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를 보다가 한방을 노리는 양관석의 아들, 은명이가 떡파는 장면을 본다. 그 때 유투브의 헐레벌'떡"이 겹친다. 어릴 때 사고로 한 쪽 다리를 잃은 사십대는 떡짐을 지고 식당들을 돌아다니며 이른 시간에 사전 영업을 한다. 하지만 취재진이 그를 인터뷰하고자 쫓지만 빠른 속도를 당해낼 수 없다. 그렇게 시작한 인터뷰를 보다나니 끝까지 닿게 된다.


그는 죽을 결심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를 살게 만든 것은 단 한 권의 책이다. 키에르케고르를 펼치면서 다시 살아낼 결심을 하였다고 한다. 헐레벌떡 사장님은 택배로 받아서 하나하나 포장을 한다. 그 무게를 감당하려는 보통사람들은 혀를 내두른다. 그것을 비가오나 눈이오나 더 빨리 팔려는 방법으로 영업의 묘가 생각해낸 듯하다.  그는 동정하는 돈은 받지 않는다. 폭싹 속았수다와 다른 결론이다.  그는 매일 목발(이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부목, 깁스를 검색하다니)을 짚고 매일 산에 오른다. 가파른 언덕을 쏜살처럼 날라다닌다. 그는 족구도 거침없다. 


우울과 실패를 우리의 시대에는 자신탓을 한다. 수면제와 불면을 지새우는 청년들이 너무도 많다. 갇혀 살고 싶지 않지만 갇혀 산다. 건강도 그런 환경으로 인해 더욱 더 좋지 않아진다. <건강을 팝니다>란 책은 이런 우울의 역사가 자본과 환경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내탓만이 아니다. 팔할은 시대의 탓이다. 좌절과 불면은 하루 아침에 끊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조금씩 다르게 만드는 기술들이 필요하다.


그대여 이불을 걷어차라. 햇볕을 쏘여야 된다. 몸을 비틀어야 된다. 중력을 거슬려야 한다. 관절에 붙은 근육을 늘려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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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으로 가다가 돌아선다. 한밤 중에도 꽃들은 지천이고 흐드러진다. 오르는 술을 더 이상 마시지  않는다. 나눈 이야기들의 단맛이 입안에 남아있고 환한 맛도 섞인다 싶다. 오랜만에 들른 선술집의 고정석에 앉아 나눈 얘기들. 팝스 사장님은 클로즈 문패를 걸어두고 열심히 노래 연습중이다. 일찍 문을 연 라이브 카페의 깔끔한 곳에서 한잔과 한보따리 얘길 나눈다.


살다보면 우리를 막다른 골목을 만나는 느낌을 갖기 마련이다. 어쩌지도 못하는 아이러니나 수수께기 같은 상황들 말이다. 하지만 정작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 일상이고 대부분이다. 식사 메뉴하나 제대로 고르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이다.


만든 상황일까 만들어진 상황일까? 그래, 섞여있다. 그래 우리는 엉킨 실타래를 풀고 있다. 꼬이기도 하고 얽히기도 하고, 삶의 능선에서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막 이어진 새로운 실이기도 하다. 어쨌든 일조를 했고 일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굳이 당연한 이야기를 왜 늘어놓는 것이란 말이야. 한 나라의 역사가, 각 나라의 역사가 다 다르다는 것이다. 다를 수밖에 없고, 다르게 만나고 다르게 넘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분기점을, 드러나 사건들을 색다르게 보는 눈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무수한 산불, 수해, 태풍에 대한 피해 등등 산사태에 이르기까지 선을 넘는 것들의 행태와 양상이 우리의 상식이란 고속도로와 더 멀리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갇는 시야와 폭을 훨씬 초월하여 다른 국면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체제는 더욱 옭죄이고, 다음 세대는 전 세대의 쓰레기더미를 찾아 일자리를 구한다. 정상적인 판단도 줄거나 부재하며 논쟁이나 회의나 하물며 토론 같은 것들도 갈수록 드물어진다. 그러니 기획기사같은 것도 미디어에서 꿈도 꾸지 못할 일들이다. 갈수록 메인을 벗어나는 것들의 품질은 떨어진다. 어쩌면 사람들은 뇌를 밖에 꺼내놓고 살아지는 좀비들 같다. 하루하루 살아내는 피맛만 찾을 뿐, 자기가 왜 여기 이렇게 서 있는지를 묻지 못한다. 물어보지 못한다. 답하지 않으려한다. 이런 와중에 내새끼 우리새끼는 그나마 귀여운 맛이라도 있다. 더 챙겨준다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하는 것 아니야. 그러면서 가혹했던 지난 날들을 지워버린다. 맥락이라고는 개나 줘버려하고 자신을 지우고 살아낸다. 그래서 좀비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그렇게 맞닿아 있다. 맹신의 끝엔 자신을 돌아보거나 밖에 서서 바라보지 못한다. 자신만의 예외다.


