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발. 휴가 짬짬이 읽으며 그가 이야기하고자 한 바를 따라가본다.
앞..[대화]245쪽을 인용하며 지난 역사적사실,현상과 해석에도 좀더 자유롭고 융통성있는 태도와 환원적 사고가 '지적 현실도피'가 아니면 '이념의 화석화' 또는 교조주의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는 대목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305쪽.
1.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90년대 초까지도 그런 학생들이 꽤 있었다. 이제 갓 배운 '계급주의 이론'이 너무 신기했던지 모든 걸 그걸로 재단하려는 과잉 열의를 드러내곤 했다. 지식인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혹 한국 대학 풍토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대학이 이론 중심 교육을 하다보니 현실 세계에 대해선 잘 말하지 않는다. 그런 건 저널리즘의 몫이라는 식이다. 바깥세상의 실제 작동방식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한 채 대학에서 좌파 물을 먹고 사회에 나간 학생들은 대부분 순식간에 헷가닥 바뀐다. 자신이 대학에서 가졌던 생각들의 현실 적합성이 전혀 없으며, 그렇게 살다간 자신만 죽게 돼 있다는 걸 곧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예방주사'를 미리 놔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정치와 기업이 실제론 어떻게 움직이며, 세상의 어떤 부분이 얼마나 추악한가 하는 걸 미리 알려주자는 것이다. 세상과 적정 수준에서 타협하는 방식까지 알려준다면 더욱 좋겠다. 그래야 사회에 나가더라도 헷가닥 돌지 않을 수 있을 게다.
이론과 현실, 이론과 실천의 괴리는 인류 역사 이래로 많은 이들을 괴롭혀 온 주제이지만, 그 괴리를 좁혀 보려는 시도는 좀처럼 환영받지 못한다. 선명성이 떨어져 사람의 관심을 끄는 '상품성'이 약한 탓이다.(중략)
이론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큰 주제로 '놀이하는 인간'을 빼놓을 수 없다. 아니 이게 가장 큰 괴리를 갖고 있는 주제일 것이다. 그 주제 중의 하나로 스포츠, 특히 국제 스포츠를 정면 대응해보자.
2.
310쪽
유신 시절을 다룬 책들을 읽으면 당시의 세계가 암흑 같았다는 느낌을 준다. 대중문화와 스포츠는 대중의 판단력을 마비시키기 위한 독약처럼 묘사돼 있다. 그런데 과연 그랬나? 유신이 선포된 다음해인 1973년에 대학생이 되었던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간 감히 그 말을 공개적으로 할 수 없었다. 당시의 수많은 전태일들과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 나처럼 의식 없는 대학생들은 '고고 미팅'이다 뭐다 해서 놀기 바빴을 때 그들은 저임에 혹사당하거나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염려하고 있었으니 어찌 훗날에라도 "그 시절이 그렇게 나빴던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죽은 자에 대한 예의때문에라도 그렇게 말 못한다.
지금 그 시절이 의외로 좋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한국 현대사의 상처 때문에 '놀이'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어려웠던 사정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이미 앞서 소개한 바 있지만, 신윤동욱은 "금메달의 감동은 정권의 '조작'으로 시작됐는지 모르지만, 이제 자발적 복종, 아니 자발적 열광으로 '승화'됐다"고 했다.(중략)
313쪽
월드컵 신드롬을 위시한 한국인 특유의 스포츠 애국주의에 부정적인 측면이 없다는 게 아니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건 참여자와 분석자의 '심각성'의 정도가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좋은 건수 생겼을 때에 그냥 한번 미친 듯이 놀아보는 거다. 그 놀자판에 뛰어들지 않은 사람의 시선으로 미친 듯이 노는 모습을 곱게 보기는 어렵다. 그건 마치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 사람이 2차, 3차까지 끌려다니다가 막판에 모두 다 '맛이 간'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 것처럼 고역일 수 있다.
