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삶의 가치'를 일러주는 책. 여기에서 가난은 빈곤과 결핍이 아닌, '자발적 가난'이다. 소유를 통해 빈곤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소박함과 겸손함으로 진정한 만족에 이르는 길을 찾으려했던 많은 이들의 노력이 생생하다
제1장 자발적 가난을 위하여
제2장 가난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제3장 성모 가난
제4장 돈의 여신
제5장 올바른 것
제6장 덜 풍요로운 삶이 주는 더 큰 행복
제7장 생산의 논리는 생명의 논리가 아니다
제8장 생명의 논리
제9장 모든 것을 버리고 여행자로 살아가라
제10장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다
제11장 단순하게 살아라
제12장 창조적 가난
제13장 가난을 배우자
제14장 자발적 가난과 현대 사회

(쓰다보니 날라가 버리다. 쯧~)

 자기가 가진 것보다 줄여서 생활하는 것은 쉽지도 수월치도 않은 것 같다.  검소함이나 알뜰함이 미덕이라곤 하지만, 생활규모가 커지고 씀씀이도 커지니 매번 부족하고 버거운 것 또한 일상인 것 같다. 어디 옆집에서 뭐라도 샀다하면 몇개월을 지나지 않아 애걸복걸 동네가 난리다. 생활인에겐, 우리 문화엔 영 익숙하지 않아 보인다.

 ㅂㅏ둑처럼, 당구처럼 '자발적 가난'은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많은 규모을 줄이지 않더라도 조금씩 주거나 나누는 기쁨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같지는 않다. 18급처럼 , 당구 30의 참맛을 느끼고 온통 방안 천장이 바둑돌과 당구공으로 보이는 단계를 거쳐야 더 커지는 것은 아닐까? 생활에 있어 사회적 애정에 대한 맛을 느끼려면, 사회적 시선을 풍부하게 하려면 이 '자발적 가난'이라는 종목, 기예를 배우지 않고서는 통과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올 한해는 재미삼아 연습삼아 입문의 기쁨을 누려보고 싶다. 줄이고 나누는 맛,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애정도 덧보탤 수 있다면... ...  저자가 제일 권면하는 것은 부자들이다. 죽을 때까지 한푼 써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부자들...그리고 무한한 증식을 꿈꾸는 그대들, 그리고 가난을 생각해보지도 못하는 절대빈곤에 허덕이는 경계를 제외하곤 모두 연습해볼 만한 종목인 것 같다. 그나마 사회적 애정이 숨쉬고 희망으로 꿈꿀 문화운동?이 되면 더할 나위는 없겠지만... 오락가락하며 행간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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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 과일 | 과자
김치 | 냉동식품 | 단무지
달걀 | 두부 | 라면
레토르트 식품 | 마요네즈와 토마토 케첩 | 물
밀가루 | 분유와 모유 | 빵
사탕과 초콜릿 | 생선 | 식용유
쌀과 잡곡 | 씨리얼 | 아이스크림과 빙과류
야채 | 어묵과 맛살 | 요구르트
우유 | 육류(소고기·돼지고기·닭고기) | 음료수
이유식 | 장류 | 조미건포류
주스 | 치즈 | 콩
콩나물 | 통조림 | 패스트푸드
해물 | 햄·소시지 | 화학조미료
2권의 내용은 해먹을 수 있는 것들 위주로 편성되어 있다고 한다. 나의 일상, 지난 날의 아이키우기 속에 되돌아보면,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몸에 늘 붙어있는 간편함, 급함 속에 붙어있는 것들때문에 마음만 있고 몸은 늘 따라가지 못했는데, 자칫 이 책대로라면 유난도 떨고 돈도 많이?(엥겔지수도 높아져야) 들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먹거리에 대한 인식전환을 위해 쉽고 체계적으로 잘 구성을 해놓은 것 같다. 늘 부딪치는 문제들이어서 유해성에 대한 좀더 간편한 확인을 위한 방법들도 나오면 좋을 듯하고, 동물실험 결과만을 그대로  근거로 집중되어 있어 아쉬웠고, 인체 유무해성에 대한 광범위한 자료(역학, 인체조사연구결과)가 근거로 제시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든다.