총칼을 들고 국회에 난입한 일들. 사건. 세계민이 모두 보았는데도 없던 일이란다. 그래서 그 혐오의 끝은 바른 사고를 할 수 없다. 이건 제 자식이 또 그런 짓을 저질러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무수한 사람들이 한 배에 탄 듯, 선장이 가르키는 곳으로 일사분란하게 이리도 많이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말은 거품이 되고 법은 누더기가 되고 신조어는 정치경제사회문화를 파고 후빈다. 말인지 된장인지. 어처구니 없는 언론과 매체 미디어는 홍수가 범람하듯 한다. 






































  여기 서 너분은 여기 지금의 문제가 구석기가 아니라 신석기때부터라고 한다. 농업혁명때부터 정착하면서부터라고 말이다. 구석기의 유전자가 지금처럼 공복을 부르짖고 꺼르륵 소리를 몸에 챙겨줘야 하듯이 아직 신석기이후를 유전자를 갖을 준비를 못하고 있다한다. 1만 2천년전부터가 문제다.


동의하는가. 하지 않는가. 그것은 커다란 문제가 아니기도 하다. 300-400년전 자본주의부터 출발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찬찬히 들여다보자. 우리는 폭탄을 가슴에 품고 다니지는 않지만 시동이라는 버튼을 매일 매순간 말 50마리 백마리를 끌고 누비고 다닌다. 이 비좁은 지구 안을 돌아다닌다. 이렇게 말을 걸기도 한다.


좁은가 비좁아지는가 우리 일상이 어떻게 되돌아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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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조팝나무

매화

동백

개나리

벚꽃

백목련

자목련

복사꽃


마음은 준비도 되지 않아 마주치기가 저어하다. 대체 뭘 본 건가. 이래도 되는 건가. 묻지 않던 질문들이 나온다. 마음은 볼록해져 본 것들을 밀쳐내기만 한다. 


매화

동백

개나리

개나리

목련

진달래

조팝나무

벚꽃


그리고

도화


해본다. 순서도 아래위도 법도 질서도 진실도 없는 세상을 보면서 뭐라고 해야하나.



 짬을 내어 오를랑 하이브리드 전시를 꼼꼼하게 살펴본다. 세계시민으로 자신을 예술에 바쳤다라는 표현은 알맞다. 끊임없이 자신을 변형시키는 모습도 놀랍다. 끊임없이 읽기와 사유를 멈추지 않는 일상도 안이하지 않다. 철저하고 예리하게 현실을 가르며 나아가고 있다는 말이 적절할 것이다. 


수많은 우려가 현실로 전화되는데도 국가의 짐이 되는 군상들은 자신의 근거없는 이념적 야욕과 힘과 권위와 권력에 소속되고 싶어하는 무리들을 끊임없이 끌어모은다. 사실과 현실은 분별을 잃고 혐오을 부추키고 선동에 하루하루를 지운다. 행정은 위기를 앞서나갈 수 있어야 한다. 순환하는 기후위기에 넋놓고 무책임한 집단들은 처음본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도 그저 국짐을 좋아만 하는 좀비족속들은 어찌하랴.