스포츠 애국주의에서 곧잘 나타나는 '쏠림'이 문제가 된다면, 그건 영원히 바뀌지 않을 한국인의 속성으로 이해하는 게 옳을 것이다. 좁은 국토, 높은 인구밀도, 인구의 사회문화적 동질성, 과잉 도시화, 초강력 중앙 집권 구조등은 다른 나라에선 볼 수 없는 한국만의 유별난 조건이다. 그 조건에서 쏠림이 안 일어난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게다.
쏠림이 심하다고 아무리 비판해 봐야 그건 바뀌지 않는다.(중략) 정작 문제삼아야 할 것은 ...'골프 공화국'체제가 아닐까? 절대 다수 서민은 놀 만한 광장조차 박탈당한 반면, 시야가 탁 트인 넓은 그린필드를 6%의 인구가 독점하고 있는 현실이 더 문제가 아니겠냐는 것이다.(중략)
3.
315쪽
한국인은 '놀이하는 인간'의 전형이다. 과잉 전형이다. 인터넷 휴대전화 문화가 놀자판 일색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각종 게임에 미쳐 돌아가는 걸 보라. 노래방을 보라. 찜질방을 보라. 러브호텔을 보라. 근엄한 세미나 끝난 후에 벌어지는 뒤풀이 현장을 보라.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는 한국인의 절대 좌우명이다. 늙었다고 못 놀거나 안 노는 게 아니다. 노인들의 관광버스 행락을 보라.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미친 듯이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보라
진짜 정색을 하고 볼 것은 정치다. 그것 역시 놀이다. 혹자는 '쌩쑈'라고도 한다. 정치 수준은 국민 수준이다. 이렇게 말하면 화낼 사람 많을 테니, '수준'을 '모습'으로 바꾸자. 정치 모습은 국민 모습이다(중략) 정치는 화내면서 즐기는 게임이다. '쌩쑈'놀이 즐기면서도 갈 길은 간다. 큰 걸음은 내딛으면서 딴전 피운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건 분명한 사실 아닌가(중략)
이해하자. 특히 스트레스에 주목해 보자.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잠재적 스트레스라는 것도 있는 법이다. 또 체질적으로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신명나게 놀 기회를 누리지 못했던 것도 스트레스의 관점에서 볼 수 있겠다.
누구나 한번쯤 직접 겪었거나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을지도 모를 '광란의 술파티'를 떠올려 보자. 평소엔 본의 아닌 위선을 떨지 않을 수 없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술파티를 생각해 보자. 교수. 의사, 법조인과 같은 전문직 종사들이 그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중략) 속으로 쌓인 게 많을 수밖에 없다. 술은 그 쌓인 스트레스의 빗장을 풀어 준다.(중략)
평소 스트레스 해소의 기회마저 변변치 않았던 여성과 청소년의 경우에야 더 말해 무엇하랴. 주강현이 지적했듯이 붉은악마 여성회원은 95년 10명에서 23만 중 40%를 넘어섰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4.
317쪽
조긍호는 "서구인들은 분노를 일상생활에서 10번 느낀다면, 한국인은 50번을 느낀다. 서구인은 8번 표출하고, 한국인은 20번쯤 표출한다. 전체를 보면 억누르는 측면이 훨씬 강하다"고 지적했다. 또 그는 "화병은 분노를 억제해서 나타나는 신체 현상이다. 물론 화를 버럭 내는 경우도 있지만, 한국은 개인적인 분노의 표출보다는 집단적인 분노의 표출 경향이 강하다"고 했다.
미국의 공동체 운동가인 켄 키즈는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스트레스의 가장 큰 원인은 공간과 관계가 있다"고 했다.
"사람들이 너무 좁은 공간에서 오랫동안 함께 있으면 균질화되고 공간개념이 없어진다. 공간개념이 없어지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다른 사람의 공간에 뛰어들어 서로 걸려 넘어진다."
한국에서 화병으로 죽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바로 그런 공간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한국은 땅도 좁고 인구밀도도 높은데다 중앙으로만 몰리는 '중앙병'을 갖고 있다. 한국인 특유의 '쏠림'도 '아파트 공화국'이 자랑하는 고밀도에서 비롯된 생존본능일 가능성이 높다.
