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젼 뉴스를 보면 참 답답한 것은, 어느 채널을 돌리던지 10분 남짓이면 그것이 복습되어 어느 하나에 대해서도 다른 의견이나 해설이 너무도 유사하다는 것이다. 한가지 사안에 대해 언론을 통해 다양하게 접할 수 없음에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그 텔레비젼의 위력에 다시 한번 감내를 하지만... ...
요즘 개인적인 관심사는 상식이다. 어떻게 큰평수에 살면서 더 큰평수를 선호하며, 더 안락함을 요구하며, 더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더 작은 평수에 살수 밖에 없음을, 열심히해도 더 어려운 사람들이 늘어나고, 세상이 더 각박해지는 것은 남의 일인듯. 온통 제마음에 상처를 낼 때만 그것도 조금 아파할 뿐, 불감증에 너무 짙어, 불감증을 이야기할수록 초라해지는 사위를 말이다.
지식이야 모든 것이 개인적인 지식이라고 이야기했다. 지식의 중립성이란 애초에 그른 일이고 개인의 하고자하는 것이나 욕구에 덧보태는 것이 지식이라, 그것에 점수를 주다간 세월이 갈수록 큰코다치기 일쑤인것 같다. 하지만 상식이라는 것은? 비겁하게도 저울질을 하다 제모습을 찾는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상식이라는 것은 남과 나, 우리와 남을 비교하는데 나타나는 평균적인 인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나와 남을 비교하는 잣대를 잊어버리거나 망각하는데 너무 길들여져 왔다. 텔레비젼이라 광고라, 허벌라게 핑계를 대더라도 중요한 것은 양심마저 버리고 사는게 삶의 생존 방식이라. 그 허울에 미쳐있다고 볼 수 있다. 애석하게도 나와 남을 이야기하는 공간은 삶이라는 것이 모두 사장되어버렸다. 어떻게 사는지는 소멸해버린채 의식의 화려함만 소통을 한다는 것이 현재의 비극이다. 그래서 상식이 살아날 길은 없다.
인권이라는 것도, 상식의 연장선이라 여긴다. 언제 노인네 인권을 생각했으며 없는자 인권을 생각했는가? 초딩중딩고딩, 그 옛날 419시절 다 어른이라 여겨 자주권을 행사하던 친구들에게 준감금상태로 의사결정권하나 주지 않고 감옥살이 시키는 것에 아무런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현실아닌가? 익히 갖고 있는 사람의 인권은 상식과 한통속이다. 너무나 지독한 불감증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성찰을 할 수 없는 구조속에 살고 있다. 성찰을 할 수 있다고. 정말!!! 어떻게 성찰을 할 수 있다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을까? 너무도 버젓이 하루가 다르게 너무나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을 바겐세일하듯 보고 있다. 애초에 상식이나 인권이나, 그리고 조금이나마 잔류한 성찰에 빗대어보지만 결코 찾기 어려운 부류다. 성찰은 너무나 많은 것을 전제한다. 남이 먼저있고, 벙어리 2세들이 있고, 세상넘들이 들어와있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픔이나 열정이 버무려있지 않고서야 ... ...
안타깝게도 우리는 상식과 인권과 성찰이 없는 새상을 ktx 고속철로 통과하고 있다. 그저 통과하면 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