봄이 제자리를 잃은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한단 말인가? 포월, 초월이 아니라 저월을 이야기하는 저자의 말을 뿌리깊게 귀 기울여야, 아니 몸기울여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생각한 자연이란 없다. 이 지구는 수백마리의 말을 끌고 나오는 증기기관덩어리다. 그 덩어리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현실이란, 사고의 파격을 원한다. 대체 생각이 자랄 곳은 어디란 말인가. 법마저 갈 길을 잃은 지금이란 자리에서 한 걸음을 어찌 디뎌야한단 말인가.


 '오를랑'


1947-

성형소식은 들었지만

뿔까지 한 줄은


책이 쌓여있더군요

한 단어를 위해 그렇게

노력한 줄은


친밀성의 소멸을

예견해서 그런 줄은 몰랐네요

슬로우 댄스를


목소리가 아름다웠다는


세계의 시작이란

그림은 알지만

전쟁의 시작이란

그림도 알고 말았다는


많은 게

한 꺼번에

다가온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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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표를 본다. 공약수 가운데는 '협동'이 있고, 삼분할해서 생각, 자본, 노동의 교집합이 그려져 있다.  '협동' 협동이라. 그 '협동'이란 단어를 마음과 입 안에 공글려본다. 공동체라. 모임이라. 혼자가 아니라 같이 가치를 추구하며 산다. 여럿이. 


위태로운 일상, 차고 넘치는 하루하루는 불안하다.  어떤 이는 <불안사회>라 말하기도 하고, 위태로운 '상황'은 불안한 대기처럼 지금을 잠식하고 있다.  '벌거벗었다'라고도 하며 액체상태라고도 한다. 불안한 하루하루는 '나"를 끊임없이 요동치게 만든다. 그래서 하루하루를 견뎌내기도 힘들어 사소한 다정다감에도 목숨건다. 



표지화를 본다. 정교한 소묘와 치밀한 덧칠이 아니다. 많게는 서 너번, 작게는 한 두번 잎새와 꽃, 꽃잎에 색을 올린다. 각자의 모양으로 피고 있는 꽃들.  뒷표지에는 팔이 하나인 꽃, 두 팔을 벌리고 있는 꽃, 운동하고 있는 듯한 꽃, 세 송이의 다른 꽃을 그려둔다.



자리이타 自利利他 . 나도 좋고 남도 좋다. 나도 피고 너도 피고, 서로 꽃피우는 일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대행에 대리다. 빠르고 빠르게 순환을 만드는 체계이기에 보이지 않는다. 남기는 것만 드러날 뿐, 그 안을 움직이는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닫힌 삶을 기계처럼 상품처럼 낳기만 할 뿐이다. 닫힌 방에 갇혀 하늘을 볼 수 없다. 하늘이 어디인 줄도 눈길을 잃어버린다. 점점 깊어지는 터널이다. 나갈 길이 요원하기만 하다.


우리는 세 개의 공을 동시에 던져야 한다. 놓치지 말고, 생각과 자본, 노동이라는 공을 동시에 던진다. 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고 받고, 대리나 대행이 아니라 품을 팔고 나눈다. 그렇게 십시일반 꾸려진 돈을 나눠 몸을 키운다. 모임을 자라게 한다. 하나가 아니라 둘, 둘이 아니라 셋을 나누는 연습을 해야한다. 겨우 닫혀진 방에서 나올 수 있다. 겨우 닫혀진 나에게서 나오기 시작한다. 다행히 돈만 남기는 사회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공짜는 없다. 


그렇게 나눈 것들은, 그렇게 채운 것이 서로에게 선물이다. 매번 달라지고 생기가 도는 모임이다. 열려지는 삶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열린 삶의 출발이다.


볕뉘


1. 읽고 나서 저자의 다이어그램 속 '협동'이란 말 대신이 '일상'이란 말을 넣어보기도 한다.