"땅이 넓은 미국은 산골에서는 그 변화가 뭔지도 모르고 삽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전 국민이 똑 같은 신문을 매일 읽는 하나의 똘똘 뭉친 집단 아닙니까. 그러니까 변화가 일어나면 완전히 거국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거죠."(중략)
이슬람의 라마단과 같이 연대감이 주는 동시성은 참으로 대단하다. 우리 모두가 같이하고 있다는 것. 그 '동시성'은 지극히 한국적인 것이다. 초강력 중앙집권구조가 사실상 동시성을 강요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도 고밀도형이라는 건 우연이 아니다. 고밀도 민주주의는 한국 특유의 온라인 민주주의를 낳았으며, 오프라인에서도 군중의 동원을 가능케 한 동력이 되었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가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늘 '열풍'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들 가능성이 높다는 걸 시사한다.
5.
321쪽
한국의 경우엔 스트레스 강도가 매우 높을 뿐 아니라 자기 표현을 억제하게끔 강요당하는 매우 근엄한 사회라고 하는 점에서 유별난 면이 있다. 그래서 한국인의 스트레스 해소는 주로 음지나 밀실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기존의 스트레스 해소 산업이 한국인의 모든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줄 수는 없는 일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월드컵 광기는 자발적인 동시에 대중매체와 대기업의 상업주의에 의해 부추겨졌다는 점에서 과거의 양상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음지와 밀실에서만 가능했던 스트레스 해소를 양지와 광장에서 할 수 있는 기회는 평생에 한번 올까말까 한 행운이다.
한국 정치도 국민적 스트레스와 관련해서 분석해 보는 것도 좋겠다. 한국이 고스트레스 국가라면 그게 어떤 식으로건 정치에도 영향을 미칠게 아닌가. 한국은 개인적인 분노의 표출보다는 집단적인 분노의 표출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건 한국 정치에선 카타르시스 기능이 유난히 발달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그 카타르시스 기능은 일시적이고 기만적인 것이기 때문에 또 다른 스트레스를 낳을 수밖에 없다. 한국 정치가 기본적으로 '반감의 정치'라는 건 그것이 스트레스 해소의 사이클을 형성하고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에 대해 핏대를 올리는 열혈 참여자들을 잘 뜯어보라. 그들이 스트레스 해소에 더 열을 올리고 있다는 게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 판에 대고 이성적 논의나 호소가 가능할까? 더욱 근본적인 신체 기능상의 문제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만약 이런 의문에 조금이라도 타당한 점이 있다면 우리는 한국정치판 이전투구는 필연일 수 있다는 가설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이전투구 극복을 포기하자는 게 아니다.
정치 현실이 개탄을 금치 못할 일인데도 다른 한편에선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건 이념이나 정치의 문제라기보다는 육체와 정신의 건강 문제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역사의 업보'라는 건 사실상 '역사적 스트레스'를 말하는 것이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굴곡으로 인해 갖게 된 집단적 스트레스는 잠복해 있다가 여건이 맞으면 그 해소를 위한 분출이 일어나게 돼 있다. 집단적, 역사적 스트레스의 관점에서도 한국 정치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5.1
그 큰 구멍에 공 하나 넣는 게 무어 그리 큰일이라고 모두 다 그렇게 미쳐 돌아가는가? 이는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만은 아니며 감성적인 동물이기도 하다는 걸 말해 주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공론장에서 떠돌아다니는 모든 비판을 잘 살펴 보시라. 모두 다 이성의 잣대다. 감성은 늘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으로 비판된다.
아니 비판을 열심히 해서 감성이 극복되고 이성 위주로 이 사회가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겠다. 그러나 절대 그럴 수 없게 돼 있다. '인간성 개조'를 하자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감성도 사회과학적 논의의 주요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월드컵 축구 광기는 한국인들이 드라마를 사랑하는 민족이라는 걸 웅변해 주었다.
각기 다른 개성과 취향대로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는 것도 '놀이'다. 내 놀이가 소중하면 남의 놀이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바람직하겠지만, 남의 놀이를 비난하는 것도 놀이다. 각자 기 죽지 말고 원없이 놀자. 나는 내 놀이에 충실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