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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탄 박종화 삼국지 세트 - 전10권
나관중 지음, 박종화 옮김 / 달궁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한국에 번역 또는 평역된 수많은 삼국지들 중 고전으로 꼽히는 월탄 박종화 선생의 삼국지 읽기를 마쳤다 (06/23/2010당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예전에 나온 6권짜리 한질로 구성된 것으로 서유기, 금병매, 수호지와 함께 중국고전문학전집으로 엮어져 나온 판이었던 듯 하다. 2009년 겨울의 한국 방문 때 청계천 헌책방가에서 구입한 것으로 배편으로 보내서 가져온 것을 6/23/2010에 읽은 것으니, 구입 당시의 마음과 비교할 때 좀 늦은 감이 없지는 않다. 이런 것을 보면 역시 나의 독서구매욕구는 상당 부분 "소유욕"이라고 생각되는데 뭐 어쩌라고.
현재 나와 있는 신간 (그나마도 절판인듯)하고 비교하면 확실히 글자체가 작다. 내 기억으로는 1992-93년 사이의 IMF전의 호경기 시절에 책의 활자가 전반적으로 커진 것으로 기억한다. 혹자는 활자가 커져서 책을 보기가 편하다고 하지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출판사가 권수를 뻥튀기 하여 돈을 더 벌기 위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그 전에 나온 단권 책이 지금은 최소한 상/하로 나워서 나오고 있으니 책값은 그간의 종이값/인쇄비 인상과 물가인상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벌써 두 배가 되는 셈이다. 책을 많이 읽지 않는 시대인데다가 중소 출판사들이 대기업에 맞서는 고충을 모르지는 않지만, 역시 이런 것은 정이 좀 떨어지는 일이다.
내가 가진 삼국지들은 이문열, 이병주, 석천, 그리고 황모작가의 판인데, 이문열이 가장 신간이고, 석천 삼국지가 가장 오래된 판 (세로쓰기)이다. 그런데 석천을 제외한 판들은 모두 묘사에 쓰인 언어가 대동소이한, 말하자면, 나의 세대에 그리 낯설지 않은 것들이다. 하지만 월탄 삼국지의 묘사는 월탄선생이 글을 쓰시던 그 시절의 언어체가 많이 녹아들어 있어 그런지 나에게는 상당히 이채롭다. (사실 이때의 판본들 중에는 일어판을 그대로 번역하다시피하여 나온 삼국지들도 꽤 있는 듯, 문장이나 문체가 상당히 일본스럽다. 월탄은 이 점에서도 당시의 이런 류와는 매우 차별화될 수 있다.)
월탄의 묘사는 요즘에 쓰이는 언어체와는 확실한 차이가 있는데, 예를 들면 "어흥" (말이 달려들거나 달려가는 장명), "어매 뜨거라" (장수나 군졸들이 기습당할 때 놀라는 장면), "얘" (주연급 장군들이 수하에 명령 내리면서 상대방을 호칭할 때) 등인데, 다른 판들이 무겁고 고어체 같은 말을 쓰는 것에 비교하면 참으로 재미있는 부분이다. 비슷한 느낌의 묘사를 정비석 선생의 작품들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 시대에는 이런 유형의 표현이 유행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물론 정비석 선생의 경우는 훨씬 심하지만). 같은 시기에 구입해서 지금 열심히 읽고 있는 월탄의 "자고 가는 저 구름아"의 경우도 요즘의 "고풍스럽고 구어체스러운" 역사소설과 많이 다르다.
삼국지의 내용은 책을 조금 읽었다는 사람들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비, 손권, 조조, 관우, 장비, 제갈공명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라고 쓰고나니 얼마전 본 강심장에서 연예민 모씨가 "하후돈"을 "하우돈"이라고 쓴 기억이 난다). 그만큼 이 이야기는 조선시대부터 꾸준히 회자되고 사랑받아온 작품인 것이다. 어릴 때부터 들어온 말이 20대에는 삼국지, 30대에는 정관정요라고 할 만큼, 삼국지는 우리에게 친숙하다. 의리와 모계와, 용기, 배신 등 인간사에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이 이 소설에 나와 있는, 그야말로 역사소설의 종합선물세트라고 하겠다.
한참 십대 때에는 이문열 삼국지를 여러 번 읽어가면서 관운장을 나의 role model로 삼은 적이 있었다. 어리고 순수했던 때라서 그랬는지, 뜻을 굽히지 않고 평생을 살아간 그 모습이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었다 (이문열 판에서 보이는 "평역"을 가장한 약간의, 그러나 반복되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 때에는 참 신선하게 보였던 "평역"도 지금에 와서는, 특히 이문열작가의 정치적인 발언과 행보, 그리고 거듭 실망을 안겨주는 후기 창작물들 (변경, 호모엑세쿠탄스)를 겪고 난 지금에는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정신세뇌적인 부분들만 부각되어 보인다. 나도 사람이니, 나이에 따라 조금씩 변해온 탓이려니 싶다.
그리고, 한 십여년 삼국지를 다시 읽지 않다가 최근 3-4년간 상기 판본들을 구해서 읽었는데, 솔직히 대부분 이문열판도 못하다고 생각했고, 특히 일어번역을 그대로 들여온 판들에는 매우 실망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월탄 삼국지는 상당히 original하다고 느껴진다. 어떤 표현이나 묘사를 보아도 삼국지연의라는 큰 줄기를 바탕으로 월탄만의 고유한 해석과 story-telling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다. 즉 줄거리를 제외한 모든 표현은 감히 월탄만의 그것이라고 생각될 만큼, 내가 보아온 삼국지들 중 최고의 originality를 보여주고 있다. 소장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월탄의 다른 모든 책들도 구해서 하나씩 읽어볼 생각이다.