자동차나 고속철의 속도가 그만큼 편안함 속에 위험함이 반비례하여 도사리고 있듯이, 바쁘다 바뻐를 외치면서 정작 중요한 것을 다 잊고 사는, 먹거리마저 속도에 맡겨야하는 세상이 야속하기도 하다.

인스탄트/패스트푸드/제철과일/야채위주의 식단, 모두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부분적으로 맞벌이의 현실도 언급하고 있지만, 구조적 사각지대나 저임금 현실, 장시간근로와 격무라는 현실 속에서 해법을 찾기란 그리 쉬울 것 같기 않다. 시선을 맞추어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 여러 모순적인 모습을 담을 수 있는 후속편을 찾는 것은 과욕일까?

이 정도의 인식이면 우리 농산물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만은 현실은 여전히 학교 급식도 예산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고, 저가에 익숙한 것이 우리의 이중적인 모습인지라... 여러문제가 겹쳐든다.

몇권을 사서 여기저기 집안에 두어야겠다. 안해, 아이들도 보게....슬슬 (작업) 들어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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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개의 현실 사이에서
2 미끄러지는 허버트의 종형(鐘形)곡선
3 에너지와 문명의 흥망성쇠
4 화석 연료 시대
5 이슬람의 '와일드 카드'
6 녹아 내리는 지구
7 허술한 틈새
8 수소 경제의 새벽
9 아래로부터의 세계화 재편


슈마허의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 중간기술도 함께 겹친다. 자본의 시대는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 모든 것을 중심으로 모았다. 사람도 돈도 기술도. 그 응집력은 아무 생각없는 유아의 몸짓만 남긴 것은 아닐까? 불과 200년만에 제몸에 상처를 내며, 나는 세상에서 힘이 세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뇌아처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튼튼해지고 제살을 깍아먹지 않는 방법은 무엇인지? 그래도 인간을 맘 속에 담고 있는 사람들의 처절한 몸부림 덕에 그나마 나아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책을 읽다보니 생각은 수소혁명에 가 있지 않는다. 분권시스템에, 그래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에 마음이 간다. 세상은 점점 일을 해도 점점 일이 많아지는 이유와, 점점 가난해지는 이유를 일상에 가져와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냥 세상 흘러가는대로 내몸을 맡겨보았자, 점점 각박해지는 세태만 남는 것은 아닐까?

50만 안쪽의 소도시로 재편하고 제먹거리 먹고, 아기자기하게 살아가는 시스템, 수소 발전기처럼 그렇게 넉넉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보고, 제대로만 생각해보면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은 아닐까? 문제가 안된다고 강박즘처럼 자꾸 세뇌를 시키는 일상에 있는 것이지? 함께 마음을 나눌 수 있다면 2의 N승에 비례하는 것은 아닐까?

맘길만 돌리면 서로 편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너무 자기만 살 궁리만 하는 것은 아닐까? 아무 생각없는 자본의 시대처럼... ...(책을 빌어 마음만 허공으로 던진다. 조금은 헛헛한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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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무리

1. 참터 - 참*/아*데미 만으로도 벅차하다. 결속력은 대비되는 듯. 진도는 아직 모르겠다. 어느 것이 빨리나갈지? 내년 다른 일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것 같다. 집중해야할 듯.

일터로부터 참터에 도움된 것 ; 후반 조금 조급한 마음이 있었으나, 역할나누기와 기다려주기 습관은 나름대로 도움이 된 것 같다. 적은 일이라도 서로 가져가고 참여도를 높이는 것, 일을 맡긴 뒤 전적인 신뢰는 그나마 일터의 경험이 참터에 도움이 된 것 같다.

