 신드롬을 위시한 한국인 특유의 스포츠 애국주의에 부정적인 측면이 없다는 게 아니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건 참여자와 분석자의 '심각성'의 정도가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좋은 건수 생겼을 때에 그냥 한번 미친 듯이 놀아보는 거다. 그 놀자판에 뛰어들지 않은 사람의 시선으로 미친 듯이 노는 모습을 곱게 보기는 어렵다. 그건 마치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 사람이 2차, 3차까지 끌려다니다가 막판에 모두 다 '맛이 간'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 것처럼 고역일 수 있다.

 스포츠 애국주의에서 곧잘 나타나는 '쏠림'이 문제가 된다면, 그건 영원히 바뀌지 않을 한국인의 속성으로 이해하는 게 옳을 것이다. 좁은 국토, 높은 인구밀도, 인구의 사회문화적 동질성, 과잉 도시화, 초강력 중앙 집권 구조등은 다른 나라에선 볼 수 없는 한국만의 유별난 조건이다. 그 조건에서 쏠림이 안 일어난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게다.

 쏠림이 심하다고 아무리 비판해 봐야 그건 바뀌지 않는다.(중략) 정작 문제삼아야 할 것은 ...'골프 공화국'체제가 아닐까? 절대 다수 서민은 놀 만한 광장조차 박탈당한 반면, 시야가 탁 트인 넓은 그린필드를 6%의 인구가 독점하고 있는 현실이 더 문제가 아니겠냐는 것이다.(중략)

3.

315쪽

 한국인은 '놀이하는 인간'의 전형이다. 과잉 전형이다. 인터넷 휴대전화 문화가 놀자판 일색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각종 게임에 미쳐 돌아가는 걸 보라. 노래방을 보라. 찜질방을 보라. 러브호텔을 보라. 근엄한 세미나 끝난 후에 벌어지는 뒤풀이 현장을 보라.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는 한국인의 절대 좌우명이다. 늙었다고 못 놀거나 안 노는 게 아니다. 노인들의 관광버스 행락을 보라.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미친 듯이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보라

 진짜 정색을 하고 볼 것은 정치다. 그것 역시 놀이다. 혹자는 '쌩쑈'라고도 한다. 정치 수준은 국민 수준이다. 이렇게 말하면 화낼 사람 많을 테니, '수준'을 '모습'으로 바꾸자. 정치 모습은 국민 모습이다(중략) 정치는 화내면서 즐기는 게임이다. '쌩쑈'놀이 즐기면서도 갈 길은 간다. 큰 걸음은 내딛으면서 딴전 피운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건 분명한 사실 아닌가(중략)

 이해하자. 특히 스트레스에 주목해 보자.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잠재적 스트레스라는 것도 있는 법이다. 또 체질적으로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신명나게 놀 기회를 누리지 못했던 것도 스트레스의 관점에서 볼 수 있겠다.

 누구나 한번쯤 직접 겪었거나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을지도 모를 '광란의 술파티'를 떠올려 보자. 평소엔 본의 아닌 위선을 떨지 않을 수 없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술파티를 생각해 보자. 교수. 의사, 법조인과 같은 전문직 종사들이 그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중략) 속으로 쌓인 게 많을 수밖에 없다. 술은 그 쌓인 스트레스의 빗장을 풀어 준다.(중략)

 평소 스트레스 해소의 기회마저 변변치 않았던 여성과 청소년의 경우에야 더 말해 무엇하랴. 주강현이 지적했듯이 붉은악마 여성회원은 95년 10명에서 23만 중 40%를 넘어섰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4.

317쪽

 조긍호는 "서구인들은 분노를 일상생활에서 10번 느낀다면, 한국인은 50번을 느낀다. 서구인은 8번 표출하고, 한국인은 20번쯤 표출한다. 전체를 보면 억누르는 측면이 훨씬 강하다"고 지적했다. 또 그는 "화병은 분노를 억제해서 나타나는 신체 현상이다. 물론 화를 버럭 내는 경우도 있지만, 한국은 개인적인 분노의 표출보다는 집단적인 분노의 표출 경향이 강하다"고 했다.

 미국의 공동체 운동가인 켄 키즈는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스트레스의 가장 큰 원인은 공간과 관계가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너무 좁은 공간에서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 균질화되고 공간개념이 없어진다. 공간개념이 없어지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다른 사람의 공간에 뛰어들어 서로 걸려 넘어진다."

 한국에서 화병으로 죽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바로 그런 공간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한국은 땅도 좁고 인구밀도도 높은데다 중앙으로만 몰리는 '중앙병'을 갖고 있다. 한국인 특유의 '쏠림'도 '아파트 공화국'이 자랑하는 고밀도에서 비롯된 생존본능일 가능성이 높다.

 "땅이 넓은 미국은 산골에서는 그 변화가 뭔지도 모르고 삽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전 국민이 똑 같은 신문을 매일 읽는 하나의 똘똘 뭉친 집단 아닙니까. 그러니까 변화가 일어나면 완전히 거국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거죠."(중략)

 이슬람의 라마단과 같이 연대감이 주는 동시성은 참으로 대단하다. 우리 모두가 같이하고 있다는 것. 그 '동시성'은 지극히 한국적인 것이다. 초강력 중앙집권구조가 사실상 동시성을 강요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도 고밀도형이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고밀도 민주주의는 한국 특유의 온라인 민주주의를 낳았으며, 오프라인에서도 군중의 동원을 가능케 한 동력이 되었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가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늘 '열풍'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 가능성이 높다는 걸 시사한다. 