2. 화마가 드리운 날, 그 끝을 알 수 없는 불꽃. 스스로 만든 법의 테두리조차 타는 듯한 나날이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3. 반드시 그럴 것이다. 우리는 질문하는 법을 느끼기 시작한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질문들은 아마 출구를 낳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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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헤겔의 비유로, 철학이 이미 역사로 굳어진 것만을, 즉 기존의 것만을 인식한다는 점을 가리킨다. "세상을 사유하는 철학은 현실이 형성과 준비를 마친 후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철학이 그것이 가진 회색을 다시 회색으로 덧칠하기만 한다면 생의 모습은 낡아 버리게 되고, 회색을 그대로 두면 젊어지지 못할 것이며 다만 인식되기만 할 뿐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내릴 부렵에야 비로소 비행을 시작한다. 헤겔은 철학이 앞으로 도래할 것을 파악하는 능력이 없다고 말한다. '회색으로 덧입힌 회색'은 '기존의 것'이 지닌 색이다. 철학은 돌이켜 생각함이지 앞서 생각함이 아니다. 그것은 전망적이지 않고 회고적이다. 이와 반대로 희망의 사유는 아직 존재하지 않은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어 현실을 본다. '새로운 태양이 뜨는 아침의 닭 울음소리, 세계의 젊어진 모습을 선언하는 것이다. 117-118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본질의 로직을 벗어나 새로운 것이 동트는 광채를 볼 눈이 멀어 있다. 희망의 사유는 인식의 초점을 미래로, '기존의 것'에서 '앞으로 도래할 것'으로 옮기며, 본질의 시간성을 나타내는 항상 이미 아직 아님을 대비시킨다.


 블로흐는 회색에 희망의 색인 파란색을 대비시켰다. "먼 색인 파란색은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미래적인 것과 아직 무엇이 되지 않은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괴테는 파란색을 '끌어당김이 있는 무'로 정의했다. 파란색은 우리를 매혹하고 갈망을 일깨우는 '아직 아님'이다. 파란색은 우리를 먼 곳으로 끌어당긴다. 쾨테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높은 하늘, 먼 산을 파랗다고 보는 것처럼 파란 면은 우리 눈앞에서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눈앞에서 멀어지는 어떤 호감 가는 대상을 우리가 기꺼이 좇는 것처럼 우리는 파란색이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기 때문에 이 색을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희망이 없는 공동체는 회색으로 덮여 있다. 것이 없다. 


희망의 정신을 지닌 우리는 '지나간 것' 안에서도 '앞으로 도래할 것'을 발견한다. 진정으로 새로운 것이자 다른 것인 '앞으로 도래할 것'은 '지나간 것'이 꾸는 낮의 꿈이다. 희망의 정신 없이는 동일성 안에 갇히게 된다. 희망의 정신은 '지나간 것' 안에서 '앞으로 도래할 것'의 흔적을 좇아 나아간다. 그렇게 과거는 구원을 암시하는 은밀한 지표를 지니고 있다. 125-126


'아직-아:닌' 전시는 희망을 다루는 만남이다. 희망의 원리라는 책의 부제, 아니 원제목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이기도 하다. 밤꿈이 아니라 낮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위의 <<불안사회>> 역시 희망을 다루고 블로흐를 언급하고 있다. 오프닝때 전시설명을 마무리하면서 낭독한 대목이기도 하다. 


Bowl시리즈는 공동체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모임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붙이고 긁고 오리고 금가게 하고 다른 것들로 채우기도 하고, 선물present이기도 한 것이다. 말하고 싶은 텍스트들도 판박이처럼 붙어있기도 한데, 훗날 알게될 스토리이기도 하다.


Blue 시리즈는 옮긴 대목을 다시 보며 환기시켜도 좋을 듯하다.




볕뉘


소소영화관에 전시중인데 상주하고 있지는 않다. 주말 간간히 들르긴 하지만, 위의 스토리를 갖고 보시면 더 좋을 듯하다. 소소영화관에서 추천중인 영화 <쇼잉업>을 보시면 더더욱 좋겠지만, 이 역시 작가의 욕심일 수도 있겠다싶다. 아마 4월 중순까지 편하게 오셔서 둘러보시고, 한 켠에 마련한 책장과 책들도 전시를 위해 준비한 소품이니 참고하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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