* 참터로부터 일터에 도움된 것; 각박함, 속도주의가 제일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사무국장 위주로 일이 집중되지 않은 것, 이것은 일터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속도에 익숙해 일을 하지 않는다라는 경직된 모습이 나타날 수 있었는데, 나름대로 느긋함이나 천천히, 서로 익숙해지는 것, 여유로움이 사회활동에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그 느긋함이 일터에 스며들어야 할터인데. ㅎㅎ 그 간극은 너무너무 크다.

2. 동네 - 학*위: 교육문제-전*조-참*연대의 고리잇기(너무 서툴게 이어져있다. 동력이 없는 듯 너무 연약한 고리로.) 내년 어떻게 할런지 고민중이다. 동네사람과 일중심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은 정말 좋은 경험이었음.- 선거국면에 휘둘리지 말아야할텐데. 걱정이다. 작은 네트워크의 씨앗이라도 회자되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을 확율이 더커질 듯./도*관 운동에 대해 느끼게 된 것은 큰 감사. 지인도 알게된 것도 더 큰 감사/대*림 --- 어찌 맘을 나눠야할지~ 생각을 모아야할텐데. 방향도 삶에 대한 고민도 사라져버린 듯. 열정도 예전만 못한 것은 아닌지? 삶의 고민없는 놀*패가 되는 것은 아닐런지?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조금 불거져 나오다 말아버렸다. 계모임도 아니고 모호하다. 색깔도 없고 무색무취해져 가는 것은 아닐까?

* 자원활동, 실질적인 참여로 느슨하지만 사회활동이 진행되고 있는 단체를 알게된 것은 나로선 행운이다. 그냥 여유있는 사람이 하는 일이지라고 여겼지만, 엄연히 운동이란 타이틀에다 실질적인 조직력도 확인한 것, 체계적인 모습에 점점 끌리게 되었다. 좀더 사회의 문제, 질적인 문제로 접근할 수 있는 안, 시도가 필요하다고 여겨지지만 현재 운영틀로도 참터가 꿈꾸는 것의 많은 자양분이 되지 않을까? 하구 성급한 판단도 해본다.  다른 모든 사회활동단체들의 실질적 참여의 폭이 축소된 것과 반대로 점점 늘어간 것, 교육의 문제도 느슨하지만 근본적으로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것 같다.  틀의 교집합, 활동의 상호인정에 따른 영역넓히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여러가지를 배우다.

* 교육문제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었고, 높이쳐진 장벽을 몸소 확인한 것. 해결가능성도 활동을 통해 엿볼 수 있는 것도 나로선 큰 기쁨, 몸이 조금은 힘들었지만 말이다. 

* 여러 단체의 공통점, 함께하기는 마음뿐, 남에게 기대어본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 같다. 어석거리는 단체간 사람 사이의 관계, 진도가 나가지 못함. 일을 먼저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골이 깊게 패여있다. 흔들 수있는 것은 없을까? 마음을 흔들 수 있는 것은 없을까? 아카데*도 그것을 하기 위한 일이지만 쉽지 않다. 참여도도 떨어지고,  남색깔을 인정하지 않는 자기색깔만 강하다. 남의 색이 무엇인지도 보려고 하지 않음. 그런것을 느끼는 한해였던 것 같다. 우리 수준이 여기구나. 우리 바닥이 여기구나. 한해 움직이며 지켜보게 될 것 같다.

3. 일터 - 밑그림/정지작업은 된 듯. 열심으로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친구들이 필요한데. 전반적으로 시야가 너무 좁아. 인문쪽은 기술에 맹탕, 기술쪽은 인문사회마인드 부족으로 맹탕. 어떻게 가고 있는지 서로도 모르는 것은 아닐까? 색깔이 겹치는 분위기가 넘 부족하다. 일은 재미있게 잘 될 듯한데.