5.

321쪽

한국의 경우엔 스트레스 강도가 매우 높을 뿐 아니라 자기 표현을 억제하게끔 강요당하는 매우 근엄한 사회라고 하는 점에서 유별난 면이 있다. 그래서 한국인의 스트레스 해소는 주로 음지나 밀실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기존의 스트레스 해소 산업이 한국인의 모든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줄 수는 없는 일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월드컵 광기는 자발적인 동시에 대중매체와 대기업의 상업주의에 의해 부추겨졌다는 점에서 과거의 양상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음지와 밀실에서만 가능했던 스트레스 해소를 양지와 광장에서 할 수 있는 기회는 평생에 한번 올까말까 한 행운이다.

 한국 정치도 국민적 스트레스와 관련해서 분석해 보는 것도 좋겠다. 한국이 고스트레스 국가라면 그게 어떤 식으로건 정치에도 영향을 미칠게 아닌가. 한국은 개인적인 분노의 표출보다는 집단적인 분노의 표출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건 한국 정치에선 카타르시스 기능이 유난히 발달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그 카타르시스 기능은 일시적이고 기만적인 것이기 때문에 또 다른 스트레스를 낳을 수밖에 없다. 한국 정치가 기본적으로 '반감의 정치'라는 건 그것이 스트레스 해소의 사이클을 형성하고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에 대해 핏대를 올리는 열혈 참여자들을 잘 뜯어보라. 그들이 스트레스 해소에 더 열을 올리고 있다는 게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판에 대고 이성적 논의나 호소가 가능할까? 더욱 근본적인 신체 기능상의 문제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만약 이런 의문에 조금이라도 타당한 점이 있다면 우리는 한국정치판 이전투구는 필연일 수 있다는 가설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이전투구 극복을 포기하자는 게 아니다.

 정치 현실이 개탄을 금치 못할 일인데도 다른 한편에선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건 이념이나 정치의 문제라기보다는 육체와 정신의 건강 문제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역사의 업보'라는 건 사실상 '역사적 스트레스'를 말하는 것이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굴곡으로 인해 갖게 된 집단적 스트레스는 잠복해 있다가 여건이 맞으면 그 해소를 위한 분출이 일어나게 돼 있다. 집단적, 역사적 스트레스의 관점에서도 한국 정치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5.1

 그 큰 구멍에 공 하나 넣는 게 무어 그리 큰일이라고 모두 다 그렇게 미쳐 돌아가는가? 이는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만은 아니며 감성적인 동물이기도 하다는 걸 말해 주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공론장에서 떠돌아다니는 모든 비판을 잘 살펴 보시라. 모두 다 이성의 잣대다. 감성은 늘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으로 비판된다.

 아니 비판을 열심히 해서 감성이 극복되고 이성 위주로 이 사회가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겠다. 그러나 절대 그럴 수 없게 돼 있다. '인간성 개조'를 하자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감성도 사회과학적 논의의 주요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월드컵 축구 광기는 한국인들이 드라마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는 걸 웅변해 주었다.

 각기 다른 개성과 취향대로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는 것도 '놀이'다. 내 놀이가 소중하면 남의 놀이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바람직하겠지만, 남의 놀이를 비난하는 것도 놀이다. 각자 기 죽지 말고 원없이 놀자. 나는 내 놀이에 충실했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060731 (학운위)

교육감, 교육위원 선거가 있었습니다. 조금 일찍 나서 투표를 했습니다. 간간이 소식을 접하고 후보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얻고자 하였는데, 안타까운 것은 차선이 아니라 차악을 택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소수자의 의견을 취합해서 우선순위를 두고 임기내에 꼭 반영하겠다라는가? 제도적으로 소수자의 의견을 반영하면 좋겠지만, 교육감 선거에선 차악,

교육위원 선거에선 후보자만의 색깔이 보고싶었는데, 하고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꼭 해낼 것은 다른 것은 아닐까요? 여러 관계 속에서 공약만큼 할 수 있는 것은 더 더구나 아닐테고.. 그리고 젊은 사람 3, 전직교장 한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마음은 정해져 있어, 교육위원은 맘 편하게 투표하였습니다. 직선제를 해야할 것 같아요. 어디 출신, 연줄이 가장 강하게 작용하는 것 같더군요. 그나마 세번째로라도 당선하면 좋을텐데 말입니다.

어제 제주도 학교 급식 운영사례가 방송으로 나오더군요. 국가-지자체-교육청-학운위가 그나마 모이고 합심해야 일을 할 수 있죠. 일을 되게 하는 것과 주장하는 것의 간극...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도 말입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6-07-31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울 2006-08-01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담한 결과네요. 제가 투표해서 된 적도 없지만?, 차악의 선택도 당선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요. 암묵적 카르텔이라기보단 운영위원심기가 주효했겠지요. 공직과 현실사이의 차이, 무관심한 시선.... 직선제가 나을려나요???
 

   날리기 직전이다. 햇볕은 간만에 낮게 들어온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가을산 2006-07-31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페이퍼를 결국 살리신 것에 추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