4. 정보 - 알*딘고수들의 생각끈, 독서욕의 말미를 훑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사실 남글에 큰 관심이 없어서인 것은 문제지만, 맘에 든 책의 욕심만은 멈출 수는 없는 듯. 하지만 내 것이 되면 소유욕에 읽고 싶은 맘이 가셔버리니 큰 문제. 그냥 빌어서 읽어야 되나봐?!) 내년엔 딱딱하기만 한 책들말고 부드러운 수필-소설취향에 몸도 줘야할까봐. 수박겉핥기 버전에서도 벗어나보면서(이것도 욕씸이다.ㅎㅎ).

겉핥기는 계속되고 있다. 좀더 깊이를 더할 수 있게 유사한 부류의 책들을 집중해서 보아야 할 것 같다. 독서태도가 달라지고 있는데, 언제부턴가 경영-처세 성공학을 다룬 책들에 마음 길이 아주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에 데인 것처럼... ...

5. 달림/모임/몸 - 풀 코스 1회/ 30k -1회/하프코스 3회 외 11번 대회참가, 상반기 열씸, 하반기 부실/번아웃. 자중해야할 듯. 오마이뉴스배 우승. 모임 넘 많이 했나봐~ 지나칠 정도로 오버했나봐~ '월화수목금금금'도 '월일수일금일일'로 줄이고 ... ... ㅎㅎ

흰 머리도 늘다. 쯧~ 한 여름 일터일로 버거워했더니 새치가 는다. ㅎㅎ. 나이도 그러하거니와...쯧~

6. 마음 - 사람과 관계맺기가 아직도 서툴러, 절제를 하고 참을 수 있다는 것은 나이때문만은 아니겠지

7. 정리해보니 더욱 어수선하다. 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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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간디', '종교적 다원주의의 선구자' 때로는 '싸우는 생활주의자' 등으로 불리우는 한국 현대사의 큰 그릇 함석헌(1901 ~ 1989). 이 책은 함석헌에 대한 최초의 인물평전으로서, 함석헌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에 유학한 저자 김성수의 박사학위 논문을 초고로 하고 있다.

이 책을 굳이 구분하자면, 그의 생애사적 전기라기보다는 사회사적 전기에 더 가깝다. 이 책은 여러 방면에 걸쳐 방대한 지적 유산을 남겼던 그의 사상을 청년기(1901~1923), 해방전 시기(~1945), 자유당 정권기(~1960), 노년기(~1989)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다른 곳에 신경이 갔다.  지금부터 100년, 150년사이 우리의 공백,  종교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는데, 점점 높아지는 교회 건물 - 정치,사회문제에 애써 때뭍지 않은 듯하지만, 더욱 큰 *물을 번번히 끼어 얹은 우리의 자화상만이 크로키처럼 남아있다. 사실 지금도 별 관심이 없다. 마치 작금의 현실처럼 '믿습니까'를 강요하는 현실과 동떨어진 행동은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떻게 그토록 현실과 떨어진 불감증이 생겨났을까?

오히려 속마음을 터놓고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속편하게 알 수도 있었겠지만, 지극한 소심함으로 속알이만 한 것 같다. 그렇다고 수박겉핥기에서 얼마나 진도가 나갔겠는가도 의문이지만,  무식한 나는 행간의 기독교사, 활동에 더 관심이 있었고, 심정적 종교다원주의인 '나'의 겉핥기 코드와도 맞는 듯했다.  그 깊이와 넓이, 삶은 그 동시대로만 걸맞지 않은 것 같다. 그러기엔 시대가 너무도 못받쳐주고 몰라주는 듯하다.

세태는 더욱 더 함선생님의 외침과 노력에 반대로 가는 듯하다. 교회는 더 높아지고 커지고, 교인은 세상과 더욱 더 멀어지고, 지극한 불감증은 그냥 대중사회의 익명성에 노출되어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지금 그 초심으로 살아계시다면, 어찌할까? 어떤 이야기를 